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찰스에릭입니다.
2. 짧은 장면 하나 분량이라 송구스럽습니다.
3. 시기는 대략 둘의 40대 초중반 정도입니다.
몸에 익숙한 편안한 휠체어에서 낯선 플라스틱 휠체어로 옮겨가는 과정은 언제나 생소하기만 했다. 천천히 복도를 짚어가며 이번 감옥에는 그가 얼마나 있을까 생각해 본다. 1년? 한 달? 그래, 적어도 몇달은 가둬둘 수 있겠지. 하지만 분명 또 부수고 나갈 것이다. 늘 그래 왔듯.
정부가 특별히 '그를 위해' 세운 이 시설 안에, 적어도 에릭 렌셔가 감지할 수 있는 범위 내의 금속은 전혀 없다. 물론 그가 금속으로 된 사물을 "볼 수 있다면" 얘기가 다르다. 그의 뇌가 시각적 정보를 통해 그것을 인식하는 순간 여기보다 먼 곳에 있는 물건에도 힘을 쓸 수 있겠지만, 구체적인 금속 사물이 보이지 않을 때 금속을 감지 할 수 있는 거리는 의외로 짧다는 것을, 찰스는 알고 있었다.
강화 유리와 플라스틱으로 된 문이 열리자 마찬가지로 투명한 의자에 앉아 있는 남자가 보인다. 여전히 마른 몸을 흰 죄수복이 감싸고 있다. 죄수번호가 새겨져 있지 않은 옷이었으나, 어차피 이 "시설"에 감금된 죄수는 그 한 명이니 상관 없는 일이다. 세월이 지났건만 여전히 강인하고 날카로운 청회색 시선이 찰스를 향한다. 입은 늘 그렇듯 굳게 다물렸고, 마른 손은 의자 팔걸이 위에 가볍게 얹혀 있었다.
대답이 없을 확률은 80% 이상. 그래도 가벼운 인사를 잊지 않고 미소를 지으며 작은 테이블 앞으로 다가간다.
"잘 지냈나. 우리 체스나 둘까?"
그가 거절할 수 있을 리 없다. 이 작은 방 안에서, 그가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는 제공된 옷가지와 간단한 세면도구, 그리고 몇 권의 책이 전부였으니까. 그런 물건 중 하나인 작은 테이블 위에는 체스판이 놓여 있고, 지난번 두던 판이 그대로 펼쳐져 있다. 심지어 찰스가 오기 전까지는 이 게임 하나 제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갇혀 있는 자의 처지다.
"자넨 나랑 체스 두러 여기 오나?"
"아마도. 행크는 잘 두긴 하지만 공격적이질 않아서 영 재미가 없거든."
어느새 찰스의 머리카락에는 흰 터럭이 약간이나마 섞여들었고, 에릭의 미간 주름은 더 깊어졌다. 노년까지는 아니더라도 농담으로라도 청년이라고 부를 수 없는 나이가 된 것이다. 이런 나이가 되면 젊을 적 열정은 많이 수그러드는 법이다. 얼마 전까지 엑스맨과 브라더후드의 우두머리로서 '적대'하던 입장이었지만, 이제는 이렇게 마주 보고 앉아 차분히 체스를 두는 것만 해도 그렇다.
어느새 둘은 침묵에 잠겨들었고, 말 움직이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하지만 사실 그들은 대화중이었다. 폰을 전진시키고 나이트를 무르고 비숍을 위협적인 위치에 다가붙이며 그들만의 대화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달랬다. 하지만 듣지 않았다. 정식으로 대들자 회피한다. 약점을 짐짓 드러내지만 속을 읽혀 무산당한다. 왕이 성 안으로 도피하고, 여왕이 옷자락을 끌며 다가가 기사의 심장을 찌른다. 점차 격렬해지는 전투에서 말들이 쓰러져 가고, 반면에는 검고 흰 두 명의 왕이 서로를 응시하며 참상을 바라본다. 마침내 성채가 무너지고, 죄수복에 감싸인 남자의 손이 루크를 치우기 위해 반면에 닿았을 때.
"찰스?"
찰스의 손이 에릭의 손목을 잡았다. 물러달라는 것인가 하여 바라보는 순간, 생소한 감각이 손목에 와 닿는다. 시선만 내리깔아 바라본 끝에, 남자의 엄지가락이 붙들린 손목 안쪽을 천천히 쓸고 있었다.
파란 핏줄이 선 손목, 굵지 않지만 견고한 뼈대와 거기 단단히 붙은 힘줄을 더없이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동안 둘 중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잠시 붙잡힌 손목을 내려다보던 에릭이 명백히 비난조의 표정을 담고 찰스와 시선을 맞춘 순간, 찰스가 천연덕스레 웃은 것이 고작이었다.
"자네, 카메라는 조심하지 그래."
그의 말대로 이 곳 사면은 감시 카메라로 촬영되고 있다. 허나 그걸 알면서도 이런 일을 한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찰스는 친절한 미소를 지은 채 거의 다정하기까지 한 어조로 말해주었다.
"괜찮아, 이 각도에서는 우리 손 같은 건 안 보이거든." 그리고 잠시 후 덧붙인다. "그리고 사실 저기 찍혀도 상관없어. 저 친구들 눈에 우린 그저 대화를 하고 있을 뿐이라네."
에릭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프로페서 X의 능력이 어떤 것인지 그보다 더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 카메라가 무엇을 비추건, 심지어 이 자리에서 둘이 키스를 하고 젊은 날 종종 그랬듯 바닥에 구르더라도 그들은 모를 것이라는 뜻이다. 카메라의 영상은 헛되이 흐를 뿐이고, 기록 테이프는 다음날 다른 기록이 덧씌워진채 잊혀지겠지.
그 말을 입증하기라도 하려는 듯, 남자가 붙든 손목을 천천히 위로 올린다. 그리고 마치 궁중의 레이디에게 사랑의 맹세를 하는 기사라도 되는 양, 방금 어루만진 창백한 피부 위에 입술을 내린다. 기억하고 있던 것보다 좀더 마른 느낌의 키스가 손목에 닿는 순간, 에릭은 조용히 이를 악물었고, 찰스는 그 사실을 알았다.
"자네를 가두는 건 정말 잔인한 일이지."
"...알면 관두던가."
손목 위로 따스하지만은 않은 숨결이 떨어졌다. 둘 다 알고 있다. 누가 정부에게 에릭 렌셔와 그 조직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는지, 누가 요원들을 도왔는지. 누가 그를 이렇게 효과적으로 가둘 감옥을 고안했는지, 그래서 누가 이 계획을 추진시켰을지. 아니, 애당초 에릭 렌셔를, 미합중국 역사상 가장 위험한 테러리스트를 이런 '안전한' 곳에 고스란히 살려두고 감금할 생각을 하게 만든 것이 누구일지.
"관두긴? 이렇게 가둬두기라도 하지 않으면 제대로 얘기를 할 수가 없지 않나."
"오, 찰스. 나와 얘기하기를 원할 줄은 몰랐는데, 진작 말하지 그랬나. 언제건 받아줬을 거야."
하지만 붙든 쪽도 붙잡힌 쪽도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어차피 둘 모두가 알고 있는 이야기이니 할 필요조차 없다.
"하지만 에릭, 자네는 그러면 늘 나를 납치하잖나. 난 사람들이 다치는 게 싫어."
언제나 서로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몰랐던 적은 없었으므로.
붙든 손을 얼굴로 가져간 찰스가 잠시 마른 손을 볼에 대고 그 서느런 체온을 음미한다. 하지만 거기까지. 입술조차 스치지 않고 순순히 내리는 몸짓에, 아무런 저항도 도발도 따라오지 않는다. 그저 풀려난 후, 마침내 자유로워진 손목으로 말을 치우며 한 마디 덧붙일 뿐.
"난 나갈 거라네. 이 곳의 가드들도 언젠가는 다칠 거야. 알잖아."
감금된 남자의 고집스런 말에, 더이상 기억만큼은 붉지 않은 입술이 조용히 호선을 그린다. 납득이나 이해보다는 포기나 체념에 가까운 미소였다. 그런 미소를 띤 채, 미간에 주름을 새기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욕심 많은 남자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래, 그건 내 죄지."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여왕이 쓰러지고, 주교가 왕에게 짓밟혔다. 성채에 포위된 병사들은 못박힌 듯 꼼짝도 하지 못했다. 기사의 칼날이 왕의 목을 노렸고, 꼼짝없이 갇힌 것으로 보이던 왕이 마지막 반격을 날렸다.
"체크메이트."
거의 그렇듯 에릭의 승리. 평소대로라면 이 깔끔한 선언에 반발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째서인가 오늘만은 달랐다.
"...물러 주면 안되겠나."
"찰스, 자네 기억에, 그런 말 들었다고 내가 물러준 적이 있었나?"
"없었지. 알겠네."
어느새 면회 시간이 다 되었다. 찰스는 속으로 혀를 차며 조용히 물러나왔다. 등 뒤의 그는 여기를 쳐다보고 있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금새 등을 돌리고 책이라도 펴고 있겠지. 복도를 건너나와 흘끗 뒤를 돌아볼 것도 없이 자신의 추측이 맞다는 것을 확인한 찰스는 원래의 휠체어로 갈아탄 다음 우울한 표정이 되어 밖으로 나갔다.
그와의 게임은 언제나 미완으로 해 두고 싶었다. 그 곳에 반면을 펴 놓고 기다리도록, 다음 수를 생각하며 조금이라도 더 자신을 기다려 주도록. 하지만 오늘의 그는 가차없었다. 단 한 수도 물러주지 않았고, 면회 시간이 끝나기 전 모든 승부를 끝내 버렸다. 마치 이제부터 아주 오래 동안 이런 게임을 할 일은 없을 거라는 듯이.
"...곧 바람이 불겠구나."
뒤에서 휠체어를 밀던 청년이 의아한 눈으로 찰스를 일별했다. 고개를 천천히 저은 찰스는 우리에 갇힌 야수가 곧 부수고 나올 것임을 직감하며 차에 올랐다.
* 별로 수위나 커플링은 없지만 에릭찰스에릭 분위기?
* 모처에서 리퀘를 받아서 썼던 글이죠.
* 문제는 이 뒤의 옷 벗기 체스 내기...글이 날아가서 없다는 것. 다시 써야 하나 OTL
"말도 안돼."
찰스는 질린 얼굴로 체스판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그 건너편에서, 에릭은 제법 오만해보이기까지 하는 미소를 띄우고 찰스를 바라보며 빈정거렸다.
"18전 15패. 찰스, 정말 고마워. 네 덕분에 난 그랜드마스터가 된 기분을 늘 맛보고 있거든."
"에릭, 경고하는데,"
"무슨 경고?"
찰스는 초조한 얼굴이 되어 입술을 물었다. 이럴때의 찰스는 심술궂은 고양이 같아서, 얄밉지만 대체 어떻게 할 수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당하기만 하기엔 찰스도 그간 쌓인 것이 제법 많았다.
"자꾸 그러면 자네 머릿속에 간섭해서 레이븐 옷을 훔쳐입고 테이블 위에서 캉캉춤을 추게 만들겠어."
"그 춤 스텝은 알아?"
"요는 다리만 번쩍 들면 돼. 행크가 좋아하겠네."
의외로 진지한 어조에 에릭의 얼굴에서 살짝 미소가 사라진다. 찰스는 어깨를 으쓱 하고는, '체스 말고 다른걸 좀 해 보지?' 하고 가볍게 말을 이었다. 그렇다. 어린 시절부터 남의 머리속을 드나들며 수많은 사람들을 이해하고 납득해 온 찰스 자비에라 해도 이 순간만은 그저 '어떻게든 상대를 한 번쯤 이기고 싶은 남자아이'에 불과했다. 어쩌랴, 그것이야말로 모든 '수컷'에게 자연스럽게 새겨져 있는 유전자의 명령인 것을.
"다른 거? 자네 다른 스포츠도 할 줄 알아?"
찰스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뿌듯함과 정색이 반반 섞여 있는 반짝이는 표정이었다. 주로 저런 표정이 될 때에는...
"그럼. 이래봬도 배워야 하는건 다 배웠어. 권투는 우리가 하긴 좀 무리 같지만 제법 하는 편이지. 테니스코트라면 정원 뒤쪽에 마련되어 있고 부지 내의 호수에서 수영을 해도 상관 없어. 달리기 트랙도 행크 덕에 마련되어 있고 사실은 펜싱 훈련실도 있지. 아버지가 좋아하셨거든."
"펜싱?"
"그리고 어디까지나 아버지 취미지만 지하 2층으로 내려가면 사격 훈련도 할 수 있다네."
"대체 자네 아버지라는 분은..."
"그런 걸로 그런 얘기 하지 마. 그나마 조부님이 너무 시켜서 지겹다고 승마는 제끼셨어. 일단 난 어머니와 살 때 기초 정도는 배우긴 했지만 말이야."
"말? 말이라고?"
"그래서, 어느걸 해 볼 텐가? 골라 보게, 난 뭐건 상관없거든."
그렇다. 바로 자기 자랑을 할 때다. 에릭은 어이없다는 표정이 되어 찰스를 바라보았다. 푸른 눈에 떠올라 있는 것은 명백한 자부심과 호승심.
좋아, 어떻게든 이겨 보겠다 이거지? 에릭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골라."
"아냐, 자네가 골라. 난..."
"그래, 그러면 간단하게 수영으로 하지."
"좋았어!"
에릭은 사람좋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친구. 어디 한번 해 보자고.
에릭은 양 팔을 허리에 얹고 이 쪽을 향해 헤엄쳐 오는 찰스를 감상했다. 샌님 치고는 제법 단련된 등과 허리가 볼만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샌님 티가 난다고밖에 할 수 없는 약간 펑퍼짐한 엉덩이가 꽤 귀여웠다. 그래, 뛰어나군. 하지만 책상물림들이야 어쩔 수 없지. 마침내 기슭에 도착한 찰스가 고개를 저으며 에릭에게 말한다.
"맙소사, 에릭 자네 수영 선수라도 했나?"
"아니, 그냥...필요에 따라 익혔지."
물결이 계속 움직이는 바다에서 닻을 움직이기 위해 팔을 휘두르면서도 떠 있을 수 있을 만큼 말이야. 에릭은 속으로만 그렇게 생각하고는, 한 손을 내밀어 수영복 차림의 찰스가 물 밖으로 완전히 올라오는 것을 도왔다. 역시 수영은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물방울이 햇빛을 보지 못해 지나치게 하얀 찰스의 속살을 훑으며 다시 호수로 돌아간다.
"그럼 이번엔 자네가 골라."
"...어?"
"이기고 싶어서 이러는 거 아니었어? 한 번은 내가 골랐으니 이젠 자네가 고르라구."
찰스의 얼굴에 곤혹스러운 표정이 떠오른다. 자신감 있게 웃고 있는 에릭의 얼굴을 보던 찰스가 '사격'을 골랐을 때, 에릭은 거의 폭소를 터트릴 뻔했다. 이 착한 친구야, 이기고 싶은 주제에 내가 아무것도 모를 법한 펜싱이나 승마는 건드리지도 않다니, 물러빠져도 이렇게 물러빠질 수가 있나.
하지만 굳이 그걸 지적할 필요는 느끼지 못했다는 점에서, 에릭 랜셔는 아무래도 이 상황을 자신이 즐기고 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능력 쓰지 마."
"마찬가지야. 원한다면 내 시각 쯤 조종할 수 있잖아."
"그래그래, 그럼 쏴 보자고."
에릭을 향한 권총은 쏘지 못하겠다고 한 주제에, 찰스의 라이플 사격 실력은 꽤 괜찮은 편이었다. 열 발 중 여덟 발 명중, 그중 다섯발이 9점이거나 10점이다. 아니, 이 정도면 꽤 훌륭하다. 그래, 어디까지나 아마추어로서 말이지. 에릭은 득의의 웃음을 지으며 조용히 표적을 겨눴다. 좋아, 남자의 자존심을 위해 세 발은 일부러 9점을 맞춰 주지.
"에릭."
"음?"
"나, 아주 솔직하게 한 마디만 해도 될까."
"안돼."
"......"
푸른 눈동자가 에릭의 눈을 노려본다. '내려다 본다'는 것이 이렇게 상쾌하고 기분좋은 일이라는 걸 만끽하며 에릭은 그 지나치게 푸른 눈동자를 느긋한 기분으로 응시했다.
"에릭!"
"그래, 말 해도 좋아."
'한 번이라도 좀 져 주면 안돼?' 라는 말을 할 작정이었고 실제 거의 입 밖으로 튀어나갈 뻔 했지만 찰스는 참았다. 참고 또 참았다. 그거야말로 패배를 인정하는 꼬마 떼쟁이의 말이 아니고 뭔가. 잠시 생각하던 찰스는 간신히 자신의 자존심과 그의 만족감이 한번에 충족될 수 있는 결론을 찾아내, 그것을 입에 담았다.
"그냥 체스 하자."
"좋아."
비죽이 걸린 웃음이 너무나 얄미웠지만, 이전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자네 정말 운동 잘 하는군, 굉장해."
"뭘 또."
사격장 문이 닫혔고, 그 뒤로 아주 오랫동안 열리지 않았다.
<끝>
그게 사실 한 편이 더 있었지만 뒤가 홀랑 날아갔던 고로, 여기 다시 올립니다.
머 지금 상태로도 엔딩이 나긴 나요.
솔직히 말하면 지루했다.
"자네, 이제 그만 포기하는게 어때?"
느긋한 웃음을 짓고 있는 에릭도 약간 진력난 듯 보였다.
"아냐, 한 판만 더 두자고."
"찰스."
"오늘 딱 한 판만 더."
'그래, 이게 오늘의 첫 '한 판만 더' 로군.' 에릭은 속으로만 고개를 내저었다. 이럴 때의 찰스는 놀아달라고 조르는 고집스런 강아지 같다. 이렇게 한 세판 정도 더 하고서야 물러서는 것이다. 평소에는 못 이기는 척 그러마고 했지만, 이번에는 어렵다 싶어 에릭은 살짝 장난스런 제안을 해 보기로 했다.
"그래? 그러면 좀 색다른 걸 해 보지 않겠어?"
"색다른 거?"
찰스의 푸른 눈이 이 쪽을 응시한다. 그 시선을 즐기며, 에릭은 차분히 말을 늘어놓았다.
"말 잡기 게임으로 해 보지."
"그게 뭔데."
"간단해. 봐, 체스에서 폰을 빼면 각 두 개 씩의 말이 있지? 킹과 퀸은 한 세트로 치고 말야."
찰스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중 하나를 고르는 거야. 그리고 먼저 그 말을 쓰러뜨리면..."
"쓰러뜨리면?"
에릭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자네, 설마 이 조건으로 게임을 하자고 하진 않겠지?
"옷을 하나 벗는 거지."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이 쪽을 탐색하듯 눈을 가느다랗게 뜬 찰스가 자신의 마음을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간의 관찰과 경험을 통해, 에릭은 찰스가 머리에 손을 대지 않고도 남의 마음을 읽는 정도는 쉽게 해낸다는 걸 알았다. 그렇다면, 지금 에릭이 이런 제안을 하는 이유도 잘 알겠지.
"어때?"
'설마 하진 않겠지? 누가 옷을 벗게 될지 뻔한데.' 하지만 에릭의 예상은 빗나갔다. 찰스는 아주 잠깐 미간을 찌푸리며 고민했을 뿐, 곧 쾌활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 뭐."
"찰스-"
"그거 핑계로 안 하려는 거잖아. 안 통해."
아니, 아무리 24세라고는 해도 '교수' 아닌가? 파티에서 눈 맞은 커플이나 할 법한 제안을 두고 새로운 룰이 더 재미있겠다며 눈을 반짝이고 있는 건 대체 뭔가. '대체 미국인들이란.' 에릭은 애시당초 그런 망측한 제안을 한 것이 자신이라는 사실 따위는 까맣게 잊고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에릭찰스 분위기
* 이 둘이 체스 두는게 정말 좋습니다. 근데 늘 에릭이 이기는게 참 묘해요. 찰스랑 두기 전에는 쇼우가 가르쳐줬을까?
"체크메이트"
찰스는 끄응 하고 신음을 내며 머리를 긁적였다. 어찌해도 소용없이, 찰스의 킹은 외통수에 몰려 아무 움직임도 할 수 없는 상태다. 옆으로 움직이면 비숍에게 죽을 거고, 지금 이 상태로는 퀸에게 당한다. 물론 에릭 또한 그 상황을 충분히 알고 있었고, 그래서 입가에 느슨하게 승리의 미소가 매달려 있었다. 웃는 일 자체가 흔치 않은 남자이지라 웃는 모습을 보는 것 자체는 좋았지만 그것이 자신의 패배를 기초로 삼고 있어서야 기분이 마냥 좋기는 어렵다.
"졌어. 정말 대단하군."
"12전 8패야, 찰스. 인정해. 자네 최근은 나한테 네 번 연속 졌다고."
찰스의 마음 속에서 슬그머니 심술이 피어올랐다. 기본적으로 찰스 자비에는 쾌활하고 여유 넘치는 성격을 갖고 있긴 했지만 그래도 호승심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한번 더 해 보지 않겠어?"
"또 지려고?"
"모르잖아. 아직 10시 정도니까 시간은 있어."
한번쯤은 룰을 어겨도 상관 없겠지. 사실 찰스는 손가락을 굳이 올리지 않아도 남의 생각을 읽는 정도는 가능했다. 손가락을 올리는 것은 그 감촉을 통해 집중하기 위한 것이었으니까. 고로 이번 한 판 정도는 저 기고만장한 에릭의 마음을 읽어서 꺾어줘도 상관 없으리라.
"자네가 너무 늦게 자서 늦잠자면 레이븐이 시끄럽게 잔소리 할 텐데."
"괜찮아, 논문 쓸 때엔 하루 세 시간만 자면서도 잘만 버텼어."
잠시 침묵하던 에릭이 못 이기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찰스는 신이 나서 다시 체스말을 배열했다. 두고 보자, 에릭 렌셔! 체스 플레이어는 각 말을 움직이면서 동시에 마음 속에 전체적인 행보를 그리게 되어 있다. 상대에게 어떤 함정을 짤지, 어떤 방식으로 외통수에 몰아넣을지 읽어낸다면 승리는 별로 어렵지 않다. 방금 패배한 찰스가 흑을 잡고 폰 하나를 한칸 앞으로 옮겨두었다. 직후 에릭이 처음 말을 손에 잡고 옮기려는 순간, 찰스는 조용히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탐색에 들어갔다.
- 저 손가락을 핥고 싶군.
찰스는 순간 깜짝 놀라 눈을 깜박거렸다. 그리고 곧이어 주위를 돌아보았다. 에릭의 눈에 들어올 '손가락'의 주인이 될 법한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다.
"찰스?"
"어?...어."
"뭐 찾나?"
찰스는 애써 자세를 다잡으며 최대한 선량하게 웃어 보였다. "찾다니, 뭘?" 고개를 저으며 이번에는 폰 하나를 더 앞으로 옮긴다. 나이트를 밖으로 빼기 위한 포석이었지만 다음 순간 강하게 울려오는 에릭의 생각에 거의 실수로 말을 떨어트릴 뻔 했다.
- 손을 붙들고, 손가락 사이에 혀를 미끄러뜨리면...
맙소사, 얼른 말을 놓고 손가락을 자기도 모르게 꼭 주먹으로 쥐며 다른 손으로 감쌌다. 슬쩍 확인한 에릭의 시선이 자신의 손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시점에서 찰스는 얼굴에 화끈하니 열이 오르는 것을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
"무슨 생각 하나?"
"음?"
"...말, 말 말이야 에릭. 자네 순서니까 어서 움직이라고."
- 저 시끄러운 입술을 키스로 막아버리고 싶군.
생각은 그렇게 하는 주제에, 에릭은 "너무 재촉하지 마. 생각이라는 걸 좀 해야지." 라고 뻔뻔스레 말하며 루크 앞의 폰을 치웠다. 찰스는 곤란한 기분이 되어 머리를 긁적이며 어떻게든 체스 행보에 집중하려 애썼다. 하지만 도저히 에릭의 마음을 엿보는 걸 그만둘 수가 없었는데, 그것이 호기심 때문인지 또는 다른 무엇 때문인지는 찰스도 알 수 없었다.
- 이번에도 지면 키스해 버릴까.
- 어떻게 몰아붙이면 제일 당황할까.
- 의자 위가 좋겠군.
- 저 빌어먹을 트위드 바지 따위 확...
- 얼굴이 빨간 걸 보니 찰스도 그럴 기분일까? 아니, 말하진 말자.
이것은 실로 점입 가경이었다. 체스가 진행됨에 따라 체스판 위의 싸움은 복잡해져 갔지만 에릭의 머리는 오히려 더욱 집요하게 찰스의 온 몸을 훑어가며 범하고 있었다. 에릭은 체스의 행보 따위 거의 생각하지 않았다. 비숍을 세 칸 옮기며 한다는 생각이라는 게 "아, 비숍을 세 칸 옮겨야겠군. 찰스는 어떤 반응을 할까"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제서야 찰스는 깨달았다. 에릭 랜셔에게 체스는 체스가 아니었다. 그것은 찰스 자비에를 공략하여 무너뜨리고 마침내 범하는 과정이었고, 그는 섹스에 탐닉하는 카사노바처럼 싸움을 조율하고 숨을 고르며 찰스를 공격해 가고 있었다. 체크메이트를 향해 무자비하게 달려가는 것은 곧 그의 정복 그 자체였던 것이다.
"찰스, 심기일전 하는 것 같더니 이게 웬일인가?"
결과는 어이없게도 고작 10분만에 찰스의 패배로 끝났다.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짧은 승부에 에릭은 약간 실망했고, 그러면서도 만족하고 있었다. 하지만 에릭의 민망한 상상과 욕망에 시달리며 그저 말을 옮기는 것이 고작이었던 찰스는 온 얼굴이 시뻘겋게 물든 채 어이없는 변명만 중얼거릴 뿐이었다.
"와인때문에 그런가 봐. 음, 역시 잘못 생각했어. 가서 자야지."
"와인? 고작 한 잔 마시고?"
"어...그게..."
"자네 평소엔 한 병도 쉽게 비웠잖아."
- 이 친구도 달아오른 건가?
번뜩 스치는 에릭의 생각에 찰스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눈앞의 남자의 청회색 눈이 그 몸짓에 잠깐 커졌다가 평상대로 돌아온다. 다만, 그 안에 담긴 눈빛은 방금 전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었다.
"...찰스 자비에?"
"어...들어갈게, 그러니까,"
"자네, 거기 서."
벌떡 일어섰지만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에릭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제법 사나운 기세로 찰스를 노려본다. 하지만 그 입가에 떠올라 있는 것은 분명 웃음이었다. 그래, 말하자면 바로 '상어의 미소'
"읽었지."
"...어?!"
"내 생각, 읽었지?"
찰스는 둥그래진 눈으로 에릭을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아, 아냐 난 그냥 와인을..."
"개소리 마. 찰스 자비에, 자네가 와인 한 잔에 취한다면 난 맥주 두 모금에 취한다."
"그...그게"
"읽었다면,"
남자가 다가온다. 숨이 서로 닿을 거리가 되어서야, 찰스는 이 남자가 자신보다 확실히 키가 크다는 것을, 그리고 그 차이가 의외로 압도적이라는 것을 깨닫고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에릭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거의 닿을 듯한 거리까지 에릭의 입술이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