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숲 속에서는 완전히 끝난 건 아닙니다 - 만, 이제는 기승전결을 가진 중편보다 간간히 이어지는 뒷이야기 위주가 될 것 같습니다. 그에 앞서, 이 소설을 쓰면서 찬찬히 만들어갔던(처음 시작은 즉흥이었으니까 말이죠) 설정들을 에릭과 찰스와 저의(...) 대담 형식으로 풀어놓아 볼 생각입니다.
워커: 그간 궁금하셨던 게 많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에릭: 그렇지. 제일 궁금한 건 대체 이런 변태적인 얘기를 풀어놓을 생각을 어떻게 했냐는 건데,
찰스: 에릭!
에릭: (독일어로 뭔가 중얼거린다.)
찰스: 에릭, 어떤 기분인지는 알겠지만 일단은 살려두자. 물어볼 것들이 있었잖아.
워커: ......네? 일단은...뭐요?
찰스: 걱정 마세요. 늑대인간이라고 해서 꼭 사람 고기를 먹는 건 아니거든요. (에릭 쪽을 잠시 불안해 하는 얼굴로 쳐다본다.) 네 음, 아무튼 고기는 안 먹어요. 해치는 건 좀 자신 없는데, 제가 에릭을 말릴 수 있도록 좀 도와 주시겠어요?
(붙임성 있는 얼굴로 웃는다)
워커: ......네, 네, 아무렴요,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어쩐지 당신이 에릭보다 더 무서워 보이지만.
찰스: 네? ^^
워커: 아, 아닙니다! 그러면 궁금한 것을 말씀해 주세요!
찰스: 예, 일단 '늑대 인간' 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네요. 글 내내 늑대니 인간이니 하면서 정체에 대한 서술이 왔다갔다하던데-
워커: 그렇죠. '나는 늑대다!' '인간이다!' 라는 선언들이 교차하고 결국 '늑대 인간이다!' 라고 이어지는 건데요, 이게-
찰스: (참을성있는 표정으로 워커를 바라본다.)
워커: - 네?
찰스: 저 말 아직 다 안 끝났는데. ^^
워커: 어-....네, 넵! 죄송합니다 ㅠㅜ
찰스: 이 늑대인간들은 대체 어떻게 생겨난 존재들인가요? 또, 생태에 대한 설명도 해 주세요.
워커: 어- 생태에 대한 설명이라고 하면 두 분 다 늑대인간이시잖아요? 굳이 제가-
에릭: 넌 알지만 이 블로그 오시는 분들은 모르잖아.
찰스: 에릭의 말대로네요. 부디 알려주시면 고맙겠네요.
워커: ...역시, 자비에 씨 쪽이 더 무서워요!
(잠시 소란이 인다)
워커: 어- 그러니까- 다행히도 두 분이 질문하실 법한 걸 제가 이렇게 워드로 쳐서 가지고 왔어요.
에릭: 워드? 그게 뭐지.
찰스: 마이크로소프트 워드 프로세서 프로그램으로 작성한 조잡한 서류를 의미하는 거야.
에릭: ......프로...뭐?
워커: 그럼, 자비에 씨가 읽어주시면 될 것 같아요. 천상의 목소리를 지니고 계시잖아요.
찰스: (물끄러미 워커를 바라보다가) 대화체로 계속 쓰기 힘들어서는 아니구요?
워커: 와우, 그 돌연변이 능력 멋지군요! 어쨌건 부탁드립니다. (굽신거린다.)
(잠시 헛기침을 한 찰스, 목을 가다듬고 매끄럽게 읽기 시작한다.)
1. 이 소설에서의 '늑대인간'이란?
글 속에 나오는 '태고의 늑대들'의 후손들입니다. 빙하기 시대, 인간인 호모 사피엔스와 당시의 거대한 늑대들인 카니스 디루스의 혼령이 결합하여 생겨난 것이 바로 이들입니다. 고로 만일 학명을 붙인다면 아마도 Homo Dirus쯤 된다고 생각합니다. 최초의 혼령 결합은 아마도 샤먼에 의해 일어났던 것이겠지만, 태고의 늑대들도 그에 대해서는 확답을 주지 않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는 달의 주기에 따라 야성이 솟아오르는데, 보름달이 되면 자의와 상관없이 늑대로 변할 정도로 야성적인 힘이 흘러넘칩니다. 인간 형태일 때에도 일반 인간들보다 모든 감각이 예민하며, 근력도 더 강합니다. 낮보다 밤에 늑대로의 변신이 더 수월하고, 반대로 낮에는 더 쉽게 인간으로 돌아옵니다. 보름 때에는 왠만해서 인간으로 돌아오기 어렵지만, 아주 오래되고 자신의 야성을 다루는 데 익숙한 늑대인간들은 아주 쉽게 변신할 수 있습니다.
(찰스: 그래서 슈미트가 그렇게 쉽게 변신한 건가요?
워커: 넵! 다만, 쇼우 정도 되어도 보름 밤에 인간으로 돌아오기는 꽤 어려워요. 마을 사람들 앞에 나타날 때의 클라우스 슈미트는 의외로 필사적인 상태였죠.)
생체 회복력이 놀랍도록 강하고, 자라긴 하지만 늙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놈의 성질머리들, 그리고 제어하지 어려운 야성 때문에 대부분의 늑대인간들은 전사하거나 살해당하거나 사고사합니다. 그래서 조심성 많고 주의깊은 뱀파이어나 요정에 비해서는 수백년 살아남는 경우가 드물어요;
(찰스: 에릭, 내가 그 성미 조심하랬지?
에릭: ......)
2. 대체 그 태고의 늑대란?
모든 늑대인간들의 마음 속에는 영원히 얼어붙은 설원이 있고 태고의 늑대들이 사는 곳이 펼쳐져 있습니다. 말하자면 늑대 버전의 집단무의식의 세계입니다. 늑대들의 '원형'이 그 곳에 있습니다. 무리가 있고, 우두머리가 있고, 우두머리의 짝이 있고, 짝의 딸이며 자매들인 암컷과 형제인 젊은 수컷들이 있고요.
(에릭: 잠깐, 지금 젊은 수컷과 암컷이라고 했나? 찰스, 거기에 그런 자들이 있어?
찰스: 에릭, 오해하지 말아줘. 나는 그 늑대들이 암컷이건 수컷이건 신경쓰지 않아.
에릭: ?! 암수 상관없다고? 찰스, 그 빌어먹을 늑대들과 너무 오랜 시간을 보내는 것 같은데-
찰스: 맙소사, 에릭! 그들은 그냥 혼령이야, 살도 피도 없는 존재들이라고!
에릭: 하지만 그 공간에 들어가면 모두 실체를 갖는다고 했잖아. 안 그래?
워커: 잠시만요, 잠깐만, 지금 자비에 씨가 뭔가 오해를 받고 있...(에릭이 째려보는 바람에 침묵한다.)
찰스: 에릭, 오해를 풀어. 안 그러면-
에릭: 안 그러면? 어쩔 건데.
찰스: 다시 프랑스로 갈 거야. 거기서 10년동안 살 거고, 예전처럼-
에릭: ......알겠어.)
사실 모든 늑대인간이 다 이 '태고의 늑대'를 만나는 것은 아닙니다. 슈미트처럼 오래되었거나 뭔가 정신적 계기가 있어서... 말하자면 참선(...) 이나 명상(......), 혹은 각종 늑대인간으로서의 경헙들을 통해 도달할 수 있습니다.
태고의 늑대들이 사는 영원한 설원에 가는 법은, 쇼우가 처음 늑대인간이 되던 무렵에는 늑대인간들이 많이 알고 있는 가르침이었지만, 수백년이 지나면서 점점 잊혀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쇼우는 에릭에게 전부 가르쳐 주고 싶어했지만, 에릭이 멋대로 도망쳐 버리는 바람에 전혀 가르쳐 주지 못했습니다. 말하자면 에릭은 늑대 인간계의 후레자....
(글래스워커가 에릭에게 끌려간다. 처절한 비명과 무자비한 하울링과 으르렁거림이 들린다.)
아무튼 찰스를 통해 태고의 늑대들과 늑대인간들은 다시 한번 연결되었습니다. 태고의 늑대들은 대단히 기뻐하고 있고요.
3. 다른 늑대인간은 전혀 없는가?
(에릭이 갑자기 침묵한다. 찰스도 잠시 집중하고 읽어나간다.)
유럽의 늑대인간은 지독한 마녀사냥으로, 북미의 늑대인간은 인디언의 멸망과 함께, 남미의 늑대인간은 스페인의 침공 때문에 사라졌지만 극동 지역의 극소수 늑대인간은 살아남았습니다. 이들은 극동의 인간들에게 '12지' 중 '개'로 오인받아 그럭저럭 삶을 유지합니다만...
(에릭: 개? 지금 개라고 했어? 이런 (다시 한번 독일어)
찰스: 에릭! 읽는 중이잖아.)
중국 쪽의 늑대인간은 문화혁명의 피바람 속에서 멸종합니다. 한국의 늑대인간은 6.25 이후로 소식이 없고요, 일본의 늑대인간들은 일본 늑대의 멸종 이후 감감 무소식입니다. 다만, 멸종되었다는 얘기는 없어요.
아무튼 숨어 있는 극소수의 늑대인간들은 있습니다. 아누비스로 숭배되던 고대 이집트의 혈통을 받은 이들도 있고, 남미의 늑대인간이 멸망하던 당시 스페인에 늑대인간이 역수출(...) 되기도 했습니다. 캐나다에도 있다고 합니다. 다만 너무 넓은 곳에 마구 흩어져 있는데다 '태고의 늑대들'의 공간에 들어올 수 있는 자들도 거의 없는 상태입니다.
(에릭: 뭐야, 그냥 '꿈도 희망도 없다'라고 요약하면 될 일이잖아.
워커: 깨...깨갱
찰스: 그래도 있을지도 모른다잖아, 다행이네.)
4. 앞으로의 에릭과 찰스는?
아마도 아주 오래오래 핸복하게 살 거라고 생각합니다. 분명 많은 사건들이 있겠습니다만, 슈미트를 물리치고도 별 탈 없었으니 이제는 잘 지내지 않겠어요?
에릭: 그렇겠지?
워커: 그...그렇습니다!
찰스: 틀림없나요? 우리는 인간에 대한 대화를 가끔 나누는데, 서로 생각이 좀 다르-
워커: 에헤이! 그 그 그 그런거 없고요! 두 분은 백년해로 하실 겁니다! 절대로! 반드시! 그래야 하는 겝니다!!!!!
(심상찮게 노려보던 에릭이 가자 간신히 안도의 한숨을 쉬는 워커, 그리고 가볍게 인사하고 에릭을 따라가는 찰스)
이런 설정들이 있었...더랩니다. 와하하. 대화 형식으로 조금 풀어 보았지만 막상 쓰자니 별 게 없어 보여서 안습이네요.
앞으로는 겨울 독수리와 인큐버스를 써 나갈 생각입니다. 지금 회사 일도 정신없고 이래저래 힘들어서 집중은 잘 못 하고 있습니다만, 최선을 다 해 나가겠습니다!
- 둘의 능력이나 느낌은 원작과 비교가 안될 정도로 약화되어 있습니다.
- 달리고 또 달리는 중입니다.
몇 시간 뒤, 다시 한 번 문이 열렸다. 마차 바퀴 자국과 발자국, 무엇보다도 숨길 수 없는 클라우스의 체취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던 에릭은 어떤 인기척도 없는 빈 실내를 확인하고는 비틀거리며 벽에 기대 섰다. 피 냄새도, 어떤 폭력의 흔적도 없으니 아마도 '평화적'으로 데리고 나간 것이리라. 모피 위에 떨어진 클라우스 슈미트의 손수건을 발견한 에릭은 절망적인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 내가 좀더 강했다면.
지금 상황에서 그가 클라우스 슈미트를 이길 방법은 전무했다. 변신한 상태에서도 힘이 모자란데, 오늘은 보름조차 아니다.
- 클라우스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너도 할 수 있어.
양 손으로 얼굴을 덮고, 에릭은 그만 절규하고 말았다.
- 그들이 널 기다리고 있어.
제발, 그 누구라도 도움을, 설령 저주하고 피해 왔던 것이더라도 관계 없었다. 에릭은 무릎을 꿇고 바닥을 주먹으로 거칠게 치며 울부짖었다. 그를 구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했던 것이다. 제발, 그를 구할 수만 있다면-
반짝이는 것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오래 전 찰스에게 돌려받은 후 잊고 있던 것이.
"그래서, 전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잘못된 질문이오."
찰스는 눈앞에서 식사를 마쳐가는 남자를 회의적인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물론 찰스의 앞에도 꽤 훌륭한 식사가 차려져 있었으나 입맛은 커녕 아예 식욕 자체가 들지 않았다. 두 번이나 자기 목숨을 빼앗을 뻔 한 '괴물' 앞에서 태연하게 식사할 수 있는 강심장도 세상 어디엔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찰스는 그러한 강심장이 아니었다.
"그나저나 조금이라도 들지 않고? 좀 있으면 배고파 질 거요."
"전혀 생각이 없군요. 미안합니다."
"안됐군. 그러면 좀 있다 홍차를 한 잔 할 텐데..."
"그건 좋군요."
다만 홍차라면, 기왕 영국식 홍차라면 바로 지금 이 상황에서 매우 간절했다. 적어도 뜨거운 차를 한 잔 마시고 냉정하게 생각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 찰스를 바라보며, 클라우스는 싱글싱글 웃었다. 선선하고 관대해 보이는 미소였지만 역시 눈은 달랐다. 감각적으로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호의와 선의는 무려 진심이다. 그러나 이 쪽을 면밀히 살피는 차가운 눈 또한 그의 본질이었다. 이제 더 강해진 능력으로 되짚어 봐도, '클라우스 슈미트'라는 인격의 전모가 전혀 짐작도 가지 않는다는 건 꽤 놀라운 일이었다. 깊은 안개 속에 자리잡은 그의 정신세계는 에릭의 것보다 월등히 넓고 깊었다. 아마 좀더 집중할 기회만 주어진다면 더 깊이 들어가 볼 수 있겠지만, 그러면 상대방이 이상을 알아차릴 것이다.
"박사, 당신은 참 흥미로운 인물이오."
"...예?"
푸른 눈이 이 쪽을 빤히 보고 있다. 식사를 마치고 독특하게도 맑은 물 한잔으로 입가심을 한 지주는 테이블 위에 손을 깍지껴 얹으며 찰스 쪽으로 얼굴을 기울인다. 마치 아주 은밀한 이야기를 하듯, 나직하게 말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별 것 아닌 학자 나부랭이로 생각했지."
"......"
"보통 인간들과 다를 것 없어. 별반 가치 없는 고깃덩어리들, 그래, 뇌는 좀 맛있지만."
반사적으로 주위를 둘러 본 것은 찰스였다. 목소리가 들리는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고, 그러고 보니 식당 앞에서 시중을 들기 위해 대기하던 하인들의 자리조차 텅 비어 있었다.
"...그것 참 대단한 취미시군요."
"내가 얼마동안 살아왔다고 생각하시오?"
찰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클라우스를 바라보았다. 외견상 보이는 나이는 기껏해야 40대 중반이다. 하지만 그의 내부세계는 너무나 깊고 어두워, 찰스는 그 안에 어떤 방들이 얼만큼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보통 사람과는 다르다는 건 알겠습니다."
"대단하군."
남자가 몸을 일으킨다. 천천히 이 쪽으로 다가온 그가 찰스의 턱을 들어올렸다. 피하려면 피할 수 있겠지만, 이 남자의 힘이라면 다음 순간 아마 더 강한 힘으로 자신의 의사를 관철하리라. 시선을 피하지 않는 찰스의 눈을 한참 동안이나 응시하던 그가 툭 하고 말을 던졌을 때, 찰스는 그 의미를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샤스텔이 생각나는군. 그가 딱 자네같은 눈을 가졌었지."
"...예?"
"짙은 푸른 색 눈, 만용도 아니고 공포도 아니고, 나를 두려워하면서도 두려워 하지 않는 시선 말이오. 그 땐 참 즐거웠지. 행복한 시간이었어."
오랜 추억을 회상하는 얼굴이 된 슈미트가 미소를 지으며 찰스를 바라보았다. 찰스는 방금 전 던져진 말 중 한 단어가 그에게 너무나 익숙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눈을 크게 떴다. '샤스텔', 그 단어가 어째서 익숙한 것일까? 그런 사람을 만난 적이 있던가?
"난 자네같은 족속들을 알아. 상냥하고 예의바른 것 같지만 상당한 고집쟁이들이지. 보통의 겁 많은 자네 종족들과 달리, 언뜻 물러 보이면서도 절대 자기 뜻을 꺾지 않는 그런 부류고."
샤스텔, 찰스가 만난 사람 중에서는 없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분명 그 이름을 그는 알고 있다. 오래 된 책에서 본 기억이 났다. 샤스텔, 샤스텔...
"인간들은 어리석어. 정말로 한숨이 나올 정도로 어리숙한 원숭이들이지만 가끔 우리들을 매혹시키는 존재가 튀어나온단 말이지. 그리고 그들은 하나같이-"
장, 장 샤스텔, 드디어 생각해 낸 찰스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사냥꾼 장 샤스텔, 1767년, 송 도베!
"설마..."
"하나같이 우리에게 치명상을 입히더군."
"제보당의 야수 La bête du Gévaudan!!"
자기도 모르게 프랑스어로 외쳤다. 잠시 놀란 얼굴을 했던 클라우스가 오히려 환히 웃으며 박수를 친다. 그 반응을 보면서 찰스는 심장이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믿을 수가 없었다. 만일 클라우스 슈미트가 그 '야수'라면 그는 적어도 백년 이상을 이 모습으로 살아왔다는 이야기가 된다.
"제보당...당신이..."
"그래,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고 있지."
심지어 찰스를 향해 마치 자랑스럽게 자기 소개를 하듯 가슴에 손을 얹고 살짝 고개를 숙이기까지 한다. 긍지마저 묻어나는 그 몸짓이 끔찍스러워, 찰스의 온 몸에는 오한이 들었다.
"당시 나는 혼자가 아니었어."
'제보당의 야수', 세간에는 거대한 늑대, 혹은 늑대인간의 급습으로 알려진 일련의 끔찍한 습격 사건이다. 1764년에 한 소녀의 눈에 띈 이후, 3년간 그 '야수'에게 죽은 사람의 수만도 100명 가까이 되었다. 사태는 갈수록 심각해 졌고, 프랑스 왕실에서는 늑대 사냥꾼으로 이름난 프랑스와 앙트완을 급파해 거대한 늑대를 잡아냈다. 하지만 야수의 인간 사냥은 계속되었고, 결국 1767년 송 도베 마을의 장 샤스텔의 손에 야수가 잡혔다. 도저히 늑대라고 부를 수 없는 거대고도 기괴한 '괴물'이.
"그럼 장 샤스텔이 잡은 것이 바로..."
"내 무리였소. 불쌍한 엠마."
클라우스가 눈을 감았다. 그의 머리 속에 펼쳐진 광경을 이제 찰스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비명을 지르는 옛 사람들, 승리감에 가득 차 울부짖는 야수, 클라우스의 '짝'은 그와 마찬가지로 거대한 괴물이었다. 다만, 온 몸은 불그스름했고 눈은 노란색이다. 그 눈동자 속에 담긴 흉포한 광기는 찰스의 피를 얼어붙게 했으나, 클라우스의 눈에는 그마저도 더없이 사랑스러운 것이었다. 내 짝, 내 무리, 나의 가족. 피에 젖은 그녀는 말 그대로 하얀 여왕이었다.
"그들은 이겼다고 생각했지."
분수에서 포도주가 솟아올랐다. 사람들은 떠들고 마시며 축제를 벌였다. 그들 한가운데, 왕에게 진상될 그 '야수'의 시체가 있었다. 나무 꼬챙이에 꿰여 네 다리로 선 것처럼 전시된 그 '괴물'을 향해 사람들은 오물을 던지고 침을 뱉고 욕설을 퍼부었다. 술에 절어 미친듯이 춤을 추는 사람들 사이에 그가 서 있었다. 지금 찰스의 눈앞에 선 남자가.
"하지만 졌군요."
그리고 그 남자는 이제 독일의 숲 속으로 숨어든 것이다. 아무도 자신을 의심할 수 없는 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여, 마을의 지주님으로 자리잡은 것이겠지. 적당히 '괴물'의 전설이 생겨나고 사람들이 외출을 금기시 하는 동안, 그는 자유롭게 이 곳 숲을 쏘다니고 짐승들을, 그리고 때로는 사람들을 사냥했으리라. 적당히, 왕이나 정부가 나설 필요 없을 정도로 주의깊게.
"그렇소. 하려고만 한다면 우리는 영생을 누릴 수 있지. 샤스텔은 죽은 지 오래고, 나는 여기 이렇게 살아 있소."
승리감 가득한 미소가 클라우스의 얼굴에 떠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다시 내 무리가 될 아이를 찾아냈지."
"에릭을요?"
대답하지 않고, 클라우스 슈미트는 벽 쪽으로 다가가 끈을 잡아당겼다. 하지만 사실 대답을 들을 필요조차 없는 노릇이었다. 잠시 후, 제법 그럴듯한 본 도자 찻잔 세트와 홍차가 도착했고, 찰스는 뜨거운 찻물을 들이키며 지금 들은 놀라운 이야기를 어떻게든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했다.
눈앞의 남자가 최소한 백년, 사실은 그 이상 묵은 괴물이라는 것과, 그런 그가 이 곳에 와서 숨어 있었다는 것과, 다시 한 번 자신의 '무리'를 만들기 위해 에릭을 늑대인간으로 만들었다는 것. 일련의 사실들이 가리키고 있는 방향이 간신히 찰스의 머릿속에 들어왔다.
차 한잔을 다 비울 무렵, 찰스는 클라우스에게 말을 건넸다.
"당신은 다시 한번 무리를 만들 생각인 겁니까?"
"오, 걱정 마시오. 제보당처럼 하진 않을 거야. 그건 너무 위험하지."
"결국 만들겠다는 거군요."
홍차 향기를 즐기던 남자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그 아이와 나는 아주 오랜 세월을 함께 할 거요."
"에릭이 그걸 좋아할까는 모르겠군요."
"걱정 마시오. 뭐건 익숙해지게 마련이니. 그 아이도 인간의 고기맛을 볼 때가 되었지."
평온을 가장하는 것도 한계였다. 찰스의 손에 들려 있던 빈 찻잔이 딸가닥 소리를 내며 밑접시 위에 내려앉았다.
"에릭은 누구도 해치고 싶어하지 않아!"
"그게 잘못된 거지."
"당신은 대체!"
"이해를 못하고 있군, 박사."
클라우스 슈미트 또한 찻잔을 내려놓았다. 평온해 보이는 그의 얼굴 안에서 차가운 시선이 이 쪽을 향한다. 마치 '이제 신사적인 시간은 끝났다'는 듯, 그는 웃음기 없는 얼굴로 찰스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저 바라보고 있을 뿐인데도 노려보는 시선을 마주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박사도 보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대체,"
"영원히 얼어붙은 '우리의 시간', 감히 인간 주제에 그 곳에 들어왔잖나."
순간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아니,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내가 굳이 이 긴 대화를 나눌 이유가 없지."
"영원히 얼어붙은..."
"태고의 늑대들을 보았겠지. 인간 따위가."
검고 거대한 그림자가 떠올랐다. 붉은 눈과 거대한 이빨, 그럼에도 어떤 위험도 광기도 느껴지지 않던 야수들,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얼어붙은 세계에서 달리던 그들. 그것이 에릭 마음 속의 단순한 상상이 아니라는 것은 찰스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어째서 슈미트도 그 세계를 알고 있는 것인가. 대체 이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쩌면, 그 '세계'는 단순히 한 사람의 마음 안에 있는 가상의 세계가 아닐지도 모른다. '모든' 늑대 인간들이 그 '세계'를 볼 수 있다면, 그렇다면...
그가 태고의 늑대를 보던 그 순간, 클라우스도 그를 보고 있었던 것이리라.
"설마..."
충격적인 사실을 깨닫고 경악하는 찰스 앞에서 클라우스가 몸을 일으켰다. 인간 모습일 때의 그는 전혀 거구가 아니었는데도 장신의 몸에서는 어떤 압도적인 기운이 흘러넘쳐, 찰스는 그가 자신의 바로 앞까지 다가오는데도 꼼짝할 수 없었다.
만일 원하기만 한다면 곧장 찰스의 머리 따위 으스러뜨릴 수 있을 만큼 강한 손이 찰스의 다갈색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내린다. 예상은 했지만 정작 그 손이 닿는 순간, 찰스는 거의 펄쩍 뛰어오를 것처럼 놀랐다.
"어떻게 거기 들어갈 수 있었지?"
그의 손이 목으로 향한다. 차가운 손가락이 목덜미에 와닿아, 찰스는 결국 참지 못하고 목을 비틀어 그 손을 피하고 말았다. 다음 순간, 슈미트의 손이 찰스의 목을 그러쥐었다.
"꼭 말할 필요는 없어. 그냥 네놈 목을 날리고 에릭에게 교훈을 주어도 나쁘진 않겠지."
"...!"
손에 가볍게 힘이 들어간다. 마치 키스할 듯 찰스의 얼굴에 얼굴을 가져다 댄 클라우스 슈미트가 찰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묻는다.
"어떻게 들어갔지? 말해."
"그건..."
긴장한 찰스의 감각에 갑자기 무언가가 느껴졌다. 너무나 익숙한 남자의 기척이었다. 동시에 슈미트 또한 뒤를 돌아보았다. 아마 그에게는 찰스의 것과는 또다른 '감각'이 있기에 그렇게 느낄 수 있는 것이리라.
"아, 기다리던 손님이 왔군. 하인들을 다 내보내길 잘 했어."
목이 해방되었다. 손을 가볍게 비벼 기대감을 표시하며, 클라우스 슈미트는 언제 찰스의 목을 졸랐냐는 듯 우아하게 의자에 앉았다.
"경고해 두겠소, 박사, 잠자코 있으시오."
"......"
"혹여라도 허튼 짓을 하면, 에릭은 당신 목이 날아가는 꼴을 눈앞에서 보게 될 거요."
찰스는 절망적인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클라우스 슈미트와 그 사이의 거리는 고작 5 피트 정도다. 만일 그가 에릭이 말한대로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팔을 뻗어 찰스의 목을 날리는 것은 너무도 간단할 터, 게다가 방금 그가 보였던 살의는 분명 진심이었다. 이전보다 많이 보이는 만큼, 찰스의 행동도 더 조심스러워졌다.
"고로 당신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에릭을 위해 점잖게 있어주길 바라겠소."
끝까지 악마같은 작자라고 생각하며, 찰스는 숨을 가다듬고 문을 바라보았다. 에릭이 점점 다가온다. 오로지 찰스의 안위를 걱정하며, 남자는 이 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그는 아마도 찰스의 냄새나 자취를 쫓아 이리 오고 있는 것이겠지. 마침내 문고리가 돌아가고,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째서인가 상처 투성이의 손에 어설프게 천을 감은 에릭이 들어왔다. 들어오자마자 잽싸게 찰스를 찾아내 훑어본 그의 푸른 눈에 안도감이 찼고, 그 모습을 바라본 찰스는 한편으로는 절망을 느끼면서도 기묘한 기쁨이 마음에 가득 차는 것을 느꼈다.
그가 정말로 이 곳에 온 것이다. 찰스를 구하기 위해.
"생각보다 늦게 왔구나, 에릭. 걱정하던 참이었단다. 우리는 방금-"
인자한 미소를 띤 클라우스가 입을 열었으나, 에릭은 차가운 태도로 말을 끊으며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지?"
"여전히 성급하구나."
"당신 말대로 얌전히 지내고 있었는데, 만족스럽지 못했나?"
"글쎄다, 별로 얌전했다고는 할 수 없었지. 안 그러냐?"
"......"
클라우스는 잠시 말을 멈추고 에릭을 응시하다, 결국 자신의 반문에 답이 없으리라는 것을 깨닫고 여상스레 말을 이었다.
"어쨌건 최후 통첩을 하기 위해 이렇게 박사까지 불러오게 되었구나."
"최후 통첩?"
"난 인내심이 많은 편이지만, 거기에도 한계는 있으니까 말이다."
일어서서 잠시 창 밖을 내다보며 뜸을 들이던 클라우스는 곧 두 사람 쪽으로 돌아섰다. 그리고 마치 아주 인자한 아버지가 아들에게 두 개의 장난감중 하나를 고르라고 시키듯, 다정하기까지 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에릭, 선택하렴."
"무슨 소리야."
"네가 이 인간을 네 손으로 죽여 줬으면 좋겠구나."
"...뭐라고?"
"아니면, 물론 다른 길도 있단다."
미소짓는 이빨이 빛났다.
"그를 우리 중 하나로 만들려무나. 여기 내 눈앞에서."
에릭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 계속
다음회가 최종이 됩니다. 일정은 무사히 사수할 수 있겠네요.다음화를 공개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건, 최선을 다 해 달리겠습니다.
- 둘의 능력이나 느낌은 원작과 비교가 안될 정도로 약화되어 있습니다.
- 달리고 또 달리는 중입니다.
클라우스의 방문 후, 둘은 거취를 옮길까 진지하게 고려했지만 결국 이 겨울에는 어렵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떠나지 말라'는 클라우스 슈미트의 경고도 문제였다. 그의 경계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짓은 하지 않는게 좋지 않겠는가.
하여 한동안 둘은 이제껏 하던 일들을 계속하는데 전념했다. 에릭은 추적과 사격은 물론이고 덫 놓는 법, 자취를 숨기는 법, 야영하는 법 등, 에릭은 자신이 전해줄 수 있는 모든 생존 지식을 찰스에게 가르쳐 주려고 노력했다. 그러한 열정적인 가르침 덕에 찰스의 사냥 실력은 꽤 나아졌고, 이제는 수사슴이나 여우, 심지어 늑대 등 꽤 잡기 어려운 동물들까지 잡아내는 지경에 이르렀다.
허나 이렇듯 착실하게 늘어가는 찰스의 사냥 실력과 달리, 에릭의 '힘'쪽에는 별 진전이 없었다. '클라우스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가능하다.'는 찰스의 말에 대해 에릭은 회의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이야기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그런 식으로 다룰 수 있는 힘은 아닌 것 같아."
"모르잖아. 혹시라도 노력해 본다면."
"찰스, 이걸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 막고 싶었던 적은 있었지만..."
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릭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그렇게 변신하는 스스로를 저주한 적은 있어도 인정하거나, 나아가 그 변신을 보름 외의 다른 기간에도 할 수 있기를 꿈꿔본 적조차 없었을 것이다. 찰스 또한, 이런 상황만 아니라면 굳이 에릭에게 그러한 일을 하도록 종용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슈미트의 위협이 그들 앞에 자리하고 있었고, 그러니 이젠 모든 것이 바뀌어야만 했다.
"에릭, 분명 할 수 있을 거야."
에릭은 불안한 눈으로 찰스를 바라보았다. 잠시 무언가를 설명하려다 포기하는 그의 마음 속에는 짙은 의혹과 희미한 희망, 그리고 무엇보다도 압도적인 두려움이 뒤섞여 있었다. 말하지 못했지만 그가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찰스는 알 수 있었다.
'과연 그래도 괜찮을까? 그런 내 앞에서 네가 안전할까?'
찰스는 에릭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찰스?" 의문을 담고 이름을 부른 에릭이었지만 곧 찰스의 키스를 받아주며 잠시 그 붉은 입술에 취했다. 입술을 뗀 찰스는 할 수 있는 한 가장 진지한 얼굴로 에릭에게 말했다.
"난 단 한 번도 늑대인 네 옆에서 두려웠던 적 없어."
"찰스..."
"노력해 보자. 에릭, 괜찮다면 내가 네 안에 들어가 볼게."
에릭의 시선이 흔들렸다. 이 쪽을 향해 전해져오는 걱정에 미소지으며 찰스는 말을 계속했다.
"단순히 그 힘 때문만은 아니야. 오히려 내 힘 때문이기도 해. 내가 무엇을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자네 마음에 들어가 무엇을 볼 수 있는지 알고 싶어서 그래."
잠시 망설이던 에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한 마디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위험할 것 같으면 얼른 빠져 나가."
"물론.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날 리 없어."
조금 못마땅한 듯 미간을 찌푸린 에릭의 표정에, 도저히 웃음을 터트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에릭에게 한 이야기는 농담이 아니라 말 그대로 진심이었다. 이제껏 다른 이의 경계심 없는 마음이나 선명한 감정 등을 읽어 오긴 했지만, 그 날처럼 누군가의 마음 속에 아예 '들어가' 본 것은 찰스로서도 단 한 번도 도달한 적 없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찰스는 에릭의 마음 속에 펼쳐져 있던 그 광활한 공간을 잊을 수 없었고, 또한 찰스 자신의 힘이 지금보다도 더 확장될 수 있다는 놀라운 가능성에 전율했다.
그래서 에릭의 허락 하에, 찰스는 하루에 일정 시간 반드시 에릭의 마음 속에 '들어갔다.' 처음 에릭의 마음 속에 들어갈 때 이미 겪었지만 다른 사람의 정신 세계에 스스로를 던지는 것은 의외로 위험한 일이었다. 그러나 에릭은 그를 사랑했고, 그래서 에릭의 마음은 찰스의 존재를 느끼는 즉시 거의 모든 방어와 거부를 포기하고 순순히 찰스를 받아들여 주었다. 그것은 사실 아주 특별하고 행복한 경험이기도 했다.
다른 이들의 마음에도 이렇게 쉽게 들어갈 수 있는 것일까? 아마도 힘들 것이다. 맨 처음, 자신의 의사를 거부하던 에릭의 마음은 강렬한 폭풍 그 자체였음을 찰스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제는 좀 나을지도 모르지만, 에릭의 오두막에서 지내는 동안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기회는 사실상 없었고, 숲의 동물들의 마음에는 들어가는 것이 아예 불가능하다는 사실만 알 수 있었다.
어쨌건 그래서 찰스는 에릭의 마음 속을 지속적으로 들여다보았고, 그 안에서 늘 '열쇠'를 찾아다녔다. 에릭의 마음 속의 수 없이 많은 공간 어딘가에 그가 입었던 깊은 상처를 치유할 열쇠가 숨어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늑대인간'인 스스로를 저주하고 경원하는 에릭이 쇼우에게 맞설 수 있을 만큼 강해지려면, 그 마음 안 어딘가 있을 그 금단의 문을 열어야만 할 것이었다.
그렇게 에릭의 마음 속을 오가면서, 찰스는 그간 에릭이 겪었던 수없이 많은 고뇌와 고통을 보았고, 또한 겪었다. 그것은 일생 동안 스스로를 괴물로 여기며 살아온 한 남자의 삶이었고, 그 앞에서 찰스는 결국 이미 답했다고 생각하던 그 질문과 다시 맞닥뜨리게 되었다.
- 그의 '힘'을 키우는 것이 과연 올바른 일일까.
에릭 렌셔는 '늑대 인간'인 그 자신을 명백히 혐오하고 있었다. 에릭에게 있어 그것은 클라우스 슈미트가 그에게 건 저주에 불과했고, 어머니를 앗아가고 인생 전부를 망쳐 놓은 끔찍한 사고일 뿐이었다. 그 부정적인 분노와 격분을 느낄 때마나, 찰스는 에릭이 스스로를 증오하고 저주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에는 깊은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에릭을 신뢰한다 해도 결국 '인간'인 찰스 자비에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간혹 어슴푸레한 의혹이 떠오르곤 했다.
- 그가 클라우스처럼 되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을까.
예컨대 클라우스 슈미트는 분명 '괴물'이다. 그는 자비심 없이 인간을 죽이고 아무렇지도 않게 에릭의 어머니를 해치고 에릭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려 했다. 하지만 그가 과연 처음부터 그런 존재였을까. 어쩌면 그도 한때는 에릭처럼 자신의 힘을 두려워 하는 평범한 인간이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처음에는 부정하기 쉬웠으나, 에릭의 어두운 과거를 알게 될수록 그 생각은 끈질기게 찰스의 마음 속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찰스 자비에는 보았던 그 어린 소년을 떠올렸다. 아무도 없는 황야에 홀로 서서 그를 밀어내기 위해 애쓰던 그 아이, 어린 에릭을.
- 에릭은 그렇게 되지 않을 거야.
그럴 때면 이러한 말을 스스로에게 아무 거리낌 없이 들려줄 수 있었다. 게다가 그는 이미 늑대인 에릭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 거대한 회색 늑대는 언제나 기꺼이 몸을 던져 그의 목숨을 구해 주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좀더 가벼워져, 찰스는 에릭의 마음 속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갈 힘을 얻곤 했다. 믿자. 문 너머에 있는 것은 광폭한 괴물이 아니라 바로 그 늑대이리라. 사려깊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앞길을 인도하고 뒤를 지켜주던 또다른 에릭 렌셔. 새로운 문을 만나고 그 곳의 입구를 열어 보아야 할 때마다, 찰스는 언제나 그 늑대의 따스함을 떠올리며 용기를 얻었다.
"내 마음 속엔 뭐가 있지?"
"여러가지."
"내가 겪었던 일들?"
"그리고 자네의 생각들이 담겨 있어. 에릭 렌셔의 마음 속은 아주 넓거든."
"...끔찍하지는 않고?"
그래서 어느날 모닥불가의 그에게, 찰스는 아무 거리낌 없이 답해줄 수 있었다.
"전혀. 그 곳에는 행복한 기억들이 많이 들어 있더군."
에릭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찰스를 쳐다보았고, 찰스는 빙그레 미소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 곳에는 반짝이는 시냇물과 봄의 들꽃이 있어."
"믿기 어렵군."
"노란 데이지와 물 오른 전나무들이 풍겨내는 독특한 향기를 맡을 수 있지. 가끔은 비가 오고, 그러면 흰 옷을 걸친 검은 머리 여인이 꽃다발을 만들며 노래를 해."
"......"
에릭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찰스를 바라보았다. 이 장면이 그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찰스는 알았다. 오래되어 거의 퇴색된 기억이었지만 그 향기만은 무섭도록 강렬하게 그의 마음 속에 각인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티티새 소리를 흉내내며 어린 에릭을 끌어안고 빙글빙글 돌지. 그러다 넘어졌지만 아무렇지도 않았어. 왜냐면-"
에릭이 눈을 감았다. 그 눈꺼풀 뒤에 아로새겨져 있던 옛 기억을 찰스의 맑은 목소리가 매끄럽게 읊는다.
"고사리풀이 하도 두텁게 깔려 있어서 둘다 푹신한 풀 위에 그냥 주저앉고 말았거든."
"...그리고 그 흰 치마에 풀 물이 드는 바람에 어머니는 꽤 애를 먹었고."
남자의 목소리가 떨려 왔다. 찰스는 손을 올려 그의 어깨를 감싸안았고, 에릭은 눈을 깜박여 눈물을 털어내며 말을 계속했다.
"너무 오랫동안...잊고 있었는데."
찰스는 에릭의 등을 쓸어주었다. 잊어왔던 기억들에 휩쓸린 에릭의 마음은 지금 이 순간 찰스가 보아왔던 중 가장 행복에 가까운 형태로 부드러워져 있었다. 따뜻함이 그의 안에서부터 흘러나와 찰스의 마음까지 덥혀 주었다. 그런 에릭의 눈을 들여다 보며, 찰스는 한 마디 한 마디 영혼에 새기듯 찬찬히 말했다.
"네 마음 속에는 계속 들어 있었어."
어느새 키스가 시작되었고, 찰스는 에릭의 입술을 음미하며 다시 한 번 확신을 가졌다.
- 에릭은 괴물이 아니야. 그리고 앞으로도 절대 괴물이 되지 않을 거야.
그 날로부터 며칠 뒤, 마침내 찰스는 에릭의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문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그것은 거친 발톱 자국이 가득한 피로 물든 철문이었다. 어두운 곳에 존재하는 그 문에는 두터운 쇠사슬이 감겨 있었고, 안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무섭도록 검은 어둠 뿐이었다. 찰스는 그 문을 바라보며 고요히 - 정신적으로 - 깊이 숨을 들이킨 다음 천천히 내쉬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저 안에 있는 것을 직면할 준비가 되었는가?'
솔직히 말한다면 무서웠다. 하지만 에릭을 생각하면 멈출 수 없었다. 두터운 사슬을 손에 쥐자 얼어붙을 것 같은 냉기가 느껴졌다. 결코 끊어질 것 같지 않은 둔탁한 고리는, 그러나 찰스의 힘과 만나 서서히 부스러지기 시작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영원히 후회할 일 따위 하지 말고 에릭의 마음 밖으로 사라져.' 마음 속에서 마지막 유혹의 속삭임이 들려왔지만 찰스는 그것을 무시했다. '에릭은 괴물이 아니야. 그리고 절대 괴물이 되지도 않을 거야.' 그의 입술을 기억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을 기억해 냈다. 사슬이 끊어진 문에 손을 대자,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내며 경첩이 움직였다. 살아 꿈틀 대는 것 같은 어둠이 그 입을 벌린다. 찰스 자비에는 망설임 없이 발을 내딛었다.
문 안의 시간은 밤이었다. 등불같이 휘황한 별이 타오르는 찬란한 밤이 살아 꿈틀대는 어둠 속에 펼쳐져 있었다. 모든 것이 생생한 그 세계에서 흰 눈에 덮인 땅만이 깊이 잠들어 있을 뿐이었다. 찰스는 조심스레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시각, 이 광경 모두 경험이 있었다.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바로 그가 꿈에서 보았던 늑대의 세상이었다. 아주 작은 빛줄기마저도 칼같이 잡아내는 늑대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세상. 거대한 태양같은 보름달이 뜬 하늘과 영원히 얼어붙은 눈 덮인 땅.
- 영원히.
찰스는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 전율했다. 단 한 그루의 나무도 보이지 않는 흰 설원, 이 곳은 그와 에릭이 있던 검은 숲이 아니다. 새로운 땅, 나무도 풀도 없는 미지의 땅이었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당연히도 인기척은 없었고, 이 곳이 어디인지 정확히 알 수 있는 어떠한 표시도 없었다. 그저 한 가지 확신만이 이상할 정도로 강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 이 곳은 영원히 얼어붙은 땅이다. 지금은 어디에도 없는 곳이다.
찰스는 발걸음을 옮기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혹시라도 에릭, 혹은 '늑대'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을까 하여 주위를 살폈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아까 문 앞에서 느꼈던 확신이 점차 의혹으로 변해 갔다. 혹시 엉뚱한 문을 찾아낸 것은 아닐까? 그저 '괴물'에 대한 일그러진 기억이 들어 있는 또 한 군데 영역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심을, 찰스는 고개를 저어 단번에 떨어냈다. 그렇지 않다. 아까의 문에서 느껴졌던 소름끼치는 감각을 무시할 수는 없다. 분명 에릭의 '늑대'는 이 곳 어디엔가 있으리라.
계속 걷는 동안 찰스의 입에서 입김이 나오기 시작했다. 에릭의 마음 속에 찰스의 의식이 들어온 것 뿐인데 거의 물리적으로까지 느껴지는 추위에 찰스는 내심 놀랐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걸까? 생각하는 순간, 검은 그림자가 몰려나왔다.
"...!"
고개를 든 순간 마주친 것은 붉은 불꽃같은 눈이었다. 온 하늘을 가릴 정도로 거대한 야수가 그를 노려보고 있었고, 거대한 앞발이 영원히 얼어붙은 흰 눈 위에 지워지지 않을 자국을 아로새겼다. 적의와는 전혀 다른 감정이 물리적인 힘을 갖고 돌풍처럼 몰아친다. 이제까지 에릭의 마음 속에서 보거나 겪어왔던 감정의 폭풍들과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잠깐, 잠깐! 에릭, 내 말을 들어!"
- 물러가라.
찰스는 말을 멈추고 눈을 크게 떴다. 이 곳의 거대한 야수, 그가 본 늑대는 에릭이 아니었다. 야수가 몸을 돌려 찰스에게서 멀어진다. 육중한 발소리가 사라져 가는데도 돌풍은 더욱 거칠게 몰아닥쳤고, 결국 찰스의 몸이 어딘가로 날려가기 시작했다.
- 너는 '우리'가 아니다.
- 이 곳에 있어선 안된다.
- 돌아가라.
흙바닥이라면 손톱을 박고서라도 매달렸겠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이를 악문 찰스 앞에서 야수의 그림자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고, 찰스는 결국 비명을 지르며 날려가 문 밖으로 '추방'되었다. 눈을 번쩍 뜨자 그곳은 현실이었고, 그의 앞에 앉아 있던 에릭이 걱정스러워 하는 얼굴로 찰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찰스는 잠시 혼란에 빠져 있다 간신히 정신을 추스렸다. 지금 그가 보고 겪었던 것을 정리하는 동안 에릭은 찰스에게 시원한 물 한 컵을 가져다 주었고, 그것을 단숨에 들이킨 찰스는 숨을 간신히 가라앉히며 이마의 땀을 닦았다.
"찰스?"
"...찾았어, 에릭."
찰스를 바라보던 남자의 얼굴이 경직되었다.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찰스는 에릭의 손을 잡고 그가 보았던 것에 대해 모두 말해 주었다. 그리고는, 놀란 얼굴로 이 쪽을 바라보는 에릭에게 이야기했다.
"난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어."
"어째서? 혹시 그 안에 괴물이..."
"아니야, 그런 게 아냐 에릭."
찰스의 양 손이 에릭의 뺨을 감싸쥐었다. 짙은 푸른 눈동자가 청회색 눈동자에 시선을 맞춰 왔고, 할 수 있는 한 다정한, 하지만 아무리 봐도 경직된 미소를 떠올린 찰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문 안에는 네가 들어가야 해. 너 외에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어."
에릭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런 그의 손을 굳게 잡으며 찰스는 거의 속삭이듯 나직하게 말했다.
"'그들'이 널 기다리고 있어."
"놈들이..."
"에릭, 그들을 믿어 줘."
"찰스, 그건 괴물이야. 내 안의 괴물이라고!"
"슈미트와는 달랐어. 에릭! 그들은 날 추방했지만 해치려고는 하지 않았어."
"...알겠어."
잠시 고민하던 그가 고개를 끄덕였을 때, 찰스는 간신히 안도감을 느끼며 미소지을 수 있었다.
"이 일에 대해서는 내일 얘기하자. 마을에 다녀온 뒤 생각해 보자고."
에릭은 영 불안한 기색이었지만 말없이 고개를 다시 끄덕였고, 찰스는 그대로 그 곁에 누워 에릭의 체온에 감싸여 깊이 잠들었다. 꿈에서 그는 다시 한번 그 설원을 본 듯한 기분이 들었고, 희미하게 울리는 늑대의 울음 소리를 들은 듯도 싶었다. 하지만 둘 모두 희미한 그림자로만 감돌았을 뿐이었다.
이윽고 아침 햇살에 반쯤 깰 듯한 기분으로 옆자리를 더듬었을 때, 마을에 가는 날이면 늘 그렇듯 에릭이 일찍부터 떠나 버렸다는 것을 깨달은 찰스는 다시 베개를 끌어안으며 눈을 감았다. 에릭은 없었지만 이부자리에는 그의 체취가 가득 했고, 이렇듯 별다른 훈련이 없는 김에 좀더 행복한 수면을 즐기며 늘어져 있고 싶었던 것이다.
눈을 감고 있어도 실내의 바람은 느껴진다. 문이 열렸고, 바깥의 싸늘한 공기가 찰스의 얼굴에까지 흘러 닿아왔다. 들어서는 인기척에 괜스레 장난기가 든 찰스는 계속 잠든 척 하기 위해 짐짓 눈을 감고 누운 자세를 고쳤다. 그리고 에릭이 눈치챘나 살펴보기 위해 몰래 정신을 집중한 순간,
"행복한 늦잠이군, 자비에 박사."
찰스는 눈을 떴다. 정신의 손길이 상대의 생각에 닿은 순간 깨달은 사실에 온 몸에 오한이 들었다. 눈앞에 서서 이 쪽을 내려다 보고 있는 남자의 얼굴에는 친절한 미소가 가득 떠올라 있지만, 여전히 그 눈에는 단 한 점의 미소조차 담겨 있지 않았다.
"클라우스 슈미트..."
"옷 챙겨 입을 시간은 주겠소. 어서 준비하시오."
"어째서... 어째서 여기 온 겁니까?"
남자가 예의바르게 웃었다.
"여기 온 이유는 나중에 가르쳐 줄 테니 어서 옷을 입고 나오시오. 물론 옷을 입지 않고 있어도 나는 별 상관 없소만."
"거절할 수 있나요?"
"맘대로."
하지만 그 순간 클라우스의 생각은 전혀 다른 얘기를 하고 있었다. 지금 죽여버리고 에릭에게 '교훈'을 주는 게 나을지, 아니면 굳이 데려가서 그의 '계획'을 진행하는게 나을지 고민하는 마음의 소리를 들은 찰스는 고분고분 일어나 옷을 걸쳐입기 시작했다.
"똑똑하군."
클라우스는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찰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인간 치고는 아주 똑똑해. 그럼 갑시다. 마차를 대기시켜 두었으니."
"...에릭은요?"
"그 아이는 곧 내게 올 거요."
보란 듯이, 클라우스는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실내에 떨구었다. 그러고 난 뒤 마치 귀부인을 에스코트 하기라도 하듯 찰스를 향해 손을 내밀었고, 찰스는 굳은 얼굴로 그 손을 무시한 채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절 죽일 겁니까?"
"글쎄? 모르겠소."
남자는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
"그 아이 하기 나름에 달려 있소이다. 그래, 어쩌면..."
이어 클라우스 슈미트의 마음 속에 기대감이 일렁이는 것을, 찰스는 경악 속에 감지해냈다.
"당신도 '내 무리'에 들어오게 될 지도 모르지."
그는 진심이었다.
- 계속
달리고 또 달립니다. 다음화에 끝나겠네요. 혹은 에필로그가 분리되던가요...
곧 예약 페이지 개설하겠습니다...
- 둘의 능력이나 느낌은 원작과 비교가 안될 정도로 약화되어 있습니다.
- 이제부터는 새로운 내용입니다. 달린다 달려!
찰스는 꿈을 꾸었다. 눈, 지긋지긋한 눈이 사방에 쌓여 있었고, 그는 흰 눈이 가득 쌓인 숲에 홀로 고립되어 있었다. 숨을 들이키자 냉기가 뼛속까지 밀려들었고, 적막한 숲 속에 홀로 선 길 잃은 어린아이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덜덜 떨며 주위를 둘러보던 그는 먼데서 작은 불빛이 빛나는 것을 보고는 반가운 마음이 들어 그 쪽으로 달려갔다. 아니, 달려가려 했다. 하지만 발이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영문을 몰라 발 아래를 내려다 보니, 놀랍게도 흰 눈에 완전히 묻혀버린 발이 눈에 들어왔다. 눈, 지겨운 눈, 하지만 단지 눈 때문만이 아니었다. 처음엔 움직이려 애쓰다 나중에는 손을 뻗어 어떻게든 잡아당겨 보았지만 발은 움직이지 않았고 그저 마음만 조급해 졌다. 찰스는 이를 악물고 이 눈밭에서 발을 떼어내 보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고, 곧 이 지독한 추위에도 불구하고 온 몸이 땀으로 젖어버릴 정도로 지쳐 버렸다.
잠시 곰곰히 생각하던 그는 이번에는 허리를 숙이고, 발을 들려고 애쓰는 대신 손을 뻗어 발 주위의 눈을 치우기 시작했다. 어쩐 일인지 발이 완전히 고정되어 버린 상태에서 거의 무릎까지 덮인 눈을 파헤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어쨌건 찰스는 이를 악물고 계속 눈을 치워 나갔다. 곧 손가락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아파 왔지만 결코멈추지 않았다.
눈이 점차 파여 나가면서, 찰스의 발 주변에서 무언가가 슬그머니 윤곽을 비치기 시작했다. 발목쯤까지 치워내자 그 형태는 좀더 명확해졌는데, 그것을 본 그는 잠시 입술을 물고 고민하다 방법이 없다는 생각을 하고는 더욱 더 깊이 파헤쳐 나갔다. 검은 색의 무언가가, 바위같이 단단한 뭔가가 마치 족쇄와 같은 모양을 하고 찰스의 발목 주위에 둘러감겨 있었다. 파헤치고 또 파헤치다 지친 찰스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들었고, 멀리서 빛나던 작은 불빛이 지금이라도 꺼질 듯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이를 악물고, 그는 다시 발목의 검은 족쇄를 완전히 드러내기 위해 노력했다. 계속 눈을 파낸 손가락은 이제 거의 아무 감각을 느끼지 못했고, 손가락이 붙어 있는 손 부분이 떨어져 나갈 듯 아파왔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불빛, 거기 무엇이 있을지는 전혀 알 수 없었지만, 어떻게든 저 불빛 쪽으로 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직감이 들었던 것이다. 다급히 눈을 치우던 찰스는 드디어 자신의 발목을 그토록 강하게 휘어감고 놓아주지 않던 것이 무엇인지 볼 수 있었고, 사정만 허락했다면 즉시 뒤로 펄쩍 뛰어오를 만큼 크게 놀랐다.
손.
손이라고 불러야 할까. 그럴 수 있다면, 찰스의 발목을 붙들고 있는 것은 커다란 두 손이었다. 한 개의 엄지 가락과 칼날같은 네 개의 손가락, 그 표면은 피부라기보다는 껍질이라 불러야 적합할 정도로 단단히 굳어 있었고, 각 손가락 끝에는 뾰족한 발톱이 나 있었다. 강철 죔쇠처럼 발목을 틀어쥔 손은 족쇄라 느껴질 정도로 차갑고 딱딱했으며, 아무리 힘을 가해도 도무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숨을 헐떡이며 어떻게든 공포에 질리지 않기 위해, 침착하기 위해 노력하던 찰스의 귀에 뭔가 불길한 소리가 들려 왔다. 어느새 눈은 그쳐 있었고, 드러난 환한 달빛 밑으로 거대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명백히 공포에 질린 찰스의 눈앞에서 그 그림자는 더욱 거대하게만 변해갔고, 아주 먼데에서도 알아볼 수 있는 가지런한 이빨과 충혈된 두 눈이 찰스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다가왔다. 더이상 견딜 수 없었고, 찰스는 비명을 질렀다. 길고 긴 비명 끝에 괴물의 이빨이 찰스를 덮쳤고, 그 순간 그는 잠에서 깨어났다.
"찰스?"
눈앞에 검은 그림자가 있었다. 찰스는 순간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으나, 곧 그림자의 주인이 밖에서 막 돌아온 에릭임을 알아보고 이불 속에 기어들어가 몸을 웅크렸다. 대체 무슨 일인지 묻는 에릭의 손길이 식은땀에 젖은 찰스의 머리와 등을 다정하게 쓸어 내렸으나, 찰스는 한참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불길한 예감에 몸을 떨었다. 아직도 꿈에서 본 괴물이 눈에 선했다. 가지런한 이빨, 충혈된 두 눈, 잿빛 모피.
'그것'은 분명 에릭이었다.
찰스는 이를 악물고, 에릭을 힘껏 끌어안은 뒤 숨을 골랐다. 등을 문질러 주는 에릭의 손길은 실로 다정했지만, 진정되어 가는 찰스의 머리에는 다른 것이 느껴졌다. "...에릭?" 이름을 부르며 시선을 돌려 에릭과 눈을 맞췄다. 이 쪽을 내려다 보는 청회색 눈동자에서 방금 느낀 것과 같은 감정들이 느껴진다. 불안과 두려움.
"무슨 일 있었어?"
질문을 들은 에릭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그렇게 굳은 얼굴을 하고 한동안 찰스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와락 끌어안고 깊이 숨을 들이쉰 후 한숨짓는다.
"에릭?"
한숨을 내쉬고도 한참동안 아무 말이 없다. 조심스레 그의 마음을 훑어가자 답이 떠올랐다. 거의 직접 말하기라도 하듯 분명히 느껴지는 그것에 찰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가 왔구나."
에릭의 입술이 찰스의 이마에 머물렀다. 그리고는 "대체 그가 무슨 말을 했어?" 라고 묻는 붉은 입술을 막듯 키스한다. 한참 후, 간신히 말할 결심을 한 듯 숨을 들이켰다.
"찰스, 내 말 잘 들어. 네 안전을 보장해 주겠대."
"뭐?"
"여길 떠난다면 무사히 갈 수 있도록 해 주겠다고 했어."
찰스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곧 의혹에 젖어 가늘어졌고, 에릭의 마음 속에서 곧장 답을 읽어낸 것인지 곧 다시 벌어졌다. 이제 거기 가득한 것은 바로 분노였다.
찰스는 눈을 감았다. 엄습하려는 절망감을 누르는 동안 새로운 분노가 끓어올라왔다. 늙고 교활한 괴물 같으니! 클라우스 슈미트는 에릭의 약점을 너무나 잘 알았고, 그것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까지 완벽하게 숙지하고 있었다. 소중한 이를 다시는 잃고 싶지 않다는 그 바램을 이용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 에릭은 크게 흔들리고 있다. 어떻게든 그 동요를 막아야 한다. 차분하게 마음을 가다듬은 그는 에릭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최대한 침착하게 질문했다.
"그 말을 믿어?"
"찰스."
"클라우스 슈미트의 약속을 믿느냐고 묻고 있는 거야."
에릭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주름이 깊이 패인 미간과 꾹 다문 입이 그가 느끼고 있는 괴로움을 웅변하고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절대 물러날 생각이 없는 찰스는 이를 악물고 말을 이었다.
"그는 널 원해, 에릭."
"알고 있어."
"그리고 날 증오해."
"......"
"에릭 렌셔, 잘 들어. 놈은 반드시 날 죽이고 말 거야."
"찰스!"
견디지 못한 에릭이 언성을 높였지만 찰스는 결코 지지 않고 오히려 더 언성을 높였다. 에릭의 괴로움이 너무나 생생히 느껴졌지만 여기서만은 물러설 수가 없었다. 설령 그가 더 고통스러워 하더라도 이 잘못된 상황을 되돌려 놓아야만 한다.
"난 놈의 마음을 봤어. 에릭, 그는 날 죽이고 싶어해. 날 믿어. 그건 진심이었어."
"찰스..."
에릭의 시선이 흔들렸다. 여전히 그의 마음 가득 들어찬 두려움을 느낀 찰스는 놀란 눈으로 에릭을 응시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어째서 그가 이렇게까지 클라우스를 두려워 하는 것인가. 그 이유는 깊은 안개 속에 숨어 있었고, 찰스는 이제껏 늘 보아 왔던 그 안개가 이제는 지긋지긋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에릭, 대체"
"찰스, 넌 놈을 몰라."
"잊었는지도 모르겠는데, 에릭, 난 이미 그 괴물을 봤어. 에릭 자네가 보았던 바로 그 괴물을."
에릭이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눈을 감았다.
"그 얘기가 아냐!"
"그럼 얘기해 줘, 대체 뭐가 문제인데?"
이를 악물고 묻는 찰스의 어깨를 잡고, 에릭은 한 글자 한 글자를 찰스의 마음에 새겨 넣을 듯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놈은 나보다 강해."
"그래, 정면에서 맞붙으면 불리할 지도 몰라, 하지만"
"그 얘기가 아니야, 나는 클라우스를 절대 이길 수 없어. 널 지킬 수 없어, 찰스!"
"에릭 제발, 그러니까 함께 떠나자고 했잖아."
"놈이 그걸 눈치챘어."
"하지만-"
"지금 널 보내지 않으면 널 죽일 거야."
"에릭!"
"놈에겐 그럴 힘이 있고, 내겐 널 지킬 힘이 없어."
"대체 왜 그렇게 확신하지?"
"내 눈앞에서 변신했어. 바로 조금 전에!"
순간 에릭이 한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아, 찰스는 멍하니 에릭을 바라보았다. 그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은 아주 간단히 알 수 있었지만 예상 외의 말에 그렇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보름도 아니며 밤도 아니다. 어떻게 클라우스 슈미트가 괴물로 변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게 지금 무슨..."
"내 마음을 읽어, 찰스. 내가 본 것을 다시 봐."
잠시 에릭의 눈을 바라보던 찰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할 수 있는 한 정신을 집중하기 위해 노력했다. 클라우스 슈미트, 그리고 끔찍한 괴물. 그 순간 에릭이 느꼈던 순수한 절망과 공포. 망연자실한 시선 앞에서 에릭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두려움, 찰스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지킬 수 없다는 무력감, 그리고 끔찍스러운 자기 혐오가 뒤죽 박죽으로 섞여 뺨 위로 흘러내렸다. 에릭이 힘겹게 입을 열어 간신히 말했다.
"제발, 떠나 줘."
"에릭."
"제발."
절망. 그것은 순수한 절망의 눈물이었고, 찰스는 그가 에릭에게 희망을 줄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랜 침묵 후, 그는 눈앞의 남자보다는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 선언하듯 말했다.
"알겠어."
"......"
"그 말대로 할게."
에릭이 찰스를 끌어안았다. 셔츠의 어깨 부분이 젖어 왔지만, 찰스는 차마 그 남자의 등조차 쓸어줄 수 없었다.
가져온 것이 많지 않아 가져갈 것도 별로 없었다.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샌 두 사람은 핏발 선 눈을 한 채 오두막 입구에 서 있었다. 에릭은 숲에서 벗어날 때까지 함께 가겠다고 약속했던 터였다. 여장은 다 꾸렸지만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아 머뭇거리던 찰스는 에릭을 향해 실낱같은 희망을 담고 말을 건넸다.
"정말로 이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해?"
"찰스."
짙은 푸른색 눈에는 기대와 체념이 뒤섞여 있다.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들어줄 수 없는 에릭은 그 시선을 마주하는 것조차 견디기 어려워 차마 눈을 맞추지도 못했다.
"분명히 후회할 거야."
"...알아."
"그런데 왜?"
에릭의 눈이 떨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찰스는 말을 이어갔다. 그나마 지금이 에릭의 생각을 돌이킬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이라는 직감에 따른 것이었다.
"그건..."
"그래, 클라우스 슈미트, 그게 우리 문제지. 하지만 생각해 봐, 에릭."
"찰스."
"모든 것이 다 달라질 수 있어. 우리가 함께 노력하면-"
에릭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눈가는 붉어졌고, 청회색 눈동자는 더없이 불행해 보였다.
"젠장, 찰스! 그만해."
그만하라고 외치고 있었지만 그의 마음이 외치는 소리가 선명히 들려 왔다. '나도 함께 가고 싶어. 함께 있고 싶다고.' 찰스는 그 마음에 답을 보냈다.
"그럴 수 있어, 에릭."
에릭의 양 손이 찰스의 얼굴을 감쌌다. 말릴 틈도 없이 떨리는 입술이 찰스의 입술을 막아 왔고, 물러서려는 얼굴을 붙든 채 에릭은 더없이 격렬하게 키스해 왔다. 찰스는 손을 들어 에릭의 팔을 밀어내려 했고, 에릭은 더 강인하게 그를 끌어안고 밀어붙이며 키스를 계속했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 흐른 뒤, 간신히 서로 떨어진 두 사람은 키스를 나눈 연인이라기보다는 갓 싸움을 끝내고 난 적들처럼 서로를 노려보았다.
"찰스, 잘 알잖아."
"아니까 이러는 거야."
"널 잃고 싶지 않아!"
"지금 내가 떠나면 잃게 돼."
"제기랄!" 에릭이 이를 악문다. 분노한 남자를 바라보며 찰스는 마찬가지로 이를 악물고 내뱉듯 말했다.
"이게 자네가 원하는 삶이야? 스스로를 괴물로 여기고 끔찍한 곳에 자신을 가두고-"
"그만해!"
"슈미트와 함께 여기서 썩어 문드러지는 게? 그의 '무리'가 되고 싶어?"
에릭의 얼굴이 돌처럼 굳었다. 그가 입은 상처는 매우 깊은 것이었고 거의 물리적이기까지 한 그 아픔에 찰스의 가슴까지 미어질 것만 같았지만, 그가 스스로를 지옥에 몰아넣는 것을 그대로 두고 볼 수는 없었다.
"대답해 봐, 에릭 렌셔! 클라우스 슈미트의 무리가 될 셈이야?"
에릭은 찰스에게서 돌아섰다. 그 어깨가 크게 오르내리는 것을 발견한 찰스는 마지막 줄을 붙드는 심정으로 그 등에 말을 던졌다.
찰스의 눈이 커졌다. 다시 이 쪽을 향해 돌아선 그의 눈에는 정말 야수의 그것과 같은 순수한 분노와 흉폭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것이 향하는 대상이 찰스가 아니었음에도 두려움이 느껴질 만큼 격렬한 감정이 남자의 온 몸에서 넘쳐 흐른다.
"괴물은 괴물끼리 살 수밖에 없어. 떠나, 찰스."
마치 위협하는 늑대처럼 남자가 으르렁거렸다. 결코 물러날 생각이 없이 양 발을 단단히 딛고 서 있는 찰스의 어깨를 잡더니 그대로 오두막 밖으로 밀어낸다.
"에릭!"
"난 괴물이야.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아."
한 마디를 말할 때마다 에릭의 눈에서 불꽃이 흐르는 것 같았다. 찰스가 아니라 에릭 자신에 대한 저주와 격노와 혐오가 그의 온 몸에서 끓어오르고 있었다.
"네가 어떤 눈으로 날 봐도, 내게 어떤 감정을 갖고 있대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아."
"안돼..."
"가. 돌아가, 찰스. 너와 어울리는 곳으로 가. 여긴 네가 있을 곳이 아니야."
밀려났다. 문이 닫혔다. 찰스는 힘껏 소리지르며 문을 두드렸지만 문 잠기는 소리를 끝으로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손이 아프도록 문을 두들기던 찰스는 거의 절규에 가깝게 울부짖으며 문을 내리치고 이마를 기댔다.
이럴 수는 없다. 어떻게 해도 이렇게 끝낼 수는 없다. 돌아서서 문에 등을 기대로 숨을 몰아쉬던 찰스는 고통스런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하며 어떻게든 생각을 해 보기 위해 노력했다.
에릭은 저 안에 틀어박혀 버렸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마음의 문을 닫고 들어가 버린 것이다. 찰스는 눈을 감고 신음하다 몸을 일으키고 다시 문을 향해 몸을 돌렸다.
"안돼 에릭! 제발..."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찰스는 정신을 집중했다. 두터운 나무 문에 이마를 대고 새삼 눈을 꾹 감는다. 이 오두막의 벽 너머 어딘가에 있을 에릭에게 어떻게든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찰스 자신의 안타까움, 슬픔, 분노, 그리고 그에 대한 사랑. 또한 이해시켜야만 했다. 어째서 이렇게 순응해서는 안되는지, 왜 클라우스의 말을 따라서는 안되는지, 무엇보다도 그들이 왜 이렇게 헤어져서는 안되는지.
이 굳게 잠긴 집 안 어딘가 있을 에릭을 찾고 또 찾으며 그는 계속 말을 걸었다. 제발, 에릭. 제발! 희미하게 그의 존재감이 느껴진 순간, 찰스는 그 '존재'에게 있는 힘을 다 해 스스로의 의식을 쏘아 보냈다. 내 말을 들어 줘, 이해해야만 해. 이해해야만 했다. 에릭이 그를, 그가 에릭을. 그렇다. 그의 두려움과 공포마저도 이해해야만 지금의 잘못된 결정을 돌려놓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온 마음을 던진 순간 멀리 있던 에릭의 마음이 놀랍도록 구체적으로 닿아 와, 찰스는 놀라움에 숨을 들이키면서도 좀더 집중하기 위해 노력했다. 단단히 닫힌 마음을 감싸 안고, 다른 이의 무의식에서도 흔히 보아왔던 그 두려움의 안개를 뚫기 위해 최선을 다 했다.
'난 그를 잃게 될 거야.'
'이렇게 보내는 게 그나마 나아.'
'다시 잃을 수는 없어.'
'괴물'에 대한 원초적이고 압도적인 공포, '자신'에 대한 극단적인 혐오와 불신, '잃는 것'에 대한 비이성적인 공포, 그 모든 것을 감지한 찰스는 잠시 숨을 돌린 뒤 이제껏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일을 시도했다. 절박한 마음으로 정신의 손을 뻗으며, 자신의 온 마음과 의지를 모아 그 짙은 안개 속으로 뛰어든 것이다. 돌아올 수 없는 곳에 몸을 던지는 순교자와도 같이.
분노의 함성이 찰스의 온 의식에 몰아쳤다. 그것은 공황에 빠진 폭도들 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비슷한 끔찍한 감각을 찰스에게 선사했다. 온 몸이, 아니 온 의식이 가루가 되어 흩날려 버릴 듯 고통스러웠지만 찰스는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더 깊은 곳을 향해 의식을 쏘아보냈다. 오직 에릭의 이름을 부르며, 분노와 공포와 혐오와 저주를 흘려보내며 오로지 그 안의 에릭을 찾아서.
더러운 탁류처럼 폭풍같은 감정들이 그의 손발을 휘감아 묶었다. 사지를 갈가리 찢어버릴 듯한 고통 속에서도 그는 에릭을 향한 마음을 놓지 않았다. 찾아야 한다, 그를 찾아야 한다.
'에릭!'
절규했다. 그를 찾아 손을 뻗었다. 혼란 속 어딘가 존재할 그를 찾아서.
'에릭, 에릭!'
재차 그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의 감정이 아니라 그를, 오직 그를. 온 영혼을 모아 다시 한번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
어느새 폭풍이 사라졌다. 너른 황야가 나타났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돋지 않은 그 광막한 땅에 서 있는 것은 어린 소년이었다. 다갈색 머리카락에 너무나 익숙한 푸른 잿빛 눈을 가진, 두려움에 찬 소년.
'에릭.'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러한 경험은 처음이었다. 회색 하늘 밑의 메마른 잿빛 땅 위에 선 소년이 그를 바라본다. 찰스는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양 팔을 벌리고, 도망치려는 아이를 품 안에 꼭 붙들어 끌어안아 주었다.
'안돼, 넌 죽을 거야!'
아이가 비명을 질렀다.
'난 널 잃게 될 거야, 엄마처럼! 넌 죽을 거야. 괴물에게!'
황야에 거센 두려움이 다시 한번 폭풍처럼 몰아쳤다.
'오지 마, 돌아가! 제발 돌아가!'
그 두려움이 찰스의 의식에 다시 한번 칼날처럼 몰아쳤다. 그러나 에릭을 붙든 찰스는 이제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이야기 해 줄 수 있었다.
'에릭, 그게 그 괴물이 원하는 거야.'
'넌 죽을 거야.'
'괴물은 네가 그렇게 믿길 바라고 있어.'
'하지만 엄마는 죽었어.'
'난 아니야.'
아이가 저항을 멈췄다. 찰스는 아이의 작은 귀에 대고 속삭였다. 자신의 진심이 통하길 바라며.
'에릭, 난 살아 있어.'
'너도 사라질 거야. 없어질 거야.'
'난 널 떠나지 않아.'
'아냐 난, 난 저주받았어.'
'그게 바로 그가 네게 심어둔 저주야.'
아이의 눈이 커졌다. 가느다란 양 손목을 붙들고 아이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찰스는 아주 느리게, 똑똑히 말해주었다.
'난 절대 널 버리지 않아. 널 떠나지 않아.'
'......'
'네가 날 버리지 않는 한 떠나지 않아.'
'하지만 놈이...'
'에릭, 네가 그랬지. 너도 그와 같은 늑대인간이라고.'
아이의 몸이 경직했다. 다시 찬 바람이 불어온다. 위험 신호였지만, 찰스는 그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으리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에릭, 그가 할 수 있는 건 너도 할 수 있어.'
'내가 괴물...'
'아니야. 에릭, 넌 괴물이 아니야. 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야.'
'......'
'하지만 슈미트가 할 수 있는 건 너도 할 수 있어.'
바람이 울림이 되었다. 대지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찰스는 에릭을, 어린 에릭을 있는 힘을 다 해 끌어안았다. 무너지기 시작한 세상 속에서 아이에게 한 마디라도 더 하기 위해 노력하며, 그는 품 안의 온기를 놓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 했다.
'에릭, 사랑하고 있어.'
'......'
'날 믿어 줘. 내 소원을 들어 줘.'
'......찰스.'
'난 죽더라도 당신과 함께 있고 싶어. 그러니까...'
세상은 무서운 속도로 무너졌다. 무너진 황야 밖으로 튕겨나갔지만 이제 폭풍은 없다. 고요한 의식 속에서 그가 알고 있는 에릭이 그를 바라본다. 남자가 손을 뻗는 순간 찰스의 의식에 한계가 왔다. 더이상 집중할 수가 없었고, 곧 차가운 바람이 피부에 느껴졌다. 눈을 뜨자 온 몸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고, 그저 앉아 있었을 뿐임에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어려울 정도의 피로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찰스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랐다. 기대앉은 문 뒤로 발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
"진심이야, 에릭."
문이 열렸다. 중심을 잃고 무너지던 몸이 에릭의 다리에 기대어 균형을 찾았다. 기다란 손이 내려와 찰스의 얼굴을 어루만졌고, 찰스는 고개를 들어 이 쪽을 향해 숙인 에릭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에릭의 눈동자에는 눈물이 가득 괴어 있었다. 문득 찰스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이 남자, 생각보다 자주 우는 사람이었구나.' 그리고 아까 그의 의식 속에서 못다한 말을 맺었다.
"그러니까 날 지켜줘."
에릭이 무릎을 꿇었다. 강인한 팔이 찰스의 몸을 감쌌다. 그가 조용히 말했다.
"사랑해."
찰스는 미소지었다. 내일 당장 슈미트가 그를 죽이러 온다 해도, 지금만큼은 그게 상관 없을 정도로 기뻤다.
깊이 잠들어 있었다. 얼굴에 와 닿은 공기는 차가웠지만, 몸을 감싸고 있는 털가죽과 사람의 몸이 너무나 따뜻하고 부드러워서 깨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다. 절대 눈뜨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천천히 손을 내밀어 옆사람을 끌어안았다. 흉터 때문에 고르지 못한 피부, 단단히 잡히는 근육, 일반적인 남자가 잠자리 파트너에게서 기대하는 부드러움이나 매끄러움과는 한참 거리가 멀었지만 허리를 마주 안아오는 손은 다정하고 든든했다. 어깨에 숨결이 느껴지고 잠시 후, 까칠한 입술이 뺨에 닿았다. 눈을 뜨지 않을 수가 없어서 가늘게 뜨고 에릭을 바라본 순간 찰스는 그만 숨을 삼켰다.
어느새인가 램프에는 다시 빛이 돌아왔고, 이 쪽을 바라보는 남자의 얼굴에 엷은 불빛이 드리워져 있었다. 내리뜬 눈의 속눈썹 끝에 엷은 황금색이 앉았고, 그 안에 잠겨 있는 푸른 눈이 엷은 초록색이 되어 찰스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 완벽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순간이었다.
에릭이 가만히 손을 들어 찰스의 얼굴에 손가락을 대고 천천히 아래로 쓸었다. 마치 이 사람이 정말 여기 있는지 확인하는 듯한 몸짓이었다. 그가 뭘 느끼는지 알고 싶어서 찰스는 마음을 열었고, 그 순간 눈앞의 에릭이 느끼는 충족감, 불안감, 행복감, 두려움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다. 에릭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두려움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의 행복 때문에 생겨난 것이었다.
'지킬 수 없을지도 몰라.'
'잃게 될 지도 몰라.'
찰스는 가만히 고개를 젓고 에릭의 손을 쥔 다음 그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고 조용히 말했다.
"아무 걱정 하지 말아요."
에릭의 눈이 떨렸다. 그리고 그날의 첫 키스가 시작되었다.
에릭은 한참동안 찰스를 끌어안고 있었고, 둘은 간간이 따뜻한 키스를 나눴지만 어제처럼 끝까지 가진 않았다. 무엇보다도 배가 고팠던 것이다. 에릭은 일어나며 찰스의 이마에 입을 맞춰 주었고, 찰스는 행복감을 느끼며 둘의 체온으로 달아오른 모피 안에 몸을 푹 묻었다. 에릭이 옷을 입고 바깥으로 통하는 계단으로 나간 다음에야 찰스는 달아오른 얼굴을 양 손에 숨기고 지금까지 자기가 대체 뭘 한 건지 돌이켜 보고는 아주 잠깐이지만 패닉에 빠졌다.
맙소사, 늑대인간을 만났고, 그에게 매료되었고, 같이 잠까지 자 버렸고, 이제는 그의 집에 와서 숨어있기까지 한 것이다. 폭도로 돌변한 마을 사람들과 클라우스 슈미츠에 대해 생각하던 찰스는 고개를 저었다. 클라우스 슈미츠, 찰스가 느낀 그는 에릭을 소유하고 싶어했다. '내 아들, 내가 창조한 것.' 잠시나마 들여다 본 그의 집착은 정말 병적이었다. 그는 찰스가 에릭의 정체를 모른다는 걸 알고는,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해서 살의를 품었다. 이제 클라우스는 그게 아니라는 걸 안다. 찰스는 거대한 늑대를 보고도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리고 에릭은 이길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찰스를 위해 목숨을 걸고 달려들어서 싸웠다. 게다가 필사적으로 찰스와 함께 달아났다.
"맙소사." 찰스는 방금 깨달은 사실을 천천히 중얼거렸다. "이제 그는 정말로 날 죽이고 싶어하겠군."
떠오르는 사실은 하나 뿐이었고, 찰스는 에릭이 돌아오면 반드시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옷을 갖춰입은 에릭이 종이로 싼 꾸러미와 작은 단지를 들고 찰스에게 다가왔다.
"식사."
짧게 말하며 내린 꾸러미 안에는 호밀빵과 잼 그리고 치즈가 들어 있었다. 빵은 딱딱했고 치즈에선 약간 낡은 냄새가 났지만, 음식에 시선이 가 닿은 순간 심각한 공복을 느꼈기에 찰스는 굶주린 아이처럼 게걸스레 그것들을 먹어치웠다. 사실 지주의 집에서 나온 이후 물 한 모금 제대로 먹지 못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에릭이 든 단지 안의 찬물은 십중팔구 주위의 눈을 녹인 것이었겠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봄날의 시원한 샘물처럼 감미로웠다.
에릭도 함께 묵묵히 식사를 했다. 찰스보다는 훨씬 침착한 손길이었지만 그도 꽤 배가 고팠던지 식사 중에는 아무런말이 없었다. 간신히 빵과 잼과 치즈로 배를 채운 후 찬물을 마신 찰스는 그제서야 약간의 한기를 느꼈고, 어제 걸치고 있던 셔츠는 에릭의 피에 푹 젖어 지금 걸치기는 매우 곤란하다는 걸 깨달았다. 추운 듯 양 손으로 팔을 문지르자 그 때를 기다렸다는 듯 에릭이 뭔가를 내밀었다.
"뭡니까?"
"입을 게 없을 것 같아서."
흰 셔츠는 낡은 것이었지만 깨끗하게 세탁되어 있었고, 찰스는 대번에 그게 누구의 옷인지 알아봤다.
에릭 쪽을 바라보자 퉁명스러운 답이 돌아온다.
"괜찮아. 여분은 있으니까"
웃으며 걸쳐보니 어깨는 좀 넓었고 팔은 좀 길었고, 전반적으로 고양이 장삼 입은 것마냥 어설픈 모습이 되었다. 약간 눈살을 찌푸린 찰스가 '목부분을 채우니 목이 조금 졸리는데' 따위의 굴욕적인 생각을 하는 동안 에릭은 말없이 찰스가 걸친 셔츠의 소매를 딱 두 번 접어 주고 아래쪽의 단추들을 여며 주었다. 찰스는 단추를 끼우던 그 손을 가만히 잡고는 말을 걸었다.
"에릭, 할 말이 있어요."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들어 눈을 맞춰 온다.
"나랑 같이 여길 떠나요."
"뭐?"
"이 곳을 떠나요. 서쪽으로, 영국으로 가도 좋아요. 자랑은 아니지만 영지 안에는 숲도 있죠, 당신도 좋아할 거야."
에릭은 한동안 아무 말도 못하고 찰스만 바라보고 있었다. 꼭 그 모습 그대로 얼음조각상이라도 되어 버린 것처럼. 하지만 찰스는 이 남자가 지금 충격 속에서 머리가 터져버릴 정도로 고뇌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행복감과 불안감, 희망과 절망, 그 외 여러가지가 완전히 범벅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곧 에릭의 마음은 안정되어 갔고, 찰스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답이 주어질 거라는 걸 알고 눈을 크게 떴다.
"안돼."
"어째서요?"
조금의 주저도 없이 반문하는 찰스에게 에릭은 괴로운 듯한 표정을 보이며 말했다.
"나는 이 곳을 떠날 수 없어. 나는 슈미트를..."
"그를 처단해야 하니까?"
에릭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이가 없어진 찰스는 물어뜯듯 다시 물었다.
"그를 이길 수 있기는 해요?"
에릭이 눈을 떴다. 그에게 있어 몹시 아픈 질문일 거라는 걸 잘 알 수 있었지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직접 보았던 두 번의 충돌, 에릭은 상처만 입고 물러나야 했다.
"그래, 지금 나는 놈을 이길 수 없어."
그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하는 에릭은 정말 고통스러워 보였기 때문에 그대로 끌어안고 등을 문질러 주고 싶을 정도였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알면서 그래요?"
"그럴 수밖에 없어."
"여기 있어 봤자 과거에서 벗어날 수는 없어요. 오히려 더 묶일 뿐이잖아."
"어딜 가도 마찬가지야."
"그거, 가 보고 생각한 거 맞아요?"
"놈이 날 불러."
찰스는 에릭을 바라보았다. 눈을 꾹 감은 에릭은 한 마디 한 마디 끊듯이 말하고 있었다.
"놈이,날,부른다고."
"에릭."
"어딜 가도 그랬어. 왜 이런지는 나도 알 수 없지만... 프랑스에 있을 때에도, 제네바에서도, 계속 느껴졌어. 여기"
짚은 곳은 왼쪽 가슴.
"여기가 찔리는 것 같아. 속이 울렁거리기도 하고, 돌아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지. 유독 심한 날이면," 그는 입 끝을 끌어올리면서 피식 웃었다. "그 때의 꿈을 다시 꾸고. 여기 오고서야 간신히 나아졌지만 다시 나가봤자 마찬가지가 되겠지."
찰스는 입술이 바짝 타는 것을 느끼고 초조하게 핥아 적셨다. 이럴 줄은 몰랐다. 늑대인간끼리 서로를 부른다는 말은 어떤 전설에서도 들어본 적 없었다. 허나 다시 생각해 보면, 늑대라는 짐승 자체가 자기 무리에 단단히 얽매이는 종이다. 다만 에릭이 전혀 유대를 유지할 생각이 없는데도 부를 수 있을 정도라니, 문득 쇼우가,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한 괴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것 따위 무시해요' 라고 가볍게 말해버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자신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런 '부름'에 시달리는 삶은 이 곳에서 사는 것보다 더 괴로운 것일지도 모른다. 그를 그런 고통 속에 두어야 할까? 늑대를 숲에서 끌고 나와 보이지 않는 우리에 가둬두게 되는 건 아닐까?
"그럼 어쩌죠?"
답을 바라고 던진 말은 아니었지만 에릭은 그 질문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고개를 숙이고 잠시 침묵했다. 순간 찰스의 마음 속에 에릭의 답이 들려왔다. 놀라운 일이었다. 이제껏 찰스가 남의 마음을 읽은 적은 꽤 있었지만, 지금처럼 일부러 읽으려고 한 것도 아닌데 울려온 일은 없었던 것이다. 에릭에게 너무나 집중했기 때문일까? 지금은 에릭의 마음이 확실히 "들려왔"다. 그는 찰스가 이 곳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오직 찰스만이.
"찰스,"
"그만둬요."
당장 말을 잘라 끊어 버렸다. 에릭이 눈을 크게 뜨고 찰스를 바라보았고, 그는 그 시선을 똑바로 맞받아치며 아주 또렷하게 말했다.
"돌아갈 거면 이미 돌아갔을걸. 처음 습격받았던 날 짐 싸서 런던에 가 버렸겠지. 가지 않은 이상 나더러 여길 떠나라고 해 봤자 소용없습니다, 에릭 렌셔."
"하지만 위험해. 넌 네가"
"잘 알아요. 덕분에 눈 똑바로 뜨고 아주 잘 봤죠. 보름달이 뜨는 14일부터 16일 사이, 당신들은 두 가지 형태로 변할 수 있고 둘 다 상당한 힘을 지니고 있어요."
"찰스."
"그래도 그런 걸로 날 막을 수는 없어. 그리고 이제부터는 당신이 모를 얘기를 해 주죠."
찰스는 잠시 숨을 골랐다. 지금부터 해 줄 얘기는 어쩌면 이 남자의 오랜 상처를 완전히 짓쑤셔 놓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 그래도 말해야만 했다.
"클라우스 슈미트가 왜 당신을 그렇게 만들었는지 알고 있나요?"
에릭 주변의 공기가 한동안 멈췄다. 모든 행동을 멈추고 이 쪽을 바라보는 엷은 푸른 빛 눈동자만이 어둠 속에서 램프 빛을 받아 희미한 빛을 발했다. 꼭 귀를 세우고 잔뜩 긴장한 채 이 쪽을 바라보고 있는 굴 속의 늑대 같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찰스는 그가 혼란에 빠져 있고 약간 공포스러워 하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잠깐 망설였지만, 그래도 멈추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난 그를 읽을 수 있었어요. 그의 '시각'에서 그 사건을 다시 볼 수 있었죠."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남자는 눈을 거의 깜박이지도 않았다.
"그는 당신을 원해요. 어떤 의미로는 '사랑'한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을 거예요."
"...뭐?"
"그에게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아이'이자...동반자예요."
에릭은 말 그대로 충격을 받은 것처럼 보였다. 찰스는 그런 그를 감싸안아주고 싶은 욕망을 다시금 느꼈지만, 눈을 질끈 감아 그것을 무시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
"당신은 그를 죽이러 이 곳에 왔겠지만 적어도 그는 아니예요. 그는...그는 당신을 강렬히 원해서 그 짓을 한 겁니다."
"그럼, 어머니는..."
에릭의 눈이 떨렸다. 마치 깊은 칼날이 가슴을 헤집어 놓은 것 같은 얼굴이었고, 그런 표정을 한 남자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건 너무 잔인한 짓이겠지만, 그래도 말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이 곳에 계속 묶인 채 살아가게 될 테니까. 이 어두운 숲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그 날, 슈미트는 당신만을 노리고 있었어요."
"결국 나 때문에,"
"그런 생각 하지 말아요. 어차피 가만 두지 않았을 거예요. 오히려 어머니 덕분에 이 곳을 떠날 기회가 생겼던 겁니다."
"하지만 내가 아니었다면,"
"바뀌는 건 없었을 거예요. 스스로에게 물어봐요, 잘 알고 있잖아요."
'그래도 이 곳에 있고 싶어요?' 찰스는 이제서야 에릭을 끌어안으며 귀에 속삭였다. 그리고 결국 견디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젓는 에릭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흉터투성이 어깨에 입술을 묻고, 몇번이나 속으로만 미안하다고, 정말 미안하다고 말했다.
슈미트의 부름은 앞으로도 계속될 테고 에릭은 어디서건 그 때문에 괴로워할 것이다. 어쩌면 일생동안 시달릴지도 모른다. 혹은 영원토록일지도.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와 함께 이 곳을 떠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 후로 며칠간, 떠날 준비는 착착 진행되었다. 에릭은 여관에 남아 있던 찰스의 짐들 중 대강 손에 들고 올 수 있는 것들을 가져왔고, 찰스는 그중 여행길에 쓸만한 것들을 골라내고 나머지는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태워 버렸다.
탈출 방법을 생각하는데 의외로 시간이 걸렸다. 둘의 사정상 찰스가 이 곳에 들어올 때 이용했던 역마차 등은 전혀 이용할 수 없다. 일단 도시로 나가면 미신이 통하지 않으니 안전하게 영국으로 돌아갈 수 있겠지만, 적어도 그 '도시'로 나갈 때까지는 남의 눈에 띄지 않아야만 했다. 둘은 머리를 모으고 논의에 논의를 거듭했고, 찰스가 짐 속에 꾸려온 이 지역의 지도를 들여다보며 고민하고 있으면, 숲 지리에 대해 환히 아는 에릭이 그 지도를 보정해 가며 루트를 정했다.
"물론 나는 갈 수 있어." 당장 출발하고 싶다는 찰스에게 에릭은 냉정하게 잘라 말했다. "하지만 넌 안될 거야." 찰스는 순간 눈을 가늘게 뜨고 미간에 주름을 지으며 에릭을 쳐다보았다. 반박하고 싶은 기색이 역력했지만 에릭은 멈추지 않았다.
"넌 도시 사람이야."
"섭섭한걸, 그래도 본국에서는 제법 날렸는데."
어느새 찰스는 에릭을 이전보다도 더욱 편하게 대하고 있었다. 사실 에릭의 기억을 더듬어 본 바, 찰스보다는 몇 살 많은 듯 했지만 에릭 본인이 그것을 바랐다. 지금만은 마치 어른이 철없는 아이를 바라보듯 냉정하게 내려다 보며 말을 잇는 모습이 얄밉기 그지없었지만.
"귀족 나리들이 뭘 즐기는지는 나도 잘 알아. 하지만 겨울 숲을 빠져나가려면 그런 걸로는 무리야."
"에릭?"
"눈을 헤치고 걸어갈 수야 있겠지. 하지만 곰을 만나면 어떻게 할 거지? 늑대를 만나면?"
찰스는 입을 다물었다. 에릭이 정말 하고 싶어하는 말은 다른 것이었다. '그리고 슈미트를 만나면?' 그는 찰스를 지켜주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찰스가 강해지기를, 적어도 '자신이 없더라도' 이 숲을 빠져나갈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네가 내 옆에 있어주면 되잖아."
"늘 그럴 수는 없어."
"에릭, 왜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거야? 우린 분명 잘 빠져나갈 수 있을 텐데."
이번에는 에릭이 입을 다물었다. 뭘 생각하는지는 굳이 읽을 필요도 없었다. 거칠었던 전장 생활 때문인지 또는 어린 시절의 기억 때문인지, 그는 기본적으로 낙관보다는 비관 쪽에 무게를 두는 사람이었다. 찰스는 양손을 뻗어 에릭의 얼굴을 감싸쥐고, 꾹 다물린 입술에 입술을 갖다댔다. 허리를 안으며 키스해오는 그의 입술을 느끼고는 어깨에 머리를 얹고 천천히 말했다.
"잘 될 거야. 알 수 있어. 다 잘 될 거야."
에릭은 말없이 찰스의 등을 천천히 문질렀고, 둘은 다시 키스를 시작했다. 그들의 대화는 늘 그런 식이었다. 에릭은 자기 마음을 표현하는데 서툴렀지만 찰스는 그 마음을 읽을 수 있었고, 찰스는 그런 에릭이 이해할 수 있도록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려고 늘 노력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마을 사람들이 이 곳에 거의 오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한 두 사람은 조금씩 오두막 밖으로 다니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찰스가 몸을 단련하려면 실내에서만 움직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에릭이 지닌 장총들을 능숙하게 다루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도 야외 활동은 꼭 필요했다.
두 사람은 슈미트가 추적해 올 가능성을 생각해서떠나는 날을 다음 보름 사흘 전으로 잡고 준비를 진행했다. 그리고 그를 위해 숲에서 훈련 겸 함께 사냥을 하며 겨울 숲에서 먹을 식량을 마련했다. 찰스는 점점 에릭의 총을 잘 다루게 되었고, 찰스가 에릭의 도움 없이 처음 사슴을 잡았을 때 에릭은 경축의 의미로 가장 맛있는 부분을 직접 구워 찰스에게 차려 주었다. 에릭이 마을에서 사 온 납을 작은 도가니에 녹여 틀에 부어서 반짝이는 새 총알을 만들 때마다 찰스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신기해 했다.
"총알을 사지 않고 만들다니, 신기해."
"이게 정상이야."
손을 가까이 가져가려는 찰스를 제지하며, 에릭은 완전히 식기 전에는 만지면 큰일난다고 주의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때때로 에릭이 마을에 갈 때면 찰스는 지하의 공간에 조심스레 숨었고, 에릭은 마을의 분위기를 살피고 왔다. 마을에서는 늑대와 마법사의 이야기가 아직도 화제였고, 에릭은 오두막에 돌아가 마을의 분위기를 궁금해 하는 찰스에게 어깨를 으쓱여 답을 대신하곤 했다.
그 날도 마을에 모피를 팔러 가기 위해 짐을 꾸리던 에릭의 귀에 이 쪽을 향해 다가오는 인기척이 들려왔다. 상대는 아직 문 밖에 있었지만 예민한 감각이 경고를 해 왔고, 에릭은 찰스가 이미 지하실에 숨었다는 것에 안심하며 상대의 노크를 기다렸다. 하지만 탕탕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 다음, 에릭은 등골이 얼어붙는 것 같은 감각을 느꼈다. 낯익은 목소리, 낯익은 기척, 낯익은 냄새.
"문좀 열어주지 않겠나?"
클라우스 슈미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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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을 수 없었지만 정말로 클라우스 슈미트였다. 에릭은 잽싸게 뒤를 돌아보았고, 찰스가 지하에 숨어 있는 상태라는 것에 안도하며 고개를 다시 앞으로 돌려 문 틈으로 클라우스 슈미트의 모습을 확인했다. 대체 그가 왜 여기 왔을까? 무엇 때문에? 혹시 찰스의 일에 대해 눈치챈 것은 아닐까? 오만가지 생각이 다 떠올랐다.
에릭은 입을 꽉 다물고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문을 열 수밖에 없다. 안에 서 있는 자도 밖에 서 있는 자도 늑대인간이다. 지금 에릭에게 클라우스 슈미트가 확실히 느껴지듯, 슈미트에게도 그럴 것이다. 바로 며칠 전에 그 증오스러운 작자를 보긴 했지만, 그래도 자신의 집 안에 그를 들인다는 데에는 정신적인 준비가 필요했다. 심호흡을 마치고 문을 열자 그 남자가 거기 서 있었다. 태연한 얼굴에는 즐겁다는 듯 미소까지 떠올린 채.
"아, 마침 있었군. 다행이네."
클라우스는 한동안 에릭을 쳐다보다가 아무렇지도 않은, 아주 일상적인 얘기를 건네듯 말을 걸어왔다.
"좀 들어가도 되겠나? 할 얘기가 좀 있어서 말이야."
에릭은 순간 거부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이 곳은 그의 집이며 둥지였다. 여기 이 끔찍한 작자를 들여놓는다는 건 상상도 하기 싫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문을 닫아버리는 대신 조용히 한 걸음 물러서서 클라우스가 들어올 수 있도록 해 주었다. 혹여라도 그가 에릭에게서 거부당한 뒤 이 집 주위를 살피기라도 하면 곤란하다.
건물 안이 신기하다는 듯 둘러보는 클라우스의 뒤에서, 에릭은 문을 닫고 천천히 돌아섰다. 머릿속은 의문으로 터져버릴 것 같았지. 대체 어째서? 무엇 때문에?
"이런, 많이 놀랐나 보구나."
클라우스 슈미트는 이전과 다름 없는 부드러운 얼굴로 에릭을 바라보았고, 에릭은 눈앞의 남자를 노려보며 이를 악물었다. 이렇게 만나서 죽이는 상상이라면 수십 수백번도 더 했지만 지금은 그것이 너무나 어렵다는 걸 알고 있다. 그는 강하다. 게다가 에릭이 알 수 없는 힘을 더 지니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들키기 전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그 외에 또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아니오."
목소리를 제대로 낼 수 있을지 걱정됐지만, 입을 열자 흘러나온 것은 의외로 침착한 목소리였다.
"언제나 스스로에게 솔직하지 못하구나. '우리 종족'에게는 흔치 않은 일이지."
에릭의 눈동자가 순간 싸늘하게 가라앉았고, 잠시 참을까 했지만 결국 내뱉어 버리고 말았다.
"우리? '우리' 라고 하지 마!"
"오, 에릭. 넌 어릴 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하나도 없구나."
클라우스는 진심으로 안됐다고 생각하기라도 하는지 측은히 여기는 듯한 눈으로 혀를 찼다.
"하지만 난 네 그런 점도 좋아한단다. 그래서 널 택한 거지."
"...뭐?"
클라우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부드럽게 미소짓고 있었지만 그 눈은, 그 푸른 눈은 엄밀히 말해 사랑이나 다정함으로 빛나고 있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 눈은 사실 차가운 평가자의 눈, 그리고 그렇게 감정하여 '가치'를 매기고 나서야 드러나는 소유욕을 가진 자의 눈이었다. 에릭은 그 눈과 시선을 마주친 순간 살의가 혈관을 타고 흐르는 걸 생생히 느꼈지만, 어쩔 수 없이 주먹을 꾹 쥐고 참아내야만 했다.
"그래, 그렇게 인내심을 길러야지."
클라우스가 손을 뻗어 왔고, 에릭은 그의 손가락이 자기 얼굴을 향해 다가온다는 걸 알면서도 그 자리에 못박힌 듯 서 있었다. 손가락이 얼굴을 따라 천천히 내려오다, 인중 옆에 찍힌 작은 흉터를 어루만진다.
"못난 것들이 네게 흠집을 냈구나."
결국 견디지 못하고 에릭은 팔을 쳐들었다.
클라우스의 손을 쳐내고목을 쥐기 위해 번개같이 손을 뻗었지만 클라우스의 다른 손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붙들린 팔목을 통해 느껴지는 힘은 가공스러운 것이었고, 옴쭉달싹할 수 없다는 걸 안 에릭은 경악에 차서 남자를 바라보았다. 대체 이 힘은 뭐란 말인가.
"인간들은 늘 어리석지. 네가 돌아왔다고 들었을 때 좀더 철이 들어 있기를 바랬는데, 아직 인간 티가 덜 벗겨졌구나."
"내가 돌아온 건 널 죽이기 위해서야."
이글거리는 푸른 눈에는 살의가 가득했고, 말하며 드러난 이는 거의 짐승의 송곳니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하지만 클라우스 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오히려 그런 에릭을 조롱하듯 말했다.
"다 그렇게 깨달아 가는 거란다."
다른 팔을 휘둘렀지만 그 또한
클라우스에게 붙들리고 말았다. 남자는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온 힘을 다해 팔을 뿌리치려는 에릭을 아무 힘도 들이지 않고 제압하며 여상스레 말했다.
"난 널 택했다. 그게 뭘 뜻하는지는 곧 깨닫게 될 거야. 아이야, 넌 내 상대가 안된다. 넌 내 무리Pack의 가장 훌륭한 일원이 되겠지."
"...!"
방금 들은 말을 믿을 수 없었다. 클라우스는 일순 저항이 멎은 것에서 그 경악을 알아차리고는 싱긋 웃었다.
"몰랐다고는 하지 말거라. 우리는 홀로 사는 자들이 아니야."
"...뭐라고?"
그리고는 그러쥔 손목을 음미하듯 슬며시 쓸어내린다. 진저리가 쳐졌지만 피할 수 없다는 걸 안 에릭은 이를 악물고 그 감각을 견뎠다.
"넌 내 무리에 곧 제 발로 들어오게 될 거다."
"내가 네놈 목을 찢어놓은 뒤에 말이지."
클라우스는 그런 폭언을 듣고도 당황하기는 커녕 오히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웃기만 했다. 그리고 마치 키스라도 할 것처럼 에릭의 얼굴 앞에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천천히 속삭였다. 더운 숨결이 빰을 타고 흘렀고, 그 감각을 견디지 못하고 어떻게든 뿌리치려 했지만 소용 없었다.
"작은 에릭, 넌 네 발로 날 찾아오게 될 거란다. 그리고 우리는 아주 긴 세월을 함께 할 거야."
"날 죽이기 전엔 어림도 없어."
"옛날 생각이 나는군."
그 말을 할 때의
클라우스는 무언가 다른 것을 보고 있는 듯 했다. 눈앞에서 이글거리는 에릭의 눈 너머에, 마치 너무나 그리운 무언가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리고 마치 꿈에서 깨기라도 하는 듯 표정을 바꾸며 화제를 돌린다.
"'그 인간'과 함께 지내고 싶은 모양이지?"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귀엽더구나. 재기발랄하고... 네가 그 정도로 소중히 여기는 줄은 몰랐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입을 꾹 다물고 몸을 굳힌 채 노려보던 에릭의 몸이, 갑자기 클라우스의 몸에 밀착되었다. 포옹, 뜨거운 포옹이었다. 목덜미에 코를 묻고 깊이 숨을 들이키는
클라우스의 행동에 에릭은 공포를 느꼈다.
"오해하지 마라, 아들아."
"난 네 놈의 아들이 아니야!"
이를 악물고 내뱉었지만
클라우스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체취를 잔뜩 묻히고 있는 걸 보니 늘 함께 지내고 있나 보구나."
이런 순진한 아이 같으니. 잔뜩 몸을 굳히는 에릭을 느끼며 슈미트는 싱긋 웃었다. 나름으로는 인자한 미소였다.
"오해 말거라. 그 인간 나부랭이를 네가 어떻게 대하건 네 마음이니까."
포옹을 풀고 양 손으로 에릭의 머리를 붙든 남자는 여전히 웃으며, 하지만 눈만은 싸늘하게 식힌 채 말을 이어갔다.
"그 인간을 살려서 이 곳에서 내보내고 싶다면 내게 말만 하려무나. 네 애완동물로 갖고 싶다고 해도 난 상관 없다."
곧이어 우득거리는 소리가 집 안에 울리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에릭의 눈에 경악과 공포가 한꺼번에 차 올라왔다. 지금은 밤이 아니다. 게다가 보름은 이미 지난지 오래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일까? 잘 차려입었던 옷의 솔기가 툭툭 터져나가고 잠시 후, 에릭의 눈앞에는 이제 어린 시절부터 악몽의 주체였던 바로 그 괴물이 서 있었다. 그릉거리는 음성이 간신히 인간 언어의 형태를 띠었다.
"그 예쁜이의 머리에서 뇌수가 터져나가는 걸 보고 싶지 않으면..."
새파랗게 질린 에릭의 눈앞에서 괴물은 이를 드러내며 선언했다.
"다시는 이 곳을 떠나지 말거라. 넌 내 아이란다."
칼날같은 손톱이 에릭의 머리를 떠나 몸에 와 닿았다. 이를 악문 순간 찢어질 듯한 아픔이 가슴에 느껴졌다. 에릭의 가슴에는 네 줄의 긴 상처가 새겨졌고, 가슴을 끌어안고 몸을 웅크린 에릭 앞에서 슈미트는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온 몸에는 너덜거리는 옷의 잔해가 휘감겨 있었지만, 어깨에 걸쳐뒀던 모피코트만은 바닥에 떨어진 채 무사했다.
그것을 걸친 슈미트는 아무 인사 없이 쓰러진 에릭의 이마에 입맞추고 집 밖으로 나갔고, 예민한 에릭의 귀에는 마차 떠나는 소리가 들려 왔다. 하지만 그 뒤로도 한참동안 에릭은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상처 때문이 아니라 깨달음 때문이었다. 찰스의 말대로 슈미트가 원했던 건 어머니의 죽음이 아니고 바로 자신이었다. 또한 지금 클라우스 슈미트와 만나 이야기 함으로, 에릭은 그가 본질적으로 자신과 같은 것을 바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버렸다.
늑대인간으로서 에릭은 자신의 모든 것을 저주했지만 그럼에도 가슴 깊이 거의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는 것이 있었다. 늑대는 결코 혼자 사는 존재가 아니다. 홀로 온 유럽을 떠돌아다니며 어떻게든 이 곳을 떠올리지 않으려 애썼지만 불가능했다. 증오스럽기 이를 데 없는 슈미트의 부름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가슴 속 깊은 곳으로부터 타오르는 본능의 외침 같은 것이었다. 모든 것을 공감할 수 있는 이에게 아무것도 숨길 일 없이 함께 눈밭을, 숲을 뛰고 달리며 사냥하고 먹을것을 나누며 살아가는 것.
"찰스..."
나를 이해해 줄 유일무이한 존재, 보호하고 보호받으며 서로를 돌볼 존재, 지금 에릭에게 떠오르는 건 단 한 명의 이름 뿐이었고, 그걸 떠올린 순간 한 가지 진실이 영혼에 와 닿았다. 절대 부정할 수도 외면할 수도 없는 단 하나의 진실이.
슈미트는 결코 에릭을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찰스는 떠날 수 있으리라. 그는 그의 나라로, 집으로 돌아가 다시 가족의 품에 안길 수 있고, 그래야만 한다.
하지만 그 옆에 자기 자리는 없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다. 슈미트가 그리 놔두질 않을 테니까.
- 19세기, 독일 배경입니다.
- 슈바르츠발트 근처의 한 마을, 박물학자 찰스와 사냥꾼 에릭입니다.
- 둘의 능력이나 느낌은 원작과 비교가 안될 정도로 약화되어 있어염.
- 19금 부분 삭제했습니다.(2013/7/8)
- 후 죽겠네요. 그래도 제일 긴 것이 끝났으니 4, 5, 6, 7은 좀 빨리 될 듯 하네요.
그것을 물어보기에 앞서, 찰스의 뇌리에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에릭이 정말로 늑대인간이 맞았다면, 마을 사람들이 말하는 '괴물'은 어느 쪽인 것일까? 물론 그는 에릭에게서 읽어낸 영상을 보았고 거기에 거짓은 없었다. 흰 털을 지닌 괴물, 그 괴물이 에릭의 어머니를 죽였고 찰스를 습격하려 했다. 그리고 에릭은 그 괴물이 바로 이 마을의 지주인 클라우스 슈미트라고 얘기했다. 하지만 그 뒤 일어난 모든 '죽음'이 클라우스의 짓이었을까? 마을 사람들에게 추방당했던 에릭이 돌아와 '복수'를 했던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 생각은 곧 바뀌었다. 에릭의 어머니를 해친 건 분명 자신과 맞닥뜨린 그 괴물이었다. 게다가 에릭은 마을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곧 이 숲을 떠났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간 죽었다는 사람들, 특히 사건 이후 2-3년간 죽은 사람들을 해치운 것은 바로 그 괴물이 된다.
"혹시...마을을 떠난 이유가?"
그렇기에, 그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서 찰스는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게 보이기 위해 노력하며 에릭에게 물었다. 그의 노력은 아마도 성공한 모양이다. 에릭은 잠시 침묵하다 선선히 대답했다.
"놈에게 물린지 한 달이 지났을 때 첫 변신이 있었어."
전설은 사실이었다. 찰스의 얼굴은 완전히 창백해졌다.
"보름에요?"
"보름에. 엄청나게 아팠지. 정신차리고 나니 난 이미 인간이 아니더군."
미쳐 버릴 것 같았어. 그렇게 중얼거리며 머리를 쓸어올리는 에릭의 얼굴은 지금의 찰스 못지 않게 창백했다. 아마도 지금 그의 마음을 읽어낸다면 그가 느끼는 감정을 고스란히 알 수 있겠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정신없이 도망쳤어. 놈에게서, 마을에서, 첫 보름에 그는 날 붙잡으려 했지."
에릭의 눈동자가 떨렸다.
"사실 그때까지는 잘 몰랐어. 난 그저 운 나쁘게 괴물에게 걸린 거라고만 생각했지. 어머니가... 어머니가 그렇게 된 것도 우연이라고 생각했어."
"...그럼 아니었나요?"
잔인한 질문이라는 걸 알면서도 도저히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에릭은 고통스러워 하는 표정이 되어 눈을 감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군.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말해 본 적이 없는 얘기인데 왜 네게는 그냥 말할 수 있는 건지."
사실 찰스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지금까지 본 바 대로라면 이 남자는 타인에 대한 불신감이 강한 대신 한 번 경계가 허물어지면 걷잡을 수 없이 약해졌던 것이다. 그에게 차가운 눈길을 던지고 쫓아내 버린 마을 사람들 말고도 그가 만나왔던 수많은 사람들 중 그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주고 진실로 믿어준 사람이 몇이나 있었을까? 아니, 말을 해 볼 수는 있었을까? 하지만 찰스는 그가 지금까지 말한 것들이 다 진실이었음을 말 그대로 마음으로부터 알고 있었고, 아마도 바로 그 신뢰 때문에 마음의 장벽이 무너졌던 것이리라.
"그는 처음부터 날 노렸던 거였어. 이유는...나도 모르겠어. 날 어머니처럼 죽이지 않고, 그냥 물어뜯기만 해서 감염만 시킨 거였지."
에릭의 눈동자에 강렬한 분노가 타올랐다. 거의 흉폭해 보이는 그 얼굴을 본 찰스는, 그것이 자신을 향한 감정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긴장감에 조용히 침을 삼켰다. 그리고 에릭의 얘기는 계속되었다.
"그는 나보다 훨씬 오래되고 강한 괴물이야. 저 은화는 그가 내게 준 거였어. 직접 집어서."
찰스의 눈에 놀라움이 스쳤다. 늑대인간이? 은을 직접 손으로 집어올렸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그 동전이 닿는 순간 너무 뜨거워서 비명을 질렀지. 그가 웃더군. 내 손에 그 동전을 꽉 붙이면서 말했어."
에릭은 잠시 숨을 들이켰고, 그 사이 찰스가 물었다.
"뭐라고요?"
그는 잠시 찰스를 쳐다보았다. 얼굴에는 땀이 맺혀 있었고, 들여다 보기 전에는 알 수 없을 격렬한 감정이 그 표면 아래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한동안 그렇게 이를 악물고 있던 에릭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말했다.
"네게 주는 낙인이라고."
들어올린 손바닥에는 낙인같은 화상이 찍혀 있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 자세한 형태는 알아볼 수 없었지만, 붉고 허옇게 일그러진 화상 흉터를 본 찰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에릭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이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가 그에게는 고통이었으리라. 그 압도적인 감정의 파도에 전율하며, 찰스는 한 가지 의문을 떠올렸다- 그는 왜 이런 고통스러운 곳에 돌아왔을까? 물어보려던 참에 에릭이 먼저 말을 꺼냈다.
"그럼 이제 이유는 충분히 알았을 테고... 여기 계속 있는 건 위험해. 어서 마을에 돌아가. 내가 데려다 주지."
찰스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에릭을 바라보았다. 어이가 없어서였다. 어제 새벽만 해도 그는 거의 죽을 것처럼 보였고, 아직 상처가 다 나은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마을까지 함께 가자니 어이가 없을만도 한 일이다.
"데려다 준다고요?"
하지만 에릭은 그런 찰스의 기분을 알아차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무 동요 없이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이 정도 상처라면 밤이 되면 별 문제 없이 데려다 줄 수 있을 테니까."
고개를 내저었지만, 그 말은 사실이었다.
어느새 시간이 지나, 바깥의 햇볕이 점차 변하기 시작했다. 서서히 기울어 가는 햇살을 눈치챈 찰스는 에릭 쪽을 잠시 쳐다봤다. 그 사이 둘은 이미 한 끼의 식사를 더 한 뒤였지만, 에릭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모피를 덮었을 뿐 옷은 딱히 걸쳐입지 않은 상태로, 맨몸에 붕대만 감은 채로 얌전히 앉아 있었다. 사실 그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어차피 늑대로 변하면 옷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어깨에 둘린 붕대는 약간 헐거웠고, 그래서 그 안의 상처도 눈에 들어왔다. 비록 다 나은 것은 아니지만 벌어졌던 곳은 이미 붙어 있었다.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다. 하루가 지났다곤 해도 다친지 열몇시간밖에 되지 않는 셈인데, 상처는 붙고 안색은 이미 눈에 띄게 좋아지고 있었다. 누가 이 남자를 두고 어제 새벽만 해도 식은땀을 흘리며 헛소리를 하던 사람이라고 생각하겠는가.
"저녁이 되어가네요."
"......"
"곧...변하나요?"
찰스는 호기심을 끝내 감추지 못했다. 에릭에게 있어 불쾌한 질문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행히도 에릭은 불쾌해 하거나 하지 않고 잠시 가만히 앉아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고 싶은가?"
끄덕이지는 않았지만 고개를 저을 수도 없었다. 그런 찰스의 얼굴을 바라본 에릭은 대체 뭐가 그리 재밌는지 피식 웃더니 붕대가 감긴 팔을 내려다보았다. 마른 근육이 꽉 찬 팔에 감긴 흰 붕대는 기묘하게도 이 남자와 참으로 잘 어울렸다.
"별로 보기 좋은 장면은 아닐 거야."
마주 웃어보이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고, 그래서 입가로 새어나온 것은 웃음보다는 숨소리와 가까운 무언가였다. 그렇게 둘 사이에는 기묘한 침묵이 자리잡았고, 둘 모두 나무 덧문 사이로 서서히 기울어지며 엷게 스러져가는 햇살을 바라보고 있었다. 붉은 노을이 창 안으로 비쳐왔고, 피처럼 불타던 하늘이 기묘한 남빛으로 화해 가며 서서히 어둠이 깔려왔다. 보름달의 시간이 다가오는 것이다.
별이 뜨고 하늘이 완전히 검은빛이 되었을 때 변화가 시작되었다. 어느 순간, 에릭이 짧고 다급한 신음소리를 내며 고개를 숙였다. 방 안은 벽난로 불빛을 제외하면 완전히 어두웠고, 그래서 자세한 것은 파악하기 어려웠지만 일렁이는 불꽃에 비친 에릭의 등이 기이하게 부풀어오르는 것만이 눈에 들어왔다. 경악한 찰스 앞에서 변화는 의외로 빠르게 일어났다.
먼저 온 몸의 근육이 뒤틀리듯 불어났다. 고통에 겨워 바닥을 짚은 에릭의 손가락은 곧 갈퀴처럼 구부러졌고 무서우리만치 긴 발톱이 거기서 돋아났다. 웅크린 남자의 등은 이미 주저앉은 동물의 등처럼 둥글게 되어 거기서 털이 돋았고, 견디지 못한 듯 울부짖으며 들어올린 얼굴은 이미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잠시 변화가 멈추었는데, 그 '중간 과정'은 바로 어제 찰스가 본 흰 색의 괴물과 놀라우리만치 닮아 있었다.
그리고 곧 '두 번째 변화'가 일어났다. 늑대도 인간도 아닌 괴물은 점차 늑대와 비슷한 모습으로 변해갔다. 거대하던 손발은 늑대의 앞발처럼 작아졌고 사지의 모습도 그에 따라 점차 변해갔다. 울룩 불룩 튀어나왔던 근육은 다시 자리를 잡으며 털가죽 안으로 기어들어갔고, 완전히 다른 형태가 된 에릭이 잠시 바닥에 엎드렸다 고개를 들어올렸을 때, 찰스의 눈앞에 있는 것은 이미 인간도 아니고 괴물도 아닌, 한 마리의 거대한 회색 늑대였다. 뜯겨 나가 너덜너덜해진 붕대가 사방으로 떨어졌고, 그 밑에는 상처 없는 회색 털가죽이 자리하고 있었다.
"맙소사..."
도저히 감탄사를 내뱉지 않을 수가 없었다. 눈앞의 이 거대한 회색 늑대가 에릭이라니, 분명 이야기를 들었고 그래서머리로는 인지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눈앞에서 직접 바라보는 것은 완전히 색다른 기분을 느끼게 해 주었다. 드디어 변신이 끝났는지 회색 늑대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고, 그 노란 눈과 시선을 마주하는 순간 찰스는 마음 속 깊이 깨달았다. 비록 빛깔은 달랐지만, 차분한 늑대의 노란 눈은 에릭의 청회색 시선과 꼭 닮아 있었던 것이다.
거대한 몸, 탄력있는 근육, 그 위를 덮은 푹신해 보이는 잿빛 털. 직설적으로 말해서, 그 늑대는 대단히 아름다웠고, 순수한 경탄에 젖어 찰스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뼏었다. 그리고, 잠시 주저하던 늑대가 천천히 다가와 그 손에 코를 내밀어 주었다.
서늘한 숨이 먼저 와 닿은 뒤, 개과 동물 특유의 축축하고 차가운 코가 손에 닿아왔다. 천천히 팔을 움직여 얼굴을 쓸자 늑대는 눈을 가늘게 뜨며 찰스의 손을 받아들였고, 좀더 용기를 내어 머리를 쓸어준 다음 얇은 귀끝을 만진 후 귀를 터는 늑대의 몸짓에 웃으며 달빛을 받아 거의 은색으로 보이는 등으로 팔을 옮겼다. 늑대의 몸은 아주 따뜻했고, 그 몸에 닿은 순간 찰스의 온몸에는 전율이 달렸다. 어깨 부분에서 조심스레 털을 헤쳐 보았더니 작은 상처는 놀랍게도 아예 아물어 있었고, 깊었던 상처만이 패인 자국으로 남아 있었다. 경이로운 회복력에 감탄하며 손을 옮겼다. 늑대의 크기 때문에 손을 위로 올려, 거칠면서도 풍성하고 푸근한 털을 쓸어주는데 갑자기 늑대가 한 걸음 옆으로 물러났다.
약간은 마법의 순간이 깨진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늑대의 의사는 충분히 알만했다. 심지어 거의 집중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분명히 '빨리 길을 떠나야 놈과 안 마주치는데' 라는 강력한 의사가 전해져 왔던 것이다. 찰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아직은 찰스가 자기 생각을 읽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늑대가 머뭇거리는 걸 보며 웃었다.
"말했잖아요. 어느정도는 읽을 수 있다고. 특히 지금처럼 강하게 생각하는 건 쉽게 알아챌 수 있어요."
늑대는 그 말을 듣고는 문 밖으로 걸어나갔고, 찰스는 그 뒤를 따랐다. 얼굴에 와 닿는 밤의 숲 공기는 에일듯 차가왔지만 에릭이 미리 건네 준 털옷이 의외로 따뜻해 견딜 만 했다. 눈앞에 선 늑대를 바라보며 마을까지 함께 간다는 것은 이 형태로 호위해 준다는 뜻이었는가 생각하는데 갑자기 늑대가 땅바닥에 주저앉는다.
"에릭?"
'내 등을 타고 가는게 빨라.'
찰스는 상당히 당황했다. 안장도 고삐도 등자도 없는 늑대의 등에 올라타다니, 대체 그게 가능한 일일까? 하지만 에릭의 말이 맞긴 하다. 이런 눈밭에서 밤이라면, 확실히 거대한 늑대만큼 안전한 탈것은 없기도 했다. 일체의 마구(?) 없이 늑대의 등에 올라타야 하는 부담과 이제껏 귀족 자제로서 승마를 익혀온 스스로의 소양에 대한 자신감 사이에서 한참 저울질 하던 찰스는, 마치 스스로에게 다짐이라도 하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늑대의 등허리에 조심스레 올라탔다.
늑대의 잔등에서 어떻게든 자리를 잡고 나니 붙들 것이 필요해졌고, 그래서 잡아 본 늑대의 목 털은 생각보다 길고 풍성해서 어떻게든 붙잡을 수 있었다. 너무 꽉 잡으면 아파할 테니 좀 조심스럽긴 했지만 그래도 붙들지 않으면 떨어질 게 분명하니 안 잡을 수는 없었다.
'사람을 태워 본 적이 없으니 떨어트릴지 아닐지 모르겠군. 꽉 잡아.'
찰스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물론 이 숲에 쌓여 있는 눈은 꽤 두터웠으니 크게 다치지 않을지도 몰랐지만, 어쨌건 눈밭에 꼴사납게 떨어지는 것보다는 에릭이 좀 따가워 하더라도 꽉 잡고 있는 편이 나을 것 같았던 것이다.
찰스를 태운 뒤 천천히 몸을 일으킨 에릭이 눈 위로 몇 발짝을 딛었다. 그 사이 찰스는 늑대의 걸음 감각을 익혔다. 말과는 전혀 느낌이 달랐지만, 어쨌건 꽤 오랜 기간 승마를 즐겨온 턱에 그럭저럭 떨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건 확인할 수 있었다.
'무게가 꽤 나가는데.'
"남자잖습니까."
늑대에게서 기침 소리 비슷한 숨소리가 났는데, 아마도 웃음소리인 듯 싶었다. 약이 올라 뭔가 쏘아주려던 찰스는, 갑작스레 뛰기 시작한 에릭의 등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튀어나오려는 비명소리를 힘껏 억누르며 정신없이 매달려야만 했다.
풍경들이 정신 없이 뒤로 지나갔다. 사실 그 풍경들을 감상할 여유 따윈 없었다. 떨어지고 싶지 않았던 찰스는 겁에 질린 채 필사적으로 회색 늑대의 털을 꽉 잡고 매달렸다. 늑대는 가끔 방향을 바꾸기도 했고 냄새를 맡기 위해 멈춰 서기도 헀는데, 그 때마다 찰스는 기겁을 하며 늑대의 등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 해야만 했다. 결코 찰스의 솜씨가 서툴러서가 아니었다. 늑대는 가장 빠른 말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숲을 질주했고, 유연하게 방향을 바꿨다. 조금이라도 방심했다간 곧장 눈밭에 떨어진다고 생각하니 도저히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엄청난 속도 때문에 칼날같은 바람이 쉴새 없이 몰아쳤지만, 꼭 달라붙은 늑대의 등이 따뜻해서 그나마 견딜 만 했다.
몇 번인가 알 수 없는 포효 같은 것이 들려왔고, 그 때마다 에릭은 귀를 쫑긋 세우고 그 소리를 주의깊게 들었다. 몇번인가는 별안간 멈춰선 채 바람의 냄새를 맡거나 눈 위에 코를 갖다 댔다. 그 때마다 찰스는 심장이 튀어나올 듯한 두려움과 긴장감을 맛보았지만, 다행히도 별 일은 없었다.
드디어 나이슬라흐의 불빛이 저 너머로 보이기 시작했다. 단단히 닫힌 덧창 너머의 불빛이긴 했지만, 에릭은 사람들 눈을 주의하기라도 하는지 속도를 늦춰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을 근처까지 닿았을 때, 늑대는 더욱 신중하게 주위를 살피며 마을 구석으로 기어들어갔다.
당연히 보름 밤이었으니 마을 사람들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럼에도 에릭은 아주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는데, 마을 사람보다는 아마도 전날에 보았던 그 흰 괴물을 조심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마침내 한 집의 문 앞에 다다른 에릭은 앞발로 그 집의 문고리를 간단히 부숴 버렸고, 마치 내리라는 듯 그 바로 앞에 주저앉았다. 문득 그것이 꽤나 '궁하면 문고리를 권총으로 쏴 버리라'고 충고했던 사람의 행동 답다는 생각이 들어, 찰스는 자기도 모르게 키들거리며 웃었다.
지금까지 이 등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애쓰느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건만, 찰스는 어쩐지 이 등에서 내리는 것에 대해 몹시 아까운 마음이 되었다. 일생 단 한번 뿐일지도 모르는 일이었지 않은가. 결국 천천히 내려서자, 어서 들어가라는 듯 재촉하는 늑대의 코가 그의 몸을 슬그머니 문 쪽으로 민다.
"알겠어요. 들어갈 테니 잠깐만요."
찰스는 그렇게 말한 다음 몸을 돌려, 할 수 있는 한 한껏 두 팔을 벌려 에릭의 목을 품 안 가득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놀란 늑대가 멈칫거렸지만 꽉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리고 천천히, 예민한 늑대의 귀에 이 말이 너무도 잘 들리리라는 것을 알면서 한 자 한 자 또렷이 이야기 했다.
"고마와요. 날 믿어주고, 여기까지 데려다 줘서."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늑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꽤 커다란 앞발이 하나 올라와 찰스의 몸을 마주 끌어안았을 뿐이었고, 잠시 그 털의 온기를 만끽한 찰스는 금새 몸을 떼고 물러서서 얌전히 창고 문 안으로 들어갔다. 방금의 문고리 부수는 소리는 꽤 컸고, 아마도 이 집의 주인은 공포에 질렸을 것이다. 어떻게든 문을 잠글 수 있는 것이 없을까 둘러보니 다행히 꽤 굵직한 빗장이 문 곁에 놓여 있었고, 그것을 발견하고 문을 닫기 위해 돌아보니 늑대는 이미 사라져 있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방금 전까지 늑대가 서 있던 곳에 제법 커다란 발자국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곧 눈이 그 발자국을 덮어 모든 증거를 숨겨주리라. 안도의 한숨을 내쉰 찰스는 부서진 문고리 대신 안에서 빗장을 지르고는 창고 안 구석으로 기어들어갔다.
다음날 아침, 찰스는 부서진 문고리에 대해 경악하는 집주인에게 할 수 있는 한 가장 미안한 기색을 띠며 어젯밤의 일에 대해 설명했다. 늦게 돌아오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문고리를 부수고 창고에 숨었노라 이야기 한 다음 문 수리비를 두둑히 보상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소란을 피우던 집 주인은 묵직한 보상에 간신히 만족하는 눈치였고, 찰스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여 여관으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었다.
"나리! 마침 잘 오셨네요. 전갈이 있습니다."
여관 주인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찰스를 맞이했다. 그의 투박한 손에는 제법 그럴듯하게 소인까지 찍힌 봉투가 들려 있었다. 처음에는 편지인가 생각했지만, 안에서 나온 것은 초대장이었다. '클라우스 슈미트'라는 이름이 꽤 우아한 필체로 적혀 있다. 이 낯선 이름이 어째서 낯익은가 잠시 생각하던 찰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 놈이 바로 괴물이야. 클라우스 슈미트, 그 저주받을 지주놈이 바로 괴물이었다고!'
에릭이 말했던 이름이었다. 깨끗한 고급지에는 자택으로 초대하고 싶다는 정중한 설명과 함께 일시가 지정되어 있었다. 잠시 그 종이를 들여다 보던 찰스는 대체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인지 고민에 빠졌다.
이제껏 그는 이 곳 지주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물론 찰스의 신분을 생각하면 초대를 받아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기는 했다. 하지만 이제껏 지주는 - 클라우스 슈미트는 그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다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 기이한 초대에 대해 '이유'를 따져 보자니 짚이는 것은 한 가지 뿐이었다. 그렇다. 만일 에릭의 말대로 클라우스 슈미트가 '괴물'이라면 이 행동은 납득 가능하다. '괴물'은 찰스를 보았고, 노렸다. 그리고 에릭이 끼어들었다.
'함정일지도 모르겠군.'
찰스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물었다. 이틀 전 '괴물'은 그를 놓쳤다. 어쩌면 그때 못다한 사냥을 하려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벌린 입으로 사냥감더러 기어들어오라고 정식으로 초청하는 것이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찰스는 그래도 이 초대에 한번 응해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일단 이 자가 정말로 괴물인지 아닌지 알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 볼 필요가 있었다. 운이 좋아서 그의 정체를 찰스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서라도 파악할 수만 있다면, 에릭의 진실성에 대해 완벽한 확신을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가 괴물이라 해도 지금은 대낮이었고, 주변 고용인들의 시선도 있을 텐데 자신을 쉽사리 해칠 수는 없으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찰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방에 들어갔다. 일단 뜨거운 물에 목욕을 좀 한 다음 옷을 갈아입어야 했던 것이다. 아, 물론 식사부터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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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 도착한 지주의 저택은 런던을 잘 알고 있는 찰스가 보기에도 꽤 괜찮은 곳이었다. 물론 베를린의 진짜 귀족들의 집과 비교하는 것은 무리였지만, 이런 마을에 있을 법한 부유층의 별장이라 생각해 볼 때 제법 괜찮은 수준에 들어갔던 것이다. 그 집의 주인은 예상 외로 소탈하고 친절해 보이는 사람이었지만, 그의 명민해 보이는 엷은 푸른빛 눈동자는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만났을 때 서툰 독일어로 인사를 건네려 했지만, 그의 말을 가로막으며 들려온 것은 의외로 격식있는 유창한 영어였다.
"청년 시절에 영국에 있었소. 런던의 친구들이 잘 지내는지 모르겠군."
시원스레 웃음지으며, 클라우스 슈미트는 찰스를 위해 홍차를 준비해 두었다고 말했다. 영국에서 이 곳으로 온 이래, 들고 왔떤 홍차를 모두 소비해 버린지 꽤 되었던 찰스로서는 실로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고, 그래서 응접실에서 따끈한 찻잔을 든 찰스는 눈앞의 사람이 사실은 인간이 아니라 흉폭한 괴물, 그것도 자신의 목숨을 노렸던 괴물이라는 점을 기억하면서도 긴장을 풀고 대화할 수 있었다.
그는 매우 지적인 남자였고 재치도 있었다. 찰스의 작업에 상당한 흥미를 보이며 자신이 알고 있는 전설에 대해 이야기해 주기도 했다. 찰스를 초대한 이유에 대한 그의 설명은 의외로 단순했다. 여러가지 이유로 마을 사람들과 교류를 깊이 하지 않다 보니 찰스에 대한 소문을 이제서야 들었다는 것이다.
"괴짜 박사인가가 와서 '괴물'에 대해 조사한다고 하더군. 그 얘기를 듣고 당신을 만나고 싶어졌소."
마주 웃으며, 찰스는 클라우스의 머리 속을 들여다 보기 위해 다시 한번 집중했지만 그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자의 생각은 거의 모든 것이 비밀에 싸여 있었다. 예컨대 찰스를 만나보고 싶어졌다고 한 건 명백한 진실이었지만 그 '진짜' 이유는 안개낀 듯 흐려서 잘 보이지 않았다. 괴물 이야기를 꺼낸 뒤, 클라우스는 찰스 앞에서 농부들의 헛된 미신과 괴물로 오인될 만한 잔인한 늑대들에 대한 얘기를 늘어놓으며 찰스의 안색을 살폈다. 이 쪽을 살핀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지만 답답하게도 그 속내는 조금도 제대로 읽어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가 이 화제를 꺼낸 것으로 약간은 이 자의 동기를 유추해 낼 수 있었다. 아마도 찰스가 괴물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혹은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는지에 대해 알아보려 하는 것일 터이다. 만일 에릭이 찰스에게 자신의 정체를 털어놓았다는 것을 들킨다면, 그렇다면 살아서 마을에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여기서는 최대한 순진한 학자, 그러니까 불운하게 괴물을 만난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학자 연기를 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하여, 찰스는 짐짓 열성적으로 그 말을 부정했다.
"세상에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는 모르는 겁니다. 저만 해도 어제 바로 그 괴물에게 죽을 뻔 했으니까요."
이 사실을 밝힌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자신의 말에 따라 변하는 클라우스의 감정을 읽어내고자 시도한 것이다.
"괴물을 봤다고?"
"예, 그렇습니다. 바로 그제 밤의 일이었습니다."
클라우스 슈미트는 회의적인 눈길로 감정하듯 찰스를 바라보았다. 마치 찰스의 말을 믿어야 할지 안 믿어야 할지 고민하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찰스는 그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제는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클라우스는 감정적으로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냉철하게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다. 대체 어떤 생각인지 알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
"어디 얘기 좀 해 보시오. 내가 이제껏 들어온 농부들의 헛소리와 뭐가 다를지 궁금하거든."
찰스는 늘 그래 왔던 것처럼 최대한 열성적으로, 그의 말에 회의적인 공격자들을 설득할 때처럼 진지하게 그 날의 사건에 대해 털어놓기 시작했다. 다만 에릭에 대한 이야기는 주의깊게 내용을 바꾸었다. '갑자기 달려든 괴물같이 거대한 회색 늑대'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기색을 들켜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클라우스 슈미트는 빙글빙글 웃으며 찰스의 얘기를 듣고 있었지만, 그 머리 속은 매우 냉철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문득 찰스의 뇌리에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다.
'샤리야르를 사랑하지 않았던 시절의 셰헤라자데가 딱 이런 기분이었겠군.'
지주는 찰스의 이야기를매우 흥미로워하며 경청했다. 여전히 그 엷은 푸른빛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지만 입은 무려 약간 곡선을 그리기까지 할 정도였다. 그가 가장 흡족해 하는 눈빛을 보인 부분은 바로 '회색 늑대'에 대한 얘기가 나왔을 때였다. '두 괴물이 싸우기 시작했는데, 꼭 먹잇감을 놓고 다투는 늑대들 같았다'고 할 때엔 거의 즐거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 때 슈미트는 강렬한 감정을 하나 선보였는데, 그건 바로 비웃음이었다. 그 비웃음을 느낀 찰스는 오히려 안도했다. 사실 슈미트가 자신을 바보 취급할수록 오히려 상황은 좋다고도 할 수 있었다. '죽일 가치도 없는 멍청한 바보' 정도로 결론을 내 주면 딱 좋겠다고 생각하며, 찰스는 이야기를 마쳤다.
"살아남으셔서 다행이군요. 하지만 사실 직접 눈으로 보기 전엔 참 믿기 어려운 일이오."
찰스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하지만 전부 제가 겪은 일입니다.' 라고 말했다. 다행히도 클라우스 슈미트는 그를 우습게 여기게 된 듯 싶었다.
"마을 사람들이 말하는 것이 다 사실인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전부터 사람이 주는 사고가 자주 있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게 바로 늑대 놈들의 짓거리라 이 말이오. 늑대들은 아주 교활한 생물들이지."
그는 '교활'이라는 말을 특별히 강하게 말했는데, 거기선 오히려 자부심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클라우스 슈미트가 누구와 자신을 동일시하는지는 뻔했다. 에릭의 말을 믿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진실'을 눈앞에서 보게 된 충격은 의외로 상당해, 찰스는 바짝 타는 입술을 자기도 모르게 혀로 핥았다.
괴물, 바로 그 괴물이다. 직감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자와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고 평화롭게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은 이제 다시 만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어떻게든 이 작자에 대해 좀더 알아봐야만 한다. 그의 머리를 온통 감싸고 있는 짙은 안개를 헤치고 어떻게든 헛점을 끌어낼 화제거리가 필요했다. 하여 고민을 하고 있는데 문득 클라우스 슈미트가 툭 하고 말을 꺼냈다. 그리고 그 말이야말로 바로 키워드라는 듯, 그 말을 꺼내자마자 클라우스의 사념이 찰스의 머릿속에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그 괴짜 사냥꾼과 만난 적이 있다면서요?"
"괴짜 사냥꾼이요?"
"에릭 말이오. 에릭 렌셔."
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최대한 태연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 노력하며 클라우스 슈미트의 생각에 정신을 집중했다. 둘 다 한꺼번에 하는 것은 꽤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예, 도움을 받았지요."
"놀라운 일이오. 나는 그 아이가 다른 사람을 도왔다는 말을 아주 오랫동안 듣지 못했거든."
분명 '그 아이' 라 말할 때 클라우스 슈미트의 머리 속에 울린 것은 다른 말이었다. 그 생각은 너무나 분명해서, 찰스의 귀에 '내 아이', 그리고 '내 것' 이라는 그 말들이 한꺼번에 발음된 것처럼 들릴 지경이었다. 감정도 이제는 손에 잡힐 듯 분명했다. 소유욕, 불길같은 소유욕 그 자체였다.
잠시 침묵하는 클라우스의 마음에 떠오른 것은 찰스에게도 이제는 너무나 익숙한 장면이었다. 에릭이 추억하던 것과 거의 비슷하지만, 이번에는 "괴물"의 각도에서 바라본 것이었다. '괴물'은 여자를 성가셔하며 그대로 앞발을 휘둘러 목을 그어 버렸고, 그 뒤의 아이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창백하게 질린 소년, 달빛에 비쳐도 알아볼 수 있을만큼 또렷한 푸른 눈과 보드라운 머리카락을 한 소년, 마치 잘 구운 생강빵처럼 달콤한 체취를 풍기는 소년이었다. 겁에 질린 그 아름다운 아이를 짓누르고 천천히 따스한 살에 이빨을 박는다. 압도적인 감미로움과 향긋함. 그건 말 그대로 공포스러운 감각이어서, 찰스는 찻잔을 든 손을 제대로 조절하기 위해 잠시 정신 집중을 풀어야만 했다.
"무슨 일이오, 괜찮소?"
"아...아무 일도 아닙니다. 잠깐 현기증이 들었어요."
"이런, 조심하시오."
어떻게든 방금 느낀 압도적인 감각을 지우고 싶어서, 찰스는 일부러 더 적극적으로 대화에 끼어들었다.
"성격이 좋지 않았나 보죠? 에릭 말입니다."
"글쎄, 정확히 말한다면 비뚤어졌다고 봐야 할 거요."
"헤르 슈미트께서는 정말 관대하시군요. 마을 사람들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차가운 푸른 시선이 갑자기 다가왔다. 몸을 찰스 쪽으로 낮춘 클라우스 슈미트는 마치 그 안의 생각까지 꿰뚫어보겠다는 듯 찰스의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
"그와 무슨 얘기를 했소?"
너무나 직접적인 질문이어서 순간 당황할 뻔 했다. 슈미트의 시선은 어떤 변화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흔들림 없이 이 쪽을 향하고 있었고, 입가에는 슬쩍 미소마저 올라와 있었다. 조금이라도 수상한 점을 느끼게 해선 끝장이라는 생각이 든 찰스는 최대한 침착하게 대답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가...그가 과거에 무서운 사고를 겪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아까 보았던 그 장면은 아직도 너무나 압도적으로 찰스를 지배하고 있었다. 피, 향기, 맛, 어떻게든 간신히 주워섬겼지만 이게 잘 이야기한 건지 아니면 실수를 한 건지 알아채기가 어려웠다. 어쨌건 슈미트는 고삐를 늦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사고라, 괴물 이야기겠지. 당신은 그의 얘기를 믿소?"
"...믿지 않을 수가 없지요. 제가 그 괴물을 직접 본 걸요."
"그의 '얘기'를 믿느냐고 했소."
이제 그의 의도는 너무나 명백했다. 필사적으로 들여다 본 생각 속에서, 클라우스는 에릭이 찰스에게 지주야말로 괴물이라는 얘기를 했다고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작자에게 에릭의 얘기를 하다니, 경솔했다.
"무슨 얘기 말씀입니까?"
"그가 괴물에 대한 얘기를 해 주었으면서, 정체 얘기는 안 해 주었단 말이오?"
이것은 반드시 성공해야만 하는 속임수였다. 대답 하나에 목숨이 달려 있었던 것이다. 찰스는 마른침을 한번 삼키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계속 물어보는 절 밀어냈습니다. 제가 들어봤자 믿지 못할 거라고만 하더군요."
클라우스 슈미트가 몸을 일으키는 동안, 찰스는 자신의 필사적인 연기가 성공한 것인지 아닌지 확신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런 슈미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허나 이번에는 손이 다가왔다. 찰스의 턱을 들어올리는 손길은 의외로 부드러웠지만, 그만큼 공포스럽기도 했다. 손이 들어올리는 대로 얼굴을 드니 그 곳에는 다시 슈미트의 눈이 기다리고 있었다. 엷은 푸른빛 눈, 얼음같이 차고 잔인한 겨울같은 눈동자가.
"그 말만 했소?"
'그런 자를 구했다고? 그 아이가?' 들려오는 슈미트의 생각에 찰스는 가볍게 침을 삼키고 눈을 내리깔았다. 더이상 시선을 마주했다간 그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을 들킬 것만 같았다.
"사실 그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그리고는 남은 기력을 힘껏 끌어모아 클라우스의 시선에 눈을 맞췄다.
"헤르 슈미트께서는 알고 계십니까?"
'아, 알고 있지, 알고 있고말고.' 슈미트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어깨를 으쓱 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 아이의 헛소리야 워낙 많아서 말이오."
'어쨌건 이 녀석이 그 아이에게 그렇게 중요한 자는 아니라면...' 헤르 슈미트는 엄지손가락을 들어 찰스의 뺨을 조용히 쓸어 내렸다. '없애도 별 일은 없겠군.' 찰스는 그 생각에 거의 비명을 지를 뻔 했지만 애써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그러지 않으면 이 자의 손에 언제 목숨이 떨어질지 모른다. 그는 늑대고, 이 곳은 그의 소굴이니까.
"어쨌건 난 괴물을 믿지 않소이다. 직접 보았다는 당신의 말도 믿기는 어렵군."
간신히 손이 떨어져 나갔고, 안도의 한숨을 쉬지 않기 위해 애쓰는 동안 슈미트는 돌아서서 술병이 들어 있는 장식장 쪽으로 다가갔다.
"술이나 한 잔 하겠소?"
"아닙니다. 아직도 보름은 끝나지 않았잖습니까. 별로 위험에 처하고 싶지는 않군요."
찰스는 늑대로 변하기 조금 전에 에릭이 했던 말을 기억해 냈다. 늑대들의 눈에 보름달은 사흘간 떠오른다고 했고, 그 얘기는 오늘까지는 보름달이 뜬다는 얘기가 된다.
"그럼 이만 가야 되겠군. 즐거운 시간이었소."
그런 찰스의 심경을 아는지 모르는지, 술을 한 잔 따라 든 슈미트는 선선히 웃으며 이 불길한 회담의 끝을 알렸다. 그러나 찰스는 다시 한번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잔 속에 일렁이는 술을 응시하는 슈미트는 바로 어제 맛보았던 에릭의 피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 아름다운 아이, 다 컸구나. 인간 따위에 연연하는게 어리석다고 그렇게 얘기했건만...'
순수한 소유욕, 집착, 가학. 그 모든 것이 뒤섞여 밀려왔다. 찰스는 어서 그 끔찍한 공간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얼른 인사를 하며 걸어나왔다. 슈미트의 진득한 감정은 그러나, 복도를 걸어나오는 내내 찰스의 마음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맑은 공기가 그리웠던 적이 있던가. 복도의 창을 전부 열어젖히고 싶을 정도로 답답했다. 살아오면서 찰스는 수많은 사람들의 감정과 생각을 느꼈다. 개중에는 폭력에 대한 갈망, 파괴욕, 정욕, 악의 등 '어두운' 것들을 접하게 되는 일도 있었다. 이제껏 찰스가 보아온 그러한 감정들이 '어두운' 것이라면 방금 슈미트가 보여준 것은 지옥의 심연에 비유할 만 했다. 살아있는 인간에게서 느껴본 적이 없을 정도로 강렬한 감정이었다.
하인이 문을 열었고, 싸늘하게 젖은 독일의 겨울 공기가 찰스의 폐 안에 가득 들어왔다. 소름돋게 추웠지만 동시에 개운했다. 숨을 내뱉고 다시 들이킨 후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고 하늘을 응시한 순간, 가라앉은 하늘을 본 찰스는 깨달았다.
땅거미가 지고 있으니 곧 달이 뜰 것이다. 그리고 말도 마차도 없는 자신은... 마을로 돌아가다 괴물을 만나리라. 에릭의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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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는 계속 달렸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았고 폐는 찬 공기로 가득차 터져나갈 것 같았지만 발을 멈출 수는 없었다. 처음 저택에 올 때에는 돈도 많으면서 왜 이리 외딴 곳에 저택을 지었을까 하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 이유를 잘 알 것 같았다. 오히려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호기심 많은 마을 사람들의 눈을 피해 지내는 편이 유리했을 것이다. 고용인들을 속이는 데에도 편했을 것이고, 사실을 알게 된 불운한 고용인들을 처치하기에도 편했으리라. 숲가에 나 있는 외길에서 누군가 사라지더라도 주변 숲의 늑대 핑계를 대면 그만이다. 말 그대로, 늑대인간에게는 완전범죄일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예전에 에릭을 덮칠 때에도 그렇게 된 것이었고, 이제는 찰스가 위협당하게 된 것이다. 찰스는 자칫 넘어질 뻔 했지만 간신히 균형을 잡고 계속 달렸다. 달이 떠오르면 클라우스 슈미트는 늑대 인간이 될 것이고, 찰스의 냄새를 따라, 혹은 눈 위에 남은 자국을 따라 뛰어올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두지 않으면 안 된다. 다 낫지 못한 등의 상처가 욱신거렸고, 거기 땀이 배어들어 따갑기까지 했지만 절대 멈출 수가 없었다. 죽고 싶지 않았고, 에릭에게 자신이 알아낸 것을 말해주지 못하고 죽는 건 더 싫었다. 가장 절망적인 것은, 찰스가 여기 온 걸 에릭이 알 리 없으니 만일 여기서 찰스가 습격당하면 도와줄 이도 없다는 점이었다.
마침내 해가 져서 주위는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찰스는 울 것 같은 심정이 되었지만 사실 그에게는 울 여유조차 없었다. 생각을 해야만 했다. 마을까지, 어떻게든 마을까지 간다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찰스는 당장이라도 절망해서 주저앉고 싶은 자신을 그렇게 다그치며 달리고 또 달렸다. 그러나 그의 체력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고, 차츰 다리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걷다 달리다, 넘어져 눈에 몇번 구르고 다시 간신히 일어나 몇 걸음을 옮겨놓으며 이동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대로라면 곧 따라잡힐 거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속도를 더 높일래야 높일 수가 없었다.
드디어 완전히 깜깜해졌다. 그래도 찰스는 희망을 아예 잃지는 않았다. 지금쯤 괴물이 이리 달려오고 있을 것은 분명했지만, 그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 저 앞에 마을의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희미한 희망의 불꽃을 꺼트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그는 몇 걸음을 더 옮겨 놓았지만, 다음 순간 절망스럽게도 뒤쪽에서 다가오는 거대한 뭔가를 느끼고야 말았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그저 마을을 향해 달려갔겠지만 그는 그러지 않을만큼 현명했다. 경고가 울리는 순간 그는 온 몸을 웅크리며 옆으로 굴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걸음을 옮기는 것도 힘들었건만, 생명의 위기 앞에서 몸이 저절로 움직인 것이다. 차가운 눈이 뺨에 느껴졌고, 간신히 고개를 들고 바라보자 그 곳엔 괴물이 서 있었다. 바로 그 지긋지긋한 흰색 털의 늑대인간이.
순간 오금이 저렸지만 찰스는 다시 몸을 일으키고는 달려나갔다. 아까까지만 해도 죽을 것 같던 몸이 생존 욕구 덕에 새로운 힘을 얻어 힘차게 움직였다. 반면, 반드시 성공하리라 믿었던 첫 공격이 실패한 것에 놀랐는지 늑대인간은 잠시 거기 그대로 서 있었고, 그 동안 찰스는 길에서 벗어나 잔가지가 잔뜩 달린 작은 나무들 사이로 뛰어들어가 다시 마을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어느새 쫓아온 괴물이 손을 휘둘렀지만 긴 발톱은 잔가지들만 잘라냈을 뿐, 정작 반동강이 났어야 하는 찰스는 저 앞쪽에서 허둥지둥 달려가고 있었다. 너무 지쳐서 가끔 손으로 바닥을 짚거나 넘어지면서 달려가고 있었지만, 어쨋건 점차 마을에 가까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늑대인간이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두 발이 아니아 네 발로, 긴 손톱을 땅에 박으며 달린 괴물은 금새 찰스를 앞질러 가로막았다. 멈춰선 찰스의 눈동자게 숨길 수 없는 절망이 떠올랐고, 괴물은 그것을 즐기듯 천천히 손을 들어올렸다. 그러나 곧 찰스는 알아챘다. 무언가 커다란 것이 괴물 바로 옆에 숨어 있었고, 곧이어 무서운 기세로 늑대인간에게 달려들었다.
"에릭!"
에릭이었다. 믿을 수 없었지만 정말로 에릭이었다. 여전히 온전한 늑대의 모습을 취한 에릭은 그대로 괴물의 팔을 물어뜯으며 덤벼들었다. 절망과 극한의 공포 뒤에 찾아온 안도감과 놀라움 때문에 찰스는 거의 기절할 것 같았지만, 지금은 기절할 때가 아니었다. 찰스는 몸을 일으켜서 어떻게든 발걸음을 옮기려다 흠칫 했다.
에릭을 도와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대체 에릭을 어떻게 돕는단 말인가? 저 둘 사이에 자신이 끼어들어봤자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지금은 총도 가지고 있지 않았고, 그 총이 있다 해도 지난번 같은 요행이 따라준다고는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마을 사람? 마을 사람들을 부른다? '두 명'의 늑대인간 앞에서? 게다가 그 중 한 명은 에릭이다. 이 곳 집 안에 꼭꼭 숨어있을 마을 사람들이 쉽사리 달려나와 줄 지도 알 수 없었지만, 하지만... 문득 찰스의 머리에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지난번 둘이 싸웠을 때, 에릭은 그렇게 크게 다쳤는데 슈미트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것은 말 그대로 둘의 전력차다. 거기까지 생각이 가 닿은 찰스는 이를 악물고 마을 쪽으로 달려갔다. 저 싸움을 못 하게 하는 것까지라면 마을 사람들이 도움이 되어줄 것이다. 두 괴물이 흩어져 떨어지도록 해야만 한다. 에릭이 다쳐선 안된다.
달리는 뒤에서, 늑대 울부짖는 소리와 괴물이 으르렁대는 소리가 마구 섞여서 들려왔다. 중간에 늑대의 비명 소리가 울렸을 때에는 자기도 모르게 뒤를 돌아볼 뻔 했지만, 에릭을 구하기 위해서라고 애써 다짐한 찰스는 뒤돌아보지 않고 계속 달렸다. 발이 무거웠고, 온 몸에서는 땀이 비오듯 쏟아졌다. 두터운 코트가 이제는 거추장스러워 던져 버리고 계속 달렸다. 마침내 마을 광장 어귀에 도착한 찰스는, 당연히 사람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거리를 바라보다가 이를 악물고 소리를 질렀다.
"도둑이야!"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괴물이 무서우니 고작해야 도둑 때문에 밖으로 나올 수는 없다고 생각한 까닭인 것이다. 찰스는 다시 한번, 있는 힘을 다해 절규했다.
"마을 창고에 도둑이야! 잡아라!!!"
숲 안에 온전히 폐쇄되어 있는 이런 마을에서 마을창고의 안전은 절대적으로 중요했다. 괴물에게 잡혀죽으나 굶어죽으나 죽는 건 마찬가지다. 아니나다를까, 몇몇 건물의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저 쪽으로 도망쳤어요! 곡식자루를 들고!!!"
클라우스와 에릭이 싸우고 있을 바깥쪽을 가리키며 소리지르자 몇몇 사람들이 쇠스랑이며 몽둥이를 들고 나오기 시작했다. 당황한 마을 사람들이 더 많이 모여 움직이기 시작하고서야 찰스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그들을 인도했고, 마을 사람들은 곧 "도둑 잡아라!" "놈들이 도망쳤다!" 라고 외치며 찰스를 앞질러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젠 정말 쓰러질 것 같았지만 그래도 함께 달려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머리 속에는 피에 젖어 쓰러진 에릭이 어른거렸고, 제발 마을 사람들의 인파에 놀란 두 괴물이 어떻게든 도망쳐 줬으면 하는 바램 뿐이었다.
"괴물이다!" "지주님!" "어르신!"
앞선 사람들의 입에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멈춰선 군중들 사이에서, 찰스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나와 아까까지 둘이 싸우던 현장을 바라보았다.
맙소사, 거기에는 피투성이가 된 늑대가 있었다. 회색 털 곳곳에 흉한 상처가 입을 벌리고 있었고, 거의 쓰러지다시피 절룩거리면서도 늑대는 이 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서 새파랗게 질린 한 남자가 마을 쪽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눈밭에 피를 뚝뚝 떨구며 걸어오는 늑대와 달리, 클라우스 슈미트는 어느새 찰스의 코트까지 주워 입은 채 이 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찰스는 눈을 크게 뜨고 그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달이 떠 있는데도 필요하다면 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렇다면 에릭은?
달려오는 클라우스의 뒤에서 늑대를 본 마을 사람들은 비명을 질렀다. 곳곳에서 "주여!" "맙소사!"라는 경악에 찬 탄성과 절규가 들려왔다. 몇몇은 성호를 그었고, 몇몇은 덜덜 떨며 뒷걸음질을 쳤다.
"살려줘!"
슈미트가 외쳤다. 그의 눈은 괴물에게 쫓기는 사람 치고는 지나치게 고요하고 냉정했지만, 표정만은 아주 훌륭하게 겁에 질려 있었다.
"괴물이야, 괴물이 정말 있었어!"
겁에 질려 있는 것은 마을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지만, 일단 자신들의 수를 믿은 것인지 클라우스를 감싸고 다들 늑대 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누군가가 외쳤다.
"저 피좀 봐, 오늘은 또 누굴 죽인 거지!"
"저 늑대가 어르신을 죽이려고 했어!"
다친 것은 클라우스 슈미트가 아니라 늑대였건만, 사람들은 서서히 기세를 올려가며 늑대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심상찮은 기색을 느낀 늑대가 으르렁거렸고, 찰스는 그만 눈을 감아 버렸다. 이러려고 사람들을 불러온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지주에게만 집중하고 있다가 지금의 사태를 깨달은 늑대가 몸을 돌리려 했지만, 마을 사람들은 어느새 서서히 움직여, 마치 늑대를 밟아 죽이려는 양떼들처럼 에릭을 둘러싸고 있었다.
"이것 봐, 왜인지 모르지만 다쳤어!"
"굶주렸나 봐. 힘이 별로 없을지도 몰라!"
슈미트가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생포합시다! 오늘 나온 모든 사람들에게 금화를 드리겠소, 내가 저놈의 가죽을 산채로 벗겨 드리지!"
물론 거짓말이리라. 허나 자신들이 수적으로 유리하다는 확신이 있는 마을 사람들에게는 더없이 유혹적인 얘기였고, 그러한 그들을 해칠 마음이 없는 에릭이라면 운 나쁘게 생포당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클라우스 슈미트는 그렇게 소망하던 에릭을 손에 넣게 되리라.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찰스는 이를 악물고 나섰다. 그런 일만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된다!
"잠깐! 잠깐만! 그 늑대는 괴물이 아닙니다. 지금 오해가 있어요!"
마을 사람들이 순간 멈칫 했다. 이중 상당수가 찰스를 먼 발치에서나마 보아서 알고 있었고, '먼 나라에서 온 박식한 박사'라는 것이 그들의 인식이었다. 이런 시골 사람들에게 박사란 '뭐든지 아는 사람'이다. 찰스는 어떻게든 이들이 그런 자신의 말을 조금이라도 믿어주길 바라며 외쳤다.
"저 늑대가 아닙니다. 진짜 괴물은 따로 있어요!"
"진짜 괴물?"
'괴물이 아니래' '뭐라고?' 술렁거리기 시작한 마을 사람들의 입을 막기라도 하듯 찰스의 말을 바로 받아친 것은 클라우스 슈미트였다. 그 쪽으로 시선을 돌린 찰스 앞에서, 지주는 파란 눈을 마주하고는 슬그머니 웃어 보였다. '똑똑한 꼬맹이로군.' 그 생각이 울려옴과 동시에 그가 입을 연 순간, 찰스는 머리가 말 그대로 쭈뼛 서는 감각을 느껴야만 했다.
"꼭 평소에 저 늑대를 알고 있었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자비에 박사?"
마을 사람들이 다시 수런거렸다. 그러나 아까와는 명확히 다른 성격의 말들이 그 사이를 오갔다.
- 저 사람, 요즘 계속 밖을 돌아다녔다며?
- 그런데 무사했다나 봐.
찰스는 시린 주먹을 꼭 쥐었다. 지금 마을 사람들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는 알 만 했다. 찰스 자신은 웃어넘겼을 뿐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 없었지만, 마지막 '마녀'가 화형당한 지 고작해야 백년도 지나지 않았다. 마녀사냥의 광기가 지나갔다고 해도 독일, 게다가 이런 시골이라면 사람들의 생각이 아주 다를 수도 있다는 것도 잘 알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기서 입을 다물고 있을 수는 없었다. 에릭의 안위가 걸린 문제였고, 찰스 자신이 일으킨 문제였다. 그리고 여기서 다급히 부정하는 것이 오히려 더 안좋을 것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입을 다물고 찰스를 바라보았다. 이 쪽을 쳐다보는 그들의 눈에서는 여러가지 감정 - 불신, 의심, 불안 - 을 읽을 수 있었다.
"믿어주십시오. 진짜 괴물은 저런 늑대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끔찍합니다. 전 그 녀석에게 죽을 뻔 했어요!"
"진짜 괴물이라니, 박사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클라우스가 뻔뻔스레 끼어들었고, 곧장 마을 사람들을 돌아보며 외쳤다.
"난 지금 바로 저 녀석에게 습격을 당했소! 모두 보았잖소!"
마을 사람들의 얼굴이 험상궂어졌다. 찰스는 절망적인 심정이 되어 외쳤다.
"당신이야! 당신이 그 짓을 저질렀잖아! 날 죽이려던 건 바로 당신이라고!"
"저 미친 학자를 묶어라!"
슈미트는 웃으며 소리쳤다. 당황한 찰스가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둘러싼 마을 사람들의 입에서는 이미 '마녀! 마법사!'라는 소리가 튀어나오고 있었다. 다친 늑대보다는 지친 찰스가 만만해 보였는지 손들이 다가왔고, 찰스는 그 손을 뿌리치려 애쓰며 어떻게든 외치려 했다.
"다들 속고 있어! 당신들은!"
그러나 사방 팔방에서 팔을 붙들어 왔고, 누군가 더러운 천 뭉치를 찰스의 입에 재갈처럼 물려 묶어 버렸다. 또다른 억센 손이 팔을 뒤로 비틀었고, 결박하려는 것을 알아챈 찰스는 으르렁거리며 어떻게든 뿌리치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그렇게 손까지 묶이기 직전, 에릭이 끼어들었다.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아무리 수가 많다 해도 결국 순박한 농부들이었고, 거대한 늑대가 달려드는데 용감하게 맞설 사람이 있을 리는 없는 일이었다. 공포에 질려 우왕좌왕하며 사람들은 어떻게든 늑대에게서 멀어지려고 애썼고, 그래서 찰스는 잠깐이나마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건 피에 젖은 회색 털이었고, 늑대의 마음을 알아차린 찰스는 있는 힘을 다 해 몸을 던져 그 목덜미에 매달렸다.
눈 위로 핏방울이 떨어져 사람들의 발에 짓밟혔다. 잠시 몸을 낮췄던 늑대는 주저없이 일어나 찰스를 매단 채 내달렸다. 처음 얼마동안 질질 끌려가던 찰스는 정신을 차리고 이를 악물었다. 이렇게 목에 매달리면 둘 다 힘들어진다. 잠시 숨을 가다듬은 그는 발 밑을 빠르게 지나가는 바닥을 발로 차기 위해 애썼다. 실패, 그리고 다시 실패했다. 에릭의 피로 얼룩진 셔츠가 팔에 달라붙어 왔고 마음은 더 초조해졌다. 뒤에서는 "저놈 잡아라!" 라는 외침이 들려왔어. 늑대는 한쪽 다리를 절며 달려갔고, 간신히 바닥을 차는데 성공한 찰스는 그 반동으로 간신히 에릭의 등에 기어올라갈 수 있었다. 여전히 그저 엎드린 채 매달리는 것밖에 할 수 없었지만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에릭도 찰스도 편해졌다.
늑대는 쫓아오는 사람들을 피해 마을 광장으로 뛰어들어간 다음 마을 바깥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상처에서 핏자국이 떨어져 선명한 자국을 남겼지만 지금은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잠시 그렇게 숲길을 달리던 늑대는 속 수풀 속으로 몸을 숨겼고, 조심스레 낮은 자세로 한참을 걷다가 다시 어디론가 달려갔다.
핏자국이 고스란히 남았으니, 아마 그 날 밤에 눈이 내리지 않았다면 그들의 탈출은 실패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곧 또 눈이 내리기 시작했고, 마을 사람들은 눈 내리는 밤에 숲에 숨은 거대한 늑대와 마법사를 쫓아갈만큼 담대하진 못했다. 지주는 늑대를 붙잡지 못한 것을 영 아쉬워했지만 지금은 일단 물러날 수밖에 없다는 걸 인정하고 저택으로 돌아갔다. 몇몇 마을 사람들은 지주님의 옷차림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감히 지주에게 그에 대해 물어볼 만큼 간이 부은 사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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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는 계속 달리고 또 달렸다. 잠시 풀숲에 숨어 추격자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조심스레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늑대의 등에서 내려온 찰스는 에릭의 목을 끌어안고 눈물부터 쏟았다. 울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끌어안는 순간 와락 넘쳐흐른 눈물은 도저히 제어할 수가 없었다. '고맙다'고도 '미안하다'고도 말하지 못하는 찰스의 등에 다시 한번 그 앞발이 올라왔다. 피에 젖은 앞발을 느낀 찰스는 목도리를 풀어 에릭의 뒷다리에 난 제일 큰 상처를 감아 주었고, 에릭의 인도에 따라 눈 속으로 걸어갔다. 계속 내리는 눈이 이때만큼은 고마웠다. 마을 사람들이 도망친 늑대에 대해 수색하더라도, 이 눈이 핏자국과 발자국만 가려 준다면 에릭의 정체를 들키지는 않을 수 있을 것이다.
걸어가던 에릭이 잠시 뒤를 돌아보더니 수풀 속에 웅크리고 숨었다. 늑대가 느끼는 불안감이 고스란히 찰스의 마음에도 전해져 왔다. 추적에 대한 두려움, 클라우스에 대한 증오와 두려움, 이제부터 도망치려는 '안식처'를 그들이 알아서는 안된다는 걱정. 둘은 거의 몇시간 동안을 무성한 수풀 속에서 동정을 살피며 버텼다. 추위는 지독했지만, 인간과 늑대가 꼭 붙어있는 바람에 그래도 어떻게든 버틸 수 있었다.
한밤중도 지나 새벽이 될때 쯤 다시 늑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절룩거리던 발걸음은 여전했지만, 가쁘던 숨은 상당히 가라앉은 상태였다. 걱정스레 찰스가 바라보았지만 늑대는 아무 반응 없이 묵묵히 걷기만 했다.
그렇게 한참 걸어가다 보니 토굴이 나왔다. 굴 속에 숨어든 늑대는 그제서야 쓰러져 버렸고, 당황한 찰스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완전한 어둠 속에서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았고, 손으로 더듬어 보니 그나마 상자가 몇 개 쌓여 있어서 뒤져보았지만 총이나 탄약, 오래 보존할 수 있는 말린 식량 정도가 들어 있었을 뿐, 부상을 당한 에릭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은 없어 보였다. 초조한 기색으로 주위를 좀더 더듬어 보는데, 문득 수직으로 세워진 막대가 만져졌다. 다른 손도 뻗어 형태를 가즘해 본 찰스는 그게 바로 사다리임을 알아채고,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그 사다리가 어디까지 뻗어있는지 가늠해 보았다.
위를 향한 사다리, 올라가면 혹시 뭔가 더 있을지도 모른다. 발로 눌러 체중을 버틸만큼 튼튼한지 가늠해 본 찰스는 머리를 세게 부딪치는 일 없도록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곧 머리에 딱딱한 바닥이 와 닿았지만, 천천히 밀어보니 약간 묵직한 느낌과 함께 순순히 위로 올라갔다. 잠깐 멈추고 기색을 살핀 찰스는, 주위에 에릭과 자신 외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그 '문'을 위로 완전히 열고 몸을 끌어올렸다.
낯익은 풍경이 펼쳐졌다. 이 곳은 바로 에릭의 오두막이었고, 찰스가 밀고 올라온 곳은 주방의 작은 깔개 밑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찰스는 완전히 밖으로 나와 문을 닫아 보았다. 꽤 교묘하게 마감된 문은, 모르는 사람의 눈으로 보면 별 이상이 없어 보일 정도로 잘 위장되어 있었다. 문을 열어보니 안쪽, 그러니까 아래쪽에서는 빗장을 질러 잠글 수 있게 되어 있다. 간신히 안도의 한숨을 쉰 찰스는 벽난로 가로 달려가 늑대와 곰 모피부터 챙겼다. 하나는 깔개로, 하나는 덮개로 쓸 수 있을 것이다. 부피도 무게도 만만찮은 그것을 먼저 문 아래로 떨어트리고, 약단지와 지난번 사용했던 붕대도 함께 챙겼다.
생각 같아선 에릭을 이 위로 데려오고 싶었지만, 벽난로를 함부로 사용해 연기라도 나면- 그리고 최악의 경우 지주가 그 사실을 알기라도 하는 날이면 모든 일이 끝장날 수도 있었다.
약단지를 품고, 붕대를 어깨에 걸고 내려온 찰스는, 위에서 가져온 부싯돌을 이용해 등불을 켜서 토굴 안의 갈고리에 걸어두었다. 늑대는 아직도 쓰러진 채였고, 그렇게 쓰러지며 벌어진 상처에서 또 피가 흐르고 있었다. 상처에 약을 바르면 늑대가 괴로워 할 것은 뻔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벌어진 상처를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약을 떠서 바르는 순간, 늑대가 깽 하고 비명을 질렀다.
"괜찮아요. 쉬- 약을 바르려는 것 뿐이니까."
손이 닿을 때마다 움찔거리긴 했지만, 늑대는 찰스가 약을 다 바를 때까지 몸부림 한 번 치는 일 없이 참을성 있게 견뎌냈다. 두툼한 회색 털가죽 위에 붕대를 감는 일은 실로 무리라는 것을 깨달은 찰스는 어느새 늑대가 눈을 감아버렸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놀라 외쳤다.
"에릭? 잠들면 안돼요, 에릭!"
소용없이 눈이 굳게 닫혔다. 잠들었다기보다는 의식을 잃은 것이리라. 한숨을 쉬며 늑대의 머리를 끌어안던 찰스는 위층이 희미하게나마 밝아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혹시 해가 뜬 것인가? 아니면 추격꾼의 등불인가? 긴장하며 급히 위쪽 바닥문을 닫고 내려와 에릭을 감싸안았을 때, 답이 주어졌다.
"에릭..."
늑대로 변할 때와 달리, 인간이 되는 과정은 평화로웠다. 거대한 늑대는 천천히 줄어들었다. 크기가 줄어들면서 골격이 재배치되었고, 근육이 그에 맞춰 늘어나고 줄어들었다. 털가죽은 피부 밑으로 숨어들었고, 회색의 늑대 피부는 곧 부드러운 살색으로 바뀌었다. 여기에는 어떤 고통도 부자연스러움도 없었고, 품 안의 짐승이 인간 남자가 되는 광경을 찰스는 거의 경이에 차서 바라보았다.
"에릭!"
인간의 모습이 되었지만 남자의 눈은 여전히 굳게 내리닫혀 있다. 초조해진 찰스는 남자의 벌거벗은 몸을 살폈다. 의외로 상처 자체는 지난번보다 얕았지만, 상처 자체의 수가 많은데도 출혈량이 많았던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그 때문에 에릭의 몸은 더 차갑게 식어 있었고, 이제는 덜덜 떨기 시작했다. 최대한 빨리 붕대를 사용해 상처를 모두 감싸고 난 다음, 늑대의 모피를 깔고 거기 에릭을 안아올렸다. 최대한 편안하게 누울 수 있도록 자세를 잡아준 다음 곰 모피를 덮는다. 그리고 그럼에도 떨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다, 찰스는 옷을 벗기 시작했다.
체온을 유지는 데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같은 인간의 체온을 이용하는 것이다. 에릭의 피로 범벅이 된 옷은 잘 펴서 모피 위에 더 덮어 주었고, 직후 바로 그 모피 밑으로 기어들어가 의식 없이 덜덜 떨고 있는 에릭의 몸을 끌어안았다. 차갑게 식은 팔다리의 상처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어떻게든 체온을 전하기 위해 주무르고 쓸어내려 주었다.
늑대 인간의 회복력은 아주 잘 알고 있다. 일단 고비만 넘기면 틀림없이 빠르게 회복될 것이다. 그러나 그 고비를 넘기기까지는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았다. 그는 딱 보이는 것만큼 단단한 몸을 하고 있었다. 차갑게 굳은 몸은 마른 근육으로 가득차 있었고, 온 몸에는 자잘한 흉터가 많았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런 흉터를 온 몸에 새긴 채 의식을 잃은 남자는 미묘하게 여려 보였다. 눈을 뜨고 있으면 그렇게 강인해 보이는 사람이었는데.
찰스는 램프를 끄고, 애써 잠들기 위해 눈을 감았다. 눈을 뜨면 차갑던 에릭의 몸이 따뜻하게 녹아 있기를 빌면서, 그가 계속 숨을 쉬고 있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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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은 눈을 떴다. 온 몸이 욱신거렸지만 기묘하게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이 전신을 휘감고 있었다. 잠시동안 멍하니 그 느낌을 만끽하다 천천히 초점이 맞으면서 의식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얼굴에 닿은 공기는 꽤 차가웠는데 두텁고 부드러운 털가죽 담요 안에 들어있는 몸은 정말 따뜻했고, 에릭은 잠시 후에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품 안에 온전히 들어와 있는 사람 때문이었던 것이다. 팔을 에릭의 허리에 두른 채 품 속에서 잠든 남자의 몸이, 바로 그 부드러운 온기의 근원이었다.
두어번 눈을 깜박거리고서야 상황을 깨달을 수 있었다. 당황한 에릭의 시선이 푹 잠들어 있는 찰스의 얼굴에 머물렀다. 이런 무방비한 얼굴을 본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맨 처음 어리둥절한 얼굴로 에릭의 집에 들어와 잠들었을 때, 그리고 바로 어제 새벽에 봤던 얼굴이다. 그를 만날 때마다 언제나 그랬듯 차갑게 밀어내고 냉정하게 대한 게 고작인데 이 따뜻한 남자는 마치 강아지처럼 에릭에게 따라붙어온다. 처음으로 그의 말을 온전히 믿어주고 받아들여준 사람이었다.
마음 속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하고 올라왔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걸 깨달은 남자는 이럴 때 늘 그랬듯 또 이를 악물었다. 누군가에게 신뢰받고 기댈 수 있다는 것, 대체 얼마만에 느껴본 것이었던가.
늘 혼자였다. 어머니를 잃은 후, 이 끔찍한 저주에 빠진 후 단 한 번도 누군가를 믿어본 적이 없었는데, 용병 시절 거친 나날을 보내면서 함께 다녔던 '전우'라 할 법한 놈들에게도 기대 본 적이 없었는데, 그래서 다시는 살아 있는 인간 누구에게서도 그런 것은 얻을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만난지 단 며칠 만에 이 이상한 남자는 그 모든 확신을 다 부숴 버렸다. 강하지도 않고 민첩하지도 않고, 단숨에 죽여 없앨 수 있을 것 같은 이런 나약한 인간이.
그날, 이 남자가 처음 괴물을 만난 날 새벽,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그 푸르디 푸른 눈동자를 봤을 때, 도저히 손을 들어올려 그 얼굴을 만져보지 않을 수 없었다. 구한 것이 맞는지, 정말로 이 곳까지 무사히 도망쳐 와서 옆에 누워 있는 게 맞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자기의 환상일 뿐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날 아침 꾸었던 악몽의 희미한 그림자와 맞물려 눈앞의 남자는 더욱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를 잃을까봐 겁이 났던 것이다. 다시는 눈앞에서 그렇게 누군가를 잃고 싶지는 않았다. 그게 누구건.
찰스의 몸이 닿아 있는 모든 곳이 견디기 어려울 만큼 따뜻했다. 아직도 덜 나은 상처들 때문에 몸이 욱신거릴 테지만 그런 감각조차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찰스의 몸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잠에서 깰 것을 알면서도 다시 손을 들어 만져보지 않을 수 없었다. 살며시 닫힌 얇은 눈꺼풀을, 부드러운 뺨을, 붉은 입술을. 그리고 찰스의 눈꺼풀이 깨어나기 직전에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보았으면서도, 그 모든 것이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에릭은 도저히 키스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붉은 입술에, 생생히 살아있는 붉은 입술에.
찰스는 잠이 번쩍 깼다. 사실 반쯤은 이미 잠에서 깨어 있었고, 찬 공기에 노출된 얼굴에 까슬하지만 따뜻한 에릭의 손이 닿아왔을 때까지만 해도 그냥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천천히 눈을 떴을 때, 에릭은 찰스의 입술에 입술을 맞대고 있었다. 대체 이게 꿈인가 현실인가 싶어 눈을 두어번 깜박였지만 분명 꿈도 환상도 아니었다. 놀라움에 벌어진 이 사이로 혀가 들어왔고, 에릭은 혀와 혀를 섞으며 더없이 부드럽게 키스했다. 놀란 찰스는 팔을 들어올리려 했지만 에릭이 한쪽 손을 찰스의 뺨에서 내려 어깨를 짚는 바람에 주춤 하고 말았다.
"에릭?"
그제서야 깨달았다. 입술을 뗀 에릭의 눈에는 물자국이 있었다. 평상시 냉정하게 사물을 바라보던 청회색 눈에는 맑은 물이 가득 고였다. 방금 키스를 한 것 치고는 너무나 태연하고 덤덤한 얼굴이었지만 입매는 미처 감정의 흔적을 숨기지 못하고 긴장한 채였고, 의외로 속눈썹이 긴 눈이 자제할 수 없이 떨고 있다. 그가 느끼는 감정과 생각이 찰스의 마음 속에 흘러들어왔고, 그 감정을 공유해 버린 찰스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왜 울지?"
에릭이 물었다. 찰스는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내가 우는게 아닙니다. 이건...이건 당신이..."
에릭은 다시 한번 찰스의 입술에 키스했고, 찰스는 전혀 막지 않았다. 아니, 아예 막을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아마도 만나던 순간부터 분명 그에게 어느정도 매료되어 있었다. 이런 관계가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지만, 어쩌면 무뚝뚝하게 자신을 노려보던 그 맑은 청회색 눈동자를 접한 순간부터 끌렸던 건지도 모른다. 그의 키스를 순순히 받아들이며 눈을 감으려던 찰스는 다시 한번 그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치고는 그럴 향해 애써 웃어 보였다. 아까의 키스를 받아들였는데도 그는 거부당할까봐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 19세기, 독일 배경입니다.
- 슈바르츠발트 가의 한 마을. 소설화 중입니다.
- 그래도 1화 때보다는 시간이 거의 안 걸렸네요. 갈수록 호흡이 소설화 되어가서 편하긴 한데, 강행군이긴 하네요 OTL
- 빨리 하지 않으면 마감을 놓칠까봐 겁나 죽겠습니다.
- 그래도 엔딩까지 플롯은 드디어 다 짰어요. 아마도 1화 정도만큼의 분량을 더 쓰면 될 듯 합니다.
- 고로 기존 화들 소설화는 2월 초까진 반드시 끝내야겠네요.
에릭은 한동안 말없이 찰스를 바라보았다. 찰스의 뇌리에는 지금 에릭이 품고 있는 생각이 거의 말소리처럼 명확하게 들려 왔다. '대체 이 멍청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그는 속으로만 슬쩍 웃었고, 인내심을 갖고 설명을 시작했다.
"당신이 본 그런 괴물에 대한 책이 있어요. 보여드리고 싶지만 지금은 여관에 있네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것을 '늑대인간'이라고 부르죠. 그리스 어로는 라이칸스로프라고 하고요."
"나는...나는 괴물이라는 소리밖에 안 했는데?"
창백해진 에릭의 얼굴을 보며 찰스는 최대한 차분하게 얘기했다.
"당신이 너무 강렬하게 떠올리는 바람에 저도 그 괴물을 봤죠. 흰 털에 녹색 눈, 맞죠?"
에릭은 큰 혼란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찰스가 능력에 대해 얘기해 주었다고는 해도 아마 이 정도로 생생하게 자신이 '본'것을 묘사할 수 있다는 것은 몰랐을 것이다. 그가 이 '능력'에 대해 나쁘지 않게 받아들이길 바라며, 찰스는 설명을 계속 했다.
"늑대 인간은 일반적인 총알로는 쓰러트릴 수 없어요."
"그렇지. 놈은 무적이야." 에릭의 말에, 찰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놈에게도 약점은 있어요."
에릭은 마치 홀린 것 같은 표정으로 찰스를 바라보았다. 사실 그럴 만도 할 것이다. 이제껏 찰스가 에릭에게 보여준 모습이라고 해 봐야 당황한 상태로 도움을 요청하거나 놀라거나 곤란해 하는 것이 전부였는데, 지금의 찰스는 자기 영역으로 들어온 전문가의 모습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맑은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넘쳤고 시선 또한 당당하게 빛나고 있었다. 물론 거기에는 단순히 자신의 지식을 피로하기 때문만이 아닌, 이 퉁명하고 거친 남자가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게 된 이 상황 탓도 있었지만 어쨌건 찰스는 얘기를 계속했다.
"은 탄환이 약점입니다. 은 무기도 좋아요. 혹은 축성받은 탄환이나 금속 무기도 은 만큼은 아니지만 효과를 발휘합니다. 제일 좋은 것은 교회의 종이나 십자가, 특히 은십자가를 녹여서 만든 탄알이라고 하더군요."
비록 전설이었지만 각나라 각지의 수많은 전설들이 공통으로 지적하고 있다면 거기엔 분명히 어떤 '사실'의 뒷받침이 있게 마련이다. 모든 전설의 늑대 인간들은 모두 은을 두려워했다.
찰스의 눈동자는 빛났지만, 그 말을 들은 에릭의 표정은 어둡기만 했다. 혹시라도 믿음을 주지 못했나 싶어 잠시 그의 마음을 살펴보았지만 그건 아니었다. 오히려 에릭은 이제 찰스를 어느정도 신뢰하기까지 했지만 그와 별개로 그의 기분은 급속도로 더 어두워져 가고 있었고, 그 이유는 짙은 안개처럼 에릭의 마음 속 깊은 곳에 감추어져 보이지 않았다. 말하자면, 밝히고 싶지 않은 것이리라.
"에릭?"
이름을 불린 에릭이 흠칫 몸을 굳힌다. 무언가 완전히 다른 생각에 빠져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그리고 무언가를 새로이 깨닫기라도 한 것처럼 기묘한 시선을 찰스에게 보낸다. 마치 홀린듯한 그 눈동자 속에서 새로운 감성이 떠올랐고, 찰스는 이 남자의 감정 변화를 도무지 따라잡을 수 없어 가볍게 머리를 흔들어야 했다. 에릭은 늘 그랬다. 무심에서 적의로, 적의에서 비무장으로, 의혹에서 신뢰로, 이제는 거기서 두려움으로 변해가는 그의 감정은 꼭 검은 숲에 몰아치는 눈폭풍마냥 거칠고 예측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째서 '두려움'인 것일까? 왜? 의문의 답을 알아낼 새도 없이 에릭이 입을 열었다.
"곧 밤이 돼."
거의 속삭임 같은 말이었지만 제대로 들어낸 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이 보름이죠."
"아니야. 오늘 밤부터 시작될 거야."
"...예?"
에릭은 번개처럼 몸을 일으켜 총을 걸어둔 곳 앞으로 걸어갔다. 잠시 뒤지더니 낡은 권총 한 자루를 가져온다.
"이걸 가져가. 별로 효과는 없겠지만 불꽃과 소리에는 놀랄 거야."
"...에릭?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어리둥절해 하는 찰스의 양 어깨를 단단히 붙들고 얼굴을 바짝 들이댄다. 그 엷은 푸른 눈에는 뭔가가 이글거리고 있었지만 무엇 때문인지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었다. 분노 같기도 하고 두려움 같기도 했지만 둘 중 어느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내 말 잘 들어. 절대 뒤돌아 보지 말고 마을로 뛰어가. 어디건 가서 문을 걸고 있거든 걸쇠를 권총으로 쏴 버려. 알겠어? 창문을 깨도 좋아. 어쨌건 어느 집이건 들어가서 절대 나오지 마."
"하지만...하지만 여기 있으면 되잖아요?"
그 순간 에릭은 실로 불가해한 표정을 지었는데, 모든 감정이 뒤죽박죽 섞인 그 얼굴은 도저히 뭐라 한 마디로 규정할 수가 없었다.
"안 돼. 여기도 위험해. 아니, 어쩌면 제일 위험한 곳이야."
어깨를 붙든 에릭의 손가락이 거의 파고들 듯 했다. 뿌리치지도 못하고, 찰스는 그대로 남자에게 밀려 현관으로 나오게 되었다.
"지금이라면 늦지 않았어. 빨리 돌아가!"
"이봐요, 잠깐. 잠깐 내 말 좀"
문이 닫혔다. 안에서 빗장을 지르는 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찰스는 이를 악물고 분에 못 이겨 힘껏 외쳤지만 아무 소용 없었다. 간신히, 간신히 서로 마음을 열고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는데 대체 이게 무슨 꼴이냔 말이다! 손에는 권총이 한 자루 들려 있을 뿐, 그대로 살을 에는 찬 바람 속에 내쫓겨 버리고 만 것이다. 한동안 원망스러운 시선으로 오두막 문을 바라보던 찰스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마을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도무지 이 사태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체 뭐가 문제였을까? 그는 에릭과 대화를 했고, 그의 말을 있는 그대로 믿어 주었다. 그리고 에릭도 분명히 그 사실을 납득했다. 잠깐이나마 둘은 거의 동료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갑자기 그 빌어먹을 마음의 벽이 다시 등장한 것이다. 갑작스레 더 확고한 형태로 말이다.
대체 왜 그랬을까? 의문이 떠나지 않았다. 대체 무엇 때문에? 이미 멀어진 에릭의 오두막을 노려보던 찰스는 그를 밖으로 내몰던 에릭의 눈빛이 차갑거나 공격적이었다기보다는 오히려 절박해 보였다는 것을 기억해 나고는 다시 한숨을 내쉬며 발걸음을 옮겼다.
"멋지구만."
상황은 최악이었다. 시간은 이미 늦어 마을에 닿기도 전에 해가 질 모양이었고 그는 아무도 곁에 없는 상황에서 권총 한 자루를 지니고 숲길을 가고 있었던 것이다. 과연 이 권총이 쓸모는 있을지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에릭 말마따나 위험한 들짐승이라도 나타난다면 총소리와 불꽃으로 놀래킬 수는 있을 성 싶었다. 사실 사냥 경험이 없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래, 좋아. 말이랑 그레이하운드 서른 마리면 있으면 완벽하겠어!"
들어주는 이도 없는 농담이나 툴툴대며 마을 쪽으로 걸어간 지도 한참이 되어, 어느새 해가 지기 시작했다. 어둑해지는 하늘을 불안한 눈초리로 바라본 찰스는 좀더 발걸음을 빨리 했다. 에릭 말마따나 정 안되면 문을 깨고서라도 어딘가 들어갈 작정이었지만, 되도록 그러기 전에 마을에 닿고 싶었던 것이다. 좀더 빨리, 저 해그림자가 사라지기 전에 마을 울짱이 보이도록. 하지만 그러기 전에, 무언가가 찰스의 발을 붙들었다.
기묘한 감각이었다. 아니, 감각이라기엔 훨씬 미묘했고, 정 이야기한다면 아마도 '시선'이 가장 가까운 말일 것이다. 무언가가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것 같은 느낌이 엄습해 와, 찰스는 그 자리에 잠시 멈춰섰다. 알 수 있었다. 지금 주위를 둘러봐 봤자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 무언가 있다.
조용히 호흡을 가다듬으며, 그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했다. 이 정도 거리에서 시도해 본 적은 없었지만, 그래도 최대한 감각을 뻗쳐 주위에 누군가가 있는지 탐지하기 시작했다.
사실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아무도 없고, 방금의 감각은 그저 자신의 착각이라고 확신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현상은 그의 예상을 빗겨나갔다. 뒤쪽, 수풀 속에 무언가 거대한 것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에릭의 경고가 맞았다. 그것은 일반 들짐승과 달리 강렬한 악의를 품고 있었고, 오직 찰스를 향한 살의를 지닌채 가만히 숨어 있었다. 저것이 아마도 그 '괴물'이리라. 두려움으로 심장이 터질 듯 했지만 최대한 침착하기 위해 호흡을 가다듬으며, 찰스는 에릭이 건네주었던 권총을 다잡고는 마을을 향해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저것에게 틈을 주어선 안된다. 어차피 모습을 제대로 보지도 못한 지금 권총을 들고 설친다 해서 이길 수 있을 리 만무하고, 성급하게 도망치는 모습을 보였다가는 오히려 흥분해서 이 쪽으로 향해 달려들지도 모르는 것이다. 차라리 알아채지 못한 척 하고 조금이라도 마을에 가까이 가는 편이 생존에 유리할 듯 싶었다. 적어도 자신의 힘 덕에 놈이 이 쪽으로 덤비는 타이밍만은 정확히 알 수 있지 않은가. 잘만 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찰스는 속으로 기도문을 외면서 절박한 심정으로 발을 옮겼다. 놈이 천천히 그를 따라오는 것을 느끼며, 아뜩한 기분에 마른침을 삼키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이럴 때 마찬가지로 늦게 들어가는 마을 사람이라도 하나 눈에 띄면 안심이 되련만, 점점 어두워져 가는 사방 어디에도 사람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새삼 에릭이 원망스러워졌다. 그는 어째서 자신을 밖으로 내쫓아 버렸을까. 이럴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 왜 내몰아 버렸을까. 분명 그에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테고 그런 의미에서 사실 원망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이성과 감정은 다르게 움직이는 법이다. 지금의 찰스는 아까 따뜻한 모닥불이 타오르던 에릭의 집 안으로 다시 들어갈 수만 있다면 정말로 뭐든지 할 수 있을듯한 심정이 되어 있었다.
마을에 다가서면서 '그것'은 점점 더 찰스에게 다가왔다. 서서히 거리가 좁혀지면서 '그것'의 마음이 좀더 생생히 읽혔다. 놈은 찰스가 마을에 들어가기 전 끝장낼 심산이었고, 덤벼들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바로 그 때 찰스는 결심했다. 이렇게 무방비하게 등을 보이다가 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에릭의 말대로 권총을 쏘아가며 저항해 보는 것이 나을 듯 싶었던 것이다. 그렇다. 속으로 셋을 센 다음 돌아서서 '그것'쪽으로 권총을 향하고, 움직이는 것이 있다면 그게 뭐든지 그냥 쏴 버리면 될 것이다. 호흡을 가다듬은 그는 아까의 작정대로 수를 세었다. 하나, 둘, 셋.
돌아선 눈 앞에 거대한 이빨이 빛나고 있었다. 다가온다고는 생각했지만 '그것'의 속도가 실로 상상을 초월했던 것이다. 달빛 아래 빛나는 이빨, 악의에 넘치는 눈, 그 광경을 본 찰스는 권총을 들어올리는 것조차 잊고 숨을 멈췄다. 그것은, 바로 에릭의 상상 속에서 보았던 바로 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온 몸에 흰 털을 두른 거대한 늑대인간.
찰스는 떨리는 손으로 권총을 들어올렸다. 사실은 지금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거의 의식하지도 못한 채였지만, 적어도 그의 마음 속 어딘가 자리잡고 있던 생존 본능이 절대적 공포 앞에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이성을 그러모아 그 동작을 가능하게 했다. 총구가 올라오는 순간 괴물이 팔을 휘둘렀고, 거의 반사적으로 지나치게 놀라버린 찰스는 그대로 발을 헛디뎌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오히려 행운이라 부를만한 일이었다. 아니었다면 그 기다란 손톱에 팔이나 다리 둘 중 하나는 잘라져 버렸을 것이므로.
주저앉은 찰스는 허둥거리며 어떻게든 뒤로 도망치려 애썼다. 권총은 이미 눈 속으로 떨어져 버렸지만 거기 손을 뻗을 여유 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허우적대는 찰스를 향해 괴물은 아주 천천히 다가왔다. 돌아본 곳에서 찰스를 내려다보는 그 얼굴은 늑대와 비슷한, 하지만 훨씬 흉폭해 보이는 생김새였고 근육으로 터져나갈 것 같은 온 몸에는 흰 털이 돋아 있었다. 보통의 늑대는 네 발로 뛰어다니지만, 이 괴물은 사람을 닮은 상반신에 기형적으로 긴 다리를 갖고 있었다. 마치 늑대의 그것과도 같이 역으로 꺾인 다리를. 그리고 두 발로 선 괴물의 앞발 - 혹은 손에는 기다란 발톱이 나 있었다.
절망이 찰스의 뇌리에 엄습해 왔다. 권총이 문제가 아니었다. 이러한 것을 상대로 대체 그 누가 도망칠 수 있단 말인가? 괴물도 그 상황을 이미 충분히 알고 있는 듯 했다. 찬찬히 이 쪽을 바라보는 놈의 눈에는 잔인한 악의와 조롱이 넘친다. 일부러 드러낸 듯한 흉물스런 이빨 사이에서는 침이 흘러내렸고, 마침내 찰스에게 일격을 가할 작정인지 말이 위로 올라갔다.
찰스는 괴물의 손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공격의 순간은 그의 '힘'을 통해 알 수 있다. 집중한다면 한 번, 적어도 한 번 정도는 저 치명적인 공격을 피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을 쪽으로 조금이라도 뛰어갈 수만 있다면 좋을 것이다.
팔은 상상을 초월한 빠르기로 내리찍혔고, 찰스는 혼신의 힘을 다해 몸을 움츠리며 옆으로 굴렀다. 엎드리는 자세를 취한 순간에야 자신이 그 일격을 피해냈음을 깨달았고, 곧장 일어서 달리기 위해 팔에 힘을 주었다. 간발의 차로 다음 공격이 왔고, 괴물의 손톱은 아슬아슬하게 찰스의 등을 비껴 갔다. 두터운 모직 코트가 단숨에 찢기고 등에 끔찍한 통증이 달렸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일어서는데 성공한 찰스는 그 쪽이 과연 마을 쪽인지 생각할 여력도 없이 비명을 지르며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괴물의 속도가 훨씬 빨랐고, 어느새 눈앞을 가로막은 괴물을 본 찰스는 절망감에 눈을 감아 버렸다. 다음 일격은 도저히 피할 수 없을 거라는 확신과도 같은 예감에, 그는 이를 악물고 자신의 최후를 기다렸다.
"...!"
갑자기 굉음이 났다. 처음 그렇게 느껴졌지만 곧 그 뒤에 새로운 인식이 자리잡았다. 비명 소리, 짐승의 비명 소리가 났다. 찰스는 꽉 감고 있던 눈을 가늘게 떴고, 곧 경악 때문에 눈을 한껏 크게 열었다. 눈앞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흰 색 괴물은 여전했다. 하지만 그보다는 좀 작지만 보통의 늑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거대한 회색 늑대가 찰스와 괴물 사이에 서 있었다. 놀라서 주저앉은 순간, 흰 눈 위의 핏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늑대가 몸 방향을 돌리는 순간 그 피가 어디서 흘렀는지 알 수 있었다. 회색 털가죽에 길다란 상처가 네 개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깊은 상처에서 다시금 피가 후두둑 떨어졌고, 으르렁거리던 늑대는 이를 드러낸 채 괴물을 향해 달려들었다. 찰스는 경악한 채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두 짐승, 혹은 괴물이 엉겨붙어 싸우기 시작한 다음에야 정신을 차리고는 눈 속에 떨어져 있는 권총을 향해 달려갔다.
눈에 묻혀 있던 까닭에 얼음처럼 차가워진 총을 쥐고 둘이 뭉쳐 있는 쪽으로 총구를 향했다. 정신없이 얽혀 싸우는 통에 누굴 맞추게 될지 몰라 한동안 숨을 몰아쉬며 겨누고 있을 수밖에 없었지만, 결국 둘은 간격을 두고 떨어져 나갔다. 그 순간 총성이 울렸고, 짧은 비명 소리가 대기를 갈랐다. 괴물은 급히 얼굴을 돌렸다가 찰스 쪽을 노려보았는데, 놀랍게도 그 눈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회색 늑대가 달려들었고, 늑대를 간신히 뿌리친 괴물은 눈에서 피를 흘리며 어디론가 달려가 버렸다. 늑대 또한 괴물 뒤를 쫓아갔고, 찰스는 어둠 속에 홀로 남겨졌다.
한동안 멍한 눈으로 두 괴물이 달려간 쪽으로 바라보던 찰스는 후들거리는 무릎으로 넘어지지 않기 위해 애쓰며 어둠 속을 달리기 시작했다. 마을과는 반대 방향이었다. 어차피 완전히 어두워진 이상 마을 사람들은 절대 자신을 맞아주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혹시라도 저 '괴물'이 늑대를 처치한다면, 분명 찰스를 찾아 마을 쪽으로 달려가리라. 그렇다면 오히려 역으로 행동하는 편이 안전할 것이다. 발자국은 지금 내리는 이 눈이 감춰 주리라.
달리는 그의 머리에 떠오른 도피처는 단 한 곳 뿐이었다. 에릭의 오두막, 혹은 그 옆의 창고. 혹여라도 에릭이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면 아까 그가 한 말마따나 창고 자물쇠 정도는 부수고 들어갈 수 있을 테니까.
간신히 도착한 에릭의 오두막에 인기척은 없었다. 불은 꺼져 있었고, 문을 두드려 보았지만 아무 대답도 없었다. 찰스는 덜덜 떨며 창고 쪽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문을 당겨보니 놀랍게도 힘없이 열렸다. 모르는 사람을 안에 두고 외출을 할 정도니 어쩌면 늘 이랬던 건지도 모른다. 안에서 피비린내가 훅 끼쳐 왔지만, 망설임 없이 비틀거리며 창고 안에 들어간 찰스는 두려움과 추위에 떨며 바닥의 짚새 사이로 기어들어갔다. 가죽을 벗긴 동물 시체가 매달려 있었지만 아무 상관 없었다. 아마도 들짐승이 기어들어온다면 찰스보다는 저 먹음직한 시체들을 택하리라. 짚새 안에서 덜덜 떨던 그에게 놀랍게도 잠이 몰려왔다. 아마도 생각보다 훨씬 지쳐 있었던 모양이다. 찰스는 그대로 곯아떨어져 버렸다.
피와 지푸라기와 곰팡이, 그리고 숙성되는 짐승 고기의 냄새. 사실 창고는 악취가 지독한 곳이었을 테지만 간신히 눈을 뜬 찰스의 코는 아무 냄새도 느끼지 못했다. 잠시 눈을 가늘게 뜨고 낯선 창고의 천장을 바라보며 대체 자신이 왜 여기 있는지 생각하던 찰스는 곧 어제의 일을 생각해 냈다. 괴물, 그리고 늑대. 깜짝 놀라 몸을 일으키려다 그만 날카롭게 비명을 질렀다. 다친 등이 끔찍하게 아팠던 것이다. 다시 쓰러져 통증을 가라앉히려 애쓰며 그는 어제의 일을 하나 하나 생각해 냈다. 괴물, 거대한 회색 늑대, 그리고 피. 밤새 추운 공기에 노출되었던 얼굴이 얼얼하게 아려 왔고, 그제서야 이 곳 창고로 기어들어 왔던 것이 기억났다. 얼어죽지 않은 것은 아마도 창고 벽과 그 안의 짚새 덕이리라. 맨바닥에서 잔 몸 곳곳이 뻐근했고 등의 상처는 조금 움직이기만 해도 악 소리 나게 아팠지만 입가로 웃음이 비어져 나오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결국 어떻게든 위기는 지나간 것이다.
이를 악물고 통증을 견뎌내며 몸을 일으켰다. 추위에도 참고 코트와 조끼, 셔츠를 벗어 보니 다행히 두터운 모직 코트 덕에 셔츠는 크게 찢기지 않은 상태였고, 핏자국도 얼마 없었다. 꽤 아프긴 해도 결국 살짝 긁힌 상처라는 뜻이다. 이 정도면 상처를 잘 씻어내고 의사에게 보이면 며칠 안에 금방 낫겠다 싶어, 찰스는 안심하며 옷을 걸쳐 입고는 창고 밖으로 나갔다.
아침 공기는 차갑지만 신선했고 새로운 눈에 덮인 숲 풍경은 적어도 어제보다는 훨씬 괜찮아 보였다. 그러나 곧 찰스의 눈에 이상한 것이 띄었다. 흰 눈 위의 얼룩. 간밤에 눈이 내렸는데도 아마 그친 뒤에 들어왔는지 지나간 자국이 생생했고, 거기 붉은 핏자국이 나 있었다.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
"에릭?"
찰스는 깜짝 놀라서 에릭의 집 문 앞으로 다가갔다. 어젯밤 인기척이 없었다는 것을 기억해낸 찰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어쩌면 이 무뚝뚝하고 고지식한 사냥꾼은 어제 밤 '사냥'을 나갔던 건지도 모른다. 일반적인 총알은 아무 힘을 쓰지 못한다고 분명 얘기했건만, 그래도 총을 들고 나갔다가 큰 부상을 입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어제의 그 늑대인간과 거대한 늑대를 생각한 찰스는 문 쪽으로 달려가 소리지르며 할 수 있는 한 힘껏 문을 두드렸다.
"에릭! 어서 문 열어요!"
잠겨 있을 줄 알았던 문이 두드리자마자 그 반동으로 힘없이 열렸고, 안에서는 아무런 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에릭?"
찰스는 잠시 거기 서 있다가, 침을 한번 삼키고 문을 열고 안에 들어갔다.
오두막 안은 매우 어두웠고, 그래서 잠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안에 있는 사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집 안은 싸늘했다. 바라본 벽난로 안은 어두웠는데, 어제 불이 꺼진 후로 다시 켜지 않은 모양이었다. 입김이 나올 정도로 차가운 공기 속에 희미한 피냄새만 감돌고 있었다. 찰스는 다시 한번 그의 이름을 불렀다.
"에릭."
문득 무언가가 움직였다. 고개를 돌려보니 이전에 이 곳에 왔을 때 그가 덮고 잤던 모피 속에 누군가가 누워 있었다.
"에릭!"
반색을 하며 달려갔지만 남자의 상태는 그다지 좋지 못했다. 모피 위로 드러난 얼굴은 어둠 속에서도 느낄 수 있을만큼 창백했고, 거의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온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드러나 있는 목과 얼굴에는 식은땀이 나 있었고, 조심스레 손을 대 보니 불같이 뜨거웠다.
놀란 찰스는 벽난로 옆을 살피고는 허둥지둥 밖으로 달려나갔다. 그리고 기억하는대로 집 바로 밖에 쌓여 있던 장작 더미에서 눈에 젖지 않은 장작을 골라 한 아름을 안아들고 들어와 벽난로에 쌓아 놓고, 헛간으로 달려가 바닥에 깔려 있던 짚새를 가져왔다. 부싯돌을 찾아 불을 붙이고 매운 연기를 참아가며 불꽃을 후후 불었다. 마침내 불꽃이 피어나자 손부채로 바람을 넣어가며 불을 지켜보던 그는 에릭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에릭, 괜찮아요? 이제 상처를 봐야 해요."
아무 대답이 없었고, 찰스는 잠시 그런 에릭을 바라보다 모피 이불을 쥐고 천천히 들추었다. 그 순간 에릭이 고통에 겨운 신음 소리를 내뱉으며 몸을 틀었고, 그 바람에 그가 입은 상처가 온전히 눈에 들어왔다.
실내는 추웠는데도 에릭은 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 식은땀이 흐르는 몸은 의외로 희었고, 단단히 근육이 잡혀 있는 상체와 강건한 팔에 비해 허리는 놀랍도록 말라 있었지만, 찰스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에릭의 몸이 아니라 거기 나 있는 상처였다. 피범벅된 그의 옆구리에는 깊은 상처가 네 줄 나 있었고, 어깨와 드러나 있는 한쪽 허벅지에는 야수에게 물어뜯긴 듯한 자국이 보였다. 다행히도 살점이 떨어져 나가지는 않았지만 이빨 자국이 선명했던 것이다.
몸이 덜덜 떨려왔다. 한쪽 무릎을 꿇고 손을 뻗어 에릭의 상처를 조심스레 살폈고, 상처 부위에서 심하게 열이 나고 있다는 것을 알아내고는 나머지 한쪽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충격과 경악 너머로 의혹이 떠올랐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다. 아니, 이상한 상처다. 야수의 습격을 받은 이들은 보통 정면에서 공격을 당하거나, 십중팔구 뒤로 돌아 도망치다 부상을 입게 마련이다. 그러나 지금 이것들은 완전히 달랐다. 상처들은 옆구리와 어깨, 그리고 허벅지에 나 있었고, 그는 바로 이런 상처를 최근에 본 적이 있었다.
바로 어제, 괴물은 거대한 늑대를 공격했고, 미처 피하지 못한 늑대의 옆구리에는 깊은 상처가 새겨졌다. 한데 엉켜 싸우면서 분명 괴물은 그 날카로운 이빨을 늑대의 어깨에 박아 넣었고, 잠시 떨어졌던 둘은 다시 뭉쳐서 구르며 싸웠었다. 만일 그 와중에 허벅지를 다쳤다면?
찰스는 고개를 빠르게 저으며 그 생각들을 떨어버렸다. 지금 급한 건 그게 아니다. 생각을 멈추고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킨 다음, 그는 에릭의 몸을 모피로 잘 덮어주고 불가의 솥을 들고는 밖으로 달려나갔다.할 수 있는 한 깨끗한 눈을 모아 솥 안에 가득 넣고 다시 집으로 뛰어들어간다. 그 솥을 그대로 벽난로에 걸어 두고,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 그나마 깨끗해 보이는 식탁보를 발견하고는 속으로만 미안하다고 생각하며 가차없이 흰 천을 찢어 나갔다. 최대한 빨리 에릭의 상처를닦아내고 치료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자세한 생각은 나중에 하면 된다. 에릭이 그 늑대였던 아니건 적어도 그는 찰스를 걱정했고, 찰스를 구해 주었거나 혹은 구하고 싶어했다. 그리고 지금은 이렇게 깊은 부상을 입고 여기 쓰러져 있다. 그렇다면 주어진 선택은 단 하나, 그의 회복을 돕는 것이지 않겠는가.
벽난로의 불길 덕택에 방 안은 이제 아주 따뜻했다. 곧 물이 끓기 시작했고, 찰스는 길게 뜯어둔 식탁보 조각들을 솥에 집어넣어 충분히 소독한 후 꺼내서 잘 짜냈다. 그리고 물이 식기를 기다려 천 중 한 뭉치를 집어 더운 물에 적신 후 상처 부분을 닦아내기 시작했다. 에릭이 열에 들떠 뭔가 중얼거렸지만 잘 들리지 않았고, 찰스는 그가 깨어나는지 잘 살피며 주의깊게 부상을 살폈다.
그 순간, 갑자기 에릭이 눈을 번쩍 뜨더니 팔을 내밀어 찰스의 손목을 꽉 잡았다.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열에 들뜬 에릭의 눈은 제대로 초점이 맞지 않았다.
[...어머니?]
독일어를 들은 찰스는 곧 상황이 어떤지 판단하고는 분명히 잘 들리도록 영어로 찬찬히 말했다.
"아니에요, 나 찰스예요. 기억나요?"
[어머니, 놈이에요. 놈을 만났어요...]
찰스는 한숨을 푹 쉬었다. 피를 너무 많이 잃은데다 열까지 오르니 헛것을 본다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불안해 하는 에릭을 안정시켜 줄 만한 말을 곧 찾아냈다.
[일단 쉬어요. 자야 해요.]
에릭은 그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눈을 감았다. 찰스는 손에 들고 있던 식탁보를 다시 더운 물에 넣어 빨아내고 잘 짠 다음 나머지 땀과 피를 닦아냈다. 간신히 몸을 깨끗이 한 다음 남은 급조 붕대로 상처를 천천히 감았다. 아직 습기가 다 가시지 않은 붕대였지만 그래도 상처가 그냥 드러나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듯 싶었다. 드레싱을 마치고 보니 에릭은 어느새인가 식은땀을 흘리며 다시 푹 잠들어 버렸고, 찰스는 그제서야 허리를 펴고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릇들은 다 비어 있었고 제대로 요리할 수 있을 법한 재료들은 없었다. 부엌을 뒤져내 치즈와 빵과 양파를 찾아낸 게 고작이었다. 찰스는 입을 꾹 다물고 잠시 생각하다가 부엌에 있던 실팍한 식칼을 들고 창고 쪽으로 나섰다. 잠시의 악전고투 띁에 매달린 사슴 시체에서 고기를 좀 떼어 온 찰스는 솥에 새로운 눈을 채워넣고 물이 다 녹기를 기다려 양파, 소금과 함께 고기 또한 솥에 던져넣었다. 맛은 전혀 보장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지금의 에릭에게는 쉽게 삼킬 수 있는 식사가 꼭 필요했다.
시간이 흘러 다시 물이 끓었고, 수프라기보다는 고기국물에 가까운 것이 완정되었다. 그럭저럭 먹을만한지 한번 맛 본 찰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심스레 에릭을 안아들어 상처가 아프지 않도록 천천히 흔들며 깨웠다.
"에릭, 정신 들어요? 에릭!"
부르는 소리에 정신이 드는지 머리를 올리려던 에릭은 제대로 고개를 가누지 못하고 곧 늘어져 버렸다. 낙담한 찰스는 나무 스푼을 들고 에릭의 입을 벌린 다음 국물을 살짝 흘려넣어 보았지만, 곧 입가로 흘러나와 버릴 뿐 좀처럼 잘 넘어가질 않았다. '이걸 어쩐다?' 잠시 고민하던 찰스는 질끈 눈을 감고 숨을 들이켰다. 그렇다. 여기 쓰러져 있는 이 상처투성이 남자는, 어쩌면 찰스 때문에 목숨을 걸다 이리 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지금 이 고기 국물을 먹이기 위해 뭘 못하겠는가? 눈을 뜬 그는 고기 국물을 입에 머금은 다음, 의식을 잃은 에릭의 입을 벌리고 얇고 뜨거운 입술에 입을 대고 국물을 흘려넣어 주었다.
한 번, 그리고 다시 한 번. 찰스는 열 때문에 뜨겁고 까슬한 에릭의 갈라진 입술에 몇 번이고 스프를 흘려넣어 줬고, 그 때마다 에릭의 목울대는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한참을 먹인 후 이제 됐다 싶었던 찰스는 한숨을 푹 쉬며 물러나다가, 무언가가 그의 팔을 붙들고 있음을 알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대체 어느새 정신을 찾았던 걸까. 마지막으로 먹일 때만 해도 분명 눈을 감고 있었는데, 가늘게 뜬 엷은 푸른빛 눈이 이 쪽을 응시하고 있다. 아까보다는 좀더 가라앉은 시선을 본 찰스는 남자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에릭?"
남자는 찰스를 말없이 바라보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가지 마."
영어였다. 제대로 의식을 찾은 것이다. 찰스는 입술이 직접 닿은 모습을 들켰을지도 모른다는 민망함보다도 그가 의식을 찾은 데 대한 반가움이 앞서 다시 한 번 그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에릭, 당신 아주 크게 다쳤었어요. 기억해요? 이제 좀 괜찮아요? 날 알아보겠어요?"
에릭은 거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인 다음 다시 깊은 잠에 빠졌다. 호흡은 안정되어 있었고 열도 약간은 가라앉은 듯 싶었다. 오두막의 공기는 이제 훈훈했고 찰스의 입가로는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는 이제 안전하다. 상처 때문에 패혈증에만 걸리지 않는다면 곧 나을 것이다.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에릭이 잠든 후, 피가 흐릿하니 번져 나온 붕대를 바라보던 찰스는 고민하다 이를 악물고 조끼를 벗었다. 등의 통증 때문에 비명을 지르지 않으려 애쓰면서 셔츠까지 벗어냈다. 잠시 깨끗한 면 셔츠를 만져보던 한숨을 푹 쉬고는 아까 식탁보를 다룰 때와 똑같은 방식으로 찢어내기 시작했다.
에릭의 상처에 저 붕대만으로 버틸 수는 없었다. 분명 좀더 시간이 흐르고 나면 새 붕대를 써야만 하는데, 에릭의 오두막에는 그럴 수 있을만한 깔끔한 천이 더이상 눈에 띄지 않았다. 어차피 핏자국이 살짝 배었을 뿐 그럭저럭 깨끗한 찰스의 셔츠는 괴물의 발톱 덕에 너덜너덜한 상태였으니 잘 찢어내서 끓이기만 하면 좋은 붕대가 되어줄 터였다.
모닥불이 있다고는 해도 실내 공기가 약간은 선뜻해, 찰스는 다시 조끼와 코트를 걸쳤다. 그리고 이번에는 부엌 구석에서 주전자를 찾아내 - 솥은 스프가 담겨 있어 쓸 수 없었다 - 물을 끓여 붕대를 담가 소독했다. 그리고 깨끗하게 삶아낸 붕대는 꽉 짜서 잘 널어두었다.
사실 고약이나 가루약 같은 것이 있다면 더 좋았겠지만, 그사이 시간이 많이 흘러 마을까지 다녀오기엔 좀 빠듯할 듯 싶었다. 찰스는 대신 바깥에 나가 장작을 더 가져오고 그 김에 사슴고기도 더 잘라 왔다. 그렇게 저녁까지 준비해 두고 나니 그제서야 피로가 파도처럼 몰려왔다. 밤 내내 달리고 뛰다 불편한 창고 바닥에서 잠들었던 몸은 곳곳이 욱신댔고, 무엇보다도 등의 상처는 조금만 잘못 움직여도 지독하게 쓰라렸다. 잠시 망설이던 찰스는 조금이라도 눈을 붙여두는게 좋을 거라는 판단을 내리고는 에릭에게 잘 덮어준 커다란 모피 속으로 파고들었다.
어쩌면 인간이 아닐지도 모르는 사내 옆에서 이렇게 무방비하게 잠드는 것이 괜찮을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가 자신을 해치려 한 적이 없다는 확신이 찰스를 좀더 안심시켜 주었다. 만의 하나 해치려 한대도, 지금 입은 부상 때문에 그럴 수도 없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옆에 자리잡은 주제에, 잠든 남자가 깊고 고른 숨소리를 내고 있다는 대 안심하며 찰스는 눈을 감았다.
찰스는 눈 덮인 산 속에 서 있었다. 공기는 얼음처럼 차가웠고 바람은 칼날처럼 예리했지만, 이상하게 별로 춥지는 않았다. 분명 밤이건만 사방이 무서울만큼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하늘을 올려다 보니 태양 같은 것이 떠 있었는데, 그는 잠시 후에여 그것이 보름달이라는 걸 깨달았다. 분명 태양처럼 밝았지만 그 빛은 태양 특유의 황금빛도 아니었고 눈을 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푸르스름하고 상대적으로 부드러웠다. 거대한 달 주위엔 이제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불꽃같은 별들이 온 하늘에서 이글거리며 타오르고 있었다. 그 압도적인 광경에서 눈을 떼고 숨을 훅 내쉬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입김이 하얗게 얼어붙어 어둠 속으로 번져 갔다.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분노와 증오에 차서, 무엇보다도 두려움에 가득 차 눈 덮인 숲을 뒤지고 있었다. 발바닥에 차가운 눈이 느껴졌지만 차갑다기보단 오히려 서늘했고, 맨발 치고는 정말 이상하리만치 둔한 감각이었다. 찰스는 자기 몸을 내려다보고 싶었지만 뜻대로 움직일 수가 없다는 사실만을 깨달았을 뿐이었다. 꿈, 그렇다. 이것은 꿈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어쨌건 찰스는 걷고 또 걸었다. 가끔 뭔가를 확인하듯 고개를 숙이고 눈 위의 냄새를 맡았다. 거기서는 놀랍게도 상상도 못한 온갖 냄새가 다 났다. 어쩐지 이 꿈 속의 자신이 사람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지만 꿈 속이라 그런지 제대로 확인할 수는 없었다. 그저 가고 또 가야 한다는 생각이 났을 뿐.
그렇게 한동안 걷는데, 갑자기 그의 귀에 갑자기 소리가 들려 왔다. 희미한 비명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지만, 그건 비명을 지른 이가 그에게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였다. 다급한 마음이 되어 달리고 또 달렸다. 대체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찰스는, 아니, 이 꿈의 주인공은 그 비명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필사적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뻗어나오는 다리를 보고서야 찰스는 그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잿빛 털에 덮인 긴 다리는 개, 혹은 늑대의 앞발처럼 보였다. 그것은 나무 등걸을 뛰어넘고 수풀을 가르며 그만이 아는 길을 달려나갔다. 바람이 방향이 바뀌자 피냄새가 훅 끼쳐 왔고, 드디어 '그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달빛을 받은 '그것'은 바로 찰스를 습격했던 괴물이었다. 뒷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그리고 어째서인가 찰스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 크기가 좀 작아 보였지만, 그 압도적인 흉포함과 기세등등한 살기는 그대로였다. 놈은 한쪽 팔을 천천히 들어올리고는, 허둥지둥 도망가는 누군가의 등을 찍으려는 것 같았다. '맙소사, 안돼!' 꿈의 주인공, 아마도 늑대는 속도를 더 높였고 그래서 간신히 둘 사이에 끼어들 수 있었다. 원래는 단숨에 놈의 목줄기를 찢어놓고 싶었지만 도저히 그럴 틈이 나지 않았다.
끼어든 순간 불같은 통증이 옆구리에 느껴졌고, 곧이어 눈 덮인 땅에 세차게 격돌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늑대는 곧장 고개를 돌려 도망치던 사람 쪽을 쳐다보았고, 찰스는 이미 자신이, 혹은 이 꿈의 주인공이 무엇을 보게 될지를 알아챘다. 분명 공포에 질려 창백한 얼굴로 이 쪽을 돌아보는 저 사람은 찰스 자비에 자신이리라. 그리고 이 꿈은...
아니었다.
눈 속에는 한 여인이 쓰러져 있었다. 낯익은 얼굴, 바로 에릭의 머리 속에서 보았떤 그 여자, 오두막의 작은 초상화 속에서 앉아 있던 그 여자, 그녀가 다갈색 눈을 크게 뜨고 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목에는 찰스가 환영을 통해 보았떤 그 깊은 상처가 그대로 나 있었다. 그리고 무시무시한 포효가 들리며 의식은 다시 암흑 속으로 떨어져 갔다.
찰스는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자신의 바로 옆자리에서 지금 막 깨어나, 그제서야 느껴지는 상처의 아픔에 신음하며 이 쪽으로 고개를 돌린 에릭과 눈이 마주쳤다. 흔들리는 눈동자를 본 순간 확신할 수 있었다. 방금 전 본 것은 바로 에릭의 꿈이다. 눈부신 하늘, 어두운 숲, 하얀 눈밭의 괴물과 시체, 지금까지 보고 있던 모든 것이 바로 에릭의 꿈이었던 것이다.
잠깐 눈이 마주친 것일 뿐인데 시간이 멈추어 버린 것만 같았다. 마치 무엇엔가 홀린 것처럼, 도저히 에릭의 눈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하여 에릭이 아마도 느껴질 지독한 아픔을 견디며 천천히 손을 올리는 것을 보면서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의외로 길고 가느다란 사냥꾼의 손가락이 찰스의 얼굴에 닿았을 때에야 간신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가 눈을 깜박이자, 에릭이 한숨을 쉬었다. 안도의 한숨이었다.
"무사했나."
기묘한 생각이 들었다. 이런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에릭이 할 말이 아니었다. 에릭이 입은 심각한 부상과 비교한다면 찰스의 상처 따위는 등을 가볍게 긁힌 거나 다를 바 없을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에릭은 찰스의 얼굴을 이상하리만치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고, 찰스는 그 질문에 반드시 대답해야만 할 필요성을 느꼈다.
"예. 살짝 긁힌 정도죠. 하지만 당신이야말로, 괜찮아요?"
몸을 일으키자 등에 다시 통증이 달렸다. 자기도 모르게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지만 그래도 아까보다는 견딜 만 했다. 찰스는 에릭의 상처를 살펴보기 위해 모피를 걷었다.
"난 괜찮아. 딱히 살펴볼 필요는..."
"웃기지 말아요. 뼈까지 안 닿은 게 신기할 정도로 깊은 상처였다고요. 자, 움직일 수 있겠어요? 붕대를 갈 겁니다."
아까 감아두었던 붕대에는 피가 번져나와 있었지만, 정작 붕대를 풀면서 보니 출혈이 계속되고 있진 않았다. 물론 상처 자체는 그대로 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출혈이 멎은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다. 내심 놀라면서도 침착하게 하나 하나 붕대를 풀어가는 동안 에릭은 침묵하고 있었다. 이따금 찰스의 손이 상처 부근을 건드리면 몹시 아픈 듯 했지만 어쨌건 신음소리 한 번 내지 않고 꾹 참아냈다.
드러난 상처를 따뜻한 물로 다시 한번 조심스레 닦아낸 다음 아까 만들어 둔 새로운 붕대로 상처를 감으려 했을 때, 에릭이 약간 쉰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말했다.
"구석 선반 위."
"...예?"
"테이블 쪽 구석에 선반이 있고, 거기 작은 단지가 있을 거야. 거기 약이 있어."
찰스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그러고 보니 그는 에릭이 혼자 사는 사냥꾼이라는 점을 거의 잊고 있었다. 부상이 꽤 잦았을 테고, 다쳤을 때 사용할 약 정도는 갖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재빨리 몸을 일으켜 약단지를 가져와, 잘 묶인 노끈을 서둘러 풀어내고 종이와 함꼐 마개를 벗겨 냈다. 갈색에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끈적한 약을 떠서 상처에 갖다대는 순간 에릭이 이를 악물었다. 주먹을 꽉 쥐고 통증을 견디는 걸 보니 바르면 상당히 아픈 약 같았지만, 그래도 곳곳의 상처에 꼼꼼히 약을 바른 다음 다시 붕대를 감을 때까지 에릭은 단 한 마디 말고 하지 않고 그 아픔을 꾹 참고 견뎌냈다.
마지막 붕대를 감은 후 놀랍게도 그가 몸을 일으켜 앉았다. 찰스는 말 그대로 경악했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아직도 끙끙거리고 누워있기가 고작이었을 텐데 이 정도로까지 회복되다니 정말이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단지를 넘기라는 듯 가볍게 손짓하며 에릭이 말했다.
"코트 벗어."
"무슨 소리예요? 난 그냥 가볍게 긁힌 정도인데..."
"웃기지 마. 피냄새를 그렇게 풍기면서 다치지 않았다고?"
찰스는 잠시 망설이다 코트를 벗었다. 오두막 안은 벽난로 덕에 훈기가 가득했지만, 그래도 든든한 코트를 벗어 버리니 맨 몸에 조끼만 걸친 상반신에 소름이 돋았다. 셔츠도 없이 맨살에 조끼만 입은 그의 모습을 본 에릭이 눈썹을 치켜올렸고, 찰스는 짧게 답했다.
"붕대로 쓸 천이 없었어요. 걱정 말아요. 실크도 아니고 면 셔츠니까 찢어져도 별로 상관 없어요."
"미쳤군."
찰스는 뭐라고라도 항의하고 싶었지만 꾹 참고 입을 다물었다. 에릭이 단순히 비웃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화를 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추위에 셔츠도 없이 나가려던 셈인가?' 에릭의 뇌리에 떠오른 그 생각은 거의 귀에 들려오기라도 할 것처럼 뚜렷했다.
"조끼 벗고 돌아앉아."
찰스는 잠시 고민했다. 자신의 상처는 에릭의 것과 달리 별로 깊지 않다. 마을에 가면 의사가 있고, 그가 처치를 해 줄 것이다. 그런데 꼭 여기서 약을 발라야 할까? 반드시 그래야만 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고민하는 사이 에릭은 이미 약간 조급한 손길로 찰스의 몸을 돌려놓고 있었고, 곧 차가운 액체가 찰스의 등에 닿았다. 그리고,
"아야얏! 이거...뭡니까!"
"엄살은."
찰스는 숨을 가쁘게 쉬며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가 상처가 벌어지는 자세가 되어버린 까닭에 다시 비명을 질렀다. 마치 상처에 독주를 콸콸 들이붓는 것처럼 화끈거리고 엄청나게 아팠다. 대체 이렇게 아픈 것을 바르면서도 어떻게 그렇게 침착하게 참을 수 있었단 말인가? 아픔에 휩쓸리는 바람에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찰스의 등에 와 닿는 에릭의 손길은 의외로 부드럽고 조심스러웠다. 가끔 지나친 통증에 견디지 못한 찰스가 앓는 소리를 내며 등을 흠칫거리면 잠시 그대로 두기도 했던 것이다. 그렇게 약을 다 바른 후 에릭이 말했다.
"오늘은 이 집 안에서 지내. 밤새 여기 얌전히 엎드려 있어. 상처에 자극이 되면 곤란하니까."
찰스는 잠시 망설였다.
"그럼 당신은요?"
이번에 망설이기 시작한 것은 에릭이었다. 그 기색에, 찰스는 지금까지는 환자를 돌보느라 눌러 두었던 의혹이 다시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니, 이제는 의혹이라기보다 거의 확신이었지만.
"난 나가 있을 거야."
"당신도 다쳤잖아요."
"난- 난 여기 있을 수 없어."
매우 새삼스럽지만 확인 사살을 당한 느낌이 들었다. 몸의 상처, 그의 상태, 방금 본 꿈, 그리고 이 대화까지. 지금 입을 다물면 그나마 그럭저럭 넘어갈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학자로서건 원래 타고난 성격으로서건 찰스 프란시스 자비에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왜 날 구했죠?"
등 뒤에서는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초조해지 찰스가 말을 이었다.
"둘러댈 생각은 하지 말아요. 그 회색 늑대, 당신이었죠?"
어쩌면 전설 속의 존재인 '늑대 인간'일지도 모르는 남자가 바로 등 뒤에 있다는 사실도 그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다. 그것은 어쩌면 그 동안 에릭이 늘 찰스의 마음에 불러일으켜 왔던 그 기묘한 느낌과도 통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 이 남자는- 에릭은 실로 기묘한 이였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퉁명스럽게 대한 주제에 찰스가 순수한 믿음을 보였다는 이유 하나로 놀랄 정도로 빨리 경계심을 풀었고, 그리고 꿈에서 본 바 대로라면, 즉 에릭이 보았던 꿈 그대로라면 무려 그의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었는데 찰스를 구해주기까지 했다. 늑대를 두고 비유한다면, 그것은 마치 거대한 늑대가 온순한 태도로 다가와 손길을 뻗어도 거부하지 않고 순순히 받아들여 주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던 것이다.
사실 찰스는 전혀 몰랐지만 그런 놀라움은 바로 에릭의 것이기도 했다. 이제껏 그가 접했던 사람들은 그를 꺼리는 이들이었고, 낯선 사람이라 해도 늘 그래왔듯 퉁명스러운 태도를 보이면 알아서 멀어지곤 했다. 그런데 이 남자는, 이 외지 남자는 대체 멍청한 건지 둔한 건지 아니면 사람이 지나치게 좋은 것인지, 밀어낼수록 오히려 다가오기만 한다. 다른 이들이라면 코웃음을 치거나 정신병자 취급을 할 이야기를 들었는데도 진지하게 믿어주질 않나, 심지어는 자기가 도울 수 있다며 이상한 말들을 늘어놓질 않나, 마치 상대에게 무조건적인 선의를 보이는 일이 당연하다고 믿는 강아지마냥 사방 팔방으로 그 선의를 날려대며 따라와붙고는 절대 떨어져 나가질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에릭의 정체를 알게 되었는데도 두려워하거나 도망치기는 커녕 '왜 구했나'를 묻고 있다.
"두렵지 않나?"
충동적인 질문이었다.
"당신이 어제 절 잡아먹었다면 지금쯤 뱃속에서 충분히 두려워하고 있을 겁니다."
비꼬는 대답이 들려 왔다. 대체 어떻게 이 청년이 그 사실을 알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가시지 않았지만, 에릭은 그만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어 버렸다. 상처가 욱신거리는 바람에 곧 다시 얼굴이 굳어버렸지만.
"내가 은탄환을 쓰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 따로 설명할 필요는 없겠군."
"...아마 은을 만지는 것조차 어렵겠군요."
문득 찰스는 알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어째서 어머니의 은반지가 마룻바닥 속에 떨어져 끼일 때까지 에릭이 그것을 방치했는지 말이다. 하지만 잘 닦여 있던 그 은화는 어떻게 된 것이었을까.
- 그간 놀던 거 아니고 바쁜 회사일 짬짜미 이거 소설화 하고 있었습니다.
- 2월 25일 행사에 나올 글이라 정말 시간이 없네요.
- 열심히 달리겠습니다-
1.
찰스는 한숨을 푹 쉬었다. 오 맙소사 -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되어 버린 걸까. 레이븐의 말이 옳았다. 바로 2개월 전, 따뜻한 장작이 타오르는 실내에서 사랑스런 누이는 전혀 사랑스럽지 않은 표정으로 외쳤더랬다. '독일이라니, 미쳤어?' 네 살이나 어린 주제에 언제나 누나라도 되듯 따지고 드는 금발의 누이 앞에서 찰스는 그저 눈알만 굴렸다.
'오, 레이븐 - 그렇게 걱정할 것 없어. 슈바르츠발트 한 가운데 있는 아주 작은 마을일 뿐이야. 거기서 요양을-'
'사랑하는 오라버니이? 그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 같은데 말이야?'
그날 저녁 도착한 새 비단 드레스 자락을 꼭 틀어쥔 레이븐은 새파란 최고급 비단에 주름이 지거나 말거나 아랑곳하지 않고 찰스를 몰아붙였다.
'바로 6개월 전에 나한테 그 말 하지 않았어? 트랜실바니아의 서늘한 공기로 피서를 떠난다고 했지?'
'오, 레이븐 난 정말 그럴 작정이었어.'
'물론 그럴 작정이었겠지, 다정한 오라버니! 하지만 실제 어땠어? 괴상한 마을에 가서 들쑤시고 다니는 바람에 쫓겨났다면서?'
'아니, 그래도 그 마을 사람들이 믿던 흡혈귀가 사실 전설이 와전된 거라는 건 밝혀-'
'그 전에는!'
이번에야말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멕시코였잖아. 아후...아휘...뭐라고 했지?'
'......아후이조틀.'
'거기서 그걸 찾겠다고 하다 황열병에 걸려 죽을 뻔 했던 걸로는 부족해?'
아무 답도 할 수 없었던 것은, 이 발랄하고 때로는 대책없을 정도로 저돌적이지만 동시에 말도 못하게 찰스를 걱정하는 누이의 눈매에 어느새 눈물이 맺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빠 제발, 의학 박사까지는 아주 좋았어. 아니, 귀족이 왜 그런 걸 배워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야, 어쨌건 좋았다고.'
'......'
'그리고 박물학 쪽으로 방향을 돌린 것에 대해서도 난 불만 없어. 오빠가 모으는 신기한 물건들 나도 좋아하잖아.'
'그렇지.'
레이스 장갑에 감싸인 레이븐의 손이 가슴에 매달린 터키옥 펜던트를 꼭 쥐었다. 전설속의 괴물 아후이조틀을 찾아갔던 멕시코에서 샀던 선물이었다. 황열병에 걸려 헛것을 보면서도 끝내 손에서 놓지 않았던 목걸이를, 누이는 건강이나 챙길 것이지 미련스레 이런걸 가져왔냐고 타박하면서도 기쁘게 받아 주었었다. 찰스는 미안함에 견디지 못하고 눈을 내리깔았다.
'하지만 이번엔 독일이잖아, 게다가 도착하면 겨울이야! 거기서 대체 뭘 찾으러 가는 건데? 언제까지 전설 속의 괴물들만 찾으러 다닐 거야?'
'......'
'웨스트체스터에는 주인이 필요해.'
하지만 찰스는 또한 알고 있었다. 늘 이렇게 말하는 레이븐이었지만,
'...그러니까 이번엔 좀 맘 잡고 조심해서 갔다 와. 응?'
'미안해, 레이븐.'
언제나 끝에는 늘 찰스에게 한 수 물러주었다는 것을.
눈물 젖은 눈으로 찰스를 바라보던 레이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정말이지, 대체 누가 누구의 후견인인지 모르겠다니까.' 그리고 그런 레이븐에게 찰스는 약속을 하나 해 주었다.
'이번에 다녀오면 얌전히 영국에 붙어 있을게.'
'......정말?'
'적어도 네가 행크와 결혼식을 올릴 때까지는.'
'찰스!'
새빨개진 얼굴의 여동생에게 찰스는 웃으며 다시 한번 말해 주었다. 그녀가 몰래 마음에 둔 청년과의 결혼을 허락해 주겠다고, 그리고 기꺼이 그 결혼식에 참석하겠노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것도, 이 위기에서 헤쳐나간 다음의 일이다.
"제길!"
찰스는 있는 힘을 다해 눈길을 뛰어가며 욕설을 내뱉었다. 숨이 턱까지 차 있었지만 절대 발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벌써 해가 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 곳, 독일 검은 숲의 겨울 해는 상상을 초월하게 빨리 가라앉았고, 그에 비해 찰스의 발걸음은 지독스러운 흰 눈에 묶여 느리기 짝이 없었다. 가야 한다, 한시라도 빨리 마을로 돌아가야 한다. 지금은 음력 13일, 마을 사람들이 말하는 '괴물'이 나타나는 보름이 되기까지는 겨우 이틀만 남아 있었다.
슈바르츠발트의 작은 마을 나이슬라흐, 고작해야 삼사십여 호의 가옥이 마을 창고가 있는 작은 광장을 중심으로 옹기종기 모여선 곳이다. 몇개인가의 가게가 있긴 하지만 거기 없는 물건을 사려면 몇시간이고 숲길을 걸어 읍내까지 가야만 할 정도로 한갓진 마을로, 옥스포드를 졸업한 영국인 학자가 와 있을 만한 곳은 아니었다. 그놈의 '괴물 전설'만 아니라면.
'정말입니다.'
독일인들답게 실로 무뚝뚝한 첫인상을 지녔던 마을 사람들은 그러나, 한달간의 여관비를 선불로 지불하고 눌러앉아 싹싹하게 말을 붙여가며 끈질기게 질문을 던져오는 찰스에게 의외로 자세한 설명을 들려 주었다. 이 애교많은 이방인의 붙임성 때문인지 그가 내민 돈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건 '괴물'에 대한 질문을 듣는 족족 성호를 그으며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조심하세요 영국인 양반, 보름 밤이 되면 절대로 돌아다니면 안돼요. 그 날은 외양간 문도 모두 꼭 닫아놓는답니다.'
'괴물'은 보름달이 뜨는 14일부터 16일 사이에 마을을 돌아다닌다고 했다. 그 동안, 아니 사실상 그 앞뒤로 일주일 동안 모든 주민들은 해가 떨어지면 곧장 외양간 문을 걸고 창고를 잠그고 누구도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로.
'많은 사고가 있었어요. 그 때만은 조심하십시오.'
주어지는 말은 모두 경고의 말들 뿐이었음에도, 마을 사람들의 진지한 태도를 접할 때마다 오히려 찰스의 의욕은 불타올랐다. 이번에야말로 진짜이리라는 기대감이 끓어올랐던 것이다. 근거 없는 짐작이 아니다. 마음속으로부터 깊이, 사실은 바로 그의 두뇌를 통해서 마을 사람들이 '직접 겪은 진실'을 얘기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그의 능력이 지금 그에게 생생히 속삭여 주고 있었다. 이 마을에서만은 진실을 접하고 있다고.
물론 모든 것을 읽어내지는 못한다. 사람들이 깊이 숨기려 하는 것, 혹은 잘못 알고 있는 것까지 다 간파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눈앞의 사람들이 그저 전설을 이용해 몇푼 돈을 울궈내려는 작자들인지 아닌지 정도는 구분할 수 있었고, 그것만 해도 큰 도움이 되어 주었다. 트란실바니아의 흡혈귀는 역사적 사실이 와전된 것이었고, 멕시코의 아후이조틀은 허구의 존재였다. 그러나 이 곳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아주 생생한 공포가 살아 꿈틀거리고 있었다. 직접 본 이는 아직 만나보지 못했지만, 분명 이 곳에서라면 '답'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을 갖게 된 것만 해도 찰스로서는 대단히 큰 수확이었다.
찰스는 어른들 뿐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적극적으로 이것저것 묻고 다녔다. 머나먼 외국에서 온 손님에게 강한 호기심을 느낀 아이들은 처음 잠깐만 경계심을 보여주었을 뿐, 곧 찰스가 보여주는 이국의 물건들에 매료되어 아주 훌륭한 정보원이 되어 주었다. '한스가 이상한 그림자를 봤대요!' '구드룬네 거위를 괴물이 잡아먹었대요!' 아직까지 그 단편적인 정보들에서 딱히 훌륭한 답이 나온 적은 없지만, 그래도 앞으로의 일은 알 수 없는 것이지 않은가.
하지만 오늘만은 그 아이들의 말을 단순히 믿어버린 자신이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숲 속의 샘에서 거대한 그림자를 보았다는 얘기를 듣고는 당장 달려나갔건만, 별반 소득도 없이 너무 늦어버린 것이다. 어느새 해는 지고 있고, 지금은 붉은 노을도 거의 사라져 지평선에 금빛 끄트머리만 남아 있는 상태다. 이마 마을 사람들은 - 아마도 어제 바로 그랬듯 - 문은 물론 덧창문마저 모두 걸어 잠그고 공포에 떨고 있을 것이다. 최악의 경우에는 이 추운 겨울밤을 밖에서 보내게 되는 수가 있다. 괴물도 괴물이지만 사실 찰스에게 당장 다가온 가장 큰 위협은 그것이었다. 눈 덮인 겨울의 슈바르츠발트에서 혼자 밤을 보낸다는 건 말 그대로 자살행위이므로.
"제발, 제발 좀!"
드디어 마을 문 안으로 들어선 찰스는 완전히 어두워진 하늘을 원망스레 바라보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옷을 두텁게 갖춰 입었음에도 뼛속까지 파고 들어오는 끔찍한 추위에 몸이 덜덜 떨려 왔고, 한 발짝 옮길 때마다 지친 몸은 비명을 질러댔다. 턱까지 숨이 차오른 상태에서 더 속도를 내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간신히 마을 광장에 도달한 찰스는 절망적인 시선을 던지며 여관 문에 달려가 힘껏 노커를 두드렸다. 문은 잠겼고 덧창문도 단단히 닫혀 있다. 안에 불은 켜져 있었지만, 아무도 찰스에게 답하지 않았다.
"이봐요! 여기 사람이 있어요!"
외치며 노커를 두드렸지만 여전히 답은 없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한숨을 내쉰 찰스는 고개를 돌려 광장 가의 집들을 바라보았다. 마찬가지다. 단단히 빗장을 걸고, 자물쇠를 안에서 걸고, 덧창문을 닫고, 아무도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들여보내 달라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소리쳐 봤지만 마찬가지로 아무도 답해오지 않는다. 새삼 덜덜 떨려오는 몸을 양팔로 끌어안으며 찰스는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숲 속의 자그만 마을, 한적하고 평화로운 곳이라고만 생각했던 곳이 이렇게 쓸쓸하고 무서워 보인 적은 없다. 이름 그대로 검은 숲에 둘러싸인 건물들의 검은 그림자 사이에 이상하리만치 밝은 달빛만 떨어진다. 달빛, 아마도 괴물이 지금 자신을 본다면 이 밝은 달빛 덕에 아주 쉽게 찾아내고 잡아먹으리라. 공포보다는 추위 때문에 덜덜 떨며 다른 건물 쪽으로 다가가 보려던 찰스는 누군가 그의 어깨를 친 순간 그만 짧은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으악!!"
돌아본 곳에 선 큰 그림자를 보았을 때 공포는 순간 경악이 되었지만 그 그림자가 랜턴을 든 남자라는 것을 알아본 뒤부터는 급속도로 가라앉았다. 그렇다, 남자였다. 괴물이 아니라 그저 인간 남자 하나. 차가운 표정으로 찰스를 내려다보는 남자는 꽤 따뜻해 보이는 털가죽 망토를 걸친 등에 뭔가 묵직한 자루와 막대 같은 것을 지고는 랜턴을 들고 서 있었다.
"저기...저......"
잠시 도움을 청하려던 찰스는 곧 이 사람이 영어를 알아듣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생각하고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독일어를 할 수는 있었지만 듣기에 비해 말하기는 그다지 능숙하다고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깊이 당황한 상태라 문장이 잘 떠올라 줄지 의문이었다. 제발 이 사람이 자기 발음을 잘 알아들어 주길 바라면서, 찰스는 필사적으로 대화를 시도했다.
[그...도와주세요. 전 여기 사람이 아닙니다. 이 마을에 왔는데, 문이 닫혔고, 너무 늦어서...]
그러면서 최대한 지금 자신의 상황을 설명했다. 배도 고프고, 목도 마르고, 무엇보다도 춥다고. 하지만 남자는 그런 찰스를 차가운 시선으로 빤히 바라보기만 할 뿐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불안해진 찰스가 잠깐 남자의 생각을 훑어보려 했지만, 이 쪽을 향한 별다른 적의가 없다는 것, 약간은 찰스를 한심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 외에는 잘 알 수가 없었다.
[제 말 아시겠어요? 도와주세요.]
슬슬 반응없는 남자에게 부아가 났지만, 그래도 찰스는 열과 성을 다해 도움을 요청했다. 이미 밤이고, 마을 사람들은 이제 절대 찰스를 안으로 들여보내 주지 않을 것이다. 이 남자는 그간 마을에서는 본 적 없는 사람이었지만 아무튼 이렇게 날이 어두워도 멀쩡히 돌아다니는 걸 보면 바로 이 근처에 집이 있는 사람인 것만은 틀림없을 것 아닌가. 그는 찰스의 마지막 희망이었고, 찰스는 그 사실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었다. 간절히 손을 내미는 순간 남자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아마 그는 상대가 정신병자나 백치가 아닌가 의심하면서도 어떻게든 다시 한 번 매달렸을 것이다.
"정말 못봐 주겠군. 멍청한 짓 그만하고, 여관은 내일 아침까지는 안 열 테니 우리 집에서 묵고 가던가 하시오."
이 곳 사람 특유의 강한 억양이 섞여 있었지만 분명히 매우 유창한 영어였다. 생각지도 못한 모국어에 놀란 찰스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쳐다보자, 남자는 그런 찰스를 잠시 응시하다 곧 몸을 휙 돌려 어딘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자, 잠깐! 당신, 영어 해요? 영어 할 줄 알아요?"
남자가 멈춰선다. 하지만 돌아보지는 않았고, 냉정한 목소리가 밤 공기를 뚫고 찰스의 귀에 울려 왔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닐 텐데. 따라오시오. 싫으면 그냥 여기서 밤 새던가."
남자는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찰스는 허겁지겁 그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거 살았군요."
"......"
"성함이 어찌 되시나요? 전 찰스 자비에라고 합니다. 여기 온지는 열흘 쯤 되는데 처음 뵙는 분이군요. 괜찮으시다면-"
"에릭."
남자는 그 한 마디만 뱉고는 그 뒤부터 찰스가 뭘 묻건 무슨 이야기를 하건 모두 무시했다. 분명 말도 못하게 무례한 짓이었지만 그럼에도 어쨌건 도움의 손길인지라, 찰스는 속으로만 투덜거리며 어떻게든 남자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한참을 걷다 보니 오히려 숲에 더 가까워졌다. 불안해진 찰스는 남자의 생각을 조심스레 살펴보았고, 그가 집으로 가고 있는 것이 맞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다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어쨌건 살았다. 이 자가 무슨 속셈으로 찰스를 도와주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이 추운 밤을 눈밭에서 얼어죽을까봐 덜덜 떨며 지새지 않게 된 것만 해도 다행이 아닌가.
2.
'에릭' 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한 남자의 집은 숲 안에 틀어박히듯 자리잡고 있었다. 나무 벽에 너와로 지붕을 한 집은 겉으로 보기엔 허름한 오두막처럼 보였지만, 막상 꽤 두터운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의외로 견고하게 잘 지어둔 집이었다. 이 마을 사람들이 늘 그렇듯 덧창 안쪽에는 견고한 걸쇠들이 달려 있으며, 벽의 통나무들은 바람 샐 틈 없도록 단단히 못질되어 있다. 마을에는 잠시 마실 나왔던 것인지 벽난로에는 이미 모닥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고 거기서 훈훈한 열기가 훅 끼쳐 왔지만, 영국과는 달리 지독하게 춥고 습한 독일 겨울 공기의 냉기는 쉽게 몸에서 가시질 않았다.
덜덜 떨며 벽난로 가로 달려가 손을 비비며 몸을 녹이던 찰스의 시선이 바닥에 가 닿았다. 부유한 집이라면 카펫을, 가난한 집이라면 짚이라도 깔아둘 그 공간을 대신하고 있는 것은 무려 털가죽이다. 짙은 회색과 여러 다른 색이 섞여 있는 긴 털을 바라보던 찰스는 그것이 늑대의 모피라는 것을 깨닫고 그 크기에 경악했다. 몇해 전 세상을 떠난 찰스의 양부가 이런 크기의 늑대를 잡았다면 틀림없이 박제로 만들어 전시라도 했을 것이다. 헌데 그뿐이 아니었다. 늑대 모피의 존재를 깨닫고 둘러본 실내에는 온통 이런 저런 동물들의 모피가 걸려 있다. 족제비, 담비, 늑대, 여우... 자루를 내려놓는 에릭 쪽을 보던 찰스는, 그가 들고 있던 막대 같은 것이 사실은 소총이었다는 걸 깨닫고는 자기도 모르게 독일어로 질문했다.
[사냥꾼인가요?]
질문을 하고서야 상대가 영어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내고는 입술을 깨물었지만, 남자는 아무 대답 없이 걸머지고 있던 총을 구석에 걸어놓을 뿐이었다. 아마 그 총을 고정해 놓기 위해 만들어진 듯한 나무 대에는 지금 에릭이 들고 있던 것 말고도 두세 자루의 총이 더 있었다. 모두 오래된 것이었지만 그래도 손질이 잘 되어 있어서 둔탁한 금속에 모닥불빛이 반사되어 희미한 빛을 발한다. 이어 외투를 벗어 옆에 걸어놓더니 한쪽 구석에서 작은 솥을 들고 다른 쪽으로 가 무언가를 그 안에 던져넣는다. 그리고 그 솥을 그대로 가져와 불이 타오르는 벽난로에 걸고는, 벽난로 곁에 굴러다니는 장작 한 덩이를 집어넣어 불을 돋운다.
"저기, 이봐요."
여전히 무시한 채 구석으로 가는 그를, 찰스는 이제 확실히 부아가 난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이 추운 겨울 밤에 따뜻한 실내로 들여보내 준 것은 정말 눈물겹게 고마운 일이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 무시하는 건 좀 너무하지 않은가. 그래도 다시 한번 붙임성있게 말을 걸어볼까 하는데, 다시 구석으로 걸어갔던 에릭이 들고 온 것을 찰스 앞에 불쑥 내민다.
"저..."
호밀빵이다. 이 곳 사람들이 주식으로 먹는 검고 거친 호밀빵을 찰스에게 한 덩이 내민 에릭은, 작은 종지를 벽난로 앞에 놓았다. 분명 저 쪽에 식탁이 있긴 했지만 거기보다는 여기 벽난로 앞이 훨씬 따뜻하다. 아직도 외투를 입은 채 주저앉은 찰스는 솥에서 끓기 시작하는 것이 아마도 스튜쯤 되리라 짐작했고, 곧이어 벽난로 앞의 작은 종지 안에 담긴 것이 빵에 발라먹을 수 있는 치즈라는 것을 알게 되자 기분이 좀더 나아졌다.
지쳐 있던 뱃속에 빵이 들어가자 기운이 좀 돌았다. 솥에서 끓는 소리와 냄새가 나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이 거친 식사에 대한 기대감마저 생겨났다. 묵묵히 빵을 씹던 에릭이 몸을 일으키더니 어디선가 나무 그릇 두 개를 들고 온다. 적당히 스튜를 나눠담은 그는 그릇 하나를 찰스에게 내밀었고, 이제 둘은 그 스튜 국물에 호밀빵을 찍어가며 묵묵히 빵과 치즈와 스튜를 먹기 시작했다. 양이나 소는 아니고 생전 처음 먹어보는 고기였지만, 따뜻하고 진한 스튜 국물은 시장이 반찬인 탓인지 무척 맛있었다. 마지막 국물을 빵으로 깨끗히 발라내 삼키고 나서야, 찰스는 식사를 하는 내내 이 식사를 대접해 준 장본인과 말을 한 마디도 나누지 못했다는 걸 깨닫고 당황했다.
"저... 정말 맛있는 스튜군요."
"사슴고기."
"...예?"
남자는 아무 답도 하지 않고 아직 덜 먹은 빵을 삼켰다. 지금의 말이 바로 자신이 먹은 고기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이라는 걸 깨달은 찰스가 뭔가 말하려는 순간, 그가 또 말을 꺼냈다.
"사흘 전에 잡았지. 수가 줄어들고 있지만 아직은 잡을 만 하거든."
아무래도 사냥꾼이 맞는 것 같다. 그렇다면 그의 오두막이 이렇게 마을에서 떨어진 데 있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사냥꾼, 숯장이, 그런 직업을 가진 자들은 늘 마을에서 떨어져 이렇게 마을 사람이 아닌 것처럼 살아가게 되어 있으니 말이다. 동물을 잡아와 가죽을 벗기고 고기를 해체하고 무두질을 하며 살고 있다면, 마을의 금기에서 어느정도 벗어나 있는 존재나 마찬가지니 이렇게 찰스를 재워주는 것도 이해가 갔다. 그리고 동시에, 이 사람의 태도도 납득이 갔다. 그는 아마도 찰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일 것이다. 마을 사람이라면 신기한 이방인인 찰스에 대해 모두들 알고 있었지만, 그는 아마도 마을에 가끔 들르는 것이 전부일 테니, 게다가 붙임성도 없는 성격일 듯 하니 더더욱 모를 수밖에.
"그나저나 당신, 영국인이 여기서 뭐 하는 거요?"
느껴지는 것은 그저 호기심 뿐이었다. 역시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찰스는 금새 붙임성있는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호의어린 미소와 다정한 말로 스스로를 소개하는 것은 늘 그가 즐겨하는 일이었고, 무엇보다도 독일에 와서 처음으로 영어로 이리 긴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이었기에 더 신이 났다. 박물학자인 자신을 소개하고, 지금까지 해 온 일을 얘기했다. 사람들의 신앙과 공포 속에 존재하는 기이한 생물이나 괴물들에 대한 조사가 절대 쓸모없는 일이 아니라는 주장, 보통 사람들은 그런 게 있을 리 없다고 비웃지만, 분명 그러한 경외심의 원인이 되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에 그러한 전설이 생기게 된 것이라는 그의 생각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래서 이 지역의 '괴물'에 대해 조사하러 왔다는 것을 말하는 순간,
"...에릭?"
남자의 얼굴이 변모했다. 그저 이야기를 듣고 있던 무표정한 얼굴에 더없이 뚜렷하게 적의와 반감이 솟아올랐다. 다급히 살펴본 그의 생각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저 희한한 사람을 만났다는 정도로만 생각하던 그가, 이제는 무서울 정도로 두터운 장벽을 치기 시작한다. 이 쪽을 응시하던 푸른 눈은 이제 얼음장처럼 차갑게 변했고, 그 순간 아주 강렬한 생각이 찰스의 손에 잡힐듯 생생하게 떠올랐다. 아니, "뚫고 올라왔다"는게 맞는 표현일 것이다. 그 생각은 너무 생생하고 강렬해서, 찰스는 눈앞의 남자가 불러낸 과거의 광경을 그의 시각에서 고스란히 들여다 볼 수 있었다.
'괴물!' '너 때문이야!' 죽음, 비웃는 사람들, 구경거리, 그리고 아주 잠깐이지만 한 여자가 거의 눈에 '보였다'. 검은 머리에 낡고 두터운 옷을 걸친 중년 부인이 목이 거의 잘린 채 쓰러져 있다. 흔들리는 시야는 일반적인 어른보다 훨씬 낮아서, 아마도 아이의 것인 듯 하다. 아이가 아래를 내려다보았고, 피에 흠뻑 젖어 있는 작은 손이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 외쳤다. '괴물이다!' '저주받았어!' 누군지 모를 여자가 비명을 지르고, 고함소리가 어둠을 꽉 채웠다. 흠칫 놀라는 순간 그 기이한 광경은 사라졌고 스튜 냄새와 모피가 가득한 작은 오두막이 다시 눈에 들어왔지만, 찰스는 방금 보였던 그 압도적인 광경을 지우기 어려워 눈을 깜박거렸다.
"에릭?"
이 쪽을 노려보던 남자는 잠시 입을 일그러뜨리더니 싸늘한 어조로 내뱉듯 말했다.
"결국 네 놈도 구경꾼이군."
당황스러운 말이었다. '구경꾼'이라는 그 말에 담긴 경멸과 적대감에 더욱 당황한 찰스는 어떻게든 에릭의 감정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해 보았지만, 이미 반감의 장벽을 친 남자에게는 소용 없었다.
"예? 아닙니다, 저는 아까 얘기한 것처럼..."
"그래, 당신도 그런 놈이겠지. 도시에서 곱게 살다가, 그게 뭔지도 모르고 다가왔다가 깨닫는 순간 꽁지 빠지게 도망치는 녀석들."
"잠깐만요, 지금 저에 대해서 오해가"
"됐소."
좀더 강경하게 밀어붙여서라도 오해를 풀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정신적인 충격이 꽤 컸다. 아직도 방금 본 참상이 눈앞에 생생했던 것이다. 눈, 피, 피냄새, 함성, 찰스의 기억은 아니다. 방금의 그 광경을 생각해 낸 것은 바로 눈앞의 이 남자다. '괴물'의 피해자! 방금의 이야기는 아마도 '괴물'에 대해 호기심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얘기이리라. 그렇다, 마치 찰스와 같은 방문자들.
"저기..."
조금 정신을 차리고 다시 말을 붙여보려 했지만 에릭은 일어서서 어딘가로 걸어가 버렸다. 돌아보는데, 바닥에 깔려 있는 늑대 가죽보다 훨씬 커다란 모피를 들고 온다. 역시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이제 그 마음에는 한치를 들여다 볼 수 없을 만큼 두터운 장벽이 쳐져 있었다. 아마도 곰가죽 정도 되어 보이는 두텁고 무거운 모피를 찰스 앞에 내려놓은 남자는 서느러니 식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걸 덮고 자면 될 거요. 내일 아침에 곧장 나가시오. 인사는 필요 없소."
"제 말을 좀 들어주시면 안될까요?"
휙 돌아서서 가 버리는 그림자의 주인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인다. 찰스는 이를 꾹 악물고 잠깐 어떻게든 대들어 볼까 생각했지만, 저 정도로 마음에 두터운 장벽을 친 상대라면 무엇을 말해도 소용없다는 생각이 들어, 깊은 한숨을 내쉬며 그만둬 버렸다. 일단 모피를 덮자 온기가 천천히 냉기에 지친 몸을 휘감아 왔지만 의외로 정신만은 맑아서, 찰스는 그 뒤로도 한참을 뒤척여야 했다.
눈을 떴을 때 집안은 어두웠고, 어디에도 인기척이 없었다. 안쪽 덧창을 열어보고서야 해가 떴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벗어뒀던 겉옷을 입고 황급히 문 앞쪽으로 나가본 찰스는 이 사냥꾼의 오두막에 자기 혼자 뿐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상당히 당황했다. 당장 나가라고 한 주제에 에릭은 찰스만 남겨두고 이 집에서 나가 버린 것이다. 사냥을 나간 것일까? 아니면 어제처럼 마을에 뭔가 볼 일이 있었던 것일까? 찰스는 십중팔구 전자일 것이리라 짐작했다. 어젯밤의에릭은 한시라도 빨리 찰스를 내쫓고 싶은 눈치였고, 고로 만일 마을에 갈 예정이었다면 지체없이 찰스를 깨웠을 것이다.
어쩄건 예상하지 못한 사태 때문에 찰스는 고민에 빠져야만 했다. 그냥 이 집을 비워놓고 나가 버릴 수도 있겠지만, 잠그지도 못하고 휭하니 나가버려야 한다는 것은 도시인인 찰스로서는 대단히 마음에 걸리는 일이었다. 런던이라면, 그리고 독일이라 해도, 도시에서 이런 식으로 집 문을 잠그지 않는 건 좀도둑을 초대한다는 의미나 다를 바 없다. 물론 이 곳은 사람이 빼곡이 들어찬 도시가 아니라 마을이 아니면 하루종일 사람이라고는 도통 찾아보기 어려운 숲 속이었지만, 그래도 '일말의 가능성'이라는 것을 쉽게 무시할 수는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고민하던 찰스는 결정을 내렸다. 슬슬 배가 고파오지만 어제 먹다 남긴 호밀빵도 있고, 솥에는 스튜도 좀 남아 있었다. 장작을 어디서 가져오는지도 눈여겨 봐 두었으니 적어도 배는 곯지 않을 수 있다. 지금은 하필 보름 전날, 고로 괴물이 나타나기 바로 전날이지만 괴물의 진짜 피해자를 발견한 이상 오히려 여기 있는 게 더 나을수도 있다. 에릭이 돌아와서 아직도 남아 있는 찰스를 보고 어떻게 반응할지는 미지수이지만.
이불 대용인 모피를 두르고 앉아서, 찰스는 어제 보았던 그 놀라운 기억들을 되새겨 나갔다. 에릭의 마음 속에 담겨 던 그 무시무시한 영상들은 절대 꿈이나 환상 같은 것이 아니었다. 망상도, 헛것도 아니었다. 아마도 지금보다 매우 어렸던 에릭의 눈 앞에서 그 여자는 분명히 죽은 것이다. 함성과 사람들의 시선으로 유추해 볼 때, 아마도 마을 사람들은 그 일로 에릭을 꺼리고 피했던 것 같다. 재앙의 피해자가 오히려 불길한 존재 취급 당하는 일은 미신을 믿는 시골 사람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마녀, 그들은 언제나 '마녀'나 '악마의 하수인'을 찾아내 그들이 느끼는 불길함과 두려움을 거기 전가시키곤 했으니까. 아마도 소년은 그 뒤로 호기심어린 시선의 대상이 되었을 테고, 와서 물어보고는 두려움, 혐오감, 경멸감, 혹은 조롱을 내보이며 사라지는 자들이 부지기수였을 것도 쉽사리 짐작할 수 있다. 아마도 '구경꾼'이라는 말은 거기서 튀어나온 것이리라.
하지만 '구경꾼'이라니? 찰스는 갑작스레 부아가 치밀어 올라 입술을 물었다. 그런 무례한 소리가 어디 있는가 말이다. 자신은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 더군다나 에릭을 두고 재앙이라고 비난한 적도 없고 적어도 찰스 생각에는, 무례할 정도로 과거의 일을 캐어 물은 것도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한다면 물어볼 기회조차 없었던 것이지만. 그럼에도 함부로 구경꾼 운운하며 사람을 무시하다니, 기분 나쁘지 않을 수가 없는 일 아닌가. 대체 무슨 일을 겪었기에 저렇게 처음 보는 사람에게까지 배타적으로 구는 것일까?
오두막 안을 초조하게 서성거리던 찰스는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굳게 결심했다. 일단 에릭이 돌아올 때 까지는 여기 있다가, 그가 돌아오면 마을로 가서 최대한 에릭이라는 이 사냥꾼에 대해 알아볼 것이다. 옛날의 사건에 대해서도 최대한 알아보고, 그것이 정말로 '괴물'과 연관이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도 조사하리라. 대관절 그것이 무엇이기에 그렇게 에릭을 고통스럽게 만든 것인지, 사람을 이토록 배척하게 만든 것인지 반드시 알아내고야 말 것이다. 어느새 괴물보다도 에릭의 고통에 더 생각의 초점이 맞춰져 있었지만 그 사실은 깨닫지 못한 채, 찰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드디어 자신이 할 행동이 결정난 것에 대해 기뻐하고 있었다.
검은 숲의 겨울 해는 짧다. 하지만 갓 아침이 되어 깨어난 사람이 읽을 것도 즐길 것도 없는 빈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일은 거의 고역에 가까웠다. 정오가 넘어갈 때쯤 찰스는 장작에 불을 붙여 작은 그릇에 담겨 있던 스튜를 데웠고, 남아 있던 굳은 빵을 스튜와 함께 우물거리며 싹 먹어치웠다. 그럭저럭 배를 채우고 나니 다시 지루함이 몰려와, 결국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는 조심스레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탐사'를 시작한 것이다.
오두막이라고는 해도 한 사람이 살기엔 명백히 넓은 집이다. 게다가 계단 쪽으로 가서 올려다 보니 이층이 있는 듯 해서, 찰스는 작게 휘파람을 불고는 천천히 계단을 딛고 올라갔다. 첫 단을 디뎠을 때 울린 삐걱이는 소리에 언뜻 발을 멈췄지만, 다행히도 목재는 전혀 썩어 있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 난간을 잡고 계속 올라가 드디어 이층에 도착했지만, 곧 찰스는 실망감에 어깨를 늘어뜨려야 했다. 놀랍도록 먼지가 앉은 놋쇠 손잡이를 단 문들은 전부 단단히 잠겨 있었던 것이다. 그 뿐이 아니었다. 내려가기 위해 뒤를 돌아본 순간 찰스는 몹시 당황하고야 말았으니, 십년은 쌓인 듯한 두터운 먼지 사이에 그의 발자국이 또렷하게 찍혀 있었던 것이다. 에릭이 이 곳에 잘 올라오지 않는 것 같긴 해도, 어쩌다라가도 이 장면을 본다면 누가 여기 올라왔는지 모를 수가 없게 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어제 그가 보였던 싸늘한 눈빛과 차가운 태도가 이걸 보면 얼마나 심해질 지 생각해 본 찰스는 더욱 난감한 심정이 되어 눈을 감았다.
"이런 맙소사..."
위기는 거의 언제나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가져온다. 다행히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눈을 번쩍 뜬 찰스는 곧장 아래층으로 달려내려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마도 이층 침실 내에 있을 침대 대신 쓰이고 있는 듯한 짚자리, 간단한 세간들, 그리고 부엌이라 짐작되는 곳 한쪽 구석에 그가 찾던 그것이 있었다. 들통은 이 집에 있는 다른 물건들처럼 꽤 낡았지만 깔끔했고, 긴 막대에 달린 솔 또한 바로 그 옆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던 것이다. 아까보다 좀더 의기양양한 표정이 된 찰스는 코트까지 완전히 걸친 다음 문 밖으로 나가 눈덩어리를 떼어 들고 나온 들통에 담았다. 들통이 가득 차게 눈을 담아서는 따뜻한 실내로 가져와 불가에 둔다. 난로에 새 장작을 던지고 불을 들쑤셔 잘 옮겨붙게 해 놓자 더 강한 열기가 실내에 퍼졌고, 곧 들통은 눈 녹은 물로 가득 차게 되었다. 그리고 찰스는 그 들통과 솔을 들고 바로 이층으로 올라가 긴 솔을 들통에 담근 후 바닥을 닦기 시작했다.
그렇다. 좀 우스꽝스러워도 이름을 붙이자면 '대청소 작전' 쯤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어제의 식사와 잠자리에 대한 보답이라고 불러도 될 것이고, 그가 왜 낮 내내 이 곳에 남아 있는가에 대한 대답도 되어줄 것이다. 게다가 아까의 발자국도 완벽하게 지워 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더욱 운이 좋다면, 이 봉사의 결과 에릭이 보였던 적개심이 좀 누그러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남자 혼자 사는 살림이 그렇듯 (이에 대해 레이븐은 예전부터 찰스에게 심각한 잔소리를 해대곤 했었다.) 에릭의 집 바닥은 꽤 지저분한 편에 속했고 덕분에 생각보다는 힘들었지만, 어쨌건 작업에 착수한지 두어시간 만에 찰스는 목적한 바를 대강은 이룰 수 있었다. 적어도 에릭의 집 바닥은 이제 아주 깨끗하게 소제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 노력은 헛되지 않아, 그 와중에 찰스는 몇가지 심상찮은 것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일단 그는 에릭의 마음 속에 떠올랐던 그 여성을 발견했다. 그녀가 담긴 작은 초상화는 구석의 작은 테이블 위에 얹혀 있었다. 정확히는 바닥을 바라보도록 뒤집혀 있었는데, 들어올리는 순간 바닥에 깨끗하게 빈 자국이 날 정도인 것으로 보아 아주 오랫동안 손을 대지 않은 모양이었다. 초상화 뿐이 아니었다. 조그마한 원탁은 에릭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여성적인 물건으로 가득했지만, 전부 지독하게 두터운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던 것이다. 초상화 속의 여성은 어제 에릭의 기억을 통해 본 여인보다는 훨씬 젊었지만, 찰스는 그 콧대와 눈썹을 알아볼 수 있었다. 여인이 걸친 하얀 머릿수건과 갈색 드레스는 수수했지만 깔끔했고, 지금까지 그가 봐 온 나이슬라흐 사람들의 옷차림을 생각해 볼 때 나름 가장 깔끔한 나들이 옷을 차려 입은 듯 했다. 이런 시골 마을의 아가씨가 조그마한 크기라 해도 정식 초상화를 주문할 만한 일이라면, 아마도 결혼식 정도일 것이다. 아마도 부부가 한 쌍으로 맞추어, 한 쪽은 남자가 가지고 있거나 했을 것이다. 어째서인가 남편의 것은 없었지만 말이다.
그 외에도 묘한 것들을 두어가지 발견할 수 있었다. 하나는 작은 은반지였다. 반지는 마루와 마루 틈바구니에 빠져 있었고, 찰스는 그걸 빼내 보려다 아주 작은 나무 조각이 손가락에 박히는 부상을 입어야 했다. 얼른 가시를 뽑아내고 손가락을 입에 넣어 깨끗이 했지만 꽤 아팠다. 아픔을 참고 들여다 본 반지는 꽤 작고 가늘어서 아마도 여성용인 것 같았다. 세월이 흐르며 지나치게 녹이 슬어 완전히 회색이 되어 버린 반지의 안쪽에는 아마 글자가 새겨져 있었던 것 같았지만, 녹에 흐려진 글자 중에서 알아볼 수 있을 만한 것은 성에 해당하는 부분에 새겨져 있는 '렌셔' 뿐이었다.
다른 하나는 좀더 기묘한 것이었다. 에릭이 침대로 사용하고 있는 듯한 짚자리 바로 옆의 테이블에 5마르크 짜리 은화가 하나 놓여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은화 그 자체로는 별로 특이할 것은 없었으나, 이런 시골에 흔한 돈이 아니라는 점이 신기했다. 무엇보다도 이 정도의 은화라면 보통 사람들은 금고에 넣어두거나 적어도 이렇게 남들 눈에 쉽게 뜨일 곳에 둘 것 같지 않다는 점이 기묘했던 것이다. 은화 주위에는 다른 동전들도 전혀 없었다. 오로지 이 은화 한 닢만이 테이블 위에서 반짝거리고 있었다. 거의 틀림없이, 어떤 사연이 있는 물건이리라.
잘 닦은 것처럼, 혹은 끊임없이 만지작거리기라도 했던 것처럼 반짝이는 은화를 들여다 보다 어쩐지 불안한 기분이 된 찰스는 테이블 위에 은화를 두고 몸을 일으켰다. 어쨌건 청소는 다 끝났고, 이제 들통과 솔을 놓아두고 뻐근한 으깨를 주무르며 느긋하게 에릭을 기다리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돌아선 순간 깜짝 놀란 찰스는 거의 소리 지를 뻔 했다. 어떤 인기척도 없었건만 문가에 에릭이 서 있었던 것이다. 어두운 청회색 눈동자가 이 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엄밀히 말해 찰스가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전혀 없었다. 분명 깨끗이 청소를 했을 뿐이고 은화는 잠깐 들여다 봤을 뿐 곱게 내려놓고 돌아선 뒤인데도, 굉장히 큰 잘못이라도 한 듯한 기분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찰스는 스스로에게 반복적으로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음'을 주지시키고 나서야 간신히 에릭을 향해 입을 뗄 수 있었다.
"저..."
"왜 안 나갔지."
얼음처럼 차갑게 잘라 끊는 말에, 찰스는 잠시 답을 못 하고 주저했다. 평소 화술이 부족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이 쪽을 노려보는 에릭의 눈앞에서는 단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문득 바로 앞에 놓여 있는 들통의 존재를 깨달았고, 구정물이 가득 담긴 들통과 솔을 치워야 한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물을 버리기 위해 들고 나가는데, 아마도 그제서야 찰스가 뭘 하고 있었는지 깨달은 듯한 에릭이 들통을 빼앗아 든다.
"저,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꺼져."
부당한 대접이다. 원래의 찰스라면 이럴 때 절대 가만 있을 리 없다. 하지만 지금만은 그럴 수가 없었다. 에릭의 온 몸에서 피어오르고 있는 강렬한 울분 때문이었다. 감지하는 것만으로도 이 쪽까지 먹먹해 질 것 같은 강렬한 분노와 울분이 그의 온 몸에서 끓어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찰스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차라리 그랬다면 무언가 말을 해 볼 여지가 있었으리라. 에릭의 감정은 그보다 더 먼 과거의 일, 아마도 에릭이 알고 있을 뭔가를 향한 것이었다. 어째서 그가 그러한 반응을 보이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찰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외투를 두르고 가지고 왔던 것들을 챙기고는 문 밖으로 나섰다.
3.
숲길을 걷는 내내 울적한 마음이 가시질 않았다. 지난 밤부터 지금까지, 알게 된 것도 있었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수수께끼가 생겨난 때문이다. 게다가 그것이, 한 남자에게 저리도 강렬한 울분을 - 아마도 그 원인이 되었을 상처를 불러왔을 어떤 사건과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하니 발걸음은 더욱 무거워졌다. 과연 그 일에 대해 알아낼 수 있을까? 그 일에 대해 알려줄 마을 사람이 있을까?
마침내 마을 울타리가 보이고, 어제 문을 열어주지 않던 야속한 여관 정문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는 걸려있지 않은 문을 열고 들어가자 훈기와 함께 요리 냄새가 훅 끼쳐 온다. 뭐라고 말하기도 전, 카운터 뒤에 서 있던 여관 주인이 눈을 휘둥그렇게 뛰고 이 쪽으로 달려왔다.
[오, 선생님! 살아계셔서 다행입니다!]
그답잖게 기뻐서 뛸듯 반가워하는 속내에는 아마도 죄책감이 약간이나마 자리하고 있으리라. 이렇게 반가워 할 거였으면 문 두드릴 때 좀 열어주었으면 좋지 않았겠는가 하는 생각이 안 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건 슬쩍 감지해 본 여관 주인의 마음은 정말 기쁨과 반가움, 안도감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래서 찰스는 한 쪽 눈썹을 슬쩍 치켜올렸을 뿐 별말 없이 뜨거운 커피 한 잔을 주문했다.
여관방의 따스한 난로가에 앉아 입이 델 정도로 뜨거운 커피를 마시다 보니 어느새 바깥의 냉기가 스르르 풀려 나간다. 무슨 일인가 해서 쳐다보는 손님들에게 어제 실종됐던 손님이 무사히 돌아왔노라고 떠벌이는 여관 주인을 한참동안 쳐다보던 찰스의 뇌리에, 어쩌면 이 사람이라면 에릭에 대해 알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순간 여관 주인의 얼굴이 멈칫하니 굳었다. 그 의외의 반응에 어리둥절해 하는 찰스 앞에서, 약간 마뜩찮은 얼굴이 된 여관 주인이 내키지 않는 다는 듯 물어 온다.
[그 놈을 보셨나요?]
그건 마치 꺼려지는 자들, 마을에서 추방당한 자들을 두고 얘기하는 것 같은 그런 말투였다. 마치 찰스에게 아주 재수없는 일이 생겼다는 듯, 액땜이라도 해야겠다는 듯한 표정과 감정이었던 것이다. 찰스는 문득 어제 에릭의 기억에서 읽어낸 군중 중에 이 사람도 있었을지가 궁금해졌다. 그를 둘러싸고 저주받았다고 외치던 사람들 말이다.
[그 녀석에 대해서는 많은 말을 하고 싶지 않아요.]
여관 주인은 고개를 절레 절레 저으며 말했다. 그러나 찰스는 물러설 마음이 없었다. 이런 폐쇄적인 좁은 시골 마을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 돌아다니는 모든 소문을 알 수밖에 없는 사람이 바로 여관 주인이다. 또한 외지인들을 자주 만나기에 손님들의 환심을 늘 사야 하는 입장에서 믿음직한 정보처가 되어 주는 이들이 바로 이러한 여관 주인임을 그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마음에 품고 있던 불편함을 애써 뿌리치며, 찰스는 자신이 만들 수 있는 제일 붙임성 있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좋아요, 제가 와인 한 잔 사죠. 얘기 좀 해 주시겠어요?]
[이런, 손님. 낮부터 술이라니요...그건 좀]
[제일 좋은 것으로 부탁해요.]
어차피 이런 시골에 찰스의 주머니를 거덜낼 법한 대단한 와인은 없으리라고 자신할 수 있었지만, 여관 주인으로서는 제법 남겨먹기 좋은 기회이니 분명 넘어오리라 생각했다.
찰스는 속으로 지갑 두께를 잠시 생각해 보았지만, 지금까지 잘 아껴 썼으미 이 정도 돈을 좀 쓴다고 해서 큰 이상이 생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에릭의 사연에 대해 알 수 있다면 별로 큰 돈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관 주인은 신이 나서 주방으로 달려갔고, 곧 찰스의 기준에서도 나쁘지 않은 와인과 먹음직스러운 갈비 요리가 등장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여관 주인의 얘기가 시작되었다.
사실 여관 주인은 매우 길고 또 장황한 여러 이야기들을 늘어 놓았지만, 마음 속으로 요약해 보니 약간 싱거울 정도로 간단한 내용이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원래 이 마을에 괴물의 전설이 있던 것은 사실이라 했다. 여관주인이 어린아이였을 당시 마을의 제일 나이든 노파마저도 '소녀 시절'의 전설을 기억하고 있다고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15년 전 까지만 해도 마을 사람들은, 전설은 어디까지나 '전설'인 것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은 검은 숲에 창궐하는 늑대 떼 때문에 그런 전설이 생겼다고 믿었고, 그래서 그저 전통에 따르는 마음으로 서로 순번을 돌아가며 살찐 염소나 양을 골라 겨울 보름 밤 마을 어귀에 묶어두곤 했다. 말하자면 괴물에 대한 '제물'이었다. 그러한 '제물'들은 꼬박 꼬박 사라졌지만, 사람들은 늑대 떼들이 물어간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15년 전 모든 것이 바뀌었다. 금기를 어긴 여인이 괴물에게 희생당한 것이다. 여관 주인은 이 말을 하며 다분히 공포 어린 기색으로 침을 삼키고 성호를 그었으며, 찰스는 드디어 에릭에 연관된 얘기가 나오리라는 것을 깨닫고 이야기에 좀더 집중했다. 희생당한 여인은 지주집 하녀였다. 홀로 아들을 키우던 과부로, 얌전한 행실로 마을에서 별 문제 없이 살아가던 이였다. 그러던 그녀가 그 차가운 밤에 왜 거기 있었는지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대기를 찢었고, 처음 듣는 소리에 놀라 뛰쳐나온 사람들은 갈기 갈기 찢긴 여자의 시체와 - 이 점은 아무래도 시골 사람들 특유의 과장 같았다. 적어도 찰스가 직접 보았던 그 광경을 생각하면 말이다 - 그 옆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울부짖는 아이를 보게 되었다. 그것은 금기였다. 제물이 바쳐지는 날에는 그 누구도 밖에 나가선 안 되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훌쩍거리는 아들의 입에서 많은 말을 들어내진 못했다. 아이는 반쯤 넋이 나간 채 '괴물은 사람이었다'는 말만 반복했다고 했다. 바로 여기서 여관 주인은 말을 멈추었다. 그 기묘한 표정에서 심상찮은 기색을 읽은 찰스가 얼른 그 마음을 읽어 보려 했지만, 이미 여관 주인의 마음은 온전히 닫혀 있었다. 스스로의 기억에 자물쇠를 걸어 버린 것이다. 아마도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 잊고 싶었던 일들이라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이리라. 찰스는 아쉬움에 조용히 이를 물었지만, 여관 주인은 그런 것 따위 알아채지 못한 채 그대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마을 사람들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괴물의 정체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금기가 깨졌다는 사실이 더욱 중요했다. 바로 다음달, 마을 사람들이 묶어둔 제물은 거부당했다. 대신 '사람'이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겨울 내내, 보름 전후로 바깥에 얼씬거리던 사람들은 모두 남김없이 죽었다. 3년쯤 지나고서야 더이상 마을에 피비린내가 나지 않았는데, 그것은 사람들이 '절대로' 바깥에 나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서, 그간 마을에서 그 전설을 그저 '전설'로만 생각하던 사람들은 그 생각을 바꾸었거나, 혹은 괴물에게 죽임당했던 것이었다.
죽은 여인의 아들은 사실상 추방당했다. 관대하기로 소문난 이 곳 지주가 돌봐주겠다고 나섰지만 어째서인가 소년은도망쳐 버렸고, 마을 사람들은 곧 그 일을 잊었다. 적어도 10년 후, 낡은 군복을 걸치고 총을 든 험한 인상의 청년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행색을 보면 군대에 있었다는 것은 알 수 있었지만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돌아온 에릭은 마을 사람들의 차가운 눈길 따위에는 신경끄지 않고 그간 비어 있던 집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숲의 동물들을 사냥하며 '알아서' 지내기 시작했다. 사냥꾼으로서 에릭은 의외로 솜씨가 좋았고, 처음엔 영 마뜩치 않아 하던 마을 사람들도 어떻게든 그럭저럭 이 불청객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래봐야 물건을 사고 팔아주는 정도가 고작이었지만.
여관주인은 고개를 저으며 얘기를 끝냈다. 아니, 그러기 전에 한 마디를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대체 그 녀석이 무슨 생각으로 손님을 도왔는지는 모르겠지만,별로 질이 좋은 녀석은 아니니 조십하십쇼."
찰스는 고개를 대강 주억거리며 감사의 말을 전했다. 하지만 너무나 당연히도 그럴 생각 따위는 없었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오히려 그의 뇌리에 떠올랐던 것은, 에릭이 얼마나 분하고 억울했을까 하는 생각 뿐이었다. 어젯밤 그의 반응, 그 차가운 대응과 격렬한 울분이 이해가 갔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가 어째서 이 마을에 돌아왔을까? 능히 혼자서 제 한몸 건사할 수 있을 법한 그가? 식사를 마치고 깊이 생각에 잠겨 있던 찰스는 잠시 밖을 쳐다보았다. 해가 저물려면 아직 한참 남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 곧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몸을 지킬 권총과 나이프 한 개, 돈과 몇가지 간단한 도구들, 그렇게 준비하고 작은 배낭에 옮겨담은 후 길을 나서며, 여관 주인에게는 앞으로 한 이삼일 자리를 비울 거라고 말했다. 문을 나서며, 그는 호주머니 속에 손을 넣었다. 작은 은반지, 에릭의 방에 떨어져 있던 그것이 손에 단단히 잡혔다. 은화는 돌려놓았지만 이것만은 미처 전해주지 못한 채였고, 덕분에 에릭을 또 찾아갈 이유가, 정확히는 핑계가 완벽하게 성립되었다.
숲길을 걸어가며 그는 결심을 굳혔다. 어떻게든 에릭과 대화를 해야 한다. '괴물'과 직접 대면하고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고 싶지 않았을 이 마을에 굳이 돌아온 자.
4.
"계십니까?"
에릭의 오두막은 비어 있었지만 찰스는 그 곳을 떠나지 않고 서서 기다렸다. 늦어도 날이 저물면 아마 틀림없이 집 주인이 나타나리라 믿으며. 그리고 그의 짐작대로 에릭은 거의 저녁때가 되어서야 집에 돌아왔다. 어깨에 뭔가 끈을 걸머지고 있었는데, 끌려오는 것의 정체를 확인한 찰스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슴, 그것도 다 자란 붉은 사슴이었다. 아무리 두텁게 눈이 깔려 있다고 해도 남자 셋이 달려들어서 겨우 옮길 법한 것을 에릭은 혼자서 능숙하게 끌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멋진 사냥감이군요."
인사치레를 하는 동안, 에릭의 시선은 찰스에게 고정되어 떠날 줄을 몰랐다. 여전히 차가운 청회색 눈동자 안에는 어이없어하는 감정과 함께 짜증, 그리고 약간의 분노가 섞여 있었지만 찰스는 태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마쳤다. 충분히 예상 내의 반응이었으므로.
에릭은 그런 찰스를 완전히 무시하고 사슴을 오두막 옆의 작은 창고처럼 보이는 건물로 끌고 갔다. 창고 문을 열자 안에서 피냄새가 끼쳐 왔고, 건물 안에 매달린, 가죽이 벗겨진 사냥감들이 눈에 들어왔다. 에릭이 창고 대들보에 갈고리 달린 밧줄을 걸고 사슴을 달아올리는 동안 찰스는 고개를 돌려 그가 왔던 길 쪽을 바라보았다. 길게 남아 있는 핏자국이 묘한 느낌을 주었다.
"여긴 왜 왔지?"
돌아보니 에릭이 서 있었다. 창고 문이 닫힌 걸 보면 사슴을 달아매는 작업은 다 끝난 듯 싶었다.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남자에게, 찰스는 할 수 있는 한 상냥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드디어 말을 걸어주는군요! 기쁩니다." 그리고 그 말을 듣고 일그러지는 에릭의 얼굴은 아랑곳하지 않고 재빨리 그 뒤에 말을 더 이었다. "사실은 돌려드릴 게 있어서 왔습니다. 그 김에 얘기도 나눌까 하고요."
에릭은 한동안 그런 찰스를 빤히 노려보고 서 있었다. 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찰스는 아마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지독한 반감, 거의 혐오감에 가까운 감정이었지만 그래도 살의까지는 느껴지지 않았기에 그 자리에 여유를 갖고 버티고 서 있을 수 있었다. 그는 그 시선을 온 몸으로 받아내며 끼고 있던 장갑을 뺀 다음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어 거기 잘 간직해 두었던 은반지를 꺼냈다. 그 반지가 겨울 공기 속에 나타난 순간, 창고에서 문까지는 꽤 되는 거리였는데도 에릭의 표정이 대번에 변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날 청소하다가 이걸 주웠어요. 마룻바닥 사이에 끼어 있었죠. 시커멓길래 잘 닦아 왔습니다."
사실 그대로였다. 나오기 전 꽤 공들여서 닦았지만 긴 세월의 때를 다 닦아내는 것은 무리였던 것이다. 아직도 군데군데 검은 얼룩이 가시지 않은 낡은 반지를 바라보던 에릭은 갑자기 찰스 쪽으로 다가오며 짧게 말했다.
"내놔."
찰스는 남자의 손이 자신의 손에 닿기 직전 주먹을 꽉 쥐었다.
"제가 그랬죠? 얘기도 좀 나눌 겸 왔다고요."
에릭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이번에야말로, 지금껏 찰스가 느꼈던 그 어느 감정보다도 살의에 가까운 것이 에릭의 온 몸에서 타올랐다. 찰스는 그런 그를 달래듯 한 손을 내밀며 차분하게 진정시키듯 말했다.
"절 당신이 이제껏 보아 왔던 '구경꾼'들과 같다고는 생각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어요."
"무슨 헛소리야."
찰스는 주먹쥔 손을 남자 쪽으로 천천히 내밀며 말했다.
"믿어줬으면 좋겠는데, 전 살짝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요."
남자는 어이없다는 듯 찰스를 바라봤지만, 익히 예상한 반응이었으므로 찰스는 아무 동요 없이 말을 계속했다.
"집안 대대로 간혹 그런 사람이 나타났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말인데, 전 마을 사람들이 당신에게 씌운 말도 안 되는 누명에 동참할 생각이 없습니다."
에릭이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찰스 쪽을 바라보았다. 찰스는 총력을 다해 에릭의 마음을 읽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고, 그가 찰스의 말에 대해 미심쩍어 하면서도 아주 약간, 약간이나마 '이 자의 말을 들어볼까'라고 갈등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아주 약간 입가를 끌어올렸다. 그리고 손가락을 천천히 펴며 말했다.
"이것, 어머니의 반지죠?" 순간적으로 느껴진 에릭의 경악이 생생해, 그는 그것을 어루만지듯 부드럽게 얘기했다. 반지에 대한 그의 생각을 읽어내는 것은 지금 이 순간 아주 쉬운 일이었다. 자신의 이야기에 완전히 빠져든 남자의 정신은 활짝 열린 책과 다를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
당신은 그걸 소중해 보관해 두고 있었지만 어느날 없어졌어요. 마룻바닥 사이에 끼어 있었지만 사실 찾아볼 생각도 못 했죠." "그만."
"왜냐면 당신은 그 반지가 사라진 걸..."
"그만해!"
"어머니가 당신을 떠났다는 뜻으로 받아들였어요. 맞죠?"
소리지르던 에릭은 경악한 눈으로 찰스를 응시했고, 그는 이제 완전히 드러난 작은 은빛 반지를 에릭 앞에 내밀며 말을 맺었다.
"가져가요. 어머니는 당신을 떠났던 적이 없어요."
에릭이 멍하니 반지를 바라본 시간은 짧았지만, 그동안 그의 마음에는 비할 데 없이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여전히 그의 마음 많은 곳은 안개가 낀 듯 희미했고 그것은 이 남자가 찰스에게 감추고 싶은 것이 많다는 뜻이었지만, 적어도 이제껏 강렬하게 몰아치던 찰스를 향한 증오심과 혐오감은 실로 눈녹듯이 사라져 가고 있었다. 잠시 반지를 들여다 보던 남자는 손을 들어서 반지를 집어들고 천천히 살펴 보았다. 반지를 잡는 순간 어째서인가 짧은 고통의 표정이 스치고 지나갔지만, 살펴보는 눈은 진지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표정은 점차 풀려갔다. 곧이어 조금 망설이는 표정이 되었던 에릭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기꾼은 아닌 것 같군. 들어와."
찰스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남자의 뒤를 따라 집 안에 들어갔다. 이제서야 '괴물'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이 피어올랐다.
문 안으로 들어서자 익숙한 훈기가 몰려왔다. 벽난로 가에 자리를 잡고 앉은 찰스는 집안에 둔 들통의 물로 몸과 얼굴에 묻은 피를 적당히 씻어낸 에릭이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난롯가로 다가오는 광경을 침착하게 지켜보았다. 전에는 경황이 없어 제대로 보질 못했던 에릭의 얼굴은 의외로 단정해서,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수염과 흩어진 머리만 정돈한다면 꽤 괜찮은 신사처럼 보일 듯 싶었다. 물론, 신사처럼 차려입는다는 것도 전제조건에 넣어야겠지만.
"그래서, 뭘 듣고 싶은 건지 말해봐."
찰스는 잠시 입술을 핥았다. 긴장할 때면 튀어나오는 버릇이었다.
"괴물에 대해 얘기해 주십시오."
"왜?"
"알고 싶으니까요."
"알게 되면 어떻게 할 건지 말해 봐."
찰스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얘기했다.
"전 초자연적인 괴물 자체는 믿지 않습니다."
남자가 코웃음을 쳤지만, 그는 신경쓰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하지만 이 곳에서 어쩌면 처음으로 그런 것을 접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네요. 게다가 사람이 죽었고 말이죠."
"그 '괴물'이 뭔지는 알고 말하나?"
"물론 모릅니다. 알게 되면, 그래요. 어쩌면 당신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르죠." "도움을 준다. 네가?"
남자의 말에는 비웃음이 가득 담겨 있었지만 찰스는 오히려 지금이 기회임을 깨달았다. 이 배타적인 태도, 자신에 대한 불신을 이제부터 차근 차근 물리쳐야만 했다.
"이 곳에 돌아온 이유는 아마도 복수가 아닌가요?"
에릭은 숨을 멈췄다. 청회색 눈이 단번에 상대를 노려보았지만, 찰스는 절대 지지않고 그 시선을 되돌려주며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을 주어 말을 이어 갔다.
"한몸 건사하는데 아무 문제 없는 당신이 절대 오고 싶지 않았을 이 마을에 돌아올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 뿐이더군요."
"너..."
"괴물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당신을 돕고 싶어요."
처음 이 마을에 오게 된 이유라면 분명 탐구심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찰스는 폭력과는 분명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다. 하지만 그것은 이 마을에 와서 에릭을 만나기 전의 일이었다. '괴물'이 있었고, 한 여인이 죽었고, 그녀의 아들은 복수를 위해 돌아왔는데 마을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만 할 뿐 아무도 나서지 않는다. 그렇다면 결국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차라리 에릭에게 와서 이야기를 듣고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편이 나을 듯 싶었다.
찰스는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듯 이 쪽을 바라보는 에릭에게 다시 한번 명확하게 말해주었다.
"돕고 싶습니다."
에릭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지만, 곧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나마 찰스의 말 때문인지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누그러진 태도였지만 그래도 그것은 분명 거부의 몸짓이었다.
"당신은 도울 수 없을 거요."
"이봐요."
"도울 수 없어. 그건 사람이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절망감이 깊이 배인 목소리로 말한 에릭은 잠시 고개를 떨구고 있다가 찰스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내가 겪은 일에 대해서는 얘기해 주지. 이 이야기를 다 듣거든 곧 마을을 떠나시오."
찰스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찰스는 이 이야기를 다 듣는다 해도 결코 떠나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조심스레 에릭의 마음에 정신을 집중하고 지금 귀로 들려오는 이야기와 함께 그 마음에 보여주는 것들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에릭이 열 다섯 살 되던 해의 일이라고 했다. 그 해 겨울은 유독 눈이 많이 왔고 늑대 또한 창궐했다. 에릭은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고, 모자뿐인 둘의 생활은 결코 윤택하지 않았지만 어머니가 지주 댁 하녀였던 덕에 그럭저럭 먹고 살 수는 있었다. 어머니는 에릭 또한 지주 댁 일꾼으로 들어가길 바라고 있었고, 아마도 그 겨울의 일만 없었다면 가능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운명의 날, 에릭은 그만 늦고 말았다. 물론 그도 마을의 전설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되도록 일찍 오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주의 개인적인 심부름을 하느라 늦어져 버렸던 것이다. 지주가 갑자기 에릭을 부른 것에 대해 어머니는 의아해 했지만, 앞으로 일꾼으로 발탁되려면 좋은 인상을 주어야 했고 어쩄건 그 부름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간단한 몇 가지 일을 끝냈을 뿐인데도 해는 금방 져 버렸고, 어둑해져 가는 길에 나선 어린 에릭은 어떻게든 '괴물'의 눈에 띄지 않기만을 빌며 열심히 집을 향해 발을 옮기고 있었다.
어두운 밤, 드디어 구석진 골목 앞에 닿아 안도의 한숨을 쉬며 그 앞으로 들어가려던 순간, 무언가가 나타났다. 어린 에릭의 눈에 거의 거인처럼 보였던 '무언가'가. 에릭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 찰스는 에릭의 뇌리에 떠오른 영상을 보고는 그만 숨을 삼켰다. 그것은 에릭의 말처럼 실로 압도적이고 무시무시한 그림자였던 것이다.
지상 어디에도 저런 생물은 없을 것이다. 온 몸은 거의 푸르스름하다 싶은 흰 털로 뒤덮였고, 일그러진 얼굴은 거의 확실하게 늑대의 형상을 취하고 있었다. 그 얼굴에 자리잡은 눈은 칠흑같은 밤의 어둠에도 지지 않고 녹색으로 빛났다.
어린 에릭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주저앉았고, 괴물은 하얗게 얼어붙어 있는 소년에게 다가와 천천히 음미라도 하듯 코를 들이대고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괴물이 천천히 가지런한 이빨을 드러내고, 드디어 경악과 경직에서 풀려난 소년이 간신히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 순간, 불타는 듯한 통증이 에릭의 어깨를 덮쳤다. 에릭의 의식은 급히 희미해졌지만, 그 와중에도 여자의 비명 소리만은 똑똑히 들려왔다. '에릭!' 바로 어머니였다.
거기서 에릭의 회상은 끝났고, 그는 혼란스러워하는 듯한 얼굴로 천천히 말을 늘어놓았다.
"괴물에 대해 많은 것을 기억하지는 못해. 놈이...어머니를 죽였다는 것만은 잘 알고 있지. 하지만 내가 알 수 없었던 건..."
그는 다시 한번 혼란스러운 표정이 되었다가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찰스는 그의 생각을 더 자세히 읽어보려 했지만 아지랑이처럼 희미한 안개만 일렁일 뿐이었다. 무언가를 깊이 감추고 있는 것이다.
"그랬군요."
찰스는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그 뒤는 이미 잘 알고 있다. 에릭의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마을 사람들은 에릭을 둘러싸고 저주하며 차가운 눈길로 마을에서 추방해 버렸던 것이다. 그가 입으로 말하는 것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그는 찰스가 마을에서 들어 알고 있던 사실 한 가지는 말하지 않았다. 에릭이 마을에서 떠난 뒤 군대에 들어갔지만 결국 옛 악몽에 질려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는 동안, 찰스는 잠시 망설이다 결국 그의 말을 끊고야 말았다.
"잠시만요." 말없이 이 쪽을 쳐다보는 남자에게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지주님이 당신을 돌봐주겠다고 했다는 얘기를 들었었는데요."
다음 순간 에릭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지금 찰스의 뇌리에 느껴진 감정들과 똑같은 것이었다. 증오, 격노, 그리고 살기. 그 모든 감정은 찰스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에릭은 이를 악물었고, 무언가 꾹 참아 왔던 것을 토해내듯 그에게 말을 내뱉었다.
"아직도 모르겠나? 그 놈이 바로 괴물이야. 클라우스 슈미트, 그 저주받을 지주놈이 바로 괴물이었다고!"
찰스는 순간 멍한 얼굴로 에릭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고개를 숙였다 다시 한번 에릭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의 마음은 분노와 증오로 가득 차 있었고, 거기 찰스가 절대 이 일을 믿어주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과 의혹 또한 단단히 자리잡고 있었다.
믿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었다. 이 곳 마을 사람들은 그들의 지주를 존경했고, 좋은 분이라고 칭송해 마지 않았던 것이다. 실제 이 마을도 구석진 곳에 있긴 했지만 찢어지게 가난하지는 않았다. 에릭이 본 '괴물'은 분명 진실이지만, 그 괴물이 정말로 이 마을의 지주인지는 전혀 다른 문제 아닌가. 하지만 지금 찰스의 눈 앞에서 이 이야기를 털어놓은 에릭의 얼굴엔 빠른 속도로 회의가 번지고 있었고, 그 얼굴을 본 찰스는 지금 자신이 해야 할 말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믿기는 어렵군요...하지만," 에릭의 눈이 찰스의 눈을 마주보았고, 찰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이 불안해 하는 남자에게 믿음을 주기 위해 노력하며 말을 이었다. "전 당신의 말이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에릭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찰스는 거기서 말을 끝낼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그렇다면 당신은 한 가지를 잘못 생각했네요."
"무슨 얘기지?"
찰스는 이 집에 들어온 뒤 처음으로 유쾌한 기분이 되었다. 에릭이 어리둥절해 하는 표정을 지었던 것이다.
"전 당신이 본 '괴물'에 대해서 알고 있어요."
"...뭐?"
"당신, 사냥꾼이라면 총 정도는 잘 다룰 자신이 있겠죠?"
에릭은 지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냐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찰스는 그에 덧붙여 가볍고 명쾌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원래는 뒷편과 함께 보여드리려고 했는데, 오늘 어쩌다 보니 뒷편이 늦어져서 새로 공개해 드립니다ㅠㅜ
원래 데몬 헌터 시리즈는 네코님의 "인큐버스 찰스" 리퀘로 시작되었습니다. 리퀘 감사합니다 ㅠㅜ 덕분에 즐거운 상상을 잔뜩 할 수 있었어요! >ㅁ< 요건 보내주신 그림 허락받고 올립니다요.
네코님꼐서 그려주신 인큐버스 찰스입니다. 뒤의 검은 그림자가 너무나 모에합니다(......) 전 사실 저런 정말 중세 유럽 동판화 풍의 악마 디자인을 좋아합니다. 네, 악마는 악마죠. 그런 가운데에도 찰스는 너무 예쁘네요...
에릭과 찰스. 침대로 들어가고 싶어하는 찰스와 거부하는 에릭입니다. 다음 편을 아예 이걸로 써 볼까 해요.(분위기는 너무 가벼워질지도?!) 제목하야 찰스의 침대권 쟁탈(......)
받고서 완전 비명을 지르며 기뻐했습니다. 에릭의 차림새가 제가 생각했던 '파스벤더 버전의 반 헬싱' 보다는 점잖습니다만 저것도 너무 잘 어울리고요. 멋지고요, 섹시하고요, 근데 대체 에릭에게 어울리지 않는 옷이 뭘까요. 삐에로 옷? 암튼 둘이 너무 귀여워서 보자마자 숨 넘어갔습니다 ;ㅂ;
인생행로 곳곳에서 넘치게 사연 많은 남자 에릭 매그너스 랜셔가 그럼에도 가슴 속 깊이 약 1밀리그램 정도 남겨둔, 세파에 찌들지 않은 소녀심이 마이애미 바닷속에서 속삭였었다. 어머 바로 이 남자야!
그리고 CIA 앞마당에서 오만 건방을 떨며 에브리띵을 외치는 남자를 앞에 두고도 속삭였었다.
아 놔 이 남자 맞다니까?
리쿠르팅을 빙자한 순회 데이트를 즐기며 링컨 할아버지 발치에 앉았을 때도 따발총마냥 속삭였었지. 시발 이 남자라니까!!
돈발라 신공을 온 덩치로 구사하는 듯한 그의 저택에서 트레이닝을 빙자한 허니문을 누리던 시절엔 속삭임을 넘어서 날마다 외쳐대곤 했다. 무조건 잡아. 아니면 물기라도 해. 이 남자 놓치면 니 인생에 볕들 날도 없어...!
심지어, 그 운명의 날 모래사장에 처박힌 그를 무릎에 올려놓았을 때조차 에릭 안의 작은 소녀심은 필사적으로 절규했었다.
야이 미친노마 굴러온 복덩이를 개발살내도 정도가 있지 당장 그 헬멧 벗어던지고 싹싹 빌어! 지금 자존심이 문제냐? 너 그 깡통이랑 같이 쫓겨난다고! 사내놈들이 애비 편 들어줄 거 같냐? 꿈 깨! 딸뇬이 널 환갑회갑까지 챙겨줄거 같냐? 시발 챙겨준다치자, 퍽도 폼나겠다? 죽으나사나 마누라 밖에 없는 거다 아오 왜 그걸 몰라아아아ㅏㅏㅏㅏㅏ!!!
....소녀심의 제법 걸진 말투는 알아서 필터링하자. 세계대공황 시기에 태어나 세계대전 시대에 소년기를 보내고 냉전시대에 청년기를 보내는 남자의 쥐뿔 1밀리그램 짜리 소녀심에게 뭘 더 바라겠는가.
창창대로 거침없이 청춘을 달려온, 키만 빼고 스펙 쥑이는 남자 찰스 프랜시스 자비에가 1밀리그램은 커녕 닥닥 긁고 긁어 0.001나노그램 정도 남겨놓은 가슴 속 소녀심이 마이애미 바닷속에서 속삭였었다.
우왕ㅋ굳ㅋ 심봤네여
....나노그램 단위도 모자라 발랑 까진 소녀심이다만 이해하자. 엄마아빠저는진짜황새가물어왔나염?...따위를 물어볼 나이에 카마수트라의 오의를 고찰하는 인간들 머릿속을 드나들던 찰스의 소녀심에게 대체 뭘 기대하는 건가.
홀홀단신 원쑤의 각을 뜨러 CIA를 나서는 남자의 손나 잘 빠진 뒷태를 보면서도 속삭였었다. 마른 장작이 잘 탄다지?
다음날 아침, 근사한 의상센스와 빛나는 미모를 자랑하며 둘만의 데이트를 제안하는 남자에겐 그냥 슬슬 녹아버렸었다. 남사스럽지만 이 남자가 내 남자 맞나봐염
러시아에서 본드 뺨치는 액션활극을 찍는 남자 꽁무니를 쫓아가면서는 거의 운명적으로 속삭였었지. 내님의 뒷수습 내가 아니면 누가 하리요 어쩐지 이 패턴이 늙어 꼬부라질 때까지 갈 것도 같지만 그런건 아무래도 상관없어ㅋ
심지어, 그 운명의 날 마빡을 뚫리고 소송도 걸어볼만한 DV의 작렬에, 거 되도 않게 버버벅거리며 사태 수습해보려는 아이원츄바이마이사이드 발언에조차 소녀심은 저항을 멈추지않고 절규했었다. 아 좋대잖아! 못 이긴 척 하고 받아줘!! 시발 니가 어디가서 또 저런 월척을 낚을거 같니? 잊을 수는 있을 거 같냐?? 벌써 네 번이나 잔 주제에!! 그때마다 손나 뿅가죽은게 누군데 참을 수 있을거 같냐아아아ㅏㅏㅏㅏ!!!
하지만 우리는 안다. 에릭의 일단 뻗대보는 외고집과 찰스의 꼰대본능은 밀리그램과 나노그램 단위의 소녀심 따위가 막기엔 너무나나나나나 그레이트하고 엑설런트하며 시발 똥같고 조가튼 그 무엇임을.
그래서 그들은 익히 아는대로 이혼을 감행하고 말았다. 이 뻘하고 막가는 팬월드에서조차도. 단, 서로에 대한 소녀심 어린 미련을 한 가득 매달고서 말이다. 이것이 원작 필름과 뭐가 다른가 묻는 태클은 사양하겠다.
....쓰는 놈이 제일 잘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