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You did.
명백히 선고였던 한 마디를 반추한 남자가 다소 애매하게 곤혹한 얼굴을 했다. 마치 상황에 이끌려 주저없이 토해낸, 성마른 일갈을 뒤늦게 난감해하는 것처럼.
하지만 눈썹 끝을 슬그머니 비튼 찰스 자비에도, 그 모습을 묵묵히 내려다보는 자신, 에릭 랜셔- 아니, '매그니토'도 알고 있다. 그날 선고는 이미 내려졌고 그들은 서로의 대척점에 서서, 그리고 '앉아서' -이 대목을 곱씹으며 에릭은 저도 모르게 빨라진 호흡을 다시 골랐다- 상대를 마주한 것이다. 이제, 당연히 지난 시간과 달라야 할 스스로의 자리, 저이와의 거리를 가늠하면서.
"그렇군."
매그니토가 다소 억눌린 듯한 억양으로 낮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오랫동안 투쟁 속에서, 투쟁으로써 스스로를 지탱하고, 증명해온 사내가 다음 걸음을 딛기 위해 앞을 똑바로 응시했다. 휠체어 위에 가지런히 놓인, 살해 당한 두 다리를 향해 말이다.
"이게 내가 자네에게 한 짓이지."
"에릭."
찰스의 부름은 다소 핀잔 같은 뉘앙스마저 담고 있었다. 일 년전보다 눈에 띄게 초췌해진 그의 얼굴에 진심으로 곤혹한 기색이 떠오른다. 에릭으로썬 짐작할 수 있으나 도저히 공감할 도리가 없는, 찰스 프랜시스 자비에가 가진 대답이 나올 차례였다. 아, 알고말고.
"단지 운이 없었을 뿐이라 말하고 싶나?"
"그게 사실이니까."
"찰스, 자네가 주는 답은 언제나 부족한 답이야."
"그런가."
"자네만이 만족해하는 답이라 그래."
매그니토가 갑자기 몸을 숙여 찰스와 시선을 맞췄다. 우스꽝스런 헬멧이 익숙한 얼굴에 드리운 그늘 아래서 서늘한 회청빛 눈동자가 낯설게 빛나고 있었다. 기묘하게 일그러뜨린 일상과의 경계, 파괴된 철조망 위에 보란 듯 서있는 '옛' 친구의 푸른 눈동자에서 섬광같은 열망을 읽은 찰스가 고개를 젓는다. 고집 부리는 학생을 다독이는 양 친근하고도 가벼운, 프로페서의 익숙한 제스처였다.
"내게 무슨 답을 들어야 자네도 만족하겠나."
"You did."
매그니토가 낮게, 거의 으르렁거리는 것처럼 속삭였다. 허나 분노나 위협 같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갈증어린 요구에 가까운 울림이라 생각한 찰스가 애매하게 입술을 달싹이는 동안, 싸늘한 장갑의 감촉이 턱 아래 닿았다.
"다시 한 번 말해보게. '네가 그랬'다고."
바짝 다가선 둘의 시선 사이로 그날의 바닷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부질없는 가능성, 애틋한 미련, 그리고 절실했던 갈구를 단번에 부숴버린 선고를 다시 바라는 사내와, 곤혹스러워 하던 사내가 오로지 상대만을 시야에 담은 채로 아주 잠시 그렇게 굳어있었다. 매그니토 찰스는 텔레파시로 그 이름을 불러보았다. 매그니토, 나의..... 절대로 닿지못할 무언의 부름을 두어 번 반복한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아니, 에릭. 자네가 아니야."
여전히 매끈하고 부드러운 생활감을 지닌 손가락이 제 턱을 쥔 손을 조심스레 잡아 찬찬히 떼어놓는다. 장갑 너머로 조용히 휘감기는 체온을 저릿하게 느낀 매그니토가 저도 모르게 힘을 주었고, 손가락들은 얽힌 채로 정지했다.
허나 찰스의 목소리는 담담히 계속 이어졌다.
"자네가 아니라, 내 선택이었고 그에 따른 댓가일 뿐이네."
투명하도록 푸르른 눈동자가 한 점의 의혹도 없이 차분히 가라앉은 채 매그니토를 비추었다. 그는 진심으로- 진정 털끝만치의 책망도 없이, 오히려 스스로가 토하듯 내던진 과거의 한 마디를 유감스러워하며 '친우'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말했다.
"내가 한거야. 내 오만의 결과였어."
얼어붙었던 손가락들이 스르르 힘없이 녹아 떨어지고, 찰스의 시선이 아주 짧게 그 이별에 머물렀다. 그러니까, 에릭.
"자네가 자책하지 말았으면 하네. 한 점이라도."
가죽장갑에 감싸인 매그니토의 손가락이 움켜쥐려는 양 허공을 할퀸 뒤 단단히 접혔다. 투쟁으로 살아온 남자는 다시금 주먹을 쥐고, 앞을 노려보는 자세로 돌아갔다.
"....그것이 자네의 오만함이군."
"사람은 쉽사리 변하지 않는 법이지."
"이제야 알았나?"
"덕분에 말일세, 내 친구."
찰스 자비에가 빙긋이 웃었다. 친애의 정이 담긴, 소탈한 웃음이었고 강인하게 짜여진 그의 정신이 발하는 유려한 빛으로 가득한, 지독하게 완고한 자기 증명이기도 했다. 1년 사이에 저 소담한 미소를 스스럼없이 짓게 되기까지 찰스 자비에가 어떤 화염의 강들과, 창칼의 산을 넘었는가는 이제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가 스스로에게 지워진 무게를 거뜬히 감당하는 프로페서X가 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바로 자신, 투쟁을 외치는 매그니토를 막아설 최대의 벽, 댓가를 이미 치뤘노라고 담담히 말할 수 있는 자, 그래. 기꺼이 "내가 선택"했음을 선고해주는 숙적으로,
"고맙군."
에릭은 밑도 끝도 없이 속삭인 뒤 문득 깨달았다.
찰스 자비에의 저 웃음에 고마움을 느끼는 에릭 랜셔가, 매그니토가 진실로 거기 있음을.
틀어쥔 주먹이 조금씩 떨려왔다. 느꺼운 희열과, 곤두선 긴장이 뒤죽박죽이 되어 반사적으로 일으키는 경련이다. 이성이 판단을 내리기 전에 육신이 먼저 깨달은 사실에 지난 수십 년간 에릭 랜셔란 사내를 구성하고 지탱해온 본질이 고래고래 아우성 치고 있었다.
아, 여기에 거대한 적이 있다고. 거의 존경해도 될만한 맞수, 혼신을 다해 맞서서, 마침내 뛰어넘어야 할 그의 '벽'이 바로 여기에 있노라고.
매그니토의 손이 민첩하게 주먹을 풀고 다시금 찰스의 손을 채어올렸다. 늘씬한 근육질 팔이 행하는 일련의 동작은 거의 우아해보일 지경이었고, 핏기없는 손가락들은 아무런 저항없이 자연스레 그의 입가에 놓였다. 에릭은 찰스의 표정을, 눈조차 보지 않았다. 조용히 눈을 감은 채, 강철의 지배자는 입술로 그가 되찾은 의미를 음미했을 뿐이다.
"내 곁에 돌아온 걸 환영하네."
숙적으로 돌아온 친우의 손가락 위에 입맞추며 매그니토가 웃었다.
아마 두 번 다시 잃지 않을 것이다, 싸우는 한. 너와 맞서기를 내가 포기하지 않는 한.
이순간 눈을 떠서, 네 아픈 얼굴을 확인하지 않는 한.
fin.
실은 논커플링에 싸나이즘(...) 흘러넘치는 연성을 목표로 했습니다......만, 제가 누울 자리를 잘못봤던거죠 네.
꼴랑 몇 줄 안되는 연성에서조차 알아서 입질해주는 미친 케미스트리에 건배.....씨풋.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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