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아자젤은 심플하게 생각했었다.
거 평범한 친구라기엔 뭔가 분위기가 야시꼴랑축축뜨끈하기는 했어도 쩌적 소리 제대로 나게 갈라선 둘이니만큼 앞으로 얼굴 볼 일이 얼마나 되겠으며 본다한들 뭐 신통한 액션과 리액션이 있겠는가, 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 생각이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그야말로 속편하고 가소로운 전망이었음을 딱 석 달만에 온몸으로 깨닫게 되었다. 처음 매그니토가 아자젤에게 '극히 사적인 용무라 매우 미안하게 생각하지만'...이라 운을 뗀 뒤에 웨스트체스터에 두고 온 개인물품을 가지러 가야겠다며 손을 내밀었을 때만 해도 이 텔레포터는 흔쾌히 새 보스의 편의를 봐주었고 그외 미심쩍음이라든가 찝찝함 따윈 없었다. 원체 이리저리 꼬치꼬치 따지고 꼬고 비트는 발상과 인연없는 성격 탓이기도 했다. 허나 그 '방문'이 약 3개월에 걸쳐 십여 회를 웃도는 빈도수를 자랑하는데 이르자 어지간한 아자젤도 두고온 물품이 슈트케이스 하나가 아니라 컨테이너 박스 통째로 하나 아니냐고 투덜거리게 된다. 그것도 혼잣말 같은 게 아니라, 제법 심각한 표정으로 옹기종기 모여앉은 엠마, 립타이드, 엔젤 앞에서 말이다. 참고로 미스틱은 에릭에 묻어서 웨스트체스터로 출타 중이었다. 그녀야말로 그 저택에 두고 온 각종 물품이 컨테이너 박스 하나로 모자라는 '그' 레이븐인지라.
"컨테이너 박스가 아니지, 아자젤."
이마에 川을 새기고 있는 셋과 달리 무심한 듯 차가운 표정을 유지한 채 손톱을 다듬던 엠마가 조용히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침착한 표정이지만 화이트퀸의 손끝은 군데군데 미세하게 일어나고 갈라진 큐티클로 평소의 완벽한 모양새를 잃고 있었으며 고로 그녀도 슬그머니 빡친 상태였다. 아, 여기서 더 잘라내면 피를 볼지도.....엠마는 아쉬워하며 손톱니퍼를 거두고 속으로 뇌까렸다. 이게 다 스트레스 탓이지. 망할 ㅎㅁ들 같으니.
"친애하는 매그니토, 우리의 에릭 랜셔 씨가 웨스트체스터에 떨궈놓은 유실물이란 바로 찰스 자비에라 봐야할걸."
그러자 냉큼 엔젤이 거들었다.
"그가 그집에 있는 한 이 웃기지도 않은 소동도 계속 될거야. 아자젤은 셔틀을 면할 수 없을테고, 립타이드는 스타일리쉬함을 결국 포기해야 할거고 -매그니토는 가끔 아주, 아주, 아아아주 고까운 시선으로 립타이드의 완벽한 쓰리피스를 아래 위로 훑어보곤 했다. 저 죽여주는 헬멧에 맞춰 제작한 자기 망토를 애증을 담아 만지작거리며 말이다- 나는 환장할 것 같은 -갓뎀!! 그 클럽에서 그들 사이를 눈치채는게 아니었는데!!- 그의 부부 관계 회복 상담인지 홀애비 넋두리 받아주기인지를 해야할테고, 엠마는, 오 맙소사.... "
"엔젤, 호들갑이 심하구나. 난 자기 능력을 백 퍼센트 제어할 수 있는 텔레파시스트야. 더우기 매그니토는 고맙게도 하루의 대부분을 헬멧과 함께 하지."
"그런것치고는 지난 번의 네 히스테리컬한 절규가 참 인상적이었거든?"
".....그래, 문제는 저 독한 매그니토도 샤워할 때만은 헬멧을 벗어야 한다는 거야."
용케도 그의 생활리듬을 파악해 헬멧의 가호가 없어질 시간대마다 미련없이 외출을 하거나 외출을 한다거나 외출을 함으로써 위기를 모면해온 엠마였다. 허나 지난 주의 그녀는 그닥 운이 좋지 못했다.
-우와 뻔뻔하게 짧다!! 동네사람들 제가 해냈어요!!!.....네. 손들고 있겠사와.....돌 던지시면 달게 맞겠습니다... 주말저녁엔 좀 더 쓸 수 있을라나요.
밀린 덧글도 그때를 기약합니다ㅠㅠ
인생행로 곳곳에서 넘치게 사연 많은 남자 에릭 매그너스 랜셔가 그럼에도 가슴 속 깊이 약 1밀리그램 정도 남겨둔, 세파에 찌들지 않은 소녀심이 마이애미 바닷속에서 속삭였었다. 어머 바로 이 남자야!
그리고 CIA 앞마당에서 오만 건방을 떨며 에브리띵을 외치는 남자를 앞에 두고도 속삭였었다.
아 놔 이 남자 맞다니까?
리쿠르팅을 빙자한 순회 데이트를 즐기며 링컨 할아버지 발치에 앉았을 때도 따발총마냥 속삭였었지. 시발 이 남자라니까!!
돈발라 신공을 온 덩치로 구사하는 듯한 그의 저택에서 트레이닝을 빙자한 허니문을 누리던 시절엔 속삭임을 넘어서 날마다 외쳐대곤 했다. 무조건 잡아. 아니면 물기라도 해. 이 남자 놓치면 니 인생에 볕들 날도 없어...!
심지어, 그 운명의 날 모래사장에 처박힌 그를 무릎에 올려놓았을 때조차 에릭 안의 작은 소녀심은 필사적으로 절규했었다.
야이 미친노마 굴러온 복덩이를 개발살내도 정도가 있지 당장 그 헬멧 벗어던지고 싹싹 빌어! 지금 자존심이 문제냐? 너 그 깡통이랑 같이 쫓겨난다고! 사내놈들이 애비 편 들어줄 거 같냐? 꿈 깨! 딸뇬이 널 환갑회갑까지 챙겨줄거 같냐? 시발 챙겨준다치자, 퍽도 폼나겠다? 죽으나사나 마누라 밖에 없는 거다 아오 왜 그걸 몰라아아아ㅏㅏㅏㅏㅏ!!!
....소녀심의 제법 걸진 말투는 알아서 필터링하자. 세계대공황 시기에 태어나 세계대전 시대에 소년기를 보내고 냉전시대에 청년기를 보내는 남자의 쥐뿔 1밀리그램 짜리 소녀심에게 뭘 더 바라겠는가.
창창대로 거침없이 청춘을 달려온, 키만 빼고 스펙 쥑이는 남자 찰스 프랜시스 자비에가 1밀리그램은 커녕 닥닥 긁고 긁어 0.001나노그램 정도 남겨놓은 가슴 속 소녀심이 마이애미 바닷속에서 속삭였었다.
우왕ㅋ굳ㅋ 심봤네여
....나노그램 단위도 모자라 발랑 까진 소녀심이다만 이해하자. 엄마아빠저는진짜황새가물어왔나염?...따위를 물어볼 나이에 카마수트라의 오의를 고찰하는 인간들 머릿속을 드나들던 찰스의 소녀심에게 대체 뭘 기대하는 건가.
홀홀단신 원쑤의 각을 뜨러 CIA를 나서는 남자의 손나 잘 빠진 뒷태를 보면서도 속삭였었다. 마른 장작이 잘 탄다지?
다음날 아침, 근사한 의상센스와 빛나는 미모를 자랑하며 둘만의 데이트를 제안하는 남자에겐 그냥 슬슬 녹아버렸었다. 남사스럽지만 이 남자가 내 남자 맞나봐염
러시아에서 본드 뺨치는 액션활극을 찍는 남자 꽁무니를 쫓아가면서는 거의 운명적으로 속삭였었지. 내님의 뒷수습 내가 아니면 누가 하리요 어쩐지 이 패턴이 늙어 꼬부라질 때까지 갈 것도 같지만 그런건 아무래도 상관없어ㅋ
심지어, 그 운명의 날 마빡을 뚫리고 소송도 걸어볼만한 DV의 작렬에, 거 되도 않게 버버벅거리며 사태 수습해보려는 아이원츄바이마이사이드 발언에조차 소녀심은 저항을 멈추지않고 절규했었다. 아 좋대잖아! 못 이긴 척 하고 받아줘!! 시발 니가 어디가서 또 저런 월척을 낚을거 같니? 잊을 수는 있을 거 같냐?? 벌써 네 번이나 잔 주제에!! 그때마다 손나 뿅가죽은게 누군데 참을 수 있을거 같냐아아아ㅏㅏㅏㅏ!!!
하지만 우리는 안다. 에릭의 일단 뻗대보는 외고집과 찰스의 꼰대본능은 밀리그램과 나노그램 단위의 소녀심 따위가 막기엔 너무나나나나나 그레이트하고 엑설런트하며 시발 똥같고 조가튼 그 무엇임을.
그래서 그들은 익히 아는대로 이혼을 감행하고 말았다. 이 뻘하고 막가는 팬월드에서조차도. 단, 서로에 대한 소녀심 어린 미련을 한 가득 매달고서 말이다. 이것이 원작 필름과 뭐가 다른가 묻는 태클은 사양하겠다.
....쓰는 놈이 제일 잘 안다.
오래 된 나무 마루에 따로 카펫을 깔지 않은 것은 약간의 결벽증 때문이었다.
찰스는 오랜 세월로 인해 원래의 광택은 사라졌지만, 그래도 적절히 윤기가 흐르는 밤나무 재질의 마루 바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다갈색의 목재 위에 엇비슷한 색의 액체가 퍼졌고,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서야 그것이 이미 산산이 부서져 버린 머그컵 속에 조금 전까지 담겨 있던 커피였음을 깨닫는다. 입술이 바짝 마르고 그 안의 혀가 굳은 듯 저림에도, 그는 움직일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못박힌 채 바닥만을 바라보고 있다.
모든 감각이 정신없이 예민해진다. 말라 갈라진 입술과 어울리지 않게 축축한 실내의 공기, 꼭 닫아 두었음에도 어딘가에서 흘러온 밤 바람에는 차가운 비 냄새가 섞여 있다. 바람에 휘말린 바깥 나무들의 소리에 정신이 든 찰스는 조금 전 자신이 본 것의 '의미'를 생각하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싸늘하게 식은 피부 위에 식은땀이 맺히고, 지팡이를 짚은 손이 떨려 온다. 보안창이 붙은 젖빛 유리창에는 커튼이 쳐져 있어 밖이 보이지는 않지만, 찰스는 그 뒤에 무엇이 비칠지 알고 있었다.
또 한번의 낙뢰, 번득이는 창백한 빛은 어떤 자비심도 없이 창문에 섬짓한 실루엣을 찍어냈다. 남자, 아마도 창가에 바짝 붙어 이 안을 들여다 보는 괴한의 그림자를.
심장이 튀어올랐다. 입술이 절로 떨려 왔다. 침입해 들어오려는 것인가? 강도? 아니, 아니라는 걸 안다. 비록 우레가 울림과 동시에 바닥에 비친 그림자를 보고 잔을 떨어트렸다고 해도 그 소음이 저 괴한의 귀에 들리지 않았을 턱이 없는 것이다. 찰스는 이를 악물었다. 그다. 지난 2주간 간간이 희미한 그림자로 배회하던 그 남자다. 언젠가부터 늘 보이지 않는 시선을 이 쪽에 붙이고, 대학의 카페테리아에서, 서점에서, 골목에서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면 어느새 슬며시 사라지던 그 그림자의 주인이다. 간혹 걸려오는 대답 없는 전화, 아침이면 슬그머니 골목 가로 사라지던 모습.
문득 떠오른 사실에, 찰스는 입술을 짓물었다. 침실로 돌아가면 총이 있다. 지팡이를 짚은 몸이라고 해도 그 총을 들 수만 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서둘러 움직이려던 찰스의 뇌리에 절망적인 생각이 엄습했다.
- 저 자가 무장이라도 하고 있으면 어쩔 셈이지?
이를 악물고 최대한 그 불길한 생각을 떨쳐버리기 위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창 밖에서는 이 안이 보이지 않는다. 놈은 창 밖에 서 있고 이 곳 불은 꺼져 있지. 내가 움직인다 해도 아무것도 알아챌 수 없을 거야.
다시 한 번 번개가 번쩍였고, 창문 가에는 이제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찰스는 최대한 빨리 움직였다. 지팡이가 마룻바닥에 거칠게 부딪혔지만 그런 걸 신경쓸 여유 따윈 없었다. 침대로 달려가 몸을 던지다시피 하고 손을 뻗어 작은 테이블 밑 서랍에 넣어 둔 권총을 꺼냈다. 레이븐이 가져왔을 때엔 손사래를 쳤던 물건이지만 지금 믿을 만한 것은 그것밖에 없었다.
땀에 젖은 손으로 권총을 들고 한참이 지나서야 안전 장치가 걸려 있음을 깨달았다. 서둘러 안전장치를 풀고 몸을 옹송그리며 공이를 당겼다. 언제건 방아쇠만 당기면 총이 발사될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찰스는 전혀 안심할 수가 없었다.
그 뒤로 시간이 얼마가 흘렀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단 몇 분도 몇 시간처럼 느껴졌고, 그런 순간이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만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거센 바람이 창문을 스칠 때마다 찰스는 움칫거리며 총구를 그 쪽으로 돌리곤 했다. 폭풍이 가라앉고 마침내 창문이 새벽빛으로 부옇게 물들 때 쯤에야 찰스는 하얗게 굳은 손에서 간신히 권총을 떼어낼 수 있었다. 공이를 원래대로 돌려 놓고 안전장치를 잠근다. 하지만 다시 서랍에는 넣지 않은 채, 찰스는 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가 몸을 오그렸다. 몹시 지쳤음에도 한참동안 잠이 오지 않았다.
몇시간 후, 알람 덕에 눈을 뜬 찰스는 새벽의 악몽 같은 사건을 떠올리고 전율했다. 그러나 그가 진정으로 두려움을 느꼈던 것은 그 몇분 뒤였다. 마루에 나가 현관문 쪽으로 조심스레 다가갔을 때, 평소와 달리 현관 문 밑으로 얇은 신문 한 장이 밀려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바로 며칠 전 기사가 실려 있었다.
- 또다시, 이번엔 여교사.
찰스는 신문지를 떨어트렸다. 비가 그친지 한참 되었지만 문 안의 신문지는 아직까지 축축히 젖어 있었고, 그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단 한 가지일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그 남자'로 부터의 메시지다.
- 계속
짧게 짧게 이어질 겁니다.
원제는 How deep is your love였으나, 스토리를 다 짜 보고 제목을 더 어울리는 것으로 바꾸었습니다.
수위는 성적으로는 전연령가. 하지만 다른 의미로 15세 이상 혹은 성인용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늘 생각하지만 엑퍼클 영화를 복습할 때마다, 쇼우가 에릭을 얼마나 예뻐하는가가 계속 눈에 밟힙니다. 여기서 핵심은 좋아하거나 사랑하는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예뻐합니다.
엠마가 찰스에게 어디내머릿속을말끔히읽고우리완전소중쇼우사마가 어떤 원대한 야망과 중2스런 꿈을 가지셨는지 확인이나 해 봐라 모드로 들이댄 제복쇼우 장면은 원래 영화에 공개된 것과 또 다른 버전이 하나 있었지요. 그 잠수함인가 뭔가 위에서 군림하는 쇼우, 그리고 아마도 백악관을 차지하고 있는 쇼우(이 부분이 삭제되었는데, 과연 삭제될법한 개뿜장면이긴 합니다). 그리고 전 거기서 왜 쇼우가 그리도 에릭 에릭 클라이네 에릭 렌셔를 읊조리며 죽자고 달려온 에릭을 귀여워 죽겠다는 눈으로 바라봤는지 납득이 갑니다.
쇼우는 금발이나 푸른 눈에 대한 나치의 집착을 비웃었지만 동시에 얼빠라는 것이 제 지론. 엠마 자리에 대뜸 엔젤을 갖다놓고 이뻐하는 거 봐요. 엔젤이 아니라 다윈이 들어갔으면 장담컨대 그 집단에서 엠마 다음으로 어여쁜 립타이드를 그 자리에 갖다놓고 잔을 기울였을 종자임. 이건 성적 취향이나 인종의 문제가 아니라 미학적 관점의 문제죠. 물론 아자젤이 훨씬 이뻐! 라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아무리 봐도 쇼우의 시각은 지상의 평범한 얼빠의 기준을 따르고 있고, 그 점은 엠마가 명백히 '비서', 그리고 립타이드와 아자젤이 자연스레 '돌쇠와 마당쇠'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에서 명확하니 넘어갑시다.
어쨌건 그래서 말인데, 잠수함 함교는 그나마 좁아서 넘어가지만 백악관(?) 장면에 이르르면 무언가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 분명해집니다. 자자, 코트와 제복을 간지나게 차려입은 쇼우의 옆에는 눈부신 엠마가 있어요. 그리고 좌우 옆에는 아자젤과 립타이드가 간지나게 도열해 있죠. 근데 뭐가 부족해, 뭔가 부족하다고!
그래요, 미학적 도식을 따르자면 원래 마왕 옆에는 차갑고 냉혈한 참모가 하나 있어야 하는 겁니다. 그건 마왕 옆의 섹시언니 역할인 엠마와는 또 다른 포스트죠. 마왕이라고 하면 풋웃음이 나지만 저 일생동안 중2를 벗어나지 못했던 우리 은하제국 황제폐하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을 보세요. 한쪽 옆에는 미인 비서 힐데가르트, 그리고 다른 옆에는 냉혈의 오베르슈타일이 있었죠. (그 전에는 키르히아이스가 있었고요)
그래요, 쇼우는 미학을 철저히 따르는 남자였고, 그 부족분을 참을 수 없었을 겁니다. 우월한 유전자는 물론 금발이나 푸른 눈에 있지 않지만, 뮤턴트면서 아름답기까지 한 자들은 진정으로 자연의 선택을 받은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걸 어쩜 좋아, 다시 나타난 어여쁜 에릭은 늘씬한 몸에 근육까지 딱 좋게 붙이고 - 키에 비해 다리는 짧지만 대신 허리가 길고 늘씬하죠 - 고운 청회색 눈에 입 다물면 제법 냉철해 보이는 근사한 얼굴까지 갖추고 나타납니다. '이거야! 바로 이거야!' 그 순간 쇼우의 머리 속에는 반짝 불이 켜졌을 겁니다. 아아아, 그래 바로 쟤야. 에릭, 넌 나의 운명의 아이인 거다. 넌 내 바로 옆에서 참모를 해야 해!' 어차피 참모질 해봤자 결정은 쇼우가 할 거니까, 쇼우는 그 때 에릭의 머리 속에 뭐가 들어있는지는 관심도 없었을 겁니다. 중요한 건 최고 권력의 그 순간 자기 옆에서 미학적으로 자리하고 있을 냉철하고 행섬한 코트 제복간지 참모인 거라고요.
그러니 쇼우는 그 야망을 못 버리고 계속 에릭에게 집착하는 거죠. 장담하건데 엠마가 차던지기를 한 다음에는 잽싸게 내려가서 에릭을 주워올 생각이었을 거예요. 엄마를 죽인건 미안한 일이지만 어쨌건 오래 된 일이잖아요. 그렇지 에릭? 우리 사이에 뭘 그런 걸 따지고 그러니이. 그러니까 잠수함에서 에릭이 '당신이 내게 한 모든 것이 날 강하게 만들었어' 드립을 칠 때 그렇게 입이 헤벌어진 겁니다. 아싸, 괜찮아. 잠수함은 망가졌고 미소전쟁은 좀 개판이 된 거 같지만 일단 에릭이 손에 들어왔으니까 어떻게든 될 거야 후훗. 이러고 말이죠.
쇼우에게 실로 감탄하며, 전 쇼우가 "넌 내 단물을 왜 이리 빨아먹니" 라고 항의해도 할 말 없을 만큼 쇼우를 이래저래 써먹고 있는데, 이 뱀의 혀를 가진 마음없는 괴물은 정말 스토리에 활용하기엔 최적의 존재입니다. 타인의 고통을 분명 알아챌 정도로 눈치는 빠르면서도 거기 전혀 공감하지 않고, 사람들이 다정하게 들러붙거나 서로를 위하면 '아! 귀찮아'의 기색으로 빨리 떼어놓으라고 지시해 버리고, 웃고 있지만 눈은 조금도 웃지 않으며, 자긴의 우월성을 끔찍할 정도로 확신하고 있는 이런 괴물 캐릭터는 활용하는 것만으로도 즐겁거든요. 물론 타도용이지만.
CIA 비밀기지 습격 당시, 아마도 쇼우는 찰스가 강력한 텔레패스였으니 보자마자 죽여버리려 들었을 것 같긴 합니다만, 만일 찰스를 자기가 압도하거나 지배할 확신이 있었다면(예컨대 인질을 잡는다던가 하는 방식으로) 틀림없이 찰스도 꽤나 좋아하면서 영입했을 겁니다. 이렇게 예쁜 유닛을 영입하다니 난 역시 세계를 지배할 재목이야 후훗 하면서 말이죠.
그렇게 까불다 결국 자기가 기른 맹견에게 목을 물어뜯긴 쇼우입니다만,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의 인물들 중에서는 제일 외견적 미학에 집착하는 인간이라 - 세상에, 엔젤의 패션 상승을 보세요 - 이래저래 흥미가 많습니다.
특히, 케빈 베이컨이 연기하는 바람에, 브라이언 콕스가 연기했던 스트라이커에 비해 월등한 외모를 갖게 된 것도(와하하) 그가 자주 출연하게 되는 이유가 되고요. 근데 전 사실 콕스 씨의 스트라이커도 좋아합니다. 쇼우보다는 훨씬 인간적인 면모를 갖고 있지만 결국은 괴물이 된 사람이라 말이죠. 이 쪽은 사이코패스도 아니고...
늘 느낍니다만 같이 버닝하는 사람들끼리 뭔가를 만들어내고 공유하며 즐기는 분위기 자체에 형언할 수 없는 에너지가 흐르는 것 같아요. 지금은 거의 그로기 상탭니다만(...) 어제 내내 너무 즐거웠네요. 와주신 분들, 어울려주신 분들, 심지어 살짝 스쳐가기만 하신 분들까지ㅋㅋ 모두모두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뵈어요^^ 아, 그리고 무엇보다 좋은 행사 마련해주신 배포전 스탭분들 사랑합니다~
그리고, 책에 차마 싣지 못한....이 아니라 쓸 정신도 없었던ㅠㅠ 이런저런 뒷얘기.
* 서두는 조금 멀쩡한 얘기부터;;
에릭은 그 공중섬의 코드네임을 헤븐으로 했다는 뒷설정이 있었습니다....만, 거기까지 쓰는 건 아무래도 낯간지러워서 본편에 안넣었습니다. 그거 아니래도 충분히 간지러운 얘기 많았잖아요(....)
* 80년대 향수의 뽕빨미가 물씬 피어나는 호칭 솔리다리티.... 쓰면서도 얼굴이 달아올랐습니다만 뭐 어쩌겠어요 누구나 가슴에 중2 노트 하나쯤은 품고 다니는 거예요. 그거 없는 사람만 제게 돌을 던지세요. 그리고 매그니토 때문에 단단히 엿을 자신 방산 커넥션이 뒷돈을 댔다...란 설정도 있었는데 피말리는 마감 탓에 쓸 시간도 틈바구니도 없이 안녕안녕.
* 전쟁 중인 프로페서X의 부분은 술술 풀렸어요. 그남자, 영화상의 전개 가만 살펴보면 은근히 호전적이에요? 타인의 고통에 쉽게 연민하고 공감하고 뭐 그런것과는 별개로, 적어도 저쪽이 걸어온 싸움은 피하는 법이 없었어요. 찰스가 순도 높은 비폭력 지향의 평화주의자로 종종 오인 당하는 이유는 비교대상이 매그니토라서 그렇다에 백만 스물 두 표를 던지겠삼.
* 시놉 풀리는 동안 개드립 본능을 억누르느라 너무 힘들었습니다. 슬램덩크 안선생님한테 고백하던 정대만의 기분을 수십 번쯤 느낀 듯. 나중에 션과 찰스로 그 장면 패러디 비스무리한 걸 하면서 '아 지금 시간만 넉넉하면 안선생님을 찰스로 리터칭하는건데....대박일텐데' <-이따위 생각에 피눈물 흘렸습니다. 결국 야근 크리로 시간을 앗아가 주신 울 사장님의 승리. 퉷...ㅠㅠ
* 섬에서 탈출시도로 반백이 되는 장면 말이죠. 그거 끝까지 대머리 찰스의 유혹에 시달린 걸 고백합니다. 사실 본편과의 인과를 볼 때는 대머리가 정답 맞잖아요? 어허 회피마시고.... 아 그런데 진짜;; 빅토르 위고 모셔와 써보라해도 그건 개그가 될 공산 99.9%..... 이건 필력의 문제가 아닙니다(강조) 나중엔 너무 시달려서 시밤쾅 여기서 빛나리 찰스반전을 때리고 개그물로 가버릴까 유혹까지 느꼈다 이검다. 물론 저도 목숨은 하나뿐이라서 반백으로 타협보고 얌전히 참았습니다만.
* 매그니토의 세계 지배ㅋㅋㅋ는 사실 설정 좀 제대로 만들어 뻥치고픈 유혹을 매순간 받았어요. 지지율 급락의 진짜 이유는 작정하고 경제를 말아먹어서라든가....계획경제 댑따 좋아할 거 같아요 그남자는. 시장의 자유경쟁 따위 엿드삼 했을 가능성이 적어도 칠십퍼 이상. 허나, 자고로 로맨틱(강조)뽕빨앵슷흐커플물에 총은 나와도 되지만 가계부는 안 나와야 되는거잖아요...? 가계부에 진지한 조명을 들이댄 순간 뽕빨 대신 토나오는 현시창만이 기다릴 뿐(....)
* 사실 40대 데드섹시 매그니토 지도자 동지에 대한 욕망이 불완전 연소 상태입니다. 마찬가지로 30대 후반의 오갈 데 없는 반신불수 남자가 이거슨 애착인가 스톡홀름 증후군의 말기(...)인가를 맨날 유리창에 이마 처박고 고뇌하는 것도 좀 더 풀어보고 싶어요. 외전이라든가 외전이나 외전같은게 나올지도?
* 노킹 온 헤븐스 도어의 에릭은 처음부터 끝까지 딱 하나의 이미지를 가지고 썼습니다. 계시처럼 내려온 단어가 있었거든요. 日暮道遠. 제게 있어 이 남잔 묘하게도 장절한 고대세계의 영웅 이미지가 따라다녀요.(이거슨 설마 절대투구의 시너지 효과?!;;;) 하필 오자서라니 복수자의 팔자란 거기서 거기인가 싶기도 하고(....)
옛날옛날, 아주, 아-주 먼 옛날 어느 임금님과 왕비님이 계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동화가 그렇듯, 왕비님은 아이를 가지셨습니다. 어느날 눈 내리는 창밖 풍경을 보고 있던 왕비님은, 철로 된 창틀을 열려고 시도하다 그만 손가락을 찧어서 피를 흘리고 말았답니다. 그리고 아직 중2 감성을 못 버린 왕비님은, 뭐 옛날의 평균혼인연령을 생각하면 딱 그럴 나이죠? 떨어지는 피와 검은 창틀과 하얀 눈을 보며 생각했습니다. 무슨 동화에 철 창문이냐고 따질거면 그냥 넘어갑시다. 아무튼 눈처럼 희고, 피처럼 뜨겁고 붉고, 쇠처럼 강인한 아이였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왕비님은 아들을 낳았습니다. 과연 철처럼 강인하고 과묵하고, 가지런한 이가 하얗고, 성정이 불 같은 데다 금속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아들이었습니다만 왕비님은 그런 아이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이는 커녕 성격도 드러나지 않을 핏덩이 아들을 두고 그만 돌아가셨거든요. 산후조리를 잘못해서겠지요. 옛날엔 산욕열로 죽는 사람이 많았던 걸 생각하면 그렇게 이상하지도 않은 이야기입니다. 에릭이라는 이름을 가진 왕자님에게 ‘정상적인 가정’을 주고 싶었던 임금님은, 그래도 왕비님의 삼년상을 치르고, 이 나라 저 나라의 공주님과 선을 보느라 한참 시간을 허비한 다음 재혼했습니다. 부모와 자식으로 이루어진 가정만이 정상적이라는 편견의 소치이지요. 정치적인 이유가 있었다고 하지만 그냥 넘어갑시다. 그거까지 쓰면 동화 아니에요.
계모는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얼굴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남자였습니다. 무슨 정치적인 목적이 작용했는지 어느 나라의 왕자가 시집을 왔다나요. 괴상한 일이긴 하지만 잘 웃었고, 무엇보다 에릭을 보자마자 외쳤습니다. “Meine kleine Erik.” 독일어발음이 좀 영어풍이기는 했지만 뭐 어때요. 임금님은 계모가 가정적인 사람이라는 점에 아주 만족했습니다. 실제로 에릭과 많은 시간을 보내기도 했고요. 어린 에릭은 처음에는 계모를 아주 잘 따랐습니다. 계모는 자신에게 관심이 많았거든요! 게다가 에릭의 능력에도 크게 관심을 보였습니다. 임금님은 에릭의 그 특이한 능력을 숨기려고 애를 썼지만, 계모는 그러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특이한 예이지만 잘 살리면 좋은 재능이 될 거라고요. 그리고 에릭의 손을 잡고 외쳤습니다. 너와 내가 손을 잡고, 이 재능을 살려보자고요. 자신을 인정해주는 사람을 처음 만난 에릭은 처음에는 매우 기뻤습니다. 게다가 계모의 교육을 받게 되면서 에릭은 확실히 전보다 능력을 잘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한 해 두 해 계모와 보내는 시간이 늘어갈수록 무언가 이상한 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첫째, 이 계모는 이름이 너무 많았어요. 분명히 혼인서약서에 적은 이름은 세바스찬 쇼우인데, 누구는 계모를 닥터 슈미트라고 부르고, 누구는 계모를 또 다른 이름으로 불렀어요. 뭔가 낌새가 좋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계모가 자신을 보는 눈빛이 결코 어머니가 자식을 보는 눈빛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말하자면, 종마를 보는 마주의 눈이나 잘 자란 돼지나 닭을 보는 하녀의 눈빛이었어요. 게다가 쇼우는 가끔, 무서운 표정으로 에릭의 아버지를 바라보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에릭에게 무서운 이야기를 해 주기도 했지요. 왕궁 바깥의 세상에 대해서나, 그 초라하고 보잘것 없는 세상을 어떻게 지배해서 옳게 만들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무언가 조금 이상했습니다. 에릭이 지금까지 들어온 정치 이야기와는 조금 달랐거든요.
에릭의 생각은 맞았습니다. 불행히도 에릭의 아버지는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무언가 마술적인 힘이 작용한 것 같았지만 아무도 그게 뭔지는 몰랐습니다. 사고 당일 몇몇 사람들이 피부가 붉고 꼬리가 난 악마를 보았다고 수군거렸지
만 그 사람들은 조용히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계모는, 아니 쇼우는 본성을 드러냈습니다. 에릭은 당장 나무와 벽돌로만 지은 건물에 유폐되었어요. 사람들은 왕위계승자가 그에 맞는 교육을 받기 위해 먼 나라로 유학 갔다고만 알고 있었습니다. 후계자라고는 하나뿐인 상황에서 왕위계승자를 유학보내는 것이 위험하지 않은가 하는 의견은 묵살되었습니다. 쇼우의 부하들이 왕비의 섭정을 돕는다는 이유로 왕실의 요직을 차지했고, 점점 나라는 쇼우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점점 이 나라가 원래 어떤 식으로 굴러갔는지에 대해 잊어갔어요. 쇼우의 정치에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사람들의 행동을 한 방향으로 몰아가는 힘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쇼우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쇼우의 말에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에릭에게도 쇼우는 때때로 찾아와 많은 것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교육이라나요. 전에 하던 이야기와는 좀 달랐습니다. 아니, 좀 더 자세해졌다고 해야죠. 이 세상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사람에도 종류가 있는데 그것이 어떤 것인지, 어떤 종류의 인간이 다른 인간을 지배하는 것이 왜 정당한지, 그리고 그 지배는 어떤 식으로 이루어져야하는지. 쇼우는 그야말로 무자비하고 가차없이, 그 ‘어떤 종류의 인간’을 위한 정치를 행했습니다. 그리고 에릭에게 자신의 의견을 폭력적으로 강요했습니다. 에릭은 처음에는 전에 하던 대로 쇼우의 교육을 받아들이려고 했고, 그 다음에는 공포에 질렸고, 다음에는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미 죽은 왕의 아들에게 사람들은 아무 관심이 없었습니다. 아니 관심을 가진 사람도 있었어요. 하지만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숙청되는가를 자신의 눈으로 본 다음 에릭은 절망했습니다.
그래서 에릭은 그저, 쇼우의 폭력적인 교육에 적응하기로 했습니다. 굉장히 절망적인 시간이었고, 그 시간을 버틸 힘이 에릭에게는 없었습니다. 아직 어린 아이고, 게다가 자신에게 한 때 부모와 같은 존재였고 지금도 그러니까요. 아이는 부모가 하는 말을 믿는 법입니다. 부모의 양육태도가 인간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는 다들 잘 아시잖아요. 점점 에릭은 음지에 심은 해바라기처럼 축 처져갔습니다. 그리고 점차 표정이 없어지고, 무뚝뚝한 사람이 되어갔지요. 쇼우는 매우 만족한 듯 에릭을 쳐다보며 웃곤 했습니다. 에릭이 점점 기계적인 인간으로 변해가던 어느날, 쇼우가 에릭에게 무언가를 지시했습니다. 에릭은 아무말 없이 나갔다 왔고, 쇼우의 정적 하나가 숙청되었지요. 누구도 범인은 커녕 범행에 사용된 흉기조차 알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쇼우는 매우 자애롭게 웃으며 에릭의 머리를 쓰다듬었어요. 그런 세월이 몇 년간 이어졌고, 쇼우는 이웃나라와 협상을 빙자한 협박을 하러 종종 자리를 뜨곤 했습니다. 에릭이 이미 장성하여 한 몫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쇼우는 진심으로 에릭을 아꼈습니다. 숙청도구로 사용했다고 아끼지 않은 건 아니에요. 그저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아서 정신을 좀 꺾어놓은 것 뿐이죠. 에릭의 능력은 유용했고, 그래서 쇼우는 만족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에릭의 정신이 덜 꺾였다는 걸 미처 몰랐죠. 협상을 위해 쇼우가 나라를 비운 동안 에릭은 집을 나갔습니다.
에릭을 쫓는 쇼우의 부하들을 피해 한참을 방랑하다, 에릭이 찾아간 곳은 국경 근처의 깊은 산속이었습니다. 이곳이라면 자신의 능력을 숨기고도 잘 살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하지만 곧 에릭은, 그곳의 산 속에 많은 귀금속이 매장되어 있고, 이미 광산 하나가 생겼다가 광맥을 찾지 못해 폐업했다는 사실을 알아냈어요. 여기는 위험하다는 위기의식이 들었지만, 다른 곳으로 가기엔 사정이 여의치 않았습니다. 산속을 헤매다 어쩔 수 없이 폐광으로 찾아갔어요. 물론 아주 폐쇄된 곳은 아니었습니다. 괴물 몇 명만 남아서 작업을 계속할 뿐이라 폐광된 거나 다름 없는 곳이라고 들었지요. 괴물이라는 말에 에릭은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접근하지 않을 게 아닌가요. 오히려 몸을 숨기기에 좋은 곳이죠.
광산의 괴물들은 에릭을 따뜻하게 맞아주었습니다. 사실 괴물이라고 해도, 그렇게 무시무시한 존재는 아니었어요. 그냥 사람들이었죠. 뮤턴트. 그들은 자신들을 그렇게 소개했습니다. 특이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들이라고요. 그래서 아무도 접근하지 않는 폐광에서 지내고 있다고요. 피부가 파란,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변신할 수 있는 여자, 동화책 속 요정처럼 날개가 달린 여자, 소리를 질러 물건을 파괴할 수 있는 남자, 가슴에서 광선이 나와 목표물을 맞추는 남자. 그들은 에릭이 자신들과 같은 부류라는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에릭은 그곳에서 지내면서 자신들의 능력에 대해 잘 모르는 ‘뮤턴트’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무서워하는 어린 인간들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이들에게 받은 만큼은 갚아줘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뮤턴트들은 환호했습니다. 그럴 수 밖에요. 에릭이 손을 대는 곳에는 틀림없이 광맥이 묻혀있었고, 에릭이 마음만 먹으면 힘들게 땅을 파지 않아도 광물을 얻을 수 있었어요. 이거라도 가지고 살라고 해 주고 에릭은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아직 어리고 사회경험이 없는 뮤턴트들은 매우 행복하게 그것들을 내다팔았습니다. 그 광물을 어떻게 얻었는지는 말하지 않았지만, 자신들이 비정상적으로 많은 수확물을 캤다는 점을 숨기지 못했어요. 그 소식은 쇼우의 귀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쇼우는 알았어요. 내 작은 에릭이 거기 숨어 있구나 하고.
쇼우의 부하들이 파견되었습니다. 그러나 깊은 산속이라 찾기도 힘들었고, 무엇보다 어린 뮤턴트들은 착한 아이들이어서 자기들과 함께 지냈고, 또 식탁에 멀건 국물과 검은빵 대신 그럴듯한 식사가 올라가게 해 준 에릭에 대한 의리를 지켰습니다. 일부는 쇼우의 부하들과 싸웠고, 일부는 쇼우의 부하들과 친해지기도 했지요. 아무튼 수사에 혼선이 엄청나게 빚어졌습니다. 도대체 찾을 수가 있어야죠. 결국 쇼우가 직접 나서게 되었습니다. 쇼우는 마침내 유리와 플라스틱으로 만든 투명한 유리관 속에 에릭을 쓰러뜨리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에릭은 눈을 뜨지 않고, 굳게 정신을 닫아걸었습니다. 쇼우의 부하 중 텔레파시스트가 있었지만 에릭의 정신에 간섭하기는 어려웠어요. 쇼우는 관을 방치하고, 에릭에 대해서는 포기하기로 했습니다. 어차피 이번에 많은 ‘뮤턴트’를 찾은 걸요. 그들에게 엔젤, 레이븐 같은 이름을 붙여주며 쇼우는 즐거워했습니다. 세상엔 좋은 뮤턴트들이 많았어요. 점차 쇼우는 뮤턴트들을 모아서 자신의 나라를 만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에릭은 유리관속에서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뮤턴트가 쇼우의 이상에 반기를 들었어요. 강력한 정신계 능력자였던 그는, 동시에이상을 위해 노력하는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지금까지 다른 뮤턴트들도 그랬지만요. 하지만 그와 다른 뮤턴트들의 차이점은, 그에게는 이상을 실현시킬 힘이 있었다는 겁니다. 이웃 나라의 왕자였거든요. 쇼우가 이웃 나라까지 어떻게 할 수는 없었지요. 아직은 그럴 단계까지 힘을 키우지 못했고요. 그는 쇼우에게 반항하다 유리관 속에 갇힌 한 뮤턴트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고, 쇼우에게서 도망쳐서 저항하던 뮤턴트들과 그를 구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유리관을 여는 것까지는 그렇게 어렵지 않았어요. 관 속에서 눈을 뜨지 않는 에릭이 문제였지요. 왕자님은 혼신의 힘을 다해 정신계로서의 능력을 사용해서 에릭을 구했습니다. 너는 혼자가 아니고 세상엔 많은 형제가 있다고, 쇼우에게서 뮤턴트들을 구하는 게 옳다고 믿고 있다고 말이에요. 설득이 먹힌 건지, 머릿속에 들어온 찰스-왕자님의 이름이랍니다-가 희고 붉고 검어서 마음에 들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어째서 백설공주인데 왕자님이 더 희고 붉고 검은 건지는 따지지 맙시다. 따지는 순간 이미 당신은 지고 있어요. 아무튼 왕자님은 유리관 속의 에릭을 구해냈습니다. 관에서 나온 순간 에릭과 찰스는, 이 사람과 함께라면 뭔가 잘 될 거 같은 예감을 받았어요. 둘은 함께 뮤턴트 아이들을 모아 가르치고 훈련시켜 쇼우의 군대를 물리치고, 많은 뮤턴트들을 쇼우의 손에서 해방시켰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오래오래, 함께,
행복하게 잘 살았을까요?
동화라면 그랬겠지요. 하지만 지금부터 제가 들려드릴 이야기는 동화가 아닙니다. 이 동화에는 숨겨진 뒷이야기가 있어요.
아까 말했듯 에릭과 찰스는 쇼우를 꺾을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뮤턴트 아이들을 가르쳤다고 하지만 찰스가 가장 신경쓴 사람은 에릭이었어요. 찰스는 에릭이 분노심으로 일을 그르칠까 염려해서 에릭에게 평정심을 가르쳤고, 분노를 조절하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찰스가 정신적인 면을 건드리는 것에 저항하던 에릭은 점차 저항을 그만두고 찰스가 말하는 대로 자신을 가장 잘 통제하는 방법을 찾아냈어요. 찰스는 그 정도로 만족했습니다. 사실 더 이상은 에릭이 말하지 않고 숨기기도 했지만 찰스가 거기서 그치기로 만족한 거예요. 이유는, 뭐 그 정도로 만족하자고 스스로를 속인 것일지도 모르지만 가장 중요한 건, 찰스는 남의 정신에 영향은 끼치되 간섭하지 않는 사람이었다는 점입니다. 정신의 가장 깊은 곳을 차마 건드리지 못했고, 건드릴 수도 없었던 겁니다. 그 사람이 숨기고자 하는 부분을 억지로 파고들지 못했어요.
그래서 왕궁을 습격하던 날, 왕궁 가장 깊은 곳에서 쇼우를 만난 에릭이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했지요. 에릭은 쇼우의 머리에 가장 단단한 단검을 꽂아넣었습니다. 찰스가 가르친 대로 가장 냉정하게요. 하지만 숙청을 하더라도 저런 식은 아니어야 했는데. 쇼우의 시체를 메고 나온 에릭은 선언했습니다. 이 나라는 내가 물려받겠고, 나는 선왕과 왕비의 뒤를 잇겠노라고요. 에릭은 쇼우를 말 그대로 계승했습니다. 선왕의 적자가 사악한 왕비를 물리치고 왕좌에 오르겠다는 데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고, 쇼우의 뮤턴트들에게도 이건 나쁜 조건이 아니었습니다. 찰스는 경악했지만 이미 늦었어요. 그때야 알았습니다. 에릭은 쇼우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을요.
에릭은 철의 제왕으로 군림하며 쇼우와는 다르지만, 쇼우처럼 세상을 다스렸습니다. 그리고 찰스는 다시는 에릭과 평온하게 마주보고 대화할 수 없었습니다. 이야기는 사실은 이렇게 끝이 났답니다.
1. 서울시장 당선 기념 배포본이었습니다.
2. 정치에 대한 패러디가 약간 들어가 있지만 그게 핵심은 아닙니다. 중요한건 에릭과 찰스죠!
3. 동화 라푼젤 패러디입니다.
탑이 있고 마녀가 살고 있었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마법사가 살고 있었답니다. 슈미트인지 쇼우인지 할로우맨인지 케빈 베이컨인지, 전해지는 이름만 수십가지인 무서운 남자였습니다. 그렇게 이름이 여러가지인 이유는 아주 오래 오래 살아서라고 하더군요. 아무튼 이 마법사는 나름 부업으로 유기농 상추를 재배하고 있었습니다. "무엇을 낳을까요 두근두근 돌연변이 상추"라는 기괴한 이름의 상추는 유전자 변형 채소인 주제에 엄청난 고가였기 때문에 정상적이라면 절대 팔리지 않았겠지만, '절대 그럴 분이 아니신' 국왕 전하가 강바닥을 다 들어엎는 바람에 채소밭이 씨가 마르다시피 한 요즘에는 날개돋친 듯 팔리고 있었습니다.
상추 및 각종 야채 품귀 현상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는 상황에서, 특히 괴로워하던 한 아주머니가 있었습니다. 아주머니가 그토록 괴로워한 이유는 사실 여러가지였어요. 그 분이 원래는 채식주의자였다는 점, 하지만 어째서인가 단백질을 달라고 무척 보채는 뱃속의 아기 때문에 유제품과 달걀 정도는 어떻게든 먹고 있었지만, 아무튼 채소가 너무나도 먹고 싶었다는 점, 마지막으로 그럼에도 가끔은 미치도록 채소가 먹고 싶었다는 점을 들 수 있겠습니다. 어쨌건 아주머니는 매일 매일 마법사의 상추밭을 바라보며 말라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아주머니를 보다 못한 남편이 결국 상추를 서리하러 가게 된 거야 우리 모두가 짐작할 수 있는 일이지요. 물론 즉각, 시뻘건 피부를 가진 악마같은 남자에게 붙들려 곧장 마법사 앞으로 끌려가게 되었구요.
"내 상추를 훔치려 하다니 유감이군." 이라고 웃으며 말한 마법사는 즉각 부부에게 상추 훔치는 것을 "재고려" 해 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거절 못할 거래를 걸었지요.
마법사는 말했습니다. 자기는 일-생동안 너무나 착해서 손해만 보고 산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정-말 성격이 좋은 나니까, 나님이니까 아주머니를 두꺼비로 만들거나 아저씨를 통돼지로 만들어 구워 먹어 버리거나 하지 않는 거라고요. 그리고, 새파랗게 질린 부부에게 선언했습니다. 두 부부가 정답게 한 쌍의 소가 되어 다정하게 함께 쟁기를 끌며 송아지 낳고 일가족이 행복하게 살겠는지, 아니면 이번에 낳는 아기를 자신에게 넘겨주고 편안하게 살겠는지 선택을 하라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슬쩍 귀띔하길, 요즘 밭 가는 하인들이 야들야들한 송아지 고기가 먹고 싶어 죽을 지경이라고 했습니다.
부부는 필사적으로 자비를 간청했지만 마법사는 절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아기를 넘겨주겠다고 약속하면 일평생 무한 상추 이용권을 주겠다고 했을 뿐이죠. 그리고는 당장이라도 두 부부를 소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듯 지팡이를 움찔거리는 모습에, 결국 부부는 아기를 넘겨주겠다고 약속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분이 좋아진 마법사는 부부가 아기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것까지는 허락해 주었답니다.
"미쳤어요? 육아가 얼마나 귀찮은 일인데 그래요?" 라는 이웃 마녀 엠마의 말에 마법사 쇼우 씨는 웃으며 답했습니다. "아기 때무터 내 취향으로 키워서 성년때 따먹기 위해서 뭔 고생을 못 하겠어?" 그리고 '뭐 이런 변태새끼가 다 있나' 라는 눈으로 쳐다보는 엠마에게 이런 말도 했죠. "어차피 네가 많이 도와 줄 거잖아. 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녀니까 말야." 제길, 엠마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말했습니다. "순면 기저귀 빨래는 니가 하세요." 어차피 안 하겠지만 말이죠.
그로부처 이십여년 후.
명랑한 말발굽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말 잔등에 올라앉은 청년은 꽤나 즐거운 듯 콧노래를 불러제끼고 있었습니다. 부드러운 망토를 두른 여행복 차림에 칼 한 자루만 허리에 차고, 멋진 가죽 부츠에 은 박차를 단 푸른 눈동자의 청년은 그야말로 즐거워 견딜 수 없다는 듯 연신 노래를 흥얼거리며 길을 재촉합니다.
"분명 '계시'에 적혀 있었단 말야. 내 나이 20세가 되는 해, 세상에서 가장 부자인 마법사의 영지에서 내 인연을 만나게 될 거라고."
그런 흐리멍텅한 계시 하나 믿고 여기까지 온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무려 지난달 따로 점쳐본 점괘는 '연인'이었고, 드디어 솔로 생활 청산인가 하고 기뻐서 돌아오는 청년에게 길거리의 돗자리 사주 할아버지가 외쳤던 것입니다.
"자네, 동쪽에서 허리 가는 미인을 만날 팔자야! 죽이게 섹시한데다 무려 처녀일 거라고!"
어쨰 계시보다 더 흐리멍덩한 것 같습니다만, 아무튼 청년은 '이쯤 되면 운명!' 이라고 외치며 애마 미스틱의 등에 올라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었습니다.
내 님은 이제나 나올까 저제나 나올까. 두근두근하며 길을 가던 청년은, 그러나 이 글에 등장한지 한 페이지도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산등성이 지는 해를 바라보며 인정해야만 했습니다.
"하하하, 이거 꼼짝없이 길을 잃었는걸, 하하하하, 미안해 미스틱."
붉은 갈기의 준마가 한심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아니 좀더 정직하게 말하자면 매우 주인을 업신여기는 눈빛으로 노려보았습니다만, 긍정 파워로 가득한 우리의 청년은 개의치 않고 즐겁게 얘기합니다.
"숲에서의 야영이라니 완전 즐겁잖아! 부드러운 밤바람, 타오르는 모닥불, 나 심심하지 말라고 시시때때로 와 주는 유쾌한 불곰과 늑대!"
미스틱의 눈빛이 더 차가워집니다만, 청년은 그런 것 따위 알아채지 못한 채 야영 준비를 했습니다. 아니,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청년은 어둑해지던 숲의 한쪽 구석이 뭔지 알 수 없는 불빛 때문에 훤히 빛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고, 곧장 호기심을 느끼고 말았습니다.
"미스틱, 저 불빛 보이지? 가 보자! 어쩌면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르고, 잘만 하면 심심하지 않게 이야기나 하면서 즐거운 밤을 보낼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미스틱은 매우 회의적인 눈빛이었지만, 어쨌건 이 쓸쓸한 숲에서 음침하게 혼자 잠드는 것보다는 누군가 더 있는 것이 좋다는 데에는 동의하고 있었으므로 묵묵히 주인을 따라 걸음을 옮겼습니다.
잠시 후.
"오오! 저것 좀 봐!"
청년은 눈이 둥그래져서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았습니다. 대체적으로 시니컬한 성격을 지닌 미스틱도 이번만은 놀라서 둥그런 눈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덤불 속에 몸을 숨긴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만큼 인상적이었던 것입니다.
"라푼첼, 라푼첼, 날 올려주렴!"
이 공터 가장자리에 도착한 순간 이미 초로의 마법사는 높디 높은 탑 앞에 서서 그렇게 외치고 있었습니다. '이봐요, 라푼첼이 대체 무슨 뜻인가요?' 라고 물어볼 틈도 없이 그렇게 외치더니, 곧장 공중으로 두둥 떠올라 버린 것입니다. 와아아아아아우, 이건 정말 스펙터클한 일 아닙니까? 청년은 말 그대로 눈이 동그래져서 그 광경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약 10분쯤 후 마법사가 - 아마도 로브에 망토에 지팡이를 들었으니 마법사 맞을 겁니다 - 다시 두둥실 내려오는 걸 보고서야 뒤로 주저앉아 버렸던 것입니다.
"와우 미스틱, 방금 봤어?" 라고 외치면서요. 미스틱은 뒤를 뒤로 눕히고 히힝거렸습니다. 다른 이유에서가 아닙니다. 그간 이 주인과 함께 해 오면서 쌓아온 직감이 외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인간, 절대 똑같이 해 볼 거라고! 저 위에 뭐가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면서 말입니다!!!
"나도 날아올라가 보고 싶어!"
아오, 그럴 줄 알았어! 저 인간 그럴 줄 알았다고! 미스틱은 힘껏 불만을 표시하며 푸릉거렸지만 청년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서둘러 탑 앞으로 다가갑니다. 아참, 아까 설명이 늦은 것 같은데, 사실 숲에서 희미하게 비치고 있던 건 바로 이 탑에서 흘러나온 조명이었습니다. 어떤 입구도 계단도 없이 높이 올라가 있기만 한 기묘한 하얀 탑이었지요.
어쨌건 미스틱이 어떤 불만을 표했건 간에, 청년은 아까 마법사가 서 있던 자리에 섰습니다. 그리고 외쳤죠.
"라푼첼, 라푼첼, 날 올려주렴!"
허허허허, 이 인간이 왜 이래. 설마 한 번 일어났다고 다시 똑같은 일이 일어나겠어? 미스틱은 머리좋은 명마답게 시니컬하게 비웃었지만, 다음 순간 일어난 일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뒷걸음질 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바로 청년이 둥 하고 떠오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미스틱은 그제서야 달려들었지만 이미 한 발 늦었습니다. 둥둥 떠오른 청년은 그대로 탑 위로 올라가 버렸거든요. 미스틱은 공연히 발을 구르며 성질냈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도리없이 청년이 무사히 내려오기를 빌며 기다릴 수밖에 없이 된 것이지요.
청년의 가슴은 터질듯 두근거렸습니다. 저 탑 위에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 알 수 없는 힘에 들려 올라가면서도 청년의 마음 속에는 두려움보다도 호기심이 가득했습니다. 금은보화가 쌓여 있을까요? '라푼젤'이라는 건 대체 무엇일까요? 혹시 계시에 나와 있던 절세미녀의 이름이 바로 라푼첼인 것일까요? 아니면 어떤 마법의 보물인 걸까요? 마침내 창문 안으로 들어가 나무 마룻바닥에 발을 디딘 순간, 청년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탄성을 내질렀습니다. "세상에나!" 눈앞의 광경은 그만큼이나 놀라웠답니다.
금은보화는 없었습니다. 기이한 마법 장치 같은 것도 없었습니다. 호두나무로 만들어진 매끄러운 마룻바닥 위에는 꽤 고급스런 카펫이 깔려 있었고, 그 위엔 푹신푹신해 보이는 커다란 침대와 그에 대비되든 너무나 소박해 보이는 테이블과 의자 두 개가 있었습니다. 청년을 놀라게 한 것은 그러나, 전반적으로 어딘가 언밸런스해 보이는 - 대체 핑크/자주색 비단이불에 감싸인 호화로운 마호가니 침대와 참나무로 된 투박한 테이블과 의자라니 이게 뭡니까. - 실내도, 그리고 그 언밸런스의 정점을 달리는, 온 방을 둘러싸고도 부족해 천장까지 닿을 만큼 높은 서가들도, 그리고 거기 빽빽하게 꽂혀 있는 무시무시한 양의 책들도 아니었습니다. 청년의 새파란 눈동자는 그 방 한가운데 서서 이 쪽을 바라보는 또다른 남자에게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어쩐지 쇼우놈 치고는 질량감이 다르다고 생각했지. 넌 뭐냐?"
일단은 청년인 듯 했지만 기묘하게 노안인지라 도무지 나이를 제대로 가늠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쨌건 잘 짜인 얼굴은 꽤 핸섬했고, 저 말만 내뱉고 꾹 다문 입과 날카로운 눈매는 어딘가 고양이과의 대형 야수나 맹금류를 연상테 했습니다. 단정하게 정리된 머리는 반듯한 이마를 잘 보여주고 있었고, 그 밑에서 빛나고 있는 청회색 눈동자, 견고하고 우아한 목선, 섬세한 어깨, 어째서인가 상반신이 누드인 까닭에 제대로 감상할 수 있던 잘 짜인 흉근과 단단해 보이는 복근,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잘록한 허리'를 본 순간 청년의 눈동자에는 불꽃이 튀었습니다.
즉각 부드러운 망토를 세련된 몸짓으로 한쪽으로 치우고 품위있는 자세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청년은 맑은 목소리에 자신이 담을 수 있는 가장 깊은 성의를 담아 말했습니다.
"이름 모를 미인이여, 이 몸은 찰스 프란시스 자비에라 합니다."
"......뭐?"
남자의 응대에 담긴 것은 황당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지만 청년, 아니 찰스는 굴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상냥한 미소를 띠고 사파이어빛 꿀처럼 달콤하고도 영롱한 시선을 던지며 정말 놀랍도록 청명하고 고운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세상의 어느 레이디라 해도 거절할 수 없을 듯한 정중하고도 열렬한 구애였지요.
"나 찰스 프란시스 자비에는 그대, 백색 탑의 미인에게 청합니다. 부디 그 귀한 이름을 가르쳐 주시지 않겠습니까?"
"이봐, 일단 내 이름은 에릭이긴 한데..."
"오, 에릭." 찰스가 풍부한 감정을 담아 그 이름을 말하는 순간, 미인, 그러니까 에릭은 그간 쇼우밖에 불러주는 사람이 없던 무미건조한 자신의 이름이 황금으로 만들어진 보석 명판에 아로새겨지기라도 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한다면 그래서 그 뒤 찰스가 줄줄 늘어놓는 말들을 전혀 막지 못했습니다.
"에릭, 내 가인佳人의 이름은 그 자태처럼 강인하고도 섬세하군요. 난 바로 그대를 만나기 위해, 그리고 그 고아한 이름을 듣기 위해 일곱 개의 산과 두 개의 바다를 넘어왔다오. 그대는 바로 내게 주어진 계시 속의 사람입니다. 별이 정하고 신이 내려주신 축복이지요."
"......뭐?!"
"그대를 보는 순간 깨달았습니다. 당신의 아름다운 눈동자, 우아한 몸가짐, 그 모든 것이 바로 나를 위해 준비된 이라는 걸요."
"저기 잠깐, 지금 뭔가 오해가..."
청년이 무릎을 펴며 몸을 일으킵니다. 눈앞에 선 귀공자가 보기만큼 만만한 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슬슬 경계하기 시작한 에릭에게, 찰스는 더더욱 달디단 목소리로 얘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니오, 에릭. 그대를 보는 순간 알 수 있었어요. 당신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너..."
"찰스입니다. 찰스 프란시스 자비에."
"너말야.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난 여기서 절대 나갈 수 없어."
"그럴 리가 있나요. 당신은 여기서 나갈 수 있어요."
에릭이 눈살을 찌푸립니다. 순간 뭔가 울컥한 듯 이를 악물고 잠시 침묵하던 그는, 고개를 돌리고 한껏 감정을 억제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습니다.
"안돼, 넌 여기 뭐가 걸려있는 지 몰라."
갑자기 침묵이 흘렀습니다. 아무 반응이 없는 것에 의아함을 느낀 에릭이 시선을 돌리자 여진히 달콤하고 상냥하지만 어딘가 머리속을 깊이 들여다 보는 듯한 푸른 눈동자가 눈에 들어옵니다.
"이봐?"
"부모님이군요. 그대를 이 곳에 묶어두기 위해 마법사가 협박을 하고 있고요."
"...!"
"방금 전에도 그는 당신에게 찾아와서 빨리 합방 날짜를 잡자고 고집을 부렸고, 당신은 그러느니 죽겠다고 뻗댔네요. 그 마법사가 당신을 억지로 건드리지 않은 이유는 저도 잘 모르겠지만, 괴이한 인물인 것만은 틀림없군요."
경악한 에릭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찰스는 말을 이었습니다.
"아무 걱정하지 말아요. 당신 부모님은 구출될 겁니다. 제가 꼭 그렇게 되도록 할 거예요."
"너...너 대체 어떻게."
"자세한 건 나중에 말해줄게요. 이 곳에서 나갈 수 있도록 해 줄 테니 아무 걱정 하지 말아요 내 사랑. 이 곳은... 이 곳은 품위가 좀 부족해요. 당신은 웨스트 체스터의 훌륭한 안주인이 될 겁니다."
에릭이 눈을 크게 떴습니다. 그간 쇼우의 '보살핌'을 받으며 그저 이 탑 안에서 사는 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삶이라고만 생각해 왔습니다. 이 왕국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숲이 마법사 쇼우의 영지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랬기에 이 탑까지 찾아온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지요. 이 곳에 와서 탑을 본 이가 혹시 있었다 해도 '마법사의 탑은 건드리는게 아냐' 라고 생각하며 모두 도망가 버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마법처럼 찰스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쪽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해준 것이지요. '넌 여기서 나갈 수 있어. 나와 함께 나가자.' 라고요.
다만...
"안주인?" 에릭이 미간을 찌푸렸습니다만, 찰스는 별일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습니다. "자자, 사소한 건 넘어가지요. 아무튼 날 믿고 기다려 봐요. 장인 장모님을 무사히 확보하면 다시 돌아와서 여기 그대에게 얘기해 줄게요."
과연 이게 사소한 것인가, 정말로 무시해도 되는 것인가에 대해 심각한 불안감과 의혹이 느껴졌습니다만, 어쨌건 에릭은 이 기이한 청년의 말을 믿어보기로 했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에릭은 곧장 입을 열었죠.
"그래서, 내가 지불할 대가는 뭐지?"
순간 찰스가 눈을 깜박였습니다. "예?"
"대가 말야. 부모님을 구해준다고 했고 내가 여기서 나가게 해 준다며. 그에 대해 네가 내게 원하는 게 있을 텐데."
어리둥절해 하던 청년의 푸르른 눈동자에 더없이 따뜻한 눈빛이 차 올랐습니다.
"내가 바라는 건 한 가지 뿐이에요."
"한 가지?"
청년이 다가왔습니다. 에릭의 어깨를 붙들고, 그 손을 잡아 손등에 보드라운 입술을 꾹 누릅니다. 그리고 놀란 눈으로 찰스를 바라보는 에릭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다정하게, 따뜻하게, 에릭이 일생 제대로 느껴보지 못했던 모든 대가 없는 상냥함을 담아.
"행복해져야죠. 내 사랑하는 이가 행복하지 못하다는 건 제게 지옥같은 일이 될 테니까요."
"그러니까, '안주인'이 되라 이건가?"
"그러면야 좋지만 꼭 그럴 필요도 없어요. 행복하면 돼요."
멍한 얼굴이 된 에릭에게 윙크를 남기고, 찰스는 닫혀있는 들창 앞으로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들창을 활짝 열고 아래를 내려다 본 다음 에릭을 돌아보았습니다.
"어...근데 에릭, 저 좀 내려주지 않겠어요? 어...어라, 에릭?!"
에릭의 푸른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습니다. 우리 에릭은 정말 속눈썹이 길구나, 이쁘기도 하지, 하고 찰스가 생각하는 순간 그 눈물이 뺨으로 흘러내립니다. 그 상태로 에릭이 천천히 손을 내밀자 찰스의 몸이 두둥실 떠올랐습니다. 사랑한다고 외치고 싶었지만 혹시라도 에릭이 집중력을 잃으면 큰일납니다. 입을 꾹 다물고 내려가는 찰스의 앞에서 에릭은 처음으로 환히 웃었습니다. 그리고 찰스는 생각했지요. 아, 내 사랑은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상어구나.
찰스가 떠난 후, 에릭은 방을 돌아보았습니다. 일생동안 이 곳에서 지내왔지요. 어린 시절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쇼우 아빠랑 결혼할 거야" 같은, 지금 생각하면 어린 자신의 입을 꿰매버리고 싶은 발언도 유감없이 하기도 했습니다. 그야 어린 에릭에게 있어 쇼우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가져다 주는 하느님 비슷한 것이었으니 말이죠.
하지만 언젠가부터 '뭔가 이건 아니다' 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린 에릭이 음식 투정을 하면 요리사가 울며불며 어디론가 끌려갔고, 새 옷이 튿어지기라도 하면 하녀가 영영 사라졌지요. 그래도 혹시 모릅니다. 만일 에릭이 정말로 '아무것도' 몰랐다면 그냥 그게 당연한 건 줄 알고 살았을 겁니다.
하지만 에릭은 알게 되고 말았습니다. '나의 에릭에게 꼭 필요한 교양을 갖추기 위해' 쇼우가 고용했던 가정교사로부터 그 깨달음이 시작되었지요. 그 가정교사는 곧 불온 딱지를 달고 나라 밖으로 추방되어 버렸습니다만, 그 때부터 지식욕에 눈뜬 에릭은 세상의 모습에 대해 알고 싶어진 나머지 엄청난 양의 책들을 사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에릭이 무슨 돈이 있었냐고요? 당연히 쇼우가 허락해 준 거죠. 그는 에릭이 제출한 도서 리스트를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고는 아자젤과 립타이드에게 던져주기만 했답니다. 그리고 그 뒤로도 에릭은 아자젤과 립타이드가 가져오는 "이달의 신간 리스트" 에서 또 많은 양의 책을 사들였고요.
그 결과, 너무나 당연하게도 에릭은 자유를 갈망하게 되었습니다. 쇼우가 사실은 강바닥을 뒤엎은 국왕 폐하를 뒤에서 조종한 인물이라는 건 원래 쇼우의 자랑질 덕에 알고 있었습니다만, 그게 진정으로 어떤 의미인지는 책을 읽고 나서야 생각해 보게 되었지요. 그간 '쇼우 아버지'의 위업이자 선행으로 생각하고 있던 것이 대체 무엇인지, 주위의 사람들이 하나 둘씩 사라지는 것이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확실히 알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깨달은 것은, '난 널 정말로 아낀단다.' 라고 아무리 감언이설을 늘어놓는다 해도 쇼우는 절대 에릭에게 자유를 줄 생각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탈출했고, 다시 잡혀 들어갔고, 탑의 고용인은 다시 바뀌었습니다. 그러기를 수차례, 결국 쇼우는 마지막 카드를 꺼내들었고, '진짜 부모님의 안전' 앞에서 에릭은 끝내 무릎을 꿇고야 말았습니다. 대신 자신의 존재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다치는 것이 너무나도 지긋지긋했던 에릭은, 탈출을 시도하지 않는 대가로 이 탑에 더이상 어떤 고용인도 들이지 말아달라고 간청했고, 그래서 이렇게 혼자 있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성년이 된지 이미 몇년 지났지요. 쇼우의 구애는 갈수록 집요해지고 있었습니다. 에릭도 언젠가는 그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었고요. 단지, 마법사 쇼우는 에릭이 언젠가 스스로의 의지로 무릎을 꿇을 날을 고대하고 있는 것이었고, 에릭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쇼우가 진심으로 에릭을 억누른다면 절대 당해낼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지요. "강제는 너무 쉬워서 재미 없거든." 그 때 명민한 에릭은 깨달았습니다. 그간의 교육, 교묘한 억압, 심지어 이렇게 쇼우를 향해 타오르는 반감마저도 "취향의 미인이 제 발로 무릎꿇고 항복한다"는 쇼우의 로망에 따른 교묘한 육성 결과라는 걸 말입니다. 이가 갈렸지만, 그 덕에 어떻게든 거절은 할 수 있었으니 다행일 뿐이었지요.
물론 시시각각 위험이 조여들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무려 키스까지 당해버리는 바람에 이제 끝인가 생각하던 참이었는데, 전혀 생각도 못한 일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 찰스 프란시스 자비에
안주인이니 뭐니 괴상한 소리를 하긴 했습니다만, 아무튼 부모님을 구하고 자길 탈출시켜 주겠다니, 이 또한 쇼우의 계략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엄청난 얘기였지요. 하지만 대체 여기서 어떻게 더 최악이 되겠어요? 에릭은 이를 꽉 물고 침대 베개 쪽을 바라보았습니다. 더이상 쇼우를 막을 수 없다면 어떻게든 피를 보기 위해 단도를 숨겨두었거든요. 그게 그의 피가 되건, 에릭의 피가 되건 말입니다.
다음날.
에릭은 이를 악물었습니다. 원래 오늘은 쇼우가 오지 않는 날이었거든요. 그러니 찰스가 온다 해도 쇼우와 마주칠 위험은 없고, 찰스가 와서 무사히 준비가 끝났다고 하면 밖으로 달아나면 그만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뭔가 초조해 보이는데, 괜찮은 건가?"
이 빌어먹을 놈이 여길 왜 왔담. 에릭은 티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속으로만 이를 갈았습니다. 에릭이 그러거나 말거나 상냥한 미소를 띤 쇼우는 짐짓 다정하게 말을 늘어놓을 뿐이었습니다. 그것도 되도록 에릭에게 바짝 붙으려고 노력하며 말입니다.
"내가 오늘따라 네가 너무 보고 싶지 않겠니. 그래서 이렇게 달려왔다만."
책상 위에는 쇼우가 선물이라며 사 온 장정본이 다섯 권이나 놓여 있었습니다만, '대운하 사업의 밝은 미래'라던가, '공영사업과 함께 하는 건축 토목 경제학'이라던가, '진정한 복지 - 부자 감세가 길이다' 같은, 대체 어느 정신나간 놈이 썼는지 알고 싶지도 않은 책을 뿐이었습니다. 차가운 눈으로 그 책들을 일별하던 에릭은 어떻게든 이 녀석을 빨리 보내버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는 최대한 정중하게 대답했습니다.
"책 잘 받았습니다. 이제 가 주시죠."
"허허- 에릭, 너 정말 변했구나. 옛날에는 정말 귀여웠는데. '쇼우 아버지랑 결혼할 거여요!' 라고 귀엽게 외쳐주지 않았더냐."
굳이 상기하기싫은 먼 과거를 꺼내드는 모습에 에릭의 이마에 힘줄이 불끈 솟았습니다만, 쇼우는 절대 개의치 않고 에릭의 바로 앞으로 바짝 다가와 상냥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눈이 전혀 웃고 있질 않는 걸요.
"에릭, 넌 아직도 헛된 꿈에 젖어 있구나. 난 네가 네 처지를 제대로 이해하고 미래를 위해 옳은 선택을 하길 바라는 것 뿐이란다. 내가 널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는 네가 제일 잘 알지 않니?"
에릭은 몸을 긴장시켰습니다. 쇼우의 손이 바로 에릭의 어깨를 짚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마치 키스할 듯 입술을 바짝 가져다 댄 쇼우가, 에릭의 귀에 조용히 속삭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바깥 사내가 가져온 헛꿈이 그렇게나 달콤하더냐?"
에릭은 화들짝 놀라 쇼우를 바라보았습니다. 뭔가 이야기를 해야겠는데, 입이 떨어지질 않았습니다. 어깨를 붙든 쇼우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쇼우 쪽이 동작이 더 빨랐고, 육체적인 힘은 약해 마땅할 마법사 주제에 도무지 당할 수 없는 힘으로 에릭을 밀어붙여 침대에 쓰러트린 쇼우는 그 목덜미에 살짝 입술을 내린 다음 혐오감으로 부르르 몸을 떠는 에릭에게 말했습니다.
"날 이 정도로 밀어붙이다니 정말 대단하구나. 역시 내 손으로 키워낸 내 취향의 아이야."
"내 몸에서 손 떼!"
결국 견디지 못하고 이를 악문 채 말하고 말았습니다만, 쇼우는 절대 손을 떼지 않았습니다. 그러기는 커녕, 오히려 에릭의 몸을 더 억누르며 찬찬히 말했습니다.
"오늘 그 녀석이 오기로 했지?"
에릭의 몸이 얼음처럼 굳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에릭을 바라보며 상냥하게 웃는 쇼우의 머리 뒤 창에서, 맑은 목소리가 들린 것은 그 직후의 일입니다.
"자 에릭, 선택하거라. 저 청년을 무시하고 지금 날 받아들인다면 저 청년과 네 부모를 다 무사히 보내 주마."
"네놈..."
"난 언제나 네게 선택의 기회를 줘 왔지 않니. 안 그래?"
이가 바득 갈렸지만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건 에릭도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래도 이런 식으로 항복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베개 밑에 숨겨둔 단도에 생각이 미치고, 그것이라도 활용해 어떻게든 이 위기를 모면하고 찰스에게 위험을 알려볼까 생각한 찰라, 마치 에릭의 생각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빙글 웃으며 쇼우가 말했습니다.
"에릭, 말해두겠지만 바깥에는 아자젤과 립타이드가 숨어 있단다."
"...!"
"그리고 그 친구들에게는 내 작은 발명품을 들려 줬지. 그 친구들에게는 이 방의 상황이 들리고 있단다."
"뭐!"
경악한 에릭 앞에서 쇼우가 웃어 보입니다. 이 악마 같으니.
"저들의 우리의 혼인 증인이 되는 셈이지. 저 순진한 바보가 어리숙한 농부 부부 둘을 데리고 방심하고 있는 동안, 우리는 만반의 준비를 해 뒀다 이 얘기다. 내가 모를 것 같았니? 널 키워낸 내가?"
에릭은 눈을 감았습니다. 그 감은 눈 위에 쇼우의 입술이 내려앉습니다. 미소를 만면에 담은 쇼우가 저항을 멈춘 에릭의 입에 입맞춤하고, 마침내 다리를 벌리려는 순간,
"야. 거기 너 비켜."
곧이어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고, 에릭은 뜬 직후 지금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아 멍하니 눈앞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자, 누구라도 이 상황은 이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일단, 온 몸이 푸른색 비늘로 덮여 있는 "굉장한" 여자가 쇼우를 두들겨패고 있었습니다. 그게 얼마나 격렬한 기세였냐면, 일단 이단옆차기를 날린 다음 주문 외울 틈도 주지 않고 원투 스트레이트 후 어퍼컷으로 옥수수를 털고, 당황한 쇼우를 그 뒤로는... 아아, 차마 묘사할 수가 없습니다. 짧게 얘기하자면, 마치 지독한 시어머니에게 제삿상에 올릴 북어 보푸라기를 앞으로 3분 안에 만들라는 말도 안되는 지시를 받은 며느리마냥 맹렬한 기세로 (이건 시어머니다 이건 시어머니다 이건 시어머니다) 후들겨패는 그 여자 앞에서 쇼우는 이 나라 가장 위대한 마법사에서 털 뽑인 닭같은 몰골로 뒤바뀌어 가고 있었습니다.
아니 대체 이 여자는 누구일까요? '아이구, 아이구구 나죽네'를 외치는 쇼우 앞에서 퍽 퍽 소리가 온 천하에 울리도록 두들겨 패 피떡을 만든 여자는 그제서야 뒤를 돌아보며 외쳤습니다.
"오빠, 이제 됐지?"
"응, 와 정말 언제 봐도 굉장하구나 미스틱은! 역시 난투기 최강, 블루 드래곤이야!"
"시끄러, 남의 눈에 띄면 안된다고 평소에는 말 노릇이나 시키는 주제에!!!"
아 그랬군요, 그랬던 것이었군요. 그러니까, 이 여자는 찰스의 여동생인 것이고, 그러니까 블루...블루 드래곤이고? 그래서 아마도 날아올라 와서? 이렇게 후드려 팬 것이겠군요. 하지만 그렇다면 립타이드와 아자젤은요?! 경악한 채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바라보는 에릭을 뭔가 심사하는 듯한 눈으로 위 아래 죽죽 훑어본 푸른 비늘의 여자는 흥 하고 고개를 돌리며 말했습니다.
"헐, 그 할아범 정말 맞는 말을 했네? 미인이잖아?"
"그렇지! 그래서 내 사랑을 위해 나는 말이지..."
"시끄러, 찰스 프란시스 자비에. 드래곤 로드 주제에 인간들의 너저분한 계시나 믿고 쏘다니고 말이지이."
그제서야 제정신이 든 에릭은 시선을 돌렸습니다. 아 맙소사, 거기 창 밖에 찰스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찰스이리라 짐작되는 것"이 있었습니다. 한없이 푸른 눈과 맑은 목소리는 찰스의 것이었습니다만,
"내 소개가 늦어서 미안해요, 하얀 탑의 그대. 하지만 그 때 눈앞에서 변하면 당신이 너무 놀랄 것 같아서."
창 바로 밖에 보이는 것은 거대한 크리스탈 드래곤의 머리와 눈이었습니다. 온 몸이 너무 거대한 까닭에 머리만 주욱 빼서 창 안에 들이밀고 있습니다. 수정처럼 반짝이는 비늘 사이의 온화한 푸른 눈이 실내를 둘러보았고, 피떡이 된 쇼우를 흘끗 바라본 뒤 다시 에릭을 향합니다.
"어때요, 이런 나도 괜찮나요?"
괜찮고 말고 할게 뭐 있겠어요.
1. 전설의 드래곤 로드가
2. 부모님을 한큐에 구하고
3. 쇼우를 피떡으로 만든 뒤
4. 프로포즈를 하고 있는데 말이죠.
에릭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어요. 탑 안 방은 이제껏 그런 적이 없으리만큼 환했는데, 그건 창을 통해 들어온 바깥의 눈부신 햇살을 크리스탈 드래곤의 아름다운 비늘이 반사하고 있기 때문이었지요. 그 빛에 감싸여, 에릭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어요. 눈에서는 어느새 눈물이 흘러나왔습니다만, 어쩌겠어요. 이럴때 안 울 수는 없잖아요? 몸을 일으켜 드래곤 앞으로 다가갔지요. 그리고 그 반짝이는 비늘에 입맞춤을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탑 안의 방을 불러본 후 찰스에게 찬찬히 얘기했어요.
"날 정말로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싶은 거지?"
"물론이죠!"
"그렇다면 일단 함께 얘기를 하자. 너와 나는 정말 할 일이 많거든."
머나먼 훗날, 사람들은 눈부시게 빛나는 드래곤 로드와 쇠를 자유 자재로 다루었던 위대한 군주의 전설을 이야기했습니다. 옛날, 아주 먼 옛날, 강바닥이 뒤집히고 산천이 망가지던 혼돈과 불황의 나날 속에 갑작스레 나타나 사악한 마법사를 물리치고 나라를 도탄에서 구한 인자한 드래곤과 결단력 넘치는 마법 군주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 둘은 나라를 구하고 잠시 안정시킨 후 새로운 왕을 세우고 아주 머나먼 나라로 날아가 버렸다고 합니다. 드래곤들만이 사는 나라, 혹은 모든 것이 영원히 사는 나라로 말입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 중, 이 위대한 전설이 바로 싱그러운 상추 한 다발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는 것을 제대로 알고 있는 이는 없습니다.
그건 오로지, 영생을 누리는 드래곤들만이 아는 비밀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고 합니다.
11월 13일 엑스멘 배포전에 참가할 소설 회지 Knockin' on heaven's door의 구두 예약을 받습니다(10일 자정까지)
현재 피눈물나는(...) 마감 중이며, 결정된 사양은, A5/19금/DP본/100p이상/시리어스AU/에릭찰스 입니다.
세부 사항이 결정되는 대로 공지하겠습니다. 아래는 샘플과 예약게시판 주소입니다. 통판은 행사 이후에 진행할 생각이고요, 현장에서 수령하실 구두예약을 남겨주시면 됩니다.
마감 끝냈습니다. 퀄리티를 묻는 분들께는.....
..... 네, 핫식스3캔에 커피를 버무린 맛이라고만 말씀드리겠습니다ㅠㅠ
최종 사양은 다음과 같습니다. A5/19금/인쇄본/120P/시리어스AU/에릭찰스/앵스트/6,000원
prologue
다가오는 겨울에 대비해 장작을 그득히 재어둔 자비에 저택의 벽난로 곁에서 에릭이 와인을 음미했다. 막 피어오른 히코리 장작의 훈훈한 내음을 넉넉히 품은 고풍스런 저택은 지나간 아날로그 시대의 느른한 감수성에 충실한 공간이었고 그 특색은 여러모로 현 주인의 그것과도 일치하는 데가 있었다. 특히, 정적이고 이지적인 관조의 풍모가 그러하다. 쾌활하고 적극적인 찰스 프랜시스 자비에지만 결정적인 순간 내린 판단이 보수적이고도 온건한 자중과 인내, 신중한 은거였음을 새삼 떠올린 에릭이 글라스를 내려놓았다.
“자넨 계속 이렇게 학교를 꾸려나갈 참인가.”
“음? 그야 어지간하면 그렇겠지. 교장선생님 일도 꽤 매력적이라네.”
“그리고 나는 오늘처럼 가끔 찾아와 예의바른 척 우리 사이의 모든 불편한 일들은 조용히 묻어둔 채 자네와 체스를 두고 와인의 향기나 즐기면 되는 건가.”
찰스의 눈썹 끄트머리가 살짝 치솟다가 스르르 내려앉았다. 푸른 눈에 떠오른 다감한 빛에는 언제나 에릭의 시선을 끄는 마력이 있었다.
“무례한 키스 쯤은 종종 허락하겠어. 됐나?”
“그건 허락 받지 않아도 될 옵션이고.”
“오, 자신만만하군 그래.”
에릭이 몸을 숙여 키득거리는 ‘친구’의 오른 쪽 뺨에 입 맞추자 찰스가 자연스레 왼 뺨을 내밀었다. 하지만 세 번째 키스가 입술로 향하는 순간 그의 살집 좋은 손이 접촉을 막아섰다.
“어물쩍 넘어가지 말고 더 얘기해봐, 최근 들어 뭐가 자네 신경을 건드리는 거지?”
“이래서 텔레파시스트란.”
“내가 한없이 둔감한 보통 인간이었대도 눈치 챘을 거야. 에릭, 지난 봄에 잠시 본 후로 이게 몇 개월 만의 방문인지 아나? 한데 오랜만에 찾아온 자넨 내내 미간을 펴지 않고 앉아서 술만 홀짝거리다가 몹시, 아주 몹시 불만스런 표정으로 내 인생계획을 추궁했다고.”
칭하는 대로 평범한 ‘친구’였다면 적당히 해명을 생략해도 될 에릭의 행적이었지만 이들은 그렇게 똑 떨어지는 관계 정의에 해당되지 않았다. 꽤 긴 시간을 들여 서로와의 교제에 ‘다음 단계’를 넘느냐 마느냐 미묘한 일진일퇴를 거듭한지도 몇 년째.
“그저, 모든 상황의 정체감에 초조한 게지. 자네도 그렇지 않나?”
고여 있는 물, 찻잔 속의 태풍, 수면 아래서의 공방이 비단 이들 관계에 한정된 수식이 아니다. 에릭과 찰스를 묶고, 동시에 가는 길을 틀어지게 만드는 뮤턴트 문제도 쭉 이런 상태였다. 아는 사람만 아는, 극소수의 인간과 뮤턴트에만 해당되는 그들만의 리그.
“느리지만 확고한 변화도 고려해볼 옵션 아닐까? 에릭. 내 학생들이 성장해 사회에 섞이게 되면- ”
“숨을 죽인 채 평범을 가장하고 살아가겠지. 가끔 자신의 정체성을 터놓을 수 있는 특별한 동창회의 존재에 감사하면서 말야.”
“음, 꽤나 다수의 학생들이 택할 법한 인생 모델이긴 하지. 부정 않겠네만 친구, 그게 나쁜 것만은 아니잖나. 공존이란 작은 것부터 천천히 시작되는 거니까.”
“동의하네. 생존의 문제지. 한데 에릭, 이건 인간에게도 마찬가지로 생존의 문제야. 그들이 강력한 힘을 가진 새로운 인류의 존재를 받아들일 수 있게끔.....”
“강자의 배려를 말할 셈인가. 자네의 그 생래적 오만함은 여전하군.”
“고맙구먼.”
고개를 살짝 까딱하며 입술을 내밀고 고맙다고 투덜대는 모습에 에릭이 낮게 웃음지었다.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번개같이 몸을 뻗어 삐죽나온 입술에 기습 키스한 그가 체스말을 빙글빙글 돌리며 지나가듯이, 반은 혼잣말인양 뇌까렸다.
“능력에 끌려다녀선 안 된다라.... 하지만 힘이란 거기에 있으므로 당연히 사용되는 그런 거지.”
“그래도 노력을 멈춰선 안 돼.”
“자넨 끝까지 힘의 자제와 제어, 받아들여지는 공존을 말하겠지만 찰스, 그래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아. 작금의 이 정체된 상황처럼.”
찰스는 키스 받은 입술을 슬며시 검지 끝으로 만지작거리며 에릭을 바라보았고, 옛 대륙의 폐허에서 온 사내는 호소하는 듯한 푸른 눈에 떠오른 결 고운 연민을 향해 언제나처럼 무한한 찬탄과 희미한 질시를 함께 느껴야 했다.
“그래도 친구, 나는 희망을 찾고 있어. 비록 느리지만 사람들은 조금씩 변해왔고, 앞으로도 변할 걸세.”
에릭은 눈앞에 천연스레 존재하는 것들을 새삼스럽게 돌아보았다. 몇 세대의 시간을 묵묵히 지켜보았을 이 서재와, 평원을 흔든 어떤 비바람에서도 안온하게 공간을 품어주었을 이 저택과, 생명을 건 투쟁의 한복판에서도 능히 평정을 지킬 수 있었던 이가 속한 정돈된 세계를.
그리고 그는 마침내 제 마음의 추가 향할 방향을 결정할 수 있었다.
“내가 자네에게 그 희망을 주겠네.”
약간 의아해하며 벌어진 상대의 입술에 다시 한 번 짧게 입맞춤한 에릭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은 늦가을의 을씨년스런 호우로 차게 젖어있었다. 다음에 이곳을 방문할 때는 호우가 아닌 폭풍우가 몰아칠 것이다. 아마도 자신으로 인해.
후회하지 않을 자신은 없었다. 허나 멈추지도 않을 것이다.
01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땡볕에 달아오른 아스팔트에 질질 끌리며 간혹 물컹한 핏덩이를 바닥에 발라놓는 자신의 두 다리를 내려다보면서 찰스는 몇 시간째 같은 물음을 반복하고 있었다. 이미 곤죽이 된 두뇌는 물음이후에 이어져야 했을 사고의 궤적을 포기한 지 오래였고 해서 찰스는 그저 앵무새처럼 같은 질문을 반복하고 있었다. 사실 낯익은 거리를 천천히 전진하는 행렬 한가운데서 찰스가 할 수 있는 일은 기껏 공허한 질문을 반복하는 것 뿐이기도 했다. 주변은 ‘승리’한 뮤턴트 들의 거대한 함성과 소름끼치는 적의와 그리고 수백 수천만 대다수 시민들의 잔뜩 쭈그러든 공포와 경계로 가득했고 찰스의 머리를 죄듯 압박하는 특별한 구속구는 그런 감정들을 여과없이 찰스에게 들이붓고 있었으니까. 그건 정신 전체가 우악스레 붙들려 끊임없이 범해지는 거나 다를 바 없는 처사였고, 이걸 그에게 채운 자들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기도 했다. 그들은 이야말로 인간들의 비위나 맞춰온 찰스에게 어울리는 징벌이라며 저들끼리 웃어댔다.
그래, 전쟁이 있었지.
순식간에 시작되어 단 며칠 새 믿을 수 없이 압도적으로 결판난 인간과 뮤턴트의 전쟁이었다. 그리고 웨스트체스터의 학교는 전쟁이 시작되던 그날 새벽, 어떤 인간의 거점보다 가장 먼저 짓밟혔다.
다시 곯아 터진 과일 몇 개가 침과 함께 날아왔다. 청과상 가판대 구석에서 굴러다니던 쓰레기일 테지. 그나마 더한 오물이 투척되지 않는 건 이 퍼레이드가 보이지 않게 통제된 이벤트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악몽의 강도가 덜해지지 않았지만 말이다.
퍼레이드가 끝났을 때 찰스는 거의 반 기절상태였다. 자비에 스쿨에서 붙잡힐 때 입고 있던 드레스 셔츠는 그동안 찰스가 흘린 식은땀과 크고 작은 생채기에서 난 핏물, 브라더후드들이 뮤턴트의 배신자를 조롱하고 욕하며 뱉은 침, 던진 오물로 엉망이었다. X자 모양의 철제빔에 매달린 채로 워싱턴DC 시내 구석구석을 보행속도로 5시간 넘게 일주하는 동안 아스팔트에 질질 쓸려간 다리는 피에 절은 걸레짝이나 다름없었고 찰스는 처음으로 제 다리에 감각이 없음을 다행이라 여겼다.
브라더후드가 임시 총사령부로 접수한 의회의사당으로 다시 끌려와 숱한 분과 소(小)회의실들 중 하나에 처박힌 지 얼마나 되었을까. 어수선한 가운데 회의실 바닥에 눈도 뜨지 못하고 쓰러져있는데 누군가가 들어오는 기척이 났고, 찰스는 직감적으로 그게 누구인지 알았다. 시장바닥마냥 수선스럽던 주위를 단번에 쥐죽은 듯 고요하게 만들며 홀홀단신 ‘특A급 반역자’를 찾아올 인물은 하나 뿐인 것을.
에릭은 들어와 조용히 찰스의 구속구부터 풀어주었다. 그는 어떤 설명도, 변명도, 심지어 표정도 없이 침착하게 자신의 용건부터 내놓았다.
“자넨 재판없이 처형 당할거야, 찰스.”
그럴 줄 알았다고 너희들이 할 만한 짓이라고 이죽대고 싶었지만 목이 잠겨 말이 나오지 않았다. 허나 에릭의 다음 말에는 정신이 어느 정도 돌아와 기능하기 시작했다.
“저들은 내손으로 끝장내기를 바래 친구. 그리고 난 그러고 싶지가 않지. 프로페서X로 내손에 죽거나, 내 소유의 찰스 자비에로 살거나. 자넨 선택할 수 있어.”
이때 처음으로 자신이 잘 알던 친구의 육성을 들은 것 같았다. 비록 내용은 턱도 없을 넌센스였지만 말이다. 고통으로 엉망진창 흐트러진 정신상태인데도 찰스는 갈라터진 헛웃음을 흘렸다.
“내 친구. 자네야말로 정신이 나간 것 같군.”
에릭의 소유가 되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지 않았다. 소유와 피소유의 관계라니, 와우. 20세기에 불쑥 내밀어진 자유인과 노예의 거래 개념이 찰스를 순수하게 놀래키고, 동시에 정당한 울분까지 휘적휘적 날려버렸다. 사람이 너무 기가 막히면 화도 나지 않는 법이다.
“소유라. 나 같은 불구를 알차게 부려먹을 수도 없을 테니 그럼 자네에게 성적으로 봉사하는 노예라도 되란 말인가?”
딴에는 농을 섞어 던진 비아냥이었지만, 그간 친구라고 부른 두 사람 관계가 얼마나 섹슈얼한 텐션으로 숨막히게 유지되던 사이였는지 제일 잘 아는 당사자 둘은 어색하게 시선을 얽었고, 찰스가 먼저 지친 눈을 스르르 감아 에릭을 외면했다.
“적어도 자네만은 내 인간적인 존엄을 지켜줄거라 믿었는데 친구.”
이제 깨끗이 죽여 달라는 의사표현이었고, 그걸 들은 에릭이 정말 쥐어짜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렇게 수치스런 제안을 감히 자네에게 할 만큼 나도 필사적이야, 찰스. 왜 그걸 몰라.”
놀랍게도 매그니토가 거기서 무릎을 꿇었다. 장신의 승리자가 극적으로 왜소해진 끝에 토해놓은 호소는 더더욱이나 초라했고, 그랬기 때문에 찰스는 절실히 그의 간구를 들을 수 있었다.
“이번만은 제발, 찰스. I want you by my side.”
찰스는 바닥에 널부러진 채로 힘겹게 에릭을 올려보았다. 역광 때문에 표정이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손끝이 조금씩 떨고 있는 걸 보았다. 해변에서의 이별 후 시간이 지날수록 차갑고 표정없는 매그니토가 되어갔던 친구가 지금만은 예전에 알던 에릭으로 보인다 느꼈으나 동시에 자기들은 너무 멀리 와버렸다고도 생각했다. 그동안, 특히 그 지옥같던 새벽에 너무나 많은 기회와 사람들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제와서? 너무 늦었어 내 오랜 친구.”
만약 눈물이 나왔다면 울었을 테지. 하지만 눈물조차 말라 버린지 오래였다. 찰스는 며칠 전에 벌어졌던 참혹한 유혈극을 생생하게 다시 떠올릴 수 있었고 동시에 해머로 두개골을 때려 부수는 듯한 두통이 함께 덮쳐왔다.
웨스트체스터의 새벽은 군대처럼 잘 조직된 브라더후드 정예 전투원들의 침입으로 산산이 부서졌다. 자비에 스쿨을 문답무용 제압하는 이 작전은 이전까지처럼 뮤턴트끼리는 되도록 죽이지 않는다는 암묵적 룰이 있던 전투가 아니었다. 미운정이나마 안면있던 브라더후드 구성원은 단 한명도 안 보였고 모두 신참에 돌처럼 굳은 얼굴의 가차없는 전투병들이 끝도 없이 몰려들었다. 학교 전체에 아이들의 비명이 가득했고, 제한적으로 고용한 인간 사용인들의 단말마가 울려 퍼졌다. 션이 목덜미에 난 자상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모두 피하라고 고함을 쳤고 찰스의 텔레파시 제어는 제대로 먹히지 않았다. 텔레파시 차단용 헬멧들이 수도 없이 보였다. 에릭의 그것과 똑같이 생기고 대신 붉은 자줏빛 대신 섬뜩한 무채색 광택이 두드러진 물건들이.
사이사이 그래도 힘을 일으켜 아이들을 이끌고, 행크에게 탈출을 고했으나 그것이 한계였다. 교란당한 정신을 부여잡고 찰스는 행크들이 엑스젯을 띄우는 것까지 간신히 엄호하고는 생포 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바로 곁에서 찰스를 지키던 알렉스가.
찰스는 숨을 들이켰다. 알렉스.
완전히 훤칠한 청년으로 자란 알렉스는 가슴을 시뻘겋게 물들이며 쓰러지는 순간까지도 찰스에게 화를 내며 소리쳤었다. 도망가지 않고 뭐하냐고. 당신은 살아서 할 일이 있지 않냐고. 눈도 채 감지 못하고 쓰러진 첫 제자의 모습은 그대로 찰스의 망막에 달라붙은 것 같았다. 실감은 나지 않았으나 그 장면만은 화상처럼 뇌리에 새겨져있다. 다시 웨스트체스터에 돌아가면 뚱한 표정의 알렉스가 왜 이리 늦으셨냐고 툴툴거리면서도 휠체어를 조심스럽게 밀어줄 것 같은데도.
잃은 건 알렉스 만이 아니다. 밴시, 목에 치명적인 자상을 입은 션도 그때 함께 붙잡혀 격리 당했다. 숨을 헐떡이는 션을 무릎베개해주고 지혈하려 별짓을 다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찰스의 정장바지를 새빨갛게 물들여놓으며 눈을 감고 죽어가는 그를 그저 껴안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밴시는 딴에 뭐라고 말을 하려고 웅얼거렸으나 성대가 두 조각난 사람이 내는 건 바람 새어나가는 섬뜩한 소리 뿐이었다. 찰스는 텔레파시 차단재로 만든 컨테이너 안에서 울부짖었다.
안돼. 이건 아냐. 이럴수는 없어.
션의 의식을 붙잡아두려고 집중했지만 빌어먹을 금속들이 그마저도 방해를 한다. 텔레파시도, 소리도 차단된 쇠우리 안에서 찰스는 목이 쉬도록 외쳤었다. 의사를 불러달라고. 누구든 와달라고. 이 앨 제발 살려만 달라고.
하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찰스를 가둔 특별한 컨테이너는 봉쇄된 그대로 브라더후드 본거지에 가서야 열렸고, 무심한 눈빛의 엠마가 기다리고 있었다. 피투성이 션을 끌어내는 손길들에 무어라 호소를 한 것도 같다. 곧바로 닥친 지독한 두통으로 제풀에 널부러졌지만 말이다. 에릭은 모든 보고를 받았을 텐데도 끝내 찰스를 보려하지 않았고 찰스는 완전히 지쳐 너덜거리는 와중에도 차라리 다행이라 여겼다. 당장 에릭을 대면했을 때 자신이 어떤 파괴의 열망을 혹은 무저갱의 절망을 맛보게 될지 본인도 알 수 없었으므로.
그렇게 며칠 동안 찰스는 그 컨테이너에 두통과 함께 계속 방치되어 있다가 브라더후드의 승리를 들었고, 전승 퍼레이드에 끌려나가 자신에게 그리고 학교에 붙여진 죄목을 알았다.
“늦지 않았어, 찰스.”
에릭이 거의 속삭이듯이 말해주었다. 션이 아직 살아있다고. 그리고 달아난 엑스젯이 브라더후드의 방공망을 제치고 나가기 직전이라고.
넌 살아야 할 이유가 있어.
알렉스의 마지막 고함이 환청처럼 겹쳤다. 에릭이 손을 내밀었고 아직 조금씩 경련하는 그 손끝을 보며 찰스는 갑자기 깨달았다. 지금 에릭도 몰려 있었다. 필사적이란 말은 과장이 아니다. 냉혹한 매그니토와 이를 드러내며 큼직하게 웃곤 하던 에릭 사이에서 그도 흔들리는 것이다. 자비에 스쿨의 참변에 대해서 에릭은 어떤 변명도 하지 않았는데 그의 성격상 그것 자체가 그 일이 뭔가 잘못된 결과란 뜻이긴 하다. 에릭은 섣부른 변명이나 사과를 하거나 용서를 구하는 남자가 아니었다. 스스로가 실패했다고 여길수록 더욱.
찰스는 자기가 지금 에릭을 위해 되도 않을 변명을 주어 섬기고 있다며 자조했다. 그러나 멈출 수가 없었다. 에릭에게 ‘왜’를 묻는 것이 두려운 만큼의, 꼭 그 이유로. 허나 이 감정과 별개로 에릭이 넌즈시 운을 띄운 내용은 찰스를 흔들어놓기에 충분하였다.
션을 살려주고, 학생들이 도주하도록 손을 놓겠다는 거나 진배 없는 제안에 찰스는 망설이지 않고 매달렸다. 다른 선택은 없었다. 그리고...
여기서 손을 놓으면 에릭은 돌이킬 수 없어져.
텔레파스가 아니라도 충분히 감을 잡을 수 있는 사실이었다. 눈앞의 남자에게 어떤 의미로든 애착을 지니고 있다면 말이다. 에릭이 뻗은 손과 찰스의 피투성이 손이 간신히 겹쳐졌다.
“살아야 할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에릭, 생각해보니 난 이미 존중받는 죽음을 누릴 자격도 없어.”
찰스가 눈을 감았다. 이 순간 에릭의 얼굴도 뒤에서 쏟아지는 빛도 보고 싶지 않았다.
“필요하면 가져가. 자네 것이 되지.”
눈 감은 채로, 에릭의 버석버석 마른 입술이 손등에 닿는 걸 느낀다. 잘 아는 감촉이었으나 두 번 다시 예전과 같지 않을 접촉이었다. 찰스는 멍한 채로 되새겼다. 이렇게까지 되었는데 자신을 그를 미워할 수가 없었고, 그게 제일 절망스럽다고.
찰스의 대답을 듣고 난 에릭은 아주 잠시 침묵을 지켰고, 이내 띄엄띄엄 말했다. 미안하다고. 찰스가 듣기에 그토록 허망한 사과는 평생 더 없을 한 마디였고, 해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미안하다거나 용서를 구하거나할 관계가 아니라 생각했지만 이도 입 밖엔 내지 않았다. 해봤자 소용도 없는 소리니까. 그때부터 찰스는 자기일이 아닌 것처럼 주위 일들을 지켜만 보기 시작했다. 실감도, 의미도, 목적도 희미하다. 다만 자신에게 다시 채워진 텔레파시 구속구가 안겨준 찌르는 듯한 두통만이 선명한 현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