- AU입니다.
- 이번 동네 페스타의 신간이 될 예정입니다.
- 연쇄살인, 유혈 예정, 찰스가 많이 힘들어 합니다.
- 지옥에서의 일주일 - 7일 전
본인이 생각하기에, 찰스 프란시스 자비에가 정체 불명의 남성에게 스토킹을 당할 이유 따위는 없었다. 설령 스토커가 여자라 해도 다를 것은 없다. 대학을 졸업하고 당연한 수순인 듯 대학원을 갔고, 학위를 받아 이 곳 미네소타주의 작은 대학에서 교수 자리를 구해 여동생 레이븐과 함께 조용히 지내고 있었다. 언제나 기운차게 잔소리를 날리곤 하던 레이븐은 대학 연구소 소속이었던 행크와 결혼했고, 그녀가 떠난 뒤 찰스는 조용한 독신 생활에 익숙해진 채 학교와 집 사이를 왕복하며 생활하고 있었던 것이다. 취미라고 해 봐야 독서가 고작이었고, 학교 동료와 가끔 한잔 하는 정도 외에는 별다른 교류활동도 없었다. 정해진 데이트 상대도 없었는데, 그건 반쯤은 체념하고 있던 일이었다. 몇년 전, 주정뱅이가 모는 픽업 트럭에 치어 영영 다리를 절게 된 뒤로 굳이 바깥에서 적극적으로 사람을 찾아 돌아다닐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이다. 바로 그 사고가 지금껏 그의 조용했던 인생에 가장 거대했던 사건이었다.
그 외에는, 가끔 스스로가 돌아보아도 믿겨지지 않을만큼 조용하고 수동적인 삶을 살아왔고, 찰스는 그에 제법 만족하며 지내고 있었다. 가끔 작은 거실에 혼자 앉아 위스키 스트레이트를 한 잔 하고 있노라면 수다스럽고 활기찬 레이븐의 잔소리, 상대적으로 수줍어 보이는 행크의 겸연쩍은 웃음, 그리고 센스나쁜 농담이 떠오르며 그 모두가 부재한 이 공간이 한없이 어색해지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지낼만 한 삶이었다. 적어도 스토커 일만 아니라면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대체 왜 누군가가 이런 식으로 찰스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목적조차 알 수 없다는 것이 더 두려운 점이다. 처음 퇴근길에 묘하게 따라붙는 인기척을 느낀 이래, 낯모를 남자의 시선은 절대 찰스의 주변을 떠나지 않았다. 돈을 노리는 강도라고 보기엔 지나치게 오랫동안 따라다니기만 하는데다, 찰스 자신이 별로 부자도 아니다. 원한이라고 생각하는 게 제일 빠르겠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찰스가 이제껏 저 정도로 상대가 집요하게 달라붙을 만 한 사건을 일으키거나 원한을 산 기억도 없다. 대학에서도 그는 적극적으로 나서거나 대학 행정에 깊이 개입하는 타입이 아니었고, 그저 주어진 일을 조용히 해 내는 사람이었다.
흔히 스토커가 붙는 가장 흔한 이유라면 성적인 집착 혹은 욕망이겠지만, 오, 맙소사. 그거야말로 가장 찰스와 연관이 어없는 일이었다. 자신은 남자고 - 설령 상대가 게이라고 해도 - 외견적으로도 별로 볼품은 없었으니까. 작은 키에 보통의 몸집, 푸른 눈을 칭찬해 주는 사람은 있었지만 고집스러워 보이는 코와 입매 등 별반 대단할 것 없는 외모를 지였던 것이다. 게다가 다리까지 전다.
- 오빠, 진정해. 전화선 상태가 너무 안 좋아. 조금만 빨리 말하면 막 지직거려.
찰스는 수화기를 고쳐 잡고 한숨을 내쉬었다. 유일한 가족이자 믿고 상담할 만한 친구랄 수 있는 레이븐은 행크와 함께 너무나 먼 곳으로 이사가 있었다.
"미안해, 레이븐. 별로 걱정할 건 아니고..."
- 아니 왜 오빠가 미안해 하는데? 잘 안 들리는 것 뿐이야. 제발 조금만 천천히 말해 줘.
찰스는 잠시 망설였다. 자신의 말을 믿어 주고 지지해 줄 유일한 가족이다. 비록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부모님이 입양해 온 후 서로를 믿으며 함께 자랐으니까.
"레이븐, 어쨌건 난...난 무서워."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모두 얘기하지는 못했다. 레이븐은 임신 4개월 째였고, 이제 간신히 지독했던 입덧이 지나 체력을 회복하는 중이었다. 아이의 이름을 프란시스 아니면 프란시스카로 붙이겠다며 한창 출산 준비를 하느라 정신없는 그녀에게 어제의 '침입'이나 신문 기사 등의 끔찍한 얘기를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 오, 찰스.
레이븐의 목소리는 다정했지만, 찰스는 그 목소리에 숨길 수 없는 피로가 담겨 있음을 알아챘다.
"미안해, 너도 힘들 텐데."
- 아냐. 전혀 아니야 찰스. 어, 내 목소리가 피곤하게 들렸다면 그건 다 빌어먹을 직장 때문이야. 임산부한테 눈치나 주는 직장 따위 망해버렸으면 좋겠는데. 아무튼 내 말 잘 들어, 오빠. 너무 무서워 하지만 말고, 정 문제가 있다 싶으면 경찰에게 연락해 봐.
찰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이미 얼마 전, 괴한이 자꾸 어른거린다는 이유로 경찰을 부른 적이 있었다. 꽤 심드렁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리던 경찰은 다니는 길을 바꿔보라는 제안과 함께, 어쨌건 되도록 찰스의 집 앞을 지나도록 순찰 경로를 잡아보겠다고 했었다.
계속 창 밖만 바라보고 사는 것은 아니었으니 과연 그들이 그래 주었나 제대로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어쨌건 찰스에게 중요한 일은 그 괴한이 조금의 동요도 없이 계속 자신을 추적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 찰스?
"어, 알겠어, 레이븐. 경찰에 얘기해 볼게."
그래도 레이븐에게 그 얘기를 할 수는 없다. 이미 그녀 자신의 일만으로도 충분히 부담이 될 것이다.
"늦은 시간까지 미안해, 피곤하지?"
- 오, 아냐. 그냥 오늘 따라 조금 지쳤을 뿐이야. 찰스, 정 걱정되면... 내가 행크에게 말해볼까? 그... 잠시 여기서 지내도 괜찮을 거야.
반가운 제안이었지만 찰스는 꾹 참고 고개를 저었다.
"아냐 레이븐, 너무 걱정하지 마. 별 일 아닐 테니까."
억지 웃음과 함께 인사를 나누고는 전화를 끊었지만, 별 일 아닐 리 없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찰스가 더 잘 알고 있었다. 솔직히 레이븐이 오라는 말만 해 준다면 달려가고 싶다. 하지만 이 곳에는 그의 직장이 있었고, 학생들의 시험 기간이 얼마 남지도 않았다. 급박하게 휴가를 낼 상황도 아니었고, 무엇보다도 잠시 떠나 있다고 해서 사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 가장 큰 문제였다.
"...맙소사."
전화를 끊은 찰스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창 너머 뜨락 건너, 가로등 옆에 사람 그림자가 어른거렸던 것이다. 찰스는 급히 거실에 커튼을 친 다음, 침실로 들어가 문을 단단히 잠궜다. 총을 머리맡에 두고 이불 속에 들어가 두려움에 떨며 어떻게든 별 일 아니라고, 안전할 거라고, 아무도 침입하지 않을 거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며 잠들기 위해 애썼다.
오래 된 나무 마루에 따로 카펫을 깔지 않은 것은 약간의 결벽증 때문이었다.
찰스는 오랜 세월로 인해 원래의 광택은 사라졌지만, 그래도 적절히 윤기가 흐르는 밤나무 재질의 마루 바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다갈색의 목재 위에 엇비슷한 색의 액체가 퍼졌고,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서야 그것이 이미 산산이 부서져 버린 머그컵 속에 조금 전까지 담겨 있던 커피였음을 깨닫는다. 입술이 바짝 마르고 그 안의 혀가 굳은 듯 저림에도, 그는 움직일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못박힌 채 바닥만을 바라보고 있다.
모든 감각이 정신없이 예민해진다. 말라 갈라진 입술과 어울리지 않게 축축한 실내의 공기, 꼭 닫아 두었음에도 어딘가에서 흘러온 밤 바람에는 차가운 비 냄새가 섞여 있다. 바람에 휘말린 바깥 나무들의 소리에 정신이 든 찰스는 조금 전 자신이 본 것의 '의미'를 생각하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싸늘하게 식은 피부 위에 식은땀이 맺히고, 지팡이를 짚은 손이 떨려 온다. 보안창이 붙은 젖빛 유리창에는 커튼이 쳐져 있어 밖이 보이지는 않지만, 찰스는 그 뒤에 무엇이 비칠지 알고 있었다.
또 한번의 낙뢰, 번득이는 창백한 빛은 어떤 자비심도 없이 창문에 섬짓한 실루엣을 찍어냈다. 남자, 아마도 창가에 바짝 붙어 이 안을 들여다 보는 괴한의 그림자를.
심장이 튀어올랐다. 입술이 절로 떨려 왔다. 침입해 들어오려는 것인가? 강도? 아니, 아니라는 걸 안다. 비록 우레가 울림과 동시에 바닥에 비친 그림자를 보고 잔을 떨어트렸다고 해도 그 소음이 저 괴한의 귀에 들리지 않았을 턱이 없는 것이다. 찰스는 이를 악물었다. 그다. 지난 2주간 간간이 희미한 그림자로 배회하던 그 남자다. 언젠가부터 늘 보이지 않는 시선을 이 쪽에 붙이고, 대학의 카페테리아에서, 서점에서, 골목에서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면 어느새 슬며시 사라지던 그 그림자의 주인이다. 간혹 걸려오는 대답 없는 전화, 아침이면 슬그머니 골목 가로 사라지던 모습.
문득 떠오른 사실에, 찰스는 입술을 짓물었다. 침실로 돌아가면 총이 있다. 지팡이를 짚은 몸이라고 해도 그 총을 들 수만 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서둘러 움직이려던 찰스의 뇌리에 절망적인 생각이 엄습했다.
- 저 자가 무장이라도 하고 있으면 어쩔 셈이지?
이를 악물고 최대한 그 불길한 생각을 떨쳐버리기 위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창 밖에서는 이 안이 보이지 않는다. 놈은 창 밖에 서 있고 이 곳 불은 꺼져 있지. 내가 움직인다 해도 아무것도 알아챌 수 없을 거야.
다시 한 번 번개가 번쩍였고, 창문 가에는 이제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찰스는 최대한 빨리 움직였다. 지팡이가 마룻바닥에 거칠게 부딪혔지만 그런 걸 신경쓸 여유 따윈 없었다. 침대로 달려가 몸을 던지다시피 하고 손을 뻗어 작은 테이블 밑 서랍에 넣어 둔 권총을 꺼냈다. 레이븐이 가져왔을 때엔 손사래를 쳤던 물건이지만 지금 믿을 만한 것은 그것밖에 없었다.
땀에 젖은 손으로 권총을 들고 한참이 지나서야 안전 장치가 걸려 있음을 깨달았다. 서둘러 안전장치를 풀고 몸을 옹송그리며 공이를 당겼다. 언제건 방아쇠만 당기면 총이 발사될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찰스는 전혀 안심할 수가 없었다.
그 뒤로 시간이 얼마가 흘렀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단 몇 분도 몇 시간처럼 느껴졌고, 그런 순간이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만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거센 바람이 창문을 스칠 때마다 찰스는 움칫거리며 총구를 그 쪽으로 돌리곤 했다. 폭풍이 가라앉고 마침내 창문이 새벽빛으로 부옇게 물들 때 쯤에야 찰스는 하얗게 굳은 손에서 간신히 권총을 떼어낼 수 있었다. 공이를 원래대로 돌려 놓고 안전장치를 잠근다. 하지만 다시 서랍에는 넣지 않은 채, 찰스는 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가 몸을 오그렸다. 몹시 지쳤음에도 한참동안 잠이 오지 않았다.
몇시간 후, 알람 덕에 눈을 뜬 찰스는 새벽의 악몽 같은 사건을 떠올리고 전율했다. 그러나 그가 진정으로 두려움을 느꼈던 것은 그 몇분 뒤였다. 마루에 나가 현관문 쪽으로 조심스레 다가갔을 때, 평소와 달리 현관 문 밑으로 얇은 신문 한 장이 밀려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바로 며칠 전 기사가 실려 있었다.
- 또다시, 이번엔 여교사.
찰스는 신문지를 떨어트렸다. 비가 그친지 한참 되었지만 문 안의 신문지는 아직까지 축축히 젖어 있었고, 그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단 한 가지일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그 남자'로 부터의 메시지다.
- 계속
짧게 짧게 이어질 겁니다.
원제는 How deep is your love였으나, 스토리를 다 짜 보고 제목을 더 어울리는 것으로 바꾸었습니다.
수위는 성적으로는 전연령가. 하지만 다른 의미로 15세 이상 혹은 성인용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1. 서울시장 당선 기념 배포본이었습니다.
2. 정치에 대한 패러디가 약간 들어가 있지만 그게 핵심은 아닙니다. 중요한건 에릭과 찰스죠!
3. 동화 라푼젤 패러디입니다.
탑이 있고 마녀가 살고 있었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마법사가 살고 있었답니다. 슈미트인지 쇼우인지 할로우맨인지 케빈 베이컨인지, 전해지는 이름만 수십가지인 무서운 남자였습니다. 그렇게 이름이 여러가지인 이유는 아주 오래 오래 살아서라고 하더군요. 아무튼 이 마법사는 나름 부업으로 유기농 상추를 재배하고 있었습니다. "무엇을 낳을까요 두근두근 돌연변이 상추"라는 기괴한 이름의 상추는 유전자 변형 채소인 주제에 엄청난 고가였기 때문에 정상적이라면 절대 팔리지 않았겠지만, '절대 그럴 분이 아니신' 국왕 전하가 강바닥을 다 들어엎는 바람에 채소밭이 씨가 마르다시피 한 요즘에는 날개돋친 듯 팔리고 있었습니다.
상추 및 각종 야채 품귀 현상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는 상황에서, 특히 괴로워하던 한 아주머니가 있었습니다. 아주머니가 그토록 괴로워한 이유는 사실 여러가지였어요. 그 분이 원래는 채식주의자였다는 점, 하지만 어째서인가 단백질을 달라고 무척 보채는 뱃속의 아기 때문에 유제품과 달걀 정도는 어떻게든 먹고 있었지만, 아무튼 채소가 너무나도 먹고 싶었다는 점, 마지막으로 그럼에도 가끔은 미치도록 채소가 먹고 싶었다는 점을 들 수 있겠습니다. 어쨌건 아주머니는 매일 매일 마법사의 상추밭을 바라보며 말라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아주머니를 보다 못한 남편이 결국 상추를 서리하러 가게 된 거야 우리 모두가 짐작할 수 있는 일이지요. 물론 즉각, 시뻘건 피부를 가진 악마같은 남자에게 붙들려 곧장 마법사 앞으로 끌려가게 되었구요.
"내 상추를 훔치려 하다니 유감이군." 이라고 웃으며 말한 마법사는 즉각 부부에게 상추 훔치는 것을 "재고려" 해 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거절 못할 거래를 걸었지요.
마법사는 말했습니다. 자기는 일-생동안 너무나 착해서 손해만 보고 산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정-말 성격이 좋은 나니까, 나님이니까 아주머니를 두꺼비로 만들거나 아저씨를 통돼지로 만들어 구워 먹어 버리거나 하지 않는 거라고요. 그리고, 새파랗게 질린 부부에게 선언했습니다. 두 부부가 정답게 한 쌍의 소가 되어 다정하게 함께 쟁기를 끌며 송아지 낳고 일가족이 행복하게 살겠는지, 아니면 이번에 낳는 아기를 자신에게 넘겨주고 편안하게 살겠는지 선택을 하라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슬쩍 귀띔하길, 요즘 밭 가는 하인들이 야들야들한 송아지 고기가 먹고 싶어 죽을 지경이라고 했습니다.
부부는 필사적으로 자비를 간청했지만 마법사는 절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아기를 넘겨주겠다고 약속하면 일평생 무한 상추 이용권을 주겠다고 했을 뿐이죠. 그리고는 당장이라도 두 부부를 소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듯 지팡이를 움찔거리는 모습에, 결국 부부는 아기를 넘겨주겠다고 약속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분이 좋아진 마법사는 부부가 아기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것까지는 허락해 주었답니다.
"미쳤어요? 육아가 얼마나 귀찮은 일인데 그래요?" 라는 이웃 마녀 엠마의 말에 마법사 쇼우 씨는 웃으며 답했습니다. "아기 때무터 내 취향으로 키워서 성년때 따먹기 위해서 뭔 고생을 못 하겠어?" 그리고 '뭐 이런 변태새끼가 다 있나' 라는 눈으로 쳐다보는 엠마에게 이런 말도 했죠. "어차피 네가 많이 도와 줄 거잖아. 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녀니까 말야." 제길, 엠마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말했습니다. "순면 기저귀 빨래는 니가 하세요." 어차피 안 하겠지만 말이죠.
그로부처 이십여년 후.
명랑한 말발굽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말 잔등에 올라앉은 청년은 꽤나 즐거운 듯 콧노래를 불러제끼고 있었습니다. 부드러운 망토를 두른 여행복 차림에 칼 한 자루만 허리에 차고, 멋진 가죽 부츠에 은 박차를 단 푸른 눈동자의 청년은 그야말로 즐거워 견딜 수 없다는 듯 연신 노래를 흥얼거리며 길을 재촉합니다.
"분명 '계시'에 적혀 있었단 말야. 내 나이 20세가 되는 해, 세상에서 가장 부자인 마법사의 영지에서 내 인연을 만나게 될 거라고."
그런 흐리멍텅한 계시 하나 믿고 여기까지 온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무려 지난달 따로 점쳐본 점괘는 '연인'이었고, 드디어 솔로 생활 청산인가 하고 기뻐서 돌아오는 청년에게 길거리의 돗자리 사주 할아버지가 외쳤던 것입니다.
"자네, 동쪽에서 허리 가는 미인을 만날 팔자야! 죽이게 섹시한데다 무려 처녀일 거라고!"
어쨰 계시보다 더 흐리멍덩한 것 같습니다만, 아무튼 청년은 '이쯤 되면 운명!' 이라고 외치며 애마 미스틱의 등에 올라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었습니다.
내 님은 이제나 나올까 저제나 나올까. 두근두근하며 길을 가던 청년은, 그러나 이 글에 등장한지 한 페이지도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산등성이 지는 해를 바라보며 인정해야만 했습니다.
"하하하, 이거 꼼짝없이 길을 잃었는걸, 하하하하, 미안해 미스틱."
붉은 갈기의 준마가 한심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아니 좀더 정직하게 말하자면 매우 주인을 업신여기는 눈빛으로 노려보았습니다만, 긍정 파워로 가득한 우리의 청년은 개의치 않고 즐겁게 얘기합니다.
"숲에서의 야영이라니 완전 즐겁잖아! 부드러운 밤바람, 타오르는 모닥불, 나 심심하지 말라고 시시때때로 와 주는 유쾌한 불곰과 늑대!"
미스틱의 눈빛이 더 차가워집니다만, 청년은 그런 것 따위 알아채지 못한 채 야영 준비를 했습니다. 아니,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청년은 어둑해지던 숲의 한쪽 구석이 뭔지 알 수 없는 불빛 때문에 훤히 빛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고, 곧장 호기심을 느끼고 말았습니다.
"미스틱, 저 불빛 보이지? 가 보자! 어쩌면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르고, 잘만 하면 심심하지 않게 이야기나 하면서 즐거운 밤을 보낼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미스틱은 매우 회의적인 눈빛이었지만, 어쨌건 이 쓸쓸한 숲에서 음침하게 혼자 잠드는 것보다는 누군가 더 있는 것이 좋다는 데에는 동의하고 있었으므로 묵묵히 주인을 따라 걸음을 옮겼습니다.
잠시 후.
"오오! 저것 좀 봐!"
청년은 눈이 둥그래져서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았습니다. 대체적으로 시니컬한 성격을 지닌 미스틱도 이번만은 놀라서 둥그런 눈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덤불 속에 몸을 숨긴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만큼 인상적이었던 것입니다.
"라푼첼, 라푼첼, 날 올려주렴!"
이 공터 가장자리에 도착한 순간 이미 초로의 마법사는 높디 높은 탑 앞에 서서 그렇게 외치고 있었습니다. '이봐요, 라푼첼이 대체 무슨 뜻인가요?' 라고 물어볼 틈도 없이 그렇게 외치더니, 곧장 공중으로 두둥 떠올라 버린 것입니다. 와아아아아아우, 이건 정말 스펙터클한 일 아닙니까? 청년은 말 그대로 눈이 동그래져서 그 광경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약 10분쯤 후 마법사가 - 아마도 로브에 망토에 지팡이를 들었으니 마법사 맞을 겁니다 - 다시 두둥실 내려오는 걸 보고서야 뒤로 주저앉아 버렸던 것입니다.
"와우 미스틱, 방금 봤어?" 라고 외치면서요. 미스틱은 뒤를 뒤로 눕히고 히힝거렸습니다. 다른 이유에서가 아닙니다. 그간 이 주인과 함께 해 오면서 쌓아온 직감이 외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인간, 절대 똑같이 해 볼 거라고! 저 위에 뭐가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면서 말입니다!!!
"나도 날아올라가 보고 싶어!"
아오, 그럴 줄 알았어! 저 인간 그럴 줄 알았다고! 미스틱은 힘껏 불만을 표시하며 푸릉거렸지만 청년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서둘러 탑 앞으로 다가갑니다. 아참, 아까 설명이 늦은 것 같은데, 사실 숲에서 희미하게 비치고 있던 건 바로 이 탑에서 흘러나온 조명이었습니다. 어떤 입구도 계단도 없이 높이 올라가 있기만 한 기묘한 하얀 탑이었지요.
어쨌건 미스틱이 어떤 불만을 표했건 간에, 청년은 아까 마법사가 서 있던 자리에 섰습니다. 그리고 외쳤죠.
"라푼첼, 라푼첼, 날 올려주렴!"
허허허허, 이 인간이 왜 이래. 설마 한 번 일어났다고 다시 똑같은 일이 일어나겠어? 미스틱은 머리좋은 명마답게 시니컬하게 비웃었지만, 다음 순간 일어난 일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뒷걸음질 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바로 청년이 둥 하고 떠오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미스틱은 그제서야 달려들었지만 이미 한 발 늦었습니다. 둥둥 떠오른 청년은 그대로 탑 위로 올라가 버렸거든요. 미스틱은 공연히 발을 구르며 성질냈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도리없이 청년이 무사히 내려오기를 빌며 기다릴 수밖에 없이 된 것이지요.
청년의 가슴은 터질듯 두근거렸습니다. 저 탑 위에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 알 수 없는 힘에 들려 올라가면서도 청년의 마음 속에는 두려움보다도 호기심이 가득했습니다. 금은보화가 쌓여 있을까요? '라푼젤'이라는 건 대체 무엇일까요? 혹시 계시에 나와 있던 절세미녀의 이름이 바로 라푼첼인 것일까요? 아니면 어떤 마법의 보물인 걸까요? 마침내 창문 안으로 들어가 나무 마룻바닥에 발을 디딘 순간, 청년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탄성을 내질렀습니다. "세상에나!" 눈앞의 광경은 그만큼이나 놀라웠답니다.
금은보화는 없었습니다. 기이한 마법 장치 같은 것도 없었습니다. 호두나무로 만들어진 매끄러운 마룻바닥 위에는 꽤 고급스런 카펫이 깔려 있었고, 그 위엔 푹신푹신해 보이는 커다란 침대와 그에 대비되든 너무나 소박해 보이는 테이블과 의자 두 개가 있었습니다. 청년을 놀라게 한 것은 그러나, 전반적으로 어딘가 언밸런스해 보이는 - 대체 핑크/자주색 비단이불에 감싸인 호화로운 마호가니 침대와 참나무로 된 투박한 테이블과 의자라니 이게 뭡니까. - 실내도, 그리고 그 언밸런스의 정점을 달리는, 온 방을 둘러싸고도 부족해 천장까지 닿을 만큼 높은 서가들도, 그리고 거기 빽빽하게 꽂혀 있는 무시무시한 양의 책들도 아니었습니다. 청년의 새파란 눈동자는 그 방 한가운데 서서 이 쪽을 바라보는 또다른 남자에게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어쩐지 쇼우놈 치고는 질량감이 다르다고 생각했지. 넌 뭐냐?"
일단은 청년인 듯 했지만 기묘하게 노안인지라 도무지 나이를 제대로 가늠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쨌건 잘 짜인 얼굴은 꽤 핸섬했고, 저 말만 내뱉고 꾹 다문 입과 날카로운 눈매는 어딘가 고양이과의 대형 야수나 맹금류를 연상테 했습니다. 단정하게 정리된 머리는 반듯한 이마를 잘 보여주고 있었고, 그 밑에서 빛나고 있는 청회색 눈동자, 견고하고 우아한 목선, 섬세한 어깨, 어째서인가 상반신이 누드인 까닭에 제대로 감상할 수 있던 잘 짜인 흉근과 단단해 보이는 복근,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잘록한 허리'를 본 순간 청년의 눈동자에는 불꽃이 튀었습니다.
즉각 부드러운 망토를 세련된 몸짓으로 한쪽으로 치우고 품위있는 자세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청년은 맑은 목소리에 자신이 담을 수 있는 가장 깊은 성의를 담아 말했습니다.
"이름 모를 미인이여, 이 몸은 찰스 프란시스 자비에라 합니다."
"......뭐?"
남자의 응대에 담긴 것은 황당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지만 청년, 아니 찰스는 굴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상냥한 미소를 띠고 사파이어빛 꿀처럼 달콤하고도 영롱한 시선을 던지며 정말 놀랍도록 청명하고 고운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세상의 어느 레이디라 해도 거절할 수 없을 듯한 정중하고도 열렬한 구애였지요.
"나 찰스 프란시스 자비에는 그대, 백색 탑의 미인에게 청합니다. 부디 그 귀한 이름을 가르쳐 주시지 않겠습니까?"
"이봐, 일단 내 이름은 에릭이긴 한데..."
"오, 에릭." 찰스가 풍부한 감정을 담아 그 이름을 말하는 순간, 미인, 그러니까 에릭은 그간 쇼우밖에 불러주는 사람이 없던 무미건조한 자신의 이름이 황금으로 만들어진 보석 명판에 아로새겨지기라도 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한다면 그래서 그 뒤 찰스가 줄줄 늘어놓는 말들을 전혀 막지 못했습니다.
"에릭, 내 가인佳人의 이름은 그 자태처럼 강인하고도 섬세하군요. 난 바로 그대를 만나기 위해, 그리고 그 고아한 이름을 듣기 위해 일곱 개의 산과 두 개의 바다를 넘어왔다오. 그대는 바로 내게 주어진 계시 속의 사람입니다. 별이 정하고 신이 내려주신 축복이지요."
"......뭐?!"
"그대를 보는 순간 깨달았습니다. 당신의 아름다운 눈동자, 우아한 몸가짐, 그 모든 것이 바로 나를 위해 준비된 이라는 걸요."
"저기 잠깐, 지금 뭔가 오해가..."
청년이 무릎을 펴며 몸을 일으킵니다. 눈앞에 선 귀공자가 보기만큼 만만한 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슬슬 경계하기 시작한 에릭에게, 찰스는 더더욱 달디단 목소리로 얘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니오, 에릭. 그대를 보는 순간 알 수 있었어요. 당신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너..."
"찰스입니다. 찰스 프란시스 자비에."
"너말야.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난 여기서 절대 나갈 수 없어."
"그럴 리가 있나요. 당신은 여기서 나갈 수 있어요."
에릭이 눈살을 찌푸립니다. 순간 뭔가 울컥한 듯 이를 악물고 잠시 침묵하던 그는, 고개를 돌리고 한껏 감정을 억제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습니다.
"안돼, 넌 여기 뭐가 걸려있는 지 몰라."
갑자기 침묵이 흘렀습니다. 아무 반응이 없는 것에 의아함을 느낀 에릭이 시선을 돌리자 여진히 달콤하고 상냥하지만 어딘가 머리속을 깊이 들여다 보는 듯한 푸른 눈동자가 눈에 들어옵니다.
"이봐?"
"부모님이군요. 그대를 이 곳에 묶어두기 위해 마법사가 협박을 하고 있고요."
"...!"
"방금 전에도 그는 당신에게 찾아와서 빨리 합방 날짜를 잡자고 고집을 부렸고, 당신은 그러느니 죽겠다고 뻗댔네요. 그 마법사가 당신을 억지로 건드리지 않은 이유는 저도 잘 모르겠지만, 괴이한 인물인 것만은 틀림없군요."
경악한 에릭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찰스는 말을 이었습니다.
"아무 걱정하지 말아요. 당신 부모님은 구출될 겁니다. 제가 꼭 그렇게 되도록 할 거예요."
"너...너 대체 어떻게."
"자세한 건 나중에 말해줄게요. 이 곳에서 나갈 수 있도록 해 줄 테니 아무 걱정 하지 말아요 내 사랑. 이 곳은... 이 곳은 품위가 좀 부족해요. 당신은 웨스트 체스터의 훌륭한 안주인이 될 겁니다."
에릭이 눈을 크게 떴습니다. 그간 쇼우의 '보살핌'을 받으며 그저 이 탑 안에서 사는 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삶이라고만 생각해 왔습니다. 이 왕국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숲이 마법사 쇼우의 영지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랬기에 이 탑까지 찾아온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지요. 이 곳에 와서 탑을 본 이가 혹시 있었다 해도 '마법사의 탑은 건드리는게 아냐' 라고 생각하며 모두 도망가 버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마법처럼 찰스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쪽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해준 것이지요. '넌 여기서 나갈 수 있어. 나와 함께 나가자.' 라고요.
다만...
"안주인?" 에릭이 미간을 찌푸렸습니다만, 찰스는 별일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습니다. "자자, 사소한 건 넘어가지요. 아무튼 날 믿고 기다려 봐요. 장인 장모님을 무사히 확보하면 다시 돌아와서 여기 그대에게 얘기해 줄게요."
과연 이게 사소한 것인가, 정말로 무시해도 되는 것인가에 대해 심각한 불안감과 의혹이 느껴졌습니다만, 어쨌건 에릭은 이 기이한 청년의 말을 믿어보기로 했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에릭은 곧장 입을 열었죠.
"그래서, 내가 지불할 대가는 뭐지?"
순간 찰스가 눈을 깜박였습니다. "예?"
"대가 말야. 부모님을 구해준다고 했고 내가 여기서 나가게 해 준다며. 그에 대해 네가 내게 원하는 게 있을 텐데."
어리둥절해 하던 청년의 푸르른 눈동자에 더없이 따뜻한 눈빛이 차 올랐습니다.
"내가 바라는 건 한 가지 뿐이에요."
"한 가지?"
청년이 다가왔습니다. 에릭의 어깨를 붙들고, 그 손을 잡아 손등에 보드라운 입술을 꾹 누릅니다. 그리고 놀란 눈으로 찰스를 바라보는 에릭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다정하게, 따뜻하게, 에릭이 일생 제대로 느껴보지 못했던 모든 대가 없는 상냥함을 담아.
"행복해져야죠. 내 사랑하는 이가 행복하지 못하다는 건 제게 지옥같은 일이 될 테니까요."
"그러니까, '안주인'이 되라 이건가?"
"그러면야 좋지만 꼭 그럴 필요도 없어요. 행복하면 돼요."
멍한 얼굴이 된 에릭에게 윙크를 남기고, 찰스는 닫혀있는 들창 앞으로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들창을 활짝 열고 아래를 내려다 본 다음 에릭을 돌아보았습니다.
"어...근데 에릭, 저 좀 내려주지 않겠어요? 어...어라, 에릭?!"
에릭의 푸른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습니다. 우리 에릭은 정말 속눈썹이 길구나, 이쁘기도 하지, 하고 찰스가 생각하는 순간 그 눈물이 뺨으로 흘러내립니다. 그 상태로 에릭이 천천히 손을 내밀자 찰스의 몸이 두둥실 떠올랐습니다. 사랑한다고 외치고 싶었지만 혹시라도 에릭이 집중력을 잃으면 큰일납니다. 입을 꾹 다물고 내려가는 찰스의 앞에서 에릭은 처음으로 환히 웃었습니다. 그리고 찰스는 생각했지요. 아, 내 사랑은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상어구나.
찰스가 떠난 후, 에릭은 방을 돌아보았습니다. 일생동안 이 곳에서 지내왔지요. 어린 시절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쇼우 아빠랑 결혼할 거야" 같은, 지금 생각하면 어린 자신의 입을 꿰매버리고 싶은 발언도 유감없이 하기도 했습니다. 그야 어린 에릭에게 있어 쇼우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가져다 주는 하느님 비슷한 것이었으니 말이죠.
하지만 언젠가부터 '뭔가 이건 아니다' 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린 에릭이 음식 투정을 하면 요리사가 울며불며 어디론가 끌려갔고, 새 옷이 튿어지기라도 하면 하녀가 영영 사라졌지요. 그래도 혹시 모릅니다. 만일 에릭이 정말로 '아무것도' 몰랐다면 그냥 그게 당연한 건 줄 알고 살았을 겁니다.
하지만 에릭은 알게 되고 말았습니다. '나의 에릭에게 꼭 필요한 교양을 갖추기 위해' 쇼우가 고용했던 가정교사로부터 그 깨달음이 시작되었지요. 그 가정교사는 곧 불온 딱지를 달고 나라 밖으로 추방되어 버렸습니다만, 그 때부터 지식욕에 눈뜬 에릭은 세상의 모습에 대해 알고 싶어진 나머지 엄청난 양의 책들을 사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에릭이 무슨 돈이 있었냐고요? 당연히 쇼우가 허락해 준 거죠. 그는 에릭이 제출한 도서 리스트를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고는 아자젤과 립타이드에게 던져주기만 했답니다. 그리고 그 뒤로도 에릭은 아자젤과 립타이드가 가져오는 "이달의 신간 리스트" 에서 또 많은 양의 책을 사들였고요.
그 결과, 너무나 당연하게도 에릭은 자유를 갈망하게 되었습니다. 쇼우가 사실은 강바닥을 뒤엎은 국왕 폐하를 뒤에서 조종한 인물이라는 건 원래 쇼우의 자랑질 덕에 알고 있었습니다만, 그게 진정으로 어떤 의미인지는 책을 읽고 나서야 생각해 보게 되었지요. 그간 '쇼우 아버지'의 위업이자 선행으로 생각하고 있던 것이 대체 무엇인지, 주위의 사람들이 하나 둘씩 사라지는 것이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확실히 알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깨달은 것은, '난 널 정말로 아낀단다.' 라고 아무리 감언이설을 늘어놓는다 해도 쇼우는 절대 에릭에게 자유를 줄 생각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탈출했고, 다시 잡혀 들어갔고, 탑의 고용인은 다시 바뀌었습니다. 그러기를 수차례, 결국 쇼우는 마지막 카드를 꺼내들었고, '진짜 부모님의 안전' 앞에서 에릭은 끝내 무릎을 꿇고야 말았습니다. 대신 자신의 존재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다치는 것이 너무나도 지긋지긋했던 에릭은, 탈출을 시도하지 않는 대가로 이 탑에 더이상 어떤 고용인도 들이지 말아달라고 간청했고, 그래서 이렇게 혼자 있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성년이 된지 이미 몇년 지났지요. 쇼우의 구애는 갈수록 집요해지고 있었습니다. 에릭도 언젠가는 그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었고요. 단지, 마법사 쇼우는 에릭이 언젠가 스스로의 의지로 무릎을 꿇을 날을 고대하고 있는 것이었고, 에릭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쇼우가 진심으로 에릭을 억누른다면 절대 당해낼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지요. "강제는 너무 쉬워서 재미 없거든." 그 때 명민한 에릭은 깨달았습니다. 그간의 교육, 교묘한 억압, 심지어 이렇게 쇼우를 향해 타오르는 반감마저도 "취향의 미인이 제 발로 무릎꿇고 항복한다"는 쇼우의 로망에 따른 교묘한 육성 결과라는 걸 말입니다. 이가 갈렸지만, 그 덕에 어떻게든 거절은 할 수 있었으니 다행일 뿐이었지요.
물론 시시각각 위험이 조여들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무려 키스까지 당해버리는 바람에 이제 끝인가 생각하던 참이었는데, 전혀 생각도 못한 일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 찰스 프란시스 자비에
안주인이니 뭐니 괴상한 소리를 하긴 했습니다만, 아무튼 부모님을 구하고 자길 탈출시켜 주겠다니, 이 또한 쇼우의 계략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엄청난 얘기였지요. 하지만 대체 여기서 어떻게 더 최악이 되겠어요? 에릭은 이를 꽉 물고 침대 베개 쪽을 바라보았습니다. 더이상 쇼우를 막을 수 없다면 어떻게든 피를 보기 위해 단도를 숨겨두었거든요. 그게 그의 피가 되건, 에릭의 피가 되건 말입니다.
다음날.
에릭은 이를 악물었습니다. 원래 오늘은 쇼우가 오지 않는 날이었거든요. 그러니 찰스가 온다 해도 쇼우와 마주칠 위험은 없고, 찰스가 와서 무사히 준비가 끝났다고 하면 밖으로 달아나면 그만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뭔가 초조해 보이는데, 괜찮은 건가?"
이 빌어먹을 놈이 여길 왜 왔담. 에릭은 티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속으로만 이를 갈았습니다. 에릭이 그러거나 말거나 상냥한 미소를 띤 쇼우는 짐짓 다정하게 말을 늘어놓을 뿐이었습니다. 그것도 되도록 에릭에게 바짝 붙으려고 노력하며 말입니다.
"내가 오늘따라 네가 너무 보고 싶지 않겠니. 그래서 이렇게 달려왔다만."
책상 위에는 쇼우가 선물이라며 사 온 장정본이 다섯 권이나 놓여 있었습니다만, '대운하 사업의 밝은 미래'라던가, '공영사업과 함께 하는 건축 토목 경제학'이라던가, '진정한 복지 - 부자 감세가 길이다' 같은, 대체 어느 정신나간 놈이 썼는지 알고 싶지도 않은 책을 뿐이었습니다. 차가운 눈으로 그 책들을 일별하던 에릭은 어떻게든 이 녀석을 빨리 보내버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는 최대한 정중하게 대답했습니다.
"책 잘 받았습니다. 이제 가 주시죠."
"허허- 에릭, 너 정말 변했구나. 옛날에는 정말 귀여웠는데. '쇼우 아버지랑 결혼할 거여요!' 라고 귀엽게 외쳐주지 않았더냐."
굳이 상기하기싫은 먼 과거를 꺼내드는 모습에 에릭의 이마에 힘줄이 불끈 솟았습니다만, 쇼우는 절대 개의치 않고 에릭의 바로 앞으로 바짝 다가와 상냥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눈이 전혀 웃고 있질 않는 걸요.
"에릭, 넌 아직도 헛된 꿈에 젖어 있구나. 난 네가 네 처지를 제대로 이해하고 미래를 위해 옳은 선택을 하길 바라는 것 뿐이란다. 내가 널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는 네가 제일 잘 알지 않니?"
에릭은 몸을 긴장시켰습니다. 쇼우의 손이 바로 에릭의 어깨를 짚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마치 키스할 듯 입술을 바짝 가져다 댄 쇼우가, 에릭의 귀에 조용히 속삭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바깥 사내가 가져온 헛꿈이 그렇게나 달콤하더냐?"
에릭은 화들짝 놀라 쇼우를 바라보았습니다. 뭔가 이야기를 해야겠는데, 입이 떨어지질 않았습니다. 어깨를 붙든 쇼우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쇼우 쪽이 동작이 더 빨랐고, 육체적인 힘은 약해 마땅할 마법사 주제에 도무지 당할 수 없는 힘으로 에릭을 밀어붙여 침대에 쓰러트린 쇼우는 그 목덜미에 살짝 입술을 내린 다음 혐오감으로 부르르 몸을 떠는 에릭에게 말했습니다.
"날 이 정도로 밀어붙이다니 정말 대단하구나. 역시 내 손으로 키워낸 내 취향의 아이야."
"내 몸에서 손 떼!"
결국 견디지 못하고 이를 악문 채 말하고 말았습니다만, 쇼우는 절대 손을 떼지 않았습니다. 그러기는 커녕, 오히려 에릭의 몸을 더 억누르며 찬찬히 말했습니다.
"오늘 그 녀석이 오기로 했지?"
에릭의 몸이 얼음처럼 굳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에릭을 바라보며 상냥하게 웃는 쇼우의 머리 뒤 창에서, 맑은 목소리가 들린 것은 그 직후의 일입니다.
"자 에릭, 선택하거라. 저 청년을 무시하고 지금 날 받아들인다면 저 청년과 네 부모를 다 무사히 보내 주마."
"네놈..."
"난 언제나 네게 선택의 기회를 줘 왔지 않니. 안 그래?"
이가 바득 갈렸지만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건 에릭도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래도 이런 식으로 항복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베개 밑에 숨겨둔 단도에 생각이 미치고, 그것이라도 활용해 어떻게든 이 위기를 모면하고 찰스에게 위험을 알려볼까 생각한 찰라, 마치 에릭의 생각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빙글 웃으며 쇼우가 말했습니다.
"에릭, 말해두겠지만 바깥에는 아자젤과 립타이드가 숨어 있단다."
"...!"
"그리고 그 친구들에게는 내 작은 발명품을 들려 줬지. 그 친구들에게는 이 방의 상황이 들리고 있단다."
"뭐!"
경악한 에릭 앞에서 쇼우가 웃어 보입니다. 이 악마 같으니.
"저들의 우리의 혼인 증인이 되는 셈이지. 저 순진한 바보가 어리숙한 농부 부부 둘을 데리고 방심하고 있는 동안, 우리는 만반의 준비를 해 뒀다 이 얘기다. 내가 모를 것 같았니? 널 키워낸 내가?"
에릭은 눈을 감았습니다. 그 감은 눈 위에 쇼우의 입술이 내려앉습니다. 미소를 만면에 담은 쇼우가 저항을 멈춘 에릭의 입에 입맞춤하고, 마침내 다리를 벌리려는 순간,
"야. 거기 너 비켜."
곧이어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고, 에릭은 뜬 직후 지금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아 멍하니 눈앞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자, 누구라도 이 상황은 이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일단, 온 몸이 푸른색 비늘로 덮여 있는 "굉장한" 여자가 쇼우를 두들겨패고 있었습니다. 그게 얼마나 격렬한 기세였냐면, 일단 이단옆차기를 날린 다음 주문 외울 틈도 주지 않고 원투 스트레이트 후 어퍼컷으로 옥수수를 털고, 당황한 쇼우를 그 뒤로는... 아아, 차마 묘사할 수가 없습니다. 짧게 얘기하자면, 마치 지독한 시어머니에게 제삿상에 올릴 북어 보푸라기를 앞으로 3분 안에 만들라는 말도 안되는 지시를 받은 며느리마냥 맹렬한 기세로 (이건 시어머니다 이건 시어머니다 이건 시어머니다) 후들겨패는 그 여자 앞에서 쇼우는 이 나라 가장 위대한 마법사에서 털 뽑인 닭같은 몰골로 뒤바뀌어 가고 있었습니다.
아니 대체 이 여자는 누구일까요? '아이구, 아이구구 나죽네'를 외치는 쇼우 앞에서 퍽 퍽 소리가 온 천하에 울리도록 두들겨 패 피떡을 만든 여자는 그제서야 뒤를 돌아보며 외쳤습니다.
"오빠, 이제 됐지?"
"응, 와 정말 언제 봐도 굉장하구나 미스틱은! 역시 난투기 최강, 블루 드래곤이야!"
"시끄러, 남의 눈에 띄면 안된다고 평소에는 말 노릇이나 시키는 주제에!!!"
아 그랬군요, 그랬던 것이었군요. 그러니까, 이 여자는 찰스의 여동생인 것이고, 그러니까 블루...블루 드래곤이고? 그래서 아마도 날아올라 와서? 이렇게 후드려 팬 것이겠군요. 하지만 그렇다면 립타이드와 아자젤은요?! 경악한 채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바라보는 에릭을 뭔가 심사하는 듯한 눈으로 위 아래 죽죽 훑어본 푸른 비늘의 여자는 흥 하고 고개를 돌리며 말했습니다.
"헐, 그 할아범 정말 맞는 말을 했네? 미인이잖아?"
"그렇지! 그래서 내 사랑을 위해 나는 말이지..."
"시끄러, 찰스 프란시스 자비에. 드래곤 로드 주제에 인간들의 너저분한 계시나 믿고 쏘다니고 말이지이."
그제서야 제정신이 든 에릭은 시선을 돌렸습니다. 아 맙소사, 거기 창 밖에 찰스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찰스이리라 짐작되는 것"이 있었습니다. 한없이 푸른 눈과 맑은 목소리는 찰스의 것이었습니다만,
"내 소개가 늦어서 미안해요, 하얀 탑의 그대. 하지만 그 때 눈앞에서 변하면 당신이 너무 놀랄 것 같아서."
창 바로 밖에 보이는 것은 거대한 크리스탈 드래곤의 머리와 눈이었습니다. 온 몸이 너무 거대한 까닭에 머리만 주욱 빼서 창 안에 들이밀고 있습니다. 수정처럼 반짝이는 비늘 사이의 온화한 푸른 눈이 실내를 둘러보았고, 피떡이 된 쇼우를 흘끗 바라본 뒤 다시 에릭을 향합니다.
"어때요, 이런 나도 괜찮나요?"
괜찮고 말고 할게 뭐 있겠어요.
1. 전설의 드래곤 로드가
2. 부모님을 한큐에 구하고
3. 쇼우를 피떡으로 만든 뒤
4. 프로포즈를 하고 있는데 말이죠.
에릭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어요. 탑 안 방은 이제껏 그런 적이 없으리만큼 환했는데, 그건 창을 통해 들어온 바깥의 눈부신 햇살을 크리스탈 드래곤의 아름다운 비늘이 반사하고 있기 때문이었지요. 그 빛에 감싸여, 에릭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어요. 눈에서는 어느새 눈물이 흘러나왔습니다만, 어쩌겠어요. 이럴때 안 울 수는 없잖아요? 몸을 일으켜 드래곤 앞으로 다가갔지요. 그리고 그 반짝이는 비늘에 입맞춤을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탑 안의 방을 불러본 후 찰스에게 찬찬히 얘기했어요.
"날 정말로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싶은 거지?"
"물론이죠!"
"그렇다면 일단 함께 얘기를 하자. 너와 나는 정말 할 일이 많거든."
머나먼 훗날, 사람들은 눈부시게 빛나는 드래곤 로드와 쇠를 자유 자재로 다루었던 위대한 군주의 전설을 이야기했습니다. 옛날, 아주 먼 옛날, 강바닥이 뒤집히고 산천이 망가지던 혼돈과 불황의 나날 속에 갑작스레 나타나 사악한 마법사를 물리치고 나라를 도탄에서 구한 인자한 드래곤과 결단력 넘치는 마법 군주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 둘은 나라를 구하고 잠시 안정시킨 후 새로운 왕을 세우고 아주 머나먼 나라로 날아가 버렸다고 합니다. 드래곤들만이 사는 나라, 혹은 모든 것이 영원히 사는 나라로 말입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 중, 이 위대한 전설이 바로 싱그러운 상추 한 다발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는 것을 제대로 알고 있는 이는 없습니다.
그건 오로지, 영생을 누리는 드래곤들만이 아는 비밀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고 합니다.
- 정치계로 진출한 찰스, 이상은 다르지만 그를 잠시 돕고 떠나려다 인생 틀어잡힌 에릭입니다.
- 찰스는 뮤턴트를 지지하는 정책을 펴고 있지만 자신이 돌연변이인 건 숨기고 있어요 :D
- 연작입니다. 이번 글에는 스칼렛 위치님의 리퀘스트가 들어가 있습니다.
최신식 설비가 늘어선 부엌은 과연 사용된 적은 있는지 궁금할 정도로 반짝거렸다. 리놀륨이 깔린 바닥, 기름 얼룩 하나 없는 벽의 흰 타일들을 바라본 찰스는 아마도 이 곳이 단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으리라 생각했다.
"이거 굉장한걸."
잠시 상념에 빠져 있다 고개를 돌리는데, 실로 희귀하게도 순수한 경탄에 찬 에릭의 음성이 들려 왔다. 벽면을 바라보는 그의 등에 시선이 머무른 순간 에릭의 주위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맙소사."
찰스도 경탄할 수밖에 없었다. 에릭의 눈이 향한 곳은 바로 주방 벽에 붙은 꽤 커다란 검은 패널이었다. 거기 보란듯이 진열되어 있던 각종 칼들이 부드럽게 공중에 떠올라 마치 유연하게 헤엄치는 은빛 물고기마냥 에릭의 곁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미세한 컨트롤에 따라 공중에서 움직이던 칼날들이 다시 패널에 고분고분히 걸리고, 개중 적절한 무게와 형태를 한 식칼 하나가 에릭의 손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좋은 칼이군."
대체 어디서 꺼냈는지 꽤 큼직한 생선을 도마 위에 올린 에릭이 찰스의 말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칼 끝을 꽂아 부드럽게 선을 그어주는 것만으로도 지느러미들이 간단히 떨어져 나가는 것을, 찰스는 거의 경의에 찬 눈으로 감상했다. 물고기 손질이라니, 타고난 신분과 재력 덕에 와인을 꺼내지 않는 이상 주방에 갈 일이 없던 찰스로서는 생소하기 짝이 없는 작업이었던 것이다.
칼등으로 긁어 비늘을 제거하고, 배에 칼을 꽂아넣고 매끄럽게 갈라낸 후 빼낸 칼끝으로 배를 부드럽게 짜내듯 눌러 내장 전체를 단숨에 밀어낸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은 일체의 동작 낭비 없이 물 흐르듯 이어졌고, 고개를 숙이고 선 남자의 곧은 등과 은근히 섬세한 선을 지닌 목덜미가 거기 어우러져 거의 안무적이기까지 한 아름다움을 자아내고 있었다.
흰 셔츠 밑에 드러날 듯 숨겨진 마른 등골과 잘 짜인 등, 그리고 벨트와 팬츠 밑에 숨겨져 있을 견고한 허리에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찰스는 자기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마치 예쁘장한 하녀를 둔 음흉한 주인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들어, 도저히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색한 - 아마도 찰스에게만 어색할 - 침묵을 견디다 못한 찰스는 가볍게 헛기침을 한 후 어떻게든 말을 꺼내 공백을 채워나갔다.
"그래서, 지금 만드는 건 뭐지?"
"간단한 생선구이지."
"좋군."
"마침 도미가 물 좋은 걸로 있길래 사 뒀어. 백포도주에 소금과 후추로 간을 해서 각종 향초와 함께 유산지에 싸서 굽는 거지. 괜찮을 거야."
찰스는 경이에 찬 눈으로 에릭을 바라보았다. 포도주 마개를 따던 에릭은 그 심상찮은 침묵을 느끼고는 의아한 기색으로 뒤를 돌아보았고, 마치 신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나타난 가브리엘을 바라보는 성모를 연상케 하는 찰스의 눈과 시선을 마주치고는 대체 뭐가 문제냐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자넨 정말 경이로운 사람이야. 그런 요리는 대체 어디서 배웠어?"
에릭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여기저기서. 그보다도 대체 표정이 왜 그래? 빠삐요뜨는 별로 어려운 요리도 아닌데."
"난 달걀을 삶으려다 폭파시킨 뒤부터 요리는 포기했다고."
뭔가 한소리 하려는 듯 찰스를 바라보던 에릭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손질을 마친 도미를 큼지막하게 두 토막으로 썰어 칼집을 넣고, 최고급 백포도주를 큰 스푼에 담아 접시에 담아둔 도미 위에 앞뒤로 골고루 뿌렸다. 포도주 향기가 피어오르고, 거기 소금과 후추로 적당히 밑간을 한 뒤 구석에 놓아둔다.
"공기가 황금색이 된 것 같아."
찰스의 맑은 목소리에 어쩐지 달콤한 기분이 섞인 것 같았지만 에릭은 애써 무시했다.
"최소한 20분간 곱게 놔둬야 해."
"그럼 그 사이 뭘 하지?"
"다른 재료를 준비해야지."
슬쩍 다가붙은 찰스가 뭘 뜻하고 있는지 모를리 없건만, 에릭은 냉정하게 잘라 끊으며 몸을 돌렸다. 물을 틀어 재료들을 깨끗이 씻고, 생선을 다듬은 칼은 잠시 치워 두고 좀더 굵직한 식칼을 집어든다. 뒤에서 찰스가 들으란 듯 한숨을 쉬건 말건 침착하게 감자를 깎고 양파를 까고 당근을 다듬는다.
"당근은 별로인데."
"어린애 같군 그래."
아마도 꽤 어린아이 같은 표정으로 툴툴대고 있을 것이다. 에릭은 일단 버섯을 적당한 크기로 썰어둔 다음 레몬과 감자 또한 썰어서 접시에 담아 놓고, 마지막 코스인 양파를 집어들고 썰려다 잠시 동작을 멈추었다.
"찰스?"
"...왜?"
잠시 망설이다 한숨을 푹 쉰 남자는 반쯤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왜 허리는 건드리고 그래."
그랬다. 찰스는 어느새 휠체어를 최대한 에릭에게 바짝 붙이고는 맨손을 슬그머니 들이밀어, 에릭의 허리를 매만지고 있었던 것이다.
"눈앞에서 그러고 있으니 왠지 만져보고 싶어지잖아."
가느다란 주제에 근육으로 꽉 잡혀 있는 허리에 손을 얹고 슬슬 쓸어올린다. 그 손길이 노골적인 유혹의 몸짓이라는 건 아마 세살짜리 아이라 해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봐, 경고하겠는데."
"뭘?"
어딜 봐도 웃음기가 섞여 있는 찰스의 음성에, 에릭의 눈꼬리가 미묘하게 흔들렸다.
"난 지금 양파를 손에 들고 있어."
"그래서?"
"그리고 도마 위에 놓고, 이제부터 이걸 썰 거거든."
"음?"
에릭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한 음절 한 음절을 끊어가며 명확히 발음했다. 양파를 썰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도 못하는 이 남자가 얼마나 손가락에 물 한방울 안 묻히고 산 인간인지, 혹은 얼마나 생활력 없는 인간인지 실감하면서.
"지금 그 손 치우고 내게서 떨어지지 않으면 몹시 뼈저리게 후회하게 될 거야."
"죽어도 떨어지기 싫은걸."
양파가 도마 위에 놓였다. 에릭은 가차없이 손을 휘둘렀다. 잠시 뒤, 찰스는 정신없이 눈물을 흘리며 양 손을 들고 에릭에게서 황급히 멀어졌다. "맙소사, 에릭. 이게 뭐야?"
이러면 안되지만, 에릭은 만면에 미소가 퍼지는 것을 실감했다. 당연히 에릭의 눈도 따가웠지만 아무튼 그랬다. 양파가 치한 퇴치에 효험이 있을 줄이야.
그렇게 찰스를 '퇴치' 한 후 월계수 잎을 꺼내고 로즈마리를 끊어둔다. 유산지를 충분히 잘라 감자를 배열하고 양파를 하나 하나 곱게 얹은 뒤 버섯과 당근을 올린다. 소금을 뿌려 숨을 죽여놓고서야 뒤를 돌아보는데, 눈물젖은 찰스의 파란 눈에 순간 할 말을 잃었고, 직후 이를 갈았다. 맙소사, 양파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남자 따위에게 감탄하다니! 저 놈의 눈동자는 왜 저리 쓸데없이 청명하게 파랗단 말이냐.
"에릭."
"왜 찰스."
찰스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에릭을 바라보았다. 맑은 눈동자 주위는 새빨갛게 충혈되어 있었고, 그런 그의 모습은 양파 때문이라는 것만 잊으면 거의 멜로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보일 정도로 감상적인 느낌을 자아내고 있었다. 닦아낼 생각도 하지 않은 눈물이 투명한 한줄기 선을 그리며 뺨 위로 흘러내렸고, 바로 그 눈물 방울에 젖은 붉은 입술이 천천히 말을 자아낸다.
"사랑해."
"......찰스?"
"아, 역시. 눈물을 흘리면서 이런 말을 하는 거 뭔가 굉장한 것 같아. 게다가 자네도 울고 있잖아."
"양파 때문에 말이지."
"응, 양파 때문에."
에릭은 뜨거운 눈시울을 한 채 이를 갈았다. 그리고 이 쪽으로 휠체어를 밀고 와 팔을 뻗는 찰스를 이번엔 막지 않았다. 생선이 완전히 재워질 때까지 앞으로 약 10분, 키스 두 번, 포옹 한 번, 그리고 그 틈을 타 찰스는 심술궂게도 에릭의 목덜미에 키스마크를 남겼다. "일주일 사이에는 지워지겠지?" 의원님 답지 않은 가벼운 말투는, 아직 그가 학문의 길에 몸담고 있었을 때를 상기시켰다. 잘 웃고 쾌활하게 떠들며 툭하면 여대생을 꼬시곤 하던 그 시절을.
다시 한번 키스하며, 찰스는 에릭의 긴 목을 팔로 감고 결코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 세게 입맞춤을 해 왔다. 요리하는 중만 아니라면 곧장 침실로 갔을지도 모른다. 간신히 떼어낸 에릭의 입술에는 찰스가 살짝 문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납치하길 잘 했군."
"이런 납치범에게라면 납치당할 맛 나는데?"
에릭은 웃으며 돌아섰다. 잘 재워진 생선을 얹고 그 뒤에 다시 레몬, 월계수 잎, 로즈마리를 얹는다. 백포도주와 올리브유를 한술씩 더 부어주고, 유산지를 잘 말아서 밀봉하고 오븐에 넣었다.
"이제 30분쯤 지나면 돼."
"그래, 우리에겐 30분이 있군. 충분하잖아?"
도저히 오해할래야 오해할 수 없는 세리프에, 에릭은 얼굴을 굳히고 찰스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 결연한 표정에 당황한 찰스가 뭔가 제대로 말하기도 전에,
"엇, 에릭?!"
찰스의 무릎 밑에 팔을 넣고 몸을 어깨로 받치더니 간단하게 들어올린다. 졸지에 자루마냥 어꺠 위에 실려가게 된 찰스가 뭔가 항의하기도 전에,
"그래, 30분이 있지. 가련한 인질께서는 목숨을 부지하려면 고분고분 따라주셔야겠어."
"맙소사, 내 경호원이 이런 악당이었다니!"
짐짓 하는 한탄조차 달콤한 유혹처럼 들려와, 에릭은 주저없이 방갈로의 침실을 향해 발을 옮겼다. 그래, 30분이면 충분하다. 맛있게 요리가 익어가는 동안 이 남자를 재료로 또다른 요리를 하기에 충분한 시간 아닌가 말이다. 키스가 이어졌고, 두 남자는 꽤나 조급한 손길로 서로의 옷을 벗기기 위해 최선을 다 했다. 누구의 시선도 신경쓸 필요 없고 어떤 소리를 내더라도 상관없다는 것이 이렇게나 좋은 일일 줄이야. 곧 침실의 공기가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고, 누구의 것이라고 분간하기조차 어려운 신음 소리가 방을 가득 채웠다.
그리하여, 30분 후 완성된 빠삐요뜨는 최고였다. 향긋한 생선 향기는 두 남자의 위장 뿐 아니라 후각과 시각과 촉각까지 만족시키는데 아무 부족함이 없었다. 다만, 따뜻한 상태로 먹지는 못했다. "식었지만 정말 맛있어!" 라고 찰스는 진심을 담아 열성적으로 말했지만, 에릭은 슬쩍 미간을 찌푸리고 약간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다음번에는 제대로 해 줄 테니까" 라고 말할 뿐이었다.
- 정치계로 진출한 찰스, 이상은 다르지만 그를 잠시 돕고 떠나려다 인생 틀어잡힌 에릭입니다.
- 찰스는 뮤턴트를 지지하는 정책을 펴고 있지만 자신이 돌연변이인 건 숨기고 있어요 :D
- 연작입니다. 이번 글에는 sian님의 리퀘스트가 들어가 있습니다.
그들이 다시 몰려들었다. 에릭은 시체 주위에 몰려드는 독수리들을 연상하며 최대한 그들을 막기 위해 노력했지만 소용없었다. 사방 팔방에서 마이크와 카메라가 찰스를 향해 포문을 열었고 질문이 그와 함께 발사되었다. 창백한 얼굴의 찰스는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기자들은 그 닫힌 입에서 한 마디라도 더 들어내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자비에 의원님! 이번 하원에서 결의안이 어떻게 되리라 보십니까?"
"학부모회의 성명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특수학교의 설립에 대한 의견을 들려주십시오!"
"실제 피해사례가 보고되고 있습니다."
찰스의 얼굴은 더 하얗게 질렸고, 기자들은 신이 나서 질문을 퍼부어댔다. 이미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것이다. 지금의 찰스가 어떤 의미로건 폭발하기 직전이라는 걸. 에릭은 찰스의 입가까지 마이크를 들이댄 기자를 거의 칠 뻔 했지만 간신히 분노를 억누르며 팔을 밀어냈다. 하지만 한 개의 팔을 밀어내면 두 개의 팔이 달려드는 형국이었다.
"통제되지 않은 능력은 위험한 것 아닙니까?"
"흑인 학교에서도 돌연변이 학생 입학 거부 운동이 일고 있는데 견해는?"
"각 사립학교에서 이미 돌연변이 입학 제한 교칙을 제정하고 있는데요,"
"학생의 돌연변이 여부에 대한 선별 조사가 있어야 한다는 의견에 대해서는"
휠체어를 쥔 손이 하얗다. 기자들은 전혀 모르겠지만, 입안된 법안에 대한 찰스의 반대 의지가 확고한 것은 그 자신이 바로 '돌연변이'이기 때문이다. '돌연변이 특수학교 설립안'이라고 하면 이름은 좋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사실상 "일반 학교에서의 뮤턴트 추방령"이다. 모든 청소년은 돌연변이임이 밝혀지는 즉시 일반 학교에서 나와 각 주에 세워질 '특수학교'로 전학을 가게 된다. 선택이 아닌 추방, 차별의 법안화인 것이다.
자기 아이가 돌연변이 아이들에게 피해를 받을까 두려워하던 학부모회는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돌연변이 학생들을 '어린 괴물' 쯤으로 생각하던 교육계 또한 환영했다. 의원들 또한 지역 사회에서 소수에 해당하는 돌연변이들보다는 절대다수인 '정상인'들의 편을 들고 싶어했다. 심지어 바로 얼마 전까지 그 자신들 또한 비슷한 차별을 받고 있던 흑인학교들마저 돌연변이들에게 등을 돌렸다. 찰스도 에릭도 아주 잘 알고 있다. 지금 의회에서 돌연변이의 편을 들어주는 것은 돌연변이인 자신들 뿐, 그리고 사회에서는 인권운동가들 중 소수만이 이 법안에 반대하고 있다.
"돌연변이 학생들의 신원은 비밀에 부쳐진다는데 문제가 있을까요?"
"대답해 주십시오!"
몇번이나 카메라를 향해 손을 뻗을 뻔 했다. 하지만 위험하다. 찰스 자비에 의원을 경호하는 에릭 렌셔가 '돌연변이'라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구체적으로 그의 능력이 무엇인지까지는 밝혀지지 않은 상태지만, 조금이라도 이상한 일이 발생한다면 기자들은 오히려 신이 나서 다시 한번 에릭을, 그리고 찰스를 정치적 궁지에 몰아넣을 기사들을 써댈 것이다. '언론을 향한 협박인가? 뮤턴트의 공격!' 등의 싸구려 타블로이드지같은 제목을 달고서.
에릭은 최대한 기자들의 공세를 막아내며 다른 경호원들과 함께 찰스의 진로를 확보하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휠체어는 기자들의 몸에 가로막혀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 기자들은 나름대로 필사적이었다. 찰스가 뭐라고 말하기 전에는 절대 놓아줄 기색들이 아니었다. 결국 견디지 못한 에릭이 뭔가 하려던 순간, 한 기자가 치명적인 질문을 내뱉었다.
기자들이 일순 조용해졌다. 찰스에 대한 기자들의 평판은 '입이 무거운 여우'였다. 그만큼 신중하게 절제된 화술로 자신의 의지를 부드럽게 표현하는 젊은 의원은 드물었다. 그런 그가 무려 격앙된 기색으로 외친 것이다.
"범죄자도 아닙니다. 그들은 그저 학생들입니다! 어린 학생들이요!"
"하지만 치명적인 돌연변이들이,"
푸른 눈에 번개가 흘렀다. 짓씹어 더욱 붉어진 입술 사이로 악물린 이가 보인다. 맑은 목소리에 가득한 분노가 공기를 쩌렁 울리는 순간 에릭은 가벼운 두통을 느꼈다. 설마?
"치명적이라고요! 지금 당신들의 말이 더 치명적이야!"
"의원님?"
"'돌연변이'라고 부르지 마! 그렇게 생각하지 않잖아, 당신들은!"
"찰스!" 에릭은 그만 다급한 마음에 이름을 부르며 손을 뻗었다. 찰스의 입을 막고 싶었지만 찰스가 좀더 빨랐다.
"괴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잖소!"
정적이 퍼졌다. 기자들의 놀란 시선이 찰스에게 고정되었다. 여기자 한 명이 반사적으로 입을 가렸다. 경악만큼이나 빠른 분노가 물 위의 기름방울처럼 기자들의 눈을 재빨리 뒤덮었다. 에릭은 이를 악물었다. 두통은 가상이 아니라 현실이었고, 그 진원지가 어디인지는 불보듯 뻔했다.
"찰스, 진정해!"
"그들은 인간이오! 당신들만큼이나 평범한 인간!"
다음 기자가 입을 열려는 순간 에릭은 더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TV카메라가 폭발했다. 기자의 손에서 피가 흘렀고, 비명소리가 울렸다. 녹음기들이 지직거렸고 필름이 망가졌다. 기자들이 혼란에 빠진 사이, 에릭은 찰스의 휠체어를 끌고 나갈 수는 없음을 깨닫고 허리를 숙였다.
"에릭?"
"조용히 해." 속삭임은 나지막했지만 어조는 엄격했다. "가만 있지 않으면 키스해 버릴 테니." 그리고 그대로 등과 무릎 밑에 손을 넣고 힘을 주었다.
"의원님! 지금," 프로정신이 넘치는 기자가 적어도 한 명은 있나 보군. 찰스를 안아든 에릭은 차가운 얼굴로 기자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대답했다. "의원님께는 휴식이 필요합니다. 방금 전 보셨죠? 더이상의 질문은 받지 않습니다." 그 기자는 좀더 질문을 할 듯한 태세였으나 갑자기 멍한 얼굴이 되어 가만히 둘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걸음을 옮기며 의아해 하던 에릭은 슬쩍 찰스 쪽을 내려다보았고, 이를 꽉 악문 찰스가 관자놀이에 한 손을 얹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서야 고개를 내저으며 중얼거렸다. "그래, 그래서 두통이 멈췄군."
찰스는 그대로 차에 탈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를 꽉 악물고만 있었다. 찰스를 차에 태운 에릭은 운전수에게 신호를 보냈고, 차가 조용히 블록 밖으로 미끄러질 때가 되어서야 찰스가 입을 열었다.
"에릭."
"왜."
"...미안해."
에릭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찰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하얗게 질려 있는 얼굴, 약간 흐트러진 머리카락, 그리고 짓씹은 자국이 아직도 역력한 입술. 그 푸른 눈은 너무나 비참해 보였다.
"뭐가."
"참을 수가 없었어."
폭발의 직접적 원인이 된 것은 뇌엽 절제술 얘기였다. 에릭은 찰스가 그 문제에 대해 얼마나 격노했었는지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그 자신이 인간의 뇌와 연관된 힘을 갖고 있었기에 더 민감하게 반응했기도 했겠지만, 사람을 폐인으로 만들기 십상인 그런 위험한 수술을 '아이의 미래를 위해' 선택한다는 점에서 그는 더욱 격렬한 거부반응을 보였었다.
'그건 수술이 아니야, 난 뇌엽 절제술을 당한 사람을 본 적이 있어. 에릭, 그건 정신적 도살이야!'
에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해해."
분노에 대해 자신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많지 않을 것이다. 격노, 폭발, 때로는 하지않을 수 없는 파괴행동. 이제껏 참고 참고 또 관대하게 참아온 찰스로서는 더욱 터트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겠지.
"최악이지?"
"멋진 최악이지."
찰스는 에릭을 바라보았다.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 에릭 렌셔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기왕이면 좀더 폭발시켰으면 좋았을 거야. 돌연변이 대표로서 말이지." 찰스가 쓴웃음을 지으며 양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래, 사실 그래서야."
"......"
"모두 한 마음으로 외치고 있었어. 두려움에 가득차서 말이야. '괴물!'이라고."
"보인다는 건 괴로운 일이군."
에릭은 조용히 찰스의 손에 손을 가져갔다. 손가락 사이에 손가락을 끼우고 조용히 얽는다. 그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찰스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천천히 말해주었다. 그가 동의할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 부러 얘기하는 것이다.
"그만두고 싶으면 말만 해. 인간들은 지금의 지위를 누릴 자격이 없어."
"오, 에릭-"
"이전에 얘기했잖아. 그들은 어리석어."
손을 단단히 얽어 온다. 찰스는 눈을 감고 에릭의 체온을 느끼며 숨을 골랐다. 고마운 친구, 언제나 힘들 때마다 악역을 자처해주는 이가 있다는 건 괴롭고도 기쁜 일이다. 그리고 그 유혹을 이겨낼 기회를 동시에 주는 것이다. 이렇듯 늘 기대를 배신하는 이에게.
"물론 내 답은 알고 있겠지."
"아직까지는 말이지."
에릭이 찰스의 뺨에 조용히 입맞췄다. "다시 얘기하지만, 그만두고 싶으면 말만 해." 찰스는 간신히 웃을 수 있었다. "그래, 자네 때문에라도 포기할 수가 없군."
키스를 돌려주며 찰스는 다시 한 번 웃었다. 이 쪽을 바라보는 남자의 푸른 잿빛 눈동자가 의아한 기색을 떠올린다. 팔을 둘러 등을 감고 도닥였다. 참으로 묘하지, 자네가 얼마나 위험한 사람인지 알고 있기 때문에 난 늘 버틸 수 있어.
"일단 다시 한번 노력해 보자고. 그나마 우리 편을 들어주는 사람들이 있긴 하거든."
"절멸을 위해 노력하는 어리석은 인간들 말이지."
"에릭!"
찰스는 숨을 깊이 들이쉬고 호흡을 골랐다. 기자들의 기억에는 약간의 조작을 가해 두었고 장비는 에릭이 망가뜨렸으니, 운만 좀 따라 준다면 언론은 비교적 조용할 것이다. 적어도 그 기자들이 장비를 수리하고 다시 달려들기 전에 이 어리석은 법안에 대한 대책을 생각해 두어야 한다. 아마도 어떻게든 될 것이다. 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차가 사무실에 도착했다. 찰스는 에릭을 놓아주고 앞을 응시했다. 가야 할 길이 멀었다.
<계속>
- 사실 진짜 제목으로 삼고 싶었던 것은... You can protect yourself only by protecting the others. 너무 길어서 아웃됐죠. 돌연변이 정책 및 인간들에 대한 찰스의 생각이었어요. 그 주체가 누구이건 누군가가 구분되고 차별당하는 순간 저도 당하게 되는 거죠. 으음. 뭐 그렇습니다.
- 뇌엽절제술은 1970년대쯤 가면 극히 희귀해집니다만... 한때 저게 치료법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이 호러블. 지금 병원에서 하는 것과는 많이 다릅니다. 사람 폐인되는 걸로 유명한 수술이죠.
- 그러고 보면 엑스맨 2에서 스트라이커 쥬니어의 머리 흉터를 보건대 이 짓 당한 듯...
- 정치계로 진출한 찰스, 이상은 다르지만 그를 잠시 돕고 떠나려다 인생 틀어잡힌 에릭입니다.
- 찰스는 뮤턴트를 지지하는 정책을 펴고 있지만 자신이 돌연변이인 건 숨기고 있어요 :D
- 연작입니다. 근데 이번 글에는 리퀘가 하나도 안 들어갔네요...
어떤 일은 절대 사라지지 않지만 어떤 일은 너무나 쉽게 지워진다. 보통은 사라지고 나서야 그 가치를 안다고 한다. 꼭 그렇지는 않다. 정작 사라지고 났을 때 별 것 아니라는 것을 깨닫지만, 그럼에도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는 것도 있는 것이다.
찰스는 일상 생활에 빠르게 복귀했다. "레이븐에게 엄청나게 혼났어" 라고 완전히 기가 죽은 얼굴로 어깨를 움츠리는 찰스에게 에릭은 거의 냉혹해 보이기까지 하는 얼굴로 딱 한 마디만 했다. "당연하지." 그에 대한 그의 의사는 확고해서, 그 말을 듣고 장난기를 발휘해 부러 미간을 찌푸리며 '아야!' 하는 동작을 취해보인 찰스에게 아예 덧붙이기까지 했다.
"나도 이놈의 팔만 아니었으면 한대 쳤을 거야."
물론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었기에 찰스는 크게 웃을 수 있었다.
총격은 에릭에게도 흔적을 남겼다. 허벅지와 어깨의 뼈를 고정하기 위해 철심을 박아야 했고 - 괜찮아, 나랑 어울리지 않아? - 몇개월간의 고된 재활기간을 거쳐야 했다. 찰스가 최고의 물리치료사들을 동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에릭의 어깨만은 완전히 고쳐낼 수 없었다. 그는 이제 오른팔을 어깨 위로 들어올릴 수 없게 되었고, 그 사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에릭이 퇴원하는 날, 찰스는 중요한 의결 때문에 도저히 찾아올 수 없었지만 대신 레이븐이 차를 몰고 달려와 축하해 주었다.
"나도 찰스가 못 온게 안타까우니까 그런 얼굴은 하지 말지 그래?"
"아니, 이건 그 문제가 아니야."
"뭐?"
에릭은 그걸 모르겠냐는 듯 레이븐의 얼굴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한동안 응시했다. 운전면허를 딴 지 6개월밖에 안 된 레이븐이 몰고 있는 새빨간 쐐기형 오픈카에는 민망하도록 선명한 녹색과 빨강색의 포인세티아 꽃다발이 가득했던 것이다. 금발의 늘씬한 여성이 그 한가운데 앉아 있는 것은 실로 장관이었지만, 어쨌건 에릭으로선 거기 앉는 것은 실로 무리였다.
"레이븐, 그 꽃다발 치워."
"어머, 마음에 안 들었어? 예쁘잖아. 축하의 마음을 담았는데."
화사하게 웃자 눈부신 금발이 흔들리며 빛을 발한다. 선명한 햇빛이 빨간 오픈카 주위에 흩어지는 듯한 환상이 보일 지경이었다. 에릭이 이를 악물고 말하는 것을 즐겁게 바라보는 아름다운 헤이즐빛 눈동자에는 장난기가 가득하다.
"거기 앉아가느니 차라리 걸어가겠어."
"너무해, 에릭! 사실 이건 찰스의 부탁이었는걸. 장미로 하고 싶다는 걸 간신히 말렸어. 정말이야, 물어보라고!"
십중팔구 찰스가 농담으로 말을 꺼냈다가 레이븐이 정말로 하려 드니 놀라서 말린 거겠지. 에릭은 가볍게 한숨짓고 자동차 뒤쪽을 바라보다가, 비어 있는 레이븐의 옆자리를 응시했다. 일반적인 딱딱한 자동차 좌석과는 달리 부드러운 쿠션이 갖춰져 있고, 아직도 어깨에 통증이 남아 이는 에릭을 위한 것인지 목베개가 얌전히 놓여 있다. 말로는 저래도 환자라는 점을 생각해 준 것일 테지.
"신사 양반, 빨리 결정해. 저기 봐, 잘 생긴 젊은 의사들이 이 쪽을 보는 것 같은데 내 마음이 흔들리고 있잖아."
에릭은 한숨을 푹 쉬고 차 안으로 들어갔다. 물론 차 문은 레이븐이 열어둔 터였고, 차에 탄 다음 돌아보니 정말 이 쪽을 향해 멍하니 입을 벌린 채 돌아보는 한 무리의 청년들이 눈에 들어왔다. '잘 생겼다'고 하기엔 눈 밑의 다크서클이 지나쳤지만.
"좋아, 잘 생각했어. 이제 돌아가자고."
에릭은 고개를 끄덕이며 좌석에 머리를 기댔다. 드디어 찰스 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간신히 마음이 놓였다. 깊이 숨을 내쉬고 눈을 감은 채, 신나게 재잘대는 레이븐의 수다를 들으면서 그제서야 깨달았다.
그에게 집은 이 곳 뿐이라는 걸.
그날 저녁, 웨스트체스터.
"뭐라고?" 에릭은 차가운 눈으로 찰스를 노려보며 반문했고, 찰스는 그 시선을 차마 받아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에 더 속이 뒤틀린 에릭은 다시 한번 강경하게 밀어붙였다.
"지금 그 말 다시 해 봐."
"에릭, 진정하고 들어. 이건,"
"진정하고 있어. 그러니까 다시 말해보시지."
목소리가 낮게 울려나온다. 빛깔도 온도도 얼음같은 눈동자가 찰스를 노려본다. 진정하고 있다지만 어디를 봐도 사실상 분노로 이글대고 있는 에릭 앞에서 잠시 침묵하다 숨을 들이킨 찰스가 말을 이었다.
"에릭, 이제 더이상 내 경호원 노릇을 할 필요는 없어."
"하."
"새로운 업체와 계약했어. 지금도 그들의 경호를 받고 있고. 더이상-"
"내가 필요 없다 이거지."
"에릭, 제발 이성적으로 얘기했으면 좋겠군."
에릭의 눈동자에 번개가 흘렀다. 그는 소파에서 몸을 벌떡 일으키고 곧장 찰스 바로 앞으로 다가왔다. 얼굴을 찰스의 얼굴 앞에 바짝 들이대고 눈을 바라본다. 타오르는 시선을 피하는 찰스에게 에릭이 으르렁댔다.
"찰스 프란시스 자비에, 내 눈을 봐. 내가 이성적이지 않은 걸로 보이나?"
"에릭!"
"회피하지 마. 그 놈들은 자네를 지켜낼 수 없어. 인간들은-"
"자네도 인간이야!"
"그들은 널 지킬 수 없어. 케네디 꼴이 그렇게도 나고 싶은 거야?"
"그럼 넌!" 찰스의 외침에 거실의 공기가 쩌렁 하고 울렸다. 좀처럼 언성을 높이지 않던 친구의 변모에 놀란 에릭에게 찰스는 단호하게 쏘아붙였다. "넌 어떻게 되고 싶은 건데! 나 때문에 죽고 싶어?"
"상관없어."
"내가 싫어!"
에릭의 눈이 커졌다. "나 때문에 네가 다치는 게 지긋지긋해!" 찰스는 피를 토하듯 외치며 이 쪽을 향해 뻗어오는 손을 거칠게 쳐냈고, 그러고 나서야 그것이 오른팔이었음을 깨닫고 동요했다. 아직 뻣뻣한 관절 때문에 통증을 느낀 에릭이 자기도 모르게 이맛살을 찌푸리고 짧게 신음하자 찰스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졌다.
"찰스-"
"맙소사, 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찰스의 얼굴은 어느새 들어올린 양손에 감싸여 보이지 않았지만 그 사이로 새어나오는 목소리에는 지독한 고통이 담겨 있었다.
"다 내 잘못이야-"
"왜 이래, 찰스!"
"에릭, 내가, 내 다리가 이렇게 된 건 내 잘못이야."
찰스의 팔을 붙들고 얼굴에서 손을 떼어내려던 에릭이 그대로 숨을 삼켰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찰스는 여전히 눈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말을 늘어놓았다. 목소리가 심하게 떨려 나왔고, 가끔 흐느낌 비슷한 것이 섞여 말이 흐트러졌지만 그래도 끊지 않고 계속 이야기한다.
"날 지키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건 그만둬. 내가...내가 내 행동의 결과로 불러들인 일이야, 에릭."
"찰스..."
"그리고 자네가 총에 맞은 것도 그 때문이고."
"아냐, 그건"
"지금은! 그냥 내 말을 좀 들어 줬으면 좋겠어."
천천히 손을 내린다. 붉게 달아오른 눈에는 물이 가득 고여 있었지만 결코 뺨 위로 떨어지진 않았다. 그런 얼굴을 하고, 벌개진 눈자위에 박힌 기묘할 정도로 새파란 눈이 에릭의 눈을 바라본다.
"자네가 부서져 가."
에릭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찰스의 눈만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 속으로는 지금 이 말을 막아야 한다는 외침이 울리고 있었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그가 막고 있는 걸까? 아니, 아닐 것이다.
"지금은 오른팔이야. 다음은 어디일 것 같아? 내가 다치고 죽는건 상관없어, 내 행동의 결과니까. 하지만 에릭, 자네가 다치는 건 난 견딜 수 없어. 이번에 알았어."
"그건,"
"내가 미치는 걸 보고 싶어?"
최강의 텔레파시 능력자가 미치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싶은 거야? 찰스가 속삭이듯 말했고, 에릭은 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깨닫고는 전율했다. 이미 찰스는 그를 지키기 위해 결코 하지 않던 짓을 해 버렸다. 자신이 의식을 잃고 있던 그 때, 아마도 미칠듯한 괴로움을 느꼈던 것이리라.
"에릭, 부탁해. 제발 내게서 떠나 줘. 경호만이라도 그만둬 줘, 제발."
그리고 이러한 결론을 낸 것이겠지. 에릭은 조용히 찰스 앞에 무릎을 굽혀 눈 높이를 맞췄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내밀어 지금은 무릎에 힘없이 놓인 양 손목을 붙들었다.
"에릭."
잠시 그 손목을 바라보다 찰스의 눈을 바라보았다. 의혹에 찬 듯 그의 이름을 부르는 창백한 얼굴에는 불안과 절망과 희망이 뒤죽박죽으로 섞여 있었다.
"찰스, 내 말 잘 들어."
에릭의 눈동자는 여전히 얼음같았다. 때로는 믿을 수 없을만큼 부드럽고 따스한 눈이기도 했지만, 지금만큼은 거의 냉혹하다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강한 의지과 냉정함이 그 안에 깃들어 있다.
"자네가 오해하고 있는 게 하나 있어."
붙들린 손목이 아파올 정도로 손에 힘을 가한다. 반사적으로 뿌리치기 위해 힘을 가했지만 독수리 발톱처럼 파고든 손가락들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당황한 찰스의 눈 바로 앞에 에릭의 얼굴이 다가왔다. 깜짝 놀라 눈을 감아버리는 순간, 에릭의 입술이 닫힌 눈꺼풀에 머물렀다. 그리고 바로 입술로 내려와 비집어 열고 혀가 들어온다. 키스를 마친 에릭은 찰스의 붉은 입술을 가볍게 혀로 쓸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난 널 위해 희생하고 있는 게 아냐."
"......"
"어떻게 생각하건 상관없어. 곁에 있을 거야."
찰스는 절망에 휩싸여 눈을 감았다.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지만, 동시에 그 안 깊은 곳에서는 에릭의 선언을, 그 속에 번득이는 집착과 애착을 기뻐하는 뭔가가 있었다. 소름끼치게 싫지만 동시에 부정할 수 없는 감정.
"에릭, 제발-"
"정 떼어내고 싶으면 내 뇌를 망가뜨려."
이번에는 찰스가 숨을 들이킬 차례였다. 에릭은 꽉 붙들고 있던 찰스의 두 손을 놓아준 후 이번에는 찰스의 얼굴을 붙들었다. 절대 고개를 돌릴 수 없도록 붙들고 바짝 얼굴을 들이댄 후 하나 하나 새기듯 말한다.
"그러기 전에는 꿈도 꾸지 마."
"......"
"자넨 내 거야."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찌르는 것 같은 아픔이 실제 심장을 직격했다. 그 통증에 미간을 찌푸리고 작게 신음을 내뱉자 다시 한 번 에릭의 입술이, 이번에는 목에 와닿는다. 아니, 입술이 닿은 것은 잠시일 뿐이고, 곧 그의 이가 살을 집어 노골적인 의도를 내보이며 세게 물었다. 고통에 겨운 목소리가 울리자 만족한 듯 자신이 남긴 자국을 핥고서 물러난다.
"에릭, 지금"
"사랑해."
찰스는 눈을 감았다. 지금껏 고여 있던 뜨거운 것이 간신히 뺨에 서느런 냉기를 남기며 흘러내렸다. 남자의 뜨거운 입술이 그 눈물에 닿아왔고, 그 감촉에 몸서리치며 찰스는 눈앞의 남자를 끌어안았다. 당해낼 수가 없다. 어떻게 해도 그를 당해낼 수가 없다. 할 수 있는 말은 그저 한 가지 뿐이었다.
"더 이상 다치지 마."
남자의 몸이 흔들렸다. 웃음 때문일 것이다. 그가 귀에 입술을 가져다 대고 조용히 속삭이는 말을 들으며, 찰스는 다시 한번 왈칵 눈물이 흘러나오는 것을 느꼈다.
- 정치계로 진출한 찰스, 이상은 다르지만 그를 잠시 돕고 떠나려다 인생 틀어잡힌 에릭입니다.
- 찰스는 뮤턴트를 지지하는 정책을 펴고 있지만 자신이 돌연변이인 건 숨기고 있어요 :D
- 연작입니다. 이번 글에는 화이트폰님의 리퀘가 들어갔습니다.
"아름다워."
그것은 매우 흔치 않은 일이었다.
"뭐가?"
"자네 눈이."
사무실을 향해 천천히 이동하던 휠체어가 순간 멈췄다. 찰스는 웃으며 지금 이 순간 에릭의 얼굴을 꼭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돌아보려 했는데, 머리를 돌려볼 것도 없이 눈앞에 그 눈동자가 나타났다. 청회색 눈동자는 그러나 놀랍도록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꾹 다문 입에 약간 찌푸리기까지 한 미간을 보니 화가 났나 싶기까지 했다. 그런 얼굴을 하고서, 에릭 렌셔는 찰스 프란시스 자비에에게 아주 냉정한 어조로 물었다.
"무슨 소리야, 그거."
"자네 눈동자는 정말 미치도록 아름다워. 내가 말 안했던가?"
햇볕에 따라 푸르게도 보였다 회색으로도 보였다 하는 눈동자가 찰스의 진의라도 탐색하려는 듯 빤히 이 쪽을 바라본다. 그 시선을 부드럽게 받아내며, 찰스는 다시 나지막하게 말했다. 달콤하게, 더없이 상냥하게.
"세상에는 수많은 푸른 눈이 있지만 자네같은 눈은 흔치 않아."
하지만 듣는 사람의 얼굴은 그 말에 담긴 진의 따위 상관없다는 듯 냉랭하기만 하다.
"찰스, 갑자기 왜 이러는지 모르겠는데,"
"그냥 그걸 알려주고 싶었어. 자네는 정말 아름다워."
에릭의 얼굴이 냉랭을 넘어 차갑게 얼어붙었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굳었다. 하지만 찰스는 그런 에릭의 기분을 풀어주려 하기는 커녕 오히려 빙글빙글 웃으며 말을 잇고 있었다. 지금 에릭이 왜 이리 표정이 싸늘해졌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이 보면 에릭이 찰스의 말에 화를 내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의 감정을 손에 쥘 수 있을 듯 감지할 수 있는 찰스의 답은 달랐다.
"갑자기 왜 이래. 내가 혹시 뭐 잘못한 거라도 있어?"
"아냐 친구 전혀 그런 건 없어. 그냥 말해주고 싶었을 뿐이야."
저 차갑게 굳은 얼굴은 너무 갑작스러운 말에 당황한 속내를 숨기기 위한 에릭의 필사적인 가면이다.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이 냉정하게만 보이는 남자가 약간이라도 그 냉랭함을 무너뜨리는 광경을 볼 수 있겠지만, 적어도 남들 보는 눈이 있는 여기선 그러면 안된다는 것쯤 찰스도 잘 알고 있었다.
"일단 가자고."
에릭이 일어섰다. 다시 휠체어 뒤로 돌아가 천천히 민다. 찰스는 대화를 계속 잇기엔 시간이 없다는 사실이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가 의원으로서 바쁜 나날을 보낼수록 단 둘이 이야기할 시간은 줄어든다. 암살 시도 이후 찰스의 의정활동은 이전보다 더 주목받게 되었고, 그는 점차 뮤턴트 인권 운동의 상징이 되어가고 있었다. 뮤턴트를 위해 일하는 것은 원래 원하던 바였지만 상징이 되어 떠받들리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아이콘이란 원래 동유럽의 성화를 의미하는 거라고. 난 예수도 성모 마리아도 아닌데.' 찰스가 불만을 담아 투덜거리고 있노라면 에릭은 어깨를 으쓱이며 받아치곤 했다. '어쩔 수 없잖아. 아마 그리라면 그릴걸?' '에릭!' '어차피 뮤턴트 분리주의자들은 이미 자네의 사진과 인형을 불태우고 있어. 인간들은-' '에릭, 스스로가 인간이 아닌 것처럼 말하지 마.' 에릭은 뭔가 더 말하고 싶어하는 듯 했지만 찰스의 얼굴을 보더니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에릭."
"왜."
"자네 말야..."
"또 이상한 소리 하면 저 분수에 휠체어 던져 버린다."
"그럼 얘기하면 안되겠는걸"
사실 요즘 에릭의 신경은 제법 예민해져 있었다. 지속적으로 찰스에게 날아드는 분리주의자들의 협박은 요즘 점점 더 심해져, 몇몇 메시지들은 명백히 위험한 의도를 내포하고 있었다. 찰스를 배신자, 괴물들의 보호자, 우두머리로 지칭하는 그런 편지나 쪽지들은 경고나 욕설을 넘어서서 노골적인 협박을 하고 있었다. 찰스는 이전의 총격 사건을 직접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메시지들을 대부분 무시해 버렸지만, 에릭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그 편지들의 발신처를 추적하고 주위를 살폈다. 지금 찰스의 옆에는 에릭 한 명만이 있지만, 이 평화로워 보이는 의회 앞뜰에도 사실 몇명인가의 경호원이 조심스레 찰스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얘기해 봐."
"응?"
"안 던질 테니 얘기해 보라고."
찰스는 피식 웃었다.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어."
"......"
"에릭?"
"미안해 할 거 하나도 없어."
아아, 그래. 늘 그렇게 말하지 내 친구. 하지만 난 늘 자네에게 미안해. 나만의 여정이었어야 할 일에 자네를 끌어들인 게 잘못은 아니었을까 하고. 하지만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정색을 하며 스스로 원한 길이었노라 말하는 자네가, 고맙고도 무섭다는 걸 자네는 알까.
"자네도 마찬가지야."
"무슨 소리야?"
"내게 미안해 할 필요 없어."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이름을 부르기 위해 숨을 들이킨 순간, 에릭이 허리춤에서 무전기를 꺼냈다.
"건너편, 전방 덤불에 뭔가 반짝였다. 알아봐."
그렇게 말하면서 몇 걸음 앞으로 나선다. 아마도 그 반짝인 것과 찰스 사이를 몸으로 가로막으려는 것이다. 찰스는 반사적으로 머리에 손을 올렸다. 가벼운 두통이라도 느끼는 듯 했지만 실상은 에릭이 주목하는 덤불 속에 누가 있는지, 어쩐 일인지 알아보려는 그 나름의 방식이었다. 에릭의 짐작대로 그 곳에는 사람이 있었다. 그 인간의 의사를 읽기 위해 마음 속으로 파고들어간 순간, 총성이 울렸다.
"에릭!"
살의를 느끼자마자 저격범의 의식을 끊어버렸지만 아슬아슬한 차이로 한발 늦었다. 새파랗게 질린 찰스 앞에서 에릭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에릭, 괜찮아? 에릭!"
비명을 지르며 몸을 숙이고 도망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무릎을 꿇은 채 비틀거리던 에릭이 한 손을 아래로 내렸다가 다시 올린다. 찰스의 눈에는 뒷모습만 보이는 까닭에 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갑작스레 힘껏 몸을 일으킨 에릭이 돌아서서야 몸 상태를 볼 수 있었다.
"맙소사, 에릭!"
다가온다. 한 발로 뛰다시피 해서 다가온 에릭의 허벅지에는 엄청난 상처가 나 있다. 일반적인 총상과 다르다. 울컥 피가 솟아나오는 것 보고서야 찰스는 하얗게 질려 손을 내밀었다. 어서, 어서 지혈하지 않으면 저 출혈량으로는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한발 다가온 에릭은 그대로 무너져 찰스의 온 몸을 끌어안았다. 남자가 힘겹게 숨을 내쉰다. 단 한 순간 모든 것이 악몽으로 변해버렸는데, 에릭이 그의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막을 수가...찰스, 막을 수가 없어."
"무슨 소리야, 에릭!"
"이 총알, 막을 수가..."
중얼거리던 에릭이 양 팔로 간신히 의자를 짚고 몸을 떼는 순간,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다시 한번 총성이 울린 것이다. 찰스의 눈앞에서 에릭의 어깨가 붉게 물들었다. 남자의 어깨에 박힌 총알은 몸 안에서 파열되며 큰 상처를 남겼고, 뜨거운 피가 찰스의 얼굴과 몸에 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자를 붙들고 있던 에릭의 팔은 움직이지 않는다. 한쪽 팔은 불가항력으로 인해 아래로 늘어졌지만, 다른 팔은 힘껏 버티고 서서 이름 모를 저격자들의 시야에서 찰스를 가리고 있다.
팔을 뻗었다. 눈을 크게 뜬 채 피투성이가 된 에릭의 몸을 끌어안은 찰스는 그대로 의식을 확장했다. 순간 모든 것이 멎었다.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던 사람들도, 달려가던 사람들도, 손가락으로 에릭 쪽을 가리키며 어딘가 외치던 사람들도, 사방에서 이 쪽을 노리던 저격자들과 총성을 향해 달려가던 경호원들까지도 모두 멈춰섰다. 마치 영화 속의 정지된 장면같은 광경이었지만, 모든것이 멈춰 있는 화면과는 달리 다른 모든 것들은 움직이고 있었다. 분수에서 흩날리는 물방울, 사람들의 머리칼을 스치는 바람, 그리고 찰스의 옷에까지 뜨겁게 번져가는 에릭의 피.
"찰스..."
에릭의 속삭임 한 마디에 모든 것이 바뀌었다. 서 있던 사람들 모두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죽은 것은 아니었지만 모두 한꺼번에 의식을 잃은 것은 틀림없었다. 도저히 선별할 수가 없었다. 누가 도망치는 사람인지, 누가 저격자인지, 앞으로 누가 더 총을 쏠 것인지 알 수가 없어서 모두 기절시킨 것이다. 그 비현실적인 침묵 속에서 에릭이 속삭이는 소리만이 찰스의 귀에 멍멍하게 들려 왔다.
"다행...이야..."
"에릭?"
"이번에는..."
"말 하지 마. 소리내서 말하지 않아도 돼!"
생각을 읽는다. 에릭의 머리 속에 떠오르는 말은 단 하나. '이번에는 지켜냈어.' 라는 의사가 전해져 와, 찰스는 아무 말도 못하고 이를 악물었다. 아냐, 그래선 안돼 에릭. 나 때문에 자네가 다쳐선 안돼. 날 지키는 것보다 자네의 목숨이 몇 배로 중요해. 적어도 내게는 그래.
"에릭, 조금만 더 버텨. 곧 구급차가 올 거야!"
찰스가 손쓸 수 있었던 거리 밖에까지 도망친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이 신고를 했는지 경찰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함께 구급차가 다가왔다. 에릭은 뭔가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그 말은 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했고, 숙련된 구급요원들의 손에 들것에 옮겨진 남자는 그대로 흰 차 안에 실려들어가 사라졌다.
"의원님, 괜찮으십니까? 다친 데 없으세요?"
다급한 질문에 찰스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피가..."라고 말하는 구급요원에게 한 손을 들어보이며 답한다.
"전 괜찮습니다. 다친 데 없어요."
"하지만 의원님."
"아까 그 사람을 살려주세요. 저 대신 총에 맞았습니다."
'대신'이라는 말을 할 때 그제서야 눈에 왈칵 눈물이 고였다. 사방에 사람들이 쓰러져 있기 때문인지, 구급요원은 거기까지만 듣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났다. 찰스는 양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선택을 후회한 적은 없다. 그 선택 때문에 불특정 다수의 악의에 목숨을 내맡기고 살아야 한다는 것도 온전히 납득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그 선택을 내린 자신이, 그리고 그 선택 탓에 움직이지 못하게 된 두 다리가 저주스러웠다.
그 선택 때문에 그가 총에 맞았다. 그리고 망가진 다리로는 지금 그와 함께 있을 수조차 없다. 사경을 헤매고 있을 텐데 손조차 붙들어 줄 수 없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 하나.
- 정치계로 진출한 찰스, 이상은 다르지만 그를 잠시 돕고 떠나려다 인생 틀어잡힌 에릭입니다.
- 찰스는 뮤턴트를 지지하는 정책을 펴고 있지만 자신이 돌연변이인 건 숨기고 있어요 :D
- 연작입니다. 이번 글은 화이트폰 님의 리퀘스트 요소를 넣기 위해 준비했습니다.
"찰스, 왜 그러나?"
"죄송합니다. 등이 쑤셔서 그래요, 로버트. 가끔 이러더군요."
2차대전 참전용사였던 하원의원은 그 심정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도 독일놈들이 박아둔 총알 자리가 가끔 욱신거리지. 빌어먹을, 절대 잊게 내버려 두질 않는다니까." 찰스는 웃으며 그에 동의했고, 두 의원은 서로의 정책에 지지를 보내기로 약속한 다음 자리를 파했다. 사무실에서 나오자 문 바로 옆에 붙어 있던 에릭이 자연스럽게 다가와 휠체어 손잡이를 잡는다. 모인 미간에 꾹 다물린 입술, 그의 마음을 읽을 필요조차 없어 보였다.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었어?"
"아니."
거짓말, 그렇게 판단했지만 그의 마음 안에 들어가지는 않았다. 만일 찰스가 꼭 알아야 할 일이라면 에릭이 먼저 입을 열어 알려줄 것이다.
"그냥 자네가 여기 있는 게 싫어."
바로 이렇게. 찰스는 실소를 터트리고 싶은 것을 참으며 그저 조용히 미소지었다. 에릭은 처음부터 정치계 진출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그는 미국인이 아니었고, 그에게 있어 정치란 기만, 술책, 그리고 그의 인생을 정신적으로 눌러죽인 '학살'과 깊이 연관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는 오래 전 인간 때문에 깊이 다친 짐승처럼 사람을 믿지 않았고, 특히 그 사람이 '다수' 일 때에는 더더욱 믿지 않았다. '당선될 때까지만.' 곁에 있어 달라는 부탁에 그의 대답은 이렇게나 짧았다. 당선된 뒤로도 그는 삼 개월을 더 기다려 주었고, 그동안 내내 찰스를 설득하기 위해 애썼다. '넌 의미없는 놀음을 하는 중이야. 저들이 그런 문제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히틀러도 처음에는 비웃음을 샀어. 어떻게 됐는지 봐.' 에릭에게 모든 정부는 똑같았고, 격론이 오가는 미국의 하원과 우뢰와 같은 박수를 보내는 나치스의 의회가 아무 차이가 없었다.
아마 지금의 에릭이 들으면 화낼 것이다. 총격 사건이 일어났을 때 찰스는 그가 가 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실 에릭은 그러한 암살 시도에 대해 몇번이나 경고했었다. 일종의 공포증 발현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무시해 버린 것은 바로 찰스 자신이었다. '이 곳은 전장이 아니야.' '충분히 전장이야. 넌 저들에게 선전포고를 했어.' '에릭, 제발! 내게 다가오는 사람들을 오스왈드 보듯 할 필요는 없잖아.' 그는 항복하듯 양손을 들었지만 그것은 오히려 불만의 표시라는 걸 찰스는 잘 알고 있었다. '원하는 대로, 의원님. 하지만 내가 늘 지켜줄 수만은 없잖아.' '오, 에릭-' '난 곧 떠날 거야. 내가 없으면 어쩌려고 그래. 그래 가지고 '살아 있는' 자네 기사를 언제까지 읽을 수 있겠어?' 그 고집스러운 얼굴에 찰스는 약간은 도전적으로 내뱉었다. '그만 좀 해. 기분은 이해하지만 여긴 미국이야.' 하지만 그를 공격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고집스레 이 쪽을 바라보는 청회색 눈동자의 주인에게 확신시키고 싶었을 뿐이다. '이 곳은 미국이야. 나치스 독일이 아니라고. 이 곳은 자유와 민주주의의 땅이야.' '그리고 대통령을 암살하고 말이지.' '에릭!' 고집스러운 얼굴로 이 쪽을 바라보던 그가 찰스의 얼굴을 양 손으로 붙들었다. '난 네게 늘 감사하고 있어.' '...에릭?' '넌 증오심밖에 모르던 날 구해줬어. 그리고 날 더 강하게 만들어 줬고.' '잠깐, 이건' 키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네가 죽는 게 싫어. 그러면 난 인간을 영원히 증오하게 될 거야.' 끌어안았던 기억이 난다. 그렇다. 사실 그것이 두려웠다. 자신의 곁에서 떠난 그가 인간을 증오하며 다시 그의 인생을 지배하던 그 증오 속으로 들어가 버릴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눈을 떴을 때 눈물이 났다. 깊은 마취에서 깨면서 지나치게 피를 잃었던 까닭에 너무 추워서 온 몸이 덜덜 떨리고 배에서는 끔찍한 통증이 엄습해 왔지만 그 때문에 운 것이 아니었다. 손이, 오직 손만이 따뜻했다. 침대 옆에 앉아 그가 깨어나기만 기다리다 잠들어 버린 에릭의 머리가 그 손 곁에 있었다. 천천히 손을 움직여 그의 머리를 가볍게 만져 보았을 때, 찰스는 세상이 부풀어올라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옆쪽으로 눈물이 흘러 떨어지자 시야가 간신히 맑아졌다.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쓰다듬고 또 쓰다듬는데도 에릭은 눈을 뜨지 못했다. "찰스!" 먼저 비명을 지른 것은 병실 안으로 들어오던 레이븐이었다.
비명소리가 울리고서야 에릭은 깨어서 찰스를 바라보았다. 허나 눈을 마주친 것은 단 한 순간, 곧바로 내리뜬 시선을 한 에릭은 머리를 쓰다듬던 찰스의 손을 잡아올리더니 아주 조용히 손바닥에 입을 맞추었다. 그 뒤로 며칠간 찰스는 그를 보지 못했고 - 애당초 가족밖에 면회할 수 없다는 것을 레이븐이 우겨서 들어올 수 있었다고 했다 - 그래서 그는 에릭의 입술이 닿았던 그 손을 내려다보며 에릭을 생각하곤 했다.
"난 자네가 떠난다고 해도 이젠 못 막겠어."
며칠 뒤, 간신히 그렇게 입을 열었을 때 에릭은 한동안 찰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내가 떠날 거라고 생각해?"
"자네 말대로 되었잖아. 바보라고 욕해도 좋아."
이미 선고는 내려졌다. 다시는 두 발로 땅을 딛을 수 없을 것이라는 얘기를 듣고도 찰스는 크게 동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에릭의 날카로운 눈까지 속이지는 못했다. 잠시 아래쪽을 헤매던 시선, 미소를 띠려다 애매하게 실패한 입가, 짧게 숨을 내쉬고 깊이 숨을 들이쉬는 모습까지 본 그는 충실한 경호원답게 그 자리에서는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게 바로 몇분 전 일이다. 찰스는 어떻게든 웃으려 애쓰며 다시 말했다. 가볍게, 아무렇지도 않게.
"그는, 날 쏜 사람은 뮤턴트들에게 딸을 잃었어."
"찰스."
암살범과 눈이 마주친 순간, 무방비한 찰스의 뇌 안으로 남자의 기억이 흘러들어왔다. 일부러 읽은 것은 아니다. 찰스를 바라보는 순간 그 중년 남자는 입을 꾹 다문 채 마음 속으로 외치고 있었다. '놈들과 한패다' '살인자' '괴물' 찰스와 같은 파란 눈을 가진 소녀가 그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다. 공포에 질린 채 절규하며.
"범인들은 잡히지 않았고, 그가 본 건... 그가 본 건 비명을 지르며 납치당하는 딸아이의 얼굴이었어. 그게 마지막이었던 거야."
"찰스!"
에릭이 찰스의 어깨를 꽉 붙들었다. 그만 말하라는 뜻이라는 걸 알면서도 말을 멈출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 말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레이븐에게도, 행크나 알렉스에게도 말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절규하는 소녀의 영상을 보며 아버지는 되뇌이고 있었다. '괴물' '살인자' 그는 찰스가 뮤턴트라는 걸 몰랐지만, 그가 뮤턴트 등록 법안을 반대한다는 것만으로도 그를 죽이고 싶어할 만큼 뮤턴트를 증오하고 있었다. 왜냐면,
"왜냐면...왜냐면," 호흡을 가다듬지 않고는 그 다음 말을 하기가 너무나 어려웠다. "왜냐면 딸의 머리는 끝내 발견되지 않았으니까."
어깨를 붙든 에릭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그 손에 얼굴을 기대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찰스는 말했다. 마음은 당장 입닥치고 그에게 기대라고 외치고 있었지만 도저히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에릭, 난... 나란 인간은 최저야."
"개소리."
그 아버지의 마음을 들여다 본 순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올라오는 총구를 보면서도 그를 멈추지 못했다. 순간 반강제로 들이밀어진 증오와 혐오와 살의는 그 정도로 강렬했고, 밀어닥치는 슬픔과 지옥같은 고통은 심장을 찌르고 들어왔다. 그럼에도 총에 맞는 순간 그의 머리 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내가 죽어서 그 법안이 부결된다면 그걸로 됐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에릭."
"찰스!"
"자네가 내 뒤를 이어주면 된다고...그걸로 족하다고."
"그런 소리 하지 마."
"죽도록 무서웠지만 그건 총 때문도 아니고 죽을까봐서도 아니었어. 알아?"
"......"
찰스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바로 앞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청회색 눈을 향해, 그가 자신을 증오하거나 경원하게 된다 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혹시라도 살아서 눈을 떴을 때 자네가 없을까봐, 인간을 증오하기로 결정하고 내 곁을 떠났을까봐 그게 두려웠어. 난 그런 인간이야."
언젠가 날려보낼 수밖에 없는 독수리를 붙들어 두고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이 말을 하는 것으로 다시 한번 족쇄를 채우게 된다는 것도 모르지 않았다. 가라고 말하면서 이리 토로하는 것은 정말 최저의 행동이다.
"에릭, 떠나는 게 나을지도 몰라. 자네와 난 달라. 어쩌면 내 꿈이 잘못된 걸지도 몰라. 그렇다면 누군가는 다른 길을 준비해야 해."
"자네의 꿈은 잘못돼 있어."
칼로 에는 듯한 통증이 가슴에 느껴진다. 하지만 잘 알고 있다. 이게 에릭이다. 가장 아픈 순간에도 절대 고개를 돌리지 않고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걸어오는 이다.
"그 멍청한 망상을 그만두지 않는 한 반드시 누군가는 자네를 죽이려고 할 거야."
"그렇겠지."
"그러니까 헛소리는 그만해. 난 여기 있을 거야."
놀라서 바라보았다. 차가운 파란 눈이, 날카롭게 뻗은 눈썹이, 반듯하게 내려온 콧날이, 그 밑에 굳게 다문 입이 그의 결심을 말해주고 있다.
"에릭..."
"다시는 그런 놈들이 널 해치지 못하게 할 거야. 찰스, 넌 순진하고 오만한 바보고 그 꿈은 말도 안되지만 나와는 상관 없는 얘기야. 그러니 떠나라는 헛소리는 받아들일 수 없어."
"에릭, 넌 분명히,"
에릭이 침대 위에 놓인 찰스의 다리에 손을 얹었다. 분명 눈으로는 그의 손이 얹힌 것이 보이는데 방치된 다리에는 아무 감각도 없다. 천천히 다리를 만지던 에릭이 강경하게 말했다.
"꿈도 꾸지 마. 이런 몸을 하고서 나더러 가라고?"
"에릭, 이건 네 책임이 아냐. 그리고 네가 걱정할 일도"
"앞으로는 내가 책임질 일이야."
어깨 위에 다시 손이 얹혔다. 이번에는 입술이 다가온다. 날카롭고 격렬한 키스에 찰스는 할 말을 잃고 에릭의 팔을 붙들며 매달렸다. 입술을 뗀 순간 에릭이 속삭였다.
"..."
찰스는 눈에 눈물이 핑 고이는 것을 알아채고는 눈을 감아 버렸다. 그의 나직한 속삭임에 기껏 이악물고 말했던 결심이 산산이 부서져 나간다. 날 떠나, 에릭. 난 분명 자네를 상처입히게 될 거야. 나를 지켜내건 그러지 못하건 간에 자네는 상처를 입겠지. 깃털은 꺾이고 날개는 부러질지도 몰라. 다시는 날 수 없을지도 몰라. 내게 갇히지 말고 날아가. 이 우리에서 벗어나 버려. 지금이 기회야. 지금 간다면 돌아보지 않을 수 있어. 자네도, 나도.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에릭이 뒤에서 말을 걸어왔다. 찰스는 잠시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과거의 상념에서 벗어나 옆을 돌아보았다. 여전히 보이는 것은 휠체어를 미는 손 뿐이다. 남자인데도 길고 보기 좋게 모양이 잡힌 우아한 손.
"아 그냥 좀."
사람들이 많다. 이런 곳에서 함부로 잡을 수는 없었지만, 지금 이 순간 찰스는 에릭의 손을 잡고 싶었다. 강한 손, 그를 건사하고 돌봐주는 손, 그를 사랑해 주는 손, 그를 지지해 주고 받쳐주는 손, 남들에게는 차가울지 몰라도 자신에게는 더없이 따뜻한 손을.
"빨리 은퇴하라고."
"힘들 걸. 아직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나 아니면 안된다고 믿는 건 노인들이나 하는 짓이야."
"난 갓난아이 때 이미 흰 머리를 달고 태어났거든."
"어울리네."
햇살이 따스했다. 찰스는 가볍게 웃으며 속으로만 조용히 기원했다. 다른 것은 바라지 않습니다. 이기적이라는 것도 잘 압니다. 하지만 제발, 그만은 저보다 더 오래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 AU입니다. 에릭찰스에릭, 쇼우는 없고, 에릭을 찰스가 주웠다는 설정만 유지됩니다.
- 정치계로 진출한 찰스, 이상은 다르지만 그를 잠시 돕고 떠나려다 인생 틀어잡힌 에릭입니다.
- 찰스는 뮤턴트를 지지하는 정책을 펴고 있지만 자신이 돌연변이인 건 숨기고 있어요 :D
- 연작입니다. 이번 글은 스칼렛 위치님의 리퀘스트 요소가 들어가 있습니다.
"등록법을 반대하신다는 겁니까?"
"저는 우리 국민들이 어떤 이유로건 '구별' 되길 바라지 않습니다. 그것이 피부색이건 성별이건 돌연변이 여부건 간에 그들은 모두 성실하게 하루를 살아가는 국민입니다."
"그렇습니다만 자비에 의원님, 범죄를 저지르는 뮤턴트들에 대해 따로 대책이 없다는 지적이 있는데요."
"뮤턴트만 범죄를 저지르는 게 아닙니다. 범죄에 대한 방지책은 우리 모두가 고민해야 할 문제죠. '함께' 말입니다."
'함께' 라는 말에 방점이 찍혀 있다는 것을 누구나 느낄 수 있었다. 계속되는 의정활동으로 약간 창백해진 얼굴을 꿋꿋이 들고 답하던 찰스 자비에는 이제 질문은 끝이라는 뜻으로 손을 들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럼에도 쏟아지는 기자들의 질문과 다가오는 마이크를 밀어내며 경호원의 도움을 받아 어떻게든 앞으로 다가가려던 움직임은 풍채 좋은 한 남성에 의해 막혔다.
"의원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질문은 끝났는데요."
짧게 답하며 고개를 든 자비에 의원의 시선이 그 남자의 것과 얽혔다. 묵묵히 자비에를 내려다 보던 남자의 입매가 꾹 눌렸고, 그를 바라보던 의원은 서서히 경악에 찬 얼굴이 되어 입을 벌렸다. 의원이 손을 들어 남자의 어깨를 붙든다. 심상치 않은 기색에 의원 주변의 기자들을 막던 경호원이 고개를 돌려 남자 쪽으로 손을 뻗는다. 남자가 손을 올렸고, 총을 발견한 누군가가 비명을 지르려 했다. 시간은 끔찍하게 느리게 흘렀고, 의원이 잠깐 숨을 들이키고 뭔가를 말하려는 순간 총성이 울렸다.
에릭은 눈을 떴다. 방금 울렸던 총성이 아직도 낯익은 방 천장에 울리는 것 같아 두 손을 들어올려 눈을 가리고 잠깐 세게 비볐다. 꿈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인식하고 긴 한숨과 함께 몸을 일으킨다. 눈을 감으면 다시 한번 선명하게 그 때의 모습이 눈에 그려졌다. 몸에 한 발, 그리고 가슴에 제대로 한 발 더 쏘기 위해 남자는 손을 들었다. 에릭은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고 총은 폭발했다. 사람들의 비명소리와 함께 그는 쓰러졌지만, 에릭의 눈에 들어온 것은 단 한 사람, 배를 피로 적시며 쓰러지는 찰스 프란시스 자비에 뿐이었다.
총알을 뽑아낼까 했지만 오히려 더 위험하다는 생각에 참았다. 안아들자, 아직 의식이 있는지 시선을 에릭의 얼굴로 돌린 찰스가 팔을 에릭의 목에 감으려 했다. 하지만 그 팔은 피에 젖은 채 힘없이 늘어졌고, 푸른 눈이 눈꺼풀 안으로 말려들어가며 천천히 눈을 감는 것을 본 에릭은 다급히 그의 이름을 외쳤다. '정신 차려! 의식을 잃어선 안돼!' 누군가 구급차를 외쳤지만 그보다 한발 먼저 에릭은 의원용 리무진에 올라탔다. 쓸데없이 넓은 좌석이 지금만은 더없이 고마웠다.
수행원 한 명이 건넨 구급상자에서 압박붕대를 꺼냈다. 차마 둘러감지는 못하고 환부에 대고 꾹 눌렀다. 거의 의식을 잃은 것 같던 찰스가 짧게 비명을 질렀고, 에릭은 그가 고통스러워 한다는 사실보다 그에게 의식이 있음을 감사했다. "빨리 병원으로! 어서!" 기사는 이미 최대속도를 밟고 있었지만 에릭은 으르렁대며 소리쳤다. 머리를 감싸안자 꾹 닫혀 있던 눈꺼풀이 바르르 떨리더니 고통스럽게 열린다. "에릭..." "아무 말 하지 마." 짧게 말을 잘라버린 에릭은 무서운 표정으로 앞을 노려보며 이를 악물었다. 실책이다. 돌이킬 수 없는 실책이다. 그를 지키지 못했다. "에릭." 그가 다시 한번 말했다. 시선을 내리자 식은땀이 가득한 얼굴이 그를 기묘할 정도로 평온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고통의 그림자가 깊이 새겨져 있으면서도 잔잔한 호수 같은 눈에 에릭은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을 맛보아야만 했다. 안돼. 내 눈앞에서 떠날 꿈도 꾸지 마. 마치 지금이라도 곧 미련 없이 떠나버릴 것 같은 표정으로 바라보지 말란 말이야.
"얘기하고 싶었던 게 있었어."
"닥치고 병원에 가서 수술할 생각이나 해."
"내 친구."
다정하게 부른 그 단어에는 심지어 웃음기마저 들어가 있었다. 에릭은 눈가에 뭔가 고이는 것을 발견하고 두어번 눈을 깜박였다. 찰스의 얼굴에 그게 떨어지고 나서야 그는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손을 들어 눈가를 누르자 손에 묻은 피 냄새가 확 끼쳐 왔다. 피, 찰스의 피.
"난 자네가... 내 뜻을 이어줬으면 좋겠어."
"개소리 하지 마."
"레이븐을...레이븐을 도와줘."
에릭은 욕설을 내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다시 눈물이 흘러 떨어진다. 하필이면 찰스의 눈가에 떨어진 그 눈물은 이미 젖어있는 눈에 흘러들어가 다시 얼굴 옆으로 떨어졌다. 병원 앞에 차가 도착했고, 이미 연락을 받은 것인지 응급실 직원과 의사들이 달려나와 찰스를 침상 위에 누이고 다급히 달려들어갔다. 배에 얹혀 있던 압박붕대가 떨어져 피에 젖은채 바닥에 뒹굴었고, 에릭은 따라 들어가는 것조차 잊고 차 뒤에 앉아서 울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무릎 위에 얹혀 있던 남자의 체온이 서서히 사라져갔고, 어쩌면 그것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시 한번 눈물이 흘렀다.
이를 악물고 버텨 보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서야 차에서 내릴 수 있었다. 또다시 지키지 못했고, 또다시 눈 앞에서 가장 소중한 이가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꼴을 보아야만 했다. 아주 오래 전 간신히 흉터만 남았던 상흔 위에 생생한 상처가 덧붙어, 에릭은 이를 꽉 악물고 한 걸음 한 걸음 병원 쪽으로 다가가며 다짐했다. 만일 찰스가 목숨을 잃는다면 인간들은 지옥을 보게 될 것이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를 앗아가 버린 데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만일 그가 살아남는다면?
마음속에 던져진 질문에 에릭은 희망의 불꽃을 품었다. 살아남는다면, 혹시라도 그가 에릭 자신을 둘러싼 저주를 걷어치우고 살아남는다면. 손을 내려다보았다. 붉은 피에 젖은 손은 평소 그가 상상하던 그대로였다. 이제껏 살아오면서 그 손은 쓰레기들의 피에 늘 젖어 왔다. 하지만 지금 이 손에 말라붙은 것은 바로 찰스의 피였다. 이 피에 맹세코, 반드시.
그것이 벌써 2년 전. 눈을 떠서 바라본 손에는 아무것도 묻어 있지 않다. 에릭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주먹을 쥐고 다시 손을 폈다. 고개를 돌려 시계를 보고, 새벽 6시임을 깨닫고 아직 울리지 않은 알람을 끄며 일어선다. 평소보다 조금 이른 기상이었지만 준비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다. 샤워와 세수와 면도를 마치고 옷을 걸치고 방 밖으로 나간다. 그의 침실에 당도하여, 가볍게 노크하고 인기척을 기다린다. 잠시동안의 침묵에 쓰게 미소짓고는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가 그를 깨운다.
"찰스, 일어나."
어이없게도 어린애처럼 베개를 끌어안은 채 잠든 남자의 어깨를 잡고 흔들자, 아직 잠에서 덜 깬 푸른 눈동자가 살며시 드러났다가 다시 사라진다. 갈색 머리를 쓰다듬자 기분 좋은 고양이처럼 나지막하게 신음을 내뱉더니 눈을 감은 채 잠에 취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온다.
"어제 보고서 다 읽느라 두시까지 못 잤어."
"안됐군. 그래도 지금은 일어나야 해."
"알아...아는데...잠깐만..."
목소리가 다시 잦아든다. 깊이 숨을 내쉬는 꼴을 보니 다시 잠에 빠졌다. 에릭은 천천히 손을 내려 부드럽고 따뜻한 볼의 감촉을 느끼며 잠시 자비심 있게 기다려 주었다. 그리고 속으로 스물까지 센 뒤, 이번에는 이마를 쓸며 다시 말했다.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되는 거 알잖아. 비서들을 기다리게 할 셈이야?"
"...에릭."
"음?"
"자넨 악마야."
"칭찬 고마워."
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지만 이번에는 분명 의식이 깨어 있다. 천천히 눈을 뜬 찰스는 양 손을 짚으며 상반신을 일으키고는 언제나 그렇듯 에릭을 향해 손을 뻗었다. 겨드랑이 사이로 팔을 넣고 총격사건 이후 영영 움직일 수 없는 무릎 밑으로 손을 넣어 가볍게 들어올려 욕실 쪽으로 걸어간다.
"예전에도 얘기했지만 이 정도는 혼자 할 수 있어."
"알고 있어. 그럼 제 시간 맞게 일찍 일어나던가."
찰스는 포기한 듯 피식 웃었다. 그는 아마 모를 것이다. 그의 능력을 생각한다면 알 지도 모르지만 어쨌건 모를 것이다. 그가 살아 있는 한 순간 한 순간이 에릭에게 어떤 의미인지, 더이상 움직이지 못하는 다리를 바라보며 다시금 그 맹세를 되새기는 심정이 어떤 것인지도.
"그럼 잘 부탁해."
에릭은 찰스의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댔다 떼었다. 개조된 욕실의 받침대에 찰스를 내려놓고 몸을 돌리려는데, 찰스의 팔이 그의 목에 다시 한번 감겨온다. 어떤 의미인지 알아챈 에릭은 순순히 그가 원하는 대로 키스를 받아주었다. 혀가 섞이고, 키스를 마친 찰스가 잠시 에릭의 목에 기대어 눈을 감는다. 나지막한 속삭임을 들으며, 에릭은 다시 한번 그에게 키스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늘 미안해."
"헛소리."
스스로에게 맹세했다. 찰스의 이상에 동조하지 못하던 자신 따위 버리겠다고. 그가 살 수만 있다면,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그의 소원대로 결코 떠나는 일 없이 그와 함께 하겠노라고. 그의 연인, 동료, 반려, 혹은 그 무엇도 못 되더라도 반드시 그의 곁에 붙어서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꼭 지켜내고야 말겠다고. 이번 한 번만, 단 한 번만 운명이 자신을 향해 호의를 베풀어 준다면 그 한 번의 호의로 영혼을 팔겠노라고. 그리고 그 맹세의 대가가 바로 이렇게 눈 앞에서 숨쉬고 있다. 그의 다리는 죽었지만, 어쨌건 그는 살아있지 않은가.
샤워하기 위한 준비를 마친 다음 욕실 밖으로 나갔다. 가정부가 준비한 아침을 들여오고 저택의 각 전화기를 체크한다. 간밤에 아무 일 없었는지 얘기를 듣고 추가로 살펴야 할 보안 사항이 있으면 그걸 검토한다. 비서와 이야기하여 하루의 일정을 숙지하고 위험 지역은 없을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논한다. 이제는 익숙한 일과가 되어 버린 일이다. 그를 위해서라면, 그를 지키기 위해서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