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별로 수위나 커플링은 없지만 에릭찰스에릭 분위기?
* 모처에서 리퀘를 받아서 썼던 글이죠.
* 문제는 이 뒤의 옷 벗기 체스 내기...글이 날아가서 없다는 것. 다시 써야 하나 OTL
"말도 안돼."
찰스는 질린 얼굴로 체스판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그 건너편에서, 에릭은 제법 오만해보이기까지 하는 미소를 띄우고 찰스를 바라보며 빈정거렸다.
"18전 15패. 찰스, 정말 고마워. 네 덕분에 난 그랜드마스터가 된 기분을 늘 맛보고 있거든."
"에릭, 경고하는데,"
"무슨 경고?"
찰스는 초조한 얼굴이 되어 입술을 물었다. 이럴때의 찰스는 심술궂은 고양이 같아서, 얄밉지만 대체 어떻게 할 수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당하기만 하기엔 찰스도 그간 쌓인 것이 제법 많았다.
"자꾸 그러면 자네 머릿속에 간섭해서 레이븐 옷을 훔쳐입고 테이블 위에서 캉캉춤을 추게 만들겠어."
"그 춤 스텝은 알아?"
"요는 다리만 번쩍 들면 돼. 행크가 좋아하겠네."
의외로 진지한 어조에 에릭의 얼굴에서 살짝 미소가 사라진다. 찰스는 어깨를 으쓱 하고는, '체스 말고 다른걸 좀 해 보지?' 하고 가볍게 말을 이었다. 그렇다. 어린 시절부터 남의 머리속을 드나들며 수많은 사람들을 이해하고 납득해 온 찰스 자비에라 해도 이 순간만은 그저 '어떻게든 상대를 한 번쯤 이기고 싶은 남자아이'에 불과했다. 어쩌랴, 그것이야말로 모든 '수컷'에게 자연스럽게 새겨져 있는 유전자의 명령인 것을.
"다른 거? 자네 다른 스포츠도 할 줄 알아?"
찰스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뿌듯함과 정색이 반반 섞여 있는 반짝이는 표정이었다. 주로 저런 표정이 될 때에는...
"그럼. 이래봬도 배워야 하는건 다 배웠어. 권투는 우리가 하긴 좀 무리 같지만 제법 하는 편이지. 테니스코트라면 정원 뒤쪽에 마련되어 있고 부지 내의 호수에서 수영을 해도 상관 없어. 달리기 트랙도 행크 덕에 마련되어 있고 사실은 펜싱 훈련실도 있지. 아버지가 좋아하셨거든."
"펜싱?"
"그리고 어디까지나 아버지 취미지만 지하 2층으로 내려가면 사격 훈련도 할 수 있다네."
"대체 자네 아버지라는 분은..."
"그런 걸로 그런 얘기 하지 마. 그나마 조부님이 너무 시켜서 지겹다고 승마는 제끼셨어. 일단 난 어머니와 살 때 기초 정도는 배우긴 했지만 말이야."
"말? 말이라고?"
"그래서, 어느걸 해 볼 텐가? 골라 보게, 난 뭐건 상관없거든."
그렇다. 바로 자기 자랑을 할 때다. 에릭은 어이없다는 표정이 되어 찰스를 바라보았다. 푸른 눈에 떠올라 있는 것은 명백한 자부심과 호승심.
좋아, 어떻게든 이겨 보겠다 이거지? 에릭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골라."
"아냐, 자네가 골라. 난..."
"그래, 그러면 간단하게 수영으로 하지."
"좋았어!"
에릭은 사람좋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친구. 어디 한번 해 보자고.
에릭은 양 팔을 허리에 얹고 이 쪽을 향해 헤엄쳐 오는 찰스를 감상했다. 샌님 치고는 제법 단련된 등과 허리가 볼만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샌님 티가 난다고밖에 할 수 없는 약간 펑퍼짐한 엉덩이가 꽤 귀여웠다. 그래, 뛰어나군. 하지만 책상물림들이야 어쩔 수 없지. 마침내 기슭에 도착한 찰스가 고개를 저으며 에릭에게 말한다.
"맙소사, 에릭 자네 수영 선수라도 했나?"
"아니, 그냥...필요에 따라 익혔지."
물결이 계속 움직이는 바다에서 닻을 움직이기 위해 팔을 휘두르면서도 떠 있을 수 있을 만큼 말이야. 에릭은 속으로만 그렇게 생각하고는, 한 손을 내밀어 수영복 차림의 찰스가 물 밖으로 완전히 올라오는 것을 도왔다. 역시 수영은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물방울이 햇빛을 보지 못해 지나치게 하얀 찰스의 속살을 훑으며 다시 호수로 돌아간다.
"그럼 이번엔 자네가 골라."
"...어?"
"이기고 싶어서 이러는 거 아니었어? 한 번은 내가 골랐으니 이젠 자네가 고르라구."
찰스의 얼굴에 곤혹스러운 표정이 떠오른다. 자신감 있게 웃고 있는 에릭의 얼굴을 보던 찰스가 '사격'을 골랐을 때, 에릭은 거의 폭소를 터트릴 뻔했다. 이 착한 친구야, 이기고 싶은 주제에 내가 아무것도 모를 법한 펜싱이나 승마는 건드리지도 않다니, 물러빠져도 이렇게 물러빠질 수가 있나.
하지만 굳이 그걸 지적할 필요는 느끼지 못했다는 점에서, 에릭 랜셔는 아무래도 이 상황을 자신이 즐기고 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능력 쓰지 마."
"마찬가지야. 원한다면 내 시각 쯤 조종할 수 있잖아."
"그래그래, 그럼 쏴 보자고."
에릭을 향한 권총은 쏘지 못하겠다고 한 주제에, 찰스의 라이플 사격 실력은 꽤 괜찮은 편이었다. 열 발 중 여덟 발 명중, 그중 다섯발이 9점이거나 10점이다. 아니, 이 정도면 꽤 훌륭하다. 그래, 어디까지나 아마추어로서 말이지. 에릭은 득의의 웃음을 지으며 조용히 표적을 겨눴다. 좋아, 남자의 자존심을 위해 세 발은 일부러 9점을 맞춰 주지.
"에릭."
"음?"
"나, 아주 솔직하게 한 마디만 해도 될까."
"안돼."
"......"
푸른 눈동자가 에릭의 눈을 노려본다. '내려다 본다'는 것이 이렇게 상쾌하고 기분좋은 일이라는 걸 만끽하며 에릭은 그 지나치게 푸른 눈동자를 느긋한 기분으로 응시했다.
"에릭!"
"그래, 말 해도 좋아."
'한 번이라도 좀 져 주면 안돼?' 라는 말을 할 작정이었고 실제 거의 입 밖으로 튀어나갈 뻔 했지만 찰스는 참았다. 참고 또 참았다. 그거야말로 패배를 인정하는 꼬마 떼쟁이의 말이 아니고 뭔가. 잠시 생각하던 찰스는 간신히 자신의 자존심과 그의 만족감이 한번에 충족될 수 있는 결론을 찾아내, 그것을 입에 담았다.
"그냥 체스 하자."
"좋아."
비죽이 걸린 웃음이 너무나 얄미웠지만, 이전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자네 정말 운동 잘 하는군, 굉장해."
"뭘 또."
사격장 문이 닫혔고, 그 뒤로 아주 오랫동안 열리지 않았다.
<끝>
그게 사실 한 편이 더 있었지만 뒤가 홀랑 날아갔던 고로, 여기 다시 올립니다.
머 지금 상태로도 엔딩이 나긴 나요.
솔직히 말하면 지루했다.
"자네, 이제 그만 포기하는게 어때?"
느긋한 웃음을 짓고 있는 에릭도 약간 진력난 듯 보였다.
"아냐, 한 판만 더 두자고."
"찰스."
"오늘 딱 한 판만 더."
'그래, 이게 오늘의 첫 '한 판만 더' 로군.' 에릭은 속으로만 고개를 내저었다. 이럴 때의 찰스는 놀아달라고 조르는 고집스런 강아지 같다. 이렇게 한 세판 정도 더 하고서야 물러서는 것이다. 평소에는 못 이기는 척 그러마고 했지만, 이번에는 어렵다 싶어 에릭은 살짝 장난스런 제안을 해 보기로 했다.
"그래? 그러면 좀 색다른 걸 해 보지 않겠어?"
"색다른 거?"
찰스의 푸른 눈이 이 쪽을 응시한다. 그 시선을 즐기며, 에릭은 차분히 말을 늘어놓았다.
"말 잡기 게임으로 해 보지."
"그게 뭔데."
"간단해. 봐, 체스에서 폰을 빼면 각 두 개 씩의 말이 있지? 킹과 퀸은 한 세트로 치고 말야."
찰스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중 하나를 고르는 거야. 그리고 먼저 그 말을 쓰러뜨리면..."
"쓰러뜨리면?"
에릭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자네, 설마 이 조건으로 게임을 하자고 하진 않겠지?
"옷을 하나 벗는 거지."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이 쪽을 탐색하듯 눈을 가느다랗게 뜬 찰스가 자신의 마음을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간의 관찰과 경험을 통해, 에릭은 찰스가 머리에 손을 대지 않고도 남의 마음을 읽는 정도는 쉽게 해낸다는 걸 알았다. 그렇다면, 지금 에릭이 이런 제안을 하는 이유도 잘 알겠지.
"어때?"
'설마 하진 않겠지? 누가 옷을 벗게 될지 뻔한데.' 하지만 에릭의 예상은 빗나갔다. 찰스는 아주 잠깐 미간을 찌푸리며 고민했을 뿐, 곧 쾌활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 뭐."
"찰스-"
"그거 핑계로 안 하려는 거잖아. 안 통해."
아니, 아무리 24세라고는 해도 '교수' 아닌가? 파티에서 눈 맞은 커플이나 할 법한 제안을 두고 새로운 룰이 더 재미있겠다며 눈을 반짝이고 있는 건 대체 뭔가. '대체 미국인들이란.' 에릭은 애시당초 그런 망측한 제안을 한 것이 자신이라는 사실 따위는 까맣게 잊고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