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U입니다. 에릭찰스에릭, 쇼우는 없고, 에릭을 찰스가 주웠다는 설정만 유지됩니다.
- 정치계로 진출한 찰스, 이상은 다르지만 그를 잠시 돕고 떠나려다 인생 틀어잡힌 에릭입니다.
- 찰스는 뮤턴트를 지지하는 정책을 펴고 있지만 자신이 돌연변이인 건 숨기고 있어요 :D
- 연작입니다. 이번 글은 스칼렛 위치님의 리퀘스트 요소가 들어가 있습니다.
"등록법을 반대하신다는 겁니까?"
"저는 우리 국민들이 어떤 이유로건 '구별' 되길 바라지 않습니다. 그것이 피부색이건 성별이건 돌연변이 여부건 간에 그들은 모두 성실하게 하루를 살아가는 국민입니다."
"그렇습니다만 자비에 의원님, 범죄를 저지르는 뮤턴트들에 대해 따로 대책이 없다는 지적이 있는데요."
"뮤턴트만 범죄를 저지르는 게 아닙니다. 범죄에 대한 방지책은 우리 모두가 고민해야 할 문제죠. '함께' 말입니다."
'함께' 라는 말에 방점이 찍혀 있다는 것을 누구나 느낄 수 있었다. 계속되는 의정활동으로 약간 창백해진 얼굴을 꿋꿋이 들고 답하던 찰스 자비에는 이제 질문은 끝이라는 뜻으로 손을 들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럼에도 쏟아지는 기자들의 질문과 다가오는 마이크를 밀어내며 경호원의 도움을 받아 어떻게든 앞으로 다가가려던 움직임은 풍채 좋은 한 남성에 의해 막혔다.
"의원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질문은 끝났는데요."
짧게 답하며 고개를 든 자비에 의원의 시선이 그 남자의 것과 얽혔다. 묵묵히 자비에를 내려다 보던 남자의 입매가 꾹 눌렸고, 그를 바라보던 의원은 서서히 경악에 찬 얼굴이 되어 입을 벌렸다. 의원이 손을 들어 남자의 어깨를 붙든다. 심상치 않은 기색에 의원 주변의 기자들을 막던 경호원이 고개를 돌려 남자 쪽으로 손을 뻗는다. 남자가 손을 올렸고, 총을 발견한 누군가가 비명을 지르려 했다. 시간은 끔찍하게 느리게 흘렀고, 의원이 잠깐 숨을 들이키고 뭔가를 말하려는 순간 총성이 울렸다.
에릭은 눈을 떴다. 방금 울렸던 총성이 아직도 낯익은 방 천장에 울리는 것 같아 두 손을 들어올려 눈을 가리고 잠깐 세게 비볐다. 꿈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인식하고 긴 한숨과 함께 몸을 일으킨다. 눈을 감으면 다시 한번 선명하게 그 때의 모습이 눈에 그려졌다. 몸에 한 발, 그리고 가슴에 제대로 한 발 더 쏘기 위해 남자는 손을 들었다. 에릭은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고 총은 폭발했다. 사람들의 비명소리와 함께 그는 쓰러졌지만, 에릭의 눈에 들어온 것은 단 한 사람, 배를 피로 적시며 쓰러지는 찰스 프란시스 자비에 뿐이었다.
총알을 뽑아낼까 했지만 오히려 더 위험하다는 생각에 참았다. 안아들자, 아직 의식이 있는지 시선을 에릭의 얼굴로 돌린 찰스가 팔을 에릭의 목에 감으려 했다. 하지만 그 팔은 피에 젖은 채 힘없이 늘어졌고, 푸른 눈이 눈꺼풀 안으로 말려들어가며 천천히 눈을 감는 것을 본 에릭은 다급히 그의 이름을 외쳤다. '정신 차려! 의식을 잃어선 안돼!' 누군가 구급차를 외쳤지만 그보다 한발 먼저 에릭은 의원용 리무진에 올라탔다. 쓸데없이 넓은 좌석이 지금만은 더없이 고마웠다.
수행원 한 명이 건넨 구급상자에서 압박붕대를 꺼냈다. 차마 둘러감지는 못하고 환부에 대고 꾹 눌렀다. 거의 의식을 잃은 것 같던 찰스가 짧게 비명을 질렀고, 에릭은 그가 고통스러워 한다는 사실보다 그에게 의식이 있음을 감사했다. "빨리 병원으로! 어서!" 기사는 이미 최대속도를 밟고 있었지만 에릭은 으르렁대며 소리쳤다. 머리를 감싸안자 꾹 닫혀 있던 눈꺼풀이 바르르 떨리더니 고통스럽게 열린다. "에릭..." "아무 말 하지 마." 짧게 말을 잘라버린 에릭은 무서운 표정으로 앞을 노려보며 이를 악물었다. 실책이다. 돌이킬 수 없는 실책이다. 그를 지키지 못했다. "에릭." 그가 다시 한번 말했다. 시선을 내리자 식은땀이 가득한 얼굴이 그를 기묘할 정도로 평온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고통의 그림자가 깊이 새겨져 있으면서도 잔잔한 호수 같은 눈에 에릭은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을 맛보아야만 했다. 안돼. 내 눈앞에서 떠날 꿈도 꾸지 마. 마치 지금이라도 곧 미련 없이 떠나버릴 것 같은 표정으로 바라보지 말란 말이야.
"얘기하고 싶었던 게 있었어."
"닥치고 병원에 가서 수술할 생각이나 해."
"내 친구."
다정하게 부른 그 단어에는 심지어 웃음기마저 들어가 있었다. 에릭은 눈가에 뭔가 고이는 것을 발견하고 두어번 눈을 깜박였다. 찰스의 얼굴에 그게 떨어지고 나서야 그는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손을 들어 눈가를 누르자 손에 묻은 피 냄새가 확 끼쳐 왔다. 피, 찰스의 피.
"난 자네가... 내 뜻을 이어줬으면 좋겠어."
"개소리 하지 마."
"레이븐을...레이븐을 도와줘."
에릭은 욕설을 내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다시 눈물이 흘러 떨어진다. 하필이면 찰스의 눈가에 떨어진 그 눈물은 이미 젖어있는 눈에 흘러들어가 다시 얼굴 옆으로 떨어졌다. 병원 앞에 차가 도착했고, 이미 연락을 받은 것인지 응급실 직원과 의사들이 달려나와 찰스를 침상 위에 누이고 다급히 달려들어갔다. 배에 얹혀 있던 압박붕대가 떨어져 피에 젖은채 바닥에 뒹굴었고, 에릭은 따라 들어가는 것조차 잊고 차 뒤에 앉아서 울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무릎 위에 얹혀 있던 남자의 체온이 서서히 사라져갔고, 어쩌면 그것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시 한번 눈물이 흘렀다.
이를 악물고 버텨 보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서야 차에서 내릴 수 있었다. 또다시 지키지 못했고, 또다시 눈 앞에서 가장 소중한 이가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꼴을 보아야만 했다. 아주 오래 전 간신히 흉터만 남았던 상흔 위에 생생한 상처가 덧붙어, 에릭은 이를 꽉 악물고 한 걸음 한 걸음 병원 쪽으로 다가가며 다짐했다. 만일 찰스가 목숨을 잃는다면 인간들은 지옥을 보게 될 것이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를 앗아가 버린 데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만일 그가 살아남는다면?
마음속에 던져진 질문에 에릭은 희망의 불꽃을 품었다. 살아남는다면, 혹시라도 그가 에릭 자신을 둘러싼 저주를 걷어치우고 살아남는다면. 손을 내려다보았다. 붉은 피에 젖은 손은 평소 그가 상상하던 그대로였다. 이제껏 살아오면서 그 손은 쓰레기들의 피에 늘 젖어 왔다. 하지만 지금 이 손에 말라붙은 것은 바로 찰스의 피였다. 이 피에 맹세코, 반드시.
그것이 벌써 2년 전. 눈을 떠서 바라본 손에는 아무것도 묻어 있지 않다. 에릭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주먹을 쥐고 다시 손을 폈다. 고개를 돌려 시계를 보고, 새벽 6시임을 깨닫고 아직 울리지 않은 알람을 끄며 일어선다. 평소보다 조금 이른 기상이었지만 준비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다. 샤워와 세수와 면도를 마치고 옷을 걸치고 방 밖으로 나간다. 그의 침실에 당도하여, 가볍게 노크하고 인기척을 기다린다. 잠시동안의 침묵에 쓰게 미소짓고는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가 그를 깨운다.
"찰스, 일어나."
어이없게도 어린애처럼 베개를 끌어안은 채 잠든 남자의 어깨를 잡고 흔들자, 아직 잠에서 덜 깬 푸른 눈동자가 살며시 드러났다가 다시 사라진다. 갈색 머리를 쓰다듬자 기분 좋은 고양이처럼 나지막하게 신음을 내뱉더니 눈을 감은 채 잠에 취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온다.
"어제 보고서 다 읽느라 두시까지 못 잤어."
"안됐군. 그래도 지금은 일어나야 해."
"알아...아는데...잠깐만..."
목소리가 다시 잦아든다. 깊이 숨을 내쉬는 꼴을 보니 다시 잠에 빠졌다. 에릭은 천천히 손을 내려 부드럽고 따뜻한 볼의 감촉을 느끼며 잠시 자비심 있게 기다려 주었다. 그리고 속으로 스물까지 센 뒤, 이번에는 이마를 쓸며 다시 말했다.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되는 거 알잖아. 비서들을 기다리게 할 셈이야?"
"...에릭."
"음?"
"자넨 악마야."
"칭찬 고마워."
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지만 이번에는 분명 의식이 깨어 있다. 천천히 눈을 뜬 찰스는 양 손을 짚으며 상반신을 일으키고는 언제나 그렇듯 에릭을 향해 손을 뻗었다. 겨드랑이 사이로 팔을 넣고 총격사건 이후 영영 움직일 수 없는 무릎 밑으로 손을 넣어 가볍게 들어올려 욕실 쪽으로 걸어간다.
"예전에도 얘기했지만 이 정도는 혼자 할 수 있어."
"알고 있어. 그럼 제 시간 맞게 일찍 일어나던가."
찰스는 포기한 듯 피식 웃었다. 그는 아마 모를 것이다. 그의 능력을 생각한다면 알 지도 모르지만 어쨌건 모를 것이다. 그가 살아 있는 한 순간 한 순간이 에릭에게 어떤 의미인지, 더이상 움직이지 못하는 다리를 바라보며 다시금 그 맹세를 되새기는 심정이 어떤 것인지도.
"그럼 잘 부탁해."
에릭은 찰스의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댔다 떼었다. 개조된 욕실의 받침대에 찰스를 내려놓고 몸을 돌리려는데, 찰스의 팔이 그의 목에 다시 한번 감겨온다. 어떤 의미인지 알아챈 에릭은 순순히 그가 원하는 대로 키스를 받아주었다. 혀가 섞이고, 키스를 마친 찰스가 잠시 에릭의 목에 기대어 눈을 감는다. 나지막한 속삭임을 들으며, 에릭은 다시 한번 그에게 키스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늘 미안해."
"헛소리."
스스로에게 맹세했다. 찰스의 이상에 동조하지 못하던 자신 따위 버리겠다고. 그가 살 수만 있다면,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그의 소원대로 결코 떠나는 일 없이 그와 함께 하겠노라고. 그의 연인, 동료, 반려, 혹은 그 무엇도 못 되더라도 반드시 그의 곁에 붙어서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꼭 지켜내고야 말겠다고. 이번 한 번만, 단 한 번만 운명이 자신을 향해 호의를 베풀어 준다면 그 한 번의 호의로 영혼을 팔겠노라고. 그리고 그 맹세의 대가가 바로 이렇게 눈 앞에서 숨쉬고 있다. 그의 다리는 죽었지만, 어쨌건 그는 살아있지 않은가.
샤워하기 위한 준비를 마친 다음 욕실 밖으로 나갔다. 가정부가 준비한 아침을 들여오고 저택의 각 전화기를 체크한다. 간밤에 아무 일 없었는지 얘기를 듣고 추가로 살펴야 할 보안 사항이 있으면 그걸 검토한다. 비서와 이야기하여 하루의 일정을 숙지하고 위험 지역은 없을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논한다. 이제는 익숙한 일과가 되어 버린 일이다. 그를 위해서라면, 그를 지키기 위해서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