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왜 그러나?"
"죄송합니다. 등이 쑤셔서 그래요, 로버트. 가끔 이러더군요."
2차대전 참전용사였던 하원의원은 그 심정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도 독일놈들이 박아둔 총알 자리가 가끔 욱신거리지. 빌어먹을, 절대 잊게 내버려 두질 않는다니까." 찰스는 웃으며 그에 동의했고, 두 의원은 서로의 정책에 지지를 보내기로 약속한 다음 자리를 파했다. 사무실에서 나오자 문 바로 옆에 붙어 있던 에릭이 자연스럽게 다가와 휠체어 손잡이를 잡는다. 모인 미간에 꾹 다물린 입술, 그의 마음을 읽을 필요조차 없어 보였다.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었어?"
"아니."
거짓말, 그렇게 판단했지만 그의 마음 안에 들어가지는 않았다. 만일 찰스가 꼭 알아야 할 일이라면 에릭이 먼저 입을 열어 알려줄 것이다.
"그냥 자네가 여기 있는 게 싫어."
바로 이렇게. 찰스는 실소를 터트리고 싶은 것을 참으며 그저 조용히 미소지었다. 에릭은 처음부터 정치계 진출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그는 미국인이 아니었고, 그에게 있어 정치란 기만, 술책, 그리고 그의 인생을 정신적으로 눌러죽인 '학살'과 깊이 연관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는 오래 전 인간 때문에 깊이 다친 짐승처럼 사람을 믿지 않았고, 특히 그 사람이 '다수' 일 때에는 더더욱 믿지 않았다. '당선될 때까지만.' 곁에 있어 달라는 부탁에 그의 대답은 이렇게나 짧았다. 당선된 뒤로도 그는 삼 개월을 더 기다려 주었고, 그동안 내내 찰스를 설득하기 위해 애썼다. '넌 의미없는 놀음을 하는 중이야. 저들이 그런 문제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히틀러도 처음에는 비웃음을 샀어. 어떻게 됐는지 봐.' 에릭에게 모든 정부는 똑같았고, 격론이 오가는 미국의 하원과 우뢰와 같은 박수를 보내는 나치스의 의회가 아무 차이가 없었다.
아마 지금의 에릭이 들으면 화낼 것이다. 총격 사건이 일어났을 때 찰스는 그가 가 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실 에릭은 그러한 암살 시도에 대해 몇번이나 경고했었다. 일종의 공포증 발현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무시해 버린 것은 바로 찰스 자신이었다. '이 곳은 전장이 아니야.' '충분히 전장이야. 넌 저들에게 선전포고를 했어.' '에릭, 제발! 내게 다가오는 사람들을 오스왈드 보듯 할 필요는 없잖아.' 그는 항복하듯 양손을 들었지만 그것은 오히려 불만의 표시라는 걸 찰스는 잘 알고 있었다. '원하는 대로, 의원님. 하지만 내가 늘 지켜줄 수만은 없잖아.' '오, 에릭-' '난 곧 떠날 거야. 내가 없으면 어쩌려고 그래. 그래 가지고 '살아 있는' 자네 기사를 언제까지 읽을 수 있겠어?' 그 고집스러운 얼굴에 찰스는 약간은 도전적으로 내뱉었다. '그만 좀 해. 기분은 이해하지만 여긴 미국이야.' 하지만 그를 공격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고집스레 이 쪽을 바라보는 청회색 눈동자의 주인에게 확신시키고 싶었을 뿐이다. '이 곳은 미국이야. 나치스 독일이 아니라고. 이 곳은 자유와 민주주의의 땅이야.' '그리고 대통령을 암살하고 말이지.' '에릭!' 고집스러운 얼굴로 이 쪽을 바라보던 그가 찰스의 얼굴을 양 손으로 붙들었다. '난 네게 늘 감사하고 있어.' '...에릭?' '넌 증오심밖에 모르던 날 구해줬어. 그리고 날 더 강하게 만들어 줬고.' '잠깐, 이건' 키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네가 죽는 게 싫어. 그러면 난 인간을 영원히 증오하게 될 거야.' 끌어안았던 기억이 난다. 그렇다. 사실 그것이 두려웠다. 자신의 곁에서 떠난 그가 인간을 증오하며 다시 그의 인생을 지배하던 그 증오 속으로 들어가 버릴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눈을 떴을 때 눈물이 났다. 깊은 마취에서 깨면서 지나치게 피를 잃었던 까닭에 너무 추워서 온 몸이 덜덜 떨리고 배에서는 끔찍한 통증이 엄습해 왔지만 그 때문에 운 것이 아니었다. 손이, 오직 손만이 따뜻했다. 침대 옆에 앉아 그가 깨어나기만 기다리다 잠들어 버린 에릭의 머리가 그 손 곁에 있었다. 천천히 손을 움직여 그의 머리를 가볍게 만져 보았을 때, 찰스는 세상이 부풀어올라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옆쪽으로 눈물이 흘러 떨어지자 시야가 간신히 맑아졌다.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쓰다듬고 또 쓰다듬는데도 에릭은 눈을 뜨지 못했다. "찰스!" 먼저 비명을 지른 것은 병실 안으로 들어오던 레이븐이었다.
비명소리가 울리고서야 에릭은 깨어서 찰스를 바라보았다. 허나 눈을 마주친 것은 단 한 순간, 곧바로 내리뜬 시선을 한 에릭은 머리를 쓰다듬던 찰스의 손을 잡아올리더니 아주 조용히 손바닥에 입을 맞추었다. 그 뒤로 며칠간 찰스는 그를 보지 못했고 - 애당초 가족밖에 면회할 수 없다는 것을 레이븐이 우겨서 들어올 수 있었다고 했다 - 그래서 그는 에릭의 입술이 닿았던 그 손을 내려다보며 에릭을 생각하곤 했다.
"난 자네가 떠난다고 해도 이젠 못 막겠어."
며칠 뒤, 간신히 그렇게 입을 열었을 때 에릭은 한동안 찰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내가 떠날 거라고 생각해?"
"자네 말대로 되었잖아. 바보라고 욕해도 좋아."
이미 선고는 내려졌다. 다시는 두 발로 땅을 딛을 수 없을 것이라는 얘기를 듣고도 찰스는 크게 동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에릭의 날카로운 눈까지 속이지는 못했다. 잠시 아래쪽을 헤매던 시선, 미소를 띠려다 애매하게 실패한 입가, 짧게 숨을 내쉬고 깊이 숨을 들이쉬는 모습까지 본 그는 충실한 경호원답게 그 자리에서는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게 바로 몇분 전 일이다. 찰스는 어떻게든 웃으려 애쓰며 다시 말했다. 가볍게, 아무렇지도 않게.
"그는, 날 쏜 사람은 뮤턴트들에게 딸을 잃었어."
"찰스."
암살범과 눈이 마주친 순간, 무방비한 찰스의 뇌 안으로 남자의 기억이 흘러들어왔다. 일부러 읽은 것은 아니다. 찰스를 바라보는 순간 그 중년 남자는 입을 꾹 다문 채 마음 속으로 외치고 있었다. '놈들과 한패다' '살인자' '괴물' 찰스와 같은 파란 눈을 가진 소녀가 그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다. 공포에 질린 채 절규하며.
"범인들은 잡히지 않았고, 그가 본 건... 그가 본 건 비명을 지르며 납치당하는 딸아이의 얼굴이었어. 그게 마지막이었던 거야."
"찰스!"
에릭이 찰스의 어깨를 꽉 붙들었다. 그만 말하라는 뜻이라는 걸 알면서도 말을 멈출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 말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레이븐에게도, 행크나 알렉스에게도 말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절규하는 소녀의 영상을 보며 아버지는 되뇌이고 있었다. '괴물' '살인자' 그는 찰스가 뮤턴트라는 걸 몰랐지만, 그가 뮤턴트 등록 법안을 반대한다는 것만으로도 그를 죽이고 싶어할 만큼 뮤턴트를 증오하고 있었다. 왜냐면,
"왜냐면...왜냐면," 호흡을 가다듬지 않고는 그 다음 말을 하기가 너무나 어려웠다. "왜냐면 딸의 머리는 끝내 발견되지 않았으니까."
어깨를 붙든 에릭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그 손에 얼굴을 기대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찰스는 말했다. 마음은 당장 입닥치고 그에게 기대라고 외치고 있었지만 도저히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에릭, 난... 나란 인간은 최저야."
"개소리."
그 아버지의 마음을 들여다 본 순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올라오는 총구를 보면서도 그를 멈추지 못했다. 순간 반강제로 들이밀어진 증오와 혐오와 살의는 그 정도로 강렬했고, 밀어닥치는 슬픔과 지옥같은 고통은 심장을 찌르고 들어왔다. 그럼에도 총에 맞는 순간 그의 머리 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내가 죽어서 그 법안이 부결된다면 그걸로 됐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에릭."
"찰스!"
"자네가 내 뒤를 이어주면 된다고...그걸로 족하다고."
"그런 소리 하지 마."
"죽도록 무서웠지만 그건 총 때문도 아니고 죽을까봐서도 아니었어. 알아?"
"......"
찰스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바로 앞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청회색 눈을 향해, 그가 자신을 증오하거나 경원하게 된다 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혹시라도 살아서 눈을 떴을 때 자네가 없을까봐, 인간을 증오하기로 결정하고 내 곁을 떠났을까봐 그게 두려웠어. 난 그런 인간이야."
언젠가 날려보낼 수밖에 없는 독수리를 붙들어 두고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이 말을 하는 것으로 다시 한번 족쇄를 채우게 된다는 것도 모르지 않았다. 가라고 말하면서 이리 토로하는 것은 정말 최저의 행동이다.
"에릭, 떠나는 게 나을지도 몰라. 자네와 난 달라. 어쩌면 내 꿈이 잘못된 걸지도 몰라. 그렇다면 누군가는 다른 길을 준비해야 해."
"자네의 꿈은 잘못돼 있어."
칼로 에는 듯한 통증이 가슴에 느껴진다. 하지만 잘 알고 있다. 이게 에릭이다. 가장 아픈 순간에도 절대 고개를 돌리지 않고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걸어오는 이다.
"그 멍청한 망상을 그만두지 않는 한 반드시 누군가는 자네를 죽이려고 할 거야."
"그렇겠지."
"그러니까 헛소리는 그만해. 난 여기 있을 거야."
놀라서 바라보았다. 차가운 파란 눈이, 날카롭게 뻗은 눈썹이, 반듯하게 내려온 콧날이, 그 밑에 굳게 다문 입이 그의 결심을 말해주고 있다.
"에릭..."
"다시는 그런 놈들이 널 해치지 못하게 할 거야. 찰스, 넌 순진하고 오만한 바보고 그 꿈은 말도 안되지만 나와는 상관 없는 얘기야. 그러니 떠나라는 헛소리는 받아들일 수 없어."
"에릭, 넌 분명히,"
에릭이 침대 위에 놓인 찰스의 다리에 손을 얹었다. 분명 눈으로는 그의 손이 얹힌 것이 보이는데 방치된 다리에는 아무 감각도 없다. 천천히 다리를 만지던 에릭이 강경하게 말했다.
"꿈도 꾸지 마. 이런 몸을 하고서 나더러 가라고?"
"에릭, 이건 네 책임이 아냐. 그리고 네가 걱정할 일도"
"앞으로는 내가 책임질 일이야."
어깨 위에 다시 손이 얹혔다. 이번에는 입술이 다가온다. 날카롭고 격렬한 키스에 찰스는 할 말을 잃고 에릭의 팔을 붙들며 매달렸다. 입술을 뗀 순간 에릭이 속삭였다.
"..."
찰스는 눈에 눈물이 핑 고이는 것을 알아채고는 눈을 감아 버렸다. 그의 나직한 속삭임에 기껏 이악물고 말했던 결심이 산산이 부서져 나간다. 날 떠나, 에릭. 난 분명 자네를 상처입히게 될 거야. 나를 지켜내건 그러지 못하건 간에 자네는 상처를 입겠지. 깃털은 꺾이고 날개는 부러질지도 몰라. 다시는 날 수 없을지도 몰라. 내게 갇히지 말고 날아가. 이 우리에서 벗어나 버려. 지금이 기회야. 지금 간다면 돌아보지 않을 수 있어. 자네도, 나도.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에릭이 뒤에서 말을 걸어왔다. 찰스는 잠시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과거의 상념에서 벗어나 옆을 돌아보았다. 여전히 보이는 것은 휠체어를 미는 손 뿐이다. 남자인데도 길고 보기 좋게 모양이 잡힌 우아한 손.
"아 그냥 좀."
사람들이 많다. 이런 곳에서 함부로 잡을 수는 없었지만, 지금 이 순간 찰스는 에릭의 손을 잡고 싶었다. 강한 손, 그를 건사하고 돌봐주는 손, 그를 사랑해 주는 손, 그를 지지해 주고 받쳐주는 손, 남들에게는 차가울지 몰라도 자신에게는 더없이 따뜻한 손을.
"빨리 은퇴하라고."
"힘들 걸. 아직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나 아니면 안된다고 믿는 건 노인들이나 하는 짓이야."
"난 갓난아이 때 이미 흰 머리를 달고 태어났거든."
"어울리네."
햇살이 따스했다. 찰스는 가볍게 웃으며 속으로만 조용히 기원했다. 다른 것은 바라지 않습니다. 이기적이라는 것도 잘 압니다. 하지만 제발, 그만은 저보다 더 오래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짧은 평화가 깨지기까지 별로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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