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간만의 찰스에릭 단편입니다.
- 하지만 수위는 얼마 되지 않아염
- 이게 다 패시의 허리 때문입니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에릭 렌셔가 이렇게 말할 때, 보통 적들은 공포에 질리고 지인들은 물러선다. 지인의 수가 결코 많지는 않았지만 - 적어도 브라더 후드의 멤버들은 그렇다. 마치 으르렁거리는 동물처럼 가지런한 이가 드러나고, 눈은 서늘하게 가라앉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 단 한명만은 그러한 에릭의 시선을 온전히 무시할 수 있었다. 찰스 프란시스 자비에, 엑스맨의 지도자인 프로페서 엑스만이 그럴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다분히 이 두 강대한 돌연변이 지도자들의 과거사와 연관되어 있는 일이었고, '뭔가 사연이 있다'는 것만 알고 있는 젊은 돌연변이들은 이런 그들의 모습을 보고 꽤 큰 충격을 받곤 했다.
그건 말하자면 브라더후드로서는, 가끔은 엑스맨의 경우에도 일종의 '입문식' 같은 것이었다. "말하자면 우리 사이는 이혼한 엄마 아빠 사이를 오가는 자식 같은 거지." 굳이 머리를 손질하던 엠마가 차갑게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말하지 않아도, 이러한 둘의 모습에 충격을 받곤 하는 젊은이들은 한 반 정도의 확률로 즉각 짐을 싸서 - 서로의 진영으로 짐을 옮기곤 했다. 이것도 너무 흔한 일이다 보니 이젠 그저 일상다반사다.
그러면 대체 왜 서로 합치지 않는 거냐고 할 것이다. 우습게도 그에 대한 프로페서 X와 매그니토의 답은 확실했다. "같은 돌연변이니까 넘어가는 거지, 우리 이상은 정반대거든." 결코 함께할 수 없는 평행선이라면서 이렇게 가끔 체스를 두거나 술 한잔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이유는 뭐냐고 묻는다면? "공은 공, 사는 사." 아 네 그러십니까. 어쨌건 지금 이 사태는 에릭으로서도 별로 흔한 일은 아니었기에, 그는 눈을 차갑게 내리깔며 허리에 둘린 팔을 내려다보았다.
"그야 내 눈앞에 자네 허리가 보이잖아."
그렇다. 바야흐로 엑스맨의 수장 프로페서 X는 에릭 매그너스 렌셔, 희대의 테러리스트 매그니토의 허리에 슈트에 감싸인 팔을 두르고 있었다. 그것도 양팔로 끌어안고 검은 셔츠에 둘러싸인 납작하고도 단단한 배를 슬슬 쓰다듬고 있다. 공기 찬 늦가을이나 한겨울이라면 모를까, 한창 풀들은 물이 올랐고 꽃들은 피어오르고 햇살은 더럽도록 따듯한 '초여름같은' 봄이다. 오늘 긴 셔츠를 입고 온 걸 조금 후회하고 있던 참인데 - 하지만 붉은 헬멧에 반팔 셔츠는 에릭 생각에도 좀 아니긴 했다 - 슈트 입은 남자가 푹 끌어안고 문질거리고 있으니 솔직히 말해서 갑갑하고 더웠다.
"더워."
"어 나도. 근데 자네 체온이 서늘한걸."
"난 더운데."
"좀 참아."
대체 뭘 좀 먹고는 사는 겐가? 자네도 설마 요즘 진마냥 그 이상한 고형 과자를 식사랍시고 먹는 건 아니겠지? 모델 허리라고 해도 믿을 법한 등허리에 얼굴을 묻고 중얼대자 긴장한 허리 근육의 움직임이 그대로 뺨에 전해진다.
"잘 먹고 지내고 있는데."
"그렇겠지, 이 얄미운 친구 같으니."
요즘 찰스가 은근히 벨트 사이즈에 신경쓰고 있다는 걸을 알고 하는 말일 것이다. 이전에 웨스트 체스터에서 함께 지낼때부터, 에릭은 움직임에 방해될 정도로 포식하는 일이 없었고, 언제나 신체를 단련하기 위해 애썼다. 아마도 긴 유랑 생활이 가져다 준 생활습관일 것이다. 겉보기에는 말라 보일 정도로 얇은 몸은 사실 근육으로 꽉 차 있었고, 그래서 그 날밤 이 얇은 허리는...
"...지금 이상한 생각 하고 있지."
"그 헬멧에 새 기능이라도 추가됐나?"
에릭이 벌떡 일어나더니 앞으로 휙 걸어가 버렸다. 아니, 걸어가 버리려고 했다. 이럴 것을 예상한 찰스가 있는 힘을 다해 붙들고 늘어지지만 않았어도 그랬을 것이다. 찰스의 휠체어는 많은 개선을 통해 주인의 몸을 제법 편안하게 잘 붙들어 둘 수 있었고, 그래서 에릭은 찰스의 체중과 함께 꽤 무거운 휠체어를 끌고가는 형국이 되었다. 자연스럽게 생각보다 큰 저항에 힘을 주어 버티려던 것도 잠시, 교묘하게 힘을 준 찰스 때문에 그만 휠체어에 - 찰스의 무릎 위에 앉는 꼴이 되었다.
"뭐지?"
"그간 팔을 꽤 단련했지."
한쪽 팔은 여전히 허리에 감겨 있고, 다른 팔은 슬금슬금 위로 올라와 가슴에서 배를 쓸어내린다. 이쯤 되면 슬슬 다른 이들이 보면 곤란한 장면이 되어가고 있다는 자각에, 에릭은 다시 일어나려고 했지만 고개 숙인 찰스의 입술이 헬멧 옆 어깨에 닿는 바람에 움직임을 멈추고 말았다.
"정말로 놓길 바래?"
"......이..."
"정말?"
에릭이 이를 갈았다. 찰스가 목소리로만 웃었다. 헬멧이 두툼한 카펫 위로 떨어졌고, 두터운 나무문에 붙은 경첩이 스스로 움직여 철컥 하고 잠겼다.
한편, 응접실 소파에서는.
"이거 협상이 너무 오래 가는 거 아냐?"
"그게 협상이라면 말이지, 블루 다알링."
"엠마?"
"저기요, 두 분 아주머니, 여기는 엑스맨 본부거든요?"
"그래서, 진저 귀요미야?"
"진, 참아. 일단 교수님이 얘기를 마치고 나면 얘기하자."
미스틱과 수다를 떨며 손톱을 갈던 엠마가 피식 웃으며 고작 16세밖에 되지 않았지만 웨스트 체스터 여주인의 풍모를 갖춰가는 진과 옆에서 곤란해 하는 스캇을 쳐다보았다.
"그래도, 정말이지 난 휠체어 탄 남자가 그 쪽이리라곤 상상도 못했지 뭐야."
"엠마--!!!!"
브라더후드는 내분 일보직전, 엑스맨은 전쟁 일보직전이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웨스트체스터의 봄은 농밀하게 익어가고 있었다.
1. 찰스에릭입니다.
2. 짧은 장면 하나 분량이라 송구스럽습니다.
3. 시기는 대략 둘의 40대 초중반 정도입니다.
몸에 익숙한 편안한 휠체어에서 낯선 플라스틱 휠체어로 옮겨가는 과정은 언제나 생소하기만 했다. 천천히 복도를 짚어가며 이번 감옥에는 그가 얼마나 있을까 생각해 본다. 1년? 한 달? 그래, 적어도 몇달은 가둬둘 수 있겠지. 하지만 분명 또 부수고 나갈 것이다. 늘 그래 왔듯.
정부가 특별히 '그를 위해' 세운 이 시설 안에, 적어도 에릭 렌셔가 감지할 수 있는 범위 내의 금속은 전혀 없다. 물론 그가 금속으로 된 사물을 "볼 수 있다면" 얘기가 다르다. 그의 뇌가 시각적 정보를 통해 그것을 인식하는 순간 여기보다 먼 곳에 있는 물건에도 힘을 쓸 수 있겠지만, 구체적인 금속 사물이 보이지 않을 때 금속을 감지 할 수 있는 거리는 의외로 짧다는 것을, 찰스는 알고 있었다.
강화 유리와 플라스틱으로 된 문이 열리자 마찬가지로 투명한 의자에 앉아 있는 남자가 보인다. 여전히 마른 몸을 흰 죄수복이 감싸고 있다. 죄수번호가 새겨져 있지 않은 옷이었으나, 어차피 이 "시설"에 감금된 죄수는 그 한 명이니 상관 없는 일이다. 세월이 지났건만 여전히 강인하고 날카로운 청회색 시선이 찰스를 향한다. 입은 늘 그렇듯 굳게 다물렸고, 마른 손은 의자 팔걸이 위에 가볍게 얹혀 있었다.
대답이 없을 확률은 80% 이상. 그래도 가벼운 인사를 잊지 않고 미소를 지으며 작은 테이블 앞으로 다가간다.
"잘 지냈나. 우리 체스나 둘까?"
그가 거절할 수 있을 리 없다. 이 작은 방 안에서, 그가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는 제공된 옷가지와 간단한 세면도구, 그리고 몇 권의 책이 전부였으니까. 그런 물건 중 하나인 작은 테이블 위에는 체스판이 놓여 있고, 지난번 두던 판이 그대로 펼쳐져 있다. 심지어 찰스가 오기 전까지는 이 게임 하나 제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갇혀 있는 자의 처지다.
"자넨 나랑 체스 두러 여기 오나?"
"아마도. 행크는 잘 두긴 하지만 공격적이질 않아서 영 재미가 없거든."
어느새 찰스의 머리카락에는 흰 터럭이 약간이나마 섞여들었고, 에릭의 미간 주름은 더 깊어졌다. 노년까지는 아니더라도 농담으로라도 청년이라고 부를 수 없는 나이가 된 것이다. 이런 나이가 되면 젊을 적 열정은 많이 수그러드는 법이다. 얼마 전까지 엑스맨과 브라더후드의 우두머리로서 '적대'하던 입장이었지만, 이제는 이렇게 마주 보고 앉아 차분히 체스를 두는 것만 해도 그렇다.
어느새 둘은 침묵에 잠겨들었고, 말 움직이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하지만 사실 그들은 대화중이었다. 폰을 전진시키고 나이트를 무르고 비숍을 위협적인 위치에 다가붙이며 그들만의 대화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달랬다. 하지만 듣지 않았다. 정식으로 대들자 회피한다. 약점을 짐짓 드러내지만 속을 읽혀 무산당한다. 왕이 성 안으로 도피하고, 여왕이 옷자락을 끌며 다가가 기사의 심장을 찌른다. 점차 격렬해지는 전투에서 말들이 쓰러져 가고, 반면에는 검고 흰 두 명의 왕이 서로를 응시하며 참상을 바라본다. 마침내 성채가 무너지고, 죄수복에 감싸인 남자의 손이 루크를 치우기 위해 반면에 닿았을 때.
"찰스?"
찰스의 손이 에릭의 손목을 잡았다. 물러달라는 것인가 하여 바라보는 순간, 생소한 감각이 손목에 와 닿는다. 시선만 내리깔아 바라본 끝에, 남자의 엄지가락이 붙들린 손목 안쪽을 천천히 쓸고 있었다.
파란 핏줄이 선 손목, 굵지 않지만 견고한 뼈대와 거기 단단히 붙은 힘줄을 더없이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동안 둘 중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잠시 붙잡힌 손목을 내려다보던 에릭이 명백히 비난조의 표정을 담고 찰스와 시선을 맞춘 순간, 찰스가 천연덕스레 웃은 것이 고작이었다.
"자네, 카메라는 조심하지 그래."
그의 말대로 이 곳 사면은 감시 카메라로 촬영되고 있다. 허나 그걸 알면서도 이런 일을 한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찰스는 친절한 미소를 지은 채 거의 다정하기까지 한 어조로 말해주었다.
"괜찮아, 이 각도에서는 우리 손 같은 건 안 보이거든." 그리고 잠시 후 덧붙인다. "그리고 사실 저기 찍혀도 상관없어. 저 친구들 눈에 우린 그저 대화를 하고 있을 뿐이라네."
에릭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프로페서 X의 능력이 어떤 것인지 그보다 더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 카메라가 무엇을 비추건, 심지어 이 자리에서 둘이 키스를 하고 젊은 날 종종 그랬듯 바닥에 구르더라도 그들은 모를 것이라는 뜻이다. 카메라의 영상은 헛되이 흐를 뿐이고, 기록 테이프는 다음날 다른 기록이 덧씌워진채 잊혀지겠지.
그 말을 입증하기라도 하려는 듯, 남자가 붙든 손목을 천천히 위로 올린다. 그리고 마치 궁중의 레이디에게 사랑의 맹세를 하는 기사라도 되는 양, 방금 어루만진 창백한 피부 위에 입술을 내린다. 기억하고 있던 것보다 좀더 마른 느낌의 키스가 손목에 닿는 순간, 에릭은 조용히 이를 악물었고, 찰스는 그 사실을 알았다.
"자네를 가두는 건 정말 잔인한 일이지."
"...알면 관두던가."
손목 위로 따스하지만은 않은 숨결이 떨어졌다. 둘 다 알고 있다. 누가 정부에게 에릭 렌셔와 그 조직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는지, 누가 요원들을 도왔는지. 누가 그를 이렇게 효과적으로 가둘 감옥을 고안했는지, 그래서 누가 이 계획을 추진시켰을지. 아니, 애당초 에릭 렌셔를, 미합중국 역사상 가장 위험한 테러리스트를 이런 '안전한' 곳에 고스란히 살려두고 감금할 생각을 하게 만든 것이 누구일지.
"관두긴? 이렇게 가둬두기라도 하지 않으면 제대로 얘기를 할 수가 없지 않나."
"오, 찰스. 나와 얘기하기를 원할 줄은 몰랐는데, 진작 말하지 그랬나. 언제건 받아줬을 거야."
하지만 붙든 쪽도 붙잡힌 쪽도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어차피 둘 모두가 알고 있는 이야기이니 할 필요조차 없다.
"하지만 에릭, 자네는 그러면 늘 나를 납치하잖나. 난 사람들이 다치는 게 싫어."
언제나 서로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몰랐던 적은 없었으므로.
붙든 손을 얼굴로 가져간 찰스가 잠시 마른 손을 볼에 대고 그 서느런 체온을 음미한다. 하지만 거기까지. 입술조차 스치지 않고 순순히 내리는 몸짓에, 아무런 저항도 도발도 따라오지 않는다. 그저 풀려난 후, 마침내 자유로워진 손목으로 말을 치우며 한 마디 덧붙일 뿐.
"난 나갈 거라네. 이 곳의 가드들도 언젠가는 다칠 거야. 알잖아."
감금된 남자의 고집스런 말에, 더이상 기억만큼은 붉지 않은 입술이 조용히 호선을 그린다. 납득이나 이해보다는 포기나 체념에 가까운 미소였다. 그런 미소를 띤 채, 미간에 주름을 새기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욕심 많은 남자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래, 그건 내 죄지."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여왕이 쓰러지고, 주교가 왕에게 짓밟혔다. 성채에 포위된 병사들은 못박힌 듯 꼼짝도 하지 못했다. 기사의 칼날이 왕의 목을 노렸고, 꼼짝없이 갇힌 것으로 보이던 왕이 마지막 반격을 날렸다.
"체크메이트."
거의 그렇듯 에릭의 승리. 평소대로라면 이 깔끔한 선언에 반발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째서인가 오늘만은 달랐다.
"...물러 주면 안되겠나."
"찰스, 자네 기억에, 그런 말 들었다고 내가 물러준 적이 있었나?"
"없었지. 알겠네."
어느새 면회 시간이 다 되었다. 찰스는 속으로 혀를 차며 조용히 물러나왔다. 등 뒤의 그는 여기를 쳐다보고 있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금새 등을 돌리고 책이라도 펴고 있겠지. 복도를 건너나와 흘끗 뒤를 돌아볼 것도 없이 자신의 추측이 맞다는 것을 확인한 찰스는 원래의 휠체어로 갈아탄 다음 우울한 표정이 되어 밖으로 나갔다.
그와의 게임은 언제나 미완으로 해 두고 싶었다. 그 곳에 반면을 펴 놓고 기다리도록, 다음 수를 생각하며 조금이라도 더 자신을 기다려 주도록. 하지만 오늘의 그는 가차없었다. 단 한 수도 물러주지 않았고, 면회 시간이 끝나기 전 모든 승부를 끝내 버렸다. 마치 이제부터 아주 오래 동안 이런 게임을 할 일은 없을 거라는 듯이.
"...곧 바람이 불겠구나."
뒤에서 휠체어를 밀던 청년이 의아한 눈으로 찰스를 일별했다. 고개를 천천히 저은 찰스는 우리에 갇힌 야수가 곧 부수고 나올 것임을 직감하며 차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