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2. 12. 16:40
- 19세기, 독일 배경입니다.
- 슈바르츠발트 근처의 한 마을, 박물학자 찰스와 사냥꾼 에릭입니다.
- 둘의 능력이나 느낌은 원작과 비교가 안될 정도로 약화되어 있습니다.
- 소설화를 위해 달리고 또 달립니다. (4~6편 합본입니다)
검은 숲 속에서 - 1
검은 숲 속에서 - 2
검은 숲 속에서 - 3
깊이 잠들어 있었다. 얼굴에 와 닿은 공기는 차가웠지만, 몸을 감싸고 있는 털가죽과 사람의 몸이 너무나 따뜻하고 부드러워서 깨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다. 절대 눈뜨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천천히 손을 내밀어 옆사람을 끌어안았다. 흉터 때문에 고르지 못한 피부, 단단히 잡히는 근육, 일반적인 남자가 잠자리 파트너에게서 기대하는 부드러움이나 매끄러움과는 한참 거리가 멀었지만 허리를 마주 안아오는 손은 다정하고 든든했다. 어깨에 숨결이 느껴지고 잠시 후, 까칠한 입술이 뺨에 닿았다. 눈을 뜨지 않을 수가 없어서 가늘게 뜨고 에릭을 바라본 순간 찰스는 그만 숨을 삼켰다.
어느새인가 램프에는 다시 빛이 돌아왔고, 이 쪽을 바라보는 남자의 얼굴에 엷은 불빛이 드리워져 있었다. 내리뜬 눈의 속눈썹 끝에 엷은 황금색이 앉았고, 그 안에 잠겨 있는 푸른 눈이 엷은 초록색이 되어 찰스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 완벽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순간이었다.
어느새인가 램프에는 다시 빛이 돌아왔고, 이 쪽을 바라보는 남자의 얼굴에 엷은 불빛이 드리워져 있었다. 내리뜬 눈의 속눈썹 끝에 엷은 황금색이 앉았고, 그 안에 잠겨 있는 푸른 눈이 엷은 초록색이 되어 찰스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 완벽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순간이었다.
에릭이 가만히 손을 들어 찰스의 얼굴에 손가락을 대고 천천히 아래로 쓸었다. 마치 이 사람이 정말 여기 있는지 확인하는 듯한 몸짓이었다. 그가 뭘 느끼는지 알고 싶어서 찰스는 마음을 열었고, 그 순간 눈앞의 에릭이 느끼는 충족감, 불안감, 행복감, 두려움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다. 에릭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두려움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의 행복 때문에 생겨난 것이었다.
'지킬 수 없을지도 몰라.'
'잃게 될 지도 몰라.'
찰스는 가만히 고개를 젓고 에릭의 손을 쥔 다음 그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고 조용히 말했다.
"아무 걱정 하지 말아요."
에릭의 눈이 떨렸다. 그리고 그날의 첫 키스가 시작되었다.
'지킬 수 없을지도 몰라.'
'잃게 될 지도 몰라.'
찰스는 가만히 고개를 젓고 에릭의 손을 쥔 다음 그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고 조용히 말했다.
"아무 걱정 하지 말아요."
에릭의 눈이 떨렸다. 그리고 그날의 첫 키스가 시작되었다.
에릭은 한참동안 찰스를 끌어안고 있었고, 둘은 간간이 따뜻한 키스를 나눴지만 어제처럼 끝까지 가진 않았다. 무엇보다도 배가 고팠던 것이다. 에릭은 일어나며 찰스의 이마에 입을 맞춰 주었고, 찰스는 행복감을 느끼며 둘의 체온으로 달아오른 모피 안에 몸을 푹 묻었다. 에릭이 옷을 입고 바깥으로 통하는 계단으로 나간 다음에야 찰스는 달아오른 얼굴을 양 손에 숨기고 지금까지 자기가 대체 뭘 한 건지 돌이켜 보고는 아주 잠깐이지만 패닉에 빠졌다.
맙소사, 늑대인간을 만났고, 그에게 매료되었고, 같이 잠까지 자 버렸고, 이제는 그의 집에 와서 숨어있기까지 한 것이다. 폭도로 돌변한 마을 사람들과 클라우스 슈미츠에 대해 생각하던 찰스는 고개를 저었다. 클라우스 슈미츠, 찰스가 느낀 그는 에릭을 소유하고 싶어했다. '내 아들, 내가 창조한 것.' 잠시나마 들여다 본 그의 집착은 정말 병적이었다. 그는 찰스가 에릭의 정체를 모른다는 걸 알고는,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해서 살의를 품었다. 이제 클라우스는 그게 아니라는 걸 안다. 찰스는 거대한 늑대를 보고도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리고 에릭은 이길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찰스를 위해 목숨을 걸고 달려들어서 싸웠다. 게다가 필사적으로 찰스와 함께 달아났다.
"맙소사." 찰스는 방금 깨달은 사실을 천천히 중얼거렸다. "이제 그는 정말로 날 죽이고 싶어하겠군."
떠오르는 사실은 하나 뿐이었고, 찰스는 에릭이 돌아오면 반드시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옷을 갖춰입은 에릭이 종이로 싼 꾸러미와 작은 단지를 들고 찰스에게 다가왔다.
"식사."
짧게 말하며 내린 꾸러미 안에는 호밀빵과 잼 그리고 치즈가 들어 있었다. 빵은 딱딱했고 치즈에선 약간 낡은 냄새가 났지만, 음식에 시선이 가 닿은 순간 심각한 공복을 느꼈기에 찰스는 굶주린 아이처럼 게걸스레 그것들을 먹어치웠다. 사실 지주의 집에서 나온 이후 물 한 모금 제대로 먹지 못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에릭이 든 단지 안의 찬물은 십중팔구 주위의 눈을 녹인 것이었겠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봄날의 시원한 샘물처럼 감미로웠다.
에릭도 함께 묵묵히 식사를 했다. 찰스보다는 훨씬 침착한 손길이었지만 그도 꽤 배가 고팠던지 식사 중에는 아무런말이 없었다. 간신히 빵과 잼과 치즈로 배를 채운 후 찬물을 마신 찰스는 그제서야 약간의 한기를 느꼈고, 어제 걸치고 있던 셔츠는 에릭의 피에 푹 젖어 지금 걸치기는 매우 곤란하다는 걸 깨달았다. 추운 듯 양 손으로 팔을 문지르자 그 때를 기다렸다는 듯 에릭이 뭔가를 내밀었다.
맙소사, 늑대인간을 만났고, 그에게 매료되었고, 같이 잠까지 자 버렸고, 이제는 그의 집에 와서 숨어있기까지 한 것이다. 폭도로 돌변한 마을 사람들과 클라우스 슈미츠에 대해 생각하던 찰스는 고개를 저었다. 클라우스 슈미츠, 찰스가 느낀 그는 에릭을 소유하고 싶어했다. '내 아들, 내가 창조한 것.' 잠시나마 들여다 본 그의 집착은 정말 병적이었다. 그는 찰스가 에릭의 정체를 모른다는 걸 알고는,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해서 살의를 품었다. 이제 클라우스는 그게 아니라는 걸 안다. 찰스는 거대한 늑대를 보고도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리고 에릭은 이길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찰스를 위해 목숨을 걸고 달려들어서 싸웠다. 게다가 필사적으로 찰스와 함께 달아났다.
"맙소사." 찰스는 방금 깨달은 사실을 천천히 중얼거렸다. "이제 그는 정말로 날 죽이고 싶어하겠군."
떠오르는 사실은 하나 뿐이었고, 찰스는 에릭이 돌아오면 반드시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옷을 갖춰입은 에릭이 종이로 싼 꾸러미와 작은 단지를 들고 찰스에게 다가왔다.
"식사."
짧게 말하며 내린 꾸러미 안에는 호밀빵과 잼 그리고 치즈가 들어 있었다. 빵은 딱딱했고 치즈에선 약간 낡은 냄새가 났지만, 음식에 시선이 가 닿은 순간 심각한 공복을 느꼈기에 찰스는 굶주린 아이처럼 게걸스레 그것들을 먹어치웠다. 사실 지주의 집에서 나온 이후 물 한 모금 제대로 먹지 못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에릭이 든 단지 안의 찬물은 십중팔구 주위의 눈을 녹인 것이었겠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봄날의 시원한 샘물처럼 감미로웠다.
에릭도 함께 묵묵히 식사를 했다. 찰스보다는 훨씬 침착한 손길이었지만 그도 꽤 배가 고팠던지 식사 중에는 아무런말이 없었다. 간신히 빵과 잼과 치즈로 배를 채운 후 찬물을 마신 찰스는 그제서야 약간의 한기를 느꼈고, 어제 걸치고 있던 셔츠는 에릭의 피에 푹 젖어 지금 걸치기는 매우 곤란하다는 걸 깨달았다. 추운 듯 양 손으로 팔을 문지르자 그 때를 기다렸다는 듯 에릭이 뭔가를 내밀었다.
"뭡니까?"
"입을 게 없을 것 같아서."
흰 셔츠는 낡은 것이었지만 깨끗하게 세탁되어 있었고, 찰스는 대번에 그게 누구의 옷인지 알아봤다. 에릭 쪽을 바라보자 퉁명스러운 답이 돌아온다.
"괜찮아. 여분은 있으니까"
웃으며 걸쳐보니 어깨는 좀 넓었고 팔은 좀 길었고, 전반적으로 고양이 장삼 입은 것마냥 어설픈 모습이 되었다. 약간 눈살을 찌푸린 찰스가 '목부분을 채우니 목이 조금 졸리는데' 따위의 굴욕적인 생각을 하는 동안 에릭은 말없이 찰스가 걸친 셔츠의 소매를 딱 두 번 접어 주고 아래쪽의 단추들을 여며 주었다. 찰스는 단추를 끼우던 그 손을 가만히 잡고는 말을 걸었다.
"에릭, 할 말이 있어요."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들어 눈을 맞춰 온다.
"나랑 같이 여길 떠나요."
"뭐?"
"이 곳을 떠나요. 서쪽으로, 영국으로 가도 좋아요. 자랑은 아니지만 영지 안에는 숲도 있죠, 당신도 좋아할 거야."
에릭은 한동안 아무 말도 못하고 찰스만 바라보고 있었다. 꼭 그 모습 그대로 얼음조각상이라도 되어 버린 것처럼. 하지만 찰스는 이 남자가 지금 충격 속에서 머리가 터져버릴 정도로 고뇌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행복감과 불안감, 희망과 절망, 그 외 여러가지가 완전히 범벅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곧 에릭의 마음은 안정되어 갔고, 찰스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답이 주어질 거라는 걸 알고 눈을 크게 떴다.
"안돼."
"어째서요?"
조금의 주저도 없이 반문하는 찰스에게 에릭은 괴로운 듯한 표정을 보이며 말했다.
"나는 이 곳을 떠날 수 없어. 나는 슈미트를..."
"그를 처단해야 하니까?"
에릭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이가 없어진 찰스는 물어뜯듯 다시 물었다.
"그를 이길 수 있기는 해요?"
에릭이 눈을 떴다. 그에게 있어 몹시 아픈 질문일 거라는 걸 잘 알 수 있었지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직접 보았던 두 번의 충돌, 에릭은 상처만 입고 물러나야 했다.
"그를 이길 수 있기는 해요?"
에릭이 눈을 떴다. 그에게 있어 몹시 아픈 질문일 거라는 걸 잘 알 수 있었지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직접 보았던 두 번의 충돌, 에릭은 상처만 입고 물러나야 했다.
"그래, 지금 나는 놈을 이길 수 없어."
그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하는 에릭은 정말 고통스러워 보였기 때문에 그대로 끌어안고 등을 문질러 주고 싶을 정도였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알면서 그래요?"
"그럴 수밖에 없어."
"여기 있어 봤자 과거에서 벗어날 수는 없어요. 오히려 더 묶일 뿐이잖아."
"어딜 가도 마찬가지야."
"그거, 가 보고 생각한 거 맞아요?"
"놈이 날 불러."
찰스는 에릭을 바라보았다. 눈을 꾹 감은 에릭은 한 마디 한 마디 끊듯이 말하고 있었다.
"놈이,날,부른다고."
"에릭."
"어딜 가도 그랬어. 왜 이런지는 나도 알 수 없지만... 프랑스에 있을 때에도, 제네바에서도, 계속 느껴졌어. 여기"
짚은 곳은 왼쪽 가슴.
"여기가 찔리는 것 같아. 속이 울렁거리기도 하고, 돌아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지. 유독 심한 날이면," 그는 입 끝을 끌어올리면서 피식 웃었다. "그 때의 꿈을 다시 꾸고. 여기 오고서야 간신히 나아졌지만 다시 나가봤자 마찬가지가 되겠지."
찰스는 입술이 바짝 타는 것을 느끼고 초조하게 핥아 적셨다. 이럴 줄은 몰랐다. 늑대인간끼리 서로를 부른다는 말은 어떤 전설에서도 들어본 적 없었다. 허나 다시 생각해 보면, 늑대라는 짐승 자체가 자기 무리에 단단히 얽매이는 종이다. 다만 에릭이 전혀 유대를 유지할 생각이 없는데도 부를 수 있을 정도라니, 문득 쇼우가,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한 괴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것 따위 무시해요' 라고 가볍게 말해버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자신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런 '부름'에 시달리는 삶은 이 곳에서 사는 것보다 더 괴로운 것일지도 모른다. 그를 그런 고통 속에 두어야 할까? 늑대를 숲에서 끌고 나와 보이지 않는 우리에 가둬두게 되는 건 아닐까?
"그럼 어쩌죠?"
'그런 것 따위 무시해요' 라고 가볍게 말해버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자신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런 '부름'에 시달리는 삶은 이 곳에서 사는 것보다 더 괴로운 것일지도 모른다. 그를 그런 고통 속에 두어야 할까? 늑대를 숲에서 끌고 나와 보이지 않는 우리에 가둬두게 되는 건 아닐까?
"그럼 어쩌죠?"
답을 바라고 던진 말은 아니었지만 에릭은 그 질문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고개를 숙이고 잠시 침묵했다. 순간 찰스의 마음 속에 에릭의 답이 들려왔다. 놀라운 일이었다. 이제껏 찰스가 남의 마음을 읽은 적은 꽤 있었지만, 지금처럼 일부러 읽으려고 한 것도 아닌데 울려온 일은 없었던 것이다. 에릭에게 너무나 집중했기 때문일까? 지금은 에릭의 마음이 확실히 "들려왔"다. 그는 찰스가 이 곳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오직 찰스만이.
"찰스,"
"그만둬요."
당장 말을 잘라 끊어 버렸다. 에릭이 눈을 크게 뜨고 찰스를 바라보았고, 그는 그 시선을 똑바로 맞받아치며 아주 또렷하게 말했다.
"돌아갈 거면 이미 돌아갔을걸. 처음 습격받았던 날 짐 싸서 런던에 가 버렸겠지. 가지 않은 이상 나더러 여길 떠나라고 해 봤자 소용없습니다, 에릭 렌셔."
"하지만 위험해. 넌 네가"
"잘 알아요. 덕분에 눈 똑바로 뜨고 아주 잘 봤죠. 보름달이 뜨는 14일부터 16일 사이, 당신들은 두 가지 형태로 변할 수 있고 둘 다 상당한 힘을 지니고 있어요."
"찰스."
"그래도 그런 걸로 날 막을 수는 없어. 그리고 이제부터는 당신이 모를 얘기를 해 주죠."
"돌아갈 거면 이미 돌아갔을걸. 처음 습격받았던 날 짐 싸서 런던에 가 버렸겠지. 가지 않은 이상 나더러 여길 떠나라고 해 봤자 소용없습니다, 에릭 렌셔."
"하지만 위험해. 넌 네가"
"잘 알아요. 덕분에 눈 똑바로 뜨고 아주 잘 봤죠. 보름달이 뜨는 14일부터 16일 사이, 당신들은 두 가지 형태로 변할 수 있고 둘 다 상당한 힘을 지니고 있어요."
"찰스."
"그래도 그런 걸로 날 막을 수는 없어. 그리고 이제부터는 당신이 모를 얘기를 해 주죠."
찰스는 잠시 숨을 골랐다. 지금부터 해 줄 얘기는 어쩌면 이 남자의 오랜 상처를 완전히 짓쑤셔 놓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 그래도 말해야만 했다.
"클라우스 슈미트가 왜 당신을 그렇게 만들었는지 알고 있나요?"
"클라우스 슈미트가 왜 당신을 그렇게 만들었는지 알고 있나요?"
에릭 주변의 공기가 한동안 멈췄다. 모든 행동을 멈추고 이 쪽을 바라보는 엷은 푸른 빛 눈동자만이 어둠 속에서 램프 빛을 받아 희미한 빛을 발했다. 꼭 귀를 세우고 잔뜩 긴장한 채 이 쪽을 바라보고 있는 굴 속의 늑대 같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찰스는 그가 혼란에 빠져 있고 약간 공포스러워 하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잠깐 망설였지만, 그래도 멈추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난 그를 읽을 수 있었어요. 그의 '시각'에서 그 사건을 다시 볼 수 있었죠."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남자는 눈을 거의 깜박이지도 않았다.
"그는 당신을 원해요. 어떤 의미로는 '사랑'한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을 거예요."
"...뭐?"
"그에게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아이'이자...동반자예요."
에릭은 말 그대로 충격을 받은 것처럼 보였다. 찰스는 그런 그를 감싸안아주고 싶은 욕망을 다시금 느꼈지만, 눈을 질끈 감아 그것을 무시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
"당신은 그를 죽이러 이 곳에 왔겠지만 적어도 그는 아니예요. 그는...그는 당신을 강렬히 원해서 그 짓을 한 겁니다."
"그럼, 어머니는..."
에릭의 눈이 떨렸다. 마치 깊은 칼날이 가슴을 헤집어 놓은 것 같은 얼굴이었고, 그런 표정을 한 남자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건 너무 잔인한 짓이겠지만, 그래도 말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이 곳에 계속 묶인 채 살아가게 될 테니까. 이 어두운 숲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그 날, 슈미트는 당신만을 노리고 있었어요."
"결국 나 때문에,"
"그런 생각 하지 말아요. 어차피 가만 두지 않았을 거예요. 오히려 어머니 덕분에 이 곳을 떠날 기회가 생겼던 겁니다."
"하지만 내가 아니었다면,"
"바뀌는 건 없었을 거예요. 스스로에게 물어봐요, 잘 알고 있잖아요."
'그래도 이 곳에 있고 싶어요?' 찰스는 이제서야 에릭을 끌어안으며 귀에 속삭였다. 그리고 결국 견디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젓는 에릭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흉터투성이 어깨에 입술을 묻고, 몇번이나 속으로만 미안하다고, 정말 미안하다고 말했다.
슈미트의 부름은 앞으로도 계속될 테고 에릭은 어디서건 그 때문에 괴로워할 것이다. 어쩌면 일생동안 시달릴지도 모른다. 혹은 영원토록일지도.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와 함께 이 곳을 떠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 후로 며칠간, 떠날 준비는 착착 진행되었다. 에릭은 여관에 남아 있던 찰스의 짐들 중 대강 손에 들고 올 수 있는 것들을 가져왔고, 찰스는 그중 여행길에 쓸만한 것들을 골라내고 나머지는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태워 버렸다.
탈출 방법을 생각하는데 의외로 시간이 걸렸다. 둘의 사정상 찰스가 이 곳에 들어올 때 이용했던 역마차 등은 전혀 이용할 수 없다. 일단 도시로 나가면 미신이 통하지 않으니 안전하게 영국으로 돌아갈 수 있겠지만, 적어도 그 '도시'로 나갈 때까지는 남의 눈에 띄지 않아야만 했다. 둘은 머리를 모으고 논의에 논의를 거듭했고, 찰스가 짐 속에 꾸려온 이 지역의 지도를 들여다보며 고민하고 있으면, 숲 지리에 대해 환히 아는 에릭이 그 지도를 보정해 가며 루트를 정했다.
탈출 방법을 생각하는데 의외로 시간이 걸렸다. 둘의 사정상 찰스가 이 곳에 들어올 때 이용했던 역마차 등은 전혀 이용할 수 없다. 일단 도시로 나가면 미신이 통하지 않으니 안전하게 영국으로 돌아갈 수 있겠지만, 적어도 그 '도시'로 나갈 때까지는 남의 눈에 띄지 않아야만 했다. 둘은 머리를 모으고 논의에 논의를 거듭했고, 찰스가 짐 속에 꾸려온 이 지역의 지도를 들여다보며 고민하고 있으면, 숲 지리에 대해 환히 아는 에릭이 그 지도를 보정해 가며 루트를 정했다.
"물론 나는 갈 수 있어." 당장 출발하고 싶다는 찰스에게 에릭은 냉정하게 잘라 말했다. "하지만 넌 안될 거야." 찰스는 순간 눈을 가늘게 뜨고 미간에 주름을 지으며 에릭을 쳐다보았다. 반박하고 싶은 기색이 역력했지만 에릭은 멈추지 않았다.
"넌 도시 사람이야."
"섭섭한걸, 그래도 본국에서는 제법 날렸는데."
어느새 찰스는 에릭을 이전보다도 더욱 편하게 대하고 있었다. 사실 에릭의 기억을 더듬어 본 바, 찰스보다는 몇 살 많은 듯 했지만 에릭 본인이 그것을 바랐다. 지금만은 마치 어른이 철없는 아이를 바라보듯 냉정하게 내려다 보며 말을 잇는 모습이 얄밉기 그지없었지만.
"귀족 나리들이 뭘 즐기는지는 나도 잘 알아. 하지만 겨울 숲을 빠져나가려면 그런 걸로는 무리야."
"에릭?"
"눈을 헤치고 걸어갈 수야 있겠지. 하지만 곰을 만나면 어떻게 할 거지? 늑대를 만나면?"
찰스는 입을 다물었다. 에릭이 정말 하고 싶어하는 말은 다른 것이었다. '그리고 슈미트를 만나면?' 그는 찰스를 지켜주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찰스가 강해지기를, 적어도 '자신이 없더라도' 이 숲을 빠져나갈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네가 내 옆에 있어주면 되잖아."
"늘 그럴 수는 없어."
"에릭, 왜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거야? 우린 분명 잘 빠져나갈 수 있을 텐데."
이번에는 에릭이 입을 다물었다. 뭘 생각하는지는 굳이 읽을 필요도 없었다. 거칠었던 전장 생활 때문인지 또는 어린 시절의 기억 때문인지, 그는 기본적으로 낙관보다는 비관 쪽에 무게를 두는 사람이었다. 찰스는 양손을 뻗어 에릭의 얼굴을 감싸쥐고, 꾹 다물린 입술에 입술을 갖다댔다. 허리를 안으며 키스해오는 그의 입술을 느끼고는 어깨에 머리를 얹고 천천히 말했다.
"잘 될 거야. 알 수 있어. 다 잘 될 거야."
에릭은 말없이 찰스의 등을 천천히 문질렀고, 둘은 다시 키스를 시작했다. 그들의 대화는 늘 그런 식이었다. 에릭은 자기 마음을 표현하는데 서툴렀지만 찰스는 그 마음을 읽을 수 있었고, 찰스는 그런 에릭이 이해할 수 있도록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려고 늘 노력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마을 사람들이 이 곳에 거의 오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한 두 사람은 조금씩 오두막 밖으로 다니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찰스가 몸을 단련하려면 실내에서만 움직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에릭이 지닌 장총들을 능숙하게 다루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도 야외 활동은 꼭 필요했다.
두 사람은 슈미트가 추적해 올 가능성을 생각해서 떠나는 날을 다음 보름 사흘 전으로 잡고 준비를 진행했다. 그리고 그를 위해 숲에서 훈련 겸 함께 사냥을 하며 겨울 숲에서 먹을 식량을 마련했다. 찰스는 점점 에릭의 총을 잘 다루게 되었고, 찰스가 에릭의 도움 없이 처음 사슴을 잡았을 때 에릭은 경축의 의미로 가장 맛있는 부분을 직접 구워 찰스에게 차려 주었다. 에릭이 마을에서 사 온 납을 작은 도가니에 녹여 틀에 부어서 반짝이는 새 총알을 만들 때마다 찰스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신기해 했다.
"총알을 사지 않고 만들다니, 신기해."
"이게 정상이야."
손을 가까이 가져가려는 찰스를 제지하며, 에릭은 완전히 식기 전에는 만지면 큰일난다고 주의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때때로 에릭이 마을에 갈 때면 찰스는 지하의 공간에 조심스레 숨었고, 에릭은 마을의 분위기를 살피고 왔다. 마을에서는 늑대와 마법사의 이야기가 아직도 화제였고, 에릭은 오두막에 돌아가 마을의 분위기를 궁금해 하는 찰스에게 어깨를 으쓱여 답을 대신하곤 했다.
그 날도 마을에 모피를 팔러 가기 위해 짐을 꾸리던 에릭의 귀에 이 쪽을 향해 다가오는 인기척이 들려왔다. 상대는 아직 문 밖에 있었지만 예민한 감각이 경고를 해 왔고, 에릭은 찰스가 이미 지하실에 숨었다는 것에 안심하며 상대의 노크를 기다렸다. 하지만 탕탕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 다음, 에릭은 등골이 얼어붙는 것 같은 감각을 느꼈다. 낯익은 목소리, 낯익은 기척, 낯익은 냄새.
"문좀 열어주지 않겠나?"
클라우스 슈미트였다.
-----------------------------
믿을 수 없었지만 정말로 클라우스 슈미트였다. 에릭은 잽싸게 뒤를 돌아보았고, 찰스가 지하에 숨어 있는 상태라는 것에 안도하며 고개를 다시 앞으로 돌려 문 틈으로 클라우스 슈미트의 모습을 확인했다. 대체 그가 왜 여기 왔을까? 무엇 때문에? 혹시 찰스의 일에 대해 눈치챈 것은 아닐까? 오만가지 생각이 다 떠올랐다.
에릭은 입을 꽉 다물고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문을 열 수밖에 없다. 안에 서 있는 자도 밖에 서 있는 자도 늑대인간이다. 지금 에릭에게 클라우스 슈미트가 확실히 느껴지듯, 슈미트에게도 그럴 것이다. 바로 며칠 전에 그 증오스러운 작자를 보긴 했지만, 그래도 자신의 집 안에 그를 들인다는 데에는 정신적인 준비가 필요했다. 심호흡을 마치고 문을 열자 그 남자가 거기 서 있었다. 태연한 얼굴에는 즐겁다는 듯 미소까지 떠올린 채.
"아, 마침 있었군. 다행이네."
클라우스는 한동안 에릭을 쳐다보다가 아무렇지도 않은, 아주 일상적인 얘기를 건네듯 말을 걸어왔다.
"좀 들어가도 되겠나? 할 얘기가 좀 있어서 말이야."
에릭은 순간 거부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이 곳은 그의 집이며 둥지였다. 여기 이 끔찍한 작자를 들여놓는다는 건 상상도 하기 싫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문을 닫아버리는 대신 조용히 한 걸음 물러서서 클라우스가 들어올 수 있도록 해 주었다. 혹여라도 그가 에릭에게서 거부당한 뒤 이 집 주위를 살피기라도 하면 곤란하다.
건물 안이 신기하다는 듯 둘러보는 클라우스의 뒤에서, 에릭은 문을 닫고 천천히 돌아섰다. 머릿속은 의문으로 터져버릴 것 같았지. 대체 어째서? 무엇 때문에?
"이런, 많이 놀랐나 보구나."
건물 안이 신기하다는 듯 둘러보는 클라우스의 뒤에서, 에릭은 문을 닫고 천천히 돌아섰다. 머릿속은 의문으로 터져버릴 것 같았지. 대체 어째서? 무엇 때문에?
"이런, 많이 놀랐나 보구나."
클라우스 슈미트는 이전과 다름 없는 부드러운 얼굴로 에릭을 바라보았고, 에릭은 눈앞의 남자를 노려보며 이를 악물었다. 이렇게 만나서 죽이는 상상이라면 수십 수백번도 더 했지만 지금은 그것이 너무나 어렵다는 걸 알고 있다. 그는 강하다. 게다가 에릭이 알 수 없는 힘을 더 지니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들키기 전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그 외에 또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아니오."
목소리를 제대로 낼 수 있을지 걱정됐지만, 입을 열자 흘러나온 것은 의외로 침착한 목소리였다.
"언제나 스스로에게 솔직하지 못하구나. '우리 종족'에게는 흔치 않은 일이지."
에릭의 눈동자가 순간 싸늘하게 가라앉았고, 잠시 참을까 했지만 결국 내뱉어 버리고 말았다.
"우리? '우리' 라고 하지 마!"
"오, 에릭. 넌 어릴 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하나도 없구나."
클라우스는 진심으로 안됐다고 생각하기라도 하는지 측은히 여기는 듯한 눈으로 혀를 찼다.
"하지만 난 네 그런 점도 좋아한단다. 그래서 널 택한 거지."
"하지만 난 네 그런 점도 좋아한단다. 그래서 널 택한 거지."
"...뭐?"
클라우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부드럽게 미소짓고 있었지만 그 눈은, 그 푸른 눈은 엄밀히 말해 사랑이나 다정함으로 빛나고 있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 눈은 사실 차가운 평가자의 눈, 그리고 그렇게 감정하여 '가치'를 매기고 나서야 드러나는 소유욕을 가진 자의 눈이었다. 에릭은 그 눈과 시선을 마주친 순간 살의가 혈관을 타고 흐르는 걸 생생히 느꼈지만, 어쩔 수 없이 주먹을 꾹 쥐고 참아내야만 했다.
"그래, 그렇게 인내심을 길러야지."
클라우스가 손을 뻗어 왔고, 에릭은 그의 손가락이 자기 얼굴을 향해 다가온다는 걸 알면서도 그 자리에 못박힌 듯 서 있었다. 손가락이 얼굴을 따라 천천히 내려오다, 인중 옆에 찍힌 작은 흉터를 어루만진다.
"못난 것들이 네게 흠집을 냈구나."
결국 견디지 못하고 에릭은 팔을 쳐들었다.
클라우스의 손을 쳐내고 목을 쥐기 위해 번개같이 손을 뻗었지만 클라우스의 다른 손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붙들린 팔목을 통해 느껴지는 힘은 가공스러운 것이었고, 옴쭉달싹할 수 없다는 걸 안 에릭은 경악에 차서 남자를 바라보았다. 대체 이 힘은 뭐란 말인가.
"인간들은 늘 어리석지. 네가 돌아왔다고 들었을 때 좀더 철이 들어 있기를 바랬는데, 아직 인간 티가 덜 벗겨졌구나."
"내가 돌아온 건 널 죽이기 위해서야."
이글거리는 푸른 눈에는 살의가 가득했고, 말하며 드러난 이는 거의 짐승의 송곳니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하지만 클라우스 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오히려 그런 에릭을 조롱하듯 말했다.
"다 그렇게 깨달아 가는 거란다."
다른 팔을 휘둘렀지만 그 또한
클라우스에게 붙들리고 말았다. 남자는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온 힘을 다해 팔을 뿌리치려는 에릭을 아무 힘도 들이지 않고 제압하며 여상스레 말했다.
"난 널 택했다. 그게 뭘 뜻하는지는 곧 깨닫게 될 거야. 아이야, 넌 내 상대가 안된다. 넌 내 무리Pack의 가장 훌륭한 일원이 되겠지."
"...!"
방금 들은 말을 믿을 수 없었다. 클라우스는 일순 저항이 멎은 것에서 그 경악을 알아차리고는 싱긋 웃었다.
"몰랐다고는 하지 말거라. 우리는 홀로 사는 자들이 아니야."
"...뭐라고?"
그리고는 그러쥔 손목을 음미하듯 슬며시 쓸어내린다. 진저리가 쳐졌지만 피할 수 없다는 걸 안 에릭은 이를 악물고 그 감각을 견뎠다.
"넌 내 무리에 곧 제 발로 들어오게 될 거다."
"내가 네놈 목을 찢어놓은 뒤에 말이지."
클라우스는 그런 폭언을 듣고도 당황하기는 커녕 오히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웃기만 했다. 그리고 마치 키스라도 할 것처럼 에릭의 얼굴 앞에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천천히 속삭였다. 더운 숨결이 빰을 타고 흘렀고, 그 감각을 견디지 못하고 어떻게든 뿌리치려 했지만 소용 없었다.
"작은 에릭, 넌 네 발로 날 찾아오게 될 거란다. 그리고 우리는 아주 긴 세월을 함께 할 거야."
"날 죽이기 전엔 어림도 없어."
"옛날 생각이 나는군."
그 말을 할 때의 클라우스는 무언가 다른 것을 보고 있는 듯 했다. 눈앞에서 이글거리는 에릭의 눈 너머에, 마치 너무나 그리운 무언가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리고 마치 꿈에서 깨기라도 하는 듯 표정을 바꾸며 화제를 돌린다.
그 말을 할 때의 클라우스는 무언가 다른 것을 보고 있는 듯 했다. 눈앞에서 이글거리는 에릭의 눈 너머에, 마치 너무나 그리운 무언가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리고 마치 꿈에서 깨기라도 하는 듯 표정을 바꾸며 화제를 돌린다.
"'그 인간'과 함께 지내고 싶은 모양이지?"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귀엽더구나. 재기발랄하고... 네가 그 정도로 소중히 여기는 줄은 몰랐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입을 꾹 다물고 몸을 굳힌 채 노려보던 에릭의 몸이, 갑자기 클라우스의 몸에 밀착되었다. 포옹, 뜨거운 포옹이었다. 목덜미에 코를 묻고 깊이 숨을 들이키는
클라우스의 행동에 에릭은 공포를 느꼈다.
"오해하지 마라, 아들아."
"난 네 놈의 아들이 아니야!"
이를 악물고 내뱉었지만
클라우스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체취를 잔뜩 묻히고 있는 걸 보니 늘 함께 지내고 있나 보구나."
이런 순진한 아이 같으니. 잔뜩 몸을 굳히는 에릭을 느끼며 슈미트는 싱긋 웃었다. 나름으로는 인자한 미소였다.
"오해 말거라. 그 인간 나부랭이를 네가 어떻게 대하건 네 마음이니까."
포옹을 풀고 양 손으로 에릭의 머리를 붙든 남자는 여전히 웃으며, 하지만 눈만은 싸늘하게 식힌 채 말을 이어갔다.
"그 인간을 살려서 이 곳에서 내보내고 싶다면 내게 말만 하려무나. 네 애완동물로 갖고 싶다고 해도 난 상관 없다."
곧이어 우득거리는 소리가 집 안에 울리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에릭의 눈에 경악과 공포가 한꺼번에 차 올라왔다. 지금은 밤이 아니다. 게다가 보름은 이미 지난지 오래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일까? 잘 차려입었던 옷의 솔기가 툭툭 터져나가고 잠시 후, 에릭의 눈앞에는 이제 어린 시절부터 악몽의 주체였던 바로 그 괴물이 서 있었다. 그릉거리는 음성이 간신히 인간 언어의 형태를 띠었다.
"그 예쁜이의 머리에서 뇌수가 터져나가는 걸 보고 싶지 않으면..."
새파랗게 질린 에릭의 눈앞에서 괴물은 이를 드러내며 선언했다.
"다시는 이 곳을 떠나지 말거라. 넌 내 아이란다."
칼날같은 손톱이 에릭의 머리를 떠나 몸에 와 닿았다. 이를 악문 순간 찢어질 듯한 아픔이 가슴에 느껴졌다. 에릭의 가슴에는 네 줄의 긴 상처가 새겨졌고, 가슴을 끌어안고 몸을 웅크린 에릭 앞에서 슈미트는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온 몸에는 너덜거리는 옷의 잔해가 휘감겨 있었지만, 어깨에 걸쳐뒀던 모피코트만은 바닥에 떨어진 채 무사했다.
그것을 걸친 슈미트는 아무 인사 없이 쓰러진 에릭의 이마에 입맞추고 집 밖으로 나갔고, 예민한 에릭의 귀에는 마차 떠나는 소리가 들려 왔다. 하지만 그 뒤로도 한참동안 에릭은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상처 때문이 아니라 깨달음 때문이었다. 찰스의 말대로 슈미트가 원했던 건 어머니의 죽음이 아니고 바로 자신이었다. 또한 지금 클라우스 슈미트와 만나 이야기 함으로, 에릭은 그가 본질적으로 자신과 같은 것을 바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버렸다.
늑대인간으로서 에릭은 자신의 모든 것을 저주했지만 그럼에도 가슴 깊이 거의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는 것이 있었다. 늑대는 결코 혼자 사는 존재가 아니다. 홀로 온 유럽을 떠돌아다니며 어떻게든 이 곳을 떠올리지 않으려 애썼지만 불가능했다. 증오스럽기 이를 데 없는 슈미트의 부름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가슴 속 깊은 곳으로부터 타오르는 본능의 외침 같은 것이었다. 모든 것을 공감할 수 있는 이에게 아무것도 숨길 일 없이 함께 눈밭을, 숲을 뛰고 달리며 사냥하고 먹을것을 나누며 살아가는 것.
"찰스..."
나를 이해해 줄 유일무이한 존재, 보호하고 보호받으며 서로를 돌볼 존재, 지금 에릭에게 떠오르는 건 단 한 명의 이름 뿐이었고, 그걸 떠올린 순간 한 가지 진실이 영혼에 와 닿았다. 절대 부정할 수도 외면할 수도 없는 단 하나의 진실이.
슈미트는 결코 에릭을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찰스는 떠날 수 있으리라. 그는 그의 나라로, 집으로 돌아가 다시 가족의 품에 안길 수 있고, 그래야만 한다.
하지만 그 옆에 자기 자리는 없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다. 슈미트가 그리 놔두질 않을 테니까.
늑대는, 혼자 사는 생물이 아니니까.
-계속
-계속
'연구 결과 -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메모] X saga (2) (107) | 2012.02.15 |
---|---|
[중편] 검은 숲 속에서 - 5 (4) | 2012.02.13 |
[중편] 검은 숲 속에서 - 3 (8) | 2012.02.06 |
[중편] 검은 숲 속에서 - 2 (4) | 2012.01.28 |
[단편] 만년필 (8) | 2012.01.26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