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U입니다.
- 이번 동네 페스타의 신간이 될 예정입니다.
- 연쇄살인, 유혈 예정, 찰스가 많이 힘들어 합니다.
- 지옥에서의 일주일 - 7일 전
본인이 생각하기에, 찰스 프란시스 자비에가 정체 불명의 남성에게 스토킹을 당할 이유 따위는 없었다. 설령 스토커가 여자라 해도 다를 것은 없다. 대학을 졸업하고 당연한 수순인 듯 대학원을 갔고, 학위를 받아 이 곳 미네소타주의 작은 대학에서 교수 자리를 구해 여동생 레이븐과 함께 조용히 지내고 있었다. 언제나 기운차게 잔소리를 날리곤 하던 레이븐은 대학 연구소 소속이었던 행크와 결혼했고, 그녀가 떠난 뒤 찰스는 조용한 독신 생활에 익숙해진 채 학교와 집 사이를 왕복하며 생활하고 있었던 것이다. 취미라고 해 봐야 독서가 고작이었고, 학교 동료와 가끔 한잔 하는 정도 외에는 별다른 교류활동도 없었다. 정해진 데이트 상대도 없었는데, 그건 반쯤은 체념하고 있던 일이었다. 몇년 전, 주정뱅이가 모는 픽업 트럭에 치어 영영 다리를 절게 된 뒤로 굳이 바깥에서 적극적으로 사람을 찾아 돌아다닐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이다. 바로 그 사고가 지금껏 그의 조용했던 인생에 가장 거대했던 사건이었다.
그 외에는, 가끔 스스로가 돌아보아도 믿겨지지 않을만큼 조용하고 수동적인 삶을 살아왔고, 찰스는 그에 제법 만족하며 지내고 있었다. 가끔 작은 거실에 혼자 앉아 위스키 스트레이트를 한 잔 하고 있노라면 수다스럽고 활기찬 레이븐의 잔소리, 상대적으로 수줍어 보이는 행크의 겸연쩍은 웃음, 그리고 센스나쁜 농담이 떠오르며 그 모두가 부재한 이 공간이 한없이 어색해지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지낼만 한 삶이었다. 적어도 스토커 일만 아니라면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대체 왜 누군가가 이런 식으로 찰스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목적조차 알 수 없다는 것이 더 두려운 점이다. 처음 퇴근길에 묘하게 따라붙는 인기척을 느낀 이래, 낯모를 남자의 시선은 절대 찰스의 주변을 떠나지 않았다. 돈을 노리는 강도라고 보기엔 지나치게 오랫동안 따라다니기만 하는데다, 찰스 자신이 별로 부자도 아니다. 원한이라고 생각하는 게 제일 빠르겠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찰스가 이제껏 저 정도로 상대가 집요하게 달라붙을 만 한 사건을 일으키거나 원한을 산 기억도 없다. 대학에서도 그는 적극적으로 나서거나 대학 행정에 깊이 개입하는 타입이 아니었고, 그저 주어진 일을 조용히 해 내는 사람이었다.
흔히 스토커가 붙는 가장 흔한 이유라면 성적인 집착 혹은 욕망이겠지만, 오, 맙소사. 그거야말로 가장 찰스와 연관이 어없는 일이었다. 자신은 남자고 - 설령 상대가 게이라고 해도 - 외견적으로도 별로 볼품은 없었으니까. 작은 키에 보통의 몸집, 푸른 눈을 칭찬해 주는 사람은 있었지만 고집스러워 보이는 코와 입매 등 별반 대단할 것 없는 외모를 지였던 것이다. 게다가 다리까지 전다.
- 오빠, 진정해. 전화선 상태가 너무 안 좋아. 조금만 빨리 말하면 막 지직거려.
찰스는 수화기를 고쳐 잡고 한숨을 내쉬었다. 유일한 가족이자 믿고 상담할 만한 친구랄 수 있는 레이븐은 행크와 함께 너무나 먼 곳으로 이사가 있었다.
"미안해, 레이븐. 별로 걱정할 건 아니고..."
- 아니 왜 오빠가 미안해 하는데? 잘 안 들리는 것 뿐이야. 제발 조금만 천천히 말해 줘.
찰스는 잠시 망설였다. 자신의 말을 믿어 주고 지지해 줄 유일한 가족이다. 비록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부모님이 입양해 온 후 서로를 믿으며 함께 자랐으니까.
"레이븐, 어쨌건 난...난 무서워."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모두 얘기하지는 못했다. 레이븐은 임신 4개월 째였고, 이제 간신히 지독했던 입덧이 지나 체력을 회복하는 중이었다. 아이의 이름을 프란시스 아니면 프란시스카로 붙이겠다며 한창 출산 준비를 하느라 정신없는 그녀에게 어제의 '침입'이나 신문 기사 등의 끔찍한 얘기를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 오, 찰스.
레이븐의 목소리는 다정했지만, 찰스는 그 목소리에 숨길 수 없는 피로가 담겨 있음을 알아챘다.
"미안해, 너도 힘들 텐데."
- 아냐. 전혀 아니야 찰스. 어, 내 목소리가 피곤하게 들렸다면 그건 다 빌어먹을 직장 때문이야. 임산부한테 눈치나 주는 직장 따위 망해버렸으면 좋겠는데. 아무튼 내 말 잘 들어, 오빠. 너무 무서워 하지만 말고, 정 문제가 있다 싶으면 경찰에게 연락해 봐.
찰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이미 얼마 전, 괴한이 자꾸 어른거린다는 이유로 경찰을 부른 적이 있었다. 꽤 심드렁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리던 경찰은 다니는 길을 바꿔보라는 제안과 함께, 어쨌건 되도록 찰스의 집 앞을 지나도록 순찰 경로를 잡아보겠다고 했었다.
계속 창 밖만 바라보고 사는 것은 아니었으니 과연 그들이 그래 주었나 제대로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어쨌건 찰스에게 중요한 일은 그 괴한이 조금의 동요도 없이 계속 자신을 추적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 찰스?
"어, 알겠어, 레이븐. 경찰에 얘기해 볼게."
그래도 레이븐에게 그 얘기를 할 수는 없다. 이미 그녀 자신의 일만으로도 충분히 부담이 될 것이다.
"늦은 시간까지 미안해, 피곤하지?"
- 오, 아냐. 그냥 오늘 따라 조금 지쳤을 뿐이야. 찰스, 정 걱정되면... 내가 행크에게 말해볼까? 그... 잠시 여기서 지내도 괜찮을 거야.
반가운 제안이었지만 찰스는 꾹 참고 고개를 저었다.
"아냐 레이븐, 너무 걱정하지 마. 별 일 아닐 테니까."
억지 웃음과 함께 인사를 나누고는 전화를 끊었지만, 별 일 아닐 리 없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찰스가 더 잘 알고 있었다. 솔직히 레이븐이 오라는 말만 해 준다면 달려가고 싶다. 하지만 이 곳에는 그의 직장이 있었고, 학생들의 시험 기간이 얼마 남지도 않았다. 급박하게 휴가를 낼 상황도 아니었고, 무엇보다도 잠시 떠나 있다고 해서 사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 가장 큰 문제였다.
"...맙소사."
전화를 끊은 찰스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창 너머 뜨락 건너, 가로등 옆에 사람 그림자가 어른거렸던 것이다. 찰스는 급히 거실에 커튼을 친 다음, 침실로 들어가 문을 단단히 잠궜다. 총을 머리맡에 두고 이불 속에 들어가 두려움에 떨며 어떻게든 별 일 아니라고, 안전할 거라고, 아무도 침입하지 않을 거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며 잠들기 위해 애썼다.
오래 된 나무 마루에 따로 카펫을 깔지 않은 것은 약간의 결벽증 때문이었다.
찰스는 오랜 세월로 인해 원래의 광택은 사라졌지만, 그래도 적절히 윤기가 흐르는 밤나무 재질의 마루 바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다갈색의 목재 위에 엇비슷한 색의 액체가 퍼졌고,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서야 그것이 이미 산산이 부서져 버린 머그컵 속에 조금 전까지 담겨 있던 커피였음을 깨닫는다. 입술이 바짝 마르고 그 안의 혀가 굳은 듯 저림에도, 그는 움직일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못박힌 채 바닥만을 바라보고 있다.
모든 감각이 정신없이 예민해진다. 말라 갈라진 입술과 어울리지 않게 축축한 실내의 공기, 꼭 닫아 두었음에도 어딘가에서 흘러온 밤 바람에는 차가운 비 냄새가 섞여 있다. 바람에 휘말린 바깥 나무들의 소리에 정신이 든 찰스는 조금 전 자신이 본 것의 '의미'를 생각하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싸늘하게 식은 피부 위에 식은땀이 맺히고, 지팡이를 짚은 손이 떨려 온다. 보안창이 붙은 젖빛 유리창에는 커튼이 쳐져 있어 밖이 보이지는 않지만, 찰스는 그 뒤에 무엇이 비칠지 알고 있었다.
또 한번의 낙뢰, 번득이는 창백한 빛은 어떤 자비심도 없이 창문에 섬짓한 실루엣을 찍어냈다. 남자, 아마도 창가에 바짝 붙어 이 안을 들여다 보는 괴한의 그림자를.
심장이 튀어올랐다. 입술이 절로 떨려 왔다. 침입해 들어오려는 것인가? 강도? 아니, 아니라는 걸 안다. 비록 우레가 울림과 동시에 바닥에 비친 그림자를 보고 잔을 떨어트렸다고 해도 그 소음이 저 괴한의 귀에 들리지 않았을 턱이 없는 것이다. 찰스는 이를 악물었다. 그다. 지난 2주간 간간이 희미한 그림자로 배회하던 그 남자다. 언젠가부터 늘 보이지 않는 시선을 이 쪽에 붙이고, 대학의 카페테리아에서, 서점에서, 골목에서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면 어느새 슬며시 사라지던 그 그림자의 주인이다. 간혹 걸려오는 대답 없는 전화, 아침이면 슬그머니 골목 가로 사라지던 모습.
문득 떠오른 사실에, 찰스는 입술을 짓물었다. 침실로 돌아가면 총이 있다. 지팡이를 짚은 몸이라고 해도 그 총을 들 수만 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서둘러 움직이려던 찰스의 뇌리에 절망적인 생각이 엄습했다.
- 저 자가 무장이라도 하고 있으면 어쩔 셈이지?
이를 악물고 최대한 그 불길한 생각을 떨쳐버리기 위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창 밖에서는 이 안이 보이지 않는다. 놈은 창 밖에 서 있고 이 곳 불은 꺼져 있지. 내가 움직인다 해도 아무것도 알아챌 수 없을 거야.
다시 한 번 번개가 번쩍였고, 창문 가에는 이제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찰스는 최대한 빨리 움직였다. 지팡이가 마룻바닥에 거칠게 부딪혔지만 그런 걸 신경쓸 여유 따윈 없었다. 침대로 달려가 몸을 던지다시피 하고 손을 뻗어 작은 테이블 밑 서랍에 넣어 둔 권총을 꺼냈다. 레이븐이 가져왔을 때엔 손사래를 쳤던 물건이지만 지금 믿을 만한 것은 그것밖에 없었다.
땀에 젖은 손으로 권총을 들고 한참이 지나서야 안전 장치가 걸려 있음을 깨달았다. 서둘러 안전장치를 풀고 몸을 옹송그리며 공이를 당겼다. 언제건 방아쇠만 당기면 총이 발사될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찰스는 전혀 안심할 수가 없었다.
그 뒤로 시간이 얼마가 흘렀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단 몇 분도 몇 시간처럼 느껴졌고, 그런 순간이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만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거센 바람이 창문을 스칠 때마다 찰스는 움칫거리며 총구를 그 쪽으로 돌리곤 했다. 폭풍이 가라앉고 마침내 창문이 새벽빛으로 부옇게 물들 때 쯤에야 찰스는 하얗게 굳은 손에서 간신히 권총을 떼어낼 수 있었다. 공이를 원래대로 돌려 놓고 안전장치를 잠근다. 하지만 다시 서랍에는 넣지 않은 채, 찰스는 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가 몸을 오그렸다. 몹시 지쳤음에도 한참동안 잠이 오지 않았다.
몇시간 후, 알람 덕에 눈을 뜬 찰스는 새벽의 악몽 같은 사건을 떠올리고 전율했다. 그러나 그가 진정으로 두려움을 느꼈던 것은 그 몇분 뒤였다. 마루에 나가 현관문 쪽으로 조심스레 다가갔을 때, 평소와 달리 현관 문 밑으로 얇은 신문 한 장이 밀려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바로 며칠 전 기사가 실려 있었다.
- 또다시, 이번엔 여교사.
찰스는 신문지를 떨어트렸다. 비가 그친지 한참 되었지만 문 안의 신문지는 아직까지 축축히 젖어 있었고, 그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단 한 가지일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그 남자'로 부터의 메시지다.
- 계속
짧게 짧게 이어질 겁니다.
원제는 How deep is your love였으나, 스토리를 다 짜 보고 제목을 더 어울리는 것으로 바꾸었습니다.
수위는 성적으로는 전연령가. 하지만 다른 의미로 15세 이상 혹은 성인용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