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세기, 독일 배경입니다.
- 슈바르츠발트 근처의 한 마을, 박물학자 찰스와 사냥꾼 에릭입니다.
- 둘의 능력이나 느낌은 원작과 비교가 안될 정도로 약화되어 있어염.
- 19금 부분 삭제했습니다.(2013/7/8)
- 후 죽겠네요. 그래도 제일 긴 것이 끝났으니 4, 5, 6, 7은 좀 빨리 될 듯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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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물어보기에 앞서, 찰스의 뇌리에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에릭이 정말로 늑대인간이 맞았다면, 마을 사람들이 말하는 '괴물'은 어느 쪽인 것일까? 물론 그는 에릭에게서 읽어낸 영상을 보았고 거기에 거짓은 없었다. 흰 털을 지닌 괴물, 그 괴물이 에릭의 어머니를 죽였고 찰스를 습격하려 했다. 그리고 에릭은 그 괴물이 바로 이 마을의 지주인 클라우스 슈미트라고 얘기했다. 하지만 그 뒤 일어난 모든 '죽음'이 클라우스의 짓이었을까? 마을 사람들에게 추방당했던 에릭이 돌아와 '복수'를 했던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 생각은 곧 바뀌었다. 에릭의 어머니를 해친 건 분명 자신과 맞닥뜨린 그 괴물이었다. 게다가 에릭은 마을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곧 이 숲을 떠났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간 죽었다는 사람들, 특히 사건 이후 2-3년간 죽은 사람들을 해치운 것은 바로 그 괴물이 된다.
"혹시...마을을 떠난 이유가?"
그렇기에, 그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서 찰스는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게 보이기 위해 노력하며 에릭에게 물었다. 그의 노력은 아마도 성공한 모양이다. 에릭은 잠시 침묵하다 선선히 대답했다.
"놈에게 물린지 한 달이 지났을 때 첫 변신이 있었어."
전설은 사실이었다. 찰스의 얼굴은 완전히 창백해졌다.
"보름에요?"
"보름에. 엄청나게 아팠지. 정신차리고 나니 난 이미 인간이 아니더군."
미쳐 버릴 것 같았어. 그렇게 중얼거리며 머리를 쓸어올리는 에릭의 얼굴은 지금의 찰스 못지 않게 창백했다. 아마도 지금 그의 마음을 읽어낸다면 그가 느끼는 감정을 고스란히 알 수 있겠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정신없이 도망쳤어. 놈에게서, 마을에서, 첫 보름에 그는 날 붙잡으려 했지."
에릭의 눈동자가 떨렸다.
"사실 그때까지는 잘 몰랐어. 난 그저 운 나쁘게 괴물에게 걸린 거라고만 생각했지. 어머니가... 어머니가 그렇게 된 것도 우연이라고 생각했어."
"...그럼 아니었나요?"
잔인한 질문이라는 걸 알면서도 도저히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에릭은 고통스러워 하는 표정이 되어 눈을 감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군.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말해 본 적이 없는 얘기인데 왜 네게는 그냥 말할 수 있는 건지."
사실 찰스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지금까지 본 바 대로라면 이 남자는 타인에 대한 불신감이 강한 대신 한 번 경계가 허물어지면 걷잡을 수 없이 약해졌던 것이다. 그에게 차가운 눈길을 던지고 쫓아내 버린 마을 사람들 말고도 그가 만나왔던 수많은 사람들 중 그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주고 진실로 믿어준 사람이 몇이나 있었을까? 아니, 말을 해 볼 수는 있었을까? 하지만 찰스는 그가 지금까지 말한 것들이 다 진실이었음을 말 그대로 마음으로부터 알고 있었고, 아마도 바로 그 신뢰 때문에 마음의 장벽이 무너졌던 것이리라.
"그는 처음부터 날 노렸던 거였어. 이유는...나도 모르겠어. 날 어머니처럼 죽이지 않고, 그냥 물어뜯기만 해서 감염만 시킨 거였지."
에릭의 눈동자에 강렬한 분노가 타올랐다. 거의 흉폭해 보이는 그 얼굴을 본 찰스는, 그것이 자신을 향한 감정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긴장감에 조용히 침을 삼켰다. 그리고 에릭의 얘기는 계속되었다.
"그는 나보다 훨씬 오래되고 강한 괴물이야. 저 은화는 그가 내게 준 거였어. 직접 집어서."
찰스의 눈에 놀라움이 스쳤다. 늑대인간이? 은을 직접 손으로 집어올렸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그 동전이 닿는 순간 너무 뜨거워서 비명을 질렀지. 그가 웃더군. 내 손에 그 동전을 꽉 붙이면서 말했어."
에릭은 잠시 숨을 들이켰고, 그 사이 찰스가 물었다.
"뭐라고요?"
그는 잠시 찰스를 쳐다보았다. 얼굴에는 땀이 맺혀 있었고, 들여다 보기 전에는 알 수 없을 격렬한 감정이 그 표면 아래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한동안 그렇게 이를 악물고 있던 에릭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말했다.
"네게 주는 낙인이라고."
들어올린 손바닥에는 낙인같은 화상이 찍혀 있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 자세한 형태는 알아볼 수 없었지만, 붉고 허옇게 일그러진 화상 흉터를 본 찰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에릭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이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가 그에게는 고통이었으리라. 그 압도적인 감정의 파도에 전율하며, 찰스는 한 가지 의문을 떠올렸다- 그는 왜 이런 고통스러운 곳에 돌아왔을까? 물어보려던 참에 에릭이 먼저 말을 꺼냈다.
"그럼 이제 이유는 충분히 알았을 테고... 여기 계속 있는 건 위험해. 어서 마을에 돌아가. 내가 데려다 주지."
찰스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에릭을 바라보았다. 어이가 없어서였다. 어제 새벽만 해도 그는 거의 죽을 것처럼 보였고, 아직 상처가 다 나은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마을까지 함께 가자니 어이가 없을만도 한 일이다.
"데려다 준다고요?"
하지만 에릭은 그런 찰스의 기분을 알아차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무 동요 없이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이 정도 상처라면 밤이 되면 별 문제 없이 데려다 줄 수 있을 테니까."
고개를 내저었지만, 그 말은 사실이었다.
어느새 시간이 지나, 바깥의 햇볕이 점차 변하기 시작했다. 서서히 기울어 가는 햇살을 눈치챈 찰스는 에릭 쪽을 잠시 쳐다봤다. 그 사이 둘은 이미 한 끼의 식사를 더 한 뒤였지만, 에릭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모피를 덮었을 뿐 옷은 딱히 걸쳐입지 않은 상태로, 맨몸에 붕대만 감은 채로 얌전히 앉아 있었다. 사실 그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어차피 늑대로 변하면 옷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어깨에 둘린 붕대는 약간 헐거웠고, 그래서 그 안의 상처도 눈에 들어왔다. 비록 다 나은 것은 아니지만 벌어졌던 곳은 이미 붙어 있었다.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다. 하루가 지났다곤 해도 다친지 열몇시간밖에 되지 않는 셈인데, 상처는 붙고 안색은 이미 눈에 띄게 좋아지고 있었다. 누가 이 남자를 두고 어제 새벽만 해도 식은땀을 흘리며 헛소리를 하던 사람이라고 생각하겠는가.
"저녁이 되어가네요."
"......"
"곧...변하나요?"
찰스는 호기심을 끝내 감추지 못했다. 에릭에게 있어 불쾌한 질문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행히도 에릭은 불쾌해 하거나 하지 않고 잠시 가만히 앉아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고 싶은가?"
끄덕이지는 않았지만 고개를 저을 수도 없었다. 그런 찰스의 얼굴을 바라본 에릭은 대체 뭐가 그리 재밌는지 피식 웃더니 붕대가 감긴 팔을 내려다보았다. 마른 근육이 꽉 찬 팔에 감긴 흰 붕대는 기묘하게도 이 남자와 참으로 잘 어울렸다.
"별로 보기 좋은 장면은 아닐 거야."
마주 웃어보이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고, 그래서 입가로 새어나온 것은 웃음보다는 숨소리와 가까운 무언가였다. 그렇게 둘 사이에는 기묘한 침묵이 자리잡았고, 둘 모두 나무 덧문 사이로 서서히 기울어지며 엷게 스러져가는 햇살을 바라보고 있었다. 붉은 노을이 창 안으로 비쳐왔고, 피처럼 불타던 하늘이 기묘한 남빛으로 화해 가며 서서히 어둠이 깔려왔다. 보름달의 시간이 다가오는 것이다.
별이 뜨고 하늘이 완전히 검은빛이 되었을 때 변화가 시작되었다. 어느 순간, 에릭이 짧고 다급한 신음소리를 내며 고개를 숙였다. 방 안은 벽난로 불빛을 제외하면 완전히 어두웠고, 그래서 자세한 것은 파악하기 어려웠지만 일렁이는 불꽃에 비친 에릭의 등이 기이하게 부풀어오르는 것만이 눈에 들어왔다. 경악한 찰스 앞에서 변화는 의외로 빠르게 일어났다.
먼저 온 몸의 근육이 뒤틀리듯 불어났다. 고통에 겨워 바닥을 짚은 에릭의 손가락은 곧 갈퀴처럼 구부러졌고 무서우리만치 긴 발톱이 거기서 돋아났다. 웅크린 남자의 등은 이미 주저앉은 동물의 등처럼 둥글게 되어 거기서 털이 돋았고, 견디지 못한 듯 울부짖으며 들어올린 얼굴은 이미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잠시 변화가 멈추었는데, 그 '중간 과정'은 바로 어제 찰스가 본 흰 색의 괴물과 놀라우리만치 닮아 있었다.
그리고 곧 '두 번째 변화'가 일어났다. 늑대도 인간도 아닌 괴물은 점차 늑대와 비슷한 모습으로 변해갔다. 거대하던 손발은 늑대의 앞발처럼 작아졌고 사지의 모습도 그에 따라 점차 변해갔다. 울룩 불룩 튀어나왔던 근육은 다시 자리를 잡으며 털가죽 안으로 기어들어갔고, 완전히 다른 형태가 된 에릭이 잠시 바닥에 엎드렸다 고개를 들어올렸을 때, 찰스의 눈앞에 있는 것은 이미 인간도 아니고 괴물도 아닌, 한 마리의 거대한 회색 늑대였다. 뜯겨 나가 너덜너덜해진 붕대가 사방으로 떨어졌고, 그 밑에는 상처 없는 회색 털가죽이 자리하고 있었다.
"맙소사..."
도저히 감탄사를 내뱉지 않을 수가 없었다. 눈앞의 이 거대한 회색 늑대가 에릭이라니, 분명 이야기를 들었고 그래서머리로는 인지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눈앞에서 직접 바라보는 것은 완전히 색다른 기분을 느끼게 해 주었다. 드디어 변신이 끝났는지 회색 늑대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고, 그 노란 눈과 시선을 마주하는 순간 찰스는 마음 속 깊이 깨달았다. 비록 빛깔은 달랐지만, 차분한 늑대의 노란 눈은 에릭의 청회색 시선과 꼭 닮아 있었던 것이다.
거대한 몸, 탄력있는 근육, 그 위를 덮은 푹신해 보이는 잿빛 털. 직설적으로 말해서, 그 늑대는 대단히 아름다웠고, 순수한 경탄에 젖어 찰스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뼏었다. 그리고, 잠시 주저하던 늑대가 천천히 다가와 그 손에 코를 내밀어 주었다.
서늘한 숨이 먼저 와 닿은 뒤, 개과 동물 특유의 축축하고 차가운 코가 손에 닿아왔다. 천천히 팔을 움직여 얼굴을 쓸자 늑대는 눈을 가늘게 뜨며 찰스의 손을 받아들였고, 좀더 용기를 내어 머리를 쓸어준 다음 얇은 귀끝을 만진 후 귀를 터는 늑대의 몸짓에 웃으며 달빛을 받아 거의 은색으로 보이는 등으로 팔을 옮겼다. 늑대의 몸은 아주 따뜻했고, 그 몸에 닿은 순간 찰스의 온몸에는 전율이 달렸다. 어깨 부분에서 조심스레 털을 헤쳐 보았더니 작은 상처는 놀랍게도 아예 아물어 있었고, 깊었던 상처만이 패인 자국으로 남아 있었다. 경이로운 회복력에 감탄하며 손을 옮겼다. 늑대의 크기 때문에 손을 위로 올려, 거칠면서도 풍성하고 푸근한 털을 쓸어주는데 갑자기 늑대가 한 걸음 옆으로 물러났다.
약간은 마법의 순간이 깨진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늑대의 의사는 충분히 알만했다. 심지어 거의 집중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분명히 '빨리 길을 떠나야 놈과 안 마주치는데' 라는 강력한 의사가 전해져 왔던 것이다. 찰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아직은 찰스가 자기 생각을 읽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늑대가 머뭇거리는 걸 보며 웃었다.
"말했잖아요. 어느정도는 읽을 수 있다고. 특히 지금처럼 강하게 생각하는 건 쉽게 알아챌 수 있어요."
늑대는 그 말을 듣고는 문 밖으로 걸어나갔고, 찰스는 그 뒤를 따랐다. 얼굴에 와 닿는 밤의 숲 공기는 에일듯 차가왔지만 에릭이 미리 건네 준 털옷이 의외로 따뜻해 견딜 만 했다. 눈앞에 선 늑대를 바라보며 마을까지 함께 간다는 것은 이 형태로 호위해 준다는 뜻이었는가 생각하는데 갑자기 늑대가 땅바닥에 주저앉는다.
"에릭?"
'내 등을 타고 가는게 빨라.'
찰스는 상당히 당황했다. 안장도 고삐도 등자도 없는 늑대의 등에 올라타다니, 대체 그게 가능한 일일까? 하지만 에릭의 말이 맞긴 하다. 이런 눈밭에서 밤이라면, 확실히 거대한 늑대만큼 안전한 탈것은 없기도 했다. 일체의 마구(?) 없이 늑대의 등에 올라타야 하는 부담과 이제껏 귀족 자제로서 승마를 익혀온 스스로의 소양에 대한 자신감 사이에서 한참 저울질 하던 찰스는, 마치 스스로에게 다짐이라도 하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늑대의 등허리에 조심스레 올라탔다.
늑대의 잔등에서 어떻게든 자리를 잡고 나니 붙들 것이 필요해졌고, 그래서 잡아 본 늑대의 목 털은 생각보다 길고 풍성해서 어떻게든 붙잡을 수 있었다. 너무 꽉 잡으면 아파할 테니 좀 조심스럽긴 했지만 그래도 붙들지 않으면 떨어질 게 분명하니 안 잡을 수는 없었다.
'사람을 태워 본 적이 없으니 떨어트릴지 아닐지 모르겠군. 꽉 잡아.'
찰스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물론 이 숲에 쌓여 있는 눈은 꽤 두터웠으니 크게 다치지 않을지도 몰랐지만, 어쨌건 눈밭에 꼴사납게 떨어지는 것보다는 에릭이 좀 따가워 하더라도 꽉 잡고 있는 편이 나을 것 같았던 것이다.
찰스를 태운 뒤 천천히 몸을 일으킨 에릭이 눈 위로 몇 발짝을 딛었다. 그 사이 찰스는 늑대의 걸음 감각을 익혔다. 말과는 전혀 느낌이 달랐지만, 어쨌건 꽤 오랜 기간 승마를 즐겨온 턱에 그럭저럭 떨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건 확인할 수 있었다.
'무게가 꽤 나가는데.'
"남자잖습니까."
늑대에게서 기침 소리 비슷한 숨소리가 났는데, 아마도 웃음소리인 듯 싶었다. 약이 올라 뭔가 쏘아주려던 찰스는, 갑작스레 뛰기 시작한 에릭의 등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튀어나오려는 비명소리를 힘껏 억누르며 정신없이 매달려야만 했다.
풍경들이 정신 없이 뒤로 지나갔다. 사실 그 풍경들을 감상할 여유 따윈 없었다. 떨어지고 싶지 않았던 찰스는 겁에 질린 채 필사적으로 회색 늑대의 털을 꽉 잡고 매달렸다. 늑대는 가끔 방향을 바꾸기도 했고 냄새를 맡기 위해 멈춰 서기도 헀는데, 그 때마다 찰스는 기겁을 하며 늑대의 등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 해야만 했다. 결코 찰스의 솜씨가 서툴러서가 아니었다. 늑대는 가장 빠른 말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숲을 질주했고, 유연하게 방향을 바꿨다. 조금이라도 방심했다간 곧장 눈밭에 떨어진다고 생각하니 도저히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엄청난 속도 때문에 칼날같은 바람이 쉴새 없이 몰아쳤지만, 꼭 달라붙은 늑대의 등이 따뜻해서 그나마 견딜 만 했다.
몇 번인가 알 수 없는 포효 같은 것이 들려왔고, 그 때마다 에릭은 귀를 쫑긋 세우고 그 소리를 주의깊게 들었다. 몇번인가는 별안간 멈춰선 채 바람의 냄새를 맡거나 눈 위에 코를 갖다 댔다. 그 때마다 찰스는 심장이 튀어나올 듯한 두려움과 긴장감을 맛보았지만, 다행히도 별 일은 없었다.
드디어 나이슬라흐의 불빛이 저 너머로 보이기 시작했다. 단단히 닫힌 덧창 너머의 불빛이긴 했지만, 에릭은 사람들 눈을 주의하기라도 하는지 속도를 늦춰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을 근처까지 닿았을 때, 늑대는 더욱 신중하게 주위를 살피며 마을 구석으로 기어들어갔다.
당연히 보름 밤이었으니 마을 사람들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럼에도 에릭은 아주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는데, 마을 사람보다는 아마도 전날에 보았던 그 흰 괴물을 조심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마침내 한 집의 문 앞에 다다른 에릭은 앞발로 그 집의 문고리를 간단히 부숴 버렸고, 마치 내리라는 듯 그 바로 앞에 주저앉았다. 문득 그것이 꽤나 '궁하면 문고리를 권총으로 쏴 버리라'고 충고했던 사람의 행동 답다는 생각이 들어, 찰스는 자기도 모르게 키들거리며 웃었다.
지금까지 이 등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애쓰느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건만, 찰스는 어쩐지 이 등에서 내리는 것에 대해 몹시 아까운 마음이 되었다. 일생 단 한번 뿐일지도 모르는 일이었지 않은가. 결국 천천히 내려서자, 어서 들어가라는 듯 재촉하는 늑대의 코가 그의 몸을 슬그머니 문 쪽으로 민다.
"알겠어요. 들어갈 테니 잠깐만요."
찰스는 그렇게 말한 다음 몸을 돌려, 할 수 있는 한 한껏 두 팔을 벌려 에릭의 목을 품 안 가득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놀란 늑대가 멈칫거렸지만 꽉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리고 천천히, 예민한 늑대의 귀에 이 말이 너무도 잘 들리리라는 것을 알면서 한 자 한 자 또렷이 이야기 했다.
"고마와요. 날 믿어주고, 여기까지 데려다 줘서."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늑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꽤 커다란 앞발이 하나 올라와 찰스의 몸을 마주 끌어안았을 뿐이었고, 잠시 그 털의 온기를 만끽한 찰스는 금새 몸을 떼고 물러서서 얌전히 창고 문 안으로 들어갔다. 방금의 문고리 부수는 소리는 꽤 컸고, 아마도 이 집의 주인은 공포에 질렸을 것이다. 어떻게든 문을 잠글 수 있는 것이 없을까 둘러보니 다행히 꽤 굵직한 빗장이 문 곁에 놓여 있었고, 그것을 발견하고 문을 닫기 위해 돌아보니 늑대는 이미 사라져 있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방금 전까지 늑대가 서 있던 곳에 제법 커다란 발자국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곧 눈이 그 발자국을 덮어 모든 증거를 숨겨주리라. 안도의 한숨을 내쉰 찰스는 부서진 문고리 대신 안에서 빗장을 지르고는 창고 안 구석으로 기어들어갔다.
다음날 아침, 찰스는 부서진 문고리에 대해 경악하는 집주인에게 할 수 있는 한 가장 미안한 기색을 띠며 어젯밤의 일에 대해 설명했다. 늦게 돌아오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문고리를 부수고 창고에 숨었노라 이야기 한 다음 문 수리비를 두둑히 보상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소란을 피우던 집 주인은 묵직한 보상에 간신히 만족하는 눈치였고, 찰스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여 여관으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었다.
"나리! 마침 잘 오셨네요. 전갈이 있습니다."
여관 주인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찰스를 맞이했다. 그의 투박한 손에는 제법 그럴듯하게 소인까지 찍힌 봉투가 들려 있었다. 처음에는 편지인가 생각했지만, 안에서 나온 것은 초대장이었다. '클라우스 슈미트'라는 이름이 꽤 우아한 필체로 적혀 있다. 이 낯선 이름이 어째서 낯익은가 잠시 생각하던 찰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 놈이 바로 괴물이야. 클라우스 슈미트, 그 저주받을 지주놈이 바로 괴물이었다고!'
에릭이 말했던 이름이었다. 깨끗한 고급지에는 자택으로 초대하고 싶다는 정중한 설명과 함께 일시가 지정되어 있었다. 잠시 그 종이를 들여다 보던 찰스는 대체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인지 고민에 빠졌다.
이제껏 그는 이 곳 지주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물론 찰스의 신분을 생각하면 초대를 받아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기는 했다. 하지만 이제껏 지주는 - 클라우스 슈미트는 그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다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 기이한 초대에 대해 '이유'를 따져 보자니 짚이는 것은 한 가지 뿐이었다. 그렇다. 만일 에릭의 말대로 클라우스 슈미트가 '괴물'이라면 이 행동은 납득 가능하다. '괴물'은 찰스를 보았고, 노렸다. 그리고 에릭이 끼어들었다.
'함정일지도 모르겠군.'
찰스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물었다. 이틀 전 '괴물'은 그를 놓쳤다. 어쩌면 그때 못다한 사냥을 하려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벌린 입으로 사냥감더러 기어들어오라고 정식으로 초청하는 것이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찰스는 그래도 이 초대에 한번 응해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일단 이 자가 정말로 괴물인지 아닌지 알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 볼 필요가 있었다. 운이 좋아서 그의 정체를 찰스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서라도 파악할 수만 있다면, 에릭의 진실성에 대해 완벽한 확신을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가 괴물이라 해도 지금은 대낮이었고, 주변 고용인들의 시선도 있을 텐데 자신을 쉽사리 해칠 수는 없으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찰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방에 들어갔다. 일단 뜨거운 물에 목욕을 좀 한 다음 옷을 갈아입어야 했던 것이다. 아, 물론 식사부터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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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 도착한 지주의 저택은 런던을 잘 알고 있는 찰스가 보기에도 꽤 괜찮은 곳이었다. 물론 베를린의 진짜 귀족들의 집과 비교하는 것은 무리였지만, 이런 마을에 있을 법한 부유층의 별장이라 생각해 볼 때 제법 괜찮은 수준에 들어갔던 것이다. 그 집의 주인은 예상 외로 소탈하고 친절해 보이는 사람이었지만, 그의 명민해 보이는 엷은 푸른빛 눈동자는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만났을 때 서툰 독일어로 인사를 건네려 했지만, 그의 말을 가로막으며 들려온 것은 의외로 격식있는 유창한 영어였다.
"청년 시절에 영국에 있었소. 런던의 친구들이 잘 지내는지 모르겠군."
시원스레 웃음지으며, 클라우스 슈미트는 찰스를 위해 홍차를 준비해 두었다고 말했다. 영국에서 이 곳으로 온 이래, 들고 왔떤 홍차를 모두 소비해 버린지 꽤 되었던 찰스로서는 실로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고, 그래서 응접실에서 따끈한 찻잔을 든 찰스는 눈앞의 사람이 사실은 인간이 아니라 흉폭한 괴물, 그것도 자신의 목숨을 노렸던 괴물이라는 점을 기억하면서도 긴장을 풀고 대화할 수 있었다.
그는 매우 지적인 남자였고 재치도 있었다. 찰스의 작업에 상당한 흥미를 보이며 자신이 알고 있는 전설에 대해 이야기해 주기도 했다. 찰스를 초대한 이유에 대한 그의 설명은 의외로 단순했다. 여러가지 이유로 마을 사람들과 교류를 깊이 하지 않다 보니 찰스에 대한 소문을 이제서야 들었다는 것이다.
"괴짜 박사인가가 와서 '괴물'에 대해 조사한다고 하더군. 그 얘기를 듣고 당신을 만나고 싶어졌소."
마주 웃으며, 찰스는 클라우스의 머리 속을 들여다 보기 위해 다시 한번 집중했지만 그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자의 생각은 거의 모든 것이 비밀에 싸여 있었다. 예컨대 찰스를 만나보고 싶어졌다고 한 건 명백한 진실이었지만 그 '진짜' 이유는 안개낀 듯 흐려서 잘 보이지 않았다. 괴물 이야기를 꺼낸 뒤, 클라우스는 찰스 앞에서 농부들의 헛된 미신과 괴물로 오인될 만한 잔인한 늑대들에 대한 얘기를 늘어놓으며 찰스의 안색을 살폈다. 이 쪽을 살핀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지만 답답하게도 그 속내는 조금도 제대로 읽어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가 이 화제를 꺼낸 것으로 약간은 이 자의 동기를 유추해 낼 수 있었다. 아마도 찰스가 괴물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혹은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는지에 대해 알아보려 하는 것일 터이다. 만일 에릭이 찰스에게 자신의 정체를 털어놓았다는 것을 들킨다면, 그렇다면 살아서 마을에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여기서는 최대한 순진한 학자, 그러니까 불운하게 괴물을 만난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학자 연기를 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하여, 찰스는 짐짓 열성적으로 그 말을 부정했다.
"세상에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는 모르는 겁니다. 저만 해도 어제 바로 그 괴물에게 죽을 뻔 했으니까요."
이 사실을 밝힌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자신의 말에 따라 변하는 클라우스의 감정을 읽어내고자 시도한 것이다.
"괴물을 봤다고?"
"예, 그렇습니다. 바로 그제 밤의 일이었습니다."
클라우스 슈미트는 회의적인 눈길로 감정하듯 찰스를 바라보았다. 마치 찰스의 말을 믿어야 할지 안 믿어야 할지 고민하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찰스는 그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제는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클라우스는 감정적으로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냉철하게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다. 대체 어떤 생각인지 알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
"어디 얘기 좀 해 보시오. 내가 이제껏 들어온 농부들의 헛소리와 뭐가 다를지 궁금하거든."
찰스는 늘 그래 왔던 것처럼 최대한 열성적으로, 그의 말에 회의적인 공격자들을 설득할 때처럼 진지하게 그 날의 사건에 대해 털어놓기 시작했다. 다만 에릭에 대한 이야기는 주의깊게 내용을 바꾸었다. '갑자기 달려든 괴물같이 거대한 회색 늑대'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기색을 들켜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클라우스 슈미트는 빙글빙글 웃으며 찰스의 얘기를 듣고 있었지만, 그 머리 속은 매우 냉철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문득 찰스의 뇌리에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다.
'샤리야르를 사랑하지 않았던 시절의 셰헤라자데가 딱 이런 기분이었겠군.'
지주는 찰스의 이야기를 매우 흥미로워하며 경청했다. 여전히 그 엷은 푸른빛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지만 입은 무려 약간 곡선을 그리기까지 할 정도였다. 그가 가장 흡족해 하는 눈빛을 보인 부분은 바로 '회색 늑대'에 대한 얘기가 나왔을 때였다. '두 괴물이 싸우기 시작했는데, 꼭 먹잇감을 놓고 다투는 늑대들 같았다'고 할 때엔 거의 즐거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 때 슈미트는 강렬한 감정을 하나 선보였는데, 그건 바로 비웃음이었다. 그 비웃음을 느낀 찰스는 오히려 안도했다. 사실 슈미트가 자신을 바보 취급할수록 오히려 상황은 좋다고도 할 수 있었다. '죽일 가치도 없는 멍청한 바보' 정도로 결론을 내 주면 딱 좋겠다고 생각하며, 찰스는 이야기를 마쳤다.
"살아남으셔서 다행이군요. 하지만 사실 직접 눈으로 보기 전엔 참 믿기 어려운 일이오."
찰스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하지만 전부 제가 겪은 일입니다.' 라고 말했다. 다행히도 클라우스 슈미트는 그를 우습게 여기게 된 듯 싶었다.
"마을 사람들이 말하는 것이 다 사실인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전부터 사람이 주는 사고가 자주 있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게 바로 늑대 놈들의 짓거리라 이 말이오. 늑대들은 아주 교활한 생물들이지."
그는 '교활'이라는 말을 특별히 강하게 말했는데, 거기선 오히려 자부심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클라우스 슈미트가 누구와 자신을 동일시하는지는 뻔했다. 에릭의 말을 믿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진실'을 눈앞에서 보게 된 충격은 의외로 상당해, 찰스는 바짝 타는 입술을 자기도 모르게 혀로 핥았다.
괴물, 바로 그 괴물이다. 직감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자와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고 평화롭게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은 이제 다시 만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어떻게든 이 작자에 대해 좀더 알아봐야만 한다. 그의 머리를 온통 감싸고 있는 짙은 안개를 헤치고 어떻게든 헛점을 끌어낼 화제거리가 필요했다. 하여 고민을 하고 있는데 문득 클라우스 슈미트가 툭 하고 말을 꺼냈다. 그리고 그 말이야말로 바로 키워드라는 듯, 그 말을 꺼내자마자 클라우스의 사념이 찰스의 머릿속에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그 괴짜 사냥꾼과 만난 적이 있다면서요?"
"괴짜 사냥꾼이요?"
"에릭 말이오. 에릭 렌셔."
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최대한 태연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 노력하며 클라우스 슈미트의 생각에 정신을 집중했다. 둘 다 한꺼번에 하는 것은 꽤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예, 도움을 받았지요."
"놀라운 일이오. 나는 그 아이가 다른 사람을 도왔다는 말을 아주 오랫동안 듣지 못했거든."
분명 '그 아이' 라 말할 때 클라우스 슈미트의 머리 속에 울린 것은 다른 말이었다. 그 생각은 너무나 분명해서, 찰스의 귀에 '내 아이', 그리고 '내 것' 이라는 그 말들이 한꺼번에 발음된 것처럼 들릴 지경이었다. 감정도 이제는 손에 잡힐 듯 분명했다. 소유욕, 불길같은 소유욕 그 자체였다.
잠시 침묵하는 클라우스의 마음에 떠오른 것은 찰스에게도 이제는 너무나 익숙한 장면이었다. 에릭이 추억하던 것과 거의 비슷하지만, 이번에는 "괴물"의 각도에서 바라본 것이었다. '괴물'은 여자를 성가셔하며 그대로 앞발을 휘둘러 목을 그어 버렸고, 그 뒤의 아이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창백하게 질린 소년, 달빛에 비쳐도 알아볼 수 있을만큼 또렷한 푸른 눈과 보드라운 머리카락을 한 소년, 마치 잘 구운 생강빵처럼 달콤한 체취를 풍기는 소년이었다. 겁에 질린 그 아름다운 아이를 짓누르고 천천히 따스한 살에 이빨을 박는다. 압도적인 감미로움과 향긋함. 그건 말 그대로 공포스러운 감각이어서, 찰스는 찻잔을 든 손을 제대로 조절하기 위해 잠시 정신 집중을 풀어야만 했다.
"무슨 일이오, 괜찮소?"
"아...아무 일도 아닙니다. 잠깐 현기증이 들었어요."
"이런, 조심하시오."
어떻게든 방금 느낀 압도적인 감각을 지우고 싶어서, 찰스는 일부러 더 적극적으로 대화에 끼어들었다.
"성격이 좋지 않았나 보죠? 에릭 말입니다."
"글쎄, 정확히 말한다면 비뚤어졌다고 봐야 할 거요."
"헤르 슈미트께서는 정말 관대하시군요. 마을 사람들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차가운 푸른 시선이 갑자기 다가왔다. 몸을 찰스 쪽으로 낮춘 클라우스 슈미트는 마치 그 안의 생각까지 꿰뚫어보겠다는 듯 찰스의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
"그와 무슨 얘기를 했소?"
너무나 직접적인 질문이어서 순간 당황할 뻔 했다. 슈미트의 시선은 어떤 변화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흔들림 없이 이 쪽을 향하고 있었고, 입가에는 슬쩍 미소마저 올라와 있었다. 조금이라도 수상한 점을 느끼게 해선 끝장이라는 생각이 든 찰스는 최대한 침착하게 대답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가...그가 과거에 무서운 사고를 겪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아까 보았던 그 장면은 아직도 너무나 압도적으로 찰스를 지배하고 있었다. 피, 향기, 맛, 어떻게든 간신히 주워섬겼지만 이게 잘 이야기한 건지 아니면 실수를 한 건지 알아채기가 어려웠다. 어쨌건 슈미트는 고삐를 늦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사고라, 괴물 이야기겠지. 당신은 그의 얘기를 믿소?"
"...믿지 않을 수가 없지요. 제가 그 괴물을 직접 본 걸요."
"그의 '얘기'를 믿느냐고 했소."
이제 그의 의도는 너무나 명백했다. 필사적으로 들여다 본 생각 속에서, 클라우스는 에릭이 찰스에게 지주야말로 괴물이라는 얘기를 했다고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작자에게 에릭의 얘기를 하다니, 경솔했다.
"무슨 얘기 말씀입니까?"
"그가 괴물에 대한 얘기를 해 주었으면서, 정체 얘기는 안 해 주었단 말이오?"
이것은 반드시 성공해야만 하는 속임수였다. 대답 하나에 목숨이 달려 있었던 것이다. 찰스는 마른침을 한번 삼키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계속 물어보는 절 밀어냈습니다. 제가 들어봤자 믿지 못할 거라고만 하더군요."
클라우스 슈미트가 몸을 일으키는 동안, 찰스는 자신의 필사적인 연기가 성공한 것인지 아닌지 확신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런 슈미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허나 이번에는 손이 다가왔다. 찰스의 턱을 들어올리는 손길은 의외로 부드러웠지만, 그만큼 공포스럽기도 했다. 손이 들어올리는 대로 얼굴을 드니 그 곳에는 다시 슈미트의 눈이 기다리고 있었다. 엷은 푸른빛 눈, 얼음같이 차고 잔인한 겨울같은 눈동자가.
"그 말만 했소?"
'그런 자를 구했다고? 그 아이가?' 들려오는 슈미트의 생각에 찰스는 가볍게 침을 삼키고 눈을 내리깔았다. 더이상 시선을 마주했다간 그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을 들킬 것만 같았다.
"사실 그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그리고는 남은 기력을 힘껏 끌어모아 클라우스의 시선에 눈을 맞췄다.
"헤르 슈미트께서는 알고 계십니까?"
'아, 알고 있지, 알고 있고말고.' 슈미트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어깨를 으쓱 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 아이의 헛소리야 워낙 많아서 말이오."
'어쨌건 이 녀석이 그 아이에게 그렇게 중요한 자는 아니라면...' 헤르 슈미트는 엄지손가락을 들어 찰스의 뺨을 조용히 쓸어 내렸다. '없애도 별 일은 없겠군.' 찰스는 그 생각에 거의 비명을 지를 뻔 했지만 애써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그러지 않으면 이 자의 손에 언제 목숨이 떨어질지 모른다. 그는 늑대고, 이 곳은 그의 소굴이니까.
"어쨌건 난 괴물을 믿지 않소이다. 직접 보았다는 당신의 말도 믿기는 어렵군."
간신히 손이 떨어져 나갔고, 안도의 한숨을 쉬지 않기 위해 애쓰는 동안 슈미트는 돌아서서 술병이 들어 있는 장식장 쪽으로 다가갔다.
"술이나 한 잔 하겠소?"
"아닙니다. 아직도 보름은 끝나지 않았잖습니까. 별로 위험에 처하고 싶지는 않군요."
찰스는 늑대로 변하기 조금 전에 에릭이 했던 말을 기억해 냈다. 늑대들의 눈에 보름달은 사흘간 떠오른다고 했고, 그 얘기는 오늘까지는 보름달이 뜬다는 얘기가 된다.
"그럼 이만 가야 되겠군. 즐거운 시간이었소."
그런 찰스의 심경을 아는지 모르는지, 술을 한 잔 따라 든 슈미트는 선선히 웃으며 이 불길한 회담의 끝을 알렸다. 그러나 찰스는 다시 한번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잔 속에 일렁이는 술을 응시하는 슈미트는 바로 어제 맛보았던 에릭의 피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 아름다운 아이, 다 컸구나. 인간 따위에 연연하는게 어리석다고 그렇게 얘기했건만...'
순수한 소유욕, 집착, 가학. 그 모든 것이 뒤섞여 밀려왔다. 찰스는 어서 그 끔찍한 공간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얼른 인사를 하며 걸어나왔다. 슈미트의 진득한 감정은 그러나, 복도를 걸어나오는 내내 찰스의 마음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맑은 공기가 그리웠던 적이 있던가. 복도의 창을 전부 열어젖히고 싶을 정도로 답답했다. 살아오면서 찰스는 수많은 사람들의 감정과 생각을 느꼈다. 개중에는 폭력에 대한 갈망, 파괴욕, 정욕, 악의 등 '어두운' 것들을 접하게 되는 일도 있었다. 이제껏 찰스가 보아온 그러한 감정들이 '어두운' 것이라면 방금 슈미트가 보여준 것은 지옥의 심연에 비유할 만 했다. 살아있는 인간에게서 느껴본 적이 없을 정도로 강렬한 감정이었다.
하인이 문을 열었고, 싸늘하게 젖은 독일의 겨울 공기가 찰스의 폐 안에 가득 들어왔다. 소름돋게 추웠지만 동시에 개운했다. 숨을 내뱉고 다시 들이킨 후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고 하늘을 응시한 순간, 가라앉은 하늘을 본 찰스는 깨달았다.
땅거미가 지고 있으니 곧 달이 뜰 것이다. 그리고 말도 마차도 없는 자신은... 마을로 돌아가다 괴물을 만나리라. 에릭의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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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는 계속 달렸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았고 폐는 찬 공기로 가득차 터져나갈 것 같았지만 발을 멈출 수는 없었다. 처음 저택에 올 때에는 돈도 많으면서 왜 이리 외딴 곳에 저택을 지었을까 하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 이유를 잘 알 것 같았다. 오히려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호기심 많은 마을 사람들의 눈을 피해 지내는 편이 유리했을 것이다. 고용인들을 속이는 데에도 편했을 것이고, 사실을 알게 된 불운한 고용인들을 처치하기에도 편했으리라. 숲가에 나 있는 외길에서 누군가 사라지더라도 주변 숲의 늑대 핑계를 대면 그만이다. 말 그대로, 늑대인간에게는 완전범죄일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예전에 에릭을 덮칠 때에도 그렇게 된 것이었고, 이제는 찰스가 위협당하게 된 것이다. 찰스는 자칫 넘어질 뻔 했지만 간신히 균형을 잡고 계속 달렸다. 달이 떠오르면 클라우스 슈미트는 늑대 인간이 될 것이고, 찰스의 냄새를 따라, 혹은 눈 위에 남은 자국을 따라 뛰어올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두지 않으면 안 된다.
다 낫지 못한 등의 상처가 욱신거렸고, 거기 땀이 배어들어 따갑기까지 했지만 절대 멈출 수가 없었다. 죽고 싶지 않았고, 에릭에게 자신이 알아낸 것을 말해주지 못하고 죽는 건 더 싫었다. 가장 절망적인 것은, 찰스가 여기 온 걸 에릭이 알 리 없으니 만일 여기서 찰스가 습격당하면 도와줄 이도 없다는 점이었다.
마침내 해가 져서 주위는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찰스는 울 것 같은 심정이 되었지만 사실 그에게는 울 여유조차 없었다. 생각을 해야만 했다. 마을까지, 어떻게든 마을까지 간다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찰스는 당장이라도 절망해서 주저앉고 싶은 자신을 그렇게 다그치며 달리고 또 달렸다. 그러나 그의 체력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고, 차츰 다리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걷다 달리다, 넘어져 눈에 몇번 구르고 다시 간신히 일어나 몇 걸음을 옮겨놓으며 이동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대로라면 곧 따라잡힐 거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속도를 더 높일래야 높일 수가 없었다.
드디어 완전히 깜깜해졌다. 그래도 찰스는 희망을 아예 잃지는 않았다. 지금쯤 괴물이 이리 달려오고 있을 것은 분명했지만, 그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 저 앞에 마을의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희미한 희망의 불꽃을 꺼트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그는 몇 걸음을 더 옮겨 놓았지만, 다음 순간 절망스럽게도 뒤쪽에서 다가오는 거대한 뭔가를 느끼고야 말았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그저 마을을 향해 달려갔겠지만 그는 그러지 않을만큼 현명했다. 경고가 울리는 순간 그는 온 몸을 웅크리며 옆으로 굴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걸음을 옮기는 것도 힘들었건만, 생명의 위기 앞에서 몸이 저절로 움직인 것이다. 차가운 눈이 뺨에 느껴졌고, 간신히 고개를 들고 바라보자 그 곳엔 괴물이 서 있었다. 바로 그 지긋지긋한 흰색 털의 늑대인간이.
순간 오금이 저렸지만 찰스는 다시 몸을 일으키고는 달려나갔다. 아까까지만 해도 죽을 것 같던 몸이 생존 욕구 덕에 새로운 힘을 얻어 힘차게 움직였다. 반면, 반드시 성공하리라 믿었던 첫 공격이 실패한 것에 놀랐는지 늑대인간은 잠시 거기 그대로 서 있었고, 그 동안 찰스는 길에서 벗어나 잔가지가 잔뜩 달린 작은 나무들 사이로 뛰어들어가 다시 마을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어느새 쫓아온 괴물이 손을 휘둘렀지만 긴 발톱은 잔가지들만 잘라냈을 뿐, 정작 반동강이 났어야 하는 찰스는 저 앞쪽에서 허둥지둥 달려가고 있었다. 너무 지쳐서 가끔 손으로 바닥을 짚거나 넘어지면서 달려가고 있었지만, 어쨋건 점차 마을에 가까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늑대인간이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두 발이 아니아 네 발로, 긴 손톱을 땅에 박으며 달린 괴물은 금새 찰스를 앞질러 가로막았다. 멈춰선 찰스의 눈동자게 숨길 수 없는 절망이 떠올랐고, 괴물은 그것을 즐기듯 천천히 손을 들어올렸다. 그러나 곧 찰스는 알아챘다. 무언가 커다란 것이 괴물 바로 옆에 숨어 있었고, 곧이어 무서운 기세로 늑대인간에게 달려들었다.
"에릭!"
에릭이었다. 믿을 수 없었지만 정말로 에릭이었다. 여전히 온전한 늑대의 모습을 취한 에릭은 그대로 괴물의 팔을 물어뜯으며 덤벼들었다. 절망과 극한의 공포 뒤에 찾아온 안도감과 놀라움 때문에 찰스는 거의 기절할 것 같았지만, 지금은 기절할 때가 아니었다. 찰스는 몸을 일으켜서 어떻게든 발걸음을 옮기려다 흠칫 했다.
에릭을 도와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대체 에릭을 어떻게 돕는단 말인가? 저 둘 사이에 자신이 끼어들어봤자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지금은 총도 가지고 있지 않았고, 그 총이 있다 해도 지난번 같은 요행이 따라준다고는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마을 사람? 마을 사람들을 부른다? '두 명'의 늑대인간 앞에서? 게다가 그 중 한 명은 에릭이다. 이 곳 집 안에 꼭꼭 숨어있을 마을 사람들이 쉽사리 달려나와 줄 지도 알 수 없었지만, 하지만... 문득 찰스의 머리에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지난번 둘이 싸웠을 때, 에릭은 그렇게 크게 다쳤는데 슈미트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것은 말 그대로 둘의 전력차다. 거기까지 생각이 가 닿은 찰스는 이를 악물고 마을 쪽으로 달려갔다. 저 싸움을 못 하게 하는 것까지라면 마을 사람들이 도움이 되어줄 것이다. 두 괴물이 흩어져 떨어지도록 해야만 한다. 에릭이 다쳐선 안된다.
달리는 뒤에서, 늑대 울부짖는 소리와 괴물이 으르렁대는 소리가 마구 섞여서 들려왔다. 중간에 늑대의 비명 소리가 울렸을 때에는 자기도 모르게 뒤를 돌아볼 뻔 했지만, 에릭을 구하기 위해서라고 애써 다짐한 찰스는 뒤돌아보지 않고 계속 달렸다. 발이 무거웠고, 온 몸에서는 땀이 비오듯 쏟아졌다. 두터운 코트가 이제는 거추장스러워 던져 버리고 계속 달렸다. 마침내 마을 광장 어귀에 도착한 찰스는, 당연히 사람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거리를 바라보다가 이를 악물고 소리를 질렀다.
"도둑이야!"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괴물이 무서우니 고작해야 도둑 때문에 밖으로 나올 수는 없다고 생각한 까닭인 것이다. 찰스는 다시 한번, 있는 힘을 다해 절규했다.
"마을 창고에 도둑이야! 잡아라!!!"
숲 안에 온전히 폐쇄되어 있는 이런 마을에서 마을창고의 안전은 절대적으로 중요했다. 괴물에게 잡혀죽으나 굶어죽으나 죽는 건 마찬가지다. 아니나다를까, 몇몇 건물의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저 쪽으로 도망쳤어요! 곡식자루를 들고!!!"
클라우스와 에릭이 싸우고 있을 바깥쪽을 가리키며 소리지르자 몇몇 사람들이 쇠스랑이며 몽둥이를 들고 나오기 시작했다. 당황한 마을 사람들이 더 많이 모여 움직이기 시작하고서야 찰스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그들을 인도했고, 마을 사람들은 곧 "도둑 잡아라!" "놈들이 도망쳤다!" 라고 외치며 찰스를 앞질러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젠 정말 쓰러질 것 같았지만 그래도 함께 달려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머리 속에는 피에 젖어 쓰러진 에릭이 어른거렸고, 제발 마을 사람들의 인파에 놀란 두 괴물이 어떻게든 도망쳐 줬으면 하는 바램 뿐이었다.
"괴물이다!" "지주님!" "어르신!"
앞선 사람들의 입에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멈춰선 군중들 사이에서, 찰스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나와 아까까지 둘이 싸우던 현장을 바라보았다.
맙소사, 거기에는 피투성이가 된 늑대가 있었다. 회색 털 곳곳에 흉한 상처가 입을 벌리고 있었고, 거의 쓰러지다시피 절룩거리면서도 늑대는 이 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서 새파랗게 질린 한 남자가 마을 쪽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눈밭에 피를 뚝뚝 떨구며 걸어오는 늑대와 달리, 클라우스 슈미트는 어느새 찰스의 코트까지 주워 입은 채 이 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찰스는 눈을 크게 뜨고 그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달이 떠 있는데도 필요하다면 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렇다면 에릭은?
달려오는 클라우스의 뒤에서 늑대를 본 마을 사람들은 비명을 질렀다. 곳곳에서 "주여!" "맙소사!"라는 경악에 찬 탄성과 절규가 들려왔다. 몇몇은 성호를 그었고, 몇몇은 덜덜 떨며 뒷걸음질을 쳤다.
"살려줘!"
슈미트가 외쳤다. 그의 눈은 괴물에게 쫓기는 사람 치고는 지나치게 고요하고 냉정했지만, 표정만은 아주 훌륭하게 겁에 질려 있었다.
"괴물이야, 괴물이 정말 있었어!"
겁에 질려 있는 것은 마을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지만, 일단 자신들의 수를 믿은 것인지 클라우스를 감싸고 다들 늑대 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누군가가 외쳤다.
"저 피좀 봐, 오늘은 또 누굴 죽인 거지!"
"저 늑대가 어르신을 죽이려고 했어!"
다친 것은 클라우스 슈미트가 아니라 늑대였건만, 사람들은 서서히 기세를 올려가며 늑대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심상찮은 기색을 느낀 늑대가 으르렁거렸고, 찰스는 그만 눈을 감아 버렸다. 이러려고 사람들을 불러온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지주에게만 집중하고 있다가 지금의 사태를 깨달은 늑대가 몸을 돌리려 했지만, 마을 사람들은 어느새 서서히 움직여, 마치 늑대를 밟아 죽이려는 양떼들처럼 에릭을 둘러싸고 있었다.
"이것 봐, 왜인지 모르지만 다쳤어!"
"굶주렸나 봐. 힘이 별로 없을지도 몰라!"
슈미트가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생포합시다! 오늘 나온 모든 사람들에게 금화를 드리겠소, 내가 저놈의 가죽을 산채로 벗겨 드리지!"
물론 거짓말이리라. 허나 자신들이 수적으로 유리하다는 확신이 있는 마을 사람들에게는 더없이 유혹적인 얘기였고, 그러한 그들을 해칠 마음이 없는 에릭이라면 운 나쁘게 생포당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클라우스 슈미트는 그렇게 소망하던 에릭을 손에 넣게 되리라.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찰스는 이를 악물고 나섰다. 그런 일만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된다!
"잠깐! 잠깐만! 그 늑대는 괴물이 아닙니다. 지금 오해가 있어요!"
마을 사람들이 순간 멈칫 했다. 이중 상당수가 찰스를 먼 발치에서나마 보아서 알고 있었고, '먼 나라에서 온 박식한 박사'라는 것이 그들의 인식이었다. 이런 시골 사람들에게 박사란 '뭐든지 아는 사람'이다. 찰스는 어떻게든 이들이 그런 자신의 말을 조금이라도 믿어주길 바라며 외쳤다.
"저 늑대가 아닙니다. 진짜 괴물은 따로 있어요!"
"진짜 괴물?"
'괴물이 아니래' '뭐라고?' 술렁거리기 시작한 마을 사람들의 입을 막기라도 하듯 찰스의 말을 바로 받아친 것은 클라우스 슈미트였다. 그 쪽으로 시선을 돌린 찰스 앞에서, 지주는 파란 눈을 마주하고는 슬그머니 웃어 보였다. '똑똑한 꼬맹이로군.' 그 생각이 울려옴과 동시에 그가 입을 연 순간, 찰스는 머리가 말 그대로 쭈뼛 서는 감각을 느껴야만 했다.
"꼭 평소에 저 늑대를 알고 있었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자비에 박사?"
마을 사람들이 다시 수런거렸다. 그러나 아까와는 명확히 다른 성격의 말들이 그 사이를 오갔다.
- 저 사람, 요즘 계속 밖을 돌아다녔다며?
- 그런데 무사했다나 봐.찰스는 시린 주먹을 꼭 쥐었다. 지금 마을 사람들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는 알 만 했다. 찰스 자신은 웃어넘겼을 뿐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 없었지만, 마지막 '마녀'가 화형당한 지 고작해야 백년도 지나지 않았다. 마녀사냥의 광기가 지나갔다고 해도 독일, 게다가 이런 시골이라면 사람들의 생각이 아주 다를 수도 있다는 것도 잘 알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기서 입을 다물고 있을 수는 없었다. 에릭의 안위가 걸린 문제였고, 찰스 자신이 일으킨 문제였다. 그리고 여기서 다급히 부정하는 것이 오히려 더 안좋을 것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예, 전 저 늑대를 압니다."
술렁거림이 더 커졌지만, 찰스는 그런 움직임을 무시하고 큰 소리로 얘기했다.
"바로 어제 만났고, 절 구해 주었습니다."
"구해 주었다고?"
"괴물에게서요! 진짜 괴물 말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입을 다물고 찰스를 바라보았다. 이 쪽을 쳐다보는 그들의 눈에서는 여러가지 감정 - 불신, 의심, 불안 - 을 읽을 수 있었다.
"믿어주십시오. 진짜 괴물은 저런 늑대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끔찍합니다. 전 그 녀석에게 죽을 뻔 했어요!"
"진짜 괴물이라니, 박사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클라우스가 뻔뻔스레 끼어들었고, 곧장 마을 사람들을 돌아보며 외쳤다.
"난 지금 바로 저 녀석에게 습격을 당했소! 모두 보았잖소!"
마을 사람들의 얼굴이 험상궂어졌다. 찰스는 절망적인 심정이 되어 외쳤다.
"당신이야! 당신이 그 짓을 저질렀잖아! 날 죽이려던 건 바로 당신이라고!"
"저 미친 학자를 묶어라!"
슈미트는 웃으며 소리쳤다. 당황한 찰스가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둘러싼 마을 사람들의 입에서는 이미 '마녀! 마법사!'라는 소리가 튀어나오고 있었다. 다친 늑대보다는 지친 찰스가 만만해 보였는지 손들이 다가왔고, 찰스는 그 손을 뿌리치려 애쓰며 어떻게든 외치려 했다.
"다들 속고 있어! 당신들은!"
그러나 사방 팔방에서 팔을 붙들어 왔고, 누군가 더러운 천 뭉치를 찰스의 입에 재갈처럼 물려 묶어 버렸다. 또다른 억센 손이 팔을 뒤로 비틀었고, 결박하려는 것을 알아챈 찰스는 으르렁거리며 어떻게든 뿌리치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그렇게 손까지 묶이기 직전, 에릭이 끼어들었다.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아무리 수가 많다 해도 결국 순박한 농부들이었고, 거대한 늑대가 달려드는데 용감하게 맞설 사람이 있을 리는 없는 일이었다. 공포에 질려 우왕좌왕하며 사람들은 어떻게든 늑대에게서 멀어지려고 애썼고, 그래서 찰스는 잠깐이나마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건 피에 젖은 회색 털이었고, 늑대의 마음을 알아차린 찰스는 있는 힘을 다 해 몸을 던져 그 목덜미에 매달렸다.
눈 위로 핏방울이 떨어져 사람들의 발에 짓밟혔다. 잠시 몸을 낮췄던 늑대는 주저없이 일어나 찰스를 매단 채 내달렸다. 처음 얼마동안 질질 끌려가던 찰스는 정신을 차리고 이를 악물었다. 이렇게 목에 매달리면 둘 다 힘들어진다. 잠시 숨을 가다듬은 그는 발 밑을 빠르게 지나가는 바닥을 발로 차기 위해 애썼다. 실패, 그리고 다시 실패했다. 에릭의 피로 얼룩진 셔츠가 팔에 달라붙어 왔고 마음은 더 초조해졌다. 뒤에서는 "저놈 잡아라!" 라는 외침이 들려왔어. 늑대는 한쪽 다리를 절며 달려갔고, 간신히 바닥을 차는데 성공한 찰스는 그 반동으로 간신히 에릭의 등에 기어올라갈 수 있었다. 여전히 그저 엎드린 채 매달리는 것밖에 할 수 없었지만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에릭도 찰스도 편해졌다.
늑대는 쫓아오는 사람들을 피해 마을 광장으로 뛰어들어간 다음 마을 바깥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상처에서 핏자국이 떨어져 선명한 자국을 남겼지만 지금은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잠시 그렇게 숲길을 달리던 늑대는 속 수풀 속으로 몸을 숨겼고, 조심스레 낮은 자세로 한참을 걷다가 다시 어디론가 달려갔다.
핏자국이 고스란히 남았으니, 아마 그 날 밤에 눈이 내리지 않았다면 그들의 탈출은 실패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곧 또 눈이 내리기 시작했고, 마을 사람들은 눈 내리는 밤에 숲에 숨은 거대한 늑대와 마법사를 쫓아갈만큼 담대하진 못했다. 지주는 늑대를 붙잡지 못한 것을 영 아쉬워했지만 지금은 일단 물러날 수밖에 없다는 걸 인정하고 저택으로 돌아갔다. 몇몇 마을 사람들은 지주님의 옷차림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감히 지주에게 그에 대해 물어볼 만큼 간이 부은 사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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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는 계속 달리고 또 달렸다. 잠시 풀숲에 숨어 추격자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조심스레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늑대의 등에서 내려온 찰스는 에릭의 목을 끌어안고 눈물부터 쏟았다. 울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끌어안는 순간 와락 넘쳐흐른 눈물은 도저히 제어할 수가 없었다. '고맙다'고도 '미안하다'고도 말하지 못하는 찰스의 등에 다시 한번 그 앞발이 올라왔다. 피에 젖은 앞발을 느낀 찰스는 목도리를 풀어 에릭의 뒷다리에 난 제일 큰 상처를 감아 주었고, 에릭의 인도에 따라 눈 속으로 걸어갔다. 계속 내리는 눈이 이때만큼은 고마웠다. 마을 사람들이 도망친 늑대에 대해 수색하더라도, 이 눈이 핏자국과 발자국만 가려 준다면 에릭의 정체를 들키지는 않을 수 있을 것이다.
걸어가던 에릭이 잠시 뒤를 돌아보더니 수풀 속에 웅크리고 숨었다. 늑대가 느끼는 불안감이 고스란히 찰스의 마음에도 전해져 왔다. 추적에 대한 두려움, 클라우스에 대한 증오와 두려움, 이제부터 도망치려는 '안식처'를 그들이 알아서는 안된다는 걱정. 둘은 거의 몇시간 동안을 무성한 수풀 속에서 동정을 살피며 버텼다. 추위는 지독했지만, 인간과 늑대가 꼭 붙어있는 바람에 그래도 어떻게든 버틸 수 있었다.
한밤중도 지나 새벽이 될때 쯤 다시 늑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절룩거리던 발걸음은 여전했지만, 가쁘던 숨은 상당히 가라앉은 상태였다. 걱정스레 찰스가 바라보았지만 늑대는 아무 반응 없이 묵묵히 걷기만 했다.
그렇게 한참 걸어가다 보니 토굴이 나왔다. 굴 속에 숨어든 늑대는 그제서야 쓰러져 버렸고, 당황한 찰스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완전한 어둠 속에서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았고, 손으로 더듬어 보니 그나마 상자가 몇 개 쌓여 있어서 뒤져보았지만 총이나 탄약, 오래 보존할 수 있는 말린 식량 정도가 들어 있었을 뿐, 부상을 당한 에릭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은 없어 보였다. 초조한 기색으로 주위를 좀더 더듬어 보는데, 문득 수직으로 세워진 막대가 만져졌다. 다른 손도 뻗어 형태를 가즘해 본 찰스는 그게 바로 사다리임을 알아채고,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그 사다리가 어디까지 뻗어있는지 가늠해 보았다.
위를 향한 사다리, 올라가면 혹시 뭔가 더 있을지도 모른다. 발로 눌러 체중을 버틸만큼 튼튼한지 가늠해 본 찰스는 머리를 세게 부딪치는 일 없도록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곧 머리에 딱딱한 바닥이 와 닿았지만, 천천히 밀어보니 약간 묵직한 느낌과 함께 순순히 위로 올라갔다. 잠깐 멈추고 기색을 살핀 찰스는, 주위에 에릭과 자신 외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그 '문'을 위로 완전히 열고 몸을 끌어올렸다.
낯익은 풍경이 펼쳐졌다. 이 곳은 바로 에릭의 오두막이었고, 찰스가 밀고 올라온 곳은 주방의 작은 깔개 밑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찰스는 완전히 밖으로 나와 문을 닫아 보았다. 꽤 교묘하게 마감된 문은, 모르는 사람의 눈으로 보면 별 이상이 없어 보일 정도로 잘 위장되어 있었다. 문을 열어보니 안쪽, 그러니까 아래쪽에서는 빗장을 질러 잠글 수 있게 되어 있다. 간신히 안도의 한숨을 쉰 찰스는 벽난로 가로 달려가 늑대와 곰 모피부터 챙겼다. 하나는 깔개로, 하나는 덮개로 쓸 수 있을 것이다. 부피도 무게도 만만찮은 그것을 먼저 문 아래로 떨어트리고, 약단지와 지난번 사용했던 붕대도 함께 챙겼다.
생각 같아선 에릭을 이 위로 데려오고 싶었지만, 벽난로를 함부로 사용해 연기라도 나면- 그리고 최악의 경우 지주가 그 사실을 알기라도 하는 날이면 모든 일이 끝장날 수도 있었다.
약단지를 품고, 붕대를 어깨에 걸고 내려온 찰스는, 위에서 가져온 부싯돌을 이용해 등불을 켜서 토굴 안의 갈고리에 걸어두었다. 늑대는 아직도 쓰러진 채였고, 그렇게 쓰러지며 벌어진 상처에서 또 피가 흐르고 있었다. 상처에 약을 바르면 늑대가 괴로워 할 것은 뻔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벌어진 상처를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약을 떠서 바르는 순간, 늑대가 깽 하고 비명을 질렀다.
"괜찮아요. 쉬- 약을 바르려는 것 뿐이니까."
손이 닿을 때마다 움찔거리긴 했지만, 늑대는 찰스가 약을 다 바를 때까지 몸부림 한 번 치는 일 없이 참을성 있게 견뎌냈다. 두툼한 회색 털가죽 위에 붕대를 감는 일은 실로 무리라는 것을 깨달은 찰스는 어느새 늑대가 눈을 감아버렸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놀라 외쳤다.
"에릭? 잠들면 안돼요, 에릭!"
소용없이 눈이 굳게 닫혔다. 잠들었다기보다는 의식을 잃은 것이리라. 한숨을 쉬며 늑대의 머리를 끌어안던 찰스는 위층이 희미하게나마 밝아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혹시 해가 뜬 것인가? 아니면 추격꾼의 등불인가? 긴장하며 급히 위쪽 바닥문을 닫고 내려와 에릭을 감싸안았을 때, 답이 주어졌다.
"에릭..."
늑대로 변할 때와 달리, 인간이 되는 과정은 평화로웠다. 거대한 늑대는 천천히 줄어들었다. 크기가 줄어들면서 골격이 재배치되었고, 근육이 그에 맞춰 늘어나고 줄어들었다. 털가죽은 피부 밑으로 숨어들었고, 회색의 늑대 피부는 곧 부드러운 살색으로 바뀌었다. 여기에는 어떤 고통도 부자연스러움도 없었고, 품 안의 짐승이 인간 남자가 되는 광경을 찰스는 거의 경이에 차서 바라보았다.
"에릭!"
인간의 모습이 되었지만 남자의 눈은 여전히 굳게 내리닫혀 있다. 초조해진 찰스는 남자의 벌거벗은 몸을 살폈다. 의외로 상처 자체는 지난번보다 얕았지만, 상처 자체의 수가 많은데도 출혈량이 많았던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그 때문에 에릭의 몸은 더 차갑게 식어 있었고, 이제는 덜덜 떨기 시작했다. 최대한 빨리 붕대를 사용해 상처를 모두 감싸고 난 다음, 늑대의 모피를 깔고 거기 에릭을 안아올렸다. 최대한 편안하게 누울 수 있도록 자세를 잡아준 다음 곰 모피를 덮는다. 그리고 그럼에도 떨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다, 찰스는 옷을 벗기 시작했다.
체온을 유지는 데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같은 인간의 체온을 이용하는 것이다. 에릭의 피로 범벅이 된 옷은 잘 펴서 모피 위에 더 덮어 주었고, 직후 바로 그 모피 밑으로 기어들어가 의식 없이 덜덜 떨고 있는 에릭의 몸을 끌어안았다. 차갑게 식은 팔다리의 상처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어떻게든 체온을 전하기 위해 주무르고 쓸어내려 주었다.
늑대 인간의 회복력은 아주 잘 알고 있다. 일단 고비만 넘기면 틀림없이 빠르게 회복될 것이다. 그러나 그 고비를 넘기기까지는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았다. 그는 딱 보이는 것만큼 단단한 몸을 하고 있었다. 차갑게 굳은 몸은 마른 근육으로 가득차 있었고, 온 몸에는 자잘한 흉터가 많았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런 흉터를 온 몸에 새긴 채 의식을 잃은 남자는 미묘하게 여려 보였다. 눈을 뜨고 있으면 그렇게 강인해 보이는 사람이었는데.
찰스는 램프를 끄고, 애써 잠들기 위해 눈을 감았다. 눈을 뜨면 차갑던 에릭의 몸이 따뜻하게 녹아 있기를 빌면서, 그가 계속 숨을 쉬고 있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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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은 눈을 떴다. 온 몸이 욱신거렸지만 기묘하게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이 전신을 휘감고 있었다. 잠시동안 멍하니 그 느낌을 만끽하다 천천히 초점이 맞으면서 의식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얼굴에 닿은 공기는 꽤 차가웠는데 두텁고 부드러운 털가죽 담요 안에 들어있는 몸은 정말 따뜻했고, 에릭은 잠시 후에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품 안에 온전히 들어와 있는 사람 때문이었던 것이다. 팔을 에릭의 허리에 두른 채 품 속에서 잠든 남자의 몸이, 바로 그 부드러운 온기의 근원이었다.
두어번 눈을 깜박거리고서야 상황을 깨달을 수 있었다. 당황한 에릭의 시선이 푹 잠들어 있는 찰스의 얼굴에 머물렀다. 이런 무방비한 얼굴을 본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맨 처음 어리둥절한 얼굴로 에릭의 집에 들어와 잠들었을 때, 그리고 바로 어제 새벽에 봤던 얼굴이다. 그를 만날 때마다 언제나 그랬듯 차갑게 밀어내고 냉정하게 대한 게 고작인데 이 따뜻한 남자는 마치 강아지처럼 에릭에게 따라붙어온다. 처음으로 그의 말을 온전히 믿어주고 받아들여준 사람이었다.
마음 속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하고 올라왔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걸 깨달은 남자는 이럴 때 늘 그랬듯 또 이를 악물었다. 누군가에게 신뢰받고 기댈 수 있다는 것, 대체 얼마만에 느껴본 것이었던가.
늘 혼자였다. 어머니를 잃은 후, 이 끔찍한 저주에 빠진 후 단 한 번도 누군가를 믿어본 적이 없었는데, 용병 시절 거친 나날을 보내면서 함께 다녔던 '전우'라 할 법한 놈들에게도 기대 본 적이 없었는데, 그래서 다시는 살아 있는 인간 누구에게서도 그런 것은 얻을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만난지 단 며칠 만에 이 이상한 남자는 그 모든 확신을 다 부숴 버렸다. 강하지도 않고 민첩하지도 않고, 단숨에 죽여 없앨 수 있을 것 같은 이런 나약한 인간이.
그날, 이 남자가 처음 괴물을 만난 날 새벽,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그 푸르디 푸른 눈동자를 봤을 때, 도저히 손을 들어올려 그 얼굴을 만져보지 않을 수 없었다. 구한 것이 맞는지, 정말로 이 곳까지 무사히 도망쳐 와서 옆에 누워 있는 게 맞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자기의 환상일 뿐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날 아침 꾸었던 악몽의 희미한 그림자와 맞물려 눈앞의 남자는 더욱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를 잃을까봐 겁이 났던 것이다. 다시는 눈앞에서 그렇게 누군가를 잃고 싶지는 않았다. 그게 누구건.
찰스의 몸이 닿아 있는 모든 곳이 견디기 어려울 만큼 따뜻했다. 아직도 덜 나은 상처들 때문에 몸이 욱신거릴 테지만 그런 감각조차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찰스의 몸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잠에서 깰 것을 알면서도 다시 손을 들어 만져보지 않을 수 없었다. 살며시 닫힌 얇은 눈꺼풀을, 부드러운 뺨을, 붉은 입술을. 그리고 찰스의 눈꺼풀이 깨어나기 직전에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보았으면서도, 그 모든 것이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에릭은 도저히 키스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붉은 입술에, 생생히 살아있는 붉은 입술에.
"에릭?"
그제서야 깨달았다. 입술을 뗀 에릭의 눈에는 물자국이 있었다. 평상시 냉정하게 사물을 바라보던 청회색 눈에는 맑은 물이 가득 고였다. 방금 키스를 한 것 치고는 너무나 태연하고 덤덤한 얼굴이었지만 입매는 미처 감정의 흔적을 숨기지 못하고 긴장한 채였고, 의외로 속눈썹이 긴 눈이 자제할 수 없이 떨고 있다. 그가 느끼는 감정과 생각이 찰스의 마음 속에 흘러들어왔고, 그 감정을 공유해 버린 찰스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왜 울지?"
에릭이 물었다. 찰스는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내가 우는게 아닙니다. 이건...이건 당신이..."
에릭은 다시 한번 찰스의 입술에 키스했고, 찰스는 전혀 막지 않았다. 아니, 아예 막을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아마도 만나던 순간부터 분명 그에게 어느정도 매료되어 있었다. 이런 관계가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지만, 어쩌면 무뚝뚝하게 자신을 노려보던 그 맑은 청회색 눈동자를 접한 순간부터 끌렸던 건지도 모른다. 그의 키스를 순순히 받아들이며 눈을 감으려던 찰스는 다시 한번 그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치고는 그럴 향해 애써 웃어 보였다. 아까의 키스를 받아들였는데도 그는 거부당할까봐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괜찮아요." 찰스는 그에게 말했다. "정말 괜찮아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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