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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워."
그것은 매우 흔치 않은 일이었다.
"뭐가?"
"자네 눈이."
사무실을 향해 천천히 이동하던 휠체어가 순간 멈췄다. 찰스는 웃으며 지금 이 순간 에릭의 얼굴을 꼭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돌아보려 했는데, 머리를 돌려볼 것도 없이 눈앞에 그 눈동자가 나타났다. 청회색 눈동자는 그러나 놀랍도록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꾹 다문 입에 약간 찌푸리기까지 한 미간을 보니 화가 났나 싶기까지 했다. 그런 얼굴을 하고서, 에릭 렌셔는 찰스 프란시스 자비에에게 아주 냉정한 어조로 물었다.
"무슨 소리야, 그거."
"자네 눈동자는 정말 미치도록 아름다워. 내가 말 안했던가?"
햇볕에 따라 푸르게도 보였다 회색으로도 보였다 하는 눈동자가 찰스의 진의라도 탐색하려는 듯 빤히 이 쪽을 바라본다. 그 시선을 부드럽게 받아내며, 찰스는 다시 나지막하게 말했다. 달콤하게, 더없이 상냥하게.
"세상에는 수많은 푸른 눈이 있지만 자네같은 눈은 흔치 않아."
하지만 듣는 사람의 얼굴은 그 말에 담긴 진의 따위 상관없다는 듯 냉랭하기만 하다.
"찰스, 갑자기 왜 이러는지 모르겠는데,"
"그냥 그걸 알려주고 싶었어. 자네는 정말 아름다워."
에릭의 얼굴이 냉랭을 넘어 차갑게 얼어붙었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굳었다. 하지만 찰스는 그런 에릭의 기분을 풀어주려 하기는 커녕 오히려 빙글빙글 웃으며 말을 잇고 있었다. 지금 에릭이 왜 이리 표정이 싸늘해졌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이 보면 에릭이 찰스의 말에 화를 내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의 감정을 손에 쥘 수 있을 듯 감지할 수 있는 찰스의 답은 달랐다.
"갑자기 왜 이래. 내가 혹시 뭐 잘못한 거라도 있어?"
"아냐 친구 전혀 그런 건 없어. 그냥 말해주고 싶었을 뿐이야."
저 차갑게 굳은 얼굴은 너무 갑작스러운 말에 당황한 속내를 숨기기 위한 에릭의 필사적인 가면이다.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이 냉정하게만 보이는 남자가 약간이라도 그 냉랭함을 무너뜨리는 광경을 볼 수 있겠지만, 적어도 남들 보는 눈이 있는 여기선 그러면 안된다는 것쯤 찰스도 잘 알고 있었다.
"일단 가자고."
에릭이 일어섰다. 다시 휠체어 뒤로 돌아가 천천히 민다. 찰스는 대화를 계속 잇기엔 시간이 없다는 사실이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가 의원으로서 바쁜 나날을 보낼수록 단 둘이 이야기할 시간은 줄어든다. 암살 시도 이후 찰스의 의정활동은 이전보다 더 주목받게 되었고, 그는 점차 뮤턴트 인권 운동의 상징이 되어가고 있었다. 뮤턴트를 위해 일하는 것은 원래 원하던 바였지만 상징이 되어 떠받들리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아이콘이란 원래 동유럽의 성화를 의미하는 거라고. 난 예수도 성모 마리아도 아닌데.' 찰스가 불만을 담아 투덜거리고 있노라면 에릭은 어깨를 으쓱이며 받아치곤 했다. '어쩔 수 없잖아. 아마 그리라면 그릴걸?' '에릭!' '어차피 뮤턴트 분리주의자들은 이미 자네의 사진과 인형을 불태우고 있어. 인간들은-' '에릭, 스스로가 인간이 아닌 것처럼 말하지 마.' 에릭은 뭔가 더 말하고 싶어하는 듯 했지만 찰스의 얼굴을 보더니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에릭."
"왜."
"자네 말야..."
"또 이상한 소리 하면 저 분수에 휠체어 던져 버린다."
"그럼 얘기하면 안되겠는걸"
사실 요즘 에릭의 신경은 제법 예민해져 있었다. 지속적으로 찰스에게 날아드는 분리주의자들의 협박은 요즘 점점 더 심해져, 몇몇 메시지들은 명백히 위험한 의도를 내포하고 있었다. 찰스를 배신자, 괴물들의 보호자, 우두머리로 지칭하는 그런 편지나 쪽지들은 경고나 욕설을 넘어서서 노골적인 협박을 하고 있었다. 찰스는 이전의 총격 사건을 직접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메시지들을 대부분 무시해 버렸지만, 에릭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그 편지들의 발신처를 추적하고 주위를 살폈다. 지금 찰스의 옆에는 에릭 한 명만이 있지만, 이 평화로워 보이는 의회 앞뜰에도 사실 몇명인가의 경호원이 조심스레 찰스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얘기해 봐."
"응?"
"안 던질 테니 얘기해 보라고."
찰스는 피식 웃었다.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어."
"......"
"에릭?"
"미안해 할 거 하나도 없어."
아아, 그래. 늘 그렇게 말하지 내 친구. 하지만 난 늘 자네에게 미안해. 나만의 여정이었어야 할 일에 자네를 끌어들인 게 잘못은 아니었을까 하고. 하지만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정색을 하며 스스로 원한 길이었노라 말하는 자네가, 고맙고도 무섭다는 걸 자네는 알까.
"자네도 마찬가지야."
"무슨 소리야?"
"내게 미안해 할 필요 없어."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이름을 부르기 위해 숨을 들이킨 순간, 에릭이 허리춤에서 무전기를 꺼냈다.
"건너편, 전방 덤불에 뭔가 반짝였다. 알아봐."
그렇게 말하면서 몇 걸음 앞으로 나선다. 아마도 그 반짝인 것과 찰스 사이를 몸으로 가로막으려는 것이다. 찰스는 반사적으로 머리에 손을 올렸다. 가벼운 두통이라도 느끼는 듯 했지만 실상은 에릭이 주목하는 덤불 속에 누가 있는지, 어쩐 일인지 알아보려는 그 나름의 방식이었다. 에릭의 짐작대로 그 곳에는 사람이 있었다. 그 인간의 의사를 읽기 위해 마음 속으로 파고들어간 순간, 총성이 울렸다.
"에릭!"
살의를 느끼자마자 저격범의 의식을 끊어버렸지만 아슬아슬한 차이로 한발 늦었다. 새파랗게 질린 찰스 앞에서 에릭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에릭, 괜찮아? 에릭!"
비명을 지르며 몸을 숙이고 도망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무릎을 꿇은 채 비틀거리던 에릭이 한 손을 아래로 내렸다가 다시 올린다. 찰스의 눈에는 뒷모습만 보이는 까닭에 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갑작스레 힘껏 몸을 일으킨 에릭이 돌아서서야 몸 상태를 볼 수 있었다.
"맙소사, 에릭!"
다가온다. 한 발로 뛰다시피 해서 다가온 에릭의 허벅지에는 엄청난 상처가 나 있다. 일반적인 총상과 다르다. 울컥 피가 솟아나오는 것 보고서야 찰스는 하얗게 질려 손을 내밀었다. 어서, 어서 지혈하지 않으면 저 출혈량으로는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한발 다가온 에릭은 그대로 무너져 찰스의 온 몸을 끌어안았다. 남자가 힘겹게 숨을 내쉰다. 단 한 순간 모든 것이 악몽으로 변해버렸는데, 에릭이 그의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막을 수가...찰스, 막을 수가 없어."
"무슨 소리야, 에릭!"
"이 총알, 막을 수가..."
중얼거리던 에릭이 양 팔로 간신히 의자를 짚고 몸을 떼는 순간,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다시 한번 총성이 울린 것이다. 찰스의 눈앞에서 에릭의 어깨가 붉게 물들었다. 남자의 어깨에 박힌 총알은 몸 안에서 파열되며 큰 상처를 남겼고, 뜨거운 피가 찰스의 얼굴과 몸에 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자를 붙들고 있던 에릭의 팔은 움직이지 않는다. 한쪽 팔은 불가항력으로 인해 아래로 늘어졌지만, 다른 팔은 힘껏 버티고 서서 이름 모를 저격자들의 시야에서 찰스를 가리고 있다.
팔을 뻗었다. 눈을 크게 뜬 채 피투성이가 된 에릭의 몸을 끌어안은 찰스는 그대로 의식을 확장했다. 순간 모든 것이 멎었다.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던 사람들도, 달려가던 사람들도, 손가락으로 에릭 쪽을 가리키며 어딘가 외치던 사람들도, 사방에서 이 쪽을 노리던 저격자들과 총성을 향해 달려가던 경호원들까지도 모두 멈춰섰다. 마치 영화 속의 정지된 장면같은 광경이었지만, 모든것이 멈춰 있는 화면과는 달리 다른 모든 것들은 움직이고 있었다. 분수에서 흩날리는 물방울, 사람들의 머리칼을 스치는 바람, 그리고 찰스의 옷에까지 뜨겁게 번져가는 에릭의 피.
"찰스..."
에릭의 속삭임 한 마디에 모든 것이 바뀌었다. 서 있던 사람들 모두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죽은 것은 아니었지만 모두 한꺼번에 의식을 잃은 것은 틀림없었다. 도저히 선별할 수가 없었다. 누가 도망치는 사람인지, 누가 저격자인지, 앞으로 누가 더 총을 쏠 것인지 알 수가 없어서 모두 기절시킨 것이다. 그 비현실적인 침묵 속에서 에릭이 속삭이는 소리만이 찰스의 귀에 멍멍하게 들려 왔다.
"다행...이야..."
"에릭?"
"이번에는..."
"말 하지 마. 소리내서 말하지 않아도 돼!"
생각을 읽는다. 에릭의 머리 속에 떠오르는 말은 단 하나. '이번에는 지켜냈어.' 라는 의사가 전해져 와, 찰스는 아무 말도 못하고 이를 악물었다. 아냐, 그래선 안돼 에릭. 나 때문에 자네가 다쳐선 안돼. 날 지키는 것보다 자네의 목숨이 몇 배로 중요해. 적어도 내게는 그래.
"에릭, 조금만 더 버텨. 곧 구급차가 올 거야!"
찰스가 손쓸 수 있었던 거리 밖에까지 도망친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이 신고를 했는지 경찰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함께 구급차가 다가왔다. 에릭은 뭔가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그 말은 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했고, 숙련된 구급요원들의 손에 들것에 옮겨진 남자는 그대로 흰 차 안에 실려들어가 사라졌다.
"의원님, 괜찮으십니까? 다친 데 없으세요?"
다급한 질문에 찰스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피가..."라고 말하는 구급요원에게 한 손을 들어보이며 답한다.
"전 괜찮습니다. 다친 데 없어요."
"하지만 의원님."
"아까 그 사람을 살려주세요. 저 대신 총에 맞았습니다."
'대신'이라는 말을 할 때 그제서야 눈에 왈칵 눈물이 고였다. 사방에 사람들이 쓰러져 있기 때문인지, 구급요원은 거기까지만 듣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났다. 찰스는 양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선택을 후회한 적은 없다. 그 선택 때문에 불특정 다수의 악의에 목숨을 내맡기고 살아야 한다는 것도 온전히 납득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그 선택을 내린 자신이, 그리고 그 선택 탓에 움직이지 못하게 된 두 다리가 저주스러웠다.
그 선택 때문에 그가 총에 맞았다. 그리고 망가진 다리로는 지금 그와 함께 있을 수조차 없다. 사경을 헤매고 있을 텐데 손조차 붙들어 줄 수 없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 하나.
찰스는 양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핏물 섞인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계속
[단편/화이트폰] 희생마 (4) | 2011.08.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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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Teilnahme 1 (2) | 2011.07.29 |
[단편] Greyhound series 2. 폭풍전야 (4) | 2011.07.25 |
[단편] Greyhound series 1. 그를 지키는 이유 (4) | 2011.07.25 |
[중편] Case of Mercury 5 (4) | 2011.07.20 |
"찰스, 왜 그러나?"
"죄송합니다. 등이 쑤셔서 그래요, 로버트. 가끔 이러더군요."
2차대전 참전용사였던 하원의원은 그 심정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도 독일놈들이 박아둔 총알 자리가 가끔 욱신거리지. 빌어먹을, 절대 잊게 내버려 두질 않는다니까." 찰스는 웃으며 그에 동의했고, 두 의원은 서로의 정책에 지지를 보내기로 약속한 다음 자리를 파했다. 사무실에서 나오자 문 바로 옆에 붙어 있던 에릭이 자연스럽게 다가와 휠체어 손잡이를 잡는다. 모인 미간에 꾹 다물린 입술, 그의 마음을 읽을 필요조차 없어 보였다.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었어?"
"아니."
거짓말, 그렇게 판단했지만 그의 마음 안에 들어가지는 않았다. 만일 찰스가 꼭 알아야 할 일이라면 에릭이 먼저 입을 열어 알려줄 것이다.
"그냥 자네가 여기 있는 게 싫어."
바로 이렇게. 찰스는 실소를 터트리고 싶은 것을 참으며 그저 조용히 미소지었다. 에릭은 처음부터 정치계 진출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그는 미국인이 아니었고, 그에게 있어 정치란 기만, 술책, 그리고 그의 인생을 정신적으로 눌러죽인 '학살'과 깊이 연관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는 오래 전 인간 때문에 깊이 다친 짐승처럼 사람을 믿지 않았고, 특히 그 사람이 '다수' 일 때에는 더더욱 믿지 않았다. '당선될 때까지만.' 곁에 있어 달라는 부탁에 그의 대답은 이렇게나 짧았다. 당선된 뒤로도 그는 삼 개월을 더 기다려 주었고, 그동안 내내 찰스를 설득하기 위해 애썼다. '넌 의미없는 놀음을 하는 중이야. 저들이 그런 문제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히틀러도 처음에는 비웃음을 샀어. 어떻게 됐는지 봐.' 에릭에게 모든 정부는 똑같았고, 격론이 오가는 미국의 하원과 우뢰와 같은 박수를 보내는 나치스의 의회가 아무 차이가 없었다.
아마 지금의 에릭이 들으면 화낼 것이다. 총격 사건이 일어났을 때 찰스는 그가 가 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실 에릭은 그러한 암살 시도에 대해 몇번이나 경고했었다. 일종의 공포증 발현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무시해 버린 것은 바로 찰스 자신이었다. '이 곳은 전장이 아니야.' '충분히 전장이야. 넌 저들에게 선전포고를 했어.' '에릭, 제발! 내게 다가오는 사람들을 오스왈드 보듯 할 필요는 없잖아.' 그는 항복하듯 양손을 들었지만 그것은 오히려 불만의 표시라는 걸 찰스는 잘 알고 있었다. '원하는 대로, 의원님. 하지만 내가 늘 지켜줄 수만은 없잖아.' '오, 에릭-' '난 곧 떠날 거야. 내가 없으면 어쩌려고 그래. 그래 가지고 '살아 있는' 자네 기사를 언제까지 읽을 수 있겠어?' 그 고집스러운 얼굴에 찰스는 약간은 도전적으로 내뱉었다. '그만 좀 해. 기분은 이해하지만 여긴 미국이야.' 하지만 그를 공격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고집스레 이 쪽을 바라보는 청회색 눈동자의 주인에게 확신시키고 싶었을 뿐이다. '이 곳은 미국이야. 나치스 독일이 아니라고. 이 곳은 자유와 민주주의의 땅이야.' '그리고 대통령을 암살하고 말이지.' '에릭!' 고집스러운 얼굴로 이 쪽을 바라보던 그가 찰스의 얼굴을 양 손으로 붙들었다. '난 네게 늘 감사하고 있어.' '...에릭?' '넌 증오심밖에 모르던 날 구해줬어. 그리고 날 더 강하게 만들어 줬고.' '잠깐, 이건' 키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네가 죽는 게 싫어. 그러면 난 인간을 영원히 증오하게 될 거야.' 끌어안았던 기억이 난다. 그렇다. 사실 그것이 두려웠다. 자신의 곁에서 떠난 그가 인간을 증오하며 다시 그의 인생을 지배하던 그 증오 속으로 들어가 버릴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눈을 떴을 때 눈물이 났다. 깊은 마취에서 깨면서 지나치게 피를 잃었던 까닭에 너무 추워서 온 몸이 덜덜 떨리고 배에서는 끔찍한 통증이 엄습해 왔지만 그 때문에 운 것이 아니었다. 손이, 오직 손만이 따뜻했다. 침대 옆에 앉아 그가 깨어나기만 기다리다 잠들어 버린 에릭의 머리가 그 손 곁에 있었다. 천천히 손을 움직여 그의 머리를 가볍게 만져 보았을 때, 찰스는 세상이 부풀어올라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옆쪽으로 눈물이 흘러 떨어지자 시야가 간신히 맑아졌다.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쓰다듬고 또 쓰다듬는데도 에릭은 눈을 뜨지 못했다. "찰스!" 먼저 비명을 지른 것은 병실 안으로 들어오던 레이븐이었다.
비명소리가 울리고서야 에릭은 깨어서 찰스를 바라보았다. 허나 눈을 마주친 것은 단 한 순간, 곧바로 내리뜬 시선을 한 에릭은 머리를 쓰다듬던 찰스의 손을 잡아올리더니 아주 조용히 손바닥에 입을 맞추었다. 그 뒤로 며칠간 찰스는 그를 보지 못했고 - 애당초 가족밖에 면회할 수 없다는 것을 레이븐이 우겨서 들어올 수 있었다고 했다 - 그래서 그는 에릭의 입술이 닿았던 그 손을 내려다보며 에릭을 생각하곤 했다.
"난 자네가 떠난다고 해도 이젠 못 막겠어."
며칠 뒤, 간신히 그렇게 입을 열었을 때 에릭은 한동안 찰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내가 떠날 거라고 생각해?"
"자네 말대로 되었잖아. 바보라고 욕해도 좋아."
이미 선고는 내려졌다. 다시는 두 발로 땅을 딛을 수 없을 것이라는 얘기를 듣고도 찰스는 크게 동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에릭의 날카로운 눈까지 속이지는 못했다. 잠시 아래쪽을 헤매던 시선, 미소를 띠려다 애매하게 실패한 입가, 짧게 숨을 내쉬고 깊이 숨을 들이쉬는 모습까지 본 그는 충실한 경호원답게 그 자리에서는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게 바로 몇분 전 일이다. 찰스는 어떻게든 웃으려 애쓰며 다시 말했다. 가볍게, 아무렇지도 않게.
"그는, 날 쏜 사람은 뮤턴트들에게 딸을 잃었어."
"찰스."
암살범과 눈이 마주친 순간, 무방비한 찰스의 뇌 안으로 남자의 기억이 흘러들어왔다. 일부러 읽은 것은 아니다. 찰스를 바라보는 순간 그 중년 남자는 입을 꾹 다문 채 마음 속으로 외치고 있었다. '놈들과 한패다' '살인자' '괴물' 찰스와 같은 파란 눈을 가진 소녀가 그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다. 공포에 질린 채 절규하며.
"범인들은 잡히지 않았고, 그가 본 건... 그가 본 건 비명을 지르며 납치당하는 딸아이의 얼굴이었어. 그게 마지막이었던 거야."
"찰스!"
에릭이 찰스의 어깨를 꽉 붙들었다. 그만 말하라는 뜻이라는 걸 알면서도 말을 멈출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 말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레이븐에게도, 행크나 알렉스에게도 말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절규하는 소녀의 영상을 보며 아버지는 되뇌이고 있었다. '괴물' '살인자' 그는 찰스가 뮤턴트라는 걸 몰랐지만, 그가 뮤턴트 등록 법안을 반대한다는 것만으로도 그를 죽이고 싶어할 만큼 뮤턴트를 증오하고 있었다. 왜냐면,
"왜냐면...왜냐면," 호흡을 가다듬지 않고는 그 다음 말을 하기가 너무나 어려웠다. "왜냐면 딸의 머리는 끝내 발견되지 않았으니까."
어깨를 붙든 에릭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그 손에 얼굴을 기대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찰스는 말했다. 마음은 당장 입닥치고 그에게 기대라고 외치고 있었지만 도저히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에릭, 난... 나란 인간은 최저야."
"개소리."
그 아버지의 마음을 들여다 본 순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올라오는 총구를 보면서도 그를 멈추지 못했다. 순간 반강제로 들이밀어진 증오와 혐오와 살의는 그 정도로 강렬했고, 밀어닥치는 슬픔과 지옥같은 고통은 심장을 찌르고 들어왔다. 그럼에도 총에 맞는 순간 그의 머리 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내가 죽어서 그 법안이 부결된다면 그걸로 됐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에릭."
"찰스!"
"자네가 내 뒤를 이어주면 된다고...그걸로 족하다고."
"그런 소리 하지 마."
"죽도록 무서웠지만 그건 총 때문도 아니고 죽을까봐서도 아니었어. 알아?"
"......"
찰스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바로 앞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청회색 눈을 향해, 그가 자신을 증오하거나 경원하게 된다 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혹시라도 살아서 눈을 떴을 때 자네가 없을까봐, 인간을 증오하기로 결정하고 내 곁을 떠났을까봐 그게 두려웠어. 난 그런 인간이야."
언젠가 날려보낼 수밖에 없는 독수리를 붙들어 두고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이 말을 하는 것으로 다시 한번 족쇄를 채우게 된다는 것도 모르지 않았다. 가라고 말하면서 이리 토로하는 것은 정말 최저의 행동이다.
"에릭, 떠나는 게 나을지도 몰라. 자네와 난 달라. 어쩌면 내 꿈이 잘못된 걸지도 몰라. 그렇다면 누군가는 다른 길을 준비해야 해."
"자네의 꿈은 잘못돼 있어."
칼로 에는 듯한 통증이 가슴에 느껴진다. 하지만 잘 알고 있다. 이게 에릭이다. 가장 아픈 순간에도 절대 고개를 돌리지 않고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걸어오는 이다.
"그 멍청한 망상을 그만두지 않는 한 반드시 누군가는 자네를 죽이려고 할 거야."
"그렇겠지."
"그러니까 헛소리는 그만해. 난 여기 있을 거야."
놀라서 바라보았다. 차가운 파란 눈이, 날카롭게 뻗은 눈썹이, 반듯하게 내려온 콧날이, 그 밑에 굳게 다문 입이 그의 결심을 말해주고 있다.
"에릭..."
"다시는 그런 놈들이 널 해치지 못하게 할 거야. 찰스, 넌 순진하고 오만한 바보고 그 꿈은 말도 안되지만 나와는 상관 없는 얘기야. 그러니 떠나라는 헛소리는 받아들일 수 없어."
"에릭, 넌 분명히,"
에릭이 침대 위에 놓인 찰스의 다리에 손을 얹었다. 분명 눈으로는 그의 손이 얹힌 것이 보이는데 방치된 다리에는 아무 감각도 없다. 천천히 다리를 만지던 에릭이 강경하게 말했다.
"꿈도 꾸지 마. 이런 몸을 하고서 나더러 가라고?"
"에릭, 이건 네 책임이 아냐. 그리고 네가 걱정할 일도"
"앞으로는 내가 책임질 일이야."
어깨 위에 다시 손이 얹혔다. 이번에는 입술이 다가온다. 날카롭고 격렬한 키스에 찰스는 할 말을 잃고 에릭의 팔을 붙들며 매달렸다. 입술을 뗀 순간 에릭이 속삭였다.
"..."
찰스는 눈에 눈물이 핑 고이는 것을 알아채고는 눈을 감아 버렸다. 그의 나직한 속삭임에 기껏 이악물고 말했던 결심이 산산이 부서져 나간다. 날 떠나, 에릭. 난 분명 자네를 상처입히게 될 거야. 나를 지켜내건 그러지 못하건 간에 자네는 상처를 입겠지. 깃털은 꺾이고 날개는 부러질지도 몰라. 다시는 날 수 없을지도 몰라. 내게 갇히지 말고 날아가. 이 우리에서 벗어나 버려. 지금이 기회야. 지금 간다면 돌아보지 않을 수 있어. 자네도, 나도.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에릭이 뒤에서 말을 걸어왔다. 찰스는 잠시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과거의 상념에서 벗어나 옆을 돌아보았다. 여전히 보이는 것은 휠체어를 미는 손 뿐이다. 남자인데도 길고 보기 좋게 모양이 잡힌 우아한 손.
"아 그냥 좀."
사람들이 많다. 이런 곳에서 함부로 잡을 수는 없었지만, 지금 이 순간 찰스는 에릭의 손을 잡고 싶었다. 강한 손, 그를 건사하고 돌봐주는 손, 그를 사랑해 주는 손, 그를 지지해 주고 받쳐주는 손, 남들에게는 차가울지 몰라도 자신에게는 더없이 따뜻한 손을.
"빨리 은퇴하라고."
"힘들 걸. 아직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나 아니면 안된다고 믿는 건 노인들이나 하는 짓이야."
"난 갓난아이 때 이미 흰 머리를 달고 태어났거든."
"어울리네."
햇살이 따스했다. 찰스는 가볍게 웃으며 속으로만 조용히 기원했다. 다른 것은 바라지 않습니다. 이기적이라는 것도 잘 압니다. 하지만 제발, 그만은 저보다 더 오래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짧은 평화가 깨지기까지 별로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끝
[단편] Teilnahme 1 (2) | 2011.07.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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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Greyhound series 3. 황소의 눈 (5) | 2011.07.29 |
[단편] Greyhound series 1. 그를 지키는 이유 (4) | 2011.07.25 |
[중편] Case of Mercury 5 (4) | 2011.07.20 |
[단편/화이트폰] Returns (6) | 2011.07.18 |
"등록법을 반대하신다는 겁니까?"
"저는 우리 국민들이 어떤 이유로건 '구별' 되길 바라지 않습니다. 그것이 피부색이건 성별이건 돌연변이 여부건 간에 그들은 모두 성실하게 하루를 살아가는 국민입니다."
"그렇습니다만 자비에 의원님, 범죄를 저지르는 뮤턴트들에 대해 따로 대책이 없다는 지적이 있는데요."
"뮤턴트만 범죄를 저지르는 게 아닙니다. 범죄에 대한 방지책은 우리 모두가 고민해야 할 문제죠. '함께' 말입니다."
'함께' 라는 말에 방점이 찍혀 있다는 것을 누구나 느낄 수 있었다. 계속되는 의정활동으로 약간 창백해진 얼굴을 꿋꿋이 들고 답하던 찰스 자비에는 이제 질문은 끝이라는 뜻으로 손을 들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럼에도 쏟아지는 기자들의 질문과 다가오는 마이크를 밀어내며 경호원의 도움을 받아 어떻게든 앞으로 다가가려던 움직임은 풍채 좋은 한 남성에 의해 막혔다.
"의원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질문은 끝났는데요."
짧게 답하며 고개를 든 자비에 의원의 시선이 그 남자의 것과 얽혔다. 묵묵히 자비에를 내려다 보던 남자의 입매가 꾹 눌렸고, 그를 바라보던 의원은 서서히 경악에 찬 얼굴이 되어 입을 벌렸다. 의원이 손을 들어 남자의 어깨를 붙든다. 심상치 않은 기색에 의원 주변의 기자들을 막던 경호원이 고개를 돌려 남자 쪽으로 손을 뻗는다. 남자가 손을 올렸고, 총을 발견한 누군가가 비명을 지르려 했다. 시간은 끔찍하게 느리게 흘렀고, 의원이 잠깐 숨을 들이키고 뭔가를 말하려는 순간 총성이 울렸다.
에릭은 눈을 떴다. 방금 울렸던 총성이 아직도 낯익은 방 천장에 울리는 것 같아 두 손을 들어올려 눈을 가리고 잠깐 세게 비볐다. 꿈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인식하고 긴 한숨과 함께 몸을 일으킨다. 눈을 감으면 다시 한번 선명하게 그 때의 모습이 눈에 그려졌다. 몸에 한 발, 그리고 가슴에 제대로 한 발 더 쏘기 위해 남자는 손을 들었다. 에릭은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고 총은 폭발했다. 사람들의 비명소리와 함께 그는 쓰러졌지만, 에릭의 눈에 들어온 것은 단 한 사람, 배를 피로 적시며 쓰러지는 찰스 프란시스 자비에 뿐이었다.
총알을 뽑아낼까 했지만 오히려 더 위험하다는 생각에 참았다. 안아들자, 아직 의식이 있는지 시선을 에릭의 얼굴로 돌린 찰스가 팔을 에릭의 목에 감으려 했다. 하지만 그 팔은 피에 젖은 채 힘없이 늘어졌고, 푸른 눈이 눈꺼풀 안으로 말려들어가며 천천히 눈을 감는 것을 본 에릭은 다급히 그의 이름을 외쳤다. '정신 차려! 의식을 잃어선 안돼!' 누군가 구급차를 외쳤지만 그보다 한발 먼저 에릭은 의원용 리무진에 올라탔다. 쓸데없이 넓은 좌석이 지금만은 더없이 고마웠다.
수행원 한 명이 건넨 구급상자에서 압박붕대를 꺼냈다. 차마 둘러감지는 못하고 환부에 대고 꾹 눌렀다. 거의 의식을 잃은 것 같던 찰스가 짧게 비명을 질렀고, 에릭은 그가 고통스러워 한다는 사실보다 그에게 의식이 있음을 감사했다. "빨리 병원으로! 어서!" 기사는 이미 최대속도를 밟고 있었지만 에릭은 으르렁대며 소리쳤다. 머리를 감싸안자 꾹 닫혀 있던 눈꺼풀이 바르르 떨리더니 고통스럽게 열린다. "에릭..." "아무 말 하지 마." 짧게 말을 잘라버린 에릭은 무서운 표정으로 앞을 노려보며 이를 악물었다. 실책이다. 돌이킬 수 없는 실책이다. 그를 지키지 못했다. "에릭." 그가 다시 한번 말했다. 시선을 내리자 식은땀이 가득한 얼굴이 그를 기묘할 정도로 평온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고통의 그림자가 깊이 새겨져 있으면서도 잔잔한 호수 같은 눈에 에릭은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을 맛보아야만 했다. 안돼. 내 눈앞에서 떠날 꿈도 꾸지 마. 마치 지금이라도 곧 미련 없이 떠나버릴 것 같은 표정으로 바라보지 말란 말이야.
"얘기하고 싶었던 게 있었어."
"닥치고 병원에 가서 수술할 생각이나 해."
"내 친구."
다정하게 부른 그 단어에는 심지어 웃음기마저 들어가 있었다. 에릭은 눈가에 뭔가 고이는 것을 발견하고 두어번 눈을 깜박였다. 찰스의 얼굴에 그게 떨어지고 나서야 그는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손을 들어 눈가를 누르자 손에 묻은 피 냄새가 확 끼쳐 왔다. 피, 찰스의 피.
"난 자네가... 내 뜻을 이어줬으면 좋겠어."
"개소리 하지 마."
"레이븐을...레이븐을 도와줘."
에릭은 욕설을 내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다시 눈물이 흘러 떨어진다. 하필이면 찰스의 눈가에 떨어진 그 눈물은 이미 젖어있는 눈에 흘러들어가 다시 얼굴 옆으로 떨어졌다. 병원 앞에 차가 도착했고, 이미 연락을 받은 것인지 응급실 직원과 의사들이 달려나와 찰스를 침상 위에 누이고 다급히 달려들어갔다. 배에 얹혀 있던 압박붕대가 떨어져 피에 젖은채 바닥에 뒹굴었고, 에릭은 따라 들어가는 것조차 잊고 차 뒤에 앉아서 울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무릎 위에 얹혀 있던 남자의 체온이 서서히 사라져갔고, 어쩌면 그것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시 한번 눈물이 흘렀다.
이를 악물고 버텨 보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서야 차에서 내릴 수 있었다. 또다시 지키지 못했고, 또다시 눈 앞에서 가장 소중한 이가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꼴을 보아야만 했다. 아주 오래 전 간신히 흉터만 남았던 상흔 위에 생생한 상처가 덧붙어, 에릭은 이를 꽉 악물고 한 걸음 한 걸음 병원 쪽으로 다가가며 다짐했다. 만일 찰스가 목숨을 잃는다면 인간들은 지옥을 보게 될 것이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를 앗아가 버린 데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만일 그가 살아남는다면?
마음속에 던져진 질문에 에릭은 희망의 불꽃을 품었다. 살아남는다면, 혹시라도 그가 에릭 자신을 둘러싼 저주를 걷어치우고 살아남는다면. 손을 내려다보았다. 붉은 피에 젖은 손은 평소 그가 상상하던 그대로였다. 이제껏 살아오면서 그 손은 쓰레기들의 피에 늘 젖어 왔다. 하지만 지금 이 손에 말라붙은 것은 바로 찰스의 피였다. 이 피에 맹세코, 반드시.
그것이 벌써 2년 전. 눈을 떠서 바라본 손에는 아무것도 묻어 있지 않다. 에릭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주먹을 쥐고 다시 손을 폈다. 고개를 돌려 시계를 보고, 새벽 6시임을 깨닫고 아직 울리지 않은 알람을 끄며 일어선다. 평소보다 조금 이른 기상이었지만 준비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다. 샤워와 세수와 면도를 마치고 옷을 걸치고 방 밖으로 나간다. 그의 침실에 당도하여, 가볍게 노크하고 인기척을 기다린다. 잠시동안의 침묵에 쓰게 미소짓고는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가 그를 깨운다.
"찰스, 일어나."
어이없게도 어린애처럼 베개를 끌어안은 채 잠든 남자의 어깨를 잡고 흔들자, 아직 잠에서 덜 깬 푸른 눈동자가 살며시 드러났다가 다시 사라진다. 갈색 머리를 쓰다듬자 기분 좋은 고양이처럼 나지막하게 신음을 내뱉더니 눈을 감은 채 잠에 취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온다.
"어제 보고서 다 읽느라 두시까지 못 잤어."
"안됐군. 그래도 지금은 일어나야 해."
"알아...아는데...잠깐만..."
목소리가 다시 잦아든다. 깊이 숨을 내쉬는 꼴을 보니 다시 잠에 빠졌다. 에릭은 천천히 손을 내려 부드럽고 따뜻한 볼의 감촉을 느끼며 잠시 자비심 있게 기다려 주었다. 그리고 속으로 스물까지 센 뒤, 이번에는 이마를 쓸며 다시 말했다.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되는 거 알잖아. 비서들을 기다리게 할 셈이야?"
"...에릭."
"음?"
"자넨 악마야."
"칭찬 고마워."
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지만 이번에는 분명 의식이 깨어 있다. 천천히 눈을 뜬 찰스는 양 손을 짚으며 상반신을 일으키고는 언제나 그렇듯 에릭을 향해 손을 뻗었다. 겨드랑이 사이로 팔을 넣고 총격사건 이후 영영 움직일 수 없는 무릎 밑으로 손을 넣어 가볍게 들어올려 욕실 쪽으로 걸어간다.
"예전에도 얘기했지만 이 정도는 혼자 할 수 있어."
"알고 있어. 그럼 제 시간 맞게 일찍 일어나던가."
찰스는 포기한 듯 피식 웃었다. 그는 아마 모를 것이다. 그의 능력을 생각한다면 알 지도 모르지만 어쨌건 모를 것이다. 그가 살아 있는 한 순간 한 순간이 에릭에게 어떤 의미인지, 더이상 움직이지 못하는 다리를 바라보며 다시금 그 맹세를 되새기는 심정이 어떤 것인지도.
"그럼 잘 부탁해."
에릭은 찰스의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댔다 떼었다. 개조된 욕실의 받침대에 찰스를 내려놓고 몸을 돌리려는데, 찰스의 팔이 그의 목에 다시 한번 감겨온다. 어떤 의미인지 알아챈 에릭은 순순히 그가 원하는 대로 키스를 받아주었다. 혀가 섞이고, 키스를 마친 찰스가 잠시 에릭의 목에 기대어 눈을 감는다. 나지막한 속삭임을 들으며, 에릭은 다시 한번 그에게 키스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늘 미안해."
"헛소리."
스스로에게 맹세했다. 찰스의 이상에 동조하지 못하던 자신 따위 버리겠다고. 그가 살 수만 있다면,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그의 소원대로 결코 떠나는 일 없이 그와 함께 하겠노라고. 그의 연인, 동료, 반려, 혹은 그 무엇도 못 되더라도 반드시 그의 곁에 붙어서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꼭 지켜내고야 말겠다고. 이번 한 번만, 단 한 번만 운명이 자신을 향해 호의를 베풀어 준다면 그 한 번의 호의로 영혼을 팔겠노라고. 그리고 그 맹세의 대가가 바로 이렇게 눈 앞에서 숨쉬고 있다. 그의 다리는 죽었지만, 어쨌건 그는 살아있지 않은가.
샤워하기 위한 준비를 마친 다음 욕실 밖으로 나갔다. 가정부가 준비한 아침을 들여오고 저택의 각 전화기를 체크한다. 간밤에 아무 일 없었는지 얘기를 듣고 추가로 살펴야 할 보안 사항이 있으면 그걸 검토한다. 비서와 이야기하여 하루의 일정을 숙지하고 위험 지역은 없을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논한다. 이제는 익숙한 일과가 되어 버린 일이다. 그를 위해서라면, 그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에릭은 뭐든지 할 수 있었다.
-END
[단편] Greyhound series 3. 황소의 눈 (5) | 2011.07.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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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Greyhound series 2. 폭풍전야 (4) | 2011.07.25 |
[중편] Case of Mercury 5 (4) | 2011.07.20 |
[단편/화이트폰] Returns (6) | 2011.07.18 |
[단편] checkmate 2 (0) | 2011.07.04 |
자비에 가의 젊은 마부는 별로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약간 부아가 난 듯한 얼굴로 검은 빵을 우물거리고 있었는데, 사실 그건 예의바른 태도가 아니었다. 어느 저택이건 식사 시간 즈음 해서 방문하는 손님의 고용인에게는 차와 빵, 혹은 간략한 식사 정도는 대접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고, 그 기준으로 미루어 볼 때 티타임을 넘어 명백히 저녁 시간대에 방문한 이 마부에게 빵과 간단한 요리, 그리고 차가 나온 것은 나쁘지 않은 일이었건만, 게다가 세바스찬 쇼우의 저택에서 제공한 저녁이 꽤 괜찮은 것임에도 그의 표정은 영 풀릴 줄을 몰랐던 것이다.
고용인들이 부엌에 테이블을 내주겠다고 했는데도 마치 말이 없어질까 걱정이라도 되는 듯 냄새나는 마구간 한 구석에서 혈통 좋은 말들을 노려보며 빵을 씹어삼키는 그의 입에서는 가끔 중얼거림이 새어나왔는데, '찰스...' '가만 두나 봐라' '검은 빵이라니!' 등의 의미모를 말이 튀어나왔다. 그 목소리는 그 나이대의 젊은 남자 치고도 너무 가늘고 높아서, 모르는 사람이 보면 남장한 여자인가 하고 생각할 정도였다.
어쨌건 그렇듯 검은 빵에 투덜대는 것과는 영 딴판인 태도로 스튜 그릇 바닥까지 빵으로 싹싹 닦아먹은 청년은, 마지막 빵 조각을 입에 밀어넣고 우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난 듯 안 난듯 영 애매하게 붙은 콧수염에 붙은 빵 부스러기와 스튜 국물을 냅킨으로 닦고, 하녀가 가져다 준 쟁반에 다 쓴 냅킨을 쓱 얹어놓고 주위를 둘러본다. 마구간에는 말들 뿐이고, 이 저택의 마부와 하녀들은 모두 식사를 하고 있거나 저택에서 벌어지는 연회의 시중을 드느라 정신없을 것이다. 아까 찰스가 들어갈 때 보니 집사는 따로 없거나 적어도 자리를 비운 것으로 보였고, 아마도 비서나 하우스와이프인 듯한 흰 옷의 여자 - 그 여자를 생각하는 순간 마부의 이마가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 는 찰스와 함께 저택 안으로 들어간 듯 보였다.
"즉, 돌아다녀도 된다는 거지."
가볍게 중얼거린 청년은 주위를 흘끗 둘러보고는 씩 웃었다. 좋아, 자유다.
그 순간 청년의 얼굴이 '바뀌었다.' 목울대가 내려앉았다 다시 올라오고, 어딜 봐도 평범하고 약간 신경질적인 느낌이었던 남자의 얼굴 근육이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움직이지 않을 방식으로 움직인다. 광대뼈가 내려가고 볼 살이 오르고, 좁고 높던 비량이 작달막하게 바뀌었다. 뾰족했던 턱 라인과 푹 꺼졌던 눈두덩도 아까와는 다르다. 입고 있는 옷은 분명 마부의 옷이었는데, 서 있는 것은 전혀 다른 얼굴을 한 청년이었다. 그는 품에서 남자가 지니는 물건 치고는 너무 작은데다, 예쁘게 에나멜 세공까지 되어 있는 거울을 꺼내 얼굴을 들여다보고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부의 외투를 벗는다. 바지는 당연히 검은색 정장이었지만 외투 안에서 드러난 조끼와 셔츠는 대단한 고급품이었다. 이 정도면 하인을 마주친다 해도 길을 잃고 헤매는 연회장 손님 쯤으로 위장할 수 있을 것이다. 원래는 연회가 있을 것을 예측하지 못한 터라 찰스로 가장하고 돌아다닐 예정이었지만, 오히려 소란한 연회가 있다니 잘 되었다.
마부는 - 아니, 찰스의 '사촌여동생' 레이븐 양은 속으로만 쾌재를 부르며 마구간 밖으로 나섰다. 온 몸의 근육을 남들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움직여 외모를 바꿀 수 있는 이 '능력'은, 어렸을 때엔 그저 못생긴 외모에 딸린 저주일 뿐이었지만 이제는 달랐다. 찰스를 만나 유복한 삶을 살게 되고, 이 '능력'의 가능성을 깨달은 찰스의 제안에 의해 저주가 아닌 '선물'이라는 생각으로 훈련을 지속하고, 그리고 흥미진진한 사건들의 세계로 빠져들면서 이 '능력'은 수도 없이 도움이 되어 주었다.
하지만 그래도, 아까의 시시한 검은 빵에 대한 대가는 반드시 받을 것이다. 프랑스 파티셰가 조리한 최고의 디저트로 말이지. 사정없이 미안해하다가 결국은 그 보상을 약속할 찰스의 얼굴을 떠올리며, 레이븐은 쾌재를 불렀다. 뭐, 원래 찰스의 계획은 이 곳 고용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며 이 저택에 대해 캐 보라는 것이었지만 그것뿐이라면 재미없다. 무엇보다도 대강 하녀들 표정만 봐도 견적이 나오는 문제인데, 이 곳 하녀나 하인들을 구슬러 저택 주인의 사정을 알아내는 건 절대 녹록치 않은 일일 것이다. 칙칙한 아줌마 아저씨들을 상대로 뭘 얻어내느니 차라리 직접 가서 뒤지고 말지.
그렇게, 레이븐은 저택 안으로 조심스레 들어갔다. 굳이 정문으로 갈 필요도 없었다. 고용인들이 사용하는 뒷문은 어디에나 널려 있었고, '아래층'의 하인들은 '위층'의 높으신 분들이 가끔 길을 잃어 자신들의 구역으로 들어온다 해도 그저 당황하면서 보내줄테니 말이지.
수수한 문을 살짝 열고 들어가, 조심스레 기척을 확인해 가며 발걸음을 옮겼다. 건너편에 기척이 없는 이상 발걸음 소리는 내지 않을 생각이었다. 물론 기척이 있다면 오히려 당당히 발소리를 내며 돌아다녀야겠지만, 쇼우 저택의 복도 카펫은 의외로 두꺼워서 발소리나 제대로 나겠나 싶었다. 하인들의 공간을 지나고 나니 아마도 1층 거실인 듯한 공간이 펼쳐진다. 역시 연회 때문인지 복도를 돌아다니는 하인은 없었고, 레이븐은 잽싸게 손님인 척 당당한 태도로 몸가짐을 바꾸고 계단을 올라갔다.
보통 사교계 누군가의 활동에 대해 알고 싶다면 뒤져봐야 할 곳은 두 곳이다. 하나는 편지함, 다른 하나는 서재. 편지함이 있는 문가는 문지기나 하인들이 있을 가능성이 높고, 거기서 무언가를 뒤적거리는 모습을 보여봤자 좋을 일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목표 지점은 간단하다. 각종 서류와 초대장과 편지가 모여있는 곳, 즉 서재로 숨어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계단 위로 올라간 레이븐은 비어 있는 복도를 보고 미소를 떠올렸다. 대부분의 하인들은 접객중이거나 식사중일 거라는 짐작이 맞았다. 조심스레 살펴본 2층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마호가니로 된 두터운 문들만 방문객을 맞이하며 점잖게 서 있었고, 그녀가 할 일이라고는 거기서 서재에 해당할 법한 문을 골라 안을 탐색해 보는 것 뿐이었다.
서재는 보통 가장 큰 방이다. 양쪽 복도의 문 간격을 볼 때 가장 가능성이 높은 곳은 바로 복도 끝 문. 레이븐은 그 곳을 향해 다가가 조심스레 열쇠구멍으로 안을 탐색하며 혹시나 인기척이 나나 싶어 다시 한번 뒤를 살피고 손잡이를 잡았다. 누군가 열쇠로 잠그고 나갔는지 두터운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조끼 밑, 바지춤에서 작은 쇠꼬챙이를 두개 꺼냈다. 한 개는 쑥 밀어넣고 다른 한 개로 조심스레 잠금장치를 탐색한다. 마침내 찰칵, 소리와 함께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고, 상아로 세공된 문 손잡이를 잡은 그녀는 최대한 조용히 그것을 잡아당기고 흐르는 듯한 유연한 태도로 문 안으로 잽싸게 들어갔다.
완벽한 침입이었다. 런던 시내의 어떤 노련한 도둑이라 해도 그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단순히 이 곳에 들어왔다는 것만으로 기뻐할 만큼 하수가 아니었다. 잽싸게 돌아서서 다시 한번 아까의 도구로 조심스레 문을 잠그고 나서야,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놓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나지막히 읊조리며 돌아섰다. "좋아, 미스터 쇼우, 당신의 비밀은 뭐죠?" 청년으로 보이는 외모 치고는 너무 가느다란 목소리가 서재에 울렸고, 방금 너무 크게 중얼거렸다고 생각한 레이븐은 쿡쿡거리며 빙글 돌아서서 날 듯한 걸음으로 책상을 향해 다가갔다.
세바스찬 쇼우는 정리 정돈을 매우 좋아하는 성격으로 보였다. 문과 마찬가지로 마호가니로 된 넓은 책상 위에는 상아로 된 두꺼운 문진 아래 곱게 정돈된 고급지가 놓여 있었고, 그 바로 위쪽에는 수정으로 된 잉크병과 은장식이 달린 상아 펜이 흰색의 옥이나 대리석 쯤으로 보이는 전용 받침대에 고정되어 있었다. 평소 보석을 너무 좋아한다고 나무라던 찰스라면 야단스럽다고 눈을 찌푸릴만한 화려한 소품들이었지만 반짝이는 것을 몹시 사랑하는 레이븐으로서는 꼭 만져보고 싶을 만큼 매력적인 물건들이기도 했다. 물론 지문을 남길 바보는 아니지만.
책상 위에는 그렇게 서류 및 편지 작성을 위한 간단한 도구와 아마도 쇼우가 읽을 법한 두터운 외국어 책 두어권밖에 없었고, 흥미로운 서류가 들어있을 법 한 서랍은 당연히도 잠겨 있었다. 잠시 실망감에 어깨를 늘어뜨린 레이븐은 서랍의 잠금 장치를 살펴 본 다음, 다시 한번 쇠꼬챙이를 꺼내 작업에 들어갔다. 아니, 들어가려 했다.
"?!"
레이븐은 경악했다. 그녀가 손을 대기도 전에 철컥 소리와 함께 잠금장치가 해제되었을 뿐 아니라, 깜짝 놀라 손을 떼자마자 서랍이 스르륵 열리기까지 했던 것이다. 비명을 지르려다 간신히 참았는데, 이번에는 목 뒤쪽으로 뭔가 선뜩한 감각이 느껴진다. 날카롭고 차가운 감각이.
"소리 지르지 마. 컨트롤이 흐트러지면 네가 죽을 수도 있으니까."
자기도 모르게 양손으로 입을 막았다. 안 그러면 정말 비명을 질러 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방금 어깨 너머에서 들려온 남자의 목소리는 나지막했지만 정말 숨막히게 차가워서, 듣는 것만으로도 목 뒤의 뾰족한 것이 박혀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무서웠다.
"손 들어."
한 손에 장치를 든 채 였지만 레이븐은 순순히 양 손을 들었다. 외모는 완벽한 남자처럼 보였지만 힘은 어쩔 수 없다. 이렇게 불리한 상황에서 섣불리 반항해 봤자 아무 의미 없을 것은 뻔했다. 대체 누굴까? 일단 쇼우는 아닐 것이다. 그는 지금 이 집 어딘가에서 찰스를 만나고 있을 테니까. 이 집 하인도 아니다. 하인이라면 사람 부르는 줄을 당기거나 큰 소리로 사람들을 부를 테니까. 문을 여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으니 밖에서 들어온 사람도 아니고, 아마도 안에 계속 있던 자일 텐데 처음부터 지금까지 아무런 기척도 없이 조용히 기다리다 다가온 거라면 분명 레이븐만큼이나, 아니면 그 이상으로 기척을 죽이는데 익숙한 녀석이라는 얘기가 된다.
"너...너 뭐야?"
자기도 모르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 남자 치고는 묘하게 높은 목소리였지만 상대는 전혀 개의치 않는 것으로 보였다. "질문을 하는 건 네가 아냐. 나지." 역시 뒤에서는 기척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럴 수는 없다. 지금 레이븐의 목에 와 닿은 것이 정말 존재하는 칼날이라면 저 남자는 적어도 레이븐 바로 뒤에 서 있어야 한다. 자기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려는데 다시 한번 차가운 날붙이가 목 뒤에 꾹 눌렸다. 상처를 줄 정도의 움직임은 아니었지만 돌아보려던 고개를 얼어붙게 만드는 데에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난 이 방 어디서건 네 목을 날려버릴 수 있어. 내 말 이해했나?"
이해는 개뿔이! 당장에라도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레이븐은 피가 싸늘하게 식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음에도 간신히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그 와중에도 남자는 멀리서 이 쪽을 향해 얘기하고 있었다. 동료라도 있는 것일까? 어떻게 저렇게 먼 거리에 서서 바로 자신의 목 뒤에 칼날을 댈 수 있단 말인가?
"귀가 먼 건 아닐텐데. 시체로 발견되고 싶지 않다면 그대로 천천히 뒤돌아서도록. 아주 천천히."
거의 냉혹하게까지 들리는 목소리에는 어디의 것인지 모를 외국 액센트가 섞여 있다. 레이븐은 일단 남자의 말대로 최대한 진정하려 애쓰며 느리게 몸을 움직여 돌아섰다. 놈의 일행이 몇 명일지 몰라도, 어떻게든 이 위기를 무사히 모면해 볼 방법을 생각해 내야만 한다. 그리고 돌아선 순간 그녀는 가볍게 숨을 삼켰다.
"말해 봐. 넌 여기 뭘 찾으러 온 거지?"
레이븐은 그대로 입을 벌렸다가 아무 말도 못한 채 다시 꾹 다물었다. 등줄기에 새삼 소름이 돋는다. 그 자, 바로 로열 오페라 극장에서 찰스를 향해 칼을 던진 그 남자가 얼음장같이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오, 찰스!'
이번만큼은 그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이 후회되었다. 그렇게 마음 속으로 찰스를 애타게 부르던 레이븐의 얼굴이 새삼 파랗게 질렸다. 날카로운 칼날 때문도 아니었고, 무서운 기색으로 이 쪽을 노려보는 남자 때문도 아니었다. 정확히 말한다면, 레이븐의 목에 바짝 붙은 나이프가 남자의 손에 들려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마치 악령이라도 붙은 것처럼, 혹은 나이프 자체가 살아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 예리한 쇠붙이는 날을 번득이며 레이븐의 목 바로 밑에 둥둥 떠 있었다.
-계속
[단편] Greyhound series 2. 폭풍전야 (4) | 2011.07.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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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Greyhound series 1. 그를 지키는 이유 (4) | 2011.07.25 |
[단편/화이트폰] Returns (6) | 2011.07.18 |
[단편] checkmate 2 (0) | 2011.07.04 |
[단편] Checkmate (2) | 2011.07.02 |
"말도 안돼."
찰스는 질린 얼굴로 체스판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그 건너편에서, 에릭은 제법 오만해보이기까지 하는 미소를 띄우고 찰스를 바라보며 빈정거렸다.
"18전 15패. 찰스, 정말 고마워. 네 덕분에 난 그랜드마스터가 된 기분을 늘 맛보고 있거든."
"에릭, 경고하는데,"
"무슨 경고?"
찰스는 초조한 얼굴이 되어 입술을 물었다. 이럴때의 찰스는 심술궂은 고양이 같아서, 얄밉지만 대체 어떻게 할 수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당하기만 하기엔 찰스도 그간 쌓인 것이 제법 많았다.
"자꾸 그러면 자네 머릿속에 간섭해서 레이븐 옷을 훔쳐입고 테이블 위에서 캉캉춤을 추게 만들겠어."
"그 춤 스텝은 알아?"
"요는 다리만 번쩍 들면 돼. 행크가 좋아하겠네."
의외로 진지한 어조에 에릭의 얼굴에서 살짝 미소가 사라진다. 찰스는 어깨를 으쓱 하고는, '체스 말고 다른걸 좀 해 보지?' 하고 가볍게 말을 이었다. 그렇다. 어린 시절부터 남의 머리속을 드나들며 수많은 사람들을 이해하고 납득해 온 찰스 자비에라 해도 이 순간만은 그저 '어떻게든 상대를 한 번쯤 이기고 싶은 남자아이'에 불과했다. 어쩌랴, 그것이야말로 모든 '수컷'에게 자연스럽게 새겨져 있는 유전자의 명령인 것을.
"다른 거? 자네 다른 스포츠도 할 줄 알아?"
찰스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뿌듯함과 정색이 반반 섞여 있는 반짝이는 표정이었다. 주로 저런 표정이 될 때에는...
"그럼. 이래봬도 배워야 하는건 다 배웠어. 권투는 우리가 하긴 좀 무리 같지만 제법 하는 편이지. 테니스코트라면 정원 뒤쪽에 마련되어 있고 부지 내의 호수에서 수영을 해도 상관 없어. 달리기 트랙도 행크 덕에 마련되어 있고 사실은 펜싱 훈련실도 있지. 아버지가 좋아하셨거든."
"펜싱?"
"그리고 어디까지나 아버지 취미지만 지하 2층으로 내려가면 사격 훈련도 할 수 있다네."
"대체 자네 아버지라는 분은..."
"그런 걸로 그런 얘기 하지 마. 그나마 조부님이 너무 시켜서 지겹다고 승마는 제끼셨어. 일단 난 어머니와 살 때 기초 정도는 배우긴 했지만 말이야."
"말? 말이라고?"
"그래서, 어느걸 해 볼 텐가? 골라 보게, 난 뭐건 상관없거든."
그렇다. 바로 자기 자랑을 할 때다. 에릭은 어이없다는 표정이 되어 찰스를 바라보았다. 푸른 눈에 떠올라 있는 것은 명백한 자부심과 호승심.
좋아, 어떻게든 이겨 보겠다 이거지? 에릭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골라."
"아냐, 자네가 골라. 난..."
"그래, 그러면 간단하게 수영으로 하지."
"좋았어!"
에릭은 사람좋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친구. 어디 한번 해 보자고.
에릭은 양 팔을 허리에 얹고 이 쪽을 향해 헤엄쳐 오는 찰스를 감상했다. 샌님 치고는 제법 단련된 등과 허리가 볼만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샌님 티가 난다고밖에 할 수 없는 약간 펑퍼짐한 엉덩이가 꽤 귀여웠다. 그래, 뛰어나군. 하지만 책상물림들이야 어쩔 수 없지. 마침내 기슭에 도착한 찰스가 고개를 저으며 에릭에게 말한다.
"맙소사, 에릭 자네 수영 선수라도 했나?"
"아니, 그냥...필요에 따라 익혔지."
물결이 계속 움직이는 바다에서 닻을 움직이기 위해 팔을 휘두르면서도 떠 있을 수 있을 만큼 말이야. 에릭은 속으로만 그렇게 생각하고는, 한 손을 내밀어 수영복 차림의 찰스가 물 밖으로 완전히 올라오는 것을 도왔다. 역시 수영은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물방울이 햇빛을 보지 못해 지나치게 하얀 찰스의 속살을 훑으며 다시 호수로 돌아간다.
"그럼 이번엔 자네가 골라."
"...어?"
"이기고 싶어서 이러는 거 아니었어? 한 번은 내가 골랐으니 이젠 자네가 고르라구."
찰스의 얼굴에 곤혹스러운 표정이 떠오른다. 자신감 있게 웃고 있는 에릭의 얼굴을 보던 찰스가 '사격'을 골랐을 때, 에릭은 거의 폭소를 터트릴 뻔했다. 이 착한 친구야, 이기고 싶은 주제에 내가 아무것도 모를 법한 펜싱이나 승마는 건드리지도 않다니, 물러빠져도 이렇게 물러빠질 수가 있나.
하지만 굳이 그걸 지적할 필요는 느끼지 못했다는 점에서, 에릭 랜셔는 아무래도 이 상황을 자신이 즐기고 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능력 쓰지 마."
"마찬가지야. 원한다면 내 시각 쯤 조종할 수 있잖아."
"그래그래, 그럼 쏴 보자고."
에릭을 향한 권총은 쏘지 못하겠다고 한 주제에, 찰스의 라이플 사격 실력은 꽤 괜찮은 편이었다. 열 발 중 여덟 발 명중, 그중 다섯발이 9점이거나 10점이다. 아니, 이 정도면 꽤 훌륭하다. 그래, 어디까지나 아마추어로서 말이지. 에릭은 득의의 웃음을 지으며 조용히 표적을 겨눴다. 좋아, 남자의 자존심을 위해 세 발은 일부러 9점을 맞춰 주지.
"에릭."
"음?"
"나, 아주 솔직하게 한 마디만 해도 될까."
"안돼."
"......"
푸른 눈동자가 에릭의 눈을 노려본다. '내려다 본다'는 것이 이렇게 상쾌하고 기분좋은 일이라는 걸 만끽하며 에릭은 그 지나치게 푸른 눈동자를 느긋한 기분으로 응시했다.
"에릭!"
"그래, 말 해도 좋아."
'한 번이라도 좀 져 주면 안돼?' 라는 말을 할 작정이었고 실제 거의 입 밖으로 튀어나갈 뻔 했지만 찰스는 참았다. 참고 또 참았다. 그거야말로 패배를 인정하는 꼬마 떼쟁이의 말이 아니고 뭔가. 잠시 생각하던 찰스는 간신히 자신의 자존심과 그의 만족감이 한번에 충족될 수 있는 결론을 찾아내, 그것을 입에 담았다.
"그냥 체스 하자."
"좋아."
비죽이 걸린 웃음이 너무나 얄미웠지만, 이전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자네 정말 운동 잘 하는군, 굉장해."
"뭘 또."
사격장 문이 닫혔고, 그 뒤로 아주 오랫동안 열리지 않았다.
<끝>
솔직히 말하면 지루했다.
"자네, 이제 그만 포기하는게 어때?"
느긋한 웃음을 짓고 있는 에릭도 약간 진력난 듯 보였다.
"아냐, 한 판만 더 두자고."
"찰스."
"오늘 딱 한 판만 더."
'그래, 이게 오늘의 첫 '한 판만 더' 로군.' 에릭은 속으로만 고개를 내저었다. 이럴 때의 찰스는 놀아달라고 조르는 고집스런 강아지 같다. 이렇게 한 세판 정도 더 하고서야 물러서는 것이다. 평소에는 못 이기는 척 그러마고 했지만, 이번에는 어렵다 싶어 에릭은 살짝 장난스런 제안을 해 보기로 했다.
"그래? 그러면 좀 색다른 걸 해 보지 않겠어?"
"색다른 거?"
찰스의 푸른 눈이 이 쪽을 응시한다. 그 시선을 즐기며, 에릭은 차분히 말을 늘어놓았다.
"말 잡기 게임으로 해 보지."
"그게 뭔데."
"간단해. 봐, 체스에서 폰을 빼면 각 두 개 씩의 말이 있지? 킹과 퀸은 한 세트로 치고 말야."
찰스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중 하나를 고르는 거야. 그리고 먼저 그 말을 쓰러뜨리면..."
"쓰러뜨리면?"
에릭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자네, 설마 이 조건으로 게임을 하자고 하진 않겠지?
"옷을 하나 벗는 거지."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이 쪽을 탐색하듯 눈을 가느다랗게 뜬 찰스가 자신의 마음을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간의 관찰과 경험을 통해, 에릭은 찰스가 머리에 손을 대지 않고도 남의 마음을 읽는 정도는 쉽게 해낸다는 걸 알았다. 그렇다면, 지금 에릭이 이런 제안을 하는 이유도 잘 알겠지.
"어때?"
'설마 하진 않겠지? 누가 옷을 벗게 될지 뻔한데.' 하지만 에릭의 예상은 빗나갔다. 찰스는 아주 잠깐 미간을 찌푸리며 고민했을 뿐, 곧 쾌활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 뭐."
"찰스-"
"그거 핑계로 안 하려는 거잖아. 안 통해."
아니, 아무리 24세라고는 해도 '교수' 아닌가? 파티에서 눈 맞은 커플이나 할 법한 제안을 두고 새로운 룰이 더 재미있겠다며 눈을 반짝이고 있는 건 대체 뭔가. '대체 미국인들이란.' 에릭은 애시당초 그런 망측한 제안을 한 것이 자신이라는 사실 따위는 까맣게 잊고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럼 자네가 먼저 골라."
찰스는 화사하게 웃으며 당당히 말했다.
"킹."
...이럴 줄 알았다.
[중편] Case of Mercury 5 (4) | 2011.07.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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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화이트폰] Returns (6) | 2011.07.18 |
[단편] Checkmate (2) | 2011.07.02 |
[중편] Case of Mercury 4 (8) | 2011.07.01 |
[단편] 악몽 (0) | 2011.06.29 |
뜻밖의 말에 찰스는 놀란 눈으로 한동안 쇼우를 빤히 바라보았다. 머리를 읽지 않는다 해도 이 남자가 진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만 그 표정 어딘가에는 기묘하게 일그러진 듯한 구석이 있었지만, 그것까지 파악하고 감지해내기엔 지금 던져진 말의 충격이 너무 컸다.
"아들이요?"
"물론 친아들은 아니오. 허나 나는 그의 모친을 알고 있지. 흠, 알고 있다고 말하기는 애매하군,"
그는 잠시 고개를 외로 숙이고 눈을 내리떴다. 고개를 흔들고 혀를 차더니 다시 찰스와 눈을 맞추며 말을 잇는다.
"좀 긴 얘기가 될 거요. 하지만 숨김없이 이야기하고 싶군, 들어주겠소?"
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칼을 던진 자에 대한 정보가 아무것도 없는 마당이니 그나마 쇼우가 던져주는 이야기를 들어볼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그 이야기 속에 얼마나 진실과 거짓이 숨어있는가는 이제부터 탐색해 나가야 할 것이었다.
"혹시 뒤셀도르프에 가본 적 있소?"
고개를 저었다. 브랜디를 한 모금 더 마신 세바스찬 쇼우는, 옛 일을 떠올리기 위함인지 어딘가 먼 곳을 보는 시선이 되어 얘기를 시작했다.
"전반적으로 나쁘지 않은 도시요. 독일인들이 늘 그렇듯 쓸데없이 반듯하고 정돈이 잘 되어 있지. 하지만 그래 봐야 사람들이 늘 북적거리기 때문에 소란스럽고 지저분하기는 런던과 별반 다를 것도 없다오. 빈민들이 사는 곳이 있고 부자들이 사는 곳이 있는 건 어디나 마찬가지지. 다만 나는 그런 곳에서도 꽃이 필 수 있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소.
꽃이라고 하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군. 간단하오, 아주 특별한 재능을 두고 얘기하는 거요. 마치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한 그런 표정 짓지 마시오. 당신은 그게 무슨 말인지 알고 있고, 나 또한 알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을 거요. 분명 나는 당신이 얼마든지 내 머리를 헤집어도 좋다고 말했지 않소. 그 선언을 철회할 생각은 없으니 부디 원하는 대로 하시오.
어쨌건 각설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지. 찰스 프란시스 자비에 군, 당신과 같이 독특한 힘을 가진 자들이 당신 하나일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게 좋다는 얘기요. 나는 오래 전부터 그런 사람들을 보아왔고 또한 찾아 헤매왔소. 그들의 힘은 실로 말할 수 없이 다양하지. 어떤 사람은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비밀을 알아낼 수 있소. 또 어떤 사람은 원하는 곳에 눈 깜빡하는 사이 도달할 수 있지. 하늘을 날 수 있는 자, 심지어, 만일 미신에 빠진 이들이 본다면 악마라고 부를 법한 힘을 가진 자도 있소.
지금 당장 의자에서 일어나지 않는 것을 보니 꽤 담이 센 사내거나 혹은 내 말을 제대로 인정할 모양이군. 마음에 드는 태도요. 그렇소. 나는 그런 이들을 계속 찾아다녀 온 것이오. 독일부터 시작해서 폴란드, 헝가리, 러시아에서 프랑스를 거쳐 여기까지 왔지. 나중에 당신이 원한다면 그 결과 날 돕게 된 이들을 소개시켜 줄 수도 있소.
각설하고, 내가 그런 이들을 찾는 이유는 매우 간단하오. 아까 '꽃'이라고 말했지요? 그들은 모두 위대한 선물을 받은 자들이오. 자연에게서, 혹은 신에게서, 인간이 뭐라고 부르건 상관없는 어떤 절대적 존재 - 절대적 우연이라고 불러도 좋소! - 에서
그 힘을 받고 태어난 거요. 그것은 바로 증거요, 자비에 군,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증거. 그들이야말로 미래의 인간인 거요. 주위를 둘러보시오. 기술, 과학, 모든 세상이 발전을 향해 달려가고 있지. 인간이라고 아닐 것 같소? 전기처럼, 기관차처럼, 인간들도 바로 이 시대처럼 새로운 단계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는 거요. 당신도 그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지.
허나 모든 이들이 당신처럼 운이 좋지는 못하오. 온 유럽을 돌며 내가 살펴본 바, 특별한 힘을 가진 이들, 재능을 가진 이들의 가문, 혈통은 전혀 일정치 않소. 그들은 극도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기도 하고, 기괴한 외모 때문에 놀라운 힘을 갖고 있으면서도 버려지기도 하지. 적어도 내가 찾아낸 '악마의 아이'중 둘은 분명 그런 '선물'을 받은 아이들이었다오. 슬프게도 하필이면 겨울날 태어나는 바람에 얼어죽은 시체만 보았을 뿐이오. 이해할 수 있겠소? 만일 목숨만 붙어 있었으면 무엇을 해냈을지 모르는 미래의 가능성들이 그런 식으로 무지와 미개에 물든 인류에게 죽어가야 했던 거요.
표정을 보니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이해한 것 같군. 좋소, 나는 바로 그러한 아이들을 - 때로는 어른들을 찾아 전 유럽을 돌아다닌 거요. 다행히도 나는 돈이 많소. 이런 저택을 사는 것쯤 말편자 가는 일과 별반 다를 것도 없을 정도로는 있지. 그리고 나는 그런 이들을 기꺼이 돕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소. 아직 매우 적은 수밖에 만나지 못했지만 - 적어도 내가 만난 이들은 모두 내 보호를 받아들였지. 나는 그들을 기꺼이 보호하며, 동시에 그네들의 재능을 제대로 꽃피워 주기 위해 뭐든지 하고 있소.
서론이 길어서 정말 미안하고. 이제는...그렇소. 에릭에 대한 얘기를 해야지. 그 불행한 아이에 대해 얘기하기 전, 브랜디를 한잔 더 따라야겠소. 그렇지 않고서는 얘기하기 힘든 일이지.
에릭 렌셔, 그 아이는 뒤셀도르프 뒷골목에서 살고 있었소. 천출에 빈민이긴 했지만 부모가 없었던 것은 아니오. 처음 만났을 때에는 없는 줄 알았지만, 사실은 있더군. 내가 그 아이를 처음 만나게 된 것은 그저 신의 보살핌이라고밖에는 할 수 없는 사건 때문이었소. 당시 나는 사업 관계로 뒤셀도르프에 머물고 있던 참이었는데,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도시였지만 별로 정착할 필요성을 따로 느끼지 못해 깔끔한 호텔을 골라 묵고 있었소. 그런 호텔에는 당신도 아시다시피 수많은 고용인들이 각종 일을 하며 돌아다니곤 하지. 호텔들은 아마 나름 그들의 평판에 대해 신경을 쓰고 있을 거요. 추천장이라던가 평판을 반드시 확인하겠지. 하지만 아마 거기에 약간 구멍이 있었던 모양이오. 손님 중 몇이 귀중품을 도둑맞았으니.
잘 알겠지만 그럴 경우 물론 기본적으로는 외부의 도둑을 생각하지만... 당연히 내부에서도 용의자를 찾게 되오. 뚜렷한 목격자가 없다면 그들이 누명을 쓰는 경우도 있을 수 있고. 이 경우엔, 청소를 맡은 여급 중 하나에게 혐의가 쏠렸다고 하더군. 솔직히 말해 그녀가 범인인지 아닌지까진 알 수 없소. 어쨌건 그녀는 순순히 그 곳에서 쫓겨나거나 체포될 생각 따위 없었던 모양이오. 아직도 그 천박한 여자의 째진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군. 그녀는 힘껏 외쳤지. '그 녀석이야. 객실에 계속 들락거린다고! 난 알아, 그녀석은 마법을 부려. 어떤 걸쇠건 다 망가뜨려 버린다고!' 솔직히 그 내용을 들은 이상 그 곳에서 계속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게 되더군.
그 질문대로요. 그 아이가 바로 에릭이오. 키는 좀 큰 편이었지만 아주 소심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빳빳이 들고 서 있었는데, 내가 들여다 본 것은 그 아이의 눈이었소.
자, 여기서 한번 간단히 질문해 보겠소. 만일 당신이 이 아이와 같은 처지에 속했다면 어떤 눈을 할 것 같소? 단순히 도둑 누명을 쓴 것이 아니라, '어떤 걸쇠건 다 망가뜨리는 사람'으로 몰리고 있소. 그것이 만일 당신이 꿈에서조차 상상도 못 했던 그런 힘이라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짓고 그 누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겠소? 분명 당황하겠지. 매우 크게 당황해서 어떻게든 변명을 하기 위해 애쓸거요. 그렇소, 그것이 일반적으로 누명을 쓴 사람들의 행동이오. 허나 그 아이는 달랐지. 그 눈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차갑기 그지없는 경멸 뿐이었소. 침착하게 눈앞의 여자를 노려보던 그 아이는 마침내 말할 기회가 주어지자 짧게 말했지. 내 귀여운 에릭은 그 때부터 대단한 녀석이었다오.
'제가 안 훔쳤어요. 아주머니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걸쇠가 망가진 적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저 때문은 아니예요."
일체의 중언부언도 횡설수설도 없었소. 아이는 딱 거기까지만 말하고 입을 다물어 버리더군. 얼음장같은 눈으로 고집스럽게 눈앞에서 마구잡이로 떠드는 그 천박한 계집을 노려볼 뿐이었소. 솔직히 말해서 그 아이가 겁을 먹지 않은 건 아니었다고 생각하오. 꾹 다문 입에 불안한 기색이 있었으니까 말이지. 약간 떨고 있기까지 했소. 하지만 그래도 고작해야 열 서넛 정도밖에 안된 소년이 그런 상황에서 그 정도로 당당하다는 건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니겠소.
하지만 호텔 지배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오. 경찰을 부르면서 그 무능한 자는 소년을 도둑놈으로 취급하더군. 난 더이상 그 사태를 두고볼 수 없었소. 그래서 호텔 지배인에게 명령해 그 소년을 내게 데려오도록 했지.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는지는 묻지 마시오. 이제껏 사업을 해 오면서 쌓은 비법의 일환이라고 설명해 두지.
어쨌건 그러한 절차를 거쳐 나는 에릭을 간신히 만나볼 수 있었소. 몇가지 테스트를 거쳐 나는 그 아이의 '힘'이 금속을 움직이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지. 그건 정말 믿을 수 없는 기분이었소.
지금 내 말에 크게 놀란 것 같군. 그렇소. 에릭 렌셔는 바로 금속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자요. 그래서 그가 '던진' 단도가 로열 오페라 하우스의 벽을 거의 뚫어버릴 수 있었던 거요. 난 아직도 내 눈앞에서 쇠 공을 들어올리던 그 아이를 기억한다오. 그 아이와 함께 한 날들은 하루 하루가 모두 새로운 기쁨이었지. 물론 나는 다른 '아이들'을 길러내기도 했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기도 했소. 그들은 모두 제 나름의 유니크한 힘을 가지고 있었소. 하지만 에릭은 - 그 아이는 정말 특별했소. 그 아이는 마치 - 강해지는 것에 중독된 것 같았지.
처음엔 자신의 힘을 믿지 못하는 눈치였소. 그도 그럴 것이 그 아이의 부모는 그저 평범한 빈민이었으니까 말이오. 유태인들이었는데, 자식을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자들에게서 나의 에릭이 태어났다는 것 자체가 이해가 안 가는 그런 자들이었지. 하지만, 뭐 생각해 보면 거의 이천년 전에도 이 비슷한 일이 일어났던 것 같긴 하니까 넘어가도 될 것 같소. 유태인이란 쓸데없이 오만하고 너저분한 족속이지만 가끔 대단한 것을 내놓는단 말이지. 아무튼 좀더 흥미로운 주제로 넘아갑시다. 그 아이에게 금속이란 그저 가끔 이상해지는 사물에 불과했소. 가끔 구겨지고, 휘고, 고장나는 것 말이오. 나는 냉정하게 조사했고 - 그래서 그것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확증해냈지.
어쨌건 좀더 재미있는 부분으로 들어갑시다. 그 해쯤 뒤셀도르프에서 에릭은 부모님을 잃었고, 나는 그 아이를 거두었소. 에릭에게는 몹시 미안한 얘기지만 그 아이는 족쇄에서 해방된 셈이었지. 그 후로 9년간 - 나는 그 아이를 아끼지 않고 후원하고 도왔소. 내가 만일 평범한 인간의 아이를 그 정도로 후원했다면 지금쯤 그 아이는 대학을 졸업하고 자신이 가진 모든 힘을 동원해 내 일을 돕고 있었을 거요. 사실은 내가 에릭에게 원한 것도 바로 그런 거였지. 내 아들, 난 그 아이를 거의 내 후계자로 삼을 생각이었소.
미안하오, 내가 잠시 감정적이 된 것 같군. 사실 난 에릭이 언제부터 그렇게 뒤틀리게 됐는지 알 수가 없소. 그 아이는 지나치게 과거에 집착했는데 아마도 그것이 문제였던 것 같기도 하오. 처음에는 그저 약간의 향수병 같은 것이었다고 믿었지. 그 별볼일 없는 부모, 그리고 그럭저럭 괜찮았던 그 뒤셀도르프에 대한 향수 말이오. 하지만 슬프게도 에릭은 지나치게 증오심을 키워가더군. 뭐라고 딱 말할 수는 없지만 그는 아마도 과거의 자신에 대한 비틀린 집착을 갖고 있었음에 틀림없소. 빈민이었을 때 그를 위협하고 그의 힘, 그가 가졌어야 했을 지위에 어울리지 않는 대접을 했던 모든 것에 말이지. 그리고 슬프게도, 그 정점에 내가 있었소.
나도 이해가 잘 가지 않소. 왜 그 아이는 그렇게 과거에 집착하는 것인지... 그리고 왜 나를 증오하는지 말이오. 세간에 자랑할 생각은 없지만 누구에게도 당당히 말할 수 있소. 나는 그 아이의 아버지나 다름없고, 지금도 그 아이를 사랑하고 있다고. 그리고 그 아이를 그 너저분한 구석에서 구해와 당당한 능력자로 키워낸 것이 바로 나요. 아마도 극장에 숨겨 들어가느라 작은 단도를 골랐겠지만, 사실 그 아이는 달리는 마차의 축 정도도 간단히 부러뜨릴 수 있고, 총을 들이댄다 해도 산산히 부숴버릴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다오. 아마 그의 힘이 더 강해졌다면 대포도 그 앞에서는 아마 무용지물일 거요.
알겠소? 그럼에도 그 아이는 나에게, 이 아비에게 칼을 겨눈 거요. 아마도 그의 뒤틀린 과거가 그 정신을 아직까지 어지럽게 만드는 것 같소. 그렇소, 내 애정과 헌신을 족쇄로 생각하고 오히려 날 증오하는 거지. 나는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었는지 아직도 알 수가 없소. 내가 그 아이에게 잘못한게 없다고는 생각지 않지만, 적어도 그 모든 일이 바로 에릭을 위한 일이었다는 걸 그 아이도 분명히 알고 있으니까 말이지.
난 진실로 그 아이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했소. 부모의 추억을 떨치도록 하기 위해 독일을 떠나서 비엔나로 갔지. 비엔나에서 스위스, 네덜란드에서 프랑스로, 내가 어딜 가건 난 늘 내 어린 에릭을 데리고 다녔소. 그 아이가 당당한 청년으로 성장하기까지 모든 정성을 다 쏟았지.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아이의 뒤틀려 버린 마음은 계속 과거만을 바라보고 있었던 거요. 뒤셀도르프에서 부유한 사람들의 잔심부름을 하며 겪었던 굴욕적인 기억들, 가난, 억울함, 분노, 부모의 죽음...
빠리에서 우리는 헤어졌소. 사실 그건 헤어졌다고 말하긴 좀 그렇군, 정확히 말한다면 그 아이가 갑자기 사라져 버린 거요. 상상이 가시오? 어느날 아침 호텔 밖으로 걸어나간 아들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심정을? 다른 모든 것은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그 곳에 꼭 있어야 할 아들이 없는 거요. 물론 아무리 격려하고 이끌어도 결국 원점으로 돌아가 버리는 그 아이에게 나도 지치긴 했지. 하지만 나는 그래도 믿고 기다렸소. 두 달이나 빠리의 별장에서 그를 기다렸지. 그리고 돌아온 것이 뭔지 아시오? 바로 나를 향한 살해 기도였소. 내가 키운 아들이 나에게 칼을 들이대더군. 엠마가 막아주지 않았다면 나는 내 아들의 손에 죽었을 거요. 보아서 알겠지만 그녀도 그녀만의 힘을 가지고 있지. 내 아들과는 전혀 다른 힘이긴 하지만.
어쨌건 나는 깊은 비탄에 빠졌소. 굳이 수렁에서 건져놨더니 배신당했다는 식으로 너저분한 불평을 늘어놓을 생각은 없소. 하지만 그는 내 아들이고, 감히 말하건대 내 걸작이오. 그가 내게서 멀어진 것만 해도 가슴이 아픈데 그 칼끝이 날 겨눈다고 생각해 보시오. 그 오페라 극장에서도 그는 바로 내 목숨을 노리고 극장에 들어왔지만, 그의 광기는 바로 당신 덕분에 실패로 돌아갔소. 그 때문에 당신까지 그 광기의 표적이 된 건 아닌지 걱정되지만, 당신이 내 생명의 은인이나 마찬가지인 셈이오. 그래서 이 곳에 이렇게 초대하게 된 거요. 당신이라면 이 모든 일에 대해 알 자격이 있으니까. 그리고, 만일 그가 당신까지 표적으로 삼는다면 그것은 내 책임이기도 하니 이 일에 대해 알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소.
무언가 묻고 싶은 표정이군. 어떤 질문을 해도 좋지만 이것만은 알아두시오. 나는 당신을 보호해 드리고 싶소이다. 무슨 말인가 하겠지만 진심이오. 그 아이는 아주 집요한 성격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당신에게 해를 끼칠 거요. 그래서 나는 이 일에 대해 당신에게 알리고 제안을 할 생각을 하고 있었소. 그 제안에 대해서는 질문을 받은 다음 얘기하도록 하지."
어느새 브랜디 잔은 완전히 비어 있었고, 쇼우는 자연스럽게 유리장으로 다가가 크리스털 병을 꺼내 한 잔을 더 따랐다.
"제게도 한 잔 주시죠."
아까는 거절했었지만, 지금 막 알게 된 이 의외의 사실들을 제대로 정리해 보기 위해 한 모금 정도의 브랜디는 꼭 필요했다. 고개를 끄덕인 쇼우의 손에서 브랜디 잔을 받은 찰스는 잠시 연갈색 액체를 응시하다가 천천히 한 모금을 입에 머금었다. 타는 듯한 술기운이 목을 씻어내려가는 동안 그는 지금까지 들은 이 믿지 못할 이야기들이 충격적인 건지, 아니면 그가 쇼우에게서 어떤 거짓도 감지하지 못한 것이 충격적인 건지 잠시 고민했다.
그렇다. 생각을 모두 읽어내는 것까지는 무리였지만 눈앞의 남자가 말한 것은 적어도 이 남자에게 있어 진실이었다. '에릭'이라는 이름을 언급할때 보이는 애정 또한, 그의 빈민 부모에 대해 얘기할 때 떠올랐던 희미한 경멸감과 조소만큼이나 진실했다. 다만 그의 진술에는 어딘가 모호한 데가 있었는데, 지금으로서는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 감별해내기는 어려웠다.
"별로 크게 질문할 것은 없습니다만, 그럼 그가 왜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당신을 죽이려 하는지에 대해 짐작가시는 것이 없다는 말씀입니까?"
"방금 말한 것이 전부요. 나는 성의를 다 했고, 그는 그 성의를 증오스러워하지."
"이렇게 말하면 무례하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지만, 그것만으로는 도저히 그 살의가."
"바로 그 말을 나도 하고 싶소. 인정하고 싶지 않소만 내 아들이 미치기라도 한 것은 아닐까 걱정하고 있지."
찰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것은 뭔가 이상했다. 명백한 '거짓'은 아니었지만 쇼우는 그에게 모든 것을 밝히고 있지는 않다. 무언가를 알고 있으면서도 교묘한 화술로 숨기고 있다는 인상이 강했다. 정신의 손을 좀더 뻗어보려고 했지만, 아까부터 이 남자의 심중을 들여다 보려고 할 때마다 기묘한 뭔가가 거슬렸다. 무엇이라고 딱 집을 수 없었지만, 꼭 불에 그을린 유리창을 통해 실내를 들여다보는 듯한 탁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가볍게 한숨을 쉬며 찰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들며 입을 열었다. 지금으로서는 이 말밖에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제게 제안하실 일이 무엇인지요."
쇼우의 얼굴에 다시 한번 미소가 퍼졌다.
"당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오. 지금 이 시점에서는."
"저만이?"
쇼우가 천천히 몸을 수그린다. 속을 도무지 알 수 없는 푸른 눈동자가 찰스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금 딱딱하게 끊어가며 한 마디 한 마디 정확하게 이야기했다. 마치 이 말만은 절대 잘못 알아듣거나, 잊어서는 안된다는 듯, 그 말을 찰스의 정신에 새겨 넣으려는 듯.
"에릭을 붙잡아주시오. 그리고 나에게 데려다 주시오."
- 계속
[단편] checkmate 2 (0) | 2011.07.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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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여자, 분장이 너무 우스워."
붉은 빌로드로 둘러싸인 특석에 앉아서 하는 말 치고는, 런던 최고의 가수들에게 매우 미안해지는 얘기다. 하지만 잠시 무대 위에서 비올레따를 열연하던 후덕한 몸매의 여배우를 응시한 찰스는 간신히 웃음을 참으며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찰스?"
"미안, 네 말이 맞아 레이븐. 아마 그녀도 그렇게 생각할 걸. 근데 말이야..."
"응?"
"불쌍하니까 좀 반응해 줘, 건너편에서 널 뚫어지게 바라보는 사람이 있으니."
확실히, 붉은 빌로드로 둘러싸이다시피 한 오페라 하우스 특석에서 물색 드레스를 입은 아름다운 금발의 아가씨란 눈에 확 띄는 존재다. 건너편 특석을 잠시 바라보던 레이븐은 상대를 향해 살짝 웃어준 다음 '잘 했어?' 라고 물어보는 듯한 시선을 찰스에게 던졌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찰스는 다시 베르디의 선율에 빠져들기 위해 노력했다. '과연 진정한 사랑이 내게 불행이 될까, 불안한 내 영혼아 난 어쩌면 좋을까...'
"어때, 이 정도면 이제 와인도..."
"안돼."
물론 레이븐이 가만두지 않았지만. 비올레따가 알프레도의 구애에 대해 고민을 하거나 말거나, 이 열정적이고 맹랑한 소녀는 결코 원하는 것을 포기하려 들지 않는다. 단칼에 음주를 거부당한 레이븐은 아니나다를까 갈색 눈동자에 불을 켜고 찰스를 추궁했다.
"왜 그래, 찰스. 날 사교계의 레이디로 만들어 준다면서?"
"그거라면 걱정 마. 이미 만들고 있잖아.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 네가 내 사촌인 줄 알아."
"그럼 사교계에 들어온 건데 왜 와인은 안 되는 거야?"
찰스는 무대 위에서 우아한 몸짓과 노래로 이제껏 몰랐던 순수한 사랑의 기쁨에 대한 두려움을 연기하는 비올레따에게 마음 속으로만 사과하며 옆자리의 소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2년."
"오, 찰스-"
"18세 되는 생일날 최고의 부르고뉴 와인을 선물해 줄게. 그때까지만 참아주면 안될까?"
어쩔 수 없다는 듯 뾰로통한 얼굴이 되는 레이븐에게 찰스는 다정한 위로의 미소를 건넸다. 그의 가문, 르네상스 이전 시대부터 영국으로 건너와 자리잡은 자비에 가는 갓 열 여섯이 된 아가씨가 런던 사교계에 진출하기 위해 필요한 재력과 훌륭한 평판과 깊은 인맥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찰스 또한 이튼 칼리지에서 옥스퍼드 뉴 칼리지로 지금 막 성공적인 안착을 한 상태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고작 열여섯에 불과한 아가씨에게 사석에서 와인을 마시도록 쉽게 허락할 수는 없다. 특히,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더더욱.
"하지만-"
"미안해, 하지만 바첼러가 데뷔탄트에게 대뜸 와인을 마시게 하다니, 무리야 레이븐."
"알겠어."
말은 그렇게 했어도 레이븐의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하다.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바람에, 굳이 그 마음을 읽으려고 시도할 필요조차 없다. 뾰로통해진 얼굴을 바라보며 찰스는 속으로만 웃음을 참았다. 날이면 날마다 변덕이 죽 끓듯 하고 이것저것 관심사가 자주 바뀌면서도, 가끔 한 가지에 집착하면 못말리게 관심을 보이며 계속 그것 주위를 맴도는 그녀는 귀엽지만 꼭 그만큼 위험한 고양이 같았다.
고요히 흐르던 아리아의 분위기가 바뀌어 마침내 명랑한 반주가 흘러나오고, 아름다운 비올레따는 얼굴을 빛내며 노래했다. '난 항상 자유롭게, 기쁨을 쫓아 날아다니고 싶어!' 레이븐에게는 좀 실례되는 말이겠지만, 적어도 이 점에서 무대 위의 비올레따와 레이븐은 꼭 자매처럼 닮아 보인다고 생각하며 찰스는 레이븐의 기분을 풀어주기로 결심하고 입을 열었다.
"약속해. 네가 18세가 되는 날 아예 파리로 가서-"
"파리? 정말?"
찰스는 상냥하게 웃었다. 역시 통했다.
"그래, 파리에 가서 최고의 부르고뉴 와인을 따자."
"부띠끄에 데려가 줄 거야?"
"물론이지, 사랑스러운 여동생을 위해 그 정도를 못해줄까?"
순식간에 파리를 상상하고는 행복에 빠진 소녀의 얼굴이 밝게 빛났다. 좋아, 이제 그녀는 당분간 와인을 달라고 조르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은 파리로 갈지 니스로 갈지 아직 완전히 결정한 상태는 아닌었지만, 그녀의 반응을 보니 이 김에 파리로 결정해도 나쁘지는 않을 듯 싶어 찰스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레이븐이라면 바다보다는 도시를 더 사랑할 거야.
"흠, 찰스, 저 남자는 누구야?"
고급 레이스 장갑에 감싸인 손으로 직접 가리키려다, 찰스의 시선에 부채를 들어 얌전히 눈을 내리깔고는 부채 끝으로 살짝 방향을 가리킨다.
"어느 남자?"
"저기, 무대 옆에 남자가 하나 서 있어. 배우는 아닌 것 같은데?"
레이븐의 말대로였다. 아마 정면에 앉은 관객들 눈에는 거의 보이지 않겠지만, 벽 옆에 빗겨붙은 특석에서는 분명히 보였다. 분장도 없고, 옷을 보아도 배우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보다는 오히려 무대 장치 등을 손보는 잡역부인 듯 싶었다.
"글쎄, 무대 장치에 이상이라도 있는 걸까?"
대충 넘어가려고 했지만 매사에 호기심 많은 레이븐이 이런 일을 놓칠 리 없다. 금새 오페라 글라스를 들어 자세히 살펴보던 그녀는 금새 탄성을 질렀다.
"세상에! 저 남자 지금 품에서 뭔가 꺼내 들었어. 칼이야!"
찰스는 허리를 바로 세우며 특석 테라스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그대로 손을 들어 관자놀이에 얹고 정신을 집중한다. 레이븐이 가리킨 남자에게 의식을 집중한 순간 그가 느끼고 있는 것이 찌르는 듯한 살의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누구를 향한 것인지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남자는 관객석 쪽을 바라보면서 들고 있는 무언가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레이븐의 말대로라면 분명 칼일 것이다.
"찰스!"
"잠시만, 이 사람 누군가를 죽일 생각이야. 막아야겠어!"
레이븐이 비명을 지르려다 참으며 장갑 낀 양손으로 입을 막았다. 찰스는 과연 저 거리까지 자신의 '힘'이 가 닿을까 의심스러웠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남자를 향해 의식으로 외쳤다.
- 그만둬!
천천히 손을 올리던 남자가 동작을 멈췄다. 먼 거리라 표정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급작스럽게 움직임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는 것을 보니 놀란 기색이 뚜렷했다. 얼른 오페라글래스를 든 레이븐이 남자가 어떻게 하고 있는지 찰스에게 말해주었다.
"표정 보니 엄청나게 놀란 것 같아. 하지만 칼은 계속 들고 있어."
- 당장 그만둬.
찰스는 다시 한번 강력한 명령을 내렸다. 이런다고 상대가 살인을 포기해 줄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머리 속에서 누군가 말을 해 온다는 것은 일반적인 인간이라면 경천동지할 일일 것이다. 분명 그런 듯, 그는 들고 있던 것을 다시 품 속에 넣었지만 그 자리에서 물러나지는 않고 있었다. 찰스는 잠시 망설이다가, 약간 허풍을 치기로 결심했다.
- 여기서 돌아가지 않으면 아주 아픈 꼴을 당하게 될 거야.
옆에서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지만 주의를 돌릴 수가 없었다. 남자를 노려보고 있는데, 옆자리에서 레이븐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찰스...조심해, 저 남자 날 보고 있었어!"
그와 함께 잠시 희미해 졌던 상대의 살의가 더 치열해졌다. 남자의 감정과 의지는 너무 강렬해서, 찰스는 이제 그 남자가 레이븐 옆자리의 자신을 발견했다는 것, 그래서 찰스 쪽을 노려보며 살의를 불태우고 있다는 것까지 깨달을 수 있었다. 무대에서는 비올레따의 화려한 아리아가 거의 끝을 맺어가고 있었고, 사랑을 갈구하는 청년의 먼 목소리에도 흔들리지 않고 현세의 쾌락을 추구하겠다는 그녀의 선언이 절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지금은 날 보고 있어, 레이븐."
"어떻게 하지? 사람들을 부를까?"
찰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레이븐 이 거리까지는 어떻게 할 수가 없을 거야."
드디어 비올레따가 노래를 마쳤고, 사람들은 일어서며 박수 갈채를 날리기 시작했다.
"찰스!"
무언가가 무서운 속도로 날아왔다. 찰스보다 훨씬 반사신경이 뛰어난 레이븐이 찰스를 밀치지 않았다면 그는 죽었을 것이다. 돌아보니, 붉은 빌로드로 감싸인 로얄석의 벽에 단도가 박혀 있었다.
레이븐이 비명을 질렀고, 박수 갈채를 날리던 극장의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로열석 쪽을 바라보았다. 바닥에 쓰러졌던 찰스는 간신히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돌려 무대 쪽을 바라보았지만, 아까까지만 해도 남자가 서 있던 그 자리는 텅 비어 있을 뿐이었다. 흔들리는 커튼만이 방금 전까지 누군가 거기 서 있었고 지금 막 자리를 떴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난, 난 괜찮아 레이븐."
아직도 떨리고 있는 소녀의 어깨를 감싸안은 찰스는 공연이 끝났음을 깨달았다. 갈채를 보내려던 사람들은 난데없는 비명소리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고, 로얄 석 바깥쪽에 있던 하녀와 급사가 들어와 벽에 박힌 단도를 보고는 기겁을 했다. 단단한 목대로 마감된 벽에 푹 박혀들어간 단도를 바라보며 찰스는 등 뒤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깨달았다.
어떻게 그 먼 거리에서 이렇게 칼을 던질 수 있단 말인가?
오페라 극장의 소동은 재빨리 사람들 사이로 퍼져나갔다. 로열 오페라 하우스라는 사건 장소부터가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할 만 한 데다 비명을 지른 것이 아름다운 금발의 소녀라는 점, 그리고 아마도 매우 흉악할 것으로 짐작되는 악당이 던진 단도가 인간이 던진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힘으로 인해 벽 한가운데 푹 박혀 있었다는 것은 실로 호사가들의 구미를 돋우기 적당한 화젯거리였던 것이다. 게다가 그 목표는 누군가, 메이페어 가에 대저택을 소유하고 있는 자비에 가의 상속자다. 입에서 입으로 소문이 퍼지면서, 사람들은 당연히 오랜 원한, 혹은 재산을 노린 청부살인으로 생각하고 호기심 어린 시선을 찰스와 레이븐에게 던졌다.
"이것 봐, 찰스. 초대장이 평소에 비해 세 배는 되는 것 같아."
"온 런던이 우릴 기다리는 건 확실하군."
그 결과가 이것이다. 레이븐이 집사에게서 받아온 바구니 안에는 초대장이 수북히 쌓여 있었고, 고급지로 된 봉투 안에는 각종 야유회, 바자회, 티 파티, 산책, 뱃놀이, 사냥, 여행, 클럽 모임, 조찬, 만찬, 파티, 크로켓, 체스, 어쨌건 영국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모임의 초대장이 들어 있었다. 하나같이 우아한 필치에 격식있는 어조로 정중한 요청을 하고 있었지만, 그 상냥한 쪽지들이 담고 있는 핵심 내용은 모두 똑같은 것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와서 들려주세요. 듣고 싶어요.'
"맙소사, 이 모임에 다 참가하려면 몸이 다섯개라도 안되겠다."
달콤한 분홍색 마분지로 된 초대장을 들여다보던 레이븐이 지친 듯 고개를 저었고, 찰스는 그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대부분은 그저 우리 얘기를 듣고 싶은 것 뿐이니 잘 골라보면 하나만 가도 한 다섯개 모임은 취소시킬 수 있을걸."
"그래서, 이런데 갈 거야?"
레이븐의 질문에 찰스는 고개를 저으며 유쾌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럴 리가! 차라리 이 초대장을 보낸 사람들을 강의실에 몰아넣고 내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한 시간 동안 강의를 하고 말지."
그러는 와중에도 빈틈없이 초대장을 체크하고 답장을 보내야 하는 것들은 펜으로 표시를 남기고 옆에 밀어놓는다. 사소한 클럽 모임이나 야유회 등에는 굳지 답장을 보내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자비에 가와 친분이 있는 사람들의 초대장에는 직접 답장을 하지 않으면 실례가 되니까, 이렇게 표시를 해 둔 다음 나중에 찬찬히 답장을 쓸 생각인 것이다. 붉은 비단 쿠션을 댄 의자에 기대앉아 찰스가 하는 양을 유심히 보고 있던 레이븐이 문득 생각났는지 말을 걸어온다.
"하지만 괜히 안 가면 싫어하지 않아?"
"사실은 그렇지, 그래서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레이븐의 얼굴이 호기심에 가득 찬다.
"우리 가문 평판의 안녕을 위해, 넌 잠시 앓아누워 줘야겠어."
그리고 일그러진다. 찰스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힘, 마음을 읽는 능력 덕에 고개를 들지 않아도 지금 레이븐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정도는 알 수 있다.극장에서 본 남자처럼 강력한 의지를 지니지 않는 한 대체 무엇을 생각하는지 구체적으로는 알기 어려웠지만, 이렇게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사람의 감정 정도는 아주 쉽게 읽을 수 있었다.
"왜 꼭 그래야 하는데?"
"그야 네가 충격으로 쓰러져 앓고 있다는 정도가 아니면 이 많은 초대를 다 거절하는 것도 어려우니까 말야."
"흥, 그리고 오빠는 날 돌보느라 정신이 없고 말이지?"
"정확히 맞췄어. 혹시 너 요즘 내 능력을 배우기라도 한 거니?"
레이븐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왜 그래야 하는지 필요성은 이해했지만 그래도 하기 싫다는 표정이다. 아마도 레이븐은 할 수만 있다면 계속 그 표정을 짓고 불평을 늘어놓았을 것이다. 쓴웃음을 짓던 찰스의 얼굴이 묘하게 잠잠해지고, 진지해진 시선이 레이븐의 어깨 너머를 응시하지 않았다면
"...찰스?"
"내가 틀린 게 아니라면..."
"무슨 소리야?"
찰스가 일어서서 레이븐 뒤쪽, 창가를 향해 다가간다.
"이거 말야."
창가에 놓인 작은 탁자, 부드럽게 윤낸 호두나무 목재 위, 흰 꽃병 아래 무언가가 놓여 있다. 집어서 들어올리고, 그제서야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본 레이븐이 깜짝 놀라 갈색눈을 크게 뜨는 동안 찰스는 겉봉에 적힌 단아한 글씨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다. 그것은 봉투였다. 흰 마닐라지에 아무 문장 없는 밀랍 봉인이 붙어 있고, 적혀 있는 거라고는 단 두 마디 뿐이다.
'헬파이어 클럽.'
지옥불 클럽이라니, 18세기에나 통용될 법한 우스꽝스러운 이름이다. 얼굴을 가면으로 가린 귀족들이 자기들이 고안해 낸 유치한 의식 따위를 벌이기 위해 지어냈을 법한 이름.
"이 봉투, 아까는 분명히"
레이븐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분명 이 테이블 위는 비어 있었다. 잠시 왠지모를 위화감에 조심스레 주위를 둘러보던 찰스는, 그 위화감이 풍경 때문이 아니라 냄새 때문에 든 것임을 깨닫고 미간을 모았다. 냄새, 그렇다. 아주 미미한 냄새가 나고 있었다. 뭔가 탄 듯한 냄새, 혹은 유황 냄새.
'어울리는군.'
잠시 망설이다 봉투를 뜯었다. 안에 든 것은 흰 마닐라지로 된 수수한 초대장이다. 조금 실망하며 접혀 있는 종이를 펴서 들여다본 찰스는 가볍게 휘파람을 불어 놀라움을 표시했다.
"뭐야? 누군데 그래?"
"이건 의외네."
레이븐이 호기심에 눈을 반짝거리며 다가온다. "뭐야, 여왕폐하라도 되는 거야?" 다가온 소녀는 얌전히 올라앉은 글자들을 소리내어 읽기 시작했다.
"귀하와 자리를 함께 하고 싶습니다. 그 곳에서 이번에 겪으신 일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리고 당신의 힘에 대해서도. 중요한 일이오니 되도록 혼자 와 주십시오."
날짜와 장소가 써 있는 부분즈음에 남성적인 필치로 초대장을 보내온 이의 이름이 올라가 있다. 꼭 레이븐의 말에 마침표라도 찍듯, 찰스는 천천히 그 이름을 음미하듯 읽었다.
"세바스챤 쇼우."
"세바스찬 쇼우?"
똑같은 이름을 레이븐이 저런 어조로 입에 담는 이유는, 초대장을 보내왔다는 자가 현재 사교계에 대 화제가 되어 있는 정체 불명의 거부이기 때문일 것이다. 세바스찬 쇼우, 남아프리카에서 막대한 돈을 벌었다고도 하고 동남아에서 벌었다고도 했다. 어쨌건 확실한 건, 그가 누구인지 정확히 뭘 하던 사람인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 그리고 지금 부유층이 가득한 이 곳 메이페어 가에서도 중심이랄 수 있는 그로스브너 광장 근처에 호화로운 저택을 구입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그 막대한 수입원이 무엇인지 아직까지도 불분명하다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의 모임에 가끔 참석은 해도 공개된 파티를 여는 일은 없던 그가 굳이 찰스를 지목하여 불렀다는 것 뿐이다. 한동안 초대장을 바라보던 레이븐이 눈을 가늘게 뜨고 의혹에 찬 표정으로 찰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는 사이였어?"
"네가 더 잘 알잖아. 그럴 리가?
"그런데 이게 왜 왔지?"
찰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도 지금 초대장을 들여다보고 있는 명민한 소녀만큼이나 당혹에 빠져 있었다. 의외의 대상에게서 상상상하지못했던 방식으로 초대장이 날아온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지금 그를 감싸고 도는 불안한 마음은 그보다는, 초대장 안에 적힌 글의 내용 때문이었다.
'당신의 힘에 대해서도.'
찰스는 생각에 잠겨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레이븐에게 짧고도 간단히 말했다.
"가 봐야겠어."
레이븐이 고개를 끄덕이고, 곧 가볍게 달려나갔다. 찰스의 얼굴만 보고도 그가 뭘 원하는지 알아챈 것이다. 묵묵히 초대장을 내려다보던 찰스는 가볍게 고개를 젓고 서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어쩌면 쇼우가 지정한 시간이 되기 전에 그 '지옥불 클럽'이라는 것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 조금이라도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
그로스브너 광장의 포석 위에 사두마차의 발굽 소리가 울리는 일은 매우 흔했다. 그러나 누군가 그 문에 새겨진 자비에 가의 문장을 본다면, 충격으로 쓰러진 사촌 여동생을 간호하느라 두문불출하고 있는 자비에 가의 젊은 후계자가 사실은 외출을 즐겼다고, 그것도 장안의 화제인 쇼우 박사의 저택을 찾았다고 소문이 날 테고 이 또한 사교계의 화제가 될 것이었다. 그래서 현명하게도 찰스는 가문의 문장 따위 새겨져 있지 않은 작은 마차를 골랐다. '혼자 오라'는 말을 지켜, 마차를 모는 젊은 마부 외의 사람들은 전혀 대동하지 않은 채였다.
세바스찬 쇼우가 사교계의 화제가 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저택이었는데, 사실 꽤 넓은 정원을 가진 두 채의 저택을 한꺼번에 사들여 하나로 합쳐버린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 시세보다 높은 값을 부른 것은 물론이다. 하여, 저택 입구에 들어선 다음에도 한동안 마차는 속력을 거의 줄이지 않고 달렸고, 찰스는 마차가 꽤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음에도 거의 흔들림 없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속으로만 감탄했다. 단순히 잘 정리한 흙길이 아니다. 이 긴 정원의 마차 길을 전부 포장해 버리다니, 그는 아마도 쓸데없이 사치스러운 성격이거나 완벽주의자일 것이다.
'아마도 둘 다겠지.'
마차의 속력이 잦아들었다.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하니 정시 1분 전이다. 마차가 멈추자마자 입구에서 대기하던 하인이 달려와 잽싸게 문을 연다. 발판을 딛고 내려와 주위를 둘러보니 어스름이 내려앉는 시간인데도 저택의 모든 방에는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다. 먼 데 어딘가에서 음악 소리가 들려왔고, 몇몇 창문에는 사람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혼자' 오라고 했으면서 이런 공개된 행사에 부르다니.' 언뜻 그리 생각하는데, 눈앞에 의외의 사람이 나타나 주의가 흩어지고 말았다.
"저 쪽 모임은 오늘의 약속과는 상관 없는 쪽이랍니다."
여성스럽고 우아한, 하지만 일말의 친밀감이나 다정함 따위 없는 건조한 말투였다. 건조하되 열 때문에 말랐다기보다 오히려 얼어붙어 있다는 것이 어울리는 목소리다. 공손이 손을 내민 하인에게 모자와 단장을 맡긴 찰스는 그 목소리의 주인임에 틀림없는 여성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보통은 립타이드가 나오지만, 이번 손님은 아주 특별하다고 하시더군요."
어깨를 드러낸 흰 드레스가 너무나 잘 어울리는, 놀랍도록 아름다운 여인이 차갑다시피한 푸른 눈으로 이 쪽을 응시하며 말하고 있다. 길고 가느다란 목에도, 우아한 귀에도, 눈부신 금발에도 지금 그녀와 너무나 잘 어울리는 눈부신 다이아몬드가 얼음 조각처럼 빛을 뿌리며 얹혀 있었다. 인사할 타이밍조차 주지 않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엠마 프로스트입니다. 따라오시죠,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어딜 보아도 하녀나 하우스와이프가 할 법한 옷차림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마치 자신이 이 집의 일부인 듯 자연스럽게 하인들 앞에서 여주인처럼 행세하고 움직였다. 그렇다면 그녀는 아마 쇼우의 정부 노릇을 하는 고급 창부거나 애인, 혹은 부인일 것이다. 어쨌건 사교계에서 본 적 없는 여성이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정 말한다면 비서에 가장 가깝죠. 어떻게 생각하시건 상관 없지만요."
찰스는 묘한 느낌을 받고 앞서가는 여성의 흰 등을 응시했다. 어째서인가 그녀가 그의 마음을, 더 정확히는 '생각'을 알아채고 그에 반응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페르시아산 카펫, 대체 어떤 나라에서 제작했는지 모르겠지만 명백히 이국저인 상아와 흑단으로 된 조각품들, 인도차이나의 요란한 불상과 호화로운 탱화들, 벽에 아무렇지도 않게 붙어 있는 고가의 그림들 - 몰취미의 경계선에서 간신히 한 발 안쪽으로 들어온 호화로운 쇼우의 수집품들 사이에서 흰 드레스에 감싸인 여인은 또 하나의 장식품, 혹은 조각품처럼 보였다. 허나 지금까지 그녀가 한 말들로 미루어 볼 때 이 여인은 쇼우에게 있어 단순한 정부나 비서 정도가 아닐 것이었다. 찰스는 조용히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엠마의 생각을 읽어보려 한 순간,
"그만두세요."
미미하게나마 '조소'가 담긴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당신...?"
"여깁니다."
흰 레이스 장갑에 감싸인 손을 들어 가볍게 노크하고, 엠마는 무표정한 얼굴로 문 손잡이를 돌려 마호가니 문을 열고 찰스 쪽을 돌아보았다. 언뜻 보면 아무것도 떠올라 있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그 푸른 눈에는 명백한 비웃음이 담겨 있다.
"들어가시지요."
찰스는 초대장에 적혀 있던 말을 떠올리고 속으로만 작게 혀를 찼다.
'당신의 힘에 대해서도.'
아마도 세바스찬 쇼우는 어떠한 루트를 통해 찰스의 '힘'에 대해 알게 되었던 것 같았다. 그리고 눈앞의 이 여인을 보건대, 아마도 그 일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바로 곁에 찰스와 비슷한 사람을 두고 있기 때문이었겠지. 세상에서 하나뿐일 줄 알았던 자신과 같은 사람을 만난 것인데도, 단순히 반가워하기엔 주변 상황이 너무나 복잡했다. 허나 그 상황은, 운이 좋다면 이 문 안쪽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남자가 풀어줄 것이다. 잠시 마음의 준비를 한 찰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문 안으로 들어섰다.
남자는 벽난로 가에 서 있었다.
'이건 의외로군.'
찰스의 소감은 남자 뿐 아니라 방 전체에 대한 것이었다. 찰스를 보자마자 매우 기분이 좋다는 듯 만면에 환한 미소를 띠고 다가와 친밀한 몸짓으로 포옹하는 남자도 남자였지만, 이제껏 보았던 호화로운 실내와는 대조적으로 자주빛 카펫과 신화 속 풍경이 묘사된 그림 한두점 외에는 별반 장식이 없는 방 내부도 내부였다. 벽난로 앞에 놓인 안락의자와 빌로드 카우치는 물론 최고급품이었지만, 지금까지 쇼우의 저택 내부에 놓여 있던 사치스러운 가구들에 비하면 엄격해 보일 정도로 소박한 디자인을 하고 있었다.
여자는 '응접실'이라고 말했지만, 고급 탁자 위의 위스키와 크리스털 잔 세트를 제외하면 이 방 안에 딱히 '손님'과 연관된 것은 없어 보인다. 오히려 방 한쪽 구석에 놓인 - 아마도 카우치와 세트인 듯한 - 침대를 발견한 찰스는 의아함으로 미간을 좁혔다. 어딜 보아도 이 곳은 응접실이라기보다는 밀회를 위해 만들어진 밀실에 가까워 보였다.
"이런 곳에서 맞는 것을 용서해 주었으면 좋겠소." 그는 듣기 좋은 소탈한 목소리를 지녔지만, 미묘한 외국 액센트가 섞인 어조에는 다분히 권위적인 울림이 섞여 있었다. "사실 정식 응접실은 다른 곳에 있지만, 클럽 일반 회원들의 모임이 있는 날이라 어쩔 수 없이 이 곳에 자리를 마련하게 되었소."
역시 생각대로다. 남자의 포옹에서 풀려난 찰스는 사내의 지나치게 친밀한 태도에 의아함을 느끼며 인사를 건넸다.
"처음 뵙겠습니다. 찰스 프란시스 자비에입니다."
"쇼우, 세바스찬 쇼우요. 생명의 은인을 직접 보게 되어 기쁘군."
찰스는 눈을 크게 뜨고 쇼우를 바라보았다. '생명의 은인'? 경악한 찰스의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쇼우는 환히 웃으며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물론 이런 얘기가 너무나 갑작스럽고 당황스러울 거요. 하지만 내 얘기를 듣는다면 뭐든지 다 이해하게 될 거요."
한번 운을 띄워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싶었다.
"제 '힘'에 대한 얘기도 말입니까."
"그렇소."
의외의 화제를 꺼내 이 남자를 놀라게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역시 환히 웃으며 태연자약하게 고개를 끄덕인 남자는 유리장 쪽으로 다가가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고 안에서 잔과 병을 하나씩 꺼낸다. '들겠소?' 라고 묻는 듯한 시선을 받은 찰스는 가볍게 고개를 저어 거부의 뜻을 나타냈다. 잔에 브랜디를 한 잔 따른 쇼우는 진한 액체를 한 모금 넘기고 가볍게 이맛살을 찌푸렸다 펴며 말을 시작했다.
"내가 지금부터 하는 말에 거짓은 없을 거요. 원한다면 얼마든지 내 뜻을 읽어도 상관없소."
찰스는 한쪽 눈썹을 끌어올렸다. 어떻게 그가 찰스의 '힘'에 대해 이 정도까지 정확히 알고 있을까? 역시 아까의 추측대로 그녀가, 엠마 프로스트가 찰스를 찾아냈던 걸까? 물론 눈앞의 이 남자를 조금씩은 읽어볼 생각이긴 했지만, 찰스가 얼떨떨한 기분이 된 것은 그보다는 누군가 자신의 능력을 알고 이렇듯 아무렇지도 않게 거론하는 사태 자체가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글쎄요, 눈앞에서 말하는 사람들을 읽는 무례는 왠만해서는 저지르지 않습니다."
사실이긴 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변명같은 말이라고 생각하며, 찰스는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쇼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밀어 찰스에게 의자를 권했다. 그리고 그 자신 또한 안락의자에 앉으며 찰스 쪽을 바라보고 이야기했다.
"좋소. 남용은 좋지 않긴 하지, 하지만 내가 먼저 제안했다는 것은 반드시 기억해 주기 바라겠소. 나는 거짓말을 할 생각이 없고, 생명의 은인인 당신에게 내가 아는 바를 다 이야기할 것이오."
"아는 바라면..."
"물론 단도를 던진 자에 대한 얘기지."
찰스는 쇼우를 바라보았다. 40대로 보이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최고급 재킷을 차려 입은 몸에는 군살이 없고, 이 정도로 호화로운 집에 살면서도 눈이 전혀 풀려 있지 않다. 약간 말라 보이는 얼굴은 느긋하게 미소짓고 있음에도 어딘가 불안해 보였는데, 그것은 다분히 그가 지닌 지나치개 냉철한 푸른빛 눈 때문이리라. 아니, 그보다는 얇게 다물린 입 때문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 찰스의 관심사는 그것이 아니었다. 그를 긴장시킨 것은 쇼우의 외모가 아니라 그 입에서 방금 흘러나온 말이었다.
"그 남자를 알고 있습니까?"
"물론이오. 나는 그를 아주 잘 알고 있소."
찰스가 뭔가 더 물어보려고 입을 열었을 때, 쇼우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손을 올려 찰스의 뺨에 손을 댔다. 그 순간 찰스는 아주 기묘한 느낌을 받았는데, 남자는 친밀함을 나타내듯 뺨을 가볍게 만지고 손을 내린 것이 고작이었지만 그 손 안에는 분명 무언가가 숨어있는 것 같았다. 의지나 의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눈앞에 있는 것은 분명 나이든 남자에 불과했지만 방금 찰스의 얼굴에 닿았던 것은 그보다 훨씬 거대하고 강력한 무언가였다. 찰스가 입을 다물자, 쇼우는 바로 그것이 목적이었따는 듯 기쁜 표정으로 웃으며 그에게 다시 말을 건넸다.
"일단 내 얘기를 해 드리겠소. 다 듣고 나면 얼마든지 질문을 듣도록 하지."
"그러죠."
찰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천히 정신의 손길을 뻗칠 준비를 했다. 하지만 그 첫 시도는 무참히 실패하고 말았는데, 그것은 쇼우가 말한 것이 워낙 뜻밖이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이름은 에릭 렌셔, 독일인이오. 나를 죽이려 하고 있소."
찰스의 새파란 눈동자가 놀라움으로 벌어지는 것을, 남자는 다분히 성취감 어린 미소로 바라보았다.
"이름을 알고 계십니까?"
"그렇소. 당신보다 한... 다섯 살 더 먹었을 거요."
"그렇다면 어서 경찰에"
"소용 없소. 영국 경찰 따위가 그를 잡을 수는 없지. 무엇보다도..."
이 말을 할 때의 그는 거의 다정해 보였다.
"나는 그를 사랑하고 있다오. 에릭은 내 아들이나 다름없거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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