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변 이혼(...) 후 애매하게 몇 년 뒤.
* 퍼클 두 사람이 엑스멘 1, 2의 두 사람으로 진화 중인 어드메 시점
* 원작 공인의 납치 감금 전문 포지션인 프로페서X의 애환도 조금(...)

 






"자넨 여전히, 희생마 잡을 때 한 박자 머뭇거리는 버릇을 못 버렸군 그래."


무심히 중얼거린 뒤 손쉽게 찰스의 다음 수를 읽고 궁지에 몰아넣은 에릭이 체스판에서 시선을 올려 미간을 살짝 찌푸린 상대를 일별했다. 이 수 개월만의 만남이 몇 년전 '그 날' 이후로 몇 번째의 것인가를 세는 건 무의미하다. 제법 깊어진 서로의 눈가 주름만큼이나.


"알다시피 내가 은근히 나이브해서."
"버려지는 체스말 처지에도 일일이 공감하신다고?"


웃지도 않고 뻔뻔스레 대꾸했던 찰스가 에릭의 가벼운 비아냥에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딱히 긍정도 부정도 하지않고 에릭의 시선을 맞받은 그는 '매그니토'의 눈썹 끝이 미미하게 치켜 올라간 것을 보고서야 특유의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심통이 안 풀렸구만 자네."
"....팔목은?"
"아, 괜찮아. 별 것 아니네. 백주에 대담한 납치극을 시도한 악당들 치고는 결박이 영 어설펐어. 자네 솜씨에 비하면 애들 장난이지."


힐끗 지나간 셔츠 소맷부리 안의 선명한 멍울과 쓸린 자국을 놓치지 않은 매그니토의 물음에 숙적이자 친우인 프로페서X 답게 여상한 대답이 돌아온다. 기묘하게 지탱되는 그들 관계의 평행선과 교차점을 고루 품은 문답이기도 했다.


"이래서야 프로페서X도 애들 볼 낯이 없지 않나? 잊을만하면 터지는 납치극에다, 적대하는 조직의 수장에게 번번이 구출되는 처지라니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이지."
"나야 원체 머리 아래론 영 무력한 처지니 말일세.... 애들도 이 방면으론 적당히 기대를 접었으니 걱정할 것 없다네. 허나 이것도 우리 사이엔 나름대로 쓸만한 재회 이벤트 아닐까 싶은데, 내 오랜 친구."


패색 짙은 체스판을 눈짓으로 가리킨 찰스가 부드럽게 덧붙였다.


"내게 접전의 스릴과 패배의 쓴맛을 제대로 가르쳐주는 상대는 여전히 자네 뿐이라네."
  

반나절 전에 무려 텔레파시 무력화 장비를 동원한 과격파 뮤턴트들이 저지른 극적인 납치 및 인질극의 피해자로 흉흉한 위협에 말려들었던 당사자라 믿겨지지 않는 차분함이었다. 과거 에릭은 프로페서X 고유의 이 '평정'이 과연 그의 강인함에서 나오는 것인가 일종의 운명적 체념에서 나오는 것인가를 궁금해한 적도 있었더랬다.


"저들의 목숨 건 납치시도가 프로페서X에겐 고작 친구와 체스 한 판 두게 해주는 계기일 뿐이라, 납치범들이 들으면 피를 토할 소리로군."
"유감스럽게도 영영 듣지 못하게 되었잖나." 
"비난하는 겐가?"
"아니, 그저 사실을 말했을 뿐이네."


주제 모르는 자들의 명줄을 향해 주저없이 휘두른 힘의 여운을 여즉 만끽하면서, 이제 더이상 프로페서의 방식, 혹은 그 영혼의 색채를 궁금해하지 않게 된 매그니토가 웃었다. 짧고 건조하게 입가를 스친 미소였다.


"난 여전히 자네의 그 분별없는 위선조차도 존중하지, 친구."
"고맙군."
"유쾌한 일은 아니네. 전혀."
"어쩌겠나."


담담한 얼굴, 그러나 거의 새침하고 다소 뻔뻔하기까지한 옥스퍼드 악센트가 약간의 침묵을 두고 다시 이어졌다. 


"자네 역시, 희생마를 쉽게 던지지 못하는 버릇이 생겼는걸."




찰스 자비에는 그 힘을 우리 돌연변이를 위해 써야 해
아니면 우릴 위해 죽어주던가.
 

에릭은 단 몇 시간 전에 침입자들이 남긴 악의에 찬 단말마를 새삼 곱씹으며 찰스를 응시했다. 그리고 노려보다시피 꽂은 시선을 한 치도 피하지 않고 맞받은 아쿠아블루에, 그 고요하고 투명한 평정에 순간적으로 숨막힐 정도의 적의를 느꼈다. 더이상은 휘말리리라 생각치 않은 도발임에도 여전히 매그니토 안의 어떤 부분이 상처입은 맹수처럼 날세운 포효를 반복하는 것이다. 당치않은 후회와, 버렸다 여긴 미련의 찌꺼기를 다시 한 번 부인하는 의식처럼.


"대국적으로 보면 그저 제때 제 역할을 해내는 말들일 뿐이네. 자네나 나나 잘 알고 있는 대로."
"알기야 잘 알지."
"각오의 문제이기도 해."
"그래서, 자넨 기꺼이 그러겠노라고?"
"기껍지야 않네마는."
"체스 얘기인가."
"물론, 체스 얘기지."


찰스의 푸른 동공이 그제서야 조용히 눈꺼풀 아래로 반쯤 숨어들었다. 내리깔린 눈은 무서우리만치 투명하고 간결히 체스 얘기라 답한 입술은 견고하게 닫힌다. 익숙하다면 익숙해진 표정이었다. 이미 결단을 내리고, 판단을 끝낸 오만한 침묵의 모습.
에릭은 잠시 정체되었던 체스판에 손을 뻗어 찰스의 퀸을 잡고 내뱉듯 중얼거렸다.


"찰스, 지겨운 내 친구."
"영광이로군. 저 매그니토의 짜증을 사고도 여전히 친구라니." 


더이상 에릭의 대답은 없었다. 
매그니토는 체크메이트조차 하지않고 그대로 일어나, 체스말 대신 찰스의 손목을 낚아채 거기 붉게 쓸린 자욱을 파내버리기라도 할 것 마냥 노려보았다.


"에릭?"


침착한 부름이 뭔가의 제지였는지, 야비하기까지한 부추김이었는지 찰스 본인도 순간 가늠할 수 없었다. 다만 도드라진 핏줄과 쓸린 자국 위에 가만히 내려앉는 상대의 마른 입술과, 예리한 이를 차례로 느끼며 저도 모르게 떨었을 뿐이다. 굳이 텔레파스가 아니라도 명백히 알 수 있는 애증의 결박에. 
상처 위에 키스하고 바로 이를 세워 더욱 새빨간 흔적을 만들어 놓은 뒤 팽개치듯 놔주고 돌아서 가버리는 매그니토의 뒷모습을 향해 찰스는 뭐라 한 마디 외치려다 말을 삼켰다.
하긴, 더는 말할 필요도 없는 얘기다.


-나중에 또 보세, 내 친구.


어느덧 완전히 저문 해가 끄는 어스름 속에서, 프로페서는 덤덤한 손길로 체스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다음 희생마가 던져질 때를 기약하면서.


 



fin.




이거 쓰기 시작할 땐 뭔가 시리어스한 주제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한데 다 쓰고 나니 걍 한떨기 못된 어장관리남이 남아있을뿐. 아 놔. 이게 다 영화가 배우가 각본이 요망한 탓임. 내탓 아님. 절대 아님.....ㅠㅠ.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