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치계로 진출한 찰스, 이상은 다르지만 그를 잠시 돕고 떠나려다 인생 틀어잡힌 에릭입니다.
- 찰스는 뮤턴트를 지지하는 정책을 펴고 있지만 자신이 돌연변이인 건 숨기고 있어요 :D
- 연작입니다. 이번 글에는 스칼렛 위치님의 리퀘스트가 들어가 있습니다.
최신식 설비가 늘어선 부엌은 과연 사용된 적은 있는지 궁금할 정도로 반짝거렸다. 리놀륨이 깔린 바닥, 기름 얼룩 하나 없는 벽의 흰 타일들을 바라본 찰스는 아마도 이 곳이 단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으리라 생각했다.
"이거 굉장한걸."
잠시 상념에 빠져 있다 고개를 돌리는데, 실로 희귀하게도 순수한 경탄에 찬 에릭의 음성이 들려 왔다. 벽면을 바라보는 그의 등에 시선이 머무른 순간 에릭의 주위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맙소사."
찰스도 경탄할 수밖에 없었다. 에릭의 눈이 향한 곳은 바로 주방 벽에 붙은 꽤 커다란 검은 패널이었다. 거기 보란듯이 진열되어 있던 각종 칼들이 부드럽게 공중에 떠올라 마치 유연하게 헤엄치는 은빛 물고기마냥 에릭의 곁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미세한 컨트롤에 따라 공중에서 움직이던 칼날들이 다시 패널에 고분고분히 걸리고, 개중 적절한 무게와 형태를 한 식칼 하나가 에릭의 손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좋은 칼이군."
대체 어디서 꺼냈는지 꽤 큼직한 생선을 도마 위에 올린 에릭이 찰스의 말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칼 끝을 꽂아 부드럽게 선을 그어주는 것만으로도 지느러미들이 간단히 떨어져 나가는 것을, 찰스는 거의 경의에 찬 눈으로 감상했다. 물고기 손질이라니, 타고난 신분과 재력 덕에 와인을 꺼내지 않는 이상 주방에 갈 일이 없던 찰스로서는 생소하기 짝이 없는 작업이었던 것이다.
칼등으로 긁어 비늘을 제거하고, 배에 칼을 꽂아넣고 매끄럽게 갈라낸 후 빼낸 칼끝으로 배를 부드럽게 짜내듯 눌러 내장 전체를 단숨에 밀어낸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은 일체의 동작 낭비 없이 물 흐르듯 이어졌고, 고개를 숙이고 선 남자의 곧은 등과 은근히 섬세한 선을 지닌 목덜미가 거기 어우러져 거의 안무적이기까지 한 아름다움을 자아내고 있었다.
흰 셔츠 밑에 드러날 듯 숨겨진 마른 등골과 잘 짜인 등, 그리고 벨트와 팬츠 밑에 숨겨져 있을 견고한 허리에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찰스는 자기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마치 예쁘장한 하녀를 둔 음흉한 주인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들어, 도저히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색한 - 아마도 찰스에게만 어색할 - 침묵을 견디다 못한 찰스는 가볍게 헛기침을 한 후 어떻게든 말을 꺼내 공백을 채워나갔다.
"그래서, 지금 만드는 건 뭐지?"
"간단한 생선구이지."
"좋군."
"마침 도미가 물 좋은 걸로 있길래 사 뒀어. 백포도주에 소금과 후추로 간을 해서 각종 향초와 함께 유산지에 싸서 굽는 거지. 괜찮을 거야."
찰스는 경이에 찬 눈으로 에릭을 바라보았다. 포도주 마개를 따던 에릭은 그 심상찮은 침묵을 느끼고는 의아한 기색으로 뒤를 돌아보았고, 마치 신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나타난 가브리엘을 바라보는 성모를 연상케 하는 찰스의 눈과 시선을 마주치고는 대체 뭐가 문제냐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자넨 정말 경이로운 사람이야. 그런 요리는 대체 어디서 배웠어?"
에릭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여기저기서. 그보다도 대체 표정이 왜 그래? 빠삐요뜨는 별로 어려운 요리도 아닌데."
"난 달걀을 삶으려다 폭파시킨 뒤부터 요리는 포기했다고."
뭔가 한소리 하려는 듯 찰스를 바라보던 에릭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손질을 마친 도미를 큼지막하게 두 토막으로 썰어 칼집을 넣고, 최고급 백포도주를 큰 스푼에 담아 접시에 담아둔 도미 위에 앞뒤로 골고루 뿌렸다. 포도주 향기가 피어오르고, 거기 소금과 후추로 적당히 밑간을 한 뒤 구석에 놓아둔다.
"공기가 황금색이 된 것 같아."
찰스의 맑은 목소리에 어쩐지 달콤한 기분이 섞인 것 같았지만 에릭은 애써 무시했다.
"최소한 20분간 곱게 놔둬야 해."
"그럼 그 사이 뭘 하지?"
"다른 재료를 준비해야지."
슬쩍 다가붙은 찰스가 뭘 뜻하고 있는지 모를리 없건만, 에릭은 냉정하게 잘라 끊으며 몸을 돌렸다. 물을 틀어 재료들을 깨끗이 씻고, 생선을 다듬은 칼은 잠시 치워 두고 좀더 굵직한 식칼을 집어든다. 뒤에서 찰스가 들으란 듯 한숨을 쉬건 말건 침착하게 감자를 깎고 양파를 까고 당근을 다듬는다.
"당근은 별로인데."
"어린애 같군 그래."
아마도 꽤 어린아이 같은 표정으로 툴툴대고 있을 것이다. 에릭은 일단 버섯을 적당한 크기로 썰어둔 다음 레몬과 감자 또한 썰어서 접시에 담아 놓고, 마지막 코스인 양파를 집어들고 썰려다 잠시 동작을 멈추었다.
"찰스?"
"...왜?"
잠시 망설이다 한숨을 푹 쉰 남자는 반쯤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왜 허리는 건드리고 그래."
그랬다. 찰스는 어느새 휠체어를 최대한 에릭에게 바짝 붙이고는 맨손을 슬그머니 들이밀어, 에릭의 허리를 매만지고 있었던 것이다.
"눈앞에서 그러고 있으니 왠지 만져보고 싶어지잖아."
가느다란 주제에 근육으로 꽉 잡혀 있는 허리에 손을 얹고 슬슬 쓸어올린다. 그 손길이 노골적인 유혹의 몸짓이라는 건 아마 세살짜리 아이라 해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봐, 경고하겠는데."
"뭘?"
어딜 봐도 웃음기가 섞여 있는 찰스의 음성에, 에릭의 눈꼬리가 미묘하게 흔들렸다.
"난 지금 양파를 손에 들고 있어."
"그래서?"
"그리고 도마 위에 놓고, 이제부터 이걸 썰 거거든."
"음?"
에릭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한 음절 한 음절을 끊어가며 명확히 발음했다. 양파를 썰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도 못하는 이 남자가 얼마나 손가락에 물 한방울 안 묻히고 산 인간인지, 혹은 얼마나 생활력 없는 인간인지 실감하면서.
"지금 그 손 치우고 내게서 떨어지지 않으면 몹시 뼈저리게 후회하게 될 거야."
"죽어도 떨어지기 싫은걸."
양파가 도마 위에 놓였다. 에릭은 가차없이 손을 휘둘렀다. 잠시 뒤, 찰스는 정신없이 눈물을 흘리며 양 손을 들고 에릭에게서 황급히 멀어졌다. "맙소사, 에릭. 이게 뭐야?"
이러면 안되지만, 에릭은 만면에 미소가 퍼지는 것을 실감했다. 당연히 에릭의 눈도 따가웠지만 아무튼 그랬다. 양파가 치한 퇴치에 효험이 있을 줄이야.
그렇게 찰스를 '퇴치' 한 후 월계수 잎을 꺼내고 로즈마리를 끊어둔다. 유산지를 충분히 잘라 감자를 배열하고 양파를 하나 하나 곱게 얹은 뒤 버섯과 당근을 올린다. 소금을 뿌려 숨을 죽여놓고서야 뒤를 돌아보는데, 눈물젖은 찰스의 파란 눈에 순간 할 말을 잃었고, 직후 이를 갈았다. 맙소사, 양파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남자 따위에게 감탄하다니! 저 놈의 눈동자는 왜 저리 쓸데없이 청명하게 파랗단 말이냐.
"에릭."
"왜 찰스."
찰스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에릭을 바라보았다. 맑은 눈동자 주위는 새빨갛게 충혈되어 있었고, 그런 그의 모습은 양파 때문이라는 것만 잊으면 거의 멜로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보일 정도로 감상적인 느낌을 자아내고 있었다. 닦아낼 생각도 하지 않은 눈물이 투명한 한줄기 선을 그리며 뺨 위로 흘러내렸고, 바로 그 눈물 방울에 젖은 붉은 입술이 천천히 말을 자아낸다.
"사랑해."
"......찰스?"
"아, 역시. 눈물을 흘리면서 이런 말을 하는 거 뭔가 굉장한 것 같아. 게다가 자네도 울고 있잖아."
"양파 때문에 말이지."
"응, 양파 때문에."
에릭은 뜨거운 눈시울을 한 채 이를 갈았다. 그리고 이 쪽으로 휠체어를 밀고 와 팔을 뻗는 찰스를 이번엔 막지 않았다. 생선이 완전히 재워질 때까지 앞으로 약 10분, 키스 두 번, 포옹 한 번, 그리고 그 틈을 타 찰스는 심술궂게도 에릭의 목덜미에 키스마크를 남겼다. "일주일 사이에는 지워지겠지?" 의원님 답지 않은 가벼운 말투는, 아직 그가 학문의 길에 몸담고 있었을 때를 상기시켰다. 잘 웃고 쾌활하게 떠들며 툭하면 여대생을 꼬시곤 하던 그 시절을.
다시 한번 키스하며, 찰스는 에릭의 긴 목을 팔로 감고 결코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 세게 입맞춤을 해 왔다. 요리하는 중만 아니라면 곧장 침실로 갔을지도 모른다. 간신히 떼어낸 에릭의 입술에는 찰스가 살짝 문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납치하길 잘 했군."
"이런 납치범에게라면 납치당할 맛 나는데?"
에릭은 웃으며 돌아섰다. 잘 재워진 생선을 얹고 그 뒤에 다시 레몬, 월계수 잎, 로즈마리를 얹는다. 백포도주와 올리브유를 한술씩 더 부어주고, 유산지를 잘 말아서 밀봉하고 오븐에 넣었다.
"이제 30분쯤 지나면 돼."
"그래, 우리에겐 30분이 있군. 충분하잖아?"
도저히 오해할래야 오해할 수 없는 세리프에, 에릭은 얼굴을 굳히고 찰스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 결연한 표정에 당황한 찰스가 뭔가 제대로 말하기도 전에,
"엇, 에릭?!"
찰스의 무릎 밑에 팔을 넣고 몸을 어깨로 받치더니 간단하게 들어올린다. 졸지에 자루마냥 어꺠 위에 실려가게 된 찰스가 뭔가 항의하기도 전에,
"그래, 30분이 있지. 가련한 인질께서는 목숨을 부지하려면 고분고분 따라주셔야겠어."
"맙소사, 내 경호원이 이런 악당이었다니!"
짐짓 하는 한탄조차 달콤한 유혹처럼 들려와, 에릭은 주저없이 방갈로의 침실을 향해 발을 옮겼다. 그래, 30분이면 충분하다. 맛있게 요리가 익어가는 동안 이 남자를 재료로 또다른 요리를 하기에 충분한 시간 아닌가 말이다. 키스가 이어졌고, 두 남자는 꽤나 조급한 손길로 서로의 옷을 벗기기 위해 최선을 다 했다. 누구의 시선도 신경쓸 필요 없고 어떤 소리를 내더라도 상관없다는 것이 이렇게나 좋은 일일 줄이야. 곧 침실의 공기가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고, 누구의 것이라고 분간하기조차 어려운 신음 소리가 방을 가득 채웠다.
그리하여, 30분 후 완성된 빠삐요뜨는 최고였다. 향긋한 생선 향기는 두 남자의 위장 뿐 아니라 후각과 시각과 촉각까지 만족시키는데 아무 부족함이 없었다. 다만, 따뜻한 상태로 먹지는 못했다. "식었지만 정말 맛있어!" 라고 찰스는 진심을 담아 열성적으로 말했지만, 에릭은 슬쩍 미간을 찌푸리고 약간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다음번에는 제대로 해 줄 테니까" 라고 말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