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찰스의 능력이 초월적인/신적인 수준이라고까지는 차마(...) 인정하고 있지 않습니다만, 그 능력이 찰스 자비에라는 한 명의 인간을 '시대를 관통하는 거대담론' 에 다이렉트로 연결시켜 주고 있다는 생각은 합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수억 명의 사고를 동시에 들여다보는 것이 가능한 인간이란 우리가 흔히 관념으로만 다루는 '시대정신' 을 즉물적으로 파악하는 것 또한 가능한 존재가 아니겠는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써놓고 보니 별로 간단하지 않은 것 같기도 합니다만.
그 때문에 제 기준에서 찰스 자비에의 가치관이란, 그 자체가 현실 세계를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철학 체계 정도로 존재해 주지 않는 이상에는 아예 성립이 안 되는 경지입니다. 그 가치관을 쌓아올리기까지 거쳐온 과정이 남들과는 워낙 차원이 다른 스케일이어서 말이죠. 형이상학을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사변적 능력이 찰스에게 있어선 철학이라도 전공해야 꺼내볼 법한 옵션 사항이 아니라 본인의 정신 세계를 지켜내기 위한 필수 스킬인 겁니다.
그렇게 보았을 때 찰스를 가장 잘 설명해 줄 수 있는 철학자는 아무래도 헤겔이 될 것 같습니다. 역사철학에서 "시대정신" 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만들어 낸 장본인이기도 하죠. 헤겔의 역사철학에서 인류를 이끌어나가는 절대자는 이성이었고, 역사의 발전이란 곧 그 시대의 정신에 따라 이성이 올바른 방향을 찾아가는 수렴 과정이었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논쟁술로 사용되어 오던 변증법이 헤겔의 전매특허처럼 되어버린 것이 바로 이 지점입니다. 정명제-반명제를 거쳐 종합명제를 이끌어 내는 헤겔의 변증법은 진리는 곧 전체다, 즉 하나의 개념에 도달하기 위한 모든 과정이 곧 그 개념 안에 포함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방법론으로 정치/역사/종교/철학/자연/예술까지 모든 분야를 망라해 넣을 수 있는 거대한 괴수였지요. (물론 이 모든 분야의 세세한 차이점을 깡그리 무시하고 하나의 방법론 안에 효율적으로 몰아넣기 위해 헤겔은 철학자 중에서도 악명높은 관념론자가 되고 말았지만)
변증법의 가치는 무엇보다도 이것이 하나의 고정된 명제가 아니라 영원히 계속되는 변화, 혹은 "진화" 를 설명할 수 있는 방법론이라는 데 있습니다. 모든 것은 변할 수밖에 없고 영원한 진리는 없다는 사실을 인류가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겁니다. 이것을 인정하고 나서야, 인류는 비로소 새로운 사상과 경향을 위협적으로 억압하고 적대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어떤 이유에서 나타났고 우리에게 어떤 변화를 일으킬 것인지를 연구하여 받아들일 수 있는 근대인의 이성을 획득했죠. 헤겔이 근대 철학의 완성자로 불리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2. 에릭
프로페서 X와 매그니토가 처음으로 창조될 때, 철학은 틀림없이 그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 인간의 마음을 읽고 조작할 수 있는 찰스의 능력과 금속을 인지하고 조작할 수 있는 에릭의 능력은 관념 vs 실체라는 서양철학사의 가장 오래된 대립항과 거의 명확하게 일치하는데 이게 절대 우연일 리는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덧붙여 독일 관념론의 집대성자인 헤겔을 찰스 쪽에 놓았을 때, 반대쪽에 서 있는 에릭이 집어들 패는 너무나 분명해집니다. 모든 것을 부정하는 철학의 대표자이자 테러리스트의 영원한 우방 니체죠. 아 지겨워 (...)
니체의 철학은 "신은 죽었다" 는 명제에서 시작됩니다. 저 신에 대해서는 수많은 해석이 있을 수 있지만, 이 경우에는 헤겔의 신을 죽이는 것이 맞겠지요. 헤겔의 신, 혹은 절대자란 곧 인간의 정신이었습니다. 인간 하나의 이성, 하나의 정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 공동체의 정신, 이성, 의지를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살아있는 인간 중 헤겔의 정신에 가장 가깝게 접근할 수 있는 인간이 바로 찰스라고 생각하는 거지요) 그러나 니체는 쌈빡하게 그 신을 죽여버립니다. 그리고 쿨하게 말하죠. "신은 이미 죽었어. 너희가 신은 여전히 살아있다고 억지로 믿을 뿐이지." 그리하여 세상에 인간이 의지하고 믿을 수 있는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바로 무의 철학인 니힐리즘입니다.
그리고 이 니힐리즘의 허무에서 벗어나기 위해 니체가 인간에게 (간신히) 제공하는 것이 곧 "권력에의 의지" 인데요. 권력이라고 해서 별로 세속적인 권력과는 관계가 없고, 그저 인간이 본능적으로 존재하고자 하는 의지, 무언가를 이루고자 하는 총체적인 욕망, 합리적인 이성에 앞서서 존재하는 에너지. 말 그대로 생존을 위한 투쟁입니다. 게다가 니체의 철학에서 "권력에의 의지" 란 끝없이 실패하여 인간을 좌절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물건입니다. 어차피 인생은 예측불허, 아니 반드시 실패. 그리하여 생은 그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말 그대로 패배자의 철학. 이성의 승리와 인류의 발전을 노래하는 근대 철학 앞에서 니체는 언제나 외치고 있었던 겁니다. "닥쳐! 난 이미 패배자야! 애초에 승리하려고 한 적도 없어!"
그리고 패배한 인간을 모루 위에 올려놓은 니체는 이제 마지막 망치를 치켜듭니다. 너의 패배는 이대로 영원히 반복된다는 "영겁회귀" 의 개념입니다. 모든 희망을 버리고, 이 영겁회귀를 너의 운명으로 받아들여라. 그러나 이것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인다면 너는 그냥 평범한 패배자, 여기에서 너는 두 눈 똑바로 뜨고 망치를 올려다 보며 이건 너에게 주어진 운명이 아니라 네가 선택한 운명이라고, 그리하여 나는 이 운명을 사랑한다고 평생을 박박 우겨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운명애(運命愛) 혹은 Amor Fati인 겁니다. 그리고 이 모든 시험을 거쳐 신을 부정하고 영겁회귀를 받아들여 끝까지 "권력에의 의지"를 체현하고야 마는 자가 바로 짜라투스트라가 그토록 찬양하던 "초인" 입니다. 지금까지 에릭하고 일치하지 않는 게 하나라도 있으면 제가 성을 갈겠습니다. (...)
3. 포스트모더니즘
굳이 헤겔과 니체를 끌어들여 두 사람을 설명해 보자는 생각이 든 것은, 실제로 니체의 주장에 기대어 헤겔을 비판하는 것이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에서 가장 돋보이는 철학 조류 중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포스트모더니즘은 68혁명에 힘입어 1960년대부터 부각되기 시작한 시대 이념이기도 합니다. (이 정도면 확인사살)
포스트모더니즘에서 헤겔, 혹은 모더니즘을 비판했던 가장 중요한 쟁점은 모더니즘의 변증법이 언제나 대립, 그것도 언제나 교묘하게 편향된 대립항을 사용해 인류를 기만해 왔다는 데 있었습니다. 이성 대 비이성, 본질 대 현상, 주체 대 객체, 동일성 대 차이 등이 사실은 정명제/반명제로서 동등하게 다루어진 것이 아니라, 언제나 이성, 본질, 주체, 동일성이 정명제로써 우선하는 가운데 대립되는 반명제들을 철저하게 억압해 왔다는 것이죠. 포스트모더니즘의 기수들은 이러한 관념의 이분법적 '대립' 이 필연적으로 이끌어 내는 적대적 동일성 대신 다양한 개체의 '차이'를 우선적으로 존중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곧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 라는 슬로건 아래 소외된 개인들에 대한 존중을 요구하는 것이 68운동의 핵심 중 하나였으니 당연한 흐름이기도 했지요. 바로 이 시대에 뮤턴트의 권리 찾기가 시작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던 겁니다.
그리고 엑스맨:퍼스트클래스는 여기에서 매우 재미있지만 아주 심술궂은 가치 전복을 하나 끼워 넣었는데, 혹시 눈치채셨습니까? 찰스의 관념적인 합리성은 에릭의 실제 경험 앞에서 말 그대로 박살나고 말았지만, 바로 그 직후 행보에서 이 친구들은 한 번 더 자리를 바꿨습니다. 기꺼이 근대의 합리성을 포기했던 에릭은, 그러나 근대가 그에게 제공해 준 대립항의 투쟁, 그 투쟁에서 승리를 거두어 동일성을 쟁취하겠다는 유혹에서는 벗어나지 못했지요. 반대로 근대의 보수성을 수호하고 있던 찰스는, 투쟁을 거절하면서 앞으로 자기 앞에 떨어질 수많은 가치 판단을 동시에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이 마지막에 시치미 뚝 떼고 자리를 바꿔앉은 거지요.
앞으로도 에릭과 찰스는 끊임없이 서로의 테제이자 안티테제로 존재하며 수시로 자리 바꿔앉기를 서슴치 않을 겁니다. 뭐 그 때마다 저는 기꺼이 피를 토할 테고요. 다 둘째치고, 정말이지 이렇게까지 직관적으로 철학적 해석이 가능한 대중문화 컨텐츠를 패스트푸드마냥 멀끔하게 내놓을 수 있는 양키의 저력에는 그저 감탄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네, 솔직히 부럽네요.
설마 이걸 다 읽어주셨다면 너무나 감사합니다.
이런 블로그가 있어서 참 좋다는 마음 반, 도대체 난 뭘 쓰고 있는가라는 좌절 반 뭐 그렇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