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이 시원스레 대답한다. 그 머리에 얹힌 붉은 헬멧을 실로 원망어린 표정으로 바라보던 찰스는, 일부러 잘 들리게 기침을 해댄 후 할 수 있는 한 가장 강경하게 말했다.
"난 추워."
"이런."
"정말 춥다고, 감기 걸리겠어!"
사실은 드러나 있는 얼굴만 차가왔지만, 그래도 지금 여기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이런 엄살 따위 얼마든지 부릴 수 있었다. 미합중국의 국보, 바다를 바라보고 선 자유의 여신상 머리 위에 둥둥 떠서 바라보는 바다 풍경이야 아주 멋지긴 했지만, 히말라야 산양가죽과 백곰 가죽에 둘둘 말린 채 밍크 귀마개까지 쓰고 국제적 테러리스트 에릭 M. 렌셔의 품에 안겨 - 그것도 공주님 안기로! - 있다는 지금의 상황은 전혀 유쾌하지 않았다.
"춥다니, 나름 성의껏 준비했지만 부족했나 보군. 뭔가 따뜻한 거라도 줄까?"
"그보다는 땅에 내려가고 싶..."
바로 입 밖으로 나오려던 말이 쑥 들어갔다. 찰스를 바라보는 청회색 눈동자는 더없이 다정했지만, 지금 이 남자가 손가락 하나만 구부리면 어떤 참화가 벌어질지, 찰스는 아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새해 해맞이를 함께 갈 생각 없나?'
그 말을 꺼낼 때만 해도 그런 비열한 협박을 가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미안, 에릭. 자네 부하들이 저지른 일 때문에 좀 바쁜 거 알지 않나.'
'미안하지만 찰스, 이건 부탁이나 문의가 아니야. 문장은 의문문이지만.'
'...무슨 소린가.'
에릭은 가볍게 웃으며 설명했다.
'뉴욕 해변의 그 아가씨 말야. 허리가 좀 뻣뻣해 보여서 굽혀줄까 하고 있는데.'
'설마 진담은 아니겠지?'
'난 진지해. 뭣하면 핀업걸 포즈를 취해줄 수도 있네.'
'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붉은 투구 속에서 남자의 푸른 눈이 빛났다. 욱식동물을 연상시키는 가지런한 흰 이가 드러났고, 제법 '미소'라 부를 수 있을 법 하지만 동시에 어찌 보면 이를 갈아붙이는 듯한 표정을 하고 남자는 당당히 말하는 것이었다.
'자네와 시간을 보내겠다는 것 뿐일세. 뭣하면 국회의사당 골조도 같이 구부려 줄까?'
더이상 저항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만족하나?"
"뭘?"
"지금 이거!"
찰스의 등과 무릎을 받치고 있는 남자의 팔에 새삼 힘이 들어간다. 무겁지도 않은지 모피에 둘러싸인 찰스를 더 바짝 안아올린 남자는 거의 키스라도 할듯 바짝 입을 대고, 따스한 입김이 느껴질 정도의 거리에서 마음에 새기듯 찬찬히 속삭인다.
"오, 그럼. 물론이지."
그리고는 할 말을 잃은 찰스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를 하는 것이었다.
그 입술이 맞닿은 순간, 붉게 달아올라 있던 수평선 너머에서 첫 햇살이 비치기 시작했다. 황금색 햇살에 눈이 쏘여 그런지, 아니면 그저 너무나 오랜만에 맞댄 입술이 민망해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건 찰스는 제대로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어 질끈 감아 버렸다. 그 잘난 히말라야 산양 모피와 백곰 모피 - 워싱턴 협약이 어떻게 되었더라?! - 에 두 팔이 휘휘 감겨 둘러싸여 있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었다면, 두 팔이 다 자유로웠다면 틀림없이 이 남자의 어깨를 붙들고 더 깊이 키스해 버렸으리라.
키스가 끝났고, 1975년 1월 1일의 햇볕을 받으며 남자가 중얼거렸다.
"새해 복 많이 받아, 찰스."
"...자네도."
서로에게 복을 빌어주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생각할 수 없었다.
햇볕은 찬란했고, 공기는 싸늘했고, 바닷바람은 날카로웠고, 장소는 지나치게 엉뚱했지만, 어쨌건 이 날은 그 뒤로 오랫동안 두 사람의 기억에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