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릭찰스 분위기
* 이 둘이 체스 두는게 정말 좋습니다. 근데 늘 에릭이 이기는게 참 묘해요. 찰스랑 두기 전에는 쇼우가 가르쳐줬을까?
"체크메이트"
찰스는 끄응 하고 신음을 내며 머리를 긁적였다. 어찌해도 소용없이, 찰스의 킹은 외통수에 몰려 아무 움직임도 할 수 없는 상태다. 옆으로 움직이면 비숍에게 죽을 거고, 지금 이 상태로는 퀸에게 당한다. 물론 에릭 또한 그 상황을 충분히 알고 있었고, 그래서 입가에 느슨하게 승리의 미소가 매달려 있었다. 웃는 일 자체가 흔치 않은 남자이지라 웃는 모습을 보는 것 자체는 좋았지만 그것이 자신의 패배를 기초로 삼고 있어서야 기분이 마냥 좋기는 어렵다.
"졌어. 정말 대단하군."
"12전 8패야, 찰스. 인정해. 자네 최근은 나한테 네 번 연속 졌다고."
찰스의 마음 속에서 슬그머니 심술이 피어올랐다. 기본적으로 찰스 자비에는 쾌활하고 여유 넘치는 성격을 갖고 있긴 했지만 그래도 호승심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한번 더 해 보지 않겠어?"
"또 지려고?"
"모르잖아. 아직 10시 정도니까 시간은 있어."
한번쯤은 룰을 어겨도 상관 없겠지. 사실 찰스는 손가락을 굳이 올리지 않아도 남의 생각을 읽는 정도는 가능했다. 손가락을 올리는 것은 그 감촉을 통해 집중하기 위한 것이었으니까. 고로 이번 한 판 정도는 저 기고만장한 에릭의 마음을 읽어서 꺾어줘도 상관 없으리라.
"자네가 너무 늦게 자서 늦잠자면 레이븐이 시끄럽게 잔소리 할 텐데."
"괜찮아, 논문 쓸 때엔 하루 세 시간만 자면서도 잘만 버텼어."
잠시 침묵하던 에릭이 못 이기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찰스는 신이 나서 다시 체스말을 배열했다. 두고 보자, 에릭 렌셔! 체스 플레이어는 각 말을 움직이면서 동시에 마음 속에 전체적인 행보를 그리게 되어 있다. 상대에게 어떤 함정을 짤지, 어떤 방식으로 외통수에 몰아넣을지 읽어낸다면 승리는 별로 어렵지 않다. 방금 패배한 찰스가 흑을 잡고 폰 하나를 한칸 앞으로 옮겨두었다. 직후 에릭이 처음 말을 손에 잡고 옮기려는 순간, 찰스는 조용히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탐색에 들어갔다.
- 저 손가락을 핥고 싶군.
찰스는 순간 깜짝 놀라 눈을 깜박거렸다. 그리고 곧이어 주위를 돌아보았다. 에릭의 눈에 들어올 '손가락'의 주인이 될 법한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다.
"찰스?"
"어?...어."
"뭐 찾나?"
찰스는 애써 자세를 다잡으며 최대한 선량하게 웃어 보였다. "찾다니, 뭘?" 고개를 저으며 이번에는 폰 하나를 더 앞으로 옮긴다. 나이트를 밖으로 빼기 위한 포석이었지만 다음 순간 강하게 울려오는 에릭의 생각에 거의 실수로 말을 떨어트릴 뻔 했다.
- 손을 붙들고, 손가락 사이에 혀를 미끄러뜨리면...
맙소사, 얼른 말을 놓고 손가락을 자기도 모르게 꼭 주먹으로 쥐며 다른 손으로 감쌌다. 슬쩍 확인한 에릭의 시선이 자신의 손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시점에서 찰스는 얼굴에 화끈하니 열이 오르는 것을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
"무슨 생각 하나?"
"음?"
"...말, 말 말이야 에릭. 자네 순서니까 어서 움직이라고."
- 저 시끄러운 입술을 키스로 막아버리고 싶군.
생각은 그렇게 하는 주제에, 에릭은 "너무 재촉하지 마. 생각이라는 걸 좀 해야지." 라고 뻔뻔스레 말하며 루크 앞의 폰을 치웠다. 찰스는 곤란한 기분이 되어 머리를 긁적이며 어떻게든 체스 행보에 집중하려 애썼다. 하지만 도저히 에릭의 마음을 엿보는 걸 그만둘 수가 없었는데, 그것이 호기심 때문인지 또는 다른 무엇 때문인지는 찰스도 알 수 없었다.
- 이번에도 지면 키스해 버릴까.
- 어떻게 몰아붙이면 제일 당황할까.
- 의자 위가 좋겠군.
- 저 빌어먹을 트위드 바지 따위 확...
- 얼굴이 빨간 걸 보니 찰스도 그럴 기분일까? 아니, 말하진 말자.
이것은 실로 점입 가경이었다. 체스가 진행됨에 따라 체스판 위의 싸움은 복잡해져 갔지만 에릭의 머리는 오히려 더욱 집요하게 찰스의 온 몸을 훑어가며 범하고 있었다. 에릭은 체스의 행보 따위 거의 생각하지 않았다. 비숍을 세 칸 옮기며 한다는 생각이라는 게 "아, 비숍을 세 칸 옮겨야겠군. 찰스는 어떤 반응을 할까"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제서야 찰스는 깨달았다. 에릭 랜셔에게 체스는 체스가 아니었다. 그것은 찰스 자비에를 공략하여 무너뜨리고 마침내 범하는 과정이었고, 그는 섹스에 탐닉하는 카사노바처럼 싸움을 조율하고 숨을 고르며 찰스를 공격해 가고 있었다. 체크메이트를 향해 무자비하게 달려가는 것은 곧 그의 정복 그 자체였던 것이다.
"찰스, 심기일전 하는 것 같더니 이게 웬일인가?"
결과는 어이없게도 고작 10분만에 찰스의 패배로 끝났다.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짧은 승부에 에릭은 약간 실망했고, 그러면서도 만족하고 있었다. 하지만 에릭의 민망한 상상과 욕망에 시달리며 그저 말을 옮기는 것이 고작이었던 찰스는 온 얼굴이 시뻘겋게 물든 채 어이없는 변명만 중얼거릴 뿐이었다.
"와인때문에 그런가 봐. 음, 역시 잘못 생각했어. 가서 자야지."
"와인? 고작 한 잔 마시고?"
"어...그게..."
"자네 평소엔 한 병도 쉽게 비웠잖아."
- 이 친구도 달아오른 건가?
번뜩 스치는 에릭의 생각에 찰스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눈앞의 남자의 청회색 눈이 그 몸짓에 잠깐 커졌다가 평상대로 돌아온다. 다만, 그 안에 담긴 눈빛은 방금 전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었다.
"...찰스 자비에?"
"어...들어갈게, 그러니까,"
"자네, 거기 서."
벌떡 일어섰지만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에릭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제법 사나운 기세로 찰스를 노려본다. 하지만 그 입가에 떠올라 있는 것은 분명 웃음이었다. 그래, 말하자면 바로 '상어의 미소'
"읽었지."
"...어?!"
"내 생각, 읽었지?"
찰스는 둥그래진 눈으로 에릭을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아, 아냐 난 그냥 와인을..."
"개소리 마. 찰스 자비에, 자네가 와인 한 잔에 취한다면 난 맥주 두 모금에 취한다."
"그...그게"
"읽었다면,"
남자가 다가온다. 숨이 서로 닿을 거리가 되어서야, 찰스는 이 남자가 자신보다 확실히 키가 크다는 것을, 그리고 그 차이가 의외로 압도적이라는 것을 깨닫고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에릭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거의 닿을 듯한 거리까지 에릭의 입술이 다가온다.
* 커플링은 에릭찰스 분위기에 수위 거의 없어요.
* 스칼렛 위치님의 어택으로 다시 써본 영화의 그 장면입니다.
* 영화 대사도 들어있지만 창작상황입니다.
* 영화를 아직 안 보신 분들은 네타일지도?
"내가 아는 한 자네 치고는 오래 버틴 거지."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 말을 하고 나서야 이 쪽으로 걸어오는 가벼운 발소리가 들린 것이 전부. 즉, 그가 이 곳으로 나오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잇는 상태에서 - 아마도 꽤 오래 - 기다리고 서 있던 것이리라.
에릭은 멈춰서서 남자의 말을 곱씹어 보았다. '내가 아는 한' 그는 마치 에릭의 삶을 아주 오래 전부터 지켜봐 오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고 있다. 마주친지 며칠 되지도 않는 주제에. 돌아서서 그 자리에 버티고 선 남자를 바라보았다. 찰스 자비에라고 했던가, 입을 꾹 다물고 이 쪽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다. 해 줄 말은 하나밖에 없었다.
"나에 대해 대체 뭘 아는데?"
누구라 해도 움찔 할 수박에 없는 질문이다. 특히 에릭은 자신의 외모가 이런 말을 할 때 어떤 힘을 발휘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차갑고 무정하고 배타적으로 보이는 데에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보통은 얌전히 입을 다물고 물러난다. 이 자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
마찬가지여야 했다.
"에릭, 난 다 알고 있어. 쇼우가 자네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봤어."
피가 차갑게 식었다. 손가락 끝에서부터 전율이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에릭은 눈앞에 선 남자, 찰스 자비에를 노려보았다. 실로 어이가 없었다.
"일부러 보려던 건 아니야."
아마도 에릭을 진정시키기 위해 한 말일지도 몰랐지만, 오히려 그 말이 에릭의 마음 속에 억눌려 있던 분노의 고삐를 풀어 버렸다.
"그래? 대단하군."
어느새 악물린 이 사이로 씹어뱉듯 말한다.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이 펼쳐지는 모양이지?"
"그건,"
"그래서 속속들이 다 아신다 이건가."
"에릭!"
그도 이 대화를 불편해 한다. 찰스의 긴장한 미간이, 이 쪽에 못박힌 날카로운 시선이, 얇은 입술 사이로 엿보이는, 에릭 자신과 마찬가지로 악물린 이가 그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고, 그것이 오히려 에릭으로 하여금 하고 싶은 말을 모두 쏟아버리도록 밀어붙이고 있었다. 그렇다. 그가 불편해 하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 그 잘난 힘으로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보셨단 말이지. 그러고도 날 막을 생각이 드나?"
어쩌면 너무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하지 않으려던 말까지 한 것을 보면.
"쇼우와 별반 다를 바도 없군."
이쪽을 바라보던 짙은 푸른 눈동자에 불꽃이 튀었다. 뭔가를 말할 듯 모양까지 잡혔던 입은 그대로 굳었고, 잠깐 숨을 멈추었던 남자는 다시 한번 숨을 들이키더니 의외로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말하지만 일부러 읽은 건 아냐, 자네가..."
"아, 그러시다는 건 알아들었어."
"자네가!" 끼어들려는 에릭을 단호하게 가로막으며, 이제는 그 또한 분노한 것임에 틀림없어 보이는 찰스가 말을 계속 했다. "흘리고 다녔잖아, 사방 팔방으로."
"뭐?"
"느껴져." 그는 이 말을 꺼낸 다음 잠시 숨을 몰아쉬었다. "보지 않을 수가 없어. 자네 주위에 얼마나 엄청난 분노와 증오가 회오리치고 있는지 알고는 있나."
에릭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 넓은 바다에서 한번에 집어낼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분노였어. 그래, 실제 내 머리가 아플 정도로."
"그거 참 미안하게 됐군. 그 때 난"
"지금은 내 말을 좀 들어줬으면 좋겠어."
방금 전보다는 한결 가라앉은 목소리였지만 거기 실린 압력은 비교할 수 없으리만치 무겁다. 물론 그런 압박 따위 간단히 무시해 버릴 수 있었지만 에릭은 잠시, 아주 잠시만 참아 주기로 했다.
"에릭, 네게는 지금 네가 어떤 상태인지 보이지 않을 거야."
"글쎄 내 생각은 좀 다른데."
"아냐. 넌 몰라." 찰스는 다시 한번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내쉬며, 말하자면 한숨을 섞어 말했다. 미간에는 다시 주름이 깊이 새겨져, 그 밑의 푸른 눈이 거의 아파 보일 정도로 일그러진다.
"지금 내게는 만질 수 있을 것처럼 생생해. 분노와 증오와 절망이 널 갉아먹고 있어. 쇼우가... 클라우스 슈미트가 했던 짓들이 끝없이 널 괴롭히고 있고,"
"거기까지."
"그리고 그게 날 괴롭게 해."
그 말을 하며 갑자기 찰스의 표정이 바뀌었다. 얼굴은 여전히 괴로와 보였지만, 이제 그것은 분노보다는 오히려 슬픔에 가까운 표정을 띄고 있다.
"언제까지 스스로를 그렇게-"
"거기까지라고 했는데 못 알아들었나 보군."
에릭은 돌아섰다. 그것이 분노인지 단순한 충동인지 혹은 더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은 그 안의 어떤 부분인지는 모르겠지만 더 이상 찰스와 대화하고 싶지 않은 것만은 분명했다. 쇼우에 대한 정보를 얻었고, 이제 더 이상 여기 있을 필요가 없다.
"에릭!"
두어걸음 옮겨 놓았을 때 갑자기 몸이 멈추었다. 찰스 쪽을 돌아보려 했지만 역시 몸은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의식은 분명히 깨어 있고 시각이나 촉각, 청각은 정상인데 근육을 전혀 움직일 수 없다. 그것을 인식하고 경악한 다음 순간, 바로 그 경직이 풀렸다. 어떻게든 움직여 보려고 다리에 힘을 주려던 참에 그 알 수 없는 경직이 풀리는 바람에 한 발이 크게 앞으로 나가고, 동시에 한 쪽 무릎이 그대로 바닥에 닿았다. 틀림없는 외부로부터의 통제, 찰스의 능력이다. 경악만큼이나 솟구쳐 오르는 분노에 번개같이 고개를 돌려 돌아본 순간, 에릭은 찰스 또한 자신 만큼이나 놀라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무슨 짓이지?"
"미안해, 나는... 아니, 고의가 아니었어. 그저..."
"붙잡아 둘 생각인가? 의식을 조종해서?"
"아냐!" 세차게 고개를 젓는다. "아냐 에릭. 이건 내가 의도적으로 한 일이 아냐. 난 그저..." 푸른 눈이 불안정하게 흔들린다. "의도가 아니었어. 이런 강제적인 수단으로 그럴 생각은 없었어." 찰스가 양 손을 들어 얼굴을 감쌌다. 갈색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로 흩어진다. 천천히 얼굴을 쓸어내린 남자는, 굳게 입을 다물고 이 쪽을 노려보고 있는 남자에게 어째서인가 약간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가겠다면 당연히 보내 줄 생각이었어. 막을 수 있지만,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고 생각했어."
"그런가."
"다만..."
말하지 않은 뒷말이 무엇인지는 묻지 않아도 뻔했다.
"막고 싶다고 생각했다는 거군."
찰스는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잠시 말을 고를 듯 생각에 잠겼다가 눈을 감고 그대로 고개를 끄덕인다.
"미안해, 방금의 그건 실수였어. 하지만 에릭, 잘 생각해 봐. 네게는 친구가 필요해."
"이제껏 그런 건 필요없었어."
"쇼우에게는 친구들이 있어. 그를 잡으려면 네게도 있어야 해."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던 분노가 천천히 가라앉고, 이제 의구심이 그 자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대체 무엇 때문에 이 남자가 이렇게까지 자신을 붙들려 하는 것일까? 단지 에릭 렌셔라는 돌연변이가 전력에 필요해서? 아니면 아까 주절주절 얘기하던 자신의 '분노'라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우셔서? 어느 쪽이건 에릭이 굳이 그 바램에 부응할 필요는 없다는 걸 모르는 걸까?
"생각해 봐. 좀더 큰 것을 바라보고 움직여 볼 기회란 말이야."
왜 이렇게까지 나서서 붙드는 걸까. 그가 스스로 말했듯 그저 간단히 지배해서 묶어버릴 수도 있을 텐데. 에릭은 찰스의 눈앞으로 다가가, 자신의 것보다 좀더 낮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가 말했듯, 찰스 자비에는 적어도 지금 에릭 렌셔가 하고 있는 생각을 읽어내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서야 기분이 약간이나마 나아졌다.
"그럼 내가 하나 질문하지."
손을 내밀어 턱을 붙들 때까지, 찰스는 그저 어리둥절해 하는 시선을 에릭을 향해 던졌을 뿐이다.
"쇼우가 한 짓을 다 봤다고 했지."
"전부."
"그리고 그게 내게 어떤 의미인지까지?"
아주 잠깐이지만 찰스가 침묵한다. 눈을 내리뜨고, 잠시 시간이 지난 후 똑바로 에릭의 시선을 올려다보며 올곧게 말한다. "알아. 느꼈어." 에릭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고, 그대로 고개를 숙여 찰스의 입술을 취했다.
깊이 키스할 때까지 깨닫지 못했던 것을 보면 '일부러 읽지는 않는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깜짝 놀라 몸을 물리려는 남자의 턱을 붙들고 일부러 거칠게 키스했다. 도망칠 틈 따위 주지 않고, 입술과 이 사이를 가르고 들어가 깊이 혀를 얽어 숨쉬기조차 어렵도록 몰아붙였다. 반사적으로, 아마도 밀어내기 위해 에릭의 어깨를 붙들었던 손이 힘없이 스르륵 내려간다. 지금 이 키스를 '거부'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깨달은 것이리라.
"...에릭?"
"그래. 말한 대로 지배할 생각은 없는 것 같아서 다행이군."
한 손으로 입술을 문지른 찰스가 에릭의 손에서 빠져나갔다. 최대한 침착한 얼굴을 하려고는 했지만 찰스 자비에는 당황을 숨기는데 별로 능숙한 사람은 아니었다.
"에릭, 이건...에릭!"
부르는 소리를 무시하고 돌아서서 걸어갔다.
"잘 생각해 봐. 더 이상 과거에 묶여선 안돼!"
에릭은 걸어가며 고개를 저었다. 찰스가 진심이라는 것은 이제 확실했다. 실제로 어떻건 그가 자신의 과거를 알게 된 것과 함께 '정말로' '이해'했다고 믿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방금의 키스에서 찰스 자비에는 그를 뿌리칠만큼 입에 발린 위선자도 아니었고 거기서 받아들이고 에릭을 붙들만큼 머리를 굴리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눈을 질끈 감고 에릭이 그에게 가하는 난행을 순순히 받아들였을 뿐이었다. 딴에는 '마음을 열려고 노력'한 것이겠지.
과거에 묶이지 말라고? 바로 그러기 위해 여기까지 살아왔다. 과거의 기억에 함몰되지 않고 그것을 부수고 살아남기 위해 버텨온 시간들을 생각하면 '과거에 묶이지 말라'는 말은 그저 공허한 구호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렇다. 그의 제안에 따를 필요는 없었다. 다만...
한참을 걸어가고서야 에릭 렌셔는 발을 멈췄다. 다만 단 한 가지가 그의 앞에 가로놓여 있다. 하나의 가능성, 어쩌면,
입술을 물었다. 친구들, 동료들. 찰스는 그런 이름으로 불렀지만 에릭의 머리 속에서 다른 정의를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 그는 생각했다.
동류들.
그리고 그를 '이해'한다고 말해준 최초의 사람.
돌아서서 뒤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찰스가 아직도 서 있을지도 모르는 연구소 건물은 어둠에 감싸여 고요히 가라앉아 있었다.
그가 정말로 이해할 수 있을까?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믿을 수도 장담할 수도 없었다. 어이없이 순진하다못해 거의 오만하기까지 한 그 선언을 순순히 믿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시도해 볼 가치조차 없는 것일까? 머리속에 울렸던 그 목소리, 어떤 가식도 저깃도 없이 이 쪽을 바라보던 눈동자, 그 안에 담겨 있던 이해인지 연민인지 모를 온기.
그는 한참동안 생각에 잠겨 조용히 서 있었다. 그리고, 가려던 길 쪽을 한번 돌아본 후 발걸음을 돌려 천천히 연구소 건물 쪽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