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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7.05 호랑이를 천으로 가려서야 웃기는 일이지 4

극중 에릭이 미스틱에게 한 말이죠. 꼭 벗으라는 소리는 아닙니다만, 사실 이거야말로 에릭에게 어울리는 말이에요. "매그니토 비긴즈" 라는 소리를 듣고 있는 엑퍼클입니다만, 에릭은 한 마리의 수컷으로서 무리에서 추방된 젊은 수컷이 결국기 무리를 구성하고 리더(라기보다는 제왕)으로 군림하는 과정을 너무 잘 보여줘요.

사람이라기보다 한 마리 암컷 성별의 생명체로서 이 남자에게 너무 지독하게 끌리는 건 그런 면에서 일견 당연해 보여요. 이 수컷은(...) 강하고, 똑똑하고, 무자비하면서도 '내 품 안에 들어온 것'은 온 힘을 다해 끌어안아 버려요. 찰스의 포지션이 '모두에게 다정하고 공정한 리더' 라고 하면 그는 명확히 불공정한 리더죠. 찰스가 "우리 모두가 훈련을 해야 해" 라고 선언한 다음 구성된 스쿨에서 뮤턴트 아이들을 대하는 둘의 태도를 보면 이 점이 아주 명확하게 드러나요.

찰스는 션, 알렉스, 행크, 에릭 모두에게 가장 특화된 교육을 고안해내고 아이들을/에릭까지! 거기 적응시키죠. 그 집단에서 소외되거나 차별받는 사람은 없어요. 물론 찰스는 에릭을 다른 아이들에 비해 높은 레벨로 대해주지만, 그건 에릭이 찰스에게 소중하고 특별해서라기보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그런 점이 있다고 보지만) 새끼(cub)를 대할 때와 다 큰 개체를 대할 때의 차이 정도로 보여요. 다분히 '사회화가 당연한 무리속의 공정한 리더'인 거예요. 각자의 포지션에 맞춰 대하는 거죠. 아이들은 배워야 하는 학생이고, 에릭은 학생이지만 동시에 동료죠. 

하지만 에릭은 사람을 그런 식으로 분류하지 않아요. 그는 철저히 자신이 관심을 품고 있는 대상에게 집착하고 '선 밖'의 사람들에게는 명확히 차이를 보여요. 이것이 엔딩에서 드러난다고 보는데, 스쿨의 아이들 중 에릭 곁으로 간 것은 '여자'이자 에릭이 '특별히' 대했던 레이븐 한 명이에요. 그가 찰스를 붙들고 자신과 함께 가자고 거의 애원하다시피 한 것도, 찰스가 그 정도의 위치에 있어서가 아니라 찰스가 그의 마음 속에 그만큼 거대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예요. 이득이나 손해가 아니라 애착에 따라 행동하는 거죠. 물론 그렇다고 그가 득실을 안 따지는 사람이라는 건 아니예요. 아마도 2편 이후 '매그니토'가 되면서 그는 그런걸 찰스보다 훨씬 냉정하고 냉혹하게 따지겠죠.

하지만 적어도 엑퍼클에서의 에릭은 자신의 유대-집착-애착에 따라 사람을 철저히 '차별'해요. 그에게 있어 '내 사람'은 목숨을 걸고서라도 돕고 보호하고 끌어안아 줘야 하는 사람이에요. 여기까지는 찰스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선 밖의 사람'에 대해 에릭은 거의 '사물화' 할 수 있을 정도로 냉정해져요. 이런 사람들은 절대 적대해선 안돼요. 그리고 죽일 수 없다면 사냥하면 안되는 족속이죠. 어리석은 인간들이 미사일 공격을 감행하는 순간 인류 전체가 에릭의 '선' 밖으로 밀려나 버린 거고, 인류는 그 순간 에릭 렌셔를 죽이지 못한 걸 수십년에 걸쳐 후회해야 하는 겁니다.

근데 이 점이 에릭이라는 캐릭터에게 무한의 매력점이 돼요. 왜냐면, 인간은 본질적으로 공정함을 사랑하면서도, 한쪽 구석에는 - 인간 자체가 타고난 불공정한 존재인것만큼이나 -  불공정을 소원하거든요. 누구나 '인간'이 공정하길 바래요. 하지만 '저 사람'이 '내게만' 미소지어 주길 바라고 친절하길 바라고 '나만을' 사랑해 주길 바라는 마음도 분명히 존재하죠. 인간이 사랑을 갈구하는 존재인만큼, '특별'한 사랑을 갈구하고 또 주고 싶어하는 것이 본능입니다.

에릭에겐 그게 있죠. 그는 '선 안'의 존재에겐 철저히 훌륭한 조언자, 보호자, 조력자가 됩니다. 저 호랑이가 발톱을 휘두르면 저 같은 건 그냥 두동강이 나겠죠, 하지만 그 호랑이가 날 본 순간 목을 울리며 조용히 다가와 손 밑에 머리를 들이댄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 짐승이 무시무시하고 위험할수록 그 갭으로 인한 매력은 배가됩니다. 그가 압제자일수록, 냉정할수록, 제멋대로일수록 이 갭이 커지고, 그래서 흡입력이 강한 존재가 돼요. 그래서 '타인'에 대해 대단히 방어적이고 공격적이기까지 한 에릭은 그만큼 특별한 존재가 되죠.

전 찰스가 그 면에서 분명히 오만했다고 생각해요. (찰스가 나쁘단 뜻이 아니에요) 방어적이고 동시에 공격적이고 고집세고 남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도록 정신적 장벽이 강한 저 남자가 '자신에게만'은 굽혀줍니다. 죽이지 않고, 참고, 생각을 돌리고, 수긍해줘요. 그리고 이전에 말했듯 고분고분하고 부드러운, 그래서 수컷의 경쟁심을 정면으로는 자극하지 않는 찰스가 에릭에게는 또 이상적인 친우, 동료, 혹은 그 이상의 무언가가 될 수 있었고 말이죠. 그런 면에서는 환상적인 궁합이에요. 이전에 말횄듯 철없는 애들이라면 찰스같은 사람을 두고 자기 고집대로 부려보려고 뎀볐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에릭은 '그는 달라' 라고 생각한 이상 찰스를 위해 나름 굽혀주기까지 했으니...

결론적으로 이 둘은 서로에 대해 이해하면서도 또한 '착각'을 해 버렸어요.

언젠가는 터졌을 거예요. 해변가의 일이 없었더라도, 찰스는 자신이 에릭의 강한 의지를 '결정적인 순간에' 꺾지 못한다는 걸, 에릭은 찰스가 '결정적인 순간에' 조용히, 그리고 고요히 자신의 방식을 부정한다는 걸 겪고야 말았을 겁니다. 그것이 조금만 작은 일이었다면 냉전, 열전, 혹은 어떤 양보로 그럭저럭 끝을 맺었을지도 모르겠어요. 아니, 정말 운이 좋았다면 저 정도의 "절대적" 선은 건드리지 않고 그럭저럭 잘 지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에릭이 "인류"를 자신의 무리 밖으로 몰아내 버리는 순간, 찰스는 그걸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던 거고, 그리고 자신이 결사적으로 막으려 해도 에릭의 마음을 바꿀 수가 없다는 걸 처절하게 체감해 버리는 거죠.

동시에 에릭은... 찰스의 고집과 맞닥뜨리죠. 에릭을 위해서라면 한 발 양보하던 찰스는, 하지만 그보다 더 양보하지는 못했어요. 찰스는 담담하게 '우리는 달라' 라고 선언해 버립니다. 에릭이 '선 밖'으로 몰아내 버린 인류와 함께 해 버렸어요. 용서할 수 없는 배신이죠. 그 순간 에릭의 얼굴이 서느라니 굳는 것은, 그것이 너무나 아픈 선언이었기 때문이에요. 난 네 무리가 아냐, 네 형제가 아냐. 우린 너무 달라, 같은 무리가 될 수 없어.

 그래요, 그는 호랑이였던 겁니다. 불꽃처럼 타오르는 호랑이, 찰스의 - 늑대 리더의 다정함과 상냥한 리더쉽에 녹아들기엔 너무 거대하고, 배타적이고, 강경했어요. 그는 편안하고 조용한 늑대굴에 적응할 수는 없는 존재였어요. 그 곳에서 자신을 둘러싸고 체온을 나누며 함께 잠드는 '형제'들 사이에 몸을 눕히고 질서에 스스로를 적응시키기엔 너무 거대하고 흉포한 야수였던 거죠. 그 사실을 해변가에서 둘 다 깨달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한번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한 이상, 이제 너무나 행복했던 그 둥지에 함께 돌아갈 수는 없다는 것도.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랬죠. '친구는 두 몸을 지닌 한 영혼이다.'  그들은 아마
 가끔은 서로의 부재를 느끼면서 스스로에게 다시 물어볼 겁니다. 그 때 내가/네가 다른 말을 했다면 우리는 어떻게 지내고 있었을까. 지금 이 순간 넌 내게 무슨 말을 했을까. 너라면 이럴 때 어떻게 할까. 하나가 되었다 잡아뜯겨졌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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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글래스워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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