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3일 엑스멘 배포전에 참가할 소설 회지 Knockin' on heaven's door의 구두 예약을 받습니다
현재 피눈물나는(...) 마감 중이며, 결정된 사양은, A5/19금/DP본/100p이상/시리어스AU/에릭찰스 입니다.
세부 사항이 결정되는 대로 공지하겠습니다. 아래는 샘플과 예약게시판 주소입니다. 통판은 행사 이후에 진행할 생각이고요, 현장에서 수령하실 구두예약을 남겨주시면 됩니다.
마감 끝냈습니다. 퀄리티를 묻는 분들께는.....
..... 네, 핫식스3캔에 커피를 버무린 맛이라고만 말씀드리겠습니다ㅠㅠ
최종 사양은 다음과 같습니다.
A5/19금/인쇄본/120P/시리어스AU/에릭찰스/앵스트/6,000원
prologue
다가오는 겨울에 대비해 장작을 그득히 재어둔 자비에 저택의 벽난로 곁에서 에릭이 와인을 음미했다. 막 피어오른 히코리 장작의 훈훈한 내음을 넉넉히 품은 고풍스런 저택은 지나간 아날로그 시대의 느른한 감수성에 충실한 공간이었고 그 특색은 여러모로 현 주인의 그것과도 일치하는 데가 있었다. 특히, 정적이고 이지적인 관조의 풍모가 그러하다. 쾌활하고 적극적인 찰스 프랜시스 자비에지만 결정적인 순간 내린 판단이 보수적이고도 온건한 자중과 인내, 신중한 은거였음을 새삼 떠올린 에릭이 글라스를 내려놓았다.
“자넨 계속 이렇게 학교를 꾸려나갈 참인가.”
“음? 그야 어지간하면 그렇겠지. 교장선생님 일도 꽤 매력적이라네.”
“그리고 나는 오늘처럼 가끔 찾아와 예의바른 척 우리 사이의 모든 불편한 일들은 조용히 묻어둔 채 자네와 체스를 두고 와인의 향기나 즐기면 되는 건가.”
찰스의 눈썹 끄트머리가 살짝 치솟다가 스르르 내려앉았다. 푸른 눈에 떠오른 다감한 빛에는 언제나 에릭의 시선을 끄는 마력이 있었다.
“무례한 키스 쯤은 종종 허락하겠어. 됐나?”
“그건 허락 받지 않아도 될 옵션이고.”
“오, 자신만만하군 그래.”
에릭이 몸을 숙여 키득거리는 ‘친구’의 오른 쪽 뺨에 입 맞추자 찰스가 자연스레 왼 뺨을 내밀었다. 하지만 세 번째 키스가 입술로 향하는 순간 그의 살집 좋은 손이 접촉을 막아섰다.
“어물쩍 넘어가지 말고 더 얘기해봐, 최근 들어 뭐가 자네 신경을 건드리는 거지?”
“이래서 텔레파시스트란.”
“내가 한없이 둔감한 보통 인간이었대도 눈치 챘을 거야. 에릭, 지난 봄에 잠시 본 후로 이게 몇 개월 만의 방문인지 아나? 한데 오랜만에 찾아온 자넨 내내 미간을 펴지 않고 앉아서 술만 홀짝거리다가 몹시, 아주 몹시 불만스런 표정으로 내 인생계획을 추궁했다고.”
칭하는 대로 평범한 ‘친구’였다면 적당히 해명을 생략해도 될 에릭의 행적이었지만 이들은 그렇게 똑 떨어지는 관계 정의에 해당되지 않았다. 꽤 긴 시간을 들여 서로와의 교제에 ‘다음 단계’를 넘느냐 마느냐 미묘한 일진일퇴를 거듭한지도 몇 년째.
“그저, 모든 상황의 정체감에 초조한 게지. 자네도 그렇지 않나?”
고여 있는 물, 찻잔 속의 태풍, 수면 아래서의 공방이 비단 이들 관계에 한정된 수식이 아니다. 에릭과 찰스를 묶고, 동시에 가는 길을 틀어지게 만드는 뮤턴트 문제도 쭉 이런 상태였다. 아는 사람만 아는, 극소수의 인간과 뮤턴트에만 해당되는 그들만의 리그.
“느리지만 확고한 변화도 고려해볼 옵션 아닐까? 에릭. 내 학생들이 성장해 사회에 섞이게 되면- ”
“숨을 죽인 채 평범을 가장하고 살아가겠지. 가끔 자신의 정체성을 터놓을 수 있는 특별한 동창회의 존재에 감사하면서 말야.”
“음, 꽤나 다수의 학생들이 택할 법한 인생 모델이긴 하지. 부정 않겠네만 친구, 그게 나쁜 것만은 아니잖나. 공존이란 작은 것부터 천천히 시작되는 거니까.”
“그동안 수없이 많은 뮤턴트가 동물처럼 학대받고, 실험당하고, 살해될 걸세. 찰스, 이건 절박한 생존의 문제야.”
“동의하네. 생존의 문제지. 한데 에릭, 이건 인간에게도 마찬가지로 생존의 문제야. 그들이 강력한 힘을 가진 새로운 인류의 존재를 받아들일 수 있게끔.....”
“강자의 배려를 말할 셈인가. 자네의 그 생래적 오만함은 여전하군.”
“고맙구먼.”
고개를 살짝 까딱하며 입술을 내밀고 고맙다고 투덜대는 모습에 에릭이 낮게 웃음지었다.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번개같이 몸을 뻗어 삐죽나온 입술에 기습 키스한 그가 체스말을 빙글빙글 돌리며 지나가듯이, 반은 혼잣말인양 뇌까렸다.
“능력에 끌려다녀선 안 된다라.... 하지만 힘이란 거기에 있으므로 당연히 사용되는 그런 거지.”
“그래도 노력을 멈춰선 안 돼.”
“자넨 끝까지 힘의 자제와 제어, 받아들여지는 공존을 말하겠지만 찰스, 그래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아. 작금의 이 정체된 상황처럼.”
찰스는 키스 받은 입술을 슬며시 검지 끝으로 만지작거리며 에릭을 바라보았고, 옛 대륙의 폐허에서 온 사내는 호소하는 듯한 푸른 눈에 떠오른 결 고운 연민을 향해 언제나처럼 무한한 찬탄과 희미한 질시를 함께 느껴야 했다.
“그래도 친구, 나는 희망을 찾고 있어. 비록 느리지만 사람들은 조금씩 변해왔고, 앞으로도 변할 걸세.”
에릭은 눈앞에 천연스레 존재하는 것들을 새삼스럽게 돌아보았다. 몇 세대의 시간을 묵묵히 지켜보았을 이 서재와, 평원을 흔든 어떤 비바람에서도 안온하게 공간을 품어주었을 이 저택과, 생명을 건 투쟁의 한복판에서도 능히 평정을 지킬 수 있었던 이가 속한 정돈된 세계를.
그리고 그는 마침내 제 마음의 추가 향할 방향을 결정할 수 있었다.
“내가 자네에게 그 희망을 주겠네.”
약간 의아해하며 벌어진 상대의 입술에 다시 한 번 짧게 입맞춤한 에릭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은 늦가을의 을씨년스런 호우로 차게 젖어있었다. 다음에 이곳을 방문할 때는 호우가 아닌 폭풍우가 몰아칠 것이다. 아마도 자신으로 인해.
후회하지 않을 자신은 없었다. 허나 멈추지도 않을 것이다.
01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땡볕에 달아오른 아스팔트에 질질 끌리며 간혹 물컹한 핏덩이를 바닥에 발라놓는 자신의 두 다리를 내려다보면서 찰스는 몇 시간째 같은 물음을 반복하고 있었다. 이미 곤죽이 된 두뇌는 물음이후에 이어져야 했을 사고의 궤적을 포기한 지 오래였고 해서 찰스는 그저 앵무새처럼 같은 질문을 반복하고 있었다. 사실 낯익은 거리를 천천히 전진하는 행렬 한가운데서 찰스가 할 수 있는 일은 기껏 공허한 질문을 반복하는 것 뿐이기도 했다. 주변은 ‘승리’한 뮤턴트 들의 거대한 함성과 소름끼치는 적의와 그리고 수백 수천만 대다수 시민들의 잔뜩 쭈그러든 공포와 경계로 가득했고 찰스의 머리를 죄듯 압박하는 특별한 구속구는 그런 감정들을 여과없이 찰스에게 들이붓고 있었으니까. 그건 정신 전체가 우악스레 붙들려 끊임없이 범해지는 거나 다를 바 없는 처사였고, 이걸 그에게 채운 자들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기도 했다. 그들은 이야말로 인간들의 비위나 맞춰온 찰스에게 어울리는 징벌이라며 저들끼리 웃어댔다.
그래, 전쟁이 있었지.
순식간에 시작되어 단 며칠 새 믿을 수 없이 압도적으로 결판난 인간과 뮤턴트의 전쟁이었다. 그리고 웨스트체스터의 학교는 전쟁이 시작되던 그날 새벽, 어떤 인간의 거점보다 가장 먼저 짓밟혔다.
브라더후드의 전승 기념 퍼레이드
찰스는 자기 가슴팍에 덜렁거리며 매달린 팻말을 의식하고는 잔기침을 터뜨렸다. 헛웃음이 목구멍에 걸리며 터져나온 기침이었다. 팻말에는 traitor라 씌여 있었다. 반역, 뮤턴트의 배신자
다시 곯아 터진 과일 몇 개가 침과 함께 날아왔다. 청과상 가판대 구석에서 굴러다니던 쓰레기일 테지. 그나마 더한 오물이 투척되지 않는 건 이 퍼레이드가 보이지 않게 통제된 이벤트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악몽의 강도가 덜해지지 않았지만 말이다.
퍼레이드가 끝났을 때 찰스는 거의 반 기절상태였다. 자비에 스쿨에서 붙잡힐 때 입고 있던 드레스 셔츠는 그동안 찰스가 흘린 식은땀과 크고 작은 생채기에서 난 핏물, 브라더후드들이 뮤턴트의 배신자를 조롱하고 욕하며 뱉은 침, 던진 오물로 엉망이었다. X자 모양의 철제빔에 매달린 채로 워싱턴DC 시내 구석구석을 보행속도로 5시간 넘게 일주하는 동안 아스팔트에 질질 쓸려간 다리는 피에 절은 걸레짝이나 다름없었고 찰스는 처음으로 제 다리에 감각이 없음을 다행이라 여겼다.
브라더후드가 임시 총사령부로 접수한 의회의사당으로 다시 끌려와 숱한 분과 소(小)회의실들 중 하나에 처박힌 지 얼마나 되었을까. 어수선한 가운데 회의실 바닥에 눈도 뜨지 못하고 쓰러져있는데 누군가가 들어오는 기척이 났고, 찰스는 직감적으로 그게 누구인지 알았다. 시장바닥마냥 수선스럽던 주위를 단번에 쥐죽은 듯 고요하게 만들며 홀홀단신 ‘특A급 반역자’를 찾아올 인물은 하나 뿐인 것을.
에릭은 들어와 조용히 찰스의 구속구부터 풀어주었다. 그는 어떤 설명도, 변명도, 심지어 표정도 없이 침착하게 자신의 용건부터 내놓았다.
“자넨 재판없이 처형 당할거야, 찰스.”
그럴 줄 알았다고 너희들이 할 만한 짓이라고 이죽대고 싶었지만 목이 잠겨 말이 나오지 않았다. 허나 에릭의 다음 말에는 정신이 어느 정도 돌아와 기능하기 시작했다.
“저들은 내손으로 끝장내기를 바래 친구. 그리고 난 그러고 싶지가 않지. 프로페서X로 내손에 죽거나, 내 소유의 찰스 자비에로 살거나. 자넨 선택할 수 있어.”
이때 처음으로 자신이 잘 알던 친구의 육성을 들은 것 같았다. 비록 내용은 턱도 없을 넌센스였지만 말이다. 고통으로 엉망진창 흐트러진 정신상태인데도 찰스는 갈라터진 헛웃음을 흘렸다.
“내 친구. 자네야말로 정신이 나간 것 같군.”
에릭의 소유가 되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지 않았다. 소유와 피소유의 관계라니, 와우. 20세기에 불쑥 내밀어진 자유인과 노예의 거래 개념이 찰스를 순수하게 놀래키고, 동시에 정당한 울분까지 휘적휘적 날려버렸다. 사람이 너무 기가 막히면 화도 나지 않는 법이다.
“소유라. 나 같은 불구를 알차게 부려먹을 수도 없을 테니 그럼 자네에게 성적으로 봉사하는 노예라도 되란 말인가?”
딴에는 농을 섞어 던진 비아냥이었지만, 그간 친구라고 부른 두 사람 관계가 얼마나 섹슈얼한 텐션으로 숨막히게 유지되던 사이였는지 제일 잘 아는 당사자 둘은 어색하게 시선을 얽었고, 찰스가 먼저 지친 눈을 스르르 감아 에릭을 외면했다.
“적어도 자네만은 내 인간적인 존엄을 지켜줄거라 믿었는데 친구.”
이제 깨끗이 죽여 달라는 의사표현이었고, 그걸 들은 에릭이 정말 쥐어짜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렇게 수치스런 제안을 감히 자네에게 할 만큼 나도 필사적이야, 찰스. 왜 그걸 몰라.”
놀랍게도 매그니토가 거기서 무릎을 꿇었다. 장신의 승리자가 극적으로 왜소해진 끝에 토해놓은 호소는 더더욱이나 초라했고, 그랬기 때문에 찰스는 절실히 그의 간구를 들을 수 있었다.
“이번만은 제발, 찰스. I want you by my side.”
찰스는 바닥에 널부러진 채로 힘겹게 에릭을 올려보았다. 역광 때문에 표정이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손끝이 조금씩 떨고 있는 걸 보았다. 해변에서의 이별 후 시간이 지날수록 차갑고 표정없는 매그니토가 되어갔던 친구가 지금만은 예전에 알던 에릭으로 보인다 느꼈으나 동시에 자기들은 너무 멀리 와버렸다고도 생각했다. 그동안, 특히 그 지옥같던 새벽에 너무나 많은 기회와 사람들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제와서? 너무 늦었어 내 오랜 친구.”
만약 눈물이 나왔다면 울었을 테지. 하지만 눈물조차 말라 버린지 오래였다. 찰스는 며칠 전에 벌어졌던 참혹한 유혈극을 생생하게 다시 떠올릴 수 있었고 동시에 해머로 두개골을 때려 부수는 듯한 두통이 함께 덮쳐왔다.
웨스트체스터의 새벽은 군대처럼 잘 조직된 브라더후드 정예 전투원들의 침입으로 산산이 부서졌다. 자비에 스쿨을 문답무용 제압하는 이 작전은 이전까지처럼 뮤턴트끼리는 되도록 죽이지 않는다는 암묵적 룰이 있던 전투가 아니었다. 미운정이나마 안면있던 브라더후드 구성원은 단 한명도 안 보였고 모두 신참에 돌처럼 굳은 얼굴의 가차없는 전투병들이 끝도 없이 몰려들었다. 학교 전체에 아이들의 비명이 가득했고, 제한적으로 고용한 인간 사용인들의 단말마가 울려 퍼졌다. 션이 목덜미에 난 자상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모두 피하라고 고함을 쳤고 찰스의 텔레파시 제어는 제대로 먹히지 않았다. 텔레파시 차단용 헬멧들이 수도 없이 보였다. 에릭의 그것과 똑같이 생기고 대신 붉은 자줏빛 대신 섬뜩한 무채색 광택이 두드러진 물건들이.
사이사이 그래도 힘을 일으켜 아이들을 이끌고, 행크에게 탈출을 고했으나 그것이 한계였다. 교란당한 정신을 부여잡고 찰스는 행크들이 엑스젯을 띄우는 것까지 간신히 엄호하고는 생포 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바로 곁에서 찰스를 지키던 알렉스가.
찰스는 숨을 들이켰다. 알렉스.
완전히 훤칠한 청년으로 자란 알렉스는 가슴을 시뻘겋게 물들이며 쓰러지는 순간까지도 찰스에게 화를 내며 소리쳤었다. 도망가지 않고 뭐하냐고. 당신은 살아서 할 일이 있지 않냐고. 눈도 채 감지 못하고 쓰러진 첫 제자의 모습은 그대로 찰스의 망막에 달라붙은 것 같았다. 실감은 나지 않았으나 그 장면만은 화상처럼 뇌리에 새겨져있다. 다시 웨스트체스터에 돌아가면 뚱한 표정의 알렉스가 왜 이리 늦으셨냐고 툴툴거리면서도 휠체어를 조심스럽게 밀어줄 것 같은데도.
잃은 건 알렉스 만이 아니다. 밴시, 목에 치명적인 자상을 입은 션도 그때 함께 붙잡혀 격리 당했다. 숨을 헐떡이는 션을 무릎베개해주고 지혈하려 별짓을 다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찰스의 정장바지를 새빨갛게 물들여놓으며 눈을 감고 죽어가는 그를 그저 껴안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밴시는 딴에 뭐라고 말을 하려고 웅얼거렸으나 성대가 두 조각난 사람이 내는 건 바람 새어나가는 섬뜩한 소리 뿐이었다. 찰스는 텔레파시 차단재로 만든 컨테이너 안에서 울부짖었다.
안돼. 이건 아냐. 이럴수는 없어.
션의 의식을 붙잡아두려고 집중했지만 빌어먹을 금속들이 그마저도 방해를 한다. 텔레파시도, 소리도 차단된 쇠우리 안에서 찰스는 목이 쉬도록 외쳤었다. 의사를 불러달라고. 누구든 와달라고. 이 앨 제발 살려만 달라고.
하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찰스를 가둔 특별한 컨테이너는 봉쇄된 그대로 브라더후드 본거지에 가서야 열렸고, 무심한 눈빛의 엠마가 기다리고 있었다. 피투성이 션을 끌어내는 손길들에 무어라 호소를 한 것도 같다. 곧바로 닥친 지독한 두통으로 제풀에 널부러졌지만 말이다. 에릭은 모든 보고를 받았을 텐데도 끝내 찰스를 보려하지 않았고 찰스는 완전히 지쳐 너덜거리는 와중에도 차라리 다행이라 여겼다. 당장 에릭을 대면했을 때 자신이 어떤 파괴의 열망을 혹은 무저갱의 절망을 맛보게 될지 본인도 알 수 없었으므로.
그렇게 며칠 동안 찰스는 그 컨테이너에 두통과 함께 계속 방치되어 있다가 브라더후드의 승리를 들었고, 전승 퍼레이드에 끌려나가 자신에게 그리고 학교에 붙여진 죄목을 알았다.
“늦지 않았어, 찰스.”
에릭이 거의 속삭이듯이 말해주었다. 션이 아직 살아있다고. 그리고 달아난 엑스젯이 브라더후드의 방공망을 제치고 나가기 직전이라고.
넌 살아야 할 이유가 있어.
알렉스의 마지막 고함이 환청처럼 겹쳤다. 에릭이 손을 내밀었고 아직 조금씩 경련하는 그 손끝을 보며 찰스는 갑자기 깨달았다. 지금 에릭도 몰려 있었다. 필사적이란 말은 과장이 아니다. 냉혹한 매그니토와 이를 드러내며 큼직하게 웃곤 하던 에릭 사이에서 그도 흔들리는 것이다. 자비에 스쿨의 참변에 대해서 에릭은 어떤 변명도 하지 않았는데 그의 성격상 그것 자체가 그 일이 뭔가 잘못된 결과란 뜻이긴 하다. 에릭은 섣부른 변명이나 사과를 하거나 용서를 구하는 남자가 아니었다. 스스로가 실패했다고 여길수록 더욱.
찰스는 자기가 지금 에릭을 위해 되도 않을 변명을 주어 섬기고 있다며 자조했다. 그러나 멈출 수가 없었다. 에릭에게 ‘왜’를 묻는 것이 두려운 만큼의, 꼭 그 이유로. 허나 이 감정과 별개로 에릭이 넌즈시 운을 띄운 내용은 찰스를 흔들어놓기에 충분하였다.
션을 살려주고, 학생들이 도주하도록 손을 놓겠다는 거나 진배 없는 제안에 찰스는 망설이지 않고 매달렸다. 다른 선택은 없었다. 그리고...
여기서 손을 놓으면 에릭은 돌이킬 수 없어져.
텔레파스가 아니라도 충분히 감을 잡을 수 있는 사실이었다. 눈앞의 남자에게 어떤 의미로든 애착을 지니고 있다면 말이다. 에릭이 뻗은 손과 찰스의 피투성이 손이 간신히 겹쳐졌다.
“살아야 할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에릭, 생각해보니 난 이미 존중받는 죽음을 누릴 자격도 없어.”
찰스가 눈을 감았다. 이 순간 에릭의 얼굴도 뒤에서 쏟아지는 빛도 보고 싶지 않았다.
“필요하면 가져가. 자네 것이 되지.”
눈 감은 채로, 에릭의 버석버석 마른 입술이 손등에 닿는 걸 느낀다. 잘 아는 감촉이었으나 두 번 다시 예전과 같지 않을 접촉이었다. 찰스는 멍한 채로 되새겼다. 이렇게까지 되었는데 자신을 그를 미워할 수가 없었고, 그게 제일 절망스럽다고.
찰스의 대답을 듣고 난 에릭은 아주 잠시 침묵을 지켰고, 이내 띄엄띄엄 말했다. 미안하다고. 찰스가 듣기에 그토록 허망한 사과는 평생 더 없을 한 마디였고, 해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미안하다거나 용서를 구하거나할 관계가 아니라 생각했지만 이도 입 밖엔 내지 않았다. 해봤자 소용도 없는 소리니까. 그때부터 찰스는 자기일이 아닌 것처럼 주위 일들을 지켜만 보기 시작했다. 실감도, 의미도, 목적도 희미하다. 다만 자신에게 다시 채워진 텔레파시 구속구가 안겨준 찌르는 듯한 두통만이 선명한 현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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