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치계로 진출한 찰스, 이상은 다르지만 그를 잠시 돕고 떠나려다 인생 틀어잡힌 에릭입니다.
- 찰스는 뮤턴트를 지지하는 정책을 펴고 있지만 자신이 돌연변이인 건 숨기고 있어요 :D
- 연작입니다. 이번 글에는 화이트폰님의 리퀘가 들어갔습니다.
"아름다워."
그것은 매우 흔치 않은 일이었다.
"뭐가?"
"자네 눈이."
사무실을 향해 천천히 이동하던 휠체어가 순간 멈췄다. 찰스는 웃으며 지금 이 순간 에릭의 얼굴을 꼭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돌아보려 했는데, 머리를 돌려볼 것도 없이 눈앞에 그 눈동자가 나타났다. 청회색 눈동자는 그러나 놀랍도록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꾹 다문 입에 약간 찌푸리기까지 한 미간을 보니 화가 났나 싶기까지 했다. 그런 얼굴을 하고서, 에릭 렌셔는 찰스 프란시스 자비에에게 아주 냉정한 어조로 물었다.
"무슨 소리야, 그거."
"자네 눈동자는 정말 미치도록 아름다워. 내가 말 안했던가?"
햇볕에 따라 푸르게도 보였다 회색으로도 보였다 하는 눈동자가 찰스의 진의라도 탐색하려는 듯 빤히 이 쪽을 바라본다. 그 시선을 부드럽게 받아내며, 찰스는 다시 나지막하게 말했다. 달콤하게, 더없이 상냥하게.
"세상에는 수많은 푸른 눈이 있지만 자네같은 눈은 흔치 않아."
하지만 듣는 사람의 얼굴은 그 말에 담긴 진의 따위 상관없다는 듯 냉랭하기만 하다.
"찰스, 갑자기 왜 이러는지 모르겠는데,"
"그냥 그걸 알려주고 싶었어. 자네는 정말 아름다워."
에릭의 얼굴이 냉랭을 넘어 차갑게 얼어붙었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굳었다. 하지만 찰스는 그런 에릭의 기분을 풀어주려 하기는 커녕 오히려 빙글빙글 웃으며 말을 잇고 있었다. 지금 에릭이 왜 이리 표정이 싸늘해졌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이 보면 에릭이 찰스의 말에 화를 내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의 감정을 손에 쥘 수 있을 듯 감지할 수 있는 찰스의 답은 달랐다.
"갑자기 왜 이래. 내가 혹시 뭐 잘못한 거라도 있어?"
"아냐 친구 전혀 그런 건 없어. 그냥 말해주고 싶었을 뿐이야."
저 차갑게 굳은 얼굴은 너무 갑작스러운 말에 당황한 속내를 숨기기 위한 에릭의 필사적인 가면이다.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이 냉정하게만 보이는 남자가 약간이라도 그 냉랭함을 무너뜨리는 광경을 볼 수 있겠지만, 적어도 남들 보는 눈이 있는 여기선 그러면 안된다는 것쯤 찰스도 잘 알고 있었다.
"일단 가자고."
에릭이 일어섰다. 다시 휠체어 뒤로 돌아가 천천히 민다. 찰스는 대화를 계속 잇기엔 시간이 없다는 사실이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가 의원으로서 바쁜 나날을 보낼수록 단 둘이 이야기할 시간은 줄어든다. 암살 시도 이후 찰스의 의정활동은 이전보다 더 주목받게 되었고, 그는 점차 뮤턴트 인권 운동의 상징이 되어가고 있었다. 뮤턴트를 위해 일하는 것은 원래 원하던 바였지만 상징이 되어 떠받들리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아이콘이란 원래 동유럽의 성화를 의미하는 거라고. 난 예수도 성모 마리아도 아닌데.' 찰스가 불만을 담아 투덜거리고 있노라면 에릭은 어깨를 으쓱이며 받아치곤 했다. '어쩔 수 없잖아. 아마 그리라면 그릴걸?' '에릭!' '어차피 뮤턴트 분리주의자들은 이미 자네의 사진과 인형을 불태우고 있어. 인간들은-' '에릭, 스스로가 인간이 아닌 것처럼 말하지 마.' 에릭은 뭔가 더 말하고 싶어하는 듯 했지만 찰스의 얼굴을 보더니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에릭."
"왜."
"자네 말야..."
"또 이상한 소리 하면 저 분수에 휠체어 던져 버린다."
"그럼 얘기하면 안되겠는걸"
사실 요즘 에릭의 신경은 제법 예민해져 있었다. 지속적으로 찰스에게 날아드는 분리주의자들의 협박은 요즘 점점 더 심해져, 몇몇 메시지들은 명백히 위험한 의도를 내포하고 있었다. 찰스를 배신자, 괴물들의 보호자, 우두머리로 지칭하는 그런 편지나 쪽지들은 경고나 욕설을 넘어서서 노골적인 협박을 하고 있었다. 찰스는 이전의 총격 사건을 직접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메시지들을 대부분 무시해 버렸지만, 에릭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그 편지들의 발신처를 추적하고 주위를 살폈다. 지금 찰스의 옆에는 에릭 한 명만이 있지만, 이 평화로워 보이는 의회 앞뜰에도 사실 몇명인가의 경호원이 조심스레 찰스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얘기해 봐."
"응?"
"안 던질 테니 얘기해 보라고."
찰스는 피식 웃었다.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어."
"......"
"에릭?"
"미안해 할 거 하나도 없어."
아아, 그래. 늘 그렇게 말하지 내 친구. 하지만 난 늘 자네에게 미안해. 나만의 여정이었어야 할 일에 자네를 끌어들인 게 잘못은 아니었을까 하고. 하지만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정색을 하며 스스로 원한 길이었노라 말하는 자네가, 고맙고도 무섭다는 걸 자네는 알까.
"자네도 마찬가지야."
"무슨 소리야?"
"내게 미안해 할 필요 없어."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이름을 부르기 위해 숨을 들이킨 순간, 에릭이 허리춤에서 무전기를 꺼냈다.
"건너편, 전방 덤불에 뭔가 반짝였다. 알아봐."
그렇게 말하면서 몇 걸음 앞으로 나선다. 아마도 그 반짝인 것과 찰스 사이를 몸으로 가로막으려는 것이다. 찰스는 반사적으로 머리에 손을 올렸다. 가벼운 두통이라도 느끼는 듯 했지만 실상은 에릭이 주목하는 덤불 속에 누가 있는지, 어쩐 일인지 알아보려는 그 나름의 방식이었다. 에릭의 짐작대로 그 곳에는 사람이 있었다. 그 인간의 의사를 읽기 위해 마음 속으로 파고들어간 순간, 총성이 울렸다.
"에릭!"
살의를 느끼자마자 저격범의 의식을 끊어버렸지만 아슬아슬한 차이로 한발 늦었다. 새파랗게 질린 찰스 앞에서 에릭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에릭, 괜찮아? 에릭!"
비명을 지르며 몸을 숙이고 도망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무릎을 꿇은 채 비틀거리던 에릭이 한 손을 아래로 내렸다가 다시 올린다. 찰스의 눈에는 뒷모습만 보이는 까닭에 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갑작스레 힘껏 몸을 일으킨 에릭이 돌아서서야 몸 상태를 볼 수 있었다.
"맙소사, 에릭!"
다가온다. 한 발로 뛰다시피 해서 다가온 에릭의 허벅지에는 엄청난 상처가 나 있다. 일반적인 총상과 다르다. 울컥 피가 솟아나오는 것 보고서야 찰스는 하얗게 질려 손을 내밀었다. 어서, 어서 지혈하지 않으면 저 출혈량으로는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한발 다가온 에릭은 그대로 무너져 찰스의 온 몸을 끌어안았다. 남자가 힘겹게 숨을 내쉰다. 단 한 순간 모든 것이 악몽으로 변해버렸는데, 에릭이 그의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막을 수가...찰스, 막을 수가 없어."
"무슨 소리야, 에릭!"
"이 총알, 막을 수가..."
중얼거리던 에릭이 양 팔로 간신히 의자를 짚고 몸을 떼는 순간,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다시 한번 총성이 울린 것이다. 찰스의 눈앞에서 에릭의 어깨가 붉게 물들었다. 남자의 어깨에 박힌 총알은 몸 안에서 파열되며 큰 상처를 남겼고, 뜨거운 피가 찰스의 얼굴과 몸에 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자를 붙들고 있던 에릭의 팔은 움직이지 않는다. 한쪽 팔은 불가항력으로 인해 아래로 늘어졌지만, 다른 팔은 힘껏 버티고 서서 이름 모를 저격자들의 시야에서 찰스를 가리고 있다.
팔을 뻗었다. 눈을 크게 뜬 채 피투성이가 된 에릭의 몸을 끌어안은 찰스는 그대로 의식을 확장했다. 순간 모든 것이 멎었다.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던 사람들도, 달려가던 사람들도, 손가락으로 에릭 쪽을 가리키며 어딘가 외치던 사람들도, 사방에서 이 쪽을 노리던 저격자들과 총성을 향해 달려가던 경호원들까지도 모두 멈춰섰다. 마치 영화 속의 정지된 장면같은 광경이었지만, 모든것이 멈춰 있는 화면과는 달리 다른 모든 것들은 움직이고 있었다. 분수에서 흩날리는 물방울, 사람들의 머리칼을 스치는 바람, 그리고 찰스의 옷에까지 뜨겁게 번져가는 에릭의 피.
"찰스..."
에릭의 속삭임 한 마디에 모든 것이 바뀌었다. 서 있던 사람들 모두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죽은 것은 아니었지만 모두 한꺼번에 의식을 잃은 것은 틀림없었다. 도저히 선별할 수가 없었다. 누가 도망치는 사람인지, 누가 저격자인지, 앞으로 누가 더 총을 쏠 것인지 알 수가 없어서 모두 기절시킨 것이다. 그 비현실적인 침묵 속에서 에릭이 속삭이는 소리만이 찰스의 귀에 멍멍하게 들려 왔다.
"다행...이야..."
"에릭?"
"이번에는..."
"말 하지 마. 소리내서 말하지 않아도 돼!"
생각을 읽는다. 에릭의 머리 속에 떠오르는 말은 단 하나. '이번에는 지켜냈어.' 라는 의사가 전해져 와, 찰스는 아무 말도 못하고 이를 악물었다. 아냐, 그래선 안돼 에릭. 나 때문에 자네가 다쳐선 안돼. 날 지키는 것보다 자네의 목숨이 몇 배로 중요해. 적어도 내게는 그래.
"에릭, 조금만 더 버텨. 곧 구급차가 올 거야!"
찰스가 손쓸 수 있었던 거리 밖에까지 도망친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이 신고를 했는지 경찰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함께 구급차가 다가왔다. 에릭은 뭔가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그 말은 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했고, 숙련된 구급요원들의 손에 들것에 옮겨진 남자는 그대로 흰 차 안에 실려들어가 사라졌다.
"의원님, 괜찮으십니까? 다친 데 없으세요?"
다급한 질문에 찰스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피가..."라고 말하는 구급요원에게 한 손을 들어보이며 답한다.
"전 괜찮습니다. 다친 데 없어요."
"하지만 의원님."
"아까 그 사람을 살려주세요. 저 대신 총에 맞았습니다."
'대신'이라는 말을 할 때 그제서야 눈에 왈칵 눈물이 고였다. 사방에 사람들이 쓰러져 있기 때문인지, 구급요원은 거기까지만 듣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났다. 찰스는 양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선택을 후회한 적은 없다. 그 선택 때문에 불특정 다수의 악의에 목숨을 내맡기고 살아야 한다는 것도 온전히 납득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그 선택을 내린 자신이, 그리고 그 선택 탓에 움직이지 못하게 된 두 다리가 저주스러웠다.
그 선택 때문에 그가 총에 맞았다. 그리고 망가진 다리로는 지금 그와 함께 있을 수조차 없다. 사경을 헤매고 있을 텐데 손조차 붙들어 줄 수 없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