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행크가 두고 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카드에 둘린 작고 섬세한 리본을 본 찰스는 생각을 바꾸었다. 원단 공돌이인 행크가 크리스마스가 되었다고 해서 이런 품위있는 아이보리빛 종이에 흑녹색과 적자색 줄무늬가 사선으로 박힌 세련된 실크 리본을 매 놓을 것 같지도 않았고, 더군다나 거기 기품있게 밀랍 인장을 찍을 것 같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비스트' 형태가 된 행크의 손가락으로 이런 섬세한 매듭맺기 작업을 해낼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아 보였다. 물론 핀셋을 들고라면 깔끔하게 해내겠지만.
게다가 그 옆의 작은 미니트리 센스만 해도 그렇다. 흔히 볼 수 있는 플라스틱 모조품이 아니라 실제 작은 전나무의 끝 부분을 잘라 깔끔히 잘 다듬어서 작은 도자기 화분에 담아둔 고급품이었다. 게다가 가지에는 아마도 초콜렛 봉봉일 듯한 작은 꾸러미가 금박지에 포장된 채 은색 리본에 매달려 흔들리고 있다. 손가락으로 잠시 그 반짝이는 "열매"를 건드리던 찰스는 신중한 손길로 포장 하나를 풀어 보았다.
"...맙소사."
나타난 것은 예상대로 초콜렛 봉봉이었지만, 거기 찍힌 마크는 찰스의 예상을 벗어나 있었다. 드보브 에 갈레, 르와얄. 설마 싶어 두어개 더 풀어보았지만 백합 형태의 것도, 위에 크림이 얹힌 것도, 분명 찰스가 매우 좋아는 하지만 요즘 들어서는 거의 먹지 못했던 그 맛있는 봉봉이 맞다.
"대체 누가..."
한동안 손에 초콜렛을 들고 유심히 바라보던 찰스는, 결심한 듯 봉봉을 입에 가져가 한 입 물었다. 부드러운 감촉과 함께 따라오는 씁쓸하고도 달콤한 맛, 깊은 풍미와 함께 녹아나오는 달콤한 크림, 레이븐이 처음 이 초콜렛의 가격을 알고는 휘둥그레 뜬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어떻게 그런 데 그런 돈을 쓸 수 있어?!' 책망이나 비난이라기보다는 순수한 경악에 가까운 질문이었지.
"마음에 드는 것 같아 다행이군."
커튼이 흔들렸다. 찰스는 조금 놀랐지만, 곧 이해하고는 미소지었다. 능력를 사용하여 기척을 파악하는 일이 너무 익숙해지면, 이렇게 "읽을 수 없는" 사람의 기척에 둔감해진다는 단점이 있다. 그 멍청해 보이는 헬멧을 벗은 남자가 어딘가 굳은 듯한 얼굴로 찰스 쪽을 향해 다가오다가, 미소를 보고는 약간 누그러진 얼굴을 했다.
"자네였나."
"몰랐던 것처럼 말하는군."
"정말 몰랐네."
"아무튼 내 작은 선물이야."
크리스마스 카드와 미니 트리, 그리고 봉봉. 차갑게만 보이는 이 남자와는 영 어울리지 않는 조합의 선물이다. 잠시 트리를 바라보던 찰스가 옛 추억을 떠올리고 피식 웃었다. 이 저택에서 훈련하던 시절, 바구니에 담겨 있던 같은 메이커의 다크초콜렛을 아무것도 모른 채 전부 먹어치운 에릭은 그 사태를 알아채고 경악한 레이븐에게 꽤 아프게 등짝을 얻어맞았던 것이다.
"왜 웃나?"
트리와 찰스를 번갈아 보며 약간 신경질적으로 묻는 걸 보니 이미 에릭도 찰스가 왜 웃는지 짐작하고 있는 듯 싶었다.
"아니, 그냥 옛 생각이 나서."
"그렇게 옛날은 아니지."
이 저택에 레이븐이 있던 시절, 습관대로 푹신한 소파에 편히 앉아 뒹굴거리는 레이븐 옆에는 에릭이 앉아서 책을 읽거나 사과를 깎곤 했었다. 꼭 그때같은 걸음으로 책장 쪽으로 다가가 에릭이 예전에 즐겨 읽곤 하던 가죽 장정의 책을 빼든다. 책표지에 얹힌 가느다란 손가락과 마른 손등을 본 순간, 찰스는 기묘한 충동에 사로잡혀 그만 툭 내뱉듯 말하고 말았다.
"자네 그거 아나?"
"뭘?"
"자네가 그럴 때마다, 그 손등에 입을 맞추고 싶었지."
책을 든 남자는 미동도 하지 않았고, 그저 시선만 찰스에게 옮겨 한참을 빤히 응시했다. 그 눈동자 안에서 흔들리는 감정들을 바라보며, 찰스는 계속 말을 이었다.
"여기서 자네가 소파에 앉아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내 드보브 에 갈레를 작살낼 때 특히 그랬지."
"아직도 그걸 기억하고 있었나."
"뭐 자네만큼이나 기억했을라구."
여전히 투명하고 신성하리만치 매끄러운 목소리가 그 붉은 입술에서 흘러나온다.
"그거 아나, 에릭? 사실 레이븐이 화낼 걸 알고 있었지만, 초컬릿 포장을 까는 손가락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말릴 생각도 못 했어."
"......그래?"
청회색 눈동자가 새파란 눈동자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장신의 남자는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휠체어에 앉은 남자는 마치 투명한 유리창 속을 들여다 보듯 그 눈동자 너머, 에릭의 뇌에 떠오른 생각들을 읽어낼 수 있었다.
'아직도 그런가? 나 때문에 그런 일을 겪고도, 아직도?'
찰스는 대답하지 않고 손을 움직였다. 휠체어는 부드럽게 움직여, 책창 앞에 기댄 남자 바로 앞까지 다가간다. 거의 무릎이 맞닿을 정도로 바짝 다가선 찰스가, 상대의 마음에 한 자 한 자 새기려는 듯 또릿하게 천천히 말한다.
"에릭, 우리 사이는 이제 변했어."
남자의 표정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찰스는 미묘하게 흔들린 그의 눈을 보았고, 그에게서 퍼져나오는 깊은 실망과 상실감을 함께 느꼈다.
"자네는 매그니토고, 나는 프로페서 X지."
"그렇지."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찰스의 말에 동의한다기보다 스스로에게 지금 그 말을 납득시키기 위한 동작이었다. 그리고 찰스는, 손을 뻗어 그런 그의 손을 잡으며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성의를 담아 말했다.
"다만 자네가 나를 찰스라고 불러주는 한,"
이 의심많은 남자가, 이 말만큼은 똑바로 받아들이고 믿어주기를 빌며.
"나도 자네를 에릭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붙든 손을 가져와 손등에 부드럽게 입맞추었다. 올려다보자 남자의 눈가가 붉게 변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누구보다도 냉혹하고 비정해 보이는 주제에, 실제로는 더없이 여린 사람이었다.
어깨에 손이 얹혔다. 천천히 얼굴을 가까이 가져온 남자가 마치 두려워 견딜 수 없다는 듯 불안한 눈으로 찰스에게 동의를 구했고, 찰스는 손을 뻗어 그 입술에 입맞추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오랜만의 키스를 끝낸 에릭이 '너무 달아.' 라고 불만섞인 목소리로 소감을 말했고, 찰스는 웃음소리로 화답했다.
"메리 크리스마스, 에릭."
"메리 크리스마스, 찰스."
놀랍게도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웨스트 체스터의 성탄절이 이제 막 시작되었다.
<END>
1. 한국 시간으로는 26일 새벽 2시 35분입니다만, 미국 뉴욕 주 시간으로는 25일 오호 12시 35분입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2. 키노하양이 말해준 소재인 "리본"과 스칼렛위치님이 얘기해 주신 소재 "트리"를 조합하여 만들어 보았습니다.
3. 로맨틱 코미디처럼 쓰고 싶었는데 이 둘이 심각해져 버렸네요.
4. 모두 기쁜 성탄 되셨길 바라며, 새해에도 복 많이 받으시길 기원합니다.
5. 덧. 드보브 에 갈레는 한국 청담동에도 매장이 있지만 비추입니다. 뉴욕에 비해 너무 비싸요! 어떤 초컬릿은 두 배 차이까지 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