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You did.


명백히 선고였던 한 마디를 반추한 남자가 다소 애매하게 곤혹한 얼굴을 했다. 마치 상황에 이끌려 주저없이 토해낸, 성마른 일갈을 뒤늦게 난감해하는 것처럼.
하지만 눈썹 끝을 슬그머니 비튼 찰스 자비에도, 그 모습을 묵묵히 내려다보는 자신, 에릭 랜셔- 아니, '매그니토'도 알고 있다. 그날 선고는 이미 내려졌고 그들은 서로의 대척점에 서서, 그리고 '앉아서' -이 대목을 곱씹으며 에릭은 저도 모르게 빨라진 호흡을 다시 골랐다- 상대를 마주한 것이다. 이제, 당연히 지난 시간과 달라야 할 스스로의 자리, 저이와의 거리를 가늠하면서.


"그렇군."


매그니토가 다소 억눌린 듯한 억양으로 낮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오랫동안 투쟁 속에서, 투쟁으로써 스스로를 지탱하고, 증명해온 사내가 다음 걸음을 딛기 위해 앞을 똑바로 응시했다. 휠체어 위에 가지런히 놓인, 살해 당한 두 다리를 향해 말이다.


"이게 내가 자네에게 한 짓이지."
"에릭."


찰스의 부름은 다소 핀잔 같은 뉘앙스마저 담고 있었다. 일 년전보다 눈에 띄게 초췌해진 그의 얼굴에 진심으로 곤혹한 기색이 떠오른다. 에릭으로썬 짐작할 수 있으나 도저히 공감할 도리가 없는, 찰스 프랜시스 자비에가 가진 대답이 나올 차례였다. 아, 알고말고.


"단지 운이 없었을 뿐이라 말하고 싶나?"
"그게 사실이니까."
"찰스, 자네가 주는 답은 언제나 부족한 답이야."
"그런가."
"자네만이 만족해하는 답이라 그래."


매그니토가 갑자기 몸을 숙여 찰스와 시선을 맞췄다. 우스꽝스런 헬멧이 익숙한 얼굴에 드리운 그늘 아래서 서늘한 회청빛 눈동자가 낯설게 빛나고 있었다. 기묘하게 일그러뜨린 일상과의 경계, 파괴된 철조망 위에 보란 듯 서있는 '옛' 친구의 푸른 눈동자에서 섬광같은 열망을 읽은 찰스가 고개를 젓는다. 고집 부리는 학생을 다독이는 양 친근하고도 가벼운, 프로페서의 익숙한 제스처였다.


"내게 무슨 답을 들어야 자네도 만족하겠나."
"You did."


매그니토가 낮게, 거의 으르렁거리는 것처럼 속삭였다. 허나 분노나 위협 같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갈증어린 요구에 가까운 울림이라 생각한 찰스가 애매하게 입술을 달싹이는 동안, 싸늘한 장갑의 감촉이 턱 아래 닿았다.


"다시 한 번 말해보게. '네가 그랬'다고."


바짝 다가선 둘의 시선 사이로 그날의 바닷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부질없는 가능성, 애틋한 미련, 그리고 절실했던 갈구를 단번에 부숴버린 선고를 다시 바라는 사내와, 곤혹스러워 하던 사내가 오로지 상대만을 시야에 담은 채로 아주 잠시 그렇게 굳어있었다. 매그니토 찰스는 텔레파시로 그 이름을 불러보았다. 매그니토, 나의..... 절대로 닿지못할 무언의 부름을 두어 번 반복한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아니, 에릭. 자네가 아니야."


여전히 매끈하고 부드러운 생활감을 지닌 손가락이 제 턱을 쥔 손을 조심스레 잡아 찬찬히 떼어놓는다. 장갑 너머로 조용히 휘감기는 체온을 저릿하게 느낀 매그니토가 저도 모르게 힘을 주었고, 손가락들은 얽힌 채로 정지했다.
허나 찰스의 목소리는 담담히 계속 이어졌다.


"자네가 아니라, 내 선택이었고 그에 따른 댓가일 뿐이네."


투명하도록 푸르른 눈동자가 한 점의 의혹도 없이 차분히 가라앉은 채 매그니토를 비추었다. 그는 진심으로- 진정 털끝만치의 책망도 없이, 오히려 스스로가 토하듯 내던진 과거의 한 마디를 유감스러워하며 '친우'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말했다.


"내가 한거야. 내 오만의 결과였어."


얼어붙었던 손가락들이 스르르 힘없이 녹아 떨어지고, 찰스의 시선이 아주 짧게 그 이별에 머물렀다. 그러니까, 에릭.


"자네가 자책하지 말았으면 하네. 한 점이라도."


가죽장갑에 감싸인 매그니토의 손가락이 움켜쥐려는 양 허공을 할퀸 뒤 단단히 접혔다. 투쟁으로 살아온 남자는 다시금 주먹을 쥐고, 앞을 노려보는 자세로 돌아갔다. 


"....그것이 자네의 오만함이군."
"사람은 쉽사리 변하지 않는 법이지."
"이제야 알았나?"
"덕분에 말일세, 내 친구."
  

찰스 자비에가 빙긋이 웃었다. 친애의 정이 담긴, 소탈한 웃음이었고 강인하게 짜여진 그의 정신이 발하는 유려한 빛으로 가득한, 지독하게 완고한 자기 증명이기도 했다. 1년 사이에 저 소담한 미소를 스스럼없이 짓게 되기까지 찰스 자비에가 어떤 화염의 강들과, 창칼의 산을 넘었는가는 이제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가 스스로에게 지워진 무게를 거뜬히 감당하는 프로페서X가 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바로 자신, 투쟁을 외치는 매그니토를 막아설 최대의 벽, 댓가를 이미 치뤘노라고 담담히 말할 수 있는 자, 그래. 기꺼이 "내가 선택"했음을 선고해주는 숙적으로,


"고맙군."


에릭은 밑도 끝도 없이 속삭인 뒤 문득 깨달았다.
찰스 자비에의 저 웃음에 고마움을 느끼는 에릭 랜셔가, 매그니토가 진실로 거기 있음을.
틀어쥔 주먹이 조금씩 떨려왔다. 느꺼운 희열과, 곤두선 긴장이 뒤죽박죽이 되어 반사적으로 일으키는 경련이다. 이성이 판단을 내리기 전에 육신이 먼저 깨달은 사실에 지난 수십 년간 에릭 랜셔란 사내를 구성하고 지탱해온 본질이 고래고래 아우성 치고 있었다. 
아, 여기에 거대한 적이 있다고. 거의 존경해도 될만한 맞수, 혼신을 다해 맞서서, 마침내 뛰어넘어야 할 그의 '벽'이 바로 여기에 있노라고.  

매그니토의 손이 민첩하게 주먹을 풀고 다시금 찰스의 손을 채어올렸다. 늘씬한 근육질 팔이 행하는 일련의 동작은 거의 우아해보일 지경이었고, 핏기없는 손가락들은 아무런 저항없이 자연스레 그의 입가에 놓였다. 에릭은 찰스의 표정을, 눈조차 보지 않았다. 조용히 눈을 감은 채, 강철의 지배자는 입술로 그가 되찾은 의미를 음미했을 뿐이다.


"내 곁에 돌아온 걸 환영하네."


숙적으로 돌아온 친우의 손가락 위에 입맞추며 매그니토가 웃었다.
아마 두 번 다시 잃지 않을 것이다, 싸우는 한. 너와 맞서기를 내가 포기하지 않는 한.
이순간 눈을 떠서, 네 아픈 얼굴을 확인하지 않는 한.










fin.



실은 논커플링에 싸나이즘(...) 흘러넘치는 연성을 목표로 했습니다......만, 제가 누울 자리를 잘못봤던거죠 네.
꼴랑 몇 줄 안되는 연성에서조차 알아서 입질해주는 미친 케미스트리에 건배.....씨풋.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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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저는 큐트하고 스몰한 제 간 크기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얌전하게 X-men 무비 버전이나 파렵니다. 이건 뭐 원작이 다 해먹는 정도를 아득히 초월한 퀄리티. 교수에게 지저스를 연상하신다는 모모 님들께 바칩니다.






...세계 무역센터 꼭대기에 매달리시더이다.
이게 무려 82년도 코믹스라는데서 OTL 한 번 외쳐주면 되는겁니다.





덧. 타이틀에선 비명 내지 절규를 뽑아주시면 됨.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7. 13. 15:32

해야 할 일이 우후죽순으로 쌓이다 보니 질려버린 나머지 죄다 배를 째버리고 그저 잉여한 나날이 이어지는 중입니다. 이래서야 연구소 개설에 한 표를 행사한 의미가 전혀 없군요. 하루종일 생각을 굴리는 주제에 연구소에는 하다못해 잡담 하나 못 올리고 있으니.

헌데 그게 참 어렵단 말이지요. 물론, 애초에 오독이 아닌 이상 관객의 해석에 맞고 틀림은 없으며 서로 다른 해석 사이에 감히 우열을 논할 수도 없습니다. (그 권리는 심지어 원작자에게도 없어요) 100명이 영화를 봤으면 100명은 모두 영화에 대해 나름의 감상과 나름의 주장을 펼쳐놓을 당연한 권리를 갖고 있죠. 압니다. 그런데 그렇게 잘 알면서도, 저는 이 영화에 대해서만큼은 묘하게도 '반드시 정답을 내놓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은' 미묘한 압박감에 시달리게 돼요. "들어보니 네 말도 옳고 네 말도 옳구나" 따위의 한가한 소리가 먹힐 리 없다는 느낌이 들어버린단 말입니다.

아마도 그게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등장인물 둘이 '무엇이 정답인지를' 놓고 얼마나 가열차게 대립했는지를 두 시간 내내 지켜본 관객의 가장 솔직한 감상인 것 같습니다. 선천적으로 뛰어나면서 후천적으로 단련되기까지 한 강한 정신의 소유자 둘이 각각 자신의 최선을 다해 하나의 선택을 하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의 인생을 걸고, 결코 쉽게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을 (친구를, 동료를, 동생을, 거동의 자유를, 사랑하는 애인을, 발군의 패션센스를... 그만합시다. 슬프니까) 이 악물고 떠나보내는 과정을 지켜본 거죠. 그에 대해 도저히 함부로 누구의 생각이 짧았다거나, 누구의 실수였다거나, 누가 태도를 바꿨어야 했다고 말할 수 없긴 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나 어렵고 아프게 선택한 길 중 어느 길이 옳은 길인지 정작 나는 선택하지 않고, "둘 다 일리가 있는 듯" 이라고 말해버리는 거야말로 가장 비겁한 해석이라는 생각이 자꾸 드는 거예요. 이런 상황이니 엑스맨에 관련해서는 현재 스코어 머리를 싸안고 입을 다물 수밖에요. 저는 아직도 이 팬픽을 제가 대체 어떻게 마음을 잡고 굴려야 할지에 대해서는 감이 전혀 안 오고 있습니다. (웃음) 이하 번호 붙여 정말 두서없는 잡념이나 몇 줄 휘갈겨 보죠.


이 주절주절한 잡소리를 꾹 참고 끝까지 보셨으면 눈치채셨겠지만, 저는 인문학도의 입장에서 이 부부싸움의 승기는 처음부터 찰스가 쥐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하긴 합니다. 다만 이건 제가 뼛속까지 문과이기 때문이고, (이들이 대립하는 핵심이 DNA에 있는 이상 반드시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생물학적인 견지에서 보면 또 얘기가 전혀 달라집니다. 뭐, 그건 다음에 제가 알고 있는 수준의 조악한 잡담을 한 번 더 붙이던가, 아니면 저보다 훨씬 잘 알고 계신 어느 투명하신 분이 (물끄럼) 설명해 주실지도 모릅니다. 모쪼록 후자를 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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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llo-idol
2011. 7. 11. 13:54

에릭이 예쁩니다, 너무 예쁩니다. 아니 남자가 눈이 저리 예뻐서 어디 쓴대요, 찰스도 물론 예쁩니다만 유독 이 영화에서 에릭이 눈을 파르르 떠는 장면이나 내리뜨는 장면이 많아서 사람 심장을 들었다 놓는군요. 퍼스트 클래스가 2, 3이 만들어진대도 이미 '완성된' 매그니토는 저런 표정을 잘 안 보여줄 테지요. 아 아쉬워라. 

사실 에릭 배우의 생김새는 오히려 바늘로 찔러도 안 들어갈 것 같아 보이는 구석이 있죠. 그런데 바로 그래서, 이 남자가 한없이 심약한 모습을 보일 때, 약점을 노출할 때 완전 꽂히는 겁니다. 강한 짐승이 무방비한 모습을 보일때의 갭모에.

그에 비하면 찰스는 안정된 모습을 많이 보여줘요. 원래 배우 성격은 굉장히 쾌활하고 장난기 넘쳐 보이는데 진중하고 치분한 역할을 딱 잡아줘서, 에릭이 불안정한 모습을 보일 때마다 중심 역할을 해 줘요. 그런데, 사실 그런 찰스가 - 해변 장면 제외하고 - 정말 환희에 들떠 침착성 따위 날려 버리고 기뻐했던 장면이 있다면, 바로 세리브로 가동 장면이라고 생각해요.

생각해 보면, 꼬꼬마 시절부터 찰스 자비에는 늘 다른 뮤턴트들을 만나길 원했어요. 그가 가장 싫어하는 건 분명히 '혼자' 가 되는 겁니다. 일반적인 인간들과 대화를 할 때조차, 그는 그들에게서 돌연변이적인 유전기질을 찾아내 버려요. 헤테로크로미아, MCR1돌연변이, 그건 '고립'되고 싶어하지 않는 기질의 표현이라고 생각해요. 난 혼자가 아니야, 우리는 고립된 존재가 아냐, 우리는 모두의 일부고 함께 하는 거야. 그런 그에게 세리브로를 통해 세상의 돌연변이들을 만나며 살펴보는 것은 정말 참을 수 없는 기쁨이었을 거예요. 세리브로에 대한 개념을 들었을 때 에릭이 한 말, '만일 그들이 드러나길 원치 않으면?' 이라는 말에 대한 고려는 거기 없어요.

네 사실 세리브로는 - 그 연구소 소장은 나름 CIA가운데에서는 제일 순수하게 돌연변이에 대한 호감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만 - 얼마든지 통제기구가 될 수 있는 양날의 검이었죠. 그건 '돌연변이'라는 말을 단순한 몇가지 명사로 대체해 보면 단적으로 드러납니다. 게이, 유태인, 빨갱이, 그렇죠? 그것을 다루는 자가 악의를 갖고 움직이는 순간 정말 지옥같은 도구가 된다는 건 엑스맨 2편에서 자비에 스스로가 입증한 바 있죠.

에릭이 찰스를 만나고서야 "혼자가 아니다" 라는 걸 납득했다고 하면, 찰스는 세리브로를 쓰고서야 어린 시절부터 마음속에 깊이 자리잡은 본질적인 외로움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해요. 여기서부터 이미 이 둘의 동거에는 불안한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거죠. 에릭에게 찰스는 절대입니다. 날 이해해 주고 알아주는 전부죠, 하지만 찰스는 좀더 넓은 것을 바라볼 수 있어요. 에릭은 그에게 소중한 존재지만 많은 소중한 존재 중 하나입니다. 비중은 좀더 컸을 거예요. 하지만 전부가 아니라 "전부의 일부"라는 것. 그건 분명 둘의 미래에 불길한 그림자를 드리우는 부분이죠.

그렇다고 결별의 책임이 찰스에게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선택은 둘 모두의 것이었고, 둘은 모두 어떤 방식으로건 서로와 함께 할 수 없다는 걸 확인해 버렸으니까요. 

사족인데, 그 연구소 소장님의 대사 중 한 가지가 자막에서 너무 간단하게 처리되어 버려서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훈련되지 않은 오합지졸 괴물freak"이라는 스트라이커의 말에 대한 답이었죠. 그걸 자막에서는 그냥 유능한 사람들이라고만 말해버렸는데, 원래 대사는 "그 '괴물'들은 헌신적이고 열성적으로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였어요.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는 직후 아자젤에게 살해당해 버리죠. 뮤턴트 제국을 만들려던 쇼우는 뮤턴트에게 가장 호의적인 사람을 죽여버린 겁니다. 슬프게도, 아마 에릭도 그 전철을 밟을 것 같네요. 두 과격파 사이에서 먼저 죽어가는 건 늘 화해의 여지를 지닌 사람들이라는 건 역사가 입증하는 사실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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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극중 에릭이 미스틱에게 한 말이죠. 꼭 벗으라는 소리는 아닙니다만, 사실 이거야말로 에릭에게 어울리는 말이에요. "매그니토 비긴즈" 라는 소리를 듣고 있는 엑퍼클입니다만, 에릭은 한 마리의 수컷으로서 무리에서 추방된 젊은 수컷이 결국기 무리를 구성하고 리더(라기보다는 제왕)으로 군림하는 과정을 너무 잘 보여줘요.

사람이라기보다 한 마리 암컷 성별의 생명체로서 이 남자에게 너무 지독하게 끌리는 건 그런 면에서 일견 당연해 보여요. 이 수컷은(...) 강하고, 똑똑하고, 무자비하면서도 '내 품 안에 들어온 것'은 온 힘을 다해 끌어안아 버려요. 찰스의 포지션이 '모두에게 다정하고 공정한 리더' 라고 하면 그는 명확히 불공정한 리더죠. 찰스가 "우리 모두가 훈련을 해야 해" 라고 선언한 다음 구성된 스쿨에서 뮤턴트 아이들을 대하는 둘의 태도를 보면 이 점이 아주 명확하게 드러나요.

찰스는 션, 알렉스, 행크, 에릭 모두에게 가장 특화된 교육을 고안해내고 아이들을/에릭까지! 거기 적응시키죠. 그 집단에서 소외되거나 차별받는 사람은 없어요. 물론 찰스는 에릭을 다른 아이들에 비해 높은 레벨로 대해주지만, 그건 에릭이 찰스에게 소중하고 특별해서라기보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그런 점이 있다고 보지만) 새끼(cub)를 대할 때와 다 큰 개체를 대할 때의 차이 정도로 보여요. 다분히 '사회화가 당연한 무리속의 공정한 리더'인 거예요. 각자의 포지션에 맞춰 대하는 거죠. 아이들은 배워야 하는 학생이고, 에릭은 학생이지만 동시에 동료죠. 

하지만 에릭은 사람을 그런 식으로 분류하지 않아요. 그는 철저히 자신이 관심을 품고 있는 대상에게 집착하고 '선 밖'의 사람들에게는 명확히 차이를 보여요. 이것이 엔딩에서 드러난다고 보는데, 스쿨의 아이들 중 에릭 곁으로 간 것은 '여자'이자 에릭이 '특별히' 대했던 레이븐 한 명이에요. 그가 찰스를 붙들고 자신과 함께 가자고 거의 애원하다시피 한 것도, 찰스가 그 정도의 위치에 있어서가 아니라 찰스가 그의 마음 속에 그만큼 거대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예요. 이득이나 손해가 아니라 애착에 따라 행동하는 거죠. 물론 그렇다고 그가 득실을 안 따지는 사람이라는 건 아니예요. 아마도 2편 이후 '매그니토'가 되면서 그는 그런걸 찰스보다 훨씬 냉정하고 냉혹하게 따지겠죠.

하지만 적어도 엑퍼클에서의 에릭은 자신의 유대-집착-애착에 따라 사람을 철저히 '차별'해요. 그에게 있어 '내 사람'은 목숨을 걸고서라도 돕고 보호하고 끌어안아 줘야 하는 사람이에요. 여기까지는 찰스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선 밖의 사람'에 대해 에릭은 거의 '사물화' 할 수 있을 정도로 냉정해져요. 이런 사람들은 절대 적대해선 안돼요. 그리고 죽일 수 없다면 사냥하면 안되는 족속이죠. 어리석은 인간들이 미사일 공격을 감행하는 순간 인류 전체가 에릭의 '선' 밖으로 밀려나 버린 거고, 인류는 그 순간 에릭 렌셔를 죽이지 못한 걸 수십년에 걸쳐 후회해야 하는 겁니다.

근데 이 점이 에릭이라는 캐릭터에게 무한의 매력점이 돼요. 왜냐면, 인간은 본질적으로 공정함을 사랑하면서도, 한쪽 구석에는 - 인간 자체가 타고난 불공정한 존재인것만큼이나 -  불공정을 소원하거든요. 누구나 '인간'이 공정하길 바래요. 하지만 '저 사람'이 '내게만' 미소지어 주길 바라고 친절하길 바라고 '나만을' 사랑해 주길 바라는 마음도 분명히 존재하죠. 인간이 사랑을 갈구하는 존재인만큼, '특별'한 사랑을 갈구하고 또 주고 싶어하는 것이 본능입니다.

에릭에겐 그게 있죠. 그는 '선 안'의 존재에겐 철저히 훌륭한 조언자, 보호자, 조력자가 됩니다. 저 호랑이가 발톱을 휘두르면 저 같은 건 그냥 두동강이 나겠죠, 하지만 그 호랑이가 날 본 순간 목을 울리며 조용히 다가와 손 밑에 머리를 들이댄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 짐승이 무시무시하고 위험할수록 그 갭으로 인한 매력은 배가됩니다. 그가 압제자일수록, 냉정할수록, 제멋대로일수록 이 갭이 커지고, 그래서 흡입력이 강한 존재가 돼요. 그래서 '타인'에 대해 대단히 방어적이고 공격적이기까지 한 에릭은 그만큼 특별한 존재가 되죠.

전 찰스가 그 면에서 분명히 오만했다고 생각해요. (찰스가 나쁘단 뜻이 아니에요) 방어적이고 동시에 공격적이고 고집세고 남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도록 정신적 장벽이 강한 저 남자가 '자신에게만'은 굽혀줍니다. 죽이지 않고, 참고, 생각을 돌리고, 수긍해줘요. 그리고 이전에 말했듯 고분고분하고 부드러운, 그래서 수컷의 경쟁심을 정면으로는 자극하지 않는 찰스가 에릭에게는 또 이상적인 친우, 동료, 혹은 그 이상의 무언가가 될 수 있었고 말이죠. 그런 면에서는 환상적인 궁합이에요. 이전에 말횄듯 철없는 애들이라면 찰스같은 사람을 두고 자기 고집대로 부려보려고 뎀볐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에릭은 '그는 달라' 라고 생각한 이상 찰스를 위해 나름 굽혀주기까지 했으니...

결론적으로 이 둘은 서로에 대해 이해하면서도 또한 '착각'을 해 버렸어요.

언젠가는 터졌을 거예요. 해변가의 일이 없었더라도, 찰스는 자신이 에릭의 강한 의지를 '결정적인 순간에' 꺾지 못한다는 걸, 에릭은 찰스가 '결정적인 순간에' 조용히, 그리고 고요히 자신의 방식을 부정한다는 걸 겪고야 말았을 겁니다. 그것이 조금만 작은 일이었다면 냉전, 열전, 혹은 어떤 양보로 그럭저럭 끝을 맺었을지도 모르겠어요. 아니, 정말 운이 좋았다면 저 정도의 "절대적" 선은 건드리지 않고 그럭저럭 잘 지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에릭이 "인류"를 자신의 무리 밖으로 몰아내 버리는 순간, 찰스는 그걸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던 거고, 그리고 자신이 결사적으로 막으려 해도 에릭의 마음을 바꿀 수가 없다는 걸 처절하게 체감해 버리는 거죠.

동시에 에릭은... 찰스의 고집과 맞닥뜨리죠. 에릭을 위해서라면 한 발 양보하던 찰스는, 하지만 그보다 더 양보하지는 못했어요. 찰스는 담담하게 '우리는 달라' 라고 선언해 버립니다. 에릭이 '선 밖'으로 몰아내 버린 인류와 함께 해 버렸어요. 용서할 수 없는 배신이죠. 그 순간 에릭의 얼굴이 서느라니 굳는 것은, 그것이 너무나 아픈 선언이었기 때문이에요. 난 네 무리가 아냐, 네 형제가 아냐. 우린 너무 달라, 같은 무리가 될 수 없어.

 그래요, 그는 호랑이였던 겁니다. 불꽃처럼 타오르는 호랑이, 찰스의 - 늑대 리더의 다정함과 상냥한 리더쉽에 녹아들기엔 너무 거대하고, 배타적이고, 강경했어요. 그는 편안하고 조용한 늑대굴에 적응할 수는 없는 존재였어요. 그 곳에서 자신을 둘러싸고 체온을 나누며 함께 잠드는 '형제'들 사이에 몸을 눕히고 질서에 스스로를 적응시키기엔 너무 거대하고 흉포한 야수였던 거죠. 그 사실을 해변가에서 둘 다 깨달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한번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한 이상, 이제 너무나 행복했던 그 둥지에 함께 돌아갈 수는 없다는 것도.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랬죠. '친구는 두 몸을 지닌 한 영혼이다.'  그들은 아마
 가끔은 서로의 부재를 느끼면서 스스로에게 다시 물어볼 겁니다. 그 때 내가/네가 다른 말을 했다면 우리는 어떻게 지내고 있었을까. 지금 이 순간 넌 내게 무슨 말을 했을까. 너라면 이럴 때 어떻게 할까. 하나가 되었다 잡아뜯겨졌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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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감히 말하건대 그대는 Kinky한 크리에이터의 뮤즈. 님도 보고 떡도 뜯어먹은 감독 새퀴에게 멋지게 리스펙트.
이의 있는 분은 매그니토 삼종세트를 착용하고 저녁 6시 30분 신도림 역 환승게이트에서 170데시벨 이상의 목청으로 외쳐주세요. 물론 용건 전에 관등성명 밝히기는 기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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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7. 4. 11:38

제게 찰스는 그런 부분이 있는 캐릭터에요. 자신감이 넘치고, 사실 찰스의 그 선량함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면 굉장히 좋은 의미에서의 우월감이 느껴진단 말이죠. 나면서부터 어쨌건 지구 인류 상위 5% 안에는 들어갔을 계급에서, 나무랄 데 없는 혈통으로 태어나 주위 어른들의 생각을 환히 들여다 보면서 자란 소년이 거기 있단 말입니다. 게다가 늘 머리가 좋았고 - 낙제생 찰스 프란시스 자비에는 생각도 안 나지 말입니다 - 비뚤어지기 전에 자기보다 훨씬 외견적으로 불리한 , 하지만 재미있는 힘을 가진 '소녀' 와 만났어요. 

만일 레이븐이 소년이었다면 찰스에게 조금 반발하는 사이가 됐을지도 몰라요. 어쨌건 키(...) 를 제외하곤 어딜 봐도 자기보다 위너인 남자거든요. 그런데 찰스같은 타입이 복종심을 불러일으키는 타입이냐 하면... 아뇨, 오히려 도전하고 싶어질 타입이죠. 물론 대부분의 도전자들은 처음엔 샌님으로 보고 덤볐다가 결국 알게되는 그의 다정함과 사려깊음과 돈(...)과 지적 능력 앞에 결국은 아 안될거야 이 녀석은 좋은 친구니깐 칭구해야지~ 가 되겠지만요. 전 찰스가 그런 변화에 늘 아주 익숙했다고 믿어요. 그리고 그런 변화를 겪을때마다 그는 "인간은 저마다의 한계가 있을뿐 모두 선한 부분이 있어." 라는 생각에 확신을 더해갔을 거고요.

사실 성장한 레이븐이 옥스포드녀(...)에게 "웨이트리싱을 전공하져" 라고 딴지를 놓은 데에서도 아주 약간은 그 스멜이 납니다만... 하지만 레이븐은 여자아이고, 찰스는 분명 민감하게 격리된 외로움을 느꼈을 레이븐에게 너무 훌륭한 '오빠'가 되어주었을 것이니 '내 생각은 읽지 마!' 라고 얘기하고 약속을 받은 데에서 타협을 봤다고 생각해요.

문제는 에릭인데... 이 남자는 타인에게 찰스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복종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타입이에요. 아마 대부분의 경우 이 남자가 꺾어버려서. 그러니까 찰스와는 완전 반대 타입이죠. 호감, 친밀도, 이해를 기반으로 자기 고집을 밀어붙이는게 찰스의 '지배'라면, 입닥치고 죽고 싶지 않으면 따라와. 아니면 관두던가. 맘에 안 드나? 몇군데 부러뜨려줄까? 라는 것이 에릭의 '지배'입니다. 에릭이 찰스에게 그 남자 치고는 엄청 쉽게 마음을 허락한 건(...) 물론 첫눈에 반해서겠습니다만, 또 한가지, 이 남자에게서 수컷들 사이의 '경쟁' 그러니까, 자신과 같은 형태로 발현되는 지배욕, 혹은 찰스같은 계층에서 태어난 자들이 당연히 갖고 있을 법한 권리의식, 넌 내 명령을 들어! 따위의 태도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물론 사실 찰스에겐 그런 면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자연스럽게 중심에 서고 자연스럽게 사람들을 움직이는데 익숙해요. 다만 아마도 그가 가진 능력 때문에, 그 '과정'이 훨씬 더 사람들의 마음에 드는 방식으로 나오는 거죠. 똑같이 하녀에게 일을 시킨대도 "마들렌, 바닥의 얼룩을 지워." 랑 "마들렌, 미안한데 내가 아까 바보같은 짓을 했어요. 잉크를 엎어버렸지 뭐예요. 저거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요?" 라고 하면서 불쌍해 보이는 파란 눈으로 빤히 바라보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죠. 전자는 권위고 후자는 동의를 구하고 있지만, 사실 그 바탕에는 결국 고용관계, 즉 권력의 차이가 놓여 있어요. 그는 지배자가 맞아요. 대신 대단히 다정하고 배려심 넘쳐 보이는 지배자죠. 그건 왜냐면, 그 사람이 자신에게 정말로 중요한 것에 누군가 흙발을 딛을 때까지는 뭘 하건 전혀 개의치 않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각설하고, 찰스는 말하자면 문명사회의 이상적인 지도자예요. 우리 아빠가/오빠가/삼촌이/사장님이/과장님이 저랬으면 좋겠는 사람이기도 하죠. 하지만 그는 분명 지도자예요. 동물로 치면 당당한 알파메일이죠. 전 그 어떤 프로젝트에서도 서브인 찰스를 생각도 못 하겠어요. 이 대책없는 유전학교수는 장담하건대 석박사 논문을 쓰거나 대학원생일 때조차 프로젝트의 중심에 있거나 교수의 마음을 쉽사리 움직여 버렸을 것만 같단 말이죠. 

요 다음엔 에릭에 대해 써 볼까 합니다. 물론, 회사 일 좀 마무리 지은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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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 별로 수위나 커플링은 없지만 에릭찰스에릭 분위기?
* 모처에서 리퀘를 받아서 썼던 글이죠.
* 문제는 이 뒤의 옷 벗기 체스 내기...글이 날아가서 없다는 것. 다시 써야 하나 OTL


 

그게 사실 한 편이 더 있었지만 뒤가 홀랑 날아갔던 고로, 여기 다시 올립니다.
머 지금 상태로도 엔딩이 나긴 나요.

 
찰스와 에릭에 대해 썰을 풀어보다가 다른 게시물로 옮기게 되었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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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펜싱 시리즈 중에서도 특히 마음에 드는 사진. 여자분 너무 예쁜데 - 앨리스에서도 정말 고왔어요 - 저 내리뜬 눈 때문에 심장마비 걸리겠슴다.
칼날 위치가 정말 절묘한 듯. 귀 밑쪽 턱선에 점 있는 것도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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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치고 쓰는 겁니다. 닥치고 찍은 모 감독처럼.  (5) 2011.07.05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 에릭찰스 분위기
* 이 둘이 체스 두는게 정말 좋습니다. 근데 늘 에릭이 이기는게 참 묘해요. 찰스랑 두기 전에는 쇼우가 가르쳐줬을까?



이게 아마 두번째 썼던 엑스맨 퍼스트클래스 팬픽 같아요. 세번째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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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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