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치계로 진출한 찰스, 이상은 다르지만 그를 잠시 돕고 떠나려다 인생 틀어잡힌 에릭입니다.
- 찰스는 뮤턴트를 지지하는 정책을 펴고 있지만 자신이 돌연변이인 건 숨기고 있어요 :D
- 연작입니다. 근데 이번 글에는 리퀘가 하나도 안 들어갔네요...
어떤 일은 절대 사라지지 않지만 어떤 일은 너무나 쉽게 지워진다. 보통은 사라지고 나서야 그 가치를 안다고 한다. 꼭 그렇지는 않다. 정작 사라지고 났을 때 별 것 아니라는 것을 깨닫지만, 그럼에도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는 것도 있는 것이다.
찰스는 일상 생활에 빠르게 복귀했다. "레이븐에게 엄청나게 혼났어" 라고 완전히 기가 죽은 얼굴로 어깨를 움츠리는 찰스에게 에릭은 거의 냉혹해 보이기까지 하는 얼굴로 딱 한 마디만 했다. "당연하지." 그에 대한 그의 의사는 확고해서, 그 말을 듣고 장난기를 발휘해 부러 미간을 찌푸리며 '아야!' 하는 동작을 취해보인 찰스에게 아예 덧붙이기까지 했다.
"나도 이놈의 팔만 아니었으면 한대 쳤을 거야."
물론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었기에 찰스는 크게 웃을 수 있었다.
총격은 에릭에게도 흔적을 남겼다. 허벅지와 어깨의 뼈를 고정하기 위해 철심을 박아야 했고 - 괜찮아, 나랑 어울리지 않아? - 몇개월간의 고된 재활기간을 거쳐야 했다. 찰스가 최고의 물리치료사들을 동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에릭의 어깨만은 완전히 고쳐낼 수 없었다. 그는 이제 오른팔을 어깨 위로 들어올릴 수 없게 되었고, 그 사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에릭이 퇴원하는 날, 찰스는 중요한 의결 때문에 도저히 찾아올 수 없었지만 대신 레이븐이 차를 몰고 달려와 축하해 주었다.
"나도 찰스가 못 온게 안타까우니까 그런 얼굴은 하지 말지 그래?"
"아니, 이건 그 문제가 아니야."
"뭐?"
에릭은 그걸 모르겠냐는 듯 레이븐의 얼굴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한동안 응시했다. 운전면허를 딴 지 6개월밖에 안 된 레이븐이 몰고 있는 새빨간 쐐기형 오픈카에는 민망하도록 선명한 녹색과 빨강색의 포인세티아 꽃다발이 가득했던 것이다. 금발의 늘씬한 여성이 그 한가운데 앉아 있는 것은 실로 장관이었지만, 어쨌건 에릭으로선 거기 앉는 것은 실로 무리였다.
"레이븐, 그 꽃다발 치워."
"어머, 마음에 안 들었어? 예쁘잖아. 축하의 마음을 담았는데."
화사하게 웃자 눈부신 금발이 흔들리며 빛을 발한다. 선명한 햇빛이 빨간 오픈카 주위에 흩어지는 듯한 환상이 보일 지경이었다. 에릭이 이를 악물고 말하는 것을 즐겁게 바라보는 아름다운 헤이즐빛 눈동자에는 장난기가 가득하다.
"거기 앉아가느니 차라리 걸어가겠어."
"너무해, 에릭! 사실 이건 찰스의 부탁이었는걸. 장미로 하고 싶다는 걸 간신히 말렸어. 정말이야, 물어보라고!"
십중팔구 찰스가 농담으로 말을 꺼냈다가 레이븐이 정말로 하려 드니 놀라서 말린 거겠지. 에릭은 가볍게 한숨짓고 자동차 뒤쪽을 바라보다가, 비어 있는 레이븐의 옆자리를 응시했다. 일반적인 딱딱한 자동차 좌석과는 달리 부드러운 쿠션이 갖춰져 있고, 아직도 어깨에 통증이 남아 이는 에릭을 위한 것인지 목베개가 얌전히 놓여 있다. 말로는 저래도 환자라는 점을 생각해 준 것일 테지.
"신사 양반, 빨리 결정해. 저기 봐, 잘 생긴 젊은 의사들이 이 쪽을 보는 것 같은데 내 마음이 흔들리고 있잖아."
에릭은 한숨을 푹 쉬고 차 안으로 들어갔다. 물론 차 문은 레이븐이 열어둔 터였고, 차에 탄 다음 돌아보니 정말 이 쪽을 향해 멍하니 입을 벌린 채 돌아보는 한 무리의 청년들이 눈에 들어왔다. '잘 생겼다'고 하기엔 눈 밑의 다크서클이 지나쳤지만.
"좋아, 잘 생각했어. 이제 돌아가자고."
에릭은 고개를 끄덕이며 좌석에 머리를 기댔다. 드디어 찰스 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간신히 마음이 놓였다. 깊이 숨을 내쉬고 눈을 감은 채, 신나게 재잘대는 레이븐의 수다를 들으면서 그제서야 깨달았다.
그에게 집은 이 곳 뿐이라는 걸.
그날 저녁, 웨스트체스터.
"뭐라고?" 에릭은 차가운 눈으로 찰스를 노려보며 반문했고, 찰스는 그 시선을 차마 받아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에 더 속이 뒤틀린 에릭은 다시 한번 강경하게 밀어붙였다.
"지금 그 말 다시 해 봐."
"에릭, 진정하고 들어. 이건,"
"진정하고 있어. 그러니까 다시 말해보시지."
목소리가 낮게 울려나온다. 빛깔도 온도도 얼음같은 눈동자가 찰스를 노려본다. 진정하고 있다지만 어디를 봐도 사실상 분노로 이글대고 있는 에릭 앞에서 잠시 침묵하다 숨을 들이킨 찰스가 말을 이었다.
"에릭, 이제 더이상 내 경호원 노릇을 할 필요는 없어."
"하."
"새로운 업체와 계약했어. 지금도 그들의 경호를 받고 있고. 더이상-"
"내가 필요 없다 이거지."
"에릭, 제발 이성적으로 얘기했으면 좋겠군."
에릭의 눈동자에 번개가 흘렀다. 그는 소파에서 몸을 벌떡 일으키고 곧장 찰스 바로 앞으로 다가왔다. 얼굴을 찰스의 얼굴 앞에 바짝 들이대고 눈을 바라본다. 타오르는 시선을 피하는 찰스에게 에릭이 으르렁댔다.
"찰스 프란시스 자비에, 내 눈을 봐. 내가 이성적이지 않은 걸로 보이나?"
"에릭!"
"회피하지 마. 그 놈들은 자네를 지켜낼 수 없어. 인간들은-"
"자네도 인간이야!"
"그들은 널 지킬 수 없어. 케네디 꼴이 그렇게도 나고 싶은 거야?"
"그럼 넌!" 찰스의 외침에 거실의 공기가 쩌렁 하고 울렸다. 좀처럼 언성을 높이지 않던 친구의 변모에 놀란 에릭에게 찰스는 단호하게 쏘아붙였다. "넌 어떻게 되고 싶은 건데! 나 때문에 죽고 싶어?"
"상관없어."
"내가 싫어!"
에릭의 눈이 커졌다. "나 때문에 네가 다치는 게 지긋지긋해!" 찰스는 피를 토하듯 외치며 이 쪽을 향해 뻗어오는 손을 거칠게 쳐냈고, 그러고 나서야 그것이 오른팔이었음을 깨닫고 동요했다. 아직 뻣뻣한 관절 때문에 통증을 느낀 에릭이 자기도 모르게 이맛살을 찌푸리고 짧게 신음하자 찰스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졌다.
"찰스-"
"맙소사, 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찰스의 얼굴은 어느새 들어올린 양손에 감싸여 보이지 않았지만 그 사이로 새어나오는 목소리에는 지독한 고통이 담겨 있었다.
"다 내 잘못이야-"
"왜 이래, 찰스!"
"에릭, 내가, 내 다리가 이렇게 된 건 내 잘못이야."
찰스의 팔을 붙들고 얼굴에서 손을 떼어내려던 에릭이 그대로 숨을 삼켰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찰스는 여전히 눈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말을 늘어놓았다. 목소리가 심하게 떨려 나왔고, 가끔 흐느낌 비슷한 것이 섞여 말이 흐트러졌지만 그래도 끊지 않고 계속 이야기한다.
"날 지키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건 그만둬. 내가...내가 내 행동의 결과로 불러들인 일이야, 에릭."
"찰스..."
"그리고 자네가 총에 맞은 것도 그 때문이고."
"아냐, 그건"
"지금은! 그냥 내 말을 좀 들어 줬으면 좋겠어."
천천히 손을 내린다. 붉게 달아오른 눈에는 물이 가득 고여 있었지만 결코 뺨 위로 떨어지진 않았다. 그런 얼굴을 하고, 벌개진 눈자위에 박힌 기묘할 정도로 새파란 눈이 에릭의 눈을 바라본다.
"자네가 부서져 가."
에릭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찰스의 눈만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 속으로는 지금 이 말을 막아야 한다는 외침이 울리고 있었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그가 막고 있는 걸까? 아니, 아닐 것이다.
"지금은 오른팔이야. 다음은 어디일 것 같아? 내가 다치고 죽는건 상관없어, 내 행동의 결과니까. 하지만 에릭, 자네가 다치는 건 난 견딜 수 없어. 이번에 알았어."
"그건,"
"내가 미치는 걸 보고 싶어?"
최강의 텔레파시 능력자가 미치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싶은 거야? 찰스가 속삭이듯 말했고, 에릭은 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깨닫고는 전율했다. 이미 찰스는 그를 지키기 위해 결코 하지 않던 짓을 해 버렸다. 자신이 의식을 잃고 있던 그 때, 아마도 미칠듯한 괴로움을 느꼈던 것이리라.
"에릭, 부탁해. 제발 내게서 떠나 줘. 경호만이라도 그만둬 줘, 제발."
그리고 이러한 결론을 낸 것이겠지. 에릭은 조용히 찰스 앞에 무릎을 굽혀 눈 높이를 맞췄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내밀어 지금은 무릎에 힘없이 놓인 양 손목을 붙들었다.
"에릭."
잠시 그 손목을 바라보다 찰스의 눈을 바라보았다. 의혹에 찬 듯 그의 이름을 부르는 창백한 얼굴에는 불안과 절망과 희망이 뒤죽박죽으로 섞여 있었다.
"찰스, 내 말 잘 들어."
에릭의 눈동자는 여전히 얼음같았다. 때로는 믿을 수 없을만큼 부드럽고 따스한 눈이기도 했지만, 지금만큼은 거의 냉혹하다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강한 의지과 냉정함이 그 안에 깃들어 있다.
"자네가 오해하고 있는 게 하나 있어."
붙들린 손목이 아파올 정도로 손에 힘을 가한다. 반사적으로 뿌리치기 위해 힘을 가했지만 독수리 발톱처럼 파고든 손가락들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당황한 찰스의 눈 바로 앞에 에릭의 얼굴이 다가왔다. 깜짝 놀라 눈을 감아버리는 순간, 에릭의 입술이 닫힌 눈꺼풀에 머물렀다. 그리고 바로 입술로 내려와 비집어 열고 혀가 들어온다. 키스를 마친 에릭은 찰스의 붉은 입술을 가볍게 혀로 쓸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난 널 위해 희생하고 있는 게 아냐."
"......"
"어떻게 생각하건 상관없어. 곁에 있을 거야."
찰스는 절망에 휩싸여 눈을 감았다.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지만, 동시에 그 안 깊은 곳에서는 에릭의 선언을, 그 속에 번득이는 집착과 애착을 기뻐하는 뭔가가 있었다. 소름끼치게 싫지만 동시에 부정할 수 없는 감정.
"에릭, 제발-"
"정 떼어내고 싶으면 내 뇌를 망가뜨려."
이번에는 찰스가 숨을 들이킬 차례였다. 에릭은 꽉 붙들고 있던 찰스의 두 손을 놓아준 후 이번에는 찰스의 얼굴을 붙들었다. 절대 고개를 돌릴 수 없도록 붙들고 바짝 얼굴을 들이댄 후 하나 하나 새기듯 말한다.
"그러기 전에는 꿈도 꾸지 마."
"......"
"자넨 내 거야."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찌르는 것 같은 아픔이 실제 심장을 직격했다. 그 통증에 미간을 찌푸리고 작게 신음을 내뱉자 다시 한 번 에릭의 입술이, 이번에는 목에 와닿는다. 아니, 입술이 닿은 것은 잠시일 뿐이고, 곧 그의 이가 살을 집어 노골적인 의도를 내보이며 세게 물었다. 고통에 겨운 목소리가 울리자 만족한 듯 자신이 남긴 자국을 핥고서 물러난다.
"에릭, 지금"
"사랑해."
찰스는 눈을 감았다. 지금껏 고여 있던 뜨거운 것이 간신히 뺨에 서느런 냉기를 남기며 흘러내렸다. 남자의 뜨거운 입술이 그 눈물에 닿아왔고, 그 감촉에 몸서리치며 찰스는 눈앞의 남자를 끌어안았다. 당해낼 수가 없다. 어떻게 해도 그를 당해낼 수가 없다. 할 수 있는 말은 그저 한 가지 뿐이었다.
"더 이상 다치지 마."
남자의 몸이 흔들렸다. 웃음 때문일 것이다. 그가 귀에 입술을 가져다 대고 조용히 속삭이는 말을 들으며, 찰스는 다시 한번 왈칵 눈물이 흘러나오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