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AU + 대체역사 + 그런데 커플링 여부는 아직 미정입니다...
2. 릴레이 형식으로 이어집니다. 전편은 편수 붙여서 접어두니 클릭하시면 전부 보실 수 있어요.
1. AU + 대체역사 + 그런데 커플링이 있을지는 아직....?
2. 연성 + 설정소개 + 그중간의 형태로 지지부진 이어질 겁니다 아마도.
3. 완전판을 다듬어 올리기엔 시간과 기력 내공이 모두 딸리는데
4. 덕심을 자제하기 힘든 나머지 저지르고 보는거라...;;
5. 글래스워커, 화이트폰 두 필자가 번갈아 이어갑니다.
6. 이 포스트 내에서 계속 갱신됩니다.
7. 최중요 포인트 : 고증 말아먹었습니다(...)
1940년 5월
아직 빗발이 가시지 않은 창밖으로 잠시 시선을 흘렸던 프란츠 할더 상급대장은, 부옇게 흐린 북프랑스의 하늘과 그보다 흐린 방안 공기를 거의 냉소적으로 빗대보며 목청을 가다듬었다. 침공이 시작된 이래로 쉴새없이 몰아친 진격의 여파가 녹진한 피로감으로 전신에 매달려있고 그보다 더 무거운 강박이 정신을 묶고있다. 반발하듯 튕겨나오는 충동적 살의의 증거로, 그는 여직 저 권총을 지니고 있었다. 암살 시도란 흉측한 단어가 보이지 않는 꼬리표처럼 비죽이 붙은 총이다.
바로 지금 눈앞에서 마치 괴수의 현신인양 고성을 토하며, 독일의 승리보다, 독일의 전쟁보다, 저의 승리와 전쟁에 도취한 그의 총통에게 선사할 뻔한 죽음.
사실 고작해야 몇 달 전의 충동이었다. 이길 수 없는 전쟁을 준비하며 하루하루 피말라가던 시기에, 이 돌이킬 수 없는 수렁으로 모두를 처넣으려 한 자를 총알 한 발로 끝장낼 각오까지 했었다. 미친 충동이었으나 그의 총통 역시 비근하게 미쳐있노라 짐작한다, 아니 이제는 확신한다. 광기에 한 발을 걸치고 시작한 전쟁에서 그나마 실낱같이 비춘 승리의 여지를, 이토록 어이없이 내팽개치려 하다니.
예상을 한참 앞지른 아군 기갑부대의 러쉬와 프랑스를 저버린 듯한 운명의 장난들이 겹쳐 여기, 덩케르크에 섰다. 15km? 16km? 운하를 건너 한 번만 더 몰아붙이면 승리는 제법 확고해질 것이다. 적어도 라인강에서 북프랑스, 도버해협 코앞까지를 제 3제국의 하켄크로이츠로 뒤덮을 수 있었다. 패주를 거듭해 손바닥만한 덩케르크에 몰린 30만 연합군은 지척에서 날아올 독일의 일격에 목을 내민 형국이었고 육군이 할 일은 명백하고도 간단했다. 저들에게 총알과 포탄을 안기거나, 해협의 싸늘한 물속에 밀어넣거나. 그걸로 프랑스는 마지막 숨통이 끊길것이고 영국 육군 또한 끝장일터다. 적어도 3~4년 안의 재기는 기대할 수 없을 타격일테고 제 3제국에게 그것은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런데 이 기회를, 마치 신들의 변덕스럽고 믿을 수 없는 호의와도 같은 기회를, 이 자가.
"룬트슈테트 상급대장의 견해가 전적으로 옳네. 아군이 숨을 고를 시점이야."
바로 몇 초전까지 신경질적인 고함으로 독일 국방군 장교단 '일부'의 불충함과, 무모한 전략을 마구 비난해대던 총통이 씨근거림을 삼키고 제법 근엄한 투로 그리 말했고, 총참모장 할더는 반사적으로 튀어나올 뻔한 실소를 눌러 참았다.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연승가도, 기갑사단의, 구데리안의 기적. 당신이 이 전장에 대해 뭘 안단 말인가. 재능있는 몽상가, 성공한 정치꾼, 그러나 슬슬 저가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요인으로 거둔 승리에 겁을 집어먹고 미래를 불신하기 시작한 오스트리아 하사 나부랭이가.
"아직 파리가 남아있다. 남프랑스도. 기갑전력을 낭비해선 안되지."
코앞의 30만을 어쩌지 못한 기갑전력에 무슨 의미가 있다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상급대장의 지각은 승리의 순간에서 몸서리쳐지는 파멸의 전조를 읽었다. 아르덴을 쓸고 들어와 거머쥔 이 믿을 수 없는 진격의 나날도 이 전쟁의 궁극적 승전을 약속해주지 않는다. 프랑스, 영국, 아마도 러시아, 그리고 어쩌면 미국까지 그들의 적이 될 터이고 눈앞의 작은 사내는 때가 오면 기꺼이 파멸의 왈츠를 추리라. 할더는 지성의 작동을 넘어서 육감의 작동을 통해 확신했다. 피로로 곤죽이 된 뇌가 조망한 히틀러는 오히려 어느때의 조망보다 진실에 가깝다. 이를 아프리만치 인지하면서, 그래도 전 육신을 내리누른 의무가 그의 입을 열게 하였다. 군인으로, 예스런 독일의 아들로 태어나고 살아온 그의 본질 일부가 인내를 주문하며 작동한다.
"진군을 멈춰선 안됩니다, 재고해주십시오 퓌러."
"여태 뭘 들었나...!"
어떤 운명이 그들을 기다린대도, 파멸을 최대한 피해 달리는 것이 육군 참모총장 할더와 독일 국방군의 의무다. 승리를 이어가며 하루라도 그날을 늦출 수 있다면.
할더는 자신의 요청에서 제법 절박한 간구를 느꼈다. 동시에 독재자의 짜증어린 일갈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으리란 결과도 직감했다. 아돌프 히틀러의 암흑같은 눈동자와 대면하는 일은 언제나 유쾌하지 않은 경험이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총통은 할더를 향해 다가오며 입가를 씰룩였다. 진군을 멈춰선 안 될 전략적 이유 따윈 이미 그에게 중요하지 않다. 할더가 그의 판단에 불복한다는 상황이 중요한 것이다. 할더는 부동자세를 취하며 문득 바로 곁의 참모를 주목했다. 낯익은 얼굴이다. 개전 직전까지 할더 본인의 측근으로 신임을 받았던 폰 리펜슈타인 중령이었다. 히틀러가 다가오는 짧은 찰나에 그와 할더의 시선이 마주쳤고, 할더는 어째서 이 순간 자신이 리펜슈타인을 주목했는지 그 이유를 섬전처럼 깨달았다. 젊고 유능하며 사려깊은 엘리트 장교 카를 폰 리펜슈타인, 나치를 경멸하던 과묵한 프로이센 귀족 장교, 심지어 할더의 측근으로 재직할 당시 그의 미친 충동을 공유했던 동지.....! 항시 말수가 적고 단호한 행동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해온 리펜슈타인의 눈에서 바로 그때의 충동, 혹은 결의를 읽은 할더가 호흡을 멈췄다. 전 감각에 한꺼풀을 들이씌운 듯한 경직이 왔다. 지금 이 방에는 총통의 돌발적 전선 방문에 동반한 최측근 무장SS 장교 둘과 룬트슈테트 상급대장의 참모장인 폰 죠덴슈테른 중장,그리고 최전선 10기갑사단의 교두보 전황을 가져온 연락참모 폰 리펜슈타인, 마지막으로 프란츠 할더 참모총장 자신이 있다. 두서없는 구성이었고 전혀 공식적이지 않은 자리의 지극히 우발적인 회합다운 풍경이라면 풍경이다. 애초, 총통이 20여분 뒤의 회의에서 전군 정지를 명하기 전 자신의 판단을 스스로에게 강변하던 객실 한 켠의 장면인게다.
그랬기 때문에 오히려 완벽한 기회였다. 우발적인 장소, 우발적인 구성원, 우발적 살의.
"나는...."
히틀러의 일인칭이 망설임없이 튀어나온것처럼 리펜슈타인의 손짓도 그랬다. 심지어 더욱 빨랐다.
할더는 자신이 폰 리펜슈타인의 감사 인사, 혹은 작별 인사를 들었다고 느꼈다. 환청이래도 좋았다.
'아직 이 총을 품고 계시리라 믿었습니다'
할더의 제복 주머니 속에 잠들어있던 왈사PP가 어느새 리펜슈타인의 손에 들려 불을 뿜었다. 장탄된 8발을 순식간에 토해낸 권총은 또다른 요란한 총성들과 함께 바닥에 떨어졌다. 영원과도 같은 찰나가 스쳐간 뒤, 할더는 반사적으로 엎드린 자세 그대로 폰 리펜슈타인 최후의 표정을 목격할 수 있었다. 목적한 바를 이룬 자의 만족스런 미소를.
"총통!!!!!!"
무장친위대 장교의 비명같은 고함에 그제서야 현실로 돌아온 할더 상급대장이 조금씩 떨리는 주먹을 움켜잡으며 해야 할 명령을 외쳤다. 사령부 폐쇄, 현장 폐쇄하라. 베를린에 극비 전문을 보내.
그리고 단 몇 초 동안 벌어진 극적인 사실을 최대한 침착하게, 스스로에게 납득시키듯 중얼거렸다.
"총통이 암살 당했다."
미간 정중앙과 가슴팍을 붉게 물들이고 똑바로 쓰러진 히틀러는 심지어 눈도 감지 못하고 누운 채였다. 있을 수 없는 부당한 살의를 이해할 수 없다는 양 경악한 표정은, 그를 죽이고 자신도 SS의 응사에 벌집이 되다시피 누운 폰 리펜슈타인의 만족한 얼굴과 꼭 정반대의 위치에 널부러져 있었다.
-이 죽음이 무얼 변하게 할 수 있을까.
상급대장의 인간적인 혼란을 압살해버리고, 날선 이성의 절규인양 그 질문이 뇌리에 울려퍼졌다.
독재자의 암살이, 이 전쟁을 어디로 끌고갈 것인가. 독일을, 유럽을, 그리고 세계를.
할더는 순간 이를 악물었다.
그 어떤 것도 보장할 수 없지만 하나만은 관철할 것이다.
아군 기갑사단은 정지하지 않는다. 이대로 진군해 덩케르크를 짓밟으리라. 더 오래 살아남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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넵 히틀러가 1940년 5월에 암살당하는 AU입니다. 저대로 40년 덩케르크에서 연합군을 개발살내버린 제 3제국은... 45년에 패망하지 않고 60년대까지 존속합니다 두둥.
글래스워커님과 둘이 대화하다가 설핏 나온 소재였는데 살 붙고 어쩌구 하다보니 이리 되었습니다. 처음엔 44년 슈타우펜베르크의 암살이 성공하는 걸로 풀어볼까 했는데, 그랬다간 시기상 독일이 곱게 조건부 항복 루트를 탈 확률이 너무 높아서 포기하고(...) 기왕 막장 대체역사 트리를 과감하게 질러보는 거, 모 님의 제언을 참고해 걍 덩케르크를 영프벨 연합군의 무덤으로 만들었습니다. 실제로 저그서 히틀러가 전군 진격 중지 삽질을 푸는 덕에 운명의 초침이 촘 비껴나가긴 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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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할더 참모총장은 반 나치 인사 맞습니다. 전쟁 전, 39년 초겨울에 실제로 나라도 히틀러를 쏴버려야 하지 않나 고뇌하며 권총을 휴대하고 다녔습니다(....) 결국 훗날 동부전선에서 히틀러에게 개기고 해임당했죠. 그래서 이 AU 서두에 캐스팅 '당한'겁니다. 이 암살 상황을 좀 더 계획적인 거사로 밀고나가야 그나마 손톱만큼 더 설득력이 있을텐데 넵 그러기엔 제 기력과 필력과 여튼 모든 조건의 미비함으로 인해 우발적 범행이 되었사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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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폰 리펜슈타인 중령은 물론 가상 인물입니다. 그런 사람 없었어라. 위에도 언급한 슈타우펜베르크 백작이 모티브이긴 합니다만. 이 AU에선 에릭에게나 찰스에게나 꽤 영향을 미치는 인물이라서 요렇게 소개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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왈사PP는 실제 히틀러가 45년 5월 자살할때 사용했다고 알려진 그 총기....라는 인연(!)도 인연이지만;; 당시 호주머니에 사삭 들어갈만한 호신용 권총이라면 이거밖에 없다 싶어서 채용.
그럼 뒷 수습은 일은 글래스워커님에게 떠넘기고 맡기고 저는 이만 총총.
이번 편에 붙이는 말
1. 화이트폰님 절 죽이세요. 이거 가벼운 이야기 릴레이라면서요, 그런 치밀한 글을 써 놓고 튀시면 전 어쩌라고!
2. 흥, 휘릭 휘릭 빠르게 진행시켜 버릴 테다!
3. 이번 편은 주로 세계관 설명 되겠습니다.
괴벨스는 경악했다. 히믈러는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괴링은 서둘러 권력 이양을 해야 한다고 소리질렀다. 일반적으로 암살은 거대한 역사의 흐름을 바꾸기에는 너무나 미약한 힘이었지만, 그 궤변과 광적인 연설로 온 독일 사람들의 마음에 위대한 제국의 꿈을 불어넣은 남자가 그 대상일 때에는 이야기가 달랐다. 베를린에서 어떤 고성이 오가건 간에 프란츠 할더는 개의치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강대한 권력의 부재를 노려 반격할지도 모를 적들의 숨통을 끊는 일 뿐이었다. 후세는 덩케르크의 참극을 꽤 오래도록 잊지 못했다. 그것은 전쟁이 아니라 일방적 학살이었으며, 항구 앞바다는 30만 장병의 피로 물들어 시뻘겋게 흔들렸다. 총통을 잃었어도, 아니 잃었기에 병사들은 눈앞의 적들을 향해 더 잔인하게 몰아붙였다. 아우성을 지르며 출항하려던 배들은 잔인한 슈투카의 급강하 폭격에 비명을 질렀고, 수많은 병사들이 적들을 향해 총탄 한 방 겨누지 못하고 차가운 바다 아래 가라앉았다. 사자는 젊은 피를 잃었고 발톱이 꺾인 채 주저앉았다.
"말도 안 돼!"
그 동안 괴링은 베를린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의 맞은 편에는 성마른 괴벨스가 눈을 빛내고 앉아 있었다. 총통을 잃고 극단의 실의에 빠졌던 것도 잠시, 그와 히믈러는 어느새 손을 잡고 지금 괴링이 반대하는 결론을 내놓은 상태였다.
"세상에 말이 안 되는 일은 없소, 원수."
"무슨 소리야! 총통 각하의 뒤를 이을 자는 나밖에 없어!"
괴링의 눈에서 뿜어나오는 욕망의 불꽃만큼이나 형형하게 광기어린 눈을 한 괴벨스는 이를 악물고 말을 이었다.
"우리는 이미 할더 상급대장과 이야기를 마쳤소."
"개소리! 그 늙은이는 총통각하를 지키지도 못했어!"
"당신도 마찬가지요. 우리 모두 마찬가지고."
괴링은 잠시 씨근거리다, 참지 못하겠다는 듯 말을 덧붙였다.
"당장 총살을 당해도 마땅찮을 늙은 놈에게 무슨!"
"그 총살당해도 마땅찮은 늙은이가 30만 적군을 처단해 버린 기갑부대를 이끌고 베를린으로 진격하면 당신은 어쩔 셈이지?"
중간에 말을 끊은 괴벨스는 차갑게 쏘아붙이며 괴링의 당치도 않은 의견을 묵살해 버렸다.
"그는 지금 덩케르크의 영웅이오. 기갑부대는 총통각하와 그의 명령 아니면 듣지도 않을 거요. 당신의 공군으로 기갑부대를 다 밟아 버릴 자신이 있는 거요, 원수? 그리고 그런 내전이 일어났을 때 우리의 진정한 계획, 동방 제국 건립을 밀어붙일 자신은 있고?"
회의실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비지땀을 흘리면서도 눈빛만은 형형하던 헤르만 괴링 공군 원수가 고개를 떨군 것은, 괴벨스 옆에 앉아 있던 히믈러가 특유의 머뭇거리는 어조로, 하지만 묘하게 입가를 일그러뜨리며 내뱉은 말 때문이었다.
"이미 끝났어요, 원수. 할더 상급대장은 우리의 현재 지위를 보장하겠다고 했거든. 거기 당신까지 포함된 데에 감사하는 게 좋을 거요."
"하지만...하지만 그 암살은...참모가..."
어물거리는 괴링을 바라보는 동그란 안경 밑의 입술이 좀더 일그러졌다. 그것은 이제 명백히 '미소'라 불릴만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그거라면 걱정 마시오. 카를 폰 리펜슈타인은 유태인이오."
"유태인!"
"그렇소. 당국의 눈을 어찌 피한 모양이오만, 놈은 더러운 쥐새끼 혈통이었소. 감히 루터교로 개종하고 기사 작위까지 받은 조부 때문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거요."
괴링의 입이 딱 벌어졌다. 괴벨스는 결국 참을 수 없어졌는지, 그런 괴링을 경멸을 숨기지 않은 시선으로 염증난다는 듯 쳐다보았다. 그리고 히믈러가 약간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우리의 과업은 변하지 않소. 프란츠 할더 또한 우리의 입장을 이해할 거요. 유태인의 음모로 선전하는 건 선전감독관께서 알아서 할 일이지. 하지만, 상급대장이 그런 참모를 두었다는 사실은 서류 증거로 남아 있소이다. 그의 명줄은 사실 우리가 쥐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요."
그로서는 드물게 길게 얘기한 것이 영 마음에 걸렸는지,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잠시 생각하다 괴링에게 한 마디를 더 남겼다.
"총통께서는 전 국민의 눈물 아래 묻히실 거요. 그리고 전쟁은 계속 수행될 거요."
이제서야 고개를 떨구는 괴링을 바라보며, 괴벨스는 속으로만 내뱉었다.
'멍청한 놈. 운 좋은 줄 알아라.'
여기서 납득하지 못했다면 공군 원수 또한 '유태인의 음모'의 희생자가 되었을 것이다. 사실 그랬다면 더 좋았을 텐데.
그렇게, 프란츠 할더 상급대장은 '덩케르크의 영웅'으로서 제3제국의 2대 총통 지위에 올랐다. 그는 1대 총통, 저 위대한 아돌프 히틀러의 뜻을 이어받아 전격전을 충실히 수행할 것을 다짐했고, 그러기 위해 저 늙은 사자, 영불해협 건너편의 오만한 왕국을 굴복시킬 것을 맹세했다. 히틀러가 할더의 어깨에 손을 얹고 '진격!'이라고 외치는 팜플렛과 포스터가 온 거리에 나붙었고 국민들은 지금의 총통이 히틀러의 뜻을 이어받은 또다른 위대한 영혼임을 납득했다.
그렇듯 슬픔은 새로운 숭배 대상과 목표를 만나 서서히 퇴색되어 갔지만, 늘 그렇듯 사람들의 분노와 공포는 또다른 제물을 필요로 했다. 총통을 암살하고 사망한 카를 폰 리펜슈타인은 모두에게 저주받은 이름이 되었다. '카를'이라는 이름은 불명예스러운 암살자의 이름으로 치부되었으며, 새로 태어나는 아기들은 그 이름을 피했고, 이미 그 이름을 가진 어른들은 가능하다면 개명을 하기도 했다. '리펜슈타인' 성을 가진 자들의 경우에는 강제로 그 성을 없애고 다른 이름을 받아야만 했다.
그 뿐 아니라, 그가 '더러운 유태인'이라는 것이 만 천하에 공표되었으며, 그러한 자가 2대 총통의 참모부에 참여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어디까지나 '유태인 비밀 조직의 음모'로 치부되었다. 이 더러운 음모자들을 '완전히 처리'할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상부에서 조용히 이야기되던 '최종 해결'은 이제 회의 속의 가정이 아닌 현실이 되었다.
1940년 폴란드의 도시 오슈비엥침에 완공된 첫 수용소가 그 '최종 해결'의 집행 장소가 되었고, 원래 수감될 예정이던 일군의 양심수들 대신 유태인들이 그곳에 수용되기 시작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한다면 '처분'되기 시작했던 것이다.2대 총통은 1대 총통의 모든 주장을 계승한 것은 아니었지만, 괴벨스와 히믈러가 유태인의 "최종 해결"에 골몰하는 동안 일체 그에 대한 간섭을 하지 않았다. 지금 시점에서 그의 머리 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오직 '제국을 향한 바다의 비수' 영국의 항복을 받아내는 일 뿐이었던 것이다.
1. 여전히 정신나간 대체역사에 고증 말아먹은 뽕빨물에 그리고 아닌 척 하지만 커플물이 될 공산이 무지 커보이는 그 무언가 되겠습니다.
2. 묻지마 전개 계속 나갑니다(....)
영국, 아직 위광이 사라지지 않은 대영제국의 존재는 1차 대전을 기억하는 모든 독일군에게 있어 반드시 넘거나 혹은 깨부숴야할 벽이었다. 위대한 제 3제국의 건설은, 프랑스를 무릎꿇린 지금 바다건너 사자를 제압할 수 있는가 여부에 모든 것이 달려있다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언제든 독일의 숨통을 죌 수 있는 로열 네이비의 존재, 그리고 대서양 건너의 터무니 없는 덩치 미국과의 커넥션까지 무엇 하나 치명적이지 않은 데가 없는 노제국과의 일전이.
할더는 그의 조국이, 군대가 택하고 뛰어든 길의 외통수 끝이 어떤 것인가 잘 알고 있었다. 전쟁은 시작되었고 이대로 독일은 범접할 수 없는 강력한 제국이 되든가 흔적도 없이 불타버린 패전국이 되든가 둘 중 하나의 운명이다. 그에게 주어진 의무는 개전 당시보다 오히려 간결하게 축약된 상태였다. 그저 주어진 모든 역량을 다해 싸우면 되는 것이다. 두 번째 총통이란 지위에 집약된 온갖 정치적 야합의 구렁텅이 속에서 할더 개인이 어떤 식으로 소모된다해도.
어차피 그날 이후 그에게 남은 유일한 선택지였다.
"귀하께서 총을 보관하고 계시다?"
베를린 신제국궁전의 총통 집무실에 앉아 여느때와 같이 돌처럼 굳은 얼굴로 차분히 수식들을 풀어보던 할더가 여상한 투로 반문했다. 수리적 명석함으로 제법 이름날린 젊은 시절부터 그에게 밴 습관이었다. 생각을 정리하거나 감정을 다스릴 필요가 있을때 그는 다양한 수학공식을 풀어보며 자신을 추스르곤 한다. 반은 공인으로써 업무 능률을 위한 의식이고 반은 개인적 여흥이었을 행위가 이 집무실의 주인이 된 시점부터 철저하게 공적인 의식으로 화한 것을 히믈러도 모르지 않았다. 총통을 호위하는 무장SS, 라이프슈탄다르테가 24시간 지켜본 새 총통의 일거수 일투족을 보고받는 것이 또한 그의 일이었으니까.
"폰 리펜슈타인이 끔찍한 범행에 사용한 각하의 권총 얘깁니다."
"그런데?"
".........."
할더는 여전히 풀고있던 수식에 시선을 고정한 채 대꾸했다. 그의 총. 사용하기에 따라 치명적 아킬레스건이 될 '물증'의 언급임에도 추호의 흔들림 없이 그저 덤덤한 말투였고 히믈러는 아주 잠시 침묵으로 새로운 총통을 가늠해보았다. 정권을 이양받고도 덩케르크와 도버 전선에서 두 달여를 보낸 총통이 베를린에 귀환한 건 바로 어젯밤의 일이다. 히믈러는 2개월 전 히틀러를 수행해 전선으로 떠났던 할더를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 치밀하고, 명석하며, 보수적이고, 프로이센 육군 전통의 긍지를 가진 군인, 그러나 일인자가 되기엔 야심도 배포도 부족한 참모형 인간으로 재단했었던 그 할더가 단 두어 달 사이에 매우 다른 인물이 되어 여기 앉아있었다. 적어도 예측하기 곤란한 낯선 면모를 가지고서 말이다. 히믈러의 목소리가 본능적으로 더 작게 사그라들었다.
"각하께서 개의치 않으신다면, 영원히 제가 보관하겠습니다."
"영원히?"
"영원히."
"괴링과 괴벨스가 곤란해할텐데."
"슈츠슈타펠(SS)은 각하의 SS입니다."
할더가 그제야 히믈러를 바라보았다. 어떤 감흥도 떠오르지 않은 완벽한 무표정으로 말이다.
예전에는 히믈러에게서 소름끼치는 뭔가의 결여를 종종 느끼고 불편해한 적도 있었다. 허나 지금, 속 뻔한 아부를 내밀며 그를 떠보는 교활한 사내에게 할더는 거의 어떤 감상도 떠올리지 않았다. 쥐새끼들의 권력을 원한다면 가져가라지
앞으로도 수행해나갈 전쟁에 필요한 것만 아니라면, 무슨짓을한들.
폰 리펜슈타인의 만족한 미소가 다시 한 번 뇌리를 훑고 지나갔다. 그것은 그날 이후 할더를 완벽하게 사로잡은 주박이었다. 독일에게 승리를. 다만 그것만을.
프란츠 할더가 1939년에 했어야만 했던 일을 대신 해주고 사살된 자, 지상의 온갖 혐오스런 오명을 모두 뒤집어쓰고 가버린 옛 부하에게 '퓌러' 할더가 해줄 수 있는 것은 하나 뿐이었다.
"그말, 기억해두지."
마침 거대한 독수리가 양각된 집무실 문을 노크한 비서관에게 들어오라 명한 할더가 조용히 뇌까렸고 히믈러는 가벼운 목례로 수긍했다. 그리고 흥분을 주체못하고 상기한 표정의 비서관이 빠르게 걸어들어와 총통의 책상위에 전보 한 장을 내려놓았다.
"각하, 영국이 아군의 정전 제의를 받아들였습니다...!"
".........."
두 달 간의 피말리는 공세가 끌어낸 '결과'를 앞에 두고 할더는 처음으로 표정 비슷한 것을 얼굴에 띄워올렸다.
덩케르크에서 수십만을 수장시킨 직후 독일군은 멈추지 않았다. 루프트바페는 덩케르크 항에서 가라앉은 연합군 함정의 부유물이 채 떠오르기도 전에 항속거리가 허용하는 한 영국본토를 폭격하기 시작했고, 처음부터 런던도 예외가 아니었다. 공군원수 괴링은 자신의 입지를 만회하기위해 가릴 것이 없어보였고 독이 바짝 오른 최일선 Bf-109의 숫적 우세를 뒤집기엔 영국 로열에어포스(RAF)의 전력이 미비한 상태였다. 훗날 휴 다우딩 같은 영국공군 노장이 한 달만 더 시간을 벌었어도 그리 당하지는 않았을거라 피토하는 회고를 했을 정도다. 덩케르크 궤멸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주요 공군기지와 공업지대, 그리고 런던 밤하늘을 뒤흔든 야간 공습 사이렌과 폭음, 불길과 파괴 앞에서는 아무러한 대영제국 수뇌와 왕가, 국민도 동요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물며 대피도 거절하고 항전을 독려하던 조지 6세가 버킹컴 궁전의 피탄으로 중상을 입는 사태에 이르러서야.
할더 이하 독일의 대공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루프트바페가 영국 하늘을 불태우고 독일해군의 양동작전에 로열네이비가 눈을 돌린 사이 프랑스 북부를 은밀히 출발한 일련의 강습부대가 템즈강을 거슬러 올라가 웨스트민스터 궁을 확보했을 때 공세는 거의 클라이막스에 이르렀다. 의회의사당에서 미처 대피 못한 기백의 의원들, 내각 요인들이 팔슈름예거의 총구 앞에 얼어붙어야 했으니 말이다. 심지어 수상 윈스턴 처칠은 총격전 와중에 피격 당했다.
"처칠 경은 어찌 되었답디까?"
"명이 붙어있는 한 협상에 응할 위인이 아니잖소."
"저런."
히믈러의 형식적인 탄식을 뒤로 하고 할더가 일어났다. 이제부터 그와 3제국의 승리자들은 영국이 감수해야할 굴욕의 수위를 결정해야 했다. 쉬운 조율은 아닐테지만 적어도 유쾌하기는 할 터이다.
"아. 장관이 도중에 다른 화제를 내놓은 통에 잊을 뻔 했군."
"하달하실 명이라도."
"이번 영국침공에 상당한 공을 세운 영국인 내부 인사가 한 사람 있소."
"제가 보고받지 못한 공로자입니까"
"그렇게 되었소. 군 방첩국 대신 내게 개인적으로 연통을 넣었더군."
"..................."
도대체 그게 가능키나 한 소리인가.
히믈러의 눈이 가늘어지는 것을 음미하듯 지켜본 할더가 여전히 대수롭잖게 폭탄같은 선언을 터뜨렸다.
"대담한만큼이나 유능한 신사더군. 장관의 '그' 특무기관에서 일하고 싶다기에 대동해왔소."
"각하...!"
"나조차 미처 보고받지 못한 장관의 특무기관에 대해서는 나중에 상세히 설명할 기회를 주겠소.....마이어!"
대기하고 있던 비서관을 향해 고개를 까닥거린 할더가 조용히 덧붙인 얘기에는 천하의 하인리히 히믈러도 낯빛이 변할 수 밖에 없었다.
"아군의 에니그마 암호체계가 영국정보국에 낱낱이 해석되고 있다는 제보를 가져온 신사라오. 이 건에 대해서도 내게 많은 걸 해명해야 할거요, 장관."
그때 독수리 문장의 문이 다시 한 번 열렸다. 안내한 마이어 비서관에게 신사적인 감사를 표한 초로의 사내는 천천히 걸어들어와 총통과 SS장관에게 정중히 인사하였다. 한 점의 주눅듦도 없이 극히 예의바른 태도가 그의 만만찮을 배경을 절로 짐작케 만드는 남자였다. 웃는 듯 마는 듯한 입매와 안경 너머의 주름진 눈매와 서늘하게 생생한 푸른 눈이 기묘한 위화감을 풍기는 인상이다.
"런던에서 온 닥터 세바스찬 쇼우라 합니다."
앞으로는 클라우스 슈미트라 불러주시면 되겠다고 덧붙인 묘한 전향자를 향해 히믈러는 억지 미소를 지었다. 정체불명의 이 사내가 그의 새로운 숙제가 되리라 직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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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우 드디어 쇼우 등장시켰습니다ㅠㅠ
할더와 괴링과 괴벨스와 배틀 오브 브리튼 사이에서 뭔가 많이 주절거리고 싶었던 한 마리 설정덕은 이대로 물러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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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전쟁 전만해도 독일만큼이나 나치에 뻑간 애들이 대놓고 놀던 동네가 런던인지라(....)
- 1차 연표. 이 연표는 협의에 따라 수정될 수 있습니다.
1939년
9월 1일: 독일: 폴란드를 침공.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9월 3일: 영국과 프랑스, 독일에 선전 포고.
9월 17일: 소련군, 폴란드 동쪽 국경 침공,
9월 27일: 독일: 바르샤바 점령.
9월 28일: 독일-소련 경계 설정, 우호 조약으로 폴란드 분할.
11월 30일: 소련, 핀란드에 침입(겨울 전쟁). 독일군이 핀란드 지원.
1940년
4월 9일: 독일: 덴마크 점령, 노르웨이 침략.
5월: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벨기에, 노르웨이 독일에 항복.
5월 28일: 아돌프 히틀러 사망. 히틀러의 뒤를 이어 프란츠 할더 총통 취임.
6월 4일: 덩케르크 철수 작전 사실상 실패. 프란츠 할더 영국 항공전 개시.
6월 22일: 프랑스 독일에 항복.
8월 6일: 소련이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를 불법 점령.
8월 27일: 웨스트민스터 강습 작전, 영국 정전협정 조인. 영국은 독일의 보호국이 된다.
9월 27일: 독일, 이탈리아, 일본, 추축국에 조인, 삼국 군사 동맹 결성.
10월 15일: 영국, 삼국 군사 동맹에 가입.
11월 20일: 헝가리, 삼국 군사 동맹에 가입.
1941년
4월: 유고슬라비아, 그리스, 독일에 항복.
5월 6일: 스탈린, 인민위원회의 의장에 취임.
12월 7일: 일본, 진주만 공습. 삼국 군사 동맹 침묵.
12월 25일: 일본, 영국령 홍콩 점령.
12월 27일: 삼국 군사 동맹은 진주만 공습을 불법 침입으로 규정하고 일본 규탄 및 동맹 축출.
1942년
1월 4일: 삼국 군사 동맹, 일본에 선전 포고.
1월 20일: 독일, 반제 회의에서 유태인을 학살하기로 결정.
2월 15일: 일본, 싱가포르 점령.
5월 7일: 일본, 산호해 해전에서 미국에게 대패.
6월 5일: 일본,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국에게 대패. 이 해전 이후, 미국은 태평양 전선에서의 주도권을 잡음.
8월 16일: 미·독·소 지도자, 모스크바 회담. 소련은 미·일전에 대한 지원 거부.
11월 11일: 독일, 비시 정권하의 비점령 프랑스 지역을 점령 지역으로 편입시켜 프랑스 전 영토를 점령.
1943년
1월 25일: 미국, 독일, 일본에 대해‘무조건 항복 원칙’ 발표.
7월 25일: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베니토 무솔리니를 체포하고 바돌리오 장군을 내각으로 삼음.
9월 8일: 독일, 이탈리아에 선전 포고, 로마 점령.
9월 15일: 무솔리니 구출, 파시스트 공화 정부(살로 공화국) 수립.
10월 13일: 국왕과 바돌리오 내각, 남쪽으로 도피. 독일에 선전 포고.
10월 19일: 모스크바에서 미·독·소 외상 회의.
11월 26일: 미국·중국 카이로 회담. 한국 독립 결의.
11월 28일: 미국·독일·소련, 테헤란 회담. 소련의 대일 참전 재토의.
12월 1일: 카이로 선언 발표.
12월 7일: 이탈리아, 독일과 살로 공화국에 항복.
12월 25일: 유럽 전쟁 종전.
1944년
2월 11일: 미·독·소 지도자, 얄타 회담.
4월 12일: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죽자 해리 S. 트루먼이 대통령직을 승계.
4월 28일: 베니토 무솔리니 암살, 이탈리아, 독일 제3제국의 보호국으로 편입.
6월 23일: 오키나와, 미군에 점령.
7월 17일: 포츠담 회담.
8월 6일: 미국,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 폭탄 투하.
8월 8일: 소련, 일본에 선전 포고, 8월 폭풍 작전 시작.
8월 9일: 미국, 일본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 투하.
8월 12일: 소련, 한국 동북부 도시 나진, 웅기를 점령.
8월 14일: 소련, 한국 동북부 도시 청진 상륙 감행.
8월 15일: 일본 제국의 일왕 히로히토, 무조건 항복. 한국, 대만 등 일본의 점령지 및 식민지 해방.
8월 19일: 소련, 8월 폭풍 작전 종료. 항복 조약을 받아들임.
9월 2일: 일본 제국이 항복 문서에 서명. 제2차 세계 대전 종료.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 발발
12월 25일: 제3제국, 유태인 학살 중단.
1951년
6월 7일: 폴란드의 마지막 절멸수용소 마이다네크, 노동수용소로 전환.
제3제국 유럽의 유태인 인구는 2차대전 전의 5% 미만으로 감소. (950만 -> 40만 미만)
이들은 노동원으로서 제3 시민권 발급.
이후 세계는 미국, 소련, 제3제국의 3강 질서로 개편.
이번 편에 붙이는 말
1. 원래 썼던 것은 다시 읽어보고 폐기처분. 쇼우와 히믈러의 면회/에릭과 쇼우의 첫만남/특무대 설립/을 진행중이고, 면회 장면 쓰던 중이었습니다만 다시 읽어보니 사족이라는 기분이 들어 제거했습니다. 배경은 최대한 짧게, 이야기 진행하면서 찬찬히 풀어보렵니다.
친위대 특무기관 '하켄 아들러'의 기장은 철십자를 위로 하고 화살 뭉치를 붙들고 있는 독수리였다. 혹자는 그것이 미국의 국가 상징과 너무 닮았다며 불쾌감을 표시했지만, 하켄 아들러의 수장 클라우스 슈미츠 박사는 그 화살을 결코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총통의 적에게 내려찍히는 화살이오.' 그가 그렇게 말할 때, 그 입가에는 늘 그렇듯 기묘한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그 기장을 소매와 가슴에 새긴 청년을 바라보며, 그는 그간 자신이 거둔 '성과'를 돌이켜 보았다. 내 '아들', 내 손으로 거둔 첫 아이.
"드디어 네게 할 일이 생겼구나, 에릭."
언제나 꾸민듯한 유쾌한 태도로 사람을 대하는 그가 묘하게 다정한 어조로 말한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마치 아들에게 다정한 말을 건네기라도 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러나 책상 건너편에 서서 그 말을 듣는 이의 메마른 얼굴에는 아무 표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무표정한 푸른 잿빛 눈동자가 박사를 바라보고 있을 뿐, 꾹 다물린 얇은 입술 또한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또 그렇게 무뚝뚝하게 굴고 그러니. 너도 좀 엠마처럼-"
"무슨 일입니까."
포기하듯 어깨를 약간 움츠린 박사는 안경을 손으로 밀어올리며 말했다.
"약간의 시연(試演)일 뿐이다. 그런 시시한 일에 널 보내야 한다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는구나."
"시연이라면?"
검은 친위대 제복에 감싸인 몸이 채찍처럼 꼿꼿하다. 장신에 금발에 푸른 눈, 매끈한 얼굴에 서린 엄혹한 표정은 독일 민족이 자랑하는 순수 아리안 혈통의 외모 그대로였다. 그러나, 그 몸 안에 흐르고 있는 피가 무엇인지 서 있는 남자도 앉아 있는 남자도 모르지 않았다. 물들인 그의 금발처럼 이 '아리안'도 가짜라는 것을.
"윗분들이 난리란다. 지금까지 겨우 두 명이냐고 말이다. 그 두 명이 1개 사단보다 값어치 있다는 걸 납득을 못 하더구나."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찬 슈미트 박사는 고개를 저으며 일어섰다. 청년의 바로 앞에 다가가 손을 내밀어 검은 제복에 감싸인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다.
"내일 아침에 차가 그 쪽으로 갈 게다. 타고 가서 네 능력을 보여주면 된단다."
이제 갓 스물이 된 엠마의 '힘'은 아직 완전치 않다. 환영을 보여주는 능력이라던가 특히 그녀의 '변신'은 훌륭하긴 하지만 히믈러 및 군 수뇌부와 총통에게 감명을 주려면 좀더 직접적인 것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것을 지니고 있는 것은 에릭 뿐이다.
"난 널 믿는다. 네 어머니도 마찬가지일 거다."
처음으로 청년의 푸른 눈에 섬광이 달렸다. 순수한 분노와 그것이 자아내는 살의다. 슈미트 박사는 그것을 알고서도, 아니 오히려 눈치챘기에 상냥하게 눈을 휘며 에릭에게 웃어주었다. 생각컨대,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에서 렌셔 모자를 발견한 것은 신의, 혹은 그에 비견하는 어떤 존재의 가호나 마찬가지였다. 그에게도, 소년에게도.
가족의 이야기를 꺼낸 지금, 에릭이 생각하고 있는 것도 그가 떠올리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 광경이리라는 것을 그는 안다. 회색의 수용소 벽,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떨며 서 있는 소년의 모친. 그 모친의 안전을 걸고서야 그는 소년을 온전히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날 실망시키지 말라는 말은 할 필요도 없겠구나. 그렇지? 이제 가 봐도 된다."
"예."
나이에 비해서는 입이 무겁고 말은 짧지만 아직 눈빛까지는 능숙하게 감추지 못하는 젊은 야수가 사랑스러워, 클라우스 슈미트는 다시 한번 부드럽게 웃어주었다. '하켄 아들러'의 존재 의의에 대해 의문을 가지는 자들에게 그는 내일 이 야수를 선보일 것이다. 그리고 이 '아들'을 필두로, 세상에 그의 '아이들'이 나설 것이다. 에릭이 나가고 방문이 닫힌 순간 그는 크게 웃지 않기 위해 입을 손등으로 잠시 막아야만 했다. 어리석은 자들은 그들이 인류의 새로운 단계를 목도하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리라.
다음날.
SS 특무대 '하켄 아들러' 소속 에릭 렌셔 소위는 너른 평지 건너편의 수풀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클라우스 슈미트가 말한 대로 오전 9시에 한 대의 차가 사택에 도착했고, 안에 타고 있던 SS요원들은 그에게 눈가리개를 하길 요구했다. 노골적인 광대 놀음이었지만 순순히 응한 것은 그가 어디로 가게 될지에 대해 조금의 관심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시연'. 이미 그 말 안에 모든 것이 들어 있었다. 그저 어디론가 가서 그간의 '훈련 성과'를 보이면 되는 것이다.
몇시간의 운전 후 그가 도착한 곳은 어딘지 모를 간이 비행장이었고, 그 곳에서 비행기로 갈아타고 다시 어딘가로 떠났다. 도착한 곳에서 다시 눈가리개를 하고 차를 타고 도착한 곳이 이 곳이다. 대략 동부 유럽이라는 것 외에 어디인지 모를 평원.
뒤쪽 한참 떨어진 곳에 벙커가 있다는 것만 알았다. 그 안에서 클라우스 슈미트가 말한 '윗분들'이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넓은 평지에 서 있는 제복 차림의 군인 한 명. 사방 수백미터 정도 되어 보이는 평지 건너편에는 수풀과 나무들이 서 있다. 대부분이 침엽수인 것으로 보이는 검은 나무와 푸른 풀. 에릭은 냉담하게 폴란드, 혹은 체코일 것이라 짐작하며 자기 안의 분노를 점검했다. 분노, 증오, 그의 힘의 원천이 되는 모든 격렬한 것들을 준비하고, 아낌없이 폭발시키기 위해 날을 벼렸다.
예측대로 전방의 검은 숲 그늘에서부터 연막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희미한 연기가 평지에 흩어지는 가운데 무언가가 달려나온다. 그것이 기관총을 든 십여명의 군인들임을 알아본 에릭의 입가가 경멸로 뒤틀렸다. 인간을 들이대다니, 슈미트가 얘기한 '윗분'이라는 놈들은 상상력이 고작 이 정도라는 것인가. 군인들이 사격을 개시하기도 전, 즉각 힘을 펼쳐 총기들을 붙들어 낚아올렸다. 이해할 수 없는 괴이한 현상에 경악한 병사들이 소리를 질렀고, 몇몇은 굳이 총기를 놓지 않으려 애쓰며 함께 끌려 올라갔다.
사정없이 총기와 그에 딸린 몇몇 사람들을 바닥으로 내동댕이치며, 몇몇 운 좋은 병사들이 날린 총알을 한 손을 내밀어 멈췄다. 총기와 총알을 한꺼번에 뭉쳐 고철로 만들어 굴리고, 이것으로 끝날 리 없다고 생각하며 다시 한번 증오를 끌어올렸다. 그를 이렇게 만든 자들에 대한, 그의 동족들을 학살한 자들에 대한 분노를.
어디선가 박격포탄이 날아온다. 그 사실을 안 순간 힘을 이용해 신관을 어그러뜨리고 땅에 처박아 버렸다. 상대가 포를 더 쏘기 전, 포대의 위치를 파악하고 포신을 구부렸다. 발사 순간에 망가졌는지 한 쪽에서 유폭으로 추정되는 큰 폭발이 일어났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그가 직접 눈으로 보았던 장작더미처럼 쌓인 동족의 시신들에 비하면 아무 의미 없는 희생 아닌가.
매캐한 연막 속에서 본질적으로 다른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증오와 분노에 온 몸을 맡긴 에릭의 입가에 이제서야 희미하게 웃음이 떠오른다. 육중한 캐터필러의 기동음, 그것도 한 대가 아니다. 익숙한 이 소리는 거의 틀림없이 그것이리라. 제3제국 영광의 주역, 이제는 늙었지만 여전히 위엄 넘치는 제국의 야수들, 단 한 번도 패배한 적 없는 육중한 거신.
거대한 3개의 덩어리가 천천히 연막 속에서 거체를 드러냈을 때, 에릭은 자신의 증오와 격노가 이제껏 느껴왔던 것보다 한층 더 격렬할 수 있음을 깨닫고 놀랐다. 판터를 양 옆에 거느린 티거는 에릭의 눈에 제3제국 그 자체였고, 그를, 그의 어머니를, 그리고 두 사람의 삶 전체를 지옥으로 바꿔버린 무언가였다. 혈관을 질주하는 격노를 제어하지 않고 마음껏 터트리며, 에릭은 왼쪽 옆의 어리석은 판터를 향해 손을 뻗었다. 지금까지 다뤄왔던 것들과는 비할 수 없는 거대한 저항력이 느껴졌고, 무심하게 회전하는 엔진과 캐터필러의 절규가 뻐근하게 와닿았다. 전진 속도는 느려졌지만 전차는 여전히 이 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에릭은 아까 이곳 저곳에 박아버렸던 박격포탄들을 띄웠다. 판터의 차체 측면에 포탄을 우겨넣어 폭발시킨다. 그렇게 캐터필러를 부수고, 정지한 판터의 해치를 힘껏 잡아뜯은 뒤 장탄되어 있던 포탄들을 억지로 끌어냈다. 기겁한 병사들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희미하게 바람을 타고 들려 왔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십여발의 포탄을 공중으로 띄워 올린 시점에서 이미 승리는 예정되어 있었고, 에릭은 차가운 얼굴로 증오를 다시 한번 폭발시켰다. 오른쪽 옆 판터에서 사람들이 뛰어나오는 것이 보였지만 무시했다. 그가 노려보고 있는 것은 바로 가운데의 티거, 한때 불패의 전차라 불렸던 거대한 제국의 첨병이었다. 한 손으로 포탄들을 정지시켜 놓고 다른 손으로 포탑의 해치를 노린다. 육중한 저항감이 느껴졌지만 이것은 그가 이길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다. 뒤쪽 벙커에서 누군가 무언가를 외치며 달려왔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해치가 열리고 그 안에 포탄이 날아들어간 것과, '시연' 정지 명령을 하달받은 장교가 에릭 바로 뒤로 달려온 것은 거의 동시였다. 거대한 폭음과 함께 티거는 완전히 침묵했고, 에릭은 웃음을 터트렸다.
"어떻습니까."
기관총으로 무장한 병사들, 박격포대, 낡은 전차라 해도 티거와 판터를 단숨에 무력화시킨 자가 단 한 명의 남자라는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벙커 안에는 오직 경악에 찬 침묵만이 가득했다.
"통제는...통제는 가능한가?"
히믈러의 질문에 슈미트 박사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히믈러로서는 아마도 지나칠 정도로 상상 이상의 성과이리라. 그간 보고서에 올라갔던 에릭의 성취는 기껏해야 일개 소대 정도의 인원을 상대로 한 백병전 훈련, 혹은 차량에 준하는 물체에 대한 '힘'의 행사 정도였으니까. 사실 슈미트도 이 정도일줄은 몰랐기에 기쁨은 더더욱 컸다. 포신을 구부리고 포탄을 되돌려 무력화 시키는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그의 '아이'는 어느새 무섭도록 성장해 있었던 것이다.
"가능합니다. 그는 우리에게 절대 복종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유태인이오."
학살을 종료한지도 5년이 다 되어가는 마당에 이따위 말이나 하다니. 클라우스 슈미트는 허나 그런 감상 따위 내뱉지 않고 부드럽게 지적했다.
"그리고 돌연변이죠. 비록 순혈의 아리안은 아니지만 그의 유대 조상은 지속적으로 아리아인과 혼인해 왔습니다. 그것은 그의 외모가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더러운 잡종이군."
"저라면 현재로서는 가장 유력한 전력이 되어 줄 돌연변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아우슈비츠에 끌려갔던 유태인 에릭 렌셔가 SS기장을 달고 군인으로서 살 수 있는 이유가 그것이었다. 현재까지 단 한 명 뿐인 남성 돌연변이체. 그리고 아리안의 특징으로 늘 거론되는 큰 키와 푸른 눈. 금발이 아니므로 1종 아리안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3종 아리안보다는 오히려 더 외모적 우월성이 돋보이기까지 한 것도 도움이 되었다. 물론 이 벙커 안의 다른 이들에게는 그 외모가 별 감흥을 주지 못하겠지만, 적어도 히믈러를 설득하는 데에는 도움이 될 터였다.
"각하, 부디 저 자의 전술적 가치를 가늠해 보십시오. 저러한 자들을 모을 수 있다면 제국은 더욱 강력해질 것입니다."
"원하는 것이 뭔가."
이제껏 침묵하고 있던 총통이 입을 열었다. 아까부터 불쾌한 표정이 되어 있던 그였지만, 오히려 육군 출신인 만큼 지금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얼마나 충격적인 것인지는 그가 가장 뼈저리게 체감하고 있을 것이다. 정적 속에서, 클라우스 슈미트는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1961년, 스위스.
에릭은 거울 속을 들여다 보았다. 누가 봐도 SS대원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자신의 모습은 언제 보아도 낯설고 역겨웠다. 때로는 임무에 따라 전혀 다른 옷을 입기도 했지만, 번개를 연상케 하는 두 개의 검은 알파벳은 그의 마음 속에 박혀 있어 결코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제3제국 단 한명의 유태인 친위대원, 에릭 렌셔 대위.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걸어나갔다. 의자에 잠시 걸쳐 두었던 제식 코트를 걸치고 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간다. 그의 정체를 아는 이들은 이 곳엔 없었지만, 병사들은 그의 검은 옷을 볼 때마다 긴장하며 자세를 바로 했다. 하겐 아들러의 기장은 베를린 외에서는 착용하지 않고 있지만, 그는 가끔 자신이 새장에 갇힌 독수리가 된 것 같은 느낌을 받곤 했다. 밖으로 뛰쳐나갈 수만 있다면 발톱에 걸리는 것은 무엇이건 찢어발겨버릴 맹금이.
스위스의 공기는 차갑고도 맑았다. 눈발이 휘날리는 것을 본 에릭은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중립국인 이 곳에서도 그는 여전히 갇혀 있다. 계속되는 임무를 해치워 나가며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까지는.
원래는 뒷편과 함께 보여드리려고 했는데, 오늘 어쩌다 보니 뒷편이 늦어져서 새로 공개해 드립니다ㅠㅜ
원래 데몬 헌터 시리즈는 네코님의 "인큐버스 찰스" 리퀘로 시작되었습니다. 리퀘 감사합니다 ㅠㅜ 덕분에 즐거운 상상을 잔뜩 할 수 있었어요! >ㅁ< 요건 보내주신 그림 허락받고 올립니다요.
네코님꼐서 그려주신 인큐버스 찰스입니다. 뒤의 검은 그림자가 너무나 모에합니다(......) 전 사실 저런 정말 중세 유럽 동판화 풍의 악마 디자인을 좋아합니다. 네, 악마는 악마죠. 그런 가운데에도 찰스는 너무 예쁘네요...
에릭과 찰스. 침대로 들어가고 싶어하는 찰스와 거부하는 에릭입니다. 다음 편을 아예 이걸로 써 볼까 해요.(분위기는 너무 가벼워질지도?!) 제목하야 찰스의 침대권 쟁탈(......)
받고서 완전 비명을 지르며 기뻐했습니다. 에릭의 차림새가 제가 생각했던 '파스벤더 버전의 반 헬싱' 보다는 점잖습니다만 저것도 너무 잘 어울리고요. 멋지고요, 섹시하고요, 근데 대체 에릭에게 어울리지 않는 옷이 뭘까요. 삐에로 옷? 암튼 둘이 너무 귀여워서 보자마자 숨 넘어갔습니다 ;ㅂ;
- 정치계로 진출한 찰스, 이상은 다르지만 그를 잠시 돕고 떠나려다 인생 틀어잡힌 에릭입니다.
- 찰스는 뮤턴트를 지지하는 정책을 펴고 있지만 자신이 돌연변이인 건 숨기고 있어요 :D
- 연작입니다. 이번 글에는 스칼렛 위치님의 리퀘스트가 들어가 있습니다.
최신식 설비가 늘어선 부엌은 과연 사용된 적은 있는지 궁금할 정도로 반짝거렸다. 리놀륨이 깔린 바닥, 기름 얼룩 하나 없는 벽의 흰 타일들을 바라본 찰스는 아마도 이 곳이 단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으리라 생각했다.
"이거 굉장한걸."
잠시 상념에 빠져 있다 고개를 돌리는데, 실로 희귀하게도 순수한 경탄에 찬 에릭의 음성이 들려 왔다. 벽면을 바라보는 그의 등에 시선이 머무른 순간 에릭의 주위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맙소사."
찰스도 경탄할 수밖에 없었다. 에릭의 눈이 향한 곳은 바로 주방 벽에 붙은 꽤 커다란 검은 패널이었다. 거기 보란듯이 진열되어 있던 각종 칼들이 부드럽게 공중에 떠올라 마치 유연하게 헤엄치는 은빛 물고기마냥 에릭의 곁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미세한 컨트롤에 따라 공중에서 움직이던 칼날들이 다시 패널에 고분고분히 걸리고, 개중 적절한 무게와 형태를 한 식칼 하나가 에릭의 손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좋은 칼이군."
대체 어디서 꺼냈는지 꽤 큼직한 생선을 도마 위에 올린 에릭이 찰스의 말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칼 끝을 꽂아 부드럽게 선을 그어주는 것만으로도 지느러미들이 간단히 떨어져 나가는 것을, 찰스는 거의 경의에 찬 눈으로 감상했다. 물고기 손질이라니, 타고난 신분과 재력 덕에 와인을 꺼내지 않는 이상 주방에 갈 일이 없던 찰스로서는 생소하기 짝이 없는 작업이었던 것이다.
칼등으로 긁어 비늘을 제거하고, 배에 칼을 꽂아넣고 매끄럽게 갈라낸 후 빼낸 칼끝으로 배를 부드럽게 짜내듯 눌러 내장 전체를 단숨에 밀어낸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은 일체의 동작 낭비 없이 물 흐르듯 이어졌고, 고개를 숙이고 선 남자의 곧은 등과 은근히 섬세한 선을 지닌 목덜미가 거기 어우러져 거의 안무적이기까지 한 아름다움을 자아내고 있었다.
흰 셔츠 밑에 드러날 듯 숨겨진 마른 등골과 잘 짜인 등, 그리고 벨트와 팬츠 밑에 숨겨져 있을 견고한 허리에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찰스는 자기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마치 예쁘장한 하녀를 둔 음흉한 주인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들어, 도저히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색한 - 아마도 찰스에게만 어색할 - 침묵을 견디다 못한 찰스는 가볍게 헛기침을 한 후 어떻게든 말을 꺼내 공백을 채워나갔다.
"그래서, 지금 만드는 건 뭐지?"
"간단한 생선구이지."
"좋군."
"마침 도미가 물 좋은 걸로 있길래 사 뒀어. 백포도주에 소금과 후추로 간을 해서 각종 향초와 함께 유산지에 싸서 굽는 거지. 괜찮을 거야."
찰스는 경이에 찬 눈으로 에릭을 바라보았다. 포도주 마개를 따던 에릭은 그 심상찮은 침묵을 느끼고는 의아한 기색으로 뒤를 돌아보았고, 마치 신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나타난 가브리엘을 바라보는 성모를 연상케 하는 찰스의 눈과 시선을 마주치고는 대체 뭐가 문제냐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자넨 정말 경이로운 사람이야. 그런 요리는 대체 어디서 배웠어?"
에릭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여기저기서. 그보다도 대체 표정이 왜 그래? 빠삐요뜨는 별로 어려운 요리도 아닌데."
"난 달걀을 삶으려다 폭파시킨 뒤부터 요리는 포기했다고."
뭔가 한소리 하려는 듯 찰스를 바라보던 에릭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손질을 마친 도미를 큼지막하게 두 토막으로 썰어 칼집을 넣고, 최고급 백포도주를 큰 스푼에 담아 접시에 담아둔 도미 위에 앞뒤로 골고루 뿌렸다. 포도주 향기가 피어오르고, 거기 소금과 후추로 적당히 밑간을 한 뒤 구석에 놓아둔다.
"공기가 황금색이 된 것 같아."
찰스의 맑은 목소리에 어쩐지 달콤한 기분이 섞인 것 같았지만 에릭은 애써 무시했다.
"최소한 20분간 곱게 놔둬야 해."
"그럼 그 사이 뭘 하지?"
"다른 재료를 준비해야지."
슬쩍 다가붙은 찰스가 뭘 뜻하고 있는지 모를리 없건만, 에릭은 냉정하게 잘라 끊으며 몸을 돌렸다. 물을 틀어 재료들을 깨끗이 씻고, 생선을 다듬은 칼은 잠시 치워 두고 좀더 굵직한 식칼을 집어든다. 뒤에서 찰스가 들으란 듯 한숨을 쉬건 말건 침착하게 감자를 깎고 양파를 까고 당근을 다듬는다.
"당근은 별로인데."
"어린애 같군 그래."
아마도 꽤 어린아이 같은 표정으로 툴툴대고 있을 것이다. 에릭은 일단 버섯을 적당한 크기로 썰어둔 다음 레몬과 감자 또한 썰어서 접시에 담아 놓고, 마지막 코스인 양파를 집어들고 썰려다 잠시 동작을 멈추었다.
"찰스?"
"...왜?"
잠시 망설이다 한숨을 푹 쉰 남자는 반쯤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왜 허리는 건드리고 그래."
그랬다. 찰스는 어느새 휠체어를 최대한 에릭에게 바짝 붙이고는 맨손을 슬그머니 들이밀어, 에릭의 허리를 매만지고 있었던 것이다.
"눈앞에서 그러고 있으니 왠지 만져보고 싶어지잖아."
가느다란 주제에 근육으로 꽉 잡혀 있는 허리에 손을 얹고 슬슬 쓸어올린다. 그 손길이 노골적인 유혹의 몸짓이라는 건 아마 세살짜리 아이라 해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봐, 경고하겠는데."
"뭘?"
어딜 봐도 웃음기가 섞여 있는 찰스의 음성에, 에릭의 눈꼬리가 미묘하게 흔들렸다.
"난 지금 양파를 손에 들고 있어."
"그래서?"
"그리고 도마 위에 놓고, 이제부터 이걸 썰 거거든."
"음?"
에릭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한 음절 한 음절을 끊어가며 명확히 발음했다. 양파를 썰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도 못하는 이 남자가 얼마나 손가락에 물 한방울 안 묻히고 산 인간인지, 혹은 얼마나 생활력 없는 인간인지 실감하면서.
"지금 그 손 치우고 내게서 떨어지지 않으면 몹시 뼈저리게 후회하게 될 거야."
"죽어도 떨어지기 싫은걸."
양파가 도마 위에 놓였다. 에릭은 가차없이 손을 휘둘렀다. 잠시 뒤, 찰스는 정신없이 눈물을 흘리며 양 손을 들고 에릭에게서 황급히 멀어졌다. "맙소사, 에릭. 이게 뭐야?"
이러면 안되지만, 에릭은 만면에 미소가 퍼지는 것을 실감했다. 당연히 에릭의 눈도 따가웠지만 아무튼 그랬다. 양파가 치한 퇴치에 효험이 있을 줄이야.
그렇게 찰스를 '퇴치' 한 후 월계수 잎을 꺼내고 로즈마리를 끊어둔다. 유산지를 충분히 잘라 감자를 배열하고 양파를 하나 하나 곱게 얹은 뒤 버섯과 당근을 올린다. 소금을 뿌려 숨을 죽여놓고서야 뒤를 돌아보는데, 눈물젖은 찰스의 파란 눈에 순간 할 말을 잃었고, 직후 이를 갈았다. 맙소사, 양파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남자 따위에게 감탄하다니! 저 놈의 눈동자는 왜 저리 쓸데없이 청명하게 파랗단 말이냐.
"에릭."
"왜 찰스."
찰스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에릭을 바라보았다. 맑은 눈동자 주위는 새빨갛게 충혈되어 있었고, 그런 그의 모습은 양파 때문이라는 것만 잊으면 거의 멜로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보일 정도로 감상적인 느낌을 자아내고 있었다. 닦아낼 생각도 하지 않은 눈물이 투명한 한줄기 선을 그리며 뺨 위로 흘러내렸고, 바로 그 눈물 방울에 젖은 붉은 입술이 천천히 말을 자아낸다.
"사랑해."
"......찰스?"
"아, 역시. 눈물을 흘리면서 이런 말을 하는 거 뭔가 굉장한 것 같아. 게다가 자네도 울고 있잖아."
"양파 때문에 말이지."
"응, 양파 때문에."
에릭은 뜨거운 눈시울을 한 채 이를 갈았다. 그리고 이 쪽으로 휠체어를 밀고 와 팔을 뻗는 찰스를 이번엔 막지 않았다. 생선이 완전히 재워질 때까지 앞으로 약 10분, 키스 두 번, 포옹 한 번, 그리고 그 틈을 타 찰스는 심술궂게도 에릭의 목덜미에 키스마크를 남겼다. "일주일 사이에는 지워지겠지?" 의원님 답지 않은 가벼운 말투는, 아직 그가 학문의 길에 몸담고 있었을 때를 상기시켰다. 잘 웃고 쾌활하게 떠들며 툭하면 여대생을 꼬시곤 하던 그 시절을.
다시 한번 키스하며, 찰스는 에릭의 긴 목을 팔로 감고 결코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 세게 입맞춤을 해 왔다. 요리하는 중만 아니라면 곧장 침실로 갔을지도 모른다. 간신히 떼어낸 에릭의 입술에는 찰스가 살짝 문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납치하길 잘 했군."
"이런 납치범에게라면 납치당할 맛 나는데?"
에릭은 웃으며 돌아섰다. 잘 재워진 생선을 얹고 그 뒤에 다시 레몬, 월계수 잎, 로즈마리를 얹는다. 백포도주와 올리브유를 한술씩 더 부어주고, 유산지를 잘 말아서 밀봉하고 오븐에 넣었다.
"이제 30분쯤 지나면 돼."
"그래, 우리에겐 30분이 있군. 충분하잖아?"
도저히 오해할래야 오해할 수 없는 세리프에, 에릭은 얼굴을 굳히고 찰스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 결연한 표정에 당황한 찰스가 뭔가 제대로 말하기도 전에,
"엇, 에릭?!"
찰스의 무릎 밑에 팔을 넣고 몸을 어깨로 받치더니 간단하게 들어올린다. 졸지에 자루마냥 어꺠 위에 실려가게 된 찰스가 뭔가 항의하기도 전에,
"그래, 30분이 있지. 가련한 인질께서는 목숨을 부지하려면 고분고분 따라주셔야겠어."
"맙소사, 내 경호원이 이런 악당이었다니!"
짐짓 하는 한탄조차 달콤한 유혹처럼 들려와, 에릭은 주저없이 방갈로의 침실을 향해 발을 옮겼다. 그래, 30분이면 충분하다. 맛있게 요리가 익어가는 동안 이 남자를 재료로 또다른 요리를 하기에 충분한 시간 아닌가 말이다. 키스가 이어졌고, 두 남자는 꽤나 조급한 손길로 서로의 옷을 벗기기 위해 최선을 다 했다. 누구의 시선도 신경쓸 필요 없고 어떤 소리를 내더라도 상관없다는 것이 이렇게나 좋은 일일 줄이야. 곧 침실의 공기가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고, 누구의 것이라고 분간하기조차 어려운 신음 소리가 방을 가득 채웠다.
그리하여, 30분 후 완성된 빠삐요뜨는 최고였다. 향긋한 생선 향기는 두 남자의 위장 뿐 아니라 후각과 시각과 촉각까지 만족시키는데 아무 부족함이 없었다. 다만, 따뜻한 상태로 먹지는 못했다. "식었지만 정말 맛있어!" 라고 찰스는 진심을 담아 열성적으로 말했지만, 에릭은 슬쩍 미간을 찌푸리고 약간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다음번에는 제대로 해 줄 테니까" 라고 말할 뿐이었다.
- 정치계로 진출한 찰스, 이상은 다르지만 그를 잠시 돕고 떠나려다 인생 틀어잡힌 에릭입니다.
- 찰스는 뮤턴트를 지지하는 정책을 펴고 있지만 자신이 돌연변이인 건 숨기고 있어요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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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다시 몰려들었다. 에릭은 시체 주위에 몰려드는 독수리들을 연상하며 최대한 그들을 막기 위해 노력했지만 소용없었다. 사방 팔방에서 마이크와 카메라가 찰스를 향해 포문을 열었고 질문이 그와 함께 발사되었다. 창백한 얼굴의 찰스는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기자들은 그 닫힌 입에서 한 마디라도 더 들어내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자비에 의원님! 이번 하원에서 결의안이 어떻게 되리라 보십니까?"
"학부모회의 성명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특수학교의 설립에 대한 의견을 들려주십시오!"
"실제 피해사례가 보고되고 있습니다."
찰스의 얼굴은 더 하얗게 질렸고, 기자들은 신이 나서 질문을 퍼부어댔다. 이미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것이다. 지금의 찰스가 어떤 의미로건 폭발하기 직전이라는 걸. 에릭은 찰스의 입가까지 마이크를 들이댄 기자를 거의 칠 뻔 했지만 간신히 분노를 억누르며 팔을 밀어냈다. 하지만 한 개의 팔을 밀어내면 두 개의 팔이 달려드는 형국이었다.
"통제되지 않은 능력은 위험한 것 아닙니까?"
"흑인 학교에서도 돌연변이 학생 입학 거부 운동이 일고 있는데 견해는?"
"각 사립학교에서 이미 돌연변이 입학 제한 교칙을 제정하고 있는데요,"
"학생의 돌연변이 여부에 대한 선별 조사가 있어야 한다는 의견에 대해서는"
휠체어를 쥔 손이 하얗다. 기자들은 전혀 모르겠지만, 입안된 법안에 대한 찰스의 반대 의지가 확고한 것은 그 자신이 바로 '돌연변이'이기 때문이다. '돌연변이 특수학교 설립안'이라고 하면 이름은 좋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사실상 "일반 학교에서의 뮤턴트 추방령"이다. 모든 청소년은 돌연변이임이 밝혀지는 즉시 일반 학교에서 나와 각 주에 세워질 '특수학교'로 전학을 가게 된다. 선택이 아닌 추방, 차별의 법안화인 것이다.
자기 아이가 돌연변이 아이들에게 피해를 받을까 두려워하던 학부모회는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돌연변이 학생들을 '어린 괴물' 쯤으로 생각하던 교육계 또한 환영했다. 의원들 또한 지역 사회에서 소수에 해당하는 돌연변이들보다는 절대다수인 '정상인'들의 편을 들고 싶어했다. 심지어 바로 얼마 전까지 그 자신들 또한 비슷한 차별을 받고 있던 흑인학교들마저 돌연변이들에게 등을 돌렸다. 찰스도 에릭도 아주 잘 알고 있다. 지금 의회에서 돌연변이의 편을 들어주는 것은 돌연변이인 자신들 뿐, 그리고 사회에서는 인권운동가들 중 소수만이 이 법안에 반대하고 있다.
"돌연변이 학생들의 신원은 비밀에 부쳐진다는데 문제가 있을까요?"
"대답해 주십시오!"
몇번이나 카메라를 향해 손을 뻗을 뻔 했다. 하지만 위험하다. 찰스 자비에 의원을 경호하는 에릭 렌셔가 '돌연변이'라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구체적으로 그의 능력이 무엇인지까지는 밝혀지지 않은 상태지만, 조금이라도 이상한 일이 발생한다면 기자들은 오히려 신이 나서 다시 한번 에릭을, 그리고 찰스를 정치적 궁지에 몰아넣을 기사들을 써댈 것이다. '언론을 향한 협박인가? 뮤턴트의 공격!' 등의 싸구려 타블로이드지같은 제목을 달고서.
에릭은 최대한 기자들의 공세를 막아내며 다른 경호원들과 함께 찰스의 진로를 확보하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휠체어는 기자들의 몸에 가로막혀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 기자들은 나름대로 필사적이었다. 찰스가 뭐라고 말하기 전에는 절대 놓아줄 기색들이 아니었다. 결국 견디지 못한 에릭이 뭔가 하려던 순간, 한 기자가 치명적인 질문을 내뱉었다.
기자들이 일순 조용해졌다. 찰스에 대한 기자들의 평판은 '입이 무거운 여우'였다. 그만큼 신중하게 절제된 화술로 자신의 의지를 부드럽게 표현하는 젊은 의원은 드물었다. 그런 그가 무려 격앙된 기색으로 외친 것이다.
"범죄자도 아닙니다. 그들은 그저 학생들입니다! 어린 학생들이요!"
"하지만 치명적인 돌연변이들이,"
푸른 눈에 번개가 흘렀다. 짓씹어 더욱 붉어진 입술 사이로 악물린 이가 보인다. 맑은 목소리에 가득한 분노가 공기를 쩌렁 울리는 순간 에릭은 가벼운 두통을 느꼈다. 설마?
"치명적이라고요! 지금 당신들의 말이 더 치명적이야!"
"의원님?"
"'돌연변이'라고 부르지 마! 그렇게 생각하지 않잖아, 당신들은!"
"찰스!" 에릭은 그만 다급한 마음에 이름을 부르며 손을 뻗었다. 찰스의 입을 막고 싶었지만 찰스가 좀더 빨랐다.
"괴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잖소!"
정적이 퍼졌다. 기자들의 놀란 시선이 찰스에게 고정되었다. 여기자 한 명이 반사적으로 입을 가렸다. 경악만큼이나 빠른 분노가 물 위의 기름방울처럼 기자들의 눈을 재빨리 뒤덮었다. 에릭은 이를 악물었다. 두통은 가상이 아니라 현실이었고, 그 진원지가 어디인지는 불보듯 뻔했다.
"찰스, 진정해!"
"그들은 인간이오! 당신들만큼이나 평범한 인간!"
다음 기자가 입을 열려는 순간 에릭은 더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TV카메라가 폭발했다. 기자의 손에서 피가 흘렀고, 비명소리가 울렸다. 녹음기들이 지직거렸고 필름이 망가졌다. 기자들이 혼란에 빠진 사이, 에릭은 찰스의 휠체어를 끌고 나갈 수는 없음을 깨닫고 허리를 숙였다.
"에릭?"
"조용히 해." 속삭임은 나지막했지만 어조는 엄격했다. "가만 있지 않으면 키스해 버릴 테니." 그리고 그대로 등과 무릎 밑에 손을 넣고 힘을 주었다.
"의원님! 지금," 프로정신이 넘치는 기자가 적어도 한 명은 있나 보군. 찰스를 안아든 에릭은 차가운 얼굴로 기자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대답했다. "의원님께는 휴식이 필요합니다. 방금 전 보셨죠? 더이상의 질문은 받지 않습니다." 그 기자는 좀더 질문을 할 듯한 태세였으나 갑자기 멍한 얼굴이 되어 가만히 둘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걸음을 옮기며 의아해 하던 에릭은 슬쩍 찰스 쪽을 내려다보았고, 이를 꽉 악문 찰스가 관자놀이에 한 손을 얹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서야 고개를 내저으며 중얼거렸다. "그래, 그래서 두통이 멈췄군."
찰스는 그대로 차에 탈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를 꽉 악물고만 있었다. 찰스를 차에 태운 에릭은 운전수에게 신호를 보냈고, 차가 조용히 블록 밖으로 미끄러질 때가 되어서야 찰스가 입을 열었다.
"에릭."
"왜."
"...미안해."
에릭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찰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하얗게 질려 있는 얼굴, 약간 흐트러진 머리카락, 그리고 짓씹은 자국이 아직도 역력한 입술. 그 푸른 눈은 너무나 비참해 보였다.
"뭐가."
"참을 수가 없었어."
폭발의 직접적 원인이 된 것은 뇌엽 절제술 얘기였다. 에릭은 찰스가 그 문제에 대해 얼마나 격노했었는지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그 자신이 인간의 뇌와 연관된 힘을 갖고 있었기에 더 민감하게 반응했기도 했겠지만, 사람을 폐인으로 만들기 십상인 그런 위험한 수술을 '아이의 미래를 위해' 선택한다는 점에서 그는 더욱 격렬한 거부반응을 보였었다.
'그건 수술이 아니야, 난 뇌엽 절제술을 당한 사람을 본 적이 있어. 에릭, 그건 정신적 도살이야!'
에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해해."
분노에 대해 자신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많지 않을 것이다. 격노, 폭발, 때로는 하지않을 수 없는 파괴행동. 이제껏 참고 참고 또 관대하게 참아온 찰스로서는 더욱 터트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겠지.
"최악이지?"
"멋진 최악이지."
찰스는 에릭을 바라보았다.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 에릭 렌셔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기왕이면 좀더 폭발시켰으면 좋았을 거야. 돌연변이 대표로서 말이지." 찰스가 쓴웃음을 지으며 양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래, 사실 그래서야."
"......"
"모두 한 마음으로 외치고 있었어. 두려움에 가득차서 말이야. '괴물!'이라고."
"보인다는 건 괴로운 일이군."
에릭은 조용히 찰스의 손에 손을 가져갔다. 손가락 사이에 손가락을 끼우고 조용히 얽는다. 그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찰스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천천히 말해주었다. 그가 동의할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 부러 얘기하는 것이다.
"그만두고 싶으면 말만 해. 인간들은 지금의 지위를 누릴 자격이 없어."
"오, 에릭-"
"이전에 얘기했잖아. 그들은 어리석어."
손을 단단히 얽어 온다. 찰스는 눈을 감고 에릭의 체온을 느끼며 숨을 골랐다. 고마운 친구, 언제나 힘들 때마다 악역을 자처해주는 이가 있다는 건 괴롭고도 기쁜 일이다. 그리고 그 유혹을 이겨낼 기회를 동시에 주는 것이다. 이렇듯 늘 기대를 배신하는 이에게.
"물론 내 답은 알고 있겠지."
"아직까지는 말이지."
에릭이 찰스의 뺨에 조용히 입맞췄다. "다시 얘기하지만, 그만두고 싶으면 말만 해." 찰스는 간신히 웃을 수 있었다. "그래, 자네 때문에라도 포기할 수가 없군."
키스를 돌려주며 찰스는 다시 한 번 웃었다. 이 쪽을 바라보는 남자의 푸른 잿빛 눈동자가 의아한 기색을 떠올린다. 팔을 둘러 등을 감고 도닥였다. 참으로 묘하지, 자네가 얼마나 위험한 사람인지 알고 있기 때문에 난 늘 버틸 수 있어.
"일단 다시 한번 노력해 보자고. 그나마 우리 편을 들어주는 사람들이 있긴 하거든."
"절멸을 위해 노력하는 어리석은 인간들 말이지."
"에릭!"
찰스는 숨을 깊이 들이쉬고 호흡을 골랐다. 기자들의 기억에는 약간의 조작을 가해 두었고 장비는 에릭이 망가뜨렸으니, 운만 좀 따라 준다면 언론은 비교적 조용할 것이다. 적어도 그 기자들이 장비를 수리하고 다시 달려들기 전에 이 어리석은 법안에 대한 대책을 생각해 두어야 한다. 아마도 어떻게든 될 것이다. 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차가 사무실에 도착했다. 찰스는 에릭을 놓아주고 앞을 응시했다. 가야 할 길이 멀었다.
<계속>
- 사실 진짜 제목으로 삼고 싶었던 것은... You can protect yourself only by protecting the others. 너무 길어서 아웃됐죠. 돌연변이 정책 및 인간들에 대한 찰스의 생각이었어요. 그 주체가 누구이건 누군가가 구분되고 차별당하는 순간 저도 당하게 되는 거죠. 으음. 뭐 그렇습니다.
- 뇌엽절제술은 1970년대쯤 가면 극히 희귀해집니다만... 한때 저게 치료법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이 호러블. 지금 병원에서 하는 것과는 많이 다릅니다. 사람 폐인되는 걸로 유명한 수술이죠.
- 그러고 보면 엑스맨 2에서 스트라이커 쥬니어의 머리 흉터를 보건대 이 짓 당한 듯...
- 정치계로 진출한 찰스, 이상은 다르지만 그를 잠시 돕고 떠나려다 인생 틀어잡힌 에릭입니다.
- 찰스는 뮤턴트를 지지하는 정책을 펴고 있지만 자신이 돌연변이인 건 숨기고 있어요 :D
- 연작입니다. 근데 이번 글에는 리퀘가 하나도 안 들어갔네요...
어떤 일은 절대 사라지지 않지만 어떤 일은 너무나 쉽게 지워진다. 보통은 사라지고 나서야 그 가치를 안다고 한다. 꼭 그렇지는 않다. 정작 사라지고 났을 때 별 것 아니라는 것을 깨닫지만, 그럼에도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는 것도 있는 것이다.
찰스는 일상 생활에 빠르게 복귀했다. "레이븐에게 엄청나게 혼났어" 라고 완전히 기가 죽은 얼굴로 어깨를 움츠리는 찰스에게 에릭은 거의 냉혹해 보이기까지 하는 얼굴로 딱 한 마디만 했다. "당연하지." 그에 대한 그의 의사는 확고해서, 그 말을 듣고 장난기를 발휘해 부러 미간을 찌푸리며 '아야!' 하는 동작을 취해보인 찰스에게 아예 덧붙이기까지 했다.
"나도 이놈의 팔만 아니었으면 한대 쳤을 거야."
물론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었기에 찰스는 크게 웃을 수 있었다.
총격은 에릭에게도 흔적을 남겼다. 허벅지와 어깨의 뼈를 고정하기 위해 철심을 박아야 했고 - 괜찮아, 나랑 어울리지 않아? - 몇개월간의 고된 재활기간을 거쳐야 했다. 찰스가 최고의 물리치료사들을 동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에릭의 어깨만은 완전히 고쳐낼 수 없었다. 그는 이제 오른팔을 어깨 위로 들어올릴 수 없게 되었고, 그 사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에릭이 퇴원하는 날, 찰스는 중요한 의결 때문에 도저히 찾아올 수 없었지만 대신 레이븐이 차를 몰고 달려와 축하해 주었다.
"나도 찰스가 못 온게 안타까우니까 그런 얼굴은 하지 말지 그래?"
"아니, 이건 그 문제가 아니야."
"뭐?"
에릭은 그걸 모르겠냐는 듯 레이븐의 얼굴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한동안 응시했다. 운전면허를 딴 지 6개월밖에 안 된 레이븐이 몰고 있는 새빨간 쐐기형 오픈카에는 민망하도록 선명한 녹색과 빨강색의 포인세티아 꽃다발이 가득했던 것이다. 금발의 늘씬한 여성이 그 한가운데 앉아 있는 것은 실로 장관이었지만, 어쨌건 에릭으로선 거기 앉는 것은 실로 무리였다.
"레이븐, 그 꽃다발 치워."
"어머, 마음에 안 들었어? 예쁘잖아. 축하의 마음을 담았는데."
화사하게 웃자 눈부신 금발이 흔들리며 빛을 발한다. 선명한 햇빛이 빨간 오픈카 주위에 흩어지는 듯한 환상이 보일 지경이었다. 에릭이 이를 악물고 말하는 것을 즐겁게 바라보는 아름다운 헤이즐빛 눈동자에는 장난기가 가득하다.
"거기 앉아가느니 차라리 걸어가겠어."
"너무해, 에릭! 사실 이건 찰스의 부탁이었는걸. 장미로 하고 싶다는 걸 간신히 말렸어. 정말이야, 물어보라고!"
십중팔구 찰스가 농담으로 말을 꺼냈다가 레이븐이 정말로 하려 드니 놀라서 말린 거겠지. 에릭은 가볍게 한숨짓고 자동차 뒤쪽을 바라보다가, 비어 있는 레이븐의 옆자리를 응시했다. 일반적인 딱딱한 자동차 좌석과는 달리 부드러운 쿠션이 갖춰져 있고, 아직도 어깨에 통증이 남아 이는 에릭을 위한 것인지 목베개가 얌전히 놓여 있다. 말로는 저래도 환자라는 점을 생각해 준 것일 테지.
"신사 양반, 빨리 결정해. 저기 봐, 잘 생긴 젊은 의사들이 이 쪽을 보는 것 같은데 내 마음이 흔들리고 있잖아."
에릭은 한숨을 푹 쉬고 차 안으로 들어갔다. 물론 차 문은 레이븐이 열어둔 터였고, 차에 탄 다음 돌아보니 정말 이 쪽을 향해 멍하니 입을 벌린 채 돌아보는 한 무리의 청년들이 눈에 들어왔다. '잘 생겼다'고 하기엔 눈 밑의 다크서클이 지나쳤지만.
"좋아, 잘 생각했어. 이제 돌아가자고."
에릭은 고개를 끄덕이며 좌석에 머리를 기댔다. 드디어 찰스 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간신히 마음이 놓였다. 깊이 숨을 내쉬고 눈을 감은 채, 신나게 재잘대는 레이븐의 수다를 들으면서 그제서야 깨달았다.
그에게 집은 이 곳 뿐이라는 걸.
그날 저녁, 웨스트체스터.
"뭐라고?" 에릭은 차가운 눈으로 찰스를 노려보며 반문했고, 찰스는 그 시선을 차마 받아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에 더 속이 뒤틀린 에릭은 다시 한번 강경하게 밀어붙였다.
"지금 그 말 다시 해 봐."
"에릭, 진정하고 들어. 이건,"
"진정하고 있어. 그러니까 다시 말해보시지."
목소리가 낮게 울려나온다. 빛깔도 온도도 얼음같은 눈동자가 찰스를 노려본다. 진정하고 있다지만 어디를 봐도 사실상 분노로 이글대고 있는 에릭 앞에서 잠시 침묵하다 숨을 들이킨 찰스가 말을 이었다.
"에릭, 이제 더이상 내 경호원 노릇을 할 필요는 없어."
"하."
"새로운 업체와 계약했어. 지금도 그들의 경호를 받고 있고. 더이상-"
"내가 필요 없다 이거지."
"에릭, 제발 이성적으로 얘기했으면 좋겠군."
에릭의 눈동자에 번개가 흘렀다. 그는 소파에서 몸을 벌떡 일으키고 곧장 찰스 바로 앞으로 다가왔다. 얼굴을 찰스의 얼굴 앞에 바짝 들이대고 눈을 바라본다. 타오르는 시선을 피하는 찰스에게 에릭이 으르렁댔다.
"찰스 프란시스 자비에, 내 눈을 봐. 내가 이성적이지 않은 걸로 보이나?"
"에릭!"
"회피하지 마. 그 놈들은 자네를 지켜낼 수 없어. 인간들은-"
"자네도 인간이야!"
"그들은 널 지킬 수 없어. 케네디 꼴이 그렇게도 나고 싶은 거야?"
"그럼 넌!" 찰스의 외침에 거실의 공기가 쩌렁 하고 울렸다. 좀처럼 언성을 높이지 않던 친구의 변모에 놀란 에릭에게 찰스는 단호하게 쏘아붙였다. "넌 어떻게 되고 싶은 건데! 나 때문에 죽고 싶어?"
"상관없어."
"내가 싫어!"
에릭의 눈이 커졌다. "나 때문에 네가 다치는 게 지긋지긋해!" 찰스는 피를 토하듯 외치며 이 쪽을 향해 뻗어오는 손을 거칠게 쳐냈고, 그러고 나서야 그것이 오른팔이었음을 깨닫고 동요했다. 아직 뻣뻣한 관절 때문에 통증을 느낀 에릭이 자기도 모르게 이맛살을 찌푸리고 짧게 신음하자 찰스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졌다.
"찰스-"
"맙소사, 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찰스의 얼굴은 어느새 들어올린 양손에 감싸여 보이지 않았지만 그 사이로 새어나오는 목소리에는 지독한 고통이 담겨 있었다.
"다 내 잘못이야-"
"왜 이래, 찰스!"
"에릭, 내가, 내 다리가 이렇게 된 건 내 잘못이야."
찰스의 팔을 붙들고 얼굴에서 손을 떼어내려던 에릭이 그대로 숨을 삼켰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찰스는 여전히 눈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말을 늘어놓았다. 목소리가 심하게 떨려 나왔고, 가끔 흐느낌 비슷한 것이 섞여 말이 흐트러졌지만 그래도 끊지 않고 계속 이야기한다.
"날 지키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건 그만둬. 내가...내가 내 행동의 결과로 불러들인 일이야, 에릭."
"찰스..."
"그리고 자네가 총에 맞은 것도 그 때문이고."
"아냐, 그건"
"지금은! 그냥 내 말을 좀 들어 줬으면 좋겠어."
천천히 손을 내린다. 붉게 달아오른 눈에는 물이 가득 고여 있었지만 결코 뺨 위로 떨어지진 않았다. 그런 얼굴을 하고, 벌개진 눈자위에 박힌 기묘할 정도로 새파란 눈이 에릭의 눈을 바라본다.
"자네가 부서져 가."
에릭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찰스의 눈만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 속으로는 지금 이 말을 막아야 한다는 외침이 울리고 있었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그가 막고 있는 걸까? 아니, 아닐 것이다.
"지금은 오른팔이야. 다음은 어디일 것 같아? 내가 다치고 죽는건 상관없어, 내 행동의 결과니까. 하지만 에릭, 자네가 다치는 건 난 견딜 수 없어. 이번에 알았어."
"그건,"
"내가 미치는 걸 보고 싶어?"
최강의 텔레파시 능력자가 미치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싶은 거야? 찰스가 속삭이듯 말했고, 에릭은 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깨닫고는 전율했다. 이미 찰스는 그를 지키기 위해 결코 하지 않던 짓을 해 버렸다. 자신이 의식을 잃고 있던 그 때, 아마도 미칠듯한 괴로움을 느꼈던 것이리라.
"에릭, 부탁해. 제발 내게서 떠나 줘. 경호만이라도 그만둬 줘, 제발."
그리고 이러한 결론을 낸 것이겠지. 에릭은 조용히 찰스 앞에 무릎을 굽혀 눈 높이를 맞췄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내밀어 지금은 무릎에 힘없이 놓인 양 손목을 붙들었다.
"에릭."
잠시 그 손목을 바라보다 찰스의 눈을 바라보았다. 의혹에 찬 듯 그의 이름을 부르는 창백한 얼굴에는 불안과 절망과 희망이 뒤죽박죽으로 섞여 있었다.
"찰스, 내 말 잘 들어."
에릭의 눈동자는 여전히 얼음같았다. 때로는 믿을 수 없을만큼 부드럽고 따스한 눈이기도 했지만, 지금만큼은 거의 냉혹하다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강한 의지과 냉정함이 그 안에 깃들어 있다.
"자네가 오해하고 있는 게 하나 있어."
붙들린 손목이 아파올 정도로 손에 힘을 가한다. 반사적으로 뿌리치기 위해 힘을 가했지만 독수리 발톱처럼 파고든 손가락들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당황한 찰스의 눈 바로 앞에 에릭의 얼굴이 다가왔다. 깜짝 놀라 눈을 감아버리는 순간, 에릭의 입술이 닫힌 눈꺼풀에 머물렀다. 그리고 바로 입술로 내려와 비집어 열고 혀가 들어온다. 키스를 마친 에릭은 찰스의 붉은 입술을 가볍게 혀로 쓸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난 널 위해 희생하고 있는 게 아냐."
"......"
"어떻게 생각하건 상관없어. 곁에 있을 거야."
찰스는 절망에 휩싸여 눈을 감았다.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지만, 동시에 그 안 깊은 곳에서는 에릭의 선언을, 그 속에 번득이는 집착과 애착을 기뻐하는 뭔가가 있었다. 소름끼치게 싫지만 동시에 부정할 수 없는 감정.
"에릭, 제발-"
"정 떼어내고 싶으면 내 뇌를 망가뜨려."
이번에는 찰스가 숨을 들이킬 차례였다. 에릭은 꽉 붙들고 있던 찰스의 두 손을 놓아준 후 이번에는 찰스의 얼굴을 붙들었다. 절대 고개를 돌릴 수 없도록 붙들고 바짝 얼굴을 들이댄 후 하나 하나 새기듯 말한다.
"그러기 전에는 꿈도 꾸지 마."
"......"
"자넨 내 거야."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찌르는 것 같은 아픔이 실제 심장을 직격했다. 그 통증에 미간을 찌푸리고 작게 신음을 내뱉자 다시 한 번 에릭의 입술이, 이번에는 목에 와닿는다. 아니, 입술이 닿은 것은 잠시일 뿐이고, 곧 그의 이가 살을 집어 노골적인 의도를 내보이며 세게 물었다. 고통에 겨운 목소리가 울리자 만족한 듯 자신이 남긴 자국을 핥고서 물러난다.
"에릭, 지금"
"사랑해."
찰스는 눈을 감았다. 지금껏 고여 있던 뜨거운 것이 간신히 뺨에 서느런 냉기를 남기며 흘러내렸다. 남자의 뜨거운 입술이 그 눈물에 닿아왔고, 그 감촉에 몸서리치며 찰스는 눈앞의 남자를 끌어안았다. 당해낼 수가 없다. 어떻게 해도 그를 당해낼 수가 없다. 할 수 있는 말은 그저 한 가지 뿐이었다.
"더 이상 다치지 마."
남자의 몸이 흔들렸다. 웃음 때문일 것이다. 그가 귀에 입술을 가져다 대고 조용히 속삭이는 말을 들으며, 찰스는 다시 한번 왈칵 눈물이 흘러나오는 것을 느꼈다.
- 정치계로 진출한 찰스, 이상은 다르지만 그를 잠시 돕고 떠나려다 인생 틀어잡힌 에릭입니다.
- 찰스는 뮤턴트를 지지하는 정책을 펴고 있지만 자신이 돌연변이인 건 숨기고 있어요 :D
- 연작입니다. 이번 글에는 화이트폰님의 리퀘가 들어갔습니다.
"아름다워."
그것은 매우 흔치 않은 일이었다.
"뭐가?"
"자네 눈이."
사무실을 향해 천천히 이동하던 휠체어가 순간 멈췄다. 찰스는 웃으며 지금 이 순간 에릭의 얼굴을 꼭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돌아보려 했는데, 머리를 돌려볼 것도 없이 눈앞에 그 눈동자가 나타났다. 청회색 눈동자는 그러나 놀랍도록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꾹 다문 입에 약간 찌푸리기까지 한 미간을 보니 화가 났나 싶기까지 했다. 그런 얼굴을 하고서, 에릭 렌셔는 찰스 프란시스 자비에에게 아주 냉정한 어조로 물었다.
"무슨 소리야, 그거."
"자네 눈동자는 정말 미치도록 아름다워. 내가 말 안했던가?"
햇볕에 따라 푸르게도 보였다 회색으로도 보였다 하는 눈동자가 찰스의 진의라도 탐색하려는 듯 빤히 이 쪽을 바라본다. 그 시선을 부드럽게 받아내며, 찰스는 다시 나지막하게 말했다. 달콤하게, 더없이 상냥하게.
"세상에는 수많은 푸른 눈이 있지만 자네같은 눈은 흔치 않아."
하지만 듣는 사람의 얼굴은 그 말에 담긴 진의 따위 상관없다는 듯 냉랭하기만 하다.
"찰스, 갑자기 왜 이러는지 모르겠는데,"
"그냥 그걸 알려주고 싶었어. 자네는 정말 아름다워."
에릭의 얼굴이 냉랭을 넘어 차갑게 얼어붙었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굳었다. 하지만 찰스는 그런 에릭의 기분을 풀어주려 하기는 커녕 오히려 빙글빙글 웃으며 말을 잇고 있었다. 지금 에릭이 왜 이리 표정이 싸늘해졌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이 보면 에릭이 찰스의 말에 화를 내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의 감정을 손에 쥘 수 있을 듯 감지할 수 있는 찰스의 답은 달랐다.
"갑자기 왜 이래. 내가 혹시 뭐 잘못한 거라도 있어?"
"아냐 친구 전혀 그런 건 없어. 그냥 말해주고 싶었을 뿐이야."
저 차갑게 굳은 얼굴은 너무 갑작스러운 말에 당황한 속내를 숨기기 위한 에릭의 필사적인 가면이다.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이 냉정하게만 보이는 남자가 약간이라도 그 냉랭함을 무너뜨리는 광경을 볼 수 있겠지만, 적어도 남들 보는 눈이 있는 여기선 그러면 안된다는 것쯤 찰스도 잘 알고 있었다.
"일단 가자고."
에릭이 일어섰다. 다시 휠체어 뒤로 돌아가 천천히 민다. 찰스는 대화를 계속 잇기엔 시간이 없다는 사실이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가 의원으로서 바쁜 나날을 보낼수록 단 둘이 이야기할 시간은 줄어든다. 암살 시도 이후 찰스의 의정활동은 이전보다 더 주목받게 되었고, 그는 점차 뮤턴트 인권 운동의 상징이 되어가고 있었다. 뮤턴트를 위해 일하는 것은 원래 원하던 바였지만 상징이 되어 떠받들리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아이콘이란 원래 동유럽의 성화를 의미하는 거라고. 난 예수도 성모 마리아도 아닌데.' 찰스가 불만을 담아 투덜거리고 있노라면 에릭은 어깨를 으쓱이며 받아치곤 했다. '어쩔 수 없잖아. 아마 그리라면 그릴걸?' '에릭!' '어차피 뮤턴트 분리주의자들은 이미 자네의 사진과 인형을 불태우고 있어. 인간들은-' '에릭, 스스로가 인간이 아닌 것처럼 말하지 마.' 에릭은 뭔가 더 말하고 싶어하는 듯 했지만 찰스의 얼굴을 보더니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에릭."
"왜."
"자네 말야..."
"또 이상한 소리 하면 저 분수에 휠체어 던져 버린다."
"그럼 얘기하면 안되겠는걸"
사실 요즘 에릭의 신경은 제법 예민해져 있었다. 지속적으로 찰스에게 날아드는 분리주의자들의 협박은 요즘 점점 더 심해져, 몇몇 메시지들은 명백히 위험한 의도를 내포하고 있었다. 찰스를 배신자, 괴물들의 보호자, 우두머리로 지칭하는 그런 편지나 쪽지들은 경고나 욕설을 넘어서서 노골적인 협박을 하고 있었다. 찰스는 이전의 총격 사건을 직접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메시지들을 대부분 무시해 버렸지만, 에릭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그 편지들의 발신처를 추적하고 주위를 살폈다. 지금 찰스의 옆에는 에릭 한 명만이 있지만, 이 평화로워 보이는 의회 앞뜰에도 사실 몇명인가의 경호원이 조심스레 찰스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얘기해 봐."
"응?"
"안 던질 테니 얘기해 보라고."
찰스는 피식 웃었다.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어."
"......"
"에릭?"
"미안해 할 거 하나도 없어."
아아, 그래. 늘 그렇게 말하지 내 친구. 하지만 난 늘 자네에게 미안해. 나만의 여정이었어야 할 일에 자네를 끌어들인 게 잘못은 아니었을까 하고. 하지만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정색을 하며 스스로 원한 길이었노라 말하는 자네가, 고맙고도 무섭다는 걸 자네는 알까.
"자네도 마찬가지야."
"무슨 소리야?"
"내게 미안해 할 필요 없어."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이름을 부르기 위해 숨을 들이킨 순간, 에릭이 허리춤에서 무전기를 꺼냈다.
"건너편, 전방 덤불에 뭔가 반짝였다. 알아봐."
그렇게 말하면서 몇 걸음 앞으로 나선다. 아마도 그 반짝인 것과 찰스 사이를 몸으로 가로막으려는 것이다. 찰스는 반사적으로 머리에 손을 올렸다. 가벼운 두통이라도 느끼는 듯 했지만 실상은 에릭이 주목하는 덤불 속에 누가 있는지, 어쩐 일인지 알아보려는 그 나름의 방식이었다. 에릭의 짐작대로 그 곳에는 사람이 있었다. 그 인간의 의사를 읽기 위해 마음 속으로 파고들어간 순간, 총성이 울렸다.
"에릭!"
살의를 느끼자마자 저격범의 의식을 끊어버렸지만 아슬아슬한 차이로 한발 늦었다. 새파랗게 질린 찰스 앞에서 에릭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에릭, 괜찮아? 에릭!"
비명을 지르며 몸을 숙이고 도망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무릎을 꿇은 채 비틀거리던 에릭이 한 손을 아래로 내렸다가 다시 올린다. 찰스의 눈에는 뒷모습만 보이는 까닭에 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갑작스레 힘껏 몸을 일으킨 에릭이 돌아서서야 몸 상태를 볼 수 있었다.
"맙소사, 에릭!"
다가온다. 한 발로 뛰다시피 해서 다가온 에릭의 허벅지에는 엄청난 상처가 나 있다. 일반적인 총상과 다르다. 울컥 피가 솟아나오는 것 보고서야 찰스는 하얗게 질려 손을 내밀었다. 어서, 어서 지혈하지 않으면 저 출혈량으로는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한발 다가온 에릭은 그대로 무너져 찰스의 온 몸을 끌어안았다. 남자가 힘겹게 숨을 내쉰다. 단 한 순간 모든 것이 악몽으로 변해버렸는데, 에릭이 그의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막을 수가...찰스, 막을 수가 없어."
"무슨 소리야, 에릭!"
"이 총알, 막을 수가..."
중얼거리던 에릭이 양 팔로 간신히 의자를 짚고 몸을 떼는 순간,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다시 한번 총성이 울린 것이다. 찰스의 눈앞에서 에릭의 어깨가 붉게 물들었다. 남자의 어깨에 박힌 총알은 몸 안에서 파열되며 큰 상처를 남겼고, 뜨거운 피가 찰스의 얼굴과 몸에 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자를 붙들고 있던 에릭의 팔은 움직이지 않는다. 한쪽 팔은 불가항력으로 인해 아래로 늘어졌지만, 다른 팔은 힘껏 버티고 서서 이름 모를 저격자들의 시야에서 찰스를 가리고 있다.
팔을 뻗었다. 눈을 크게 뜬 채 피투성이가 된 에릭의 몸을 끌어안은 찰스는 그대로 의식을 확장했다. 순간 모든 것이 멎었다.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던 사람들도, 달려가던 사람들도, 손가락으로 에릭 쪽을 가리키며 어딘가 외치던 사람들도, 사방에서 이 쪽을 노리던 저격자들과 총성을 향해 달려가던 경호원들까지도 모두 멈춰섰다. 마치 영화 속의 정지된 장면같은 광경이었지만, 모든것이 멈춰 있는 화면과는 달리 다른 모든 것들은 움직이고 있었다. 분수에서 흩날리는 물방울, 사람들의 머리칼을 스치는 바람, 그리고 찰스의 옷에까지 뜨겁게 번져가는 에릭의 피.
"찰스..."
에릭의 속삭임 한 마디에 모든 것이 바뀌었다. 서 있던 사람들 모두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죽은 것은 아니었지만 모두 한꺼번에 의식을 잃은 것은 틀림없었다. 도저히 선별할 수가 없었다. 누가 도망치는 사람인지, 누가 저격자인지, 앞으로 누가 더 총을 쏠 것인지 알 수가 없어서 모두 기절시킨 것이다. 그 비현실적인 침묵 속에서 에릭이 속삭이는 소리만이 찰스의 귀에 멍멍하게 들려 왔다.
"다행...이야..."
"에릭?"
"이번에는..."
"말 하지 마. 소리내서 말하지 않아도 돼!"
생각을 읽는다. 에릭의 머리 속에 떠오르는 말은 단 하나. '이번에는 지켜냈어.' 라는 의사가 전해져 와, 찰스는 아무 말도 못하고 이를 악물었다. 아냐, 그래선 안돼 에릭. 나 때문에 자네가 다쳐선 안돼. 날 지키는 것보다 자네의 목숨이 몇 배로 중요해. 적어도 내게는 그래.
"에릭, 조금만 더 버텨. 곧 구급차가 올 거야!"
찰스가 손쓸 수 있었던 거리 밖에까지 도망친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이 신고를 했는지 경찰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함께 구급차가 다가왔다. 에릭은 뭔가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그 말은 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했고, 숙련된 구급요원들의 손에 들것에 옮겨진 남자는 그대로 흰 차 안에 실려들어가 사라졌다.
"의원님, 괜찮으십니까? 다친 데 없으세요?"
다급한 질문에 찰스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피가..."라고 말하는 구급요원에게 한 손을 들어보이며 답한다.
"전 괜찮습니다. 다친 데 없어요."
"하지만 의원님."
"아까 그 사람을 살려주세요. 저 대신 총에 맞았습니다."
'대신'이라는 말을 할 때 그제서야 눈에 왈칵 눈물이 고였다. 사방에 사람들이 쓰러져 있기 때문인지, 구급요원은 거기까지만 듣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났다. 찰스는 양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선택을 후회한 적은 없다. 그 선택 때문에 불특정 다수의 악의에 목숨을 내맡기고 살아야 한다는 것도 온전히 납득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그 선택을 내린 자신이, 그리고 그 선택 탓에 움직이지 못하게 된 두 다리가 저주스러웠다.
그 선택 때문에 그가 총에 맞았다. 그리고 망가진 다리로는 지금 그와 함께 있을 수조차 없다. 사경을 헤매고 있을 텐데 손조차 붙들어 줄 수 없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 하나.
- 정치계로 진출한 찰스, 이상은 다르지만 그를 잠시 돕고 떠나려다 인생 틀어잡힌 에릭입니다.
- 찰스는 뮤턴트를 지지하는 정책을 펴고 있지만 자신이 돌연변이인 건 숨기고 있어요 :D
- 연작입니다. 이번 글은 화이트폰 님의 리퀘스트 요소를 넣기 위해 준비했습니다.
"찰스, 왜 그러나?"
"죄송합니다. 등이 쑤셔서 그래요, 로버트. 가끔 이러더군요."
2차대전 참전용사였던 하원의원은 그 심정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도 독일놈들이 박아둔 총알 자리가 가끔 욱신거리지. 빌어먹을, 절대 잊게 내버려 두질 않는다니까." 찰스는 웃으며 그에 동의했고, 두 의원은 서로의 정책에 지지를 보내기로 약속한 다음 자리를 파했다. 사무실에서 나오자 문 바로 옆에 붙어 있던 에릭이 자연스럽게 다가와 휠체어 손잡이를 잡는다. 모인 미간에 꾹 다물린 입술, 그의 마음을 읽을 필요조차 없어 보였다.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었어?"
"아니."
거짓말, 그렇게 판단했지만 그의 마음 안에 들어가지는 않았다. 만일 찰스가 꼭 알아야 할 일이라면 에릭이 먼저 입을 열어 알려줄 것이다.
"그냥 자네가 여기 있는 게 싫어."
바로 이렇게. 찰스는 실소를 터트리고 싶은 것을 참으며 그저 조용히 미소지었다. 에릭은 처음부터 정치계 진출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그는 미국인이 아니었고, 그에게 있어 정치란 기만, 술책, 그리고 그의 인생을 정신적으로 눌러죽인 '학살'과 깊이 연관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는 오래 전 인간 때문에 깊이 다친 짐승처럼 사람을 믿지 않았고, 특히 그 사람이 '다수' 일 때에는 더더욱 믿지 않았다. '당선될 때까지만.' 곁에 있어 달라는 부탁에 그의 대답은 이렇게나 짧았다. 당선된 뒤로도 그는 삼 개월을 더 기다려 주었고, 그동안 내내 찰스를 설득하기 위해 애썼다. '넌 의미없는 놀음을 하는 중이야. 저들이 그런 문제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히틀러도 처음에는 비웃음을 샀어. 어떻게 됐는지 봐.' 에릭에게 모든 정부는 똑같았고, 격론이 오가는 미국의 하원과 우뢰와 같은 박수를 보내는 나치스의 의회가 아무 차이가 없었다.
아마 지금의 에릭이 들으면 화낼 것이다. 총격 사건이 일어났을 때 찰스는 그가 가 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실 에릭은 그러한 암살 시도에 대해 몇번이나 경고했었다. 일종의 공포증 발현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무시해 버린 것은 바로 찰스 자신이었다. '이 곳은 전장이 아니야.' '충분히 전장이야. 넌 저들에게 선전포고를 했어.' '에릭, 제발! 내게 다가오는 사람들을 오스왈드 보듯 할 필요는 없잖아.' 그는 항복하듯 양손을 들었지만 그것은 오히려 불만의 표시라는 걸 찰스는 잘 알고 있었다. '원하는 대로, 의원님. 하지만 내가 늘 지켜줄 수만은 없잖아.' '오, 에릭-' '난 곧 떠날 거야. 내가 없으면 어쩌려고 그래. 그래 가지고 '살아 있는' 자네 기사를 언제까지 읽을 수 있겠어?' 그 고집스러운 얼굴에 찰스는 약간은 도전적으로 내뱉었다. '그만 좀 해. 기분은 이해하지만 여긴 미국이야.' 하지만 그를 공격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고집스레 이 쪽을 바라보는 청회색 눈동자의 주인에게 확신시키고 싶었을 뿐이다. '이 곳은 미국이야. 나치스 독일이 아니라고. 이 곳은 자유와 민주주의의 땅이야.' '그리고 대통령을 암살하고 말이지.' '에릭!' 고집스러운 얼굴로 이 쪽을 바라보던 그가 찰스의 얼굴을 양 손으로 붙들었다. '난 네게 늘 감사하고 있어.' '...에릭?' '넌 증오심밖에 모르던 날 구해줬어. 그리고 날 더 강하게 만들어 줬고.' '잠깐, 이건' 키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네가 죽는 게 싫어. 그러면 난 인간을 영원히 증오하게 될 거야.' 끌어안았던 기억이 난다. 그렇다. 사실 그것이 두려웠다. 자신의 곁에서 떠난 그가 인간을 증오하며 다시 그의 인생을 지배하던 그 증오 속으로 들어가 버릴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눈을 떴을 때 눈물이 났다. 깊은 마취에서 깨면서 지나치게 피를 잃었던 까닭에 너무 추워서 온 몸이 덜덜 떨리고 배에서는 끔찍한 통증이 엄습해 왔지만 그 때문에 운 것이 아니었다. 손이, 오직 손만이 따뜻했다. 침대 옆에 앉아 그가 깨어나기만 기다리다 잠들어 버린 에릭의 머리가 그 손 곁에 있었다. 천천히 손을 움직여 그의 머리를 가볍게 만져 보았을 때, 찰스는 세상이 부풀어올라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옆쪽으로 눈물이 흘러 떨어지자 시야가 간신히 맑아졌다.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쓰다듬고 또 쓰다듬는데도 에릭은 눈을 뜨지 못했다. "찰스!" 먼저 비명을 지른 것은 병실 안으로 들어오던 레이븐이었다.
비명소리가 울리고서야 에릭은 깨어서 찰스를 바라보았다. 허나 눈을 마주친 것은 단 한 순간, 곧바로 내리뜬 시선을 한 에릭은 머리를 쓰다듬던 찰스의 손을 잡아올리더니 아주 조용히 손바닥에 입을 맞추었다. 그 뒤로 며칠간 찰스는 그를 보지 못했고 - 애당초 가족밖에 면회할 수 없다는 것을 레이븐이 우겨서 들어올 수 있었다고 했다 - 그래서 그는 에릭의 입술이 닿았던 그 손을 내려다보며 에릭을 생각하곤 했다.
"난 자네가 떠난다고 해도 이젠 못 막겠어."
며칠 뒤, 간신히 그렇게 입을 열었을 때 에릭은 한동안 찰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내가 떠날 거라고 생각해?"
"자네 말대로 되었잖아. 바보라고 욕해도 좋아."
이미 선고는 내려졌다. 다시는 두 발로 땅을 딛을 수 없을 것이라는 얘기를 듣고도 찰스는 크게 동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에릭의 날카로운 눈까지 속이지는 못했다. 잠시 아래쪽을 헤매던 시선, 미소를 띠려다 애매하게 실패한 입가, 짧게 숨을 내쉬고 깊이 숨을 들이쉬는 모습까지 본 그는 충실한 경호원답게 그 자리에서는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게 바로 몇분 전 일이다. 찰스는 어떻게든 웃으려 애쓰며 다시 말했다. 가볍게, 아무렇지도 않게.
"그는, 날 쏜 사람은 뮤턴트들에게 딸을 잃었어."
"찰스."
암살범과 눈이 마주친 순간, 무방비한 찰스의 뇌 안으로 남자의 기억이 흘러들어왔다. 일부러 읽은 것은 아니다. 찰스를 바라보는 순간 그 중년 남자는 입을 꾹 다문 채 마음 속으로 외치고 있었다. '놈들과 한패다' '살인자' '괴물' 찰스와 같은 파란 눈을 가진 소녀가 그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다. 공포에 질린 채 절규하며.
"범인들은 잡히지 않았고, 그가 본 건... 그가 본 건 비명을 지르며 납치당하는 딸아이의 얼굴이었어. 그게 마지막이었던 거야."
"찰스!"
에릭이 찰스의 어깨를 꽉 붙들었다. 그만 말하라는 뜻이라는 걸 알면서도 말을 멈출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 말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레이븐에게도, 행크나 알렉스에게도 말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절규하는 소녀의 영상을 보며 아버지는 되뇌이고 있었다. '괴물' '살인자' 그는 찰스가 뮤턴트라는 걸 몰랐지만, 그가 뮤턴트 등록 법안을 반대한다는 것만으로도 그를 죽이고 싶어할 만큼 뮤턴트를 증오하고 있었다. 왜냐면,
"왜냐면...왜냐면," 호흡을 가다듬지 않고는 그 다음 말을 하기가 너무나 어려웠다. "왜냐면 딸의 머리는 끝내 발견되지 않았으니까."
어깨를 붙든 에릭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그 손에 얼굴을 기대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찰스는 말했다. 마음은 당장 입닥치고 그에게 기대라고 외치고 있었지만 도저히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에릭, 난... 나란 인간은 최저야."
"개소리."
그 아버지의 마음을 들여다 본 순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올라오는 총구를 보면서도 그를 멈추지 못했다. 순간 반강제로 들이밀어진 증오와 혐오와 살의는 그 정도로 강렬했고, 밀어닥치는 슬픔과 지옥같은 고통은 심장을 찌르고 들어왔다. 그럼에도 총에 맞는 순간 그의 머리 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내가 죽어서 그 법안이 부결된다면 그걸로 됐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에릭."
"찰스!"
"자네가 내 뒤를 이어주면 된다고...그걸로 족하다고."
"그런 소리 하지 마."
"죽도록 무서웠지만 그건 총 때문도 아니고 죽을까봐서도 아니었어. 알아?"
"......"
찰스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바로 앞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청회색 눈을 향해, 그가 자신을 증오하거나 경원하게 된다 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혹시라도 살아서 눈을 떴을 때 자네가 없을까봐, 인간을 증오하기로 결정하고 내 곁을 떠났을까봐 그게 두려웠어. 난 그런 인간이야."
언젠가 날려보낼 수밖에 없는 독수리를 붙들어 두고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이 말을 하는 것으로 다시 한번 족쇄를 채우게 된다는 것도 모르지 않았다. 가라고 말하면서 이리 토로하는 것은 정말 최저의 행동이다.
"에릭, 떠나는 게 나을지도 몰라. 자네와 난 달라. 어쩌면 내 꿈이 잘못된 걸지도 몰라. 그렇다면 누군가는 다른 길을 준비해야 해."
"자네의 꿈은 잘못돼 있어."
칼로 에는 듯한 통증이 가슴에 느껴진다. 하지만 잘 알고 있다. 이게 에릭이다. 가장 아픈 순간에도 절대 고개를 돌리지 않고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걸어오는 이다.
"그 멍청한 망상을 그만두지 않는 한 반드시 누군가는 자네를 죽이려고 할 거야."
"그렇겠지."
"그러니까 헛소리는 그만해. 난 여기 있을 거야."
놀라서 바라보았다. 차가운 파란 눈이, 날카롭게 뻗은 눈썹이, 반듯하게 내려온 콧날이, 그 밑에 굳게 다문 입이 그의 결심을 말해주고 있다.
"에릭..."
"다시는 그런 놈들이 널 해치지 못하게 할 거야. 찰스, 넌 순진하고 오만한 바보고 그 꿈은 말도 안되지만 나와는 상관 없는 얘기야. 그러니 떠나라는 헛소리는 받아들일 수 없어."
"에릭, 넌 분명히,"
에릭이 침대 위에 놓인 찰스의 다리에 손을 얹었다. 분명 눈으로는 그의 손이 얹힌 것이 보이는데 방치된 다리에는 아무 감각도 없다. 천천히 다리를 만지던 에릭이 강경하게 말했다.
"꿈도 꾸지 마. 이런 몸을 하고서 나더러 가라고?"
"에릭, 이건 네 책임이 아냐. 그리고 네가 걱정할 일도"
"앞으로는 내가 책임질 일이야."
어깨 위에 다시 손이 얹혔다. 이번에는 입술이 다가온다. 날카롭고 격렬한 키스에 찰스는 할 말을 잃고 에릭의 팔을 붙들며 매달렸다. 입술을 뗀 순간 에릭이 속삭였다.
"..."
찰스는 눈에 눈물이 핑 고이는 것을 알아채고는 눈을 감아 버렸다. 그의 나직한 속삭임에 기껏 이악물고 말했던 결심이 산산이 부서져 나간다. 날 떠나, 에릭. 난 분명 자네를 상처입히게 될 거야. 나를 지켜내건 그러지 못하건 간에 자네는 상처를 입겠지. 깃털은 꺾이고 날개는 부러질지도 몰라. 다시는 날 수 없을지도 몰라. 내게 갇히지 말고 날아가. 이 우리에서 벗어나 버려. 지금이 기회야. 지금 간다면 돌아보지 않을 수 있어. 자네도, 나도.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에릭이 뒤에서 말을 걸어왔다. 찰스는 잠시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과거의 상념에서 벗어나 옆을 돌아보았다. 여전히 보이는 것은 휠체어를 미는 손 뿐이다. 남자인데도 길고 보기 좋게 모양이 잡힌 우아한 손.
"아 그냥 좀."
사람들이 많다. 이런 곳에서 함부로 잡을 수는 없었지만, 지금 이 순간 찰스는 에릭의 손을 잡고 싶었다. 강한 손, 그를 건사하고 돌봐주는 손, 그를 사랑해 주는 손, 그를 지지해 주고 받쳐주는 손, 남들에게는 차가울지 몰라도 자신에게는 더없이 따뜻한 손을.
"빨리 은퇴하라고."
"힘들 걸. 아직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나 아니면 안된다고 믿는 건 노인들이나 하는 짓이야."
"난 갓난아이 때 이미 흰 머리를 달고 태어났거든."
"어울리네."
햇살이 따스했다. 찰스는 가볍게 웃으며 속으로만 조용히 기원했다. 다른 것은 바라지 않습니다. 이기적이라는 것도 잘 압니다. 하지만 제발, 그만은 저보다 더 오래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 AU입니다. 에릭찰스에릭, 쇼우는 없고, 에릭을 찰스가 주웠다는 설정만 유지됩니다.
- 정치계로 진출한 찰스, 이상은 다르지만 그를 잠시 돕고 떠나려다 인생 틀어잡힌 에릭입니다.
- 찰스는 뮤턴트를 지지하는 정책을 펴고 있지만 자신이 돌연변이인 건 숨기고 있어요 :D
- 연작입니다. 이번 글은 스칼렛 위치님의 리퀘스트 요소가 들어가 있습니다.
"등록법을 반대하신다는 겁니까?"
"저는 우리 국민들이 어떤 이유로건 '구별' 되길 바라지 않습니다. 그것이 피부색이건 성별이건 돌연변이 여부건 간에 그들은 모두 성실하게 하루를 살아가는 국민입니다."
"그렇습니다만 자비에 의원님, 범죄를 저지르는 뮤턴트들에 대해 따로 대책이 없다는 지적이 있는데요."
"뮤턴트만 범죄를 저지르는 게 아닙니다. 범죄에 대한 방지책은 우리 모두가 고민해야 할 문제죠. '함께' 말입니다."
'함께' 라는 말에 방점이 찍혀 있다는 것을 누구나 느낄 수 있었다. 계속되는 의정활동으로 약간 창백해진 얼굴을 꿋꿋이 들고 답하던 찰스 자비에는 이제 질문은 끝이라는 뜻으로 손을 들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럼에도 쏟아지는 기자들의 질문과 다가오는 마이크를 밀어내며 경호원의 도움을 받아 어떻게든 앞으로 다가가려던 움직임은 풍채 좋은 한 남성에 의해 막혔다.
"의원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질문은 끝났는데요."
짧게 답하며 고개를 든 자비에 의원의 시선이 그 남자의 것과 얽혔다. 묵묵히 자비에를 내려다 보던 남자의 입매가 꾹 눌렸고, 그를 바라보던 의원은 서서히 경악에 찬 얼굴이 되어 입을 벌렸다. 의원이 손을 들어 남자의 어깨를 붙든다. 심상치 않은 기색에 의원 주변의 기자들을 막던 경호원이 고개를 돌려 남자 쪽으로 손을 뻗는다. 남자가 손을 올렸고, 총을 발견한 누군가가 비명을 지르려 했다. 시간은 끔찍하게 느리게 흘렀고, 의원이 잠깐 숨을 들이키고 뭔가를 말하려는 순간 총성이 울렸다.
에릭은 눈을 떴다. 방금 울렸던 총성이 아직도 낯익은 방 천장에 울리는 것 같아 두 손을 들어올려 눈을 가리고 잠깐 세게 비볐다. 꿈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인식하고 긴 한숨과 함께 몸을 일으킨다. 눈을 감으면 다시 한번 선명하게 그 때의 모습이 눈에 그려졌다. 몸에 한 발, 그리고 가슴에 제대로 한 발 더 쏘기 위해 남자는 손을 들었다. 에릭은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고 총은 폭발했다. 사람들의 비명소리와 함께 그는 쓰러졌지만, 에릭의 눈에 들어온 것은 단 한 사람, 배를 피로 적시며 쓰러지는 찰스 프란시스 자비에 뿐이었다.
총알을 뽑아낼까 했지만 오히려 더 위험하다는 생각에 참았다. 안아들자, 아직 의식이 있는지 시선을 에릭의 얼굴로 돌린 찰스가 팔을 에릭의 목에 감으려 했다. 하지만 그 팔은 피에 젖은 채 힘없이 늘어졌고, 푸른 눈이 눈꺼풀 안으로 말려들어가며 천천히 눈을 감는 것을 본 에릭은 다급히 그의 이름을 외쳤다. '정신 차려! 의식을 잃어선 안돼!' 누군가 구급차를 외쳤지만 그보다 한발 먼저 에릭은 의원용 리무진에 올라탔다. 쓸데없이 넓은 좌석이 지금만은 더없이 고마웠다.
수행원 한 명이 건넨 구급상자에서 압박붕대를 꺼냈다. 차마 둘러감지는 못하고 환부에 대고 꾹 눌렀다. 거의 의식을 잃은 것 같던 찰스가 짧게 비명을 질렀고, 에릭은 그가 고통스러워 한다는 사실보다 그에게 의식이 있음을 감사했다. "빨리 병원으로! 어서!" 기사는 이미 최대속도를 밟고 있었지만 에릭은 으르렁대며 소리쳤다. 머리를 감싸안자 꾹 닫혀 있던 눈꺼풀이 바르르 떨리더니 고통스럽게 열린다. "에릭..." "아무 말 하지 마." 짧게 말을 잘라버린 에릭은 무서운 표정으로 앞을 노려보며 이를 악물었다. 실책이다. 돌이킬 수 없는 실책이다. 그를 지키지 못했다. "에릭." 그가 다시 한번 말했다. 시선을 내리자 식은땀이 가득한 얼굴이 그를 기묘할 정도로 평온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고통의 그림자가 깊이 새겨져 있으면서도 잔잔한 호수 같은 눈에 에릭은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을 맛보아야만 했다. 안돼. 내 눈앞에서 떠날 꿈도 꾸지 마. 마치 지금이라도 곧 미련 없이 떠나버릴 것 같은 표정으로 바라보지 말란 말이야.
"얘기하고 싶었던 게 있었어."
"닥치고 병원에 가서 수술할 생각이나 해."
"내 친구."
다정하게 부른 그 단어에는 심지어 웃음기마저 들어가 있었다. 에릭은 눈가에 뭔가 고이는 것을 발견하고 두어번 눈을 깜박였다. 찰스의 얼굴에 그게 떨어지고 나서야 그는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손을 들어 눈가를 누르자 손에 묻은 피 냄새가 확 끼쳐 왔다. 피, 찰스의 피.
"난 자네가... 내 뜻을 이어줬으면 좋겠어."
"개소리 하지 마."
"레이븐을...레이븐을 도와줘."
에릭은 욕설을 내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다시 눈물이 흘러 떨어진다. 하필이면 찰스의 눈가에 떨어진 그 눈물은 이미 젖어있는 눈에 흘러들어가 다시 얼굴 옆으로 떨어졌다. 병원 앞에 차가 도착했고, 이미 연락을 받은 것인지 응급실 직원과 의사들이 달려나와 찰스를 침상 위에 누이고 다급히 달려들어갔다. 배에 얹혀 있던 압박붕대가 떨어져 피에 젖은채 바닥에 뒹굴었고, 에릭은 따라 들어가는 것조차 잊고 차 뒤에 앉아서 울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무릎 위에 얹혀 있던 남자의 체온이 서서히 사라져갔고, 어쩌면 그것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시 한번 눈물이 흘렀다.
이를 악물고 버텨 보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서야 차에서 내릴 수 있었다. 또다시 지키지 못했고, 또다시 눈 앞에서 가장 소중한 이가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꼴을 보아야만 했다. 아주 오래 전 간신히 흉터만 남았던 상흔 위에 생생한 상처가 덧붙어, 에릭은 이를 꽉 악물고 한 걸음 한 걸음 병원 쪽으로 다가가며 다짐했다. 만일 찰스가 목숨을 잃는다면 인간들은 지옥을 보게 될 것이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를 앗아가 버린 데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만일 그가 살아남는다면?
마음속에 던져진 질문에 에릭은 희망의 불꽃을 품었다. 살아남는다면, 혹시라도 그가 에릭 자신을 둘러싼 저주를 걷어치우고 살아남는다면. 손을 내려다보았다. 붉은 피에 젖은 손은 평소 그가 상상하던 그대로였다. 이제껏 살아오면서 그 손은 쓰레기들의 피에 늘 젖어 왔다. 하지만 지금 이 손에 말라붙은 것은 바로 찰스의 피였다. 이 피에 맹세코, 반드시.
그것이 벌써 2년 전. 눈을 떠서 바라본 손에는 아무것도 묻어 있지 않다. 에릭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주먹을 쥐고 다시 손을 폈다. 고개를 돌려 시계를 보고, 새벽 6시임을 깨닫고 아직 울리지 않은 알람을 끄며 일어선다. 평소보다 조금 이른 기상이었지만 준비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다. 샤워와 세수와 면도를 마치고 옷을 걸치고 방 밖으로 나간다. 그의 침실에 당도하여, 가볍게 노크하고 인기척을 기다린다. 잠시동안의 침묵에 쓰게 미소짓고는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가 그를 깨운다.
"찰스, 일어나."
어이없게도 어린애처럼 베개를 끌어안은 채 잠든 남자의 어깨를 잡고 흔들자, 아직 잠에서 덜 깬 푸른 눈동자가 살며시 드러났다가 다시 사라진다. 갈색 머리를 쓰다듬자 기분 좋은 고양이처럼 나지막하게 신음을 내뱉더니 눈을 감은 채 잠에 취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온다.
"어제 보고서 다 읽느라 두시까지 못 잤어."
"안됐군. 그래도 지금은 일어나야 해."
"알아...아는데...잠깐만..."
목소리가 다시 잦아든다. 깊이 숨을 내쉬는 꼴을 보니 다시 잠에 빠졌다. 에릭은 천천히 손을 내려 부드럽고 따뜻한 볼의 감촉을 느끼며 잠시 자비심 있게 기다려 주었다. 그리고 속으로 스물까지 센 뒤, 이번에는 이마를 쓸며 다시 말했다.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되는 거 알잖아. 비서들을 기다리게 할 셈이야?"
"...에릭."
"음?"
"자넨 악마야."
"칭찬 고마워."
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지만 이번에는 분명 의식이 깨어 있다. 천천히 눈을 뜬 찰스는 양 손을 짚으며 상반신을 일으키고는 언제나 그렇듯 에릭을 향해 손을 뻗었다. 겨드랑이 사이로 팔을 넣고 총격사건 이후 영영 움직일 수 없는 무릎 밑으로 손을 넣어 가볍게 들어올려 욕실 쪽으로 걸어간다.
"예전에도 얘기했지만 이 정도는 혼자 할 수 있어."
"알고 있어. 그럼 제 시간 맞게 일찍 일어나던가."
찰스는 포기한 듯 피식 웃었다. 그는 아마 모를 것이다. 그의 능력을 생각한다면 알 지도 모르지만 어쨌건 모를 것이다. 그가 살아 있는 한 순간 한 순간이 에릭에게 어떤 의미인지, 더이상 움직이지 못하는 다리를 바라보며 다시금 그 맹세를 되새기는 심정이 어떤 것인지도.
"그럼 잘 부탁해."
에릭은 찰스의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댔다 떼었다. 개조된 욕실의 받침대에 찰스를 내려놓고 몸을 돌리려는데, 찰스의 팔이 그의 목에 다시 한번 감겨온다. 어떤 의미인지 알아챈 에릭은 순순히 그가 원하는 대로 키스를 받아주었다. 혀가 섞이고, 키스를 마친 찰스가 잠시 에릭의 목에 기대어 눈을 감는다. 나지막한 속삭임을 들으며, 에릭은 다시 한번 그에게 키스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늘 미안해."
"헛소리."
스스로에게 맹세했다. 찰스의 이상에 동조하지 못하던 자신 따위 버리겠다고. 그가 살 수만 있다면,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그의 소원대로 결코 떠나는 일 없이 그와 함께 하겠노라고. 그의 연인, 동료, 반려, 혹은 그 무엇도 못 되더라도 반드시 그의 곁에 붙어서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꼭 지켜내고야 말겠다고. 이번 한 번만, 단 한 번만 운명이 자신을 향해 호의를 베풀어 준다면 그 한 번의 호의로 영혼을 팔겠노라고. 그리고 그 맹세의 대가가 바로 이렇게 눈 앞에서 숨쉬고 있다. 그의 다리는 죽었지만, 어쨌건 그는 살아있지 않은가.
샤워하기 위한 준비를 마친 다음 욕실 밖으로 나갔다. 가정부가 준비한 아침을 들여오고 저택의 각 전화기를 체크한다. 간밤에 아무 일 없었는지 얘기를 듣고 추가로 살펴야 할 보안 사항이 있으면 그걸 검토한다. 비서와 이야기하여 하루의 일정을 숙지하고 위험 지역은 없을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논한다. 이제는 익숙한 일과가 되어 버린 일이다. 그를 위해서라면, 그를 지키기 위해서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