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풀어보면 알잖나.”
연이은 훈련이 강도를 높여 계속되던 어느 날이었다. 학교에 일이 있다고 집을 비운 찰스가 며칠만에 돌아왔다. 해외 출장을 다녀올 땐 가족에게 선물을 사 오는 거 아니냐며 들뜬 얼굴에, 손에 불룩한 쇼핑백을 들고.
“뭐 어때. 혼자 멀리 다녀 왔고, 면세점이 공항에 있고, 집 생각은 나고 말이지.”
뭐 이런 걸 사왔느냐고 타박을 주는 레이븐을 보며 찰스가 웃었다. 어려서부터 혼자였고, 가족이라고는 많아봐야 양부, 어머니, 레이븐 정도였던 찰스는 집에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이 많이 있다는 점이 매우 기쁜 눈치였다. 쇼핑백 안의 내용물을 받자마자 알렉스와 션이 누가 포장을 빨리 푸는가를 경쟁했고, 레이븐과 모이라가 찰스의 센스에 잠시 감동하는 동안-이 색 립스틱이 없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찰스는 주머니에서 작고 길쭉한 포장을 에릭에게 내밀었다. 어리둥절하던 에릭을 향해 찰스가 웃음지었다.
“자네도 가족 아닌가.”
“……누가 뭐랬나.”
이맛살을 있는 대로 찌푸리고 포장을 노려보던 에릭이 잠시 후 조심스러운 손길로 찢어지지 않게 살짝 포장을 풀었다.
“만년필?”
“자네가 쓰면 어울릴 것 같아서 말이지.”
만년필을 들고 쳐다보는 에릭을 향해 찰스가 흐뭇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강철색 몸체가 꼭 총을 닮은 만년필이었다. 한참 쳐다보던 에릭이 만년필을 찰스 쪽으로 내밀었다.
“비싼 건 못 받아.”
에릭이 무뚝뚝한 어조로 말했다. 찰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바로 대답했다.
“비싼 거 아닌데? 파커 45라고 요새 많이들 쓰는 거야. 나도 써 봤는데 필기감이 괜찮지.”
“비싸지 않다, 라. 도련님의 기준을 믿을 수가 없어서 하는 말이다.”
“아 정말. 사람을 뭐로 보냐, 모이라, 내 말이 맞죠? 파커 45는 비싼 만년필 아니지 않아요?”
“파커 45? 그거, 대학 입학 선물로들 많이 하죠. 좋아요, 튼튼하고.”
짐짓 한탄하듯 모이라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모이라는 자신의 기준에서도 비싼 만년필이 아니고, 부담 없이 받기 쉬운 선물이라는 점을 입증해 주었다. 옆에서 소년들이 만년필 멋있게 생겼다고 떠들어대는 거나, 남들 다 받는데 왜 너만 안 받냐고 쳐다보는 레이븐의 눈빛이 부담스러웠던 것 같다. 더불어 싱글싱글 웃으며 넣어두라고 손짓하는 찰스도. 한참 강철빛으로 반짝이는 소박한 유선형의 몸체를 손가락으로 더듬던 에릭이 한숨을 한 번 푹 쉬고 자켓의 가슴에 만년필을 꽂아넣는 것으로 선물증정식은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때때로 뭔가 메모를 할 때 에릭의 손에서 강철색 유선형 만년필이 반짝이는 것을 누구나 볼 수 있었다.
“쓸만하지?”
“볼펜이 없는 것도 아닌데 무슨 만년필이야. 내가 뭐 얼마나 쓴다고.”
무뚝뚝한 목소리에서 약간의 수줍음과 감사함을 느낀 찰스가 파안대소했고, 에릭은 이마에 주름을 잡고 찰스를 쳐다보았다.
“읽은 건 아닐테고.”
“자네 목소리만 들어도 대충 알겠는데 뭘. 마음에 들어?”
에릭은 잠시 뜸을 들이다 한참 후에 대답했다.
“총 같아서 좋군.”
에릭은 찰스의 얼굴을, 특히 눈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자신의 대답을 찰스가 부정적으로 생각한다면, 그에 대해 한 마디 할 게 있다고 생각했다.
“아, 응. 콜트 45를 보고 만들었다고들 하더라.”
하지만 찰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을 했고, 에릭은 왜 만년필의 모양에서 익숙함을 느꼈는지를 금방 깨달았다. 그러나 자신의 짐작과는 다른 대답을 하는 찰스를 보며 이상한 기분도 함께 느꼈다.
“하필 왜 총이냐. 내가 총 잡는 거 좋아하지도 않는 녀석이.”
“그러니까 총 대신 만년필.”
찰스는 에릭의 질문을 예상했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뭐냐 그게.”
“너한테 총보다 만년필이 익숙해졌으면 좋겠다고. 손으로 글씨를 쓰고, 잉크를 채우고, 만년필을 씻는 일상적인 일이 말이야.”
찰스의 대답에 에릭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그 답을 찰스는 그냥 있는 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렇게 평온한 하루가 저물었다.
그 만년필이 사실은 한정품이었고 굉장히 비싼 물건이었다는 것을 에릭이 아닌 매그니토가 알게 된 것은 나중에 엔젤
이 가격을 이야기해 준 다음이었다.
본문 속에 나온 만년필은 이런 겁니다.
위에서 두 번째 물건입니다. 강철색이 잘 어울리지 않습니까. 이런 사진을 주며 뽐뿌질하신 분은 유리 위를 걷는 분이라고 계십니다. 제가 누구라고 말은 못 하겠고요.
그리고 후일담.
“이거 내 옛 친구 아니신가.”
목에 닿는 차가운 날붙이의 감촉에도 휠체어에 앉은 조그마한 노인은 그저 웃으며 그렇게 말할 뿐이었다. 등 뒤에서 목에 무언가를 겨누고 있는 헬멧을 쓴, 노인이라고 말하기엔 위화감이 드는 남자는 그저 아무 말도 없이 목에 겨눈 무언가에 힘을 조금 더 넣었다.
“여기서 이럴 시간이 있나? 인질극도 별 소용이 없을 거라는 건 자네가 제일 잘 알잖나.”
밖에서 웅성대는 소리가 들리고, 잠시 후 찰스의 목을 겨누고 있던 금속이 바닥에 떨어졌다.
“미안하네. 자네가 올 줄 알고 여기에 뭘 좀 설치해뒀지. 자네의 힘은 통하지 않네.”
매그니토는 아무 말 없이 바닥에 떨어진 금속을 주워서 창가로 향했다. 찰스의 옆을 지나갈 때, 손에 들린 그 금속의 정체가 무엇인지도 알 수 있었다. 강철색 만년필이었다. 이제 오래 되어 낡은. 과거의 어느 날이 떠올랐다. 북적이는 집, 자신을 반기던 소년소녀들의 얼굴, 그리고 에릭.
“아직 갖고 있었던가.”
“손에 익어 쓸만하다네.”
“이러라고 선물한 게 아니었네.”
“나도 알지만 나에겐 이게 가장 잘 어울리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던지는 질문과 역시나 평범한 대답이 이어졌다. 그리고 총을 닮은 만년필이 잘 갈무리 되어 매그니토의 옷자락 안으로 숨어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