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이 시원스레 대답한다. 그 머리에 얹힌 붉은 헬멧을 실로 원망어린 표정으로 바라보던 찰스는, 일부러 잘 들리게 기침을 해댄 후 할 수 있는 한 가장 강경하게 말했다.
"난 추워."
"이런."
"정말 춥다고, 감기 걸리겠어!"
사실은 드러나 있는 얼굴만 차가왔지만, 그래도 지금 여기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이런 엄살 따위 얼마든지 부릴 수 있었다. 미합중국의 국보, 바다를 바라보고 선 자유의 여신상 머리 위에 둥둥 떠서 바라보는 바다 풍경이야 아주 멋지긴 했지만, 히말라야 산양가죽과 백곰 가죽에 둘둘 말린 채 밍크 귀마개까지 쓰고 국제적 테러리스트 에릭 M. 렌셔의 품에 안겨 - 그것도 공주님 안기로! - 있다는 지금의 상황은 전혀 유쾌하지 않았다.
"춥다니, 나름 성의껏 준비했지만 부족했나 보군. 뭔가 따뜻한 거라도 줄까?"
"그보다는 땅에 내려가고 싶..."
바로 입 밖으로 나오려던 말이 쑥 들어갔다. 찰스를 바라보는 청회색 눈동자는 더없이 다정했지만, 지금 이 남자가 손가락 하나만 구부리면 어떤 참화가 벌어질지, 찰스는 아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새해 해맞이를 함께 갈 생각 없나?'
그 말을 꺼낼 때만 해도 그런 비열한 협박을 가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미안, 에릭. 자네 부하들이 저지른 일 때문에 좀 바쁜 거 알지 않나.'
'미안하지만 찰스, 이건 부탁이나 문의가 아니야. 문장은 의문문이지만.'
'...무슨 소린가.'
에릭은 가볍게 웃으며 설명했다.
'뉴욕 해변의 그 아가씨 말야. 허리가 좀 뻣뻣해 보여서 굽혀줄까 하고 있는데.'
'설마 진담은 아니겠지?'
'난 진지해. 뭣하면 핀업걸 포즈를 취해줄 수도 있네.'
'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붉은 투구 속에서 남자의 푸른 눈이 빛났다. 욱식동물을 연상시키는 가지런한 흰 이가 드러났고, 제법 '미소'라 부를 수 있을 법 하지만 동시에 어찌 보면 이를 갈아붙이는 듯한 표정을 하고 남자는 당당히 말하는 것이었다.
'자네와 시간을 보내겠다는 것 뿐일세. 뭣하면 국회의사당 골조도 같이 구부려 줄까?'
더이상 저항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만족하나?"
"뭘?"
"지금 이거!"
찰스의 등과 무릎을 받치고 있는 남자의 팔에 새삼 힘이 들어간다. 무겁지도 않은지 모피에 둘러싸인 찰스를 더 바짝 안아올린 남자는 거의 키스라도 할듯 바짝 입을 대고, 따스한 입김이 느껴질 정도의 거리에서 마음에 새기듯 찬찬히 속삭인다.
"오, 그럼. 물론이지."
그리고는 할 말을 잃은 찰스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를 하는 것이었다.
그 입술이 맞닿은 순간, 붉게 달아올라 있던 수평선 너머에서 첫 햇살이 비치기 시작했다. 황금색 햇살에 눈이 쏘여 그런지, 아니면 그저 너무나 오랜만에 맞댄 입술이 민망해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건 찰스는 제대로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어 질끈 감아 버렸다. 그 잘난 히말라야 산양 모피와 백곰 모피 - 워싱턴 협약이 어떻게 되었더라?! - 에 두 팔이 휘휘 감겨 둘러싸여 있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었다면, 두 팔이 다 자유로웠다면 틀림없이 이 남자의 어깨를 붙들고 더 깊이 키스해 버렸으리라.
키스가 끝났고, 1975년 1월 1일의 햇볕을 받으며 남자가 중얼거렸다.
"새해 복 많이 받아, 찰스."
"...자네도."
서로에게 복을 빌어주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생각할 수 없었다.
햇볕은 찬란했고, 공기는 싸늘했고, 바닷바람은 날카로웠고, 장소는 지나치게 엉뚱했지만, 어쨌건 이 날은 그 뒤로 오랫동안 두 사람의 기억에 남아 있었다.
처음엔 행크가 두고 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카드에 둘린 작고 섬세한 리본을 본 찰스는 생각을 바꾸었다. 원단 공돌이인 행크가 크리스마스가 되었다고 해서 이런 품위있는 아이보리빛 종이에 흑녹색과 적자색 줄무늬가 사선으로 박힌 세련된 실크 리본을 매 놓을 것 같지도 않았고, 더군다나 거기 기품있게 밀랍 인장을 찍을 것 같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비스트' 형태가 된 행크의 손가락으로 이런 섬세한 매듭맺기 작업을 해낼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아 보였다. 물론 핀셋을 들고라면 깔끔하게 해내겠지만.
게다가 그 옆의 작은 미니트리 센스만 해도 그렇다. 흔히 볼 수 있는 플라스틱 모조품이 아니라 실제 작은 전나무의 끝 부분을 잘라 깔끔히 잘 다듬어서 작은 도자기 화분에 담아둔 고급품이었다. 게다가 가지에는 아마도 초콜렛 봉봉일 듯한 작은 꾸러미가 금박지에 포장된 채 은색 리본에 매달려 흔들리고 있다. 손가락으로 잠시 그 반짝이는 "열매"를 건드리던 찰스는 신중한 손길로 포장 하나를 풀어 보았다.
"...맙소사."
나타난 것은 예상대로 초콜렛 봉봉이었지만, 거기 찍힌 마크는 찰스의 예상을 벗어나 있었다. 드보브 에 갈레, 르와얄. 설마 싶어 두어개 더 풀어보았지만 백합 형태의 것도, 위에 크림이 얹힌 것도, 분명 찰스가 매우 좋아는 하지만 요즘 들어서는 거의 먹지 못했던 그 맛있는 봉봉이 맞다.
"대체 누가..."
한동안 손에 초콜렛을 들고 유심히 바라보던 찰스는, 결심한 듯 봉봉을 입에 가져가 한 입 물었다. 부드러운 감촉과 함께 따라오는 씁쓸하고도 달콤한 맛, 깊은 풍미와 함께 녹아나오는 달콤한 크림, 레이븐이 처음 이 초콜렛의 가격을 알고는 휘둥그레 뜬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어떻게 그런 데 그런 돈을 쓸 수 있어?!' 책망이나 비난이라기보다는 순수한 경악에 가까운 질문이었지.
"마음에 드는 것 같아 다행이군."
커튼이 흔들렸다. 찰스는 조금 놀랐지만, 곧 이해하고는 미소지었다. 능력를 사용하여 기척을 파악하는 일이 너무 익숙해지면, 이렇게 "읽을 수 없는" 사람의 기척에 둔감해진다는 단점이 있다. 그 멍청해 보이는 헬멧을 벗은 남자가 어딘가 굳은 듯한 얼굴로 찰스 쪽을 향해 다가오다가, 미소를 보고는 약간 누그러진 얼굴을 했다.
"자네였나."
"몰랐던 것처럼 말하는군."
"정말 몰랐네."
"아무튼 내 작은 선물이야."
크리스마스 카드와 미니 트리, 그리고 봉봉. 차갑게만 보이는 이 남자와는 영 어울리지 않는 조합의 선물이다. 잠시 트리를 바라보던 찰스가 옛 추억을 떠올리고 피식 웃었다. 이 저택에서 훈련하던 시절, 바구니에 담겨 있던 같은 메이커의 다크초콜렛을 아무것도 모른 채 전부 먹어치운 에릭은 그 사태를 알아채고 경악한 레이븐에게 꽤 아프게 등짝을 얻어맞았던 것이다.
"왜 웃나?"
트리와 찰스를 번갈아 보며 약간 신경질적으로 묻는 걸 보니 이미 에릭도 찰스가 왜 웃는지 짐작하고 있는 듯 싶었다.
"아니, 그냥 옛 생각이 나서."
"그렇게 옛날은 아니지."
이 저택에 레이븐이 있던 시절, 습관대로 푹신한 소파에 편히 앉아 뒹굴거리는 레이븐 옆에는 에릭이 앉아서 책을 읽거나 사과를 깎곤 했었다. 꼭 그때같은 걸음으로 책장 쪽으로 다가가 에릭이 예전에 즐겨 읽곤 하던 가죽 장정의 책을 빼든다. 책표지에 얹힌 가느다란 손가락과 마른 손등을 본 순간, 찰스는 기묘한 충동에 사로잡혀 그만 툭 내뱉듯 말하고 말았다.
"자네 그거 아나?"
"뭘?"
"자네가 그럴 때마다, 그 손등에 입을 맞추고 싶었지."
책을 든 남자는 미동도 하지 않았고, 그저 시선만 찰스에게 옮겨 한참을 빤히 응시했다. 그 눈동자 안에서 흔들리는 감정들을 바라보며, 찰스는 계속 말을 이었다.
"여기서 자네가 소파에 앉아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내 드보브 에 갈레를 작살낼 때 특히 그랬지."
"아직도 그걸 기억하고 있었나."
"뭐 자네만큼이나 기억했을라구."
여전히 투명하고 신성하리만치 매끄러운 목소리가 그 붉은 입술에서 흘러나온다.
"그거 아나, 에릭? 사실 레이븐이 화낼 걸 알고 있었지만, 초컬릿 포장을 까는 손가락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말릴 생각도 못 했어."
"......그래?"
청회색 눈동자가 새파란 눈동자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장신의 남자는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휠체어에 앉은 남자는 마치 투명한 유리창 속을 들여다 보듯 그 눈동자 너머, 에릭의 뇌에 떠오른 생각들을 읽어낼 수 있었다.
'아직도 그런가? 나 때문에 그런 일을 겪고도, 아직도?'
찰스는 대답하지 않고 손을 움직였다. 휠체어는 부드럽게 움직여, 책창 앞에 기댄 남자 바로 앞까지 다가간다. 거의 무릎이 맞닿을 정도로 바짝 다가선 찰스가, 상대의 마음에 한 자 한 자 새기려는 듯 또릿하게 천천히 말한다.
"에릭, 우리 사이는 이제 변했어."
남자의 표정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찰스는 미묘하게 흔들린 그의 눈을 보았고, 그에게서 퍼져나오는 깊은 실망과 상실감을 함께 느꼈다.
"자네는 매그니토고, 나는 프로페서 X지."
"그렇지."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찰스의 말에 동의한다기보다 스스로에게 지금 그 말을 납득시키기 위한 동작이었다. 그리고 찰스는, 손을 뻗어 그런 그의 손을 잡으며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성의를 담아 말했다.
"다만 자네가 나를 찰스라고 불러주는 한,"
이 의심많은 남자가, 이 말만큼은 똑바로 받아들이고 믿어주기를 빌며.
"나도 자네를 에릭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붙든 손을 가져와 손등에 부드럽게 입맞추었다. 올려다보자 남자의 눈가가 붉게 변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누구보다도 냉혹하고 비정해 보이는 주제에, 실제로는 더없이 여린 사람이었다.
어깨에 손이 얹혔다. 천천히 얼굴을 가까이 가져온 남자가 마치 두려워 견딜 수 없다는 듯 불안한 눈으로 찰스에게 동의를 구했고, 찰스는 손을 뻗어 그 입술에 입맞추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오랜만의 키스를 끝낸 에릭이 '너무 달아.' 라고 불만섞인 목소리로 소감을 말했고, 찰스는 웃음소리로 화답했다.
"메리 크리스마스, 에릭."
"메리 크리스마스, 찰스."
놀랍게도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웨스트 체스터의 성탄절이 이제 막 시작되었다.
<END>
1. 한국 시간으로는 26일 새벽 2시 35분입니다만, 미국 뉴욕 주 시간으로는 25일 오호 12시 35분입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2. 키노하양이 말해준 소재인 "리본"과 스칼렛위치님이 얘기해 주신 소재 "트리"를 조합하여 만들어 보았습니다.
3. 로맨틱 코미디처럼 쓰고 싶었는데 이 둘이 심각해져 버렸네요.
4. 모두 기쁜 성탄 되셨길 바라며, 새해에도 복 많이 받으시길 기원합니다.
5. 덧. 드보브 에 갈레는 한국 청담동에도 매장이 있지만 비추입니다. 뉴욕에 비해 너무 비싸요! 어떤 초컬릿은 두 배 차이까지 나네요;
- AU입니다.
- 이번 동네 페스타의 신간이 될 예정입니다.
- 연쇄살인, 유혈 예정, 찰스가 많이 힘들어 합니다.
- 지옥에서의 일주일 - 7일 전
본인이 생각하기에, 찰스 프란시스 자비에가 정체 불명의 남성에게 스토킹을 당할 이유 따위는 없었다. 설령 스토커가 여자라 해도 다를 것은 없다. 대학을 졸업하고 당연한 수순인 듯 대학원을 갔고, 학위를 받아 이 곳 미네소타주의 작은 대학에서 교수 자리를 구해 여동생 레이븐과 함께 조용히 지내고 있었다. 언제나 기운차게 잔소리를 날리곤 하던 레이븐은 대학 연구소 소속이었던 행크와 결혼했고, 그녀가 떠난 뒤 찰스는 조용한 독신 생활에 익숙해진 채 학교와 집 사이를 왕복하며 생활하고 있었던 것이다. 취미라고 해 봐야 독서가 고작이었고, 학교 동료와 가끔 한잔 하는 정도 외에는 별다른 교류활동도 없었다. 정해진 데이트 상대도 없었는데, 그건 반쯤은 체념하고 있던 일이었다. 몇년 전, 주정뱅이가 모는 픽업 트럭에 치어 영영 다리를 절게 된 뒤로 굳이 바깥에서 적극적으로 사람을 찾아 돌아다닐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이다. 바로 그 사고가 지금껏 그의 조용했던 인생에 가장 거대했던 사건이었다.
그 외에는, 가끔 스스로가 돌아보아도 믿겨지지 않을만큼 조용하고 수동적인 삶을 살아왔고, 찰스는 그에 제법 만족하며 지내고 있었다. 가끔 작은 거실에 혼자 앉아 위스키 스트레이트를 한 잔 하고 있노라면 수다스럽고 활기찬 레이븐의 잔소리, 상대적으로 수줍어 보이는 행크의 겸연쩍은 웃음, 그리고 센스나쁜 농담이 떠오르며 그 모두가 부재한 이 공간이 한없이 어색해지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지낼만 한 삶이었다. 적어도 스토커 일만 아니라면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대체 왜 누군가가 이런 식으로 찰스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목적조차 알 수 없다는 것이 더 두려운 점이다. 처음 퇴근길에 묘하게 따라붙는 인기척을 느낀 이래, 낯모를 남자의 시선은 절대 찰스의 주변을 떠나지 않았다. 돈을 노리는 강도라고 보기엔 지나치게 오랫동안 따라다니기만 하는데다, 찰스 자신이 별로 부자도 아니다. 원한이라고 생각하는 게 제일 빠르겠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찰스가 이제껏 저 정도로 상대가 집요하게 달라붙을 만 한 사건을 일으키거나 원한을 산 기억도 없다. 대학에서도 그는 적극적으로 나서거나 대학 행정에 깊이 개입하는 타입이 아니었고, 그저 주어진 일을 조용히 해 내는 사람이었다.
흔히 스토커가 붙는 가장 흔한 이유라면 성적인 집착 혹은 욕망이겠지만, 오, 맙소사. 그거야말로 가장 찰스와 연관이 어없는 일이었다. 자신은 남자고 - 설령 상대가 게이라고 해도 - 외견적으로도 별로 볼품은 없었으니까. 작은 키에 보통의 몸집, 푸른 눈을 칭찬해 주는 사람은 있었지만 고집스러워 보이는 코와 입매 등 별반 대단할 것 없는 외모를 지였던 것이다. 게다가 다리까지 전다.
- 오빠, 진정해. 전화선 상태가 너무 안 좋아. 조금만 빨리 말하면 막 지직거려.
찰스는 수화기를 고쳐 잡고 한숨을 내쉬었다. 유일한 가족이자 믿고 상담할 만한 친구랄 수 있는 레이븐은 행크와 함께 너무나 먼 곳으로 이사가 있었다.
"미안해, 레이븐. 별로 걱정할 건 아니고..."
- 아니 왜 오빠가 미안해 하는데? 잘 안 들리는 것 뿐이야. 제발 조금만 천천히 말해 줘.
찰스는 잠시 망설였다. 자신의 말을 믿어 주고 지지해 줄 유일한 가족이다. 비록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부모님이 입양해 온 후 서로를 믿으며 함께 자랐으니까.
"레이븐, 어쨌건 난...난 무서워."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모두 얘기하지는 못했다. 레이븐은 임신 4개월 째였고, 이제 간신히 지독했던 입덧이 지나 체력을 회복하는 중이었다. 아이의 이름을 프란시스 아니면 프란시스카로 붙이겠다며 한창 출산 준비를 하느라 정신없는 그녀에게 어제의 '침입'이나 신문 기사 등의 끔찍한 얘기를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 오, 찰스.
레이븐의 목소리는 다정했지만, 찰스는 그 목소리에 숨길 수 없는 피로가 담겨 있음을 알아챘다.
"미안해, 너도 힘들 텐데."
- 아냐. 전혀 아니야 찰스. 어, 내 목소리가 피곤하게 들렸다면 그건 다 빌어먹을 직장 때문이야. 임산부한테 눈치나 주는 직장 따위 망해버렸으면 좋겠는데. 아무튼 내 말 잘 들어, 오빠. 너무 무서워 하지만 말고, 정 문제가 있다 싶으면 경찰에게 연락해 봐.
찰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이미 얼마 전, 괴한이 자꾸 어른거린다는 이유로 경찰을 부른 적이 있었다. 꽤 심드렁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리던 경찰은 다니는 길을 바꿔보라는 제안과 함께, 어쨌건 되도록 찰스의 집 앞을 지나도록 순찰 경로를 잡아보겠다고 했었다.
계속 창 밖만 바라보고 사는 것은 아니었으니 과연 그들이 그래 주었나 제대로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어쨌건 찰스에게 중요한 일은 그 괴한이 조금의 동요도 없이 계속 자신을 추적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 찰스?
"어, 알겠어, 레이븐. 경찰에 얘기해 볼게."
그래도 레이븐에게 그 얘기를 할 수는 없다. 이미 그녀 자신의 일만으로도 충분히 부담이 될 것이다.
"늦은 시간까지 미안해, 피곤하지?"
- 오, 아냐. 그냥 오늘 따라 조금 지쳤을 뿐이야. 찰스, 정 걱정되면... 내가 행크에게 말해볼까? 그... 잠시 여기서 지내도 괜찮을 거야.
반가운 제안이었지만 찰스는 꾹 참고 고개를 저었다.
"아냐 레이븐, 너무 걱정하지 마. 별 일 아닐 테니까."
억지 웃음과 함께 인사를 나누고는 전화를 끊었지만, 별 일 아닐 리 없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찰스가 더 잘 알고 있었다. 솔직히 레이븐이 오라는 말만 해 준다면 달려가고 싶다. 하지만 이 곳에는 그의 직장이 있었고, 학생들의 시험 기간이 얼마 남지도 않았다. 급박하게 휴가를 낼 상황도 아니었고, 무엇보다도 잠시 떠나 있다고 해서 사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 가장 큰 문제였다.
"...맙소사."
전화를 끊은 찰스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창 너머 뜨락 건너, 가로등 옆에 사람 그림자가 어른거렸던 것이다. 찰스는 급히 거실에 커튼을 친 다음, 침실로 들어가 문을 단단히 잠궜다. 총을 머리맡에 두고 이불 속에 들어가 두려움에 떨며 어떻게든 별 일 아니라고, 안전할 거라고, 아무도 침입하지 않을 거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며 잠들기 위해 애썼다.
오래 된 나무 마루에 따로 카펫을 깔지 않은 것은 약간의 결벽증 때문이었다.
찰스는 오랜 세월로 인해 원래의 광택은 사라졌지만, 그래도 적절히 윤기가 흐르는 밤나무 재질의 마루 바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다갈색의 목재 위에 엇비슷한 색의 액체가 퍼졌고,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서야 그것이 이미 산산이 부서져 버린 머그컵 속에 조금 전까지 담겨 있던 커피였음을 깨닫는다. 입술이 바짝 마르고 그 안의 혀가 굳은 듯 저림에도, 그는 움직일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못박힌 채 바닥만을 바라보고 있다.
모든 감각이 정신없이 예민해진다. 말라 갈라진 입술과 어울리지 않게 축축한 실내의 공기, 꼭 닫아 두었음에도 어딘가에서 흘러온 밤 바람에는 차가운 비 냄새가 섞여 있다. 바람에 휘말린 바깥 나무들의 소리에 정신이 든 찰스는 조금 전 자신이 본 것의 '의미'를 생각하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싸늘하게 식은 피부 위에 식은땀이 맺히고, 지팡이를 짚은 손이 떨려 온다. 보안창이 붙은 젖빛 유리창에는 커튼이 쳐져 있어 밖이 보이지는 않지만, 찰스는 그 뒤에 무엇이 비칠지 알고 있었다.
또 한번의 낙뢰, 번득이는 창백한 빛은 어떤 자비심도 없이 창문에 섬짓한 실루엣을 찍어냈다. 남자, 아마도 창가에 바짝 붙어 이 안을 들여다 보는 괴한의 그림자를.
심장이 튀어올랐다. 입술이 절로 떨려 왔다. 침입해 들어오려는 것인가? 강도? 아니, 아니라는 걸 안다. 비록 우레가 울림과 동시에 바닥에 비친 그림자를 보고 잔을 떨어트렸다고 해도 그 소음이 저 괴한의 귀에 들리지 않았을 턱이 없는 것이다. 찰스는 이를 악물었다. 그다. 지난 2주간 간간이 희미한 그림자로 배회하던 그 남자다. 언젠가부터 늘 보이지 않는 시선을 이 쪽에 붙이고, 대학의 카페테리아에서, 서점에서, 골목에서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면 어느새 슬며시 사라지던 그 그림자의 주인이다. 간혹 걸려오는 대답 없는 전화, 아침이면 슬그머니 골목 가로 사라지던 모습.
문득 떠오른 사실에, 찰스는 입술을 짓물었다. 침실로 돌아가면 총이 있다. 지팡이를 짚은 몸이라고 해도 그 총을 들 수만 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서둘러 움직이려던 찰스의 뇌리에 절망적인 생각이 엄습했다.
- 저 자가 무장이라도 하고 있으면 어쩔 셈이지?
이를 악물고 최대한 그 불길한 생각을 떨쳐버리기 위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창 밖에서는 이 안이 보이지 않는다. 놈은 창 밖에 서 있고 이 곳 불은 꺼져 있지. 내가 움직인다 해도 아무것도 알아챌 수 없을 거야.
다시 한 번 번개가 번쩍였고, 창문 가에는 이제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찰스는 최대한 빨리 움직였다. 지팡이가 마룻바닥에 거칠게 부딪혔지만 그런 걸 신경쓸 여유 따윈 없었다. 침대로 달려가 몸을 던지다시피 하고 손을 뻗어 작은 테이블 밑 서랍에 넣어 둔 권총을 꺼냈다. 레이븐이 가져왔을 때엔 손사래를 쳤던 물건이지만 지금 믿을 만한 것은 그것밖에 없었다.
땀에 젖은 손으로 권총을 들고 한참이 지나서야 안전 장치가 걸려 있음을 깨달았다. 서둘러 안전장치를 풀고 몸을 옹송그리며 공이를 당겼다. 언제건 방아쇠만 당기면 총이 발사될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찰스는 전혀 안심할 수가 없었다.
그 뒤로 시간이 얼마가 흘렀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단 몇 분도 몇 시간처럼 느껴졌고, 그런 순간이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만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거센 바람이 창문을 스칠 때마다 찰스는 움칫거리며 총구를 그 쪽으로 돌리곤 했다. 폭풍이 가라앉고 마침내 창문이 새벽빛으로 부옇게 물들 때 쯤에야 찰스는 하얗게 굳은 손에서 간신히 권총을 떼어낼 수 있었다. 공이를 원래대로 돌려 놓고 안전장치를 잠근다. 하지만 다시 서랍에는 넣지 않은 채, 찰스는 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가 몸을 오그렸다. 몹시 지쳤음에도 한참동안 잠이 오지 않았다.
몇시간 후, 알람 덕에 눈을 뜬 찰스는 새벽의 악몽 같은 사건을 떠올리고 전율했다. 그러나 그가 진정으로 두려움을 느꼈던 것은 그 몇분 뒤였다. 마루에 나가 현관문 쪽으로 조심스레 다가갔을 때, 평소와 달리 현관 문 밑으로 얇은 신문 한 장이 밀려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바로 며칠 전 기사가 실려 있었다.
- 또다시, 이번엔 여교사.
찰스는 신문지를 떨어트렸다. 비가 그친지 한참 되었지만 문 안의 신문지는 아직까지 축축히 젖어 있었고, 그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단 한 가지일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그 남자'로 부터의 메시지다.
- 계속
짧게 짧게 이어질 겁니다.
원제는 How deep is your love였으나, 스토리를 다 짜 보고 제목을 더 어울리는 것으로 바꾸었습니다.
수위는 성적으로는 전연령가. 하지만 다른 의미로 15세 이상 혹은 성인용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1. 수량조사는 간단히 구입 예정 권수를 덧글로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 통판하실 분들도 간단히 남겨주시면 수량 예측에 큰 도움이 됩니다. 여기서 나오는 통판 수량은 따로 빼 놓을 예정입니다.
3. 12일까지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샘플 텍스트입니다.
"등록법을 반대하신다는 겁니까?"
"저는 우리 국민들이 어떤 이유로건 '구별' 되길 바라지 않습니다. 그것이 피부색이건 성별이건 돌연변이 여부건 간에 그들은 모두 성실하게 하루를 살아가는 국민입니다."
"그렇습니다만 자비에 의원님, 범죄를 저지르는 뮤턴트들에 대해 따로 대책이 없다는 지적이 있는데요."
"뮤턴트만 범죄를 저지르는 게 아닙니다. 범죄에 대한 방지책은 우리 모두가 고민해야 할 문제죠. '함께' 말입니다."
'함께' 라는 말에 방점이 찍혀 있다는 것을 누구나 느낄 수 있었다. 계속되는 의정활동으로 약간 창백해진 얼굴을 꿋꿋이 들고 답하던 찰스 자비에는 이제 질문은 끝이라는 뜻으로 손을 들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럼에도 쏟아지는 기자들의 질문과 다가오는 마이크를 밀어내며 경호원의 도움을 받아 어떻게든 앞으로 다가가려던 움직임은 풍채 좋은 한 남성에 의해 막혔다.
"의원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질문은 끝났는데요."
짧게 답하며 고개를 든 자비에 의원의 시선이 그 남자의 것과 얽혔다. 묵묵히 자비에를 내려다 보던 남자의 입매가 꾹 눌렸고, 그를 바라보던 의원은 서서히 경악에 찬 얼굴이 되어 입을 벌렸다. 의원이 손을 들어 남자의 어깨를 붙든다. 심상치 않은 기색에 의원 주변의 기자들을 막던 경호원이 고개를 돌려 남자 쪽으로 손을 뻗는다. 남자가 손을 올렸고, 총을 발견한 누군가가 비명을 지르려 했다. 시간은 끔찍하게 느리게 흘렀고, 의원이 잠깐 숨을 들이키고 뭔가를 말하려는 순간 총성이 울렸다.
"맙소사, 에릭!"
다가온다. 한 발로 뛰다시피 해서 다가온 에릭의 허벅지에는 엄청난 상처가 나 있다. 일반적인 총상과 다르다. 울컥 피가 솟아나오는 것 보고서야 찰스는 하얗게 질려 손을 내밀었다. 어서, 어서 지혈하지 않으면 저 출혈량으로는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한발 다가온 에릭은 그대로 무너져 찰스의 온 몸을 끌어안았다. 남자가 힘겹게 숨을 내쉰다. 단 한 순간 모든 것이 악몽으로 변해버렸는데, 에릭이 그의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막을 수가...찰스, 막을 수가 없어."
"무슨 소리야, 에릭!"
"이 총알, 막을 수가..."
중얼거리던 에릭이 양 팔로 간신히 의자를 짚고 몸을 떼는 순간,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다시 한번 총성이 울린 것이다. 찰스의 눈앞에서 에릭의 어깨가 붉게 물들었다. 남자의 어깨에 박힌 총알은 몸 안에서 파열되며 큰 상처를 남겼고, 뜨거운 피가 찰스의 얼굴과 몸에 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자를 붙들고 있던 에릭의 팔은 움직이지 않는다. 한쪽 팔은 불가항력으로 인해 아래로 늘어졌지만, 다른 팔은 힘껏 버티고 서서 이름 모를 저격자들의 시야에서 찰스를 가리고 있다.
팔을 뻗었다. 눈을 크게 뜬 채 피투성이가 된 에릭의 몸을 끌어안은 찰스는 그대로 의식을 확장했다. 순간 모든 것이 멎었다.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던 사람들도, 달려가던 사람들도, 손가락으로 에릭 쪽을 가리키며 어딘가 외치던 사람들도, 사방에서 이 쪽을 노리던 저격자들과 총성을 향해 달려가던 경호원들까지도 모두 멈춰섰다. 마치 영화 속의 정지된 장면같은 광경이었지만, 모든것이 멈춰 있는 화면과는 달리 다른 모든 것들은 움직이고 있었다. 분수에서 흩날리는 물방울, 사람들의 머리칼을 스치는 바람, 그리고 찰스의 옷에까지 뜨겁게 번져가는 에릭의 피.
에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해해."
분노에 대해 자신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많지 않을 것이다. 격노, 폭발, 때로는 하지않을 수 없는 파괴행동. 이제껏 참고 참고 또 관대하게 참아온 찰스로서는 더욱 터트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겠지.
"최악이지?"
"멋진 최악이지."
찰스는 에릭을 바라보았다.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 에릭 렌셔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기왕이면 좀더 폭발시켰으면 좋았을 거야. 돌연변이 대표로서 말이지." 찰스가 쓴웃음을 지으며 양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래, 사실 그래서야."
"......"
"모두 한 마음으로 외치고 있었어. 두려움에 가득차서 말이야. '괴물!'이라고."
"보인다는 건 괴로운 일이군."
에릭은 조용히 찰스의 손에 손을 가져갔다. 손가락 사이에 손가락을 끼우고 조용히 얽는다. 그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찰스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천천히 말해주었다. 그가 동의할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 부러 얘기하는 것이다.
"그만두고 싶으면 말만 해. 인간들은 지금의 지위를 누릴 자격이 없어."
"오, 에릭-"
"이전에 얘기했잖아. 그들은 어리석어."
손을 단단히 얽어 온다. 찰스는 눈을 감고 에릭의 체온을 느끼며 숨을 골랐다. 고마운 친구, 언제나 힘들 때마다 악역을 자처해주는 이가 있다는 건 괴롭고도 기쁜 일이다. 그리고 그 유혹을 이겨낼 기회를 동시에 주는 것이다. 이렇듯 늘 기대를 배신하는 이에게.
현재 블로그에는 3편까지 올라와 있으며, 나머지 편들은 행사 이후 20일에 한꺼번에 다시 공개할 예정입니다.
- 정치계로 진출한 찰스, 이상은 다르지만 그를 잠시 돕고 떠나려다 인생 틀어잡힌 에릭입니다.
- 찰스는 뮤턴트를 지지하는 정책을 펴고 있지만 자신이 돌연변이인 건 숨기고 있어요 :D
- 연작입니다. 이번 글에는 스칼렛 위치님의 리퀘스트가 들어가 있습니다.
최신식 설비가 늘어선 부엌은 과연 사용된 적은 있는지 궁금할 정도로 반짝거렸다. 리놀륨이 깔린 바닥, 기름 얼룩 하나 없는 벽의 흰 타일들을 바라본 찰스는 아마도 이 곳이 단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으리라 생각했다.
"이거 굉장한걸."
잠시 상념에 빠져 있다 고개를 돌리는데, 실로 희귀하게도 순수한 경탄에 찬 에릭의 음성이 들려 왔다. 벽면을 바라보는 그의 등에 시선이 머무른 순간 에릭의 주위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맙소사."
찰스도 경탄할 수밖에 없었다. 에릭의 눈이 향한 곳은 바로 주방 벽에 붙은 꽤 커다란 검은 패널이었다. 거기 보란듯이 진열되어 있던 각종 칼들이 부드럽게 공중에 떠올라 마치 유연하게 헤엄치는 은빛 물고기마냥 에릭의 곁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미세한 컨트롤에 따라 공중에서 움직이던 칼날들이 다시 패널에 고분고분히 걸리고, 개중 적절한 무게와 형태를 한 식칼 하나가 에릭의 손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좋은 칼이군."
대체 어디서 꺼냈는지 꽤 큼직한 생선을 도마 위에 올린 에릭이 찰스의 말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칼 끝을 꽂아 부드럽게 선을 그어주는 것만으로도 지느러미들이 간단히 떨어져 나가는 것을, 찰스는 거의 경의에 찬 눈으로 감상했다. 물고기 손질이라니, 타고난 신분과 재력 덕에 와인을 꺼내지 않는 이상 주방에 갈 일이 없던 찰스로서는 생소하기 짝이 없는 작업이었던 것이다.
칼등으로 긁어 비늘을 제거하고, 배에 칼을 꽂아넣고 매끄럽게 갈라낸 후 빼낸 칼끝으로 배를 부드럽게 짜내듯 눌러 내장 전체를 단숨에 밀어낸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은 일체의 동작 낭비 없이 물 흐르듯 이어졌고, 고개를 숙이고 선 남자의 곧은 등과 은근히 섬세한 선을 지닌 목덜미가 거기 어우러져 거의 안무적이기까지 한 아름다움을 자아내고 있었다.
흰 셔츠 밑에 드러날 듯 숨겨진 마른 등골과 잘 짜인 등, 그리고 벨트와 팬츠 밑에 숨겨져 있을 견고한 허리에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찰스는 자기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마치 예쁘장한 하녀를 둔 음흉한 주인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들어, 도저히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색한 - 아마도 찰스에게만 어색할 - 침묵을 견디다 못한 찰스는 가볍게 헛기침을 한 후 어떻게든 말을 꺼내 공백을 채워나갔다.
"그래서, 지금 만드는 건 뭐지?"
"간단한 생선구이지."
"좋군."
"마침 도미가 물 좋은 걸로 있길래 사 뒀어. 백포도주에 소금과 후추로 간을 해서 각종 향초와 함께 유산지에 싸서 굽는 거지. 괜찮을 거야."
찰스는 경이에 찬 눈으로 에릭을 바라보았다. 포도주 마개를 따던 에릭은 그 심상찮은 침묵을 느끼고는 의아한 기색으로 뒤를 돌아보았고, 마치 신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나타난 가브리엘을 바라보는 성모를 연상케 하는 찰스의 눈과 시선을 마주치고는 대체 뭐가 문제냐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자넨 정말 경이로운 사람이야. 그런 요리는 대체 어디서 배웠어?"
에릭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여기저기서. 그보다도 대체 표정이 왜 그래? 빠삐요뜨는 별로 어려운 요리도 아닌데."
"난 달걀을 삶으려다 폭파시킨 뒤부터 요리는 포기했다고."
뭔가 한소리 하려는 듯 찰스를 바라보던 에릭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손질을 마친 도미를 큼지막하게 두 토막으로 썰어 칼집을 넣고, 최고급 백포도주를 큰 스푼에 담아 접시에 담아둔 도미 위에 앞뒤로 골고루 뿌렸다. 포도주 향기가 피어오르고, 거기 소금과 후추로 적당히 밑간을 한 뒤 구석에 놓아둔다.
"공기가 황금색이 된 것 같아."
찰스의 맑은 목소리에 어쩐지 달콤한 기분이 섞인 것 같았지만 에릭은 애써 무시했다.
"최소한 20분간 곱게 놔둬야 해."
"그럼 그 사이 뭘 하지?"
"다른 재료를 준비해야지."
슬쩍 다가붙은 찰스가 뭘 뜻하고 있는지 모를리 없건만, 에릭은 냉정하게 잘라 끊으며 몸을 돌렸다. 물을 틀어 재료들을 깨끗이 씻고, 생선을 다듬은 칼은 잠시 치워 두고 좀더 굵직한 식칼을 집어든다. 뒤에서 찰스가 들으란 듯 한숨을 쉬건 말건 침착하게 감자를 깎고 양파를 까고 당근을 다듬는다.
"당근은 별로인데."
"어린애 같군 그래."
아마도 꽤 어린아이 같은 표정으로 툴툴대고 있을 것이다. 에릭은 일단 버섯을 적당한 크기로 썰어둔 다음 레몬과 감자 또한 썰어서 접시에 담아 놓고, 마지막 코스인 양파를 집어들고 썰려다 잠시 동작을 멈추었다.
"찰스?"
"...왜?"
잠시 망설이다 한숨을 푹 쉰 남자는 반쯤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왜 허리는 건드리고 그래."
그랬다. 찰스는 어느새 휠체어를 최대한 에릭에게 바짝 붙이고는 맨손을 슬그머니 들이밀어, 에릭의 허리를 매만지고 있었던 것이다.
"눈앞에서 그러고 있으니 왠지 만져보고 싶어지잖아."
가느다란 주제에 근육으로 꽉 잡혀 있는 허리에 손을 얹고 슬슬 쓸어올린다. 그 손길이 노골적인 유혹의 몸짓이라는 건 아마 세살짜리 아이라 해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봐, 경고하겠는데."
"뭘?"
어딜 봐도 웃음기가 섞여 있는 찰스의 음성에, 에릭의 눈꼬리가 미묘하게 흔들렸다.
"난 지금 양파를 손에 들고 있어."
"그래서?"
"그리고 도마 위에 놓고, 이제부터 이걸 썰 거거든."
"음?"
에릭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한 음절 한 음절을 끊어가며 명확히 발음했다. 양파를 썰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도 못하는 이 남자가 얼마나 손가락에 물 한방울 안 묻히고 산 인간인지, 혹은 얼마나 생활력 없는 인간인지 실감하면서.
"지금 그 손 치우고 내게서 떨어지지 않으면 몹시 뼈저리게 후회하게 될 거야."
"죽어도 떨어지기 싫은걸."
양파가 도마 위에 놓였다. 에릭은 가차없이 손을 휘둘렀다. 잠시 뒤, 찰스는 정신없이 눈물을 흘리며 양 손을 들고 에릭에게서 황급히 멀어졌다. "맙소사, 에릭. 이게 뭐야?"
이러면 안되지만, 에릭은 만면에 미소가 퍼지는 것을 실감했다. 당연히 에릭의 눈도 따가웠지만 아무튼 그랬다. 양파가 치한 퇴치에 효험이 있을 줄이야.
그렇게 찰스를 '퇴치' 한 후 월계수 잎을 꺼내고 로즈마리를 끊어둔다. 유산지를 충분히 잘라 감자를 배열하고 양파를 하나 하나 곱게 얹은 뒤 버섯과 당근을 올린다. 소금을 뿌려 숨을 죽여놓고서야 뒤를 돌아보는데, 눈물젖은 찰스의 파란 눈에 순간 할 말을 잃었고, 직후 이를 갈았다. 맙소사, 양파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남자 따위에게 감탄하다니! 저 놈의 눈동자는 왜 저리 쓸데없이 청명하게 파랗단 말이냐.
"에릭."
"왜 찰스."
찰스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에릭을 바라보았다. 맑은 눈동자 주위는 새빨갛게 충혈되어 있었고, 그런 그의 모습은 양파 때문이라는 것만 잊으면 거의 멜로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보일 정도로 감상적인 느낌을 자아내고 있었다. 닦아낼 생각도 하지 않은 눈물이 투명한 한줄기 선을 그리며 뺨 위로 흘러내렸고, 바로 그 눈물 방울에 젖은 붉은 입술이 천천히 말을 자아낸다.
"사랑해."
"......찰스?"
"아, 역시. 눈물을 흘리면서 이런 말을 하는 거 뭔가 굉장한 것 같아. 게다가 자네도 울고 있잖아."
"양파 때문에 말이지."
"응, 양파 때문에."
에릭은 뜨거운 눈시울을 한 채 이를 갈았다. 그리고 이 쪽으로 휠체어를 밀고 와 팔을 뻗는 찰스를 이번엔 막지 않았다. 생선이 완전히 재워질 때까지 앞으로 약 10분, 키스 두 번, 포옹 한 번, 그리고 그 틈을 타 찰스는 심술궂게도 에릭의 목덜미에 키스마크를 남겼다. "일주일 사이에는 지워지겠지?" 의원님 답지 않은 가벼운 말투는, 아직 그가 학문의 길에 몸담고 있었을 때를 상기시켰다. 잘 웃고 쾌활하게 떠들며 툭하면 여대생을 꼬시곤 하던 그 시절을.
다시 한번 키스하며, 찰스는 에릭의 긴 목을 팔로 감고 결코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 세게 입맞춤을 해 왔다. 요리하는 중만 아니라면 곧장 침실로 갔을지도 모른다. 간신히 떼어낸 에릭의 입술에는 찰스가 살짝 문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납치하길 잘 했군."
"이런 납치범에게라면 납치당할 맛 나는데?"
에릭은 웃으며 돌아섰다. 잘 재워진 생선을 얹고 그 뒤에 다시 레몬, 월계수 잎, 로즈마리를 얹는다. 백포도주와 올리브유를 한술씩 더 부어주고, 유산지를 잘 말아서 밀봉하고 오븐에 넣었다.
"이제 30분쯤 지나면 돼."
"그래, 우리에겐 30분이 있군. 충분하잖아?"
도저히 오해할래야 오해할 수 없는 세리프에, 에릭은 얼굴을 굳히고 찰스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 결연한 표정에 당황한 찰스가 뭔가 제대로 말하기도 전에,
"엇, 에릭?!"
찰스의 무릎 밑에 팔을 넣고 몸을 어깨로 받치더니 간단하게 들어올린다. 졸지에 자루마냥 어꺠 위에 실려가게 된 찰스가 뭔가 항의하기도 전에,
"그래, 30분이 있지. 가련한 인질께서는 목숨을 부지하려면 고분고분 따라주셔야겠어."
"맙소사, 내 경호원이 이런 악당이었다니!"
짐짓 하는 한탄조차 달콤한 유혹처럼 들려와, 에릭은 주저없이 방갈로의 침실을 향해 발을 옮겼다. 그래, 30분이면 충분하다. 맛있게 요리가 익어가는 동안 이 남자를 재료로 또다른 요리를 하기에 충분한 시간 아닌가 말이다. 키스가 이어졌고, 두 남자는 꽤나 조급한 손길로 서로의 옷을 벗기기 위해 최선을 다 했다. 누구의 시선도 신경쓸 필요 없고 어떤 소리를 내더라도 상관없다는 것이 이렇게나 좋은 일일 줄이야. 곧 침실의 공기가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고, 누구의 것이라고 분간하기조차 어려운 신음 소리가 방을 가득 채웠다.
그리하여, 30분 후 완성된 빠삐요뜨는 최고였다. 향긋한 생선 향기는 두 남자의 위장 뿐 아니라 후각과 시각과 촉각까지 만족시키는데 아무 부족함이 없었다. 다만, 따뜻한 상태로 먹지는 못했다. "식었지만 정말 맛있어!" 라고 찰스는 진심을 담아 열성적으로 말했지만, 에릭은 슬쩍 미간을 찌푸리고 약간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다음번에는 제대로 해 줄 테니까" 라고 말할 뿐이었다.
- 정치계로 진출한 찰스, 이상은 다르지만 그를 잠시 돕고 떠나려다 인생 틀어잡힌 에릭입니다.
- 찰스는 뮤턴트를 지지하는 정책을 펴고 있지만 자신이 돌연변이인 건 숨기고 있어요 :D
- 연작입니다. 이번 글에는 sian님의 리퀘스트가 들어가 있습니다.
그들이 다시 몰려들었다. 에릭은 시체 주위에 몰려드는 독수리들을 연상하며 최대한 그들을 막기 위해 노력했지만 소용없었다. 사방 팔방에서 마이크와 카메라가 찰스를 향해 포문을 열었고 질문이 그와 함께 발사되었다. 창백한 얼굴의 찰스는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기자들은 그 닫힌 입에서 한 마디라도 더 들어내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자비에 의원님! 이번 하원에서 결의안이 어떻게 되리라 보십니까?"
"학부모회의 성명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특수학교의 설립에 대한 의견을 들려주십시오!"
"실제 피해사례가 보고되고 있습니다."
찰스의 얼굴은 더 하얗게 질렸고, 기자들은 신이 나서 질문을 퍼부어댔다. 이미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것이다. 지금의 찰스가 어떤 의미로건 폭발하기 직전이라는 걸. 에릭은 찰스의 입가까지 마이크를 들이댄 기자를 거의 칠 뻔 했지만 간신히 분노를 억누르며 팔을 밀어냈다. 하지만 한 개의 팔을 밀어내면 두 개의 팔이 달려드는 형국이었다.
"통제되지 않은 능력은 위험한 것 아닙니까?"
"흑인 학교에서도 돌연변이 학생 입학 거부 운동이 일고 있는데 견해는?"
"각 사립학교에서 이미 돌연변이 입학 제한 교칙을 제정하고 있는데요,"
"학생의 돌연변이 여부에 대한 선별 조사가 있어야 한다는 의견에 대해서는"
휠체어를 쥔 손이 하얗다. 기자들은 전혀 모르겠지만, 입안된 법안에 대한 찰스의 반대 의지가 확고한 것은 그 자신이 바로 '돌연변이'이기 때문이다. '돌연변이 특수학교 설립안'이라고 하면 이름은 좋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사실상 "일반 학교에서의 뮤턴트 추방령"이다. 모든 청소년은 돌연변이임이 밝혀지는 즉시 일반 학교에서 나와 각 주에 세워질 '특수학교'로 전학을 가게 된다. 선택이 아닌 추방, 차별의 법안화인 것이다.
자기 아이가 돌연변이 아이들에게 피해를 받을까 두려워하던 학부모회는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돌연변이 학생들을 '어린 괴물' 쯤으로 생각하던 교육계 또한 환영했다. 의원들 또한 지역 사회에서 소수에 해당하는 돌연변이들보다는 절대다수인 '정상인'들의 편을 들고 싶어했다. 심지어 바로 얼마 전까지 그 자신들 또한 비슷한 차별을 받고 있던 흑인학교들마저 돌연변이들에게 등을 돌렸다. 찰스도 에릭도 아주 잘 알고 있다. 지금 의회에서 돌연변이의 편을 들어주는 것은 돌연변이인 자신들 뿐, 그리고 사회에서는 인권운동가들 중 소수만이 이 법안에 반대하고 있다.
"돌연변이 학생들의 신원은 비밀에 부쳐진다는데 문제가 있을까요?"
"대답해 주십시오!"
몇번이나 카메라를 향해 손을 뻗을 뻔 했다. 하지만 위험하다. 찰스 자비에 의원을 경호하는 에릭 렌셔가 '돌연변이'라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구체적으로 그의 능력이 무엇인지까지는 밝혀지지 않은 상태지만, 조금이라도 이상한 일이 발생한다면 기자들은 오히려 신이 나서 다시 한번 에릭을, 그리고 찰스를 정치적 궁지에 몰아넣을 기사들을 써댈 것이다. '언론을 향한 협박인가? 뮤턴트의 공격!' 등의 싸구려 타블로이드지같은 제목을 달고서.
에릭은 최대한 기자들의 공세를 막아내며 다른 경호원들과 함께 찰스의 진로를 확보하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휠체어는 기자들의 몸에 가로막혀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 기자들은 나름대로 필사적이었다. 찰스가 뭐라고 말하기 전에는 절대 놓아줄 기색들이 아니었다. 결국 견디지 못한 에릭이 뭔가 하려던 순간, 한 기자가 치명적인 질문을 내뱉었다.
기자들이 일순 조용해졌다. 찰스에 대한 기자들의 평판은 '입이 무거운 여우'였다. 그만큼 신중하게 절제된 화술로 자신의 의지를 부드럽게 표현하는 젊은 의원은 드물었다. 그런 그가 무려 격앙된 기색으로 외친 것이다.
"범죄자도 아닙니다. 그들은 그저 학생들입니다! 어린 학생들이요!"
"하지만 치명적인 돌연변이들이,"
푸른 눈에 번개가 흘렀다. 짓씹어 더욱 붉어진 입술 사이로 악물린 이가 보인다. 맑은 목소리에 가득한 분노가 공기를 쩌렁 울리는 순간 에릭은 가벼운 두통을 느꼈다. 설마?
"치명적이라고요! 지금 당신들의 말이 더 치명적이야!"
"의원님?"
"'돌연변이'라고 부르지 마! 그렇게 생각하지 않잖아, 당신들은!"
"찰스!" 에릭은 그만 다급한 마음에 이름을 부르며 손을 뻗었다. 찰스의 입을 막고 싶었지만 찰스가 좀더 빨랐다.
"괴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잖소!"
정적이 퍼졌다. 기자들의 놀란 시선이 찰스에게 고정되었다. 여기자 한 명이 반사적으로 입을 가렸다. 경악만큼이나 빠른 분노가 물 위의 기름방울처럼 기자들의 눈을 재빨리 뒤덮었다. 에릭은 이를 악물었다. 두통은 가상이 아니라 현실이었고, 그 진원지가 어디인지는 불보듯 뻔했다.
"찰스, 진정해!"
"그들은 인간이오! 당신들만큼이나 평범한 인간!"
다음 기자가 입을 열려는 순간 에릭은 더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TV카메라가 폭발했다. 기자의 손에서 피가 흘렀고, 비명소리가 울렸다. 녹음기들이 지직거렸고 필름이 망가졌다. 기자들이 혼란에 빠진 사이, 에릭은 찰스의 휠체어를 끌고 나갈 수는 없음을 깨닫고 허리를 숙였다.
"에릭?"
"조용히 해." 속삭임은 나지막했지만 어조는 엄격했다. "가만 있지 않으면 키스해 버릴 테니." 그리고 그대로 등과 무릎 밑에 손을 넣고 힘을 주었다.
"의원님! 지금," 프로정신이 넘치는 기자가 적어도 한 명은 있나 보군. 찰스를 안아든 에릭은 차가운 얼굴로 기자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대답했다. "의원님께는 휴식이 필요합니다. 방금 전 보셨죠? 더이상의 질문은 받지 않습니다." 그 기자는 좀더 질문을 할 듯한 태세였으나 갑자기 멍한 얼굴이 되어 가만히 둘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걸음을 옮기며 의아해 하던 에릭은 슬쩍 찰스 쪽을 내려다보았고, 이를 꽉 악문 찰스가 관자놀이에 한 손을 얹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서야 고개를 내저으며 중얼거렸다. "그래, 그래서 두통이 멈췄군."
찰스는 그대로 차에 탈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를 꽉 악물고만 있었다. 찰스를 차에 태운 에릭은 운전수에게 신호를 보냈고, 차가 조용히 블록 밖으로 미끄러질 때가 되어서야 찰스가 입을 열었다.
"에릭."
"왜."
"...미안해."
에릭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찰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하얗게 질려 있는 얼굴, 약간 흐트러진 머리카락, 그리고 짓씹은 자국이 아직도 역력한 입술. 그 푸른 눈은 너무나 비참해 보였다.
"뭐가."
"참을 수가 없었어."
폭발의 직접적 원인이 된 것은 뇌엽 절제술 얘기였다. 에릭은 찰스가 그 문제에 대해 얼마나 격노했었는지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그 자신이 인간의 뇌와 연관된 힘을 갖고 있었기에 더 민감하게 반응했기도 했겠지만, 사람을 폐인으로 만들기 십상인 그런 위험한 수술을 '아이의 미래를 위해' 선택한다는 점에서 그는 더욱 격렬한 거부반응을 보였었다.
'그건 수술이 아니야, 난 뇌엽 절제술을 당한 사람을 본 적이 있어. 에릭, 그건 정신적 도살이야!'
에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해해."
분노에 대해 자신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많지 않을 것이다. 격노, 폭발, 때로는 하지않을 수 없는 파괴행동. 이제껏 참고 참고 또 관대하게 참아온 찰스로서는 더욱 터트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겠지.
"최악이지?"
"멋진 최악이지."
찰스는 에릭을 바라보았다.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 에릭 렌셔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기왕이면 좀더 폭발시켰으면 좋았을 거야. 돌연변이 대표로서 말이지." 찰스가 쓴웃음을 지으며 양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래, 사실 그래서야."
"......"
"모두 한 마음으로 외치고 있었어. 두려움에 가득차서 말이야. '괴물!'이라고."
"보인다는 건 괴로운 일이군."
에릭은 조용히 찰스의 손에 손을 가져갔다. 손가락 사이에 손가락을 끼우고 조용히 얽는다. 그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찰스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천천히 말해주었다. 그가 동의할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 부러 얘기하는 것이다.
"그만두고 싶으면 말만 해. 인간들은 지금의 지위를 누릴 자격이 없어."
"오, 에릭-"
"이전에 얘기했잖아. 그들은 어리석어."
손을 단단히 얽어 온다. 찰스는 눈을 감고 에릭의 체온을 느끼며 숨을 골랐다. 고마운 친구, 언제나 힘들 때마다 악역을 자처해주는 이가 있다는 건 괴롭고도 기쁜 일이다. 그리고 그 유혹을 이겨낼 기회를 동시에 주는 것이다. 이렇듯 늘 기대를 배신하는 이에게.
"물론 내 답은 알고 있겠지."
"아직까지는 말이지."
에릭이 찰스의 뺨에 조용히 입맞췄다. "다시 얘기하지만, 그만두고 싶으면 말만 해." 찰스는 간신히 웃을 수 있었다. "그래, 자네 때문에라도 포기할 수가 없군."
키스를 돌려주며 찰스는 다시 한 번 웃었다. 이 쪽을 바라보는 남자의 푸른 잿빛 눈동자가 의아한 기색을 떠올린다. 팔을 둘러 등을 감고 도닥였다. 참으로 묘하지, 자네가 얼마나 위험한 사람인지 알고 있기 때문에 난 늘 버틸 수 있어.
"일단 다시 한번 노력해 보자고. 그나마 우리 편을 들어주는 사람들이 있긴 하거든."
"절멸을 위해 노력하는 어리석은 인간들 말이지."
"에릭!"
찰스는 숨을 깊이 들이쉬고 호흡을 골랐다. 기자들의 기억에는 약간의 조작을 가해 두었고 장비는 에릭이 망가뜨렸으니, 운만 좀 따라 준다면 언론은 비교적 조용할 것이다. 적어도 그 기자들이 장비를 수리하고 다시 달려들기 전에 이 어리석은 법안에 대한 대책을 생각해 두어야 한다. 아마도 어떻게든 될 것이다. 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차가 사무실에 도착했다. 찰스는 에릭을 놓아주고 앞을 응시했다. 가야 할 길이 멀었다.
<계속>
- 사실 진짜 제목으로 삼고 싶었던 것은... You can protect yourself only by protecting the others. 너무 길어서 아웃됐죠. 돌연변이 정책 및 인간들에 대한 찰스의 생각이었어요. 그 주체가 누구이건 누군가가 구분되고 차별당하는 순간 저도 당하게 되는 거죠. 으음. 뭐 그렇습니다.
- 뇌엽절제술은 1970년대쯤 가면 극히 희귀해집니다만... 한때 저게 치료법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이 호러블. 지금 병원에서 하는 것과는 많이 다릅니다. 사람 폐인되는 걸로 유명한 수술이죠.
- 그러고 보면 엑스맨 2에서 스트라이커 쥬니어의 머리 흉터를 보건대 이 짓 당한 듯...
- 정치계로 진출한 찰스, 이상은 다르지만 그를 잠시 돕고 떠나려다 인생 틀어잡힌 에릭입니다.
- 찰스는 뮤턴트를 지지하는 정책을 펴고 있지만 자신이 돌연변이인 건 숨기고 있어요 :D
- 연작입니다. 근데 이번 글에는 리퀘가 하나도 안 들어갔네요...
어떤 일은 절대 사라지지 않지만 어떤 일은 너무나 쉽게 지워진다. 보통은 사라지고 나서야 그 가치를 안다고 한다. 꼭 그렇지는 않다. 정작 사라지고 났을 때 별 것 아니라는 것을 깨닫지만, 그럼에도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는 것도 있는 것이다.
찰스는 일상 생활에 빠르게 복귀했다. "레이븐에게 엄청나게 혼났어" 라고 완전히 기가 죽은 얼굴로 어깨를 움츠리는 찰스에게 에릭은 거의 냉혹해 보이기까지 하는 얼굴로 딱 한 마디만 했다. "당연하지." 그에 대한 그의 의사는 확고해서, 그 말을 듣고 장난기를 발휘해 부러 미간을 찌푸리며 '아야!' 하는 동작을 취해보인 찰스에게 아예 덧붙이기까지 했다.
"나도 이놈의 팔만 아니었으면 한대 쳤을 거야."
물론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었기에 찰스는 크게 웃을 수 있었다.
총격은 에릭에게도 흔적을 남겼다. 허벅지와 어깨의 뼈를 고정하기 위해 철심을 박아야 했고 - 괜찮아, 나랑 어울리지 않아? - 몇개월간의 고된 재활기간을 거쳐야 했다. 찰스가 최고의 물리치료사들을 동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에릭의 어깨만은 완전히 고쳐낼 수 없었다. 그는 이제 오른팔을 어깨 위로 들어올릴 수 없게 되었고, 그 사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에릭이 퇴원하는 날, 찰스는 중요한 의결 때문에 도저히 찾아올 수 없었지만 대신 레이븐이 차를 몰고 달려와 축하해 주었다.
"나도 찰스가 못 온게 안타까우니까 그런 얼굴은 하지 말지 그래?"
"아니, 이건 그 문제가 아니야."
"뭐?"
에릭은 그걸 모르겠냐는 듯 레이븐의 얼굴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한동안 응시했다. 운전면허를 딴 지 6개월밖에 안 된 레이븐이 몰고 있는 새빨간 쐐기형 오픈카에는 민망하도록 선명한 녹색과 빨강색의 포인세티아 꽃다발이 가득했던 것이다. 금발의 늘씬한 여성이 그 한가운데 앉아 있는 것은 실로 장관이었지만, 어쨌건 에릭으로선 거기 앉는 것은 실로 무리였다.
"레이븐, 그 꽃다발 치워."
"어머, 마음에 안 들었어? 예쁘잖아. 축하의 마음을 담았는데."
화사하게 웃자 눈부신 금발이 흔들리며 빛을 발한다. 선명한 햇빛이 빨간 오픈카 주위에 흩어지는 듯한 환상이 보일 지경이었다. 에릭이 이를 악물고 말하는 것을 즐겁게 바라보는 아름다운 헤이즐빛 눈동자에는 장난기가 가득하다.
"거기 앉아가느니 차라리 걸어가겠어."
"너무해, 에릭! 사실 이건 찰스의 부탁이었는걸. 장미로 하고 싶다는 걸 간신히 말렸어. 정말이야, 물어보라고!"
십중팔구 찰스가 농담으로 말을 꺼냈다가 레이븐이 정말로 하려 드니 놀라서 말린 거겠지. 에릭은 가볍게 한숨짓고 자동차 뒤쪽을 바라보다가, 비어 있는 레이븐의 옆자리를 응시했다. 일반적인 딱딱한 자동차 좌석과는 달리 부드러운 쿠션이 갖춰져 있고, 아직도 어깨에 통증이 남아 이는 에릭을 위한 것인지 목베개가 얌전히 놓여 있다. 말로는 저래도 환자라는 점을 생각해 준 것일 테지.
"신사 양반, 빨리 결정해. 저기 봐, 잘 생긴 젊은 의사들이 이 쪽을 보는 것 같은데 내 마음이 흔들리고 있잖아."
에릭은 한숨을 푹 쉬고 차 안으로 들어갔다. 물론 차 문은 레이븐이 열어둔 터였고, 차에 탄 다음 돌아보니 정말 이 쪽을 향해 멍하니 입을 벌린 채 돌아보는 한 무리의 청년들이 눈에 들어왔다. '잘 생겼다'고 하기엔 눈 밑의 다크서클이 지나쳤지만.
"좋아, 잘 생각했어. 이제 돌아가자고."
에릭은 고개를 끄덕이며 좌석에 머리를 기댔다. 드디어 찰스 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간신히 마음이 놓였다. 깊이 숨을 내쉬고 눈을 감은 채, 신나게 재잘대는 레이븐의 수다를 들으면서 그제서야 깨달았다.
그에게 집은 이 곳 뿐이라는 걸.
그날 저녁, 웨스트체스터.
"뭐라고?" 에릭은 차가운 눈으로 찰스를 노려보며 반문했고, 찰스는 그 시선을 차마 받아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에 더 속이 뒤틀린 에릭은 다시 한번 강경하게 밀어붙였다.
"지금 그 말 다시 해 봐."
"에릭, 진정하고 들어. 이건,"
"진정하고 있어. 그러니까 다시 말해보시지."
목소리가 낮게 울려나온다. 빛깔도 온도도 얼음같은 눈동자가 찰스를 노려본다. 진정하고 있다지만 어디를 봐도 사실상 분노로 이글대고 있는 에릭 앞에서 잠시 침묵하다 숨을 들이킨 찰스가 말을 이었다.
"에릭, 이제 더이상 내 경호원 노릇을 할 필요는 없어."
"하."
"새로운 업체와 계약했어. 지금도 그들의 경호를 받고 있고. 더이상-"
"내가 필요 없다 이거지."
"에릭, 제발 이성적으로 얘기했으면 좋겠군."
에릭의 눈동자에 번개가 흘렀다. 그는 소파에서 몸을 벌떡 일으키고 곧장 찰스 바로 앞으로 다가왔다. 얼굴을 찰스의 얼굴 앞에 바짝 들이대고 눈을 바라본다. 타오르는 시선을 피하는 찰스에게 에릭이 으르렁댔다.
"찰스 프란시스 자비에, 내 눈을 봐. 내가 이성적이지 않은 걸로 보이나?"
"에릭!"
"회피하지 마. 그 놈들은 자네를 지켜낼 수 없어. 인간들은-"
"자네도 인간이야!"
"그들은 널 지킬 수 없어. 케네디 꼴이 그렇게도 나고 싶은 거야?"
"그럼 넌!" 찰스의 외침에 거실의 공기가 쩌렁 하고 울렸다. 좀처럼 언성을 높이지 않던 친구의 변모에 놀란 에릭에게 찰스는 단호하게 쏘아붙였다. "넌 어떻게 되고 싶은 건데! 나 때문에 죽고 싶어?"
"상관없어."
"내가 싫어!"
에릭의 눈이 커졌다. "나 때문에 네가 다치는 게 지긋지긋해!" 찰스는 피를 토하듯 외치며 이 쪽을 향해 뻗어오는 손을 거칠게 쳐냈고, 그러고 나서야 그것이 오른팔이었음을 깨닫고 동요했다. 아직 뻣뻣한 관절 때문에 통증을 느낀 에릭이 자기도 모르게 이맛살을 찌푸리고 짧게 신음하자 찰스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졌다.
"찰스-"
"맙소사, 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찰스의 얼굴은 어느새 들어올린 양손에 감싸여 보이지 않았지만 그 사이로 새어나오는 목소리에는 지독한 고통이 담겨 있었다.
"다 내 잘못이야-"
"왜 이래, 찰스!"
"에릭, 내가, 내 다리가 이렇게 된 건 내 잘못이야."
찰스의 팔을 붙들고 얼굴에서 손을 떼어내려던 에릭이 그대로 숨을 삼켰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찰스는 여전히 눈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말을 늘어놓았다. 목소리가 심하게 떨려 나왔고, 가끔 흐느낌 비슷한 것이 섞여 말이 흐트러졌지만 그래도 끊지 않고 계속 이야기한다.
"날 지키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건 그만둬. 내가...내가 내 행동의 결과로 불러들인 일이야, 에릭."
"찰스..."
"그리고 자네가 총에 맞은 것도 그 때문이고."
"아냐, 그건"
"지금은! 그냥 내 말을 좀 들어 줬으면 좋겠어."
천천히 손을 내린다. 붉게 달아오른 눈에는 물이 가득 고여 있었지만 결코 뺨 위로 떨어지진 않았다. 그런 얼굴을 하고, 벌개진 눈자위에 박힌 기묘할 정도로 새파란 눈이 에릭의 눈을 바라본다.
"자네가 부서져 가."
에릭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찰스의 눈만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 속으로는 지금 이 말을 막아야 한다는 외침이 울리고 있었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그가 막고 있는 걸까? 아니, 아닐 것이다.
"지금은 오른팔이야. 다음은 어디일 것 같아? 내가 다치고 죽는건 상관없어, 내 행동의 결과니까. 하지만 에릭, 자네가 다치는 건 난 견딜 수 없어. 이번에 알았어."
"그건,"
"내가 미치는 걸 보고 싶어?"
최강의 텔레파시 능력자가 미치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싶은 거야? 찰스가 속삭이듯 말했고, 에릭은 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깨닫고는 전율했다. 이미 찰스는 그를 지키기 위해 결코 하지 않던 짓을 해 버렸다. 자신이 의식을 잃고 있던 그 때, 아마도 미칠듯한 괴로움을 느꼈던 것이리라.
"에릭, 부탁해. 제발 내게서 떠나 줘. 경호만이라도 그만둬 줘, 제발."
그리고 이러한 결론을 낸 것이겠지. 에릭은 조용히 찰스 앞에 무릎을 굽혀 눈 높이를 맞췄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내밀어 지금은 무릎에 힘없이 놓인 양 손목을 붙들었다.
"에릭."
잠시 그 손목을 바라보다 찰스의 눈을 바라보았다. 의혹에 찬 듯 그의 이름을 부르는 창백한 얼굴에는 불안과 절망과 희망이 뒤죽박죽으로 섞여 있었다.
"찰스, 내 말 잘 들어."
에릭의 눈동자는 여전히 얼음같았다. 때로는 믿을 수 없을만큼 부드럽고 따스한 눈이기도 했지만, 지금만큼은 거의 냉혹하다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강한 의지과 냉정함이 그 안에 깃들어 있다.
"자네가 오해하고 있는 게 하나 있어."
붙들린 손목이 아파올 정도로 손에 힘을 가한다. 반사적으로 뿌리치기 위해 힘을 가했지만 독수리 발톱처럼 파고든 손가락들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당황한 찰스의 눈 바로 앞에 에릭의 얼굴이 다가왔다. 깜짝 놀라 눈을 감아버리는 순간, 에릭의 입술이 닫힌 눈꺼풀에 머물렀다. 그리고 바로 입술로 내려와 비집어 열고 혀가 들어온다. 키스를 마친 에릭은 찰스의 붉은 입술을 가볍게 혀로 쓸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난 널 위해 희생하고 있는 게 아냐."
"......"
"어떻게 생각하건 상관없어. 곁에 있을 거야."
찰스는 절망에 휩싸여 눈을 감았다.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지만, 동시에 그 안 깊은 곳에서는 에릭의 선언을, 그 속에 번득이는 집착과 애착을 기뻐하는 뭔가가 있었다. 소름끼치게 싫지만 동시에 부정할 수 없는 감정.
"에릭, 제발-"
"정 떼어내고 싶으면 내 뇌를 망가뜨려."
이번에는 찰스가 숨을 들이킬 차례였다. 에릭은 꽉 붙들고 있던 찰스의 두 손을 놓아준 후 이번에는 찰스의 얼굴을 붙들었다. 절대 고개를 돌릴 수 없도록 붙들고 바짝 얼굴을 들이댄 후 하나 하나 새기듯 말한다.
"그러기 전에는 꿈도 꾸지 마."
"......"
"자넨 내 거야."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찌르는 것 같은 아픔이 실제 심장을 직격했다. 그 통증에 미간을 찌푸리고 작게 신음을 내뱉자 다시 한 번 에릭의 입술이, 이번에는 목에 와닿는다. 아니, 입술이 닿은 것은 잠시일 뿐이고, 곧 그의 이가 살을 집어 노골적인 의도를 내보이며 세게 물었다. 고통에 겨운 목소리가 울리자 만족한 듯 자신이 남긴 자국을 핥고서 물러난다.
"에릭, 지금"
"사랑해."
찰스는 눈을 감았다. 지금껏 고여 있던 뜨거운 것이 간신히 뺨에 서느런 냉기를 남기며 흘러내렸다. 남자의 뜨거운 입술이 그 눈물에 닿아왔고, 그 감촉에 몸서리치며 찰스는 눈앞의 남자를 끌어안았다. 당해낼 수가 없다. 어떻게 해도 그를 당해낼 수가 없다. 할 수 있는 말은 그저 한 가지 뿐이었다.
"더 이상 다치지 마."
남자의 몸이 흔들렸다. 웃음 때문일 것이다. 그가 귀에 입술을 가져다 대고 조용히 속삭이는 말을 들으며, 찰스는 다시 한번 왈칵 눈물이 흘러나오는 것을 느꼈다.
1. 기본적으로 영화 배경입니다만 저는 영화 감상 1번밖에 못했습니다. 오류 난무할 겁니다. 그냥 AU로 쳐주세요.
2. 단편의 한 조각이니 단편이라고 이름 붙이기도 민망한 조각글이군요. 빨리 이어서 완성하겠습니다.
3. 제목은 독일어입니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합니다.
모이라는 펜 끝을 질근질근 씹으며 잠시 침묵했다.
"뭐 문제라도 있습니까?"
정중하게 물었지만, 사실 그녀가 작전 계획의 어디쯤에서 눈을 멈추고 고민에 빠졌는지는 굳이 능력을 사용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에릭을, 그 자와 직접 맞닥뜨리게 하려구요?"
"그건 에릭과 처음부터 약속했던 일입니다."
"별로 현명한 생각은 아닌 것 같아요. 교수님."
"이미 그 점에 대해서는 함께 의논해 봤어요. 그가 극복할 수 있을 거라 믿기로 했죠."
"뭘 극복하는데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일종의 비웃음까지 실려있어 나는 나도 모르게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여전히 불신에 찬 시선이 나를 마주보고 있었다.
"그는 이제 자신의 분노를 통제할 수 있어요, 모이라. 우리에겐 더 큰 목표가 있고, 에릭은 사감으로 이 작전을 어긋나게 하지는 않을 겁니다."
말하고 있는 도중에 이미 나는 그녀가 느끼고 있는 감정에 내 설득은 하등의 효과를 거두지 못하리란 사실을 확신했다. 굳이 레이븐의 독설을 빌리지 않더라도, 여성의 감정이란 내가 인식할 수 있다고 해서 임의대로 컨트롤이 가능한 그런 물건이 아니다. 차라리 감정 자체에 손을 대어 버리는 편이 조금 더 쉽지만, 그 부작용 역시 위협적이긴 매한가지라 나는 대체로 그냥 내버려 두는 편을 택하곤 했다.
"저도 그가 자기 자신을 잃을까 봐 걱정하는 건 아니예요. 차라리 그 반대지요."
"정확히 설명하시기가 어려운 거라면 제가 좀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만."
모이라가 좀더 매서운 눈으로 나를 흘겨보았지만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 말았다. 그럼 내가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을 하던지.
"에릭이 우리가 가진 카드 중 가장 강하다는 건 나도 인정해요. 하지만 이런 결정적인 상황에 투입하기엔 너무 불안정한 카드기도 하죠. 그가 이 작전 중 무슨 사고를 친다고 해도 난 별로 놀라지 않을 걸요."
"이 작전은 그를 안정적인 카드로 만들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겁니다만."
내 목소리가 뚜렷하게 무뚝뚝해졌다는 건 인정한다. 하지만 그건 에릭이 내 친구라는 사실에 앞서, 신뢰할 수 없는 자보다는 신뢰하지 않는 자에게 우선적인 책임이 있다는 내 신념 문제기도 했다. 모이라 역시 내 말투를 느낀 듯 안색이 조금 달라졌다.
"교수님은 정말로 이 작전이 끝나도 그 사람이 우리 편으로 남을 거라고 믿어요?"
"당연하죠."
"이 작전이 끝나면 더 이상 그가 우리와 함께 할 이유가 없잖아요. 처음부터 떠나려던 사람을 그 핑계로 간신히 붙들었다고 나한테 무용담처럼 자랑한 건 교수님이었어요."
"첫째로 그러니까 나는 더더욱 끝까지 에릭에게 신의를 지켜서 작전에 참여시켜야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동안 에릭도 분명히 변했다는 걸 이젠 좀 알아주지 않겠어요? 몇 번이나 말하는 거지만, 이제 에릭도 처음과는 생각이 많이 달라졌단 말입니다."
"아, 그래요? 하지만 오늘도 여전히 그의 의자는 비어 있네요."
모이라가 입술 끝을 찌그러뜨리며 펜 끝으로 빈 의자를 가리켰다. 나는 매번 모이라가 찾아올 때마다 에릭에게 이 자리에 함께 참석해 줄 것을 종용했지만 그가 그 의자에 앉아 자리를 지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는 우리를 신뢰하지 않아요."
"그건 당신들도 마찬가지죠."
당신들, 이라고 입 속으로 되뇌며 모이라가 눈썹을 치켜올리는 것이 매우 잘 보였지만 무시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 다음에 이어진 말은 무시하고 넘기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좋아요. 어쨌든 이 작전은 우리가 협력하지 않으면 시작조차 해 볼 수 없는 거니까 어쩔 수 없겠죠. 다만 이건 잊지 마세요, 교수님. 난 한 번도 그가 정말로 우리와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다고는 믿은 적이 없고, 이렇게 경고도 했어요."
나는 결국 분통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아, 모이라 여신의 신탁을 카산드라의 예언인 양 그리 겸손하게 말씀하실 것 없습니다. 어차피 그대로 이루어질 테니. 차라리 그럴 바엔 도대체 왜 그런 에릭이 진작에 배신하지 않고 지금까지 여기에 늘러붙어 있는지도 미욱한 인간에게 좀 설명해 주시지 그래요? 신들이란 항상 인간에게 수수께끼만 던지고 답을 주지 않아서 문젭니다."
"설마 그걸 몰라서 나한테 묻는 건 아니죠? 당연히 당신 때문이잖아요."
전혀 예상치 못했던 답변에 순간 멍해진 내게 모이라는 날카롭게 한 번 더 몰아쳤다.
"물론 그 역시 혼자서보다는 우리와 같이 움직이는 게 훨씬 승산이 있다는 정도는 계산하겠죠. 그런 쪽으로는 충분히 머리가 잘 돌아가는 작자니까. 하지만 결국은 당신 때문이라구요. 당신이 우리와 함께 움직이기로 했으니 그도 그렇게 하기로 한 거죠."
나는 솔직히 그 말에 대해 잘 이해가 가지 않았고, 굳이 그 아연함을 숨기지도 않았다. 서류를 챙겨들고 자리에서 일어서던 모이라가 한숨을 쉬며 나를 내려다 보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 역시 마찬가지예요. 지금 이 일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은 바로 '당신 때문에' 함께 움직이고 있다구요. 솔직히 교수님 본인이 여태까지 그걸 몰랐다는 표정으로 지금 날 올려다 보고 있는 게 좀 충격적인데, 그렇다면 당신에게 수수께끼를 하나 더 던지고 가죠. 교수님은 대체 어느 쪽을 '우리' 라고 생각하고 있죠? 교수님 본인은 대체 어디 소속이예요?"
그리고 그녀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등을 돌려 나가버렸다. 아마 그 편이 현명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나는 며칠이 지나도 그녀가 남기고 간 질문에 대답을 내놓을 수가 없었으니까. 사실 그 질문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나는 훨씬 긴 시간이 지난 후에야 깨달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