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2. 13. 01:38
- 19세기, 독일 배경입니다.
- 슈바르츠발트 근처의 한 마을, 박물학자 찰스와 사냥꾼 에릭입니다.
- 둘의 능력이나 느낌은 원작과 비교가 안될 정도로 약화되어 있습니다.
- 이제부터는 새로운 내용입니다. 달린다 달려!
- 이제부터는 새로운 내용입니다. 달린다 달려!
찰스는 꿈을 꾸었다. 눈, 지긋지긋한 눈이 사방에 쌓여 있었고, 그는 흰 눈이 가득 쌓인 숲에 홀로 고립되어 있었다. 숨을 들이키자 냉기가 뼛속까지 밀려들었고, 적막한 숲 속에 홀로 선 길 잃은 어린아이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덜덜 떨며 주위를 둘러보던 그는 먼데서 작은 불빛이 빛나는 것을 보고는 반가운 마음이 들어 그 쪽으로 달려갔다. 아니, 달려가려 했다. 하지만 발이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영문을 몰라 발 아래를 내려다 보니, 놀랍게도 흰 눈에 완전히 묻혀버린 발이 눈에 들어왔다. 눈, 지겨운 눈, 하지만 단지 눈 때문만이 아니었다. 처음엔 움직이려 애쓰다 나중에는 손을 뻗어 어떻게든 잡아당겨 보았지만 발은 움직이지 않았고 그저 마음만 조급해 졌다. 찰스는 이를 악물고 이 눈밭에서 발을 떼어내 보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고, 곧 이 지독한 추위에도 불구하고 온 몸이 땀으로 젖어버릴 정도로 지쳐 버렸다.
잠시 곰곰히 생각하던 그는 이번에는 허리를 숙이고, 발을 들려고 애쓰는 대신 손을 뻗어 발 주위의 눈을 치우기 시작했다. 어쩐 일인지 발이 완전히 고정되어 버린 상태에서 거의 무릎까지 덮인 눈을 파헤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어쨌건 찰스는 이를 악물고 계속 눈을 치워 나갔다. 곧 손가락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아파 왔지만 결코멈추지 않았다.
눈이 점차 파여 나가면서, 찰스의 발 주변에서 무언가가 슬그머니 윤곽을 비치기 시작했다. 발목쯤까지 치워내자 그 형태는 좀더 명확해졌는데, 그것을 본 그는 잠시 입술을 물고 고민하다 방법이 없다는 생각을 하고는 더욱 더 깊이 파헤쳐 나갔다. 검은 색의 무언가가, 바위같이 단단한 뭔가가 마치 족쇄와 같은 모양을 하고 찰스의 발목 주위에 둘러감겨 있었다. 파헤치고 또 파헤치다 지친 찰스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들었고, 멀리서 빛나던 작은 불빛이 지금이라도 꺼질 듯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덜덜 떨며 주위를 둘러보던 그는 먼데서 작은 불빛이 빛나는 것을 보고는 반가운 마음이 들어 그 쪽으로 달려갔다. 아니, 달려가려 했다. 하지만 발이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영문을 몰라 발 아래를 내려다 보니, 놀랍게도 흰 눈에 완전히 묻혀버린 발이 눈에 들어왔다. 눈, 지겨운 눈, 하지만 단지 눈 때문만이 아니었다. 처음엔 움직이려 애쓰다 나중에는 손을 뻗어 어떻게든 잡아당겨 보았지만 발은 움직이지 않았고 그저 마음만 조급해 졌다. 찰스는 이를 악물고 이 눈밭에서 발을 떼어내 보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고, 곧 이 지독한 추위에도 불구하고 온 몸이 땀으로 젖어버릴 정도로 지쳐 버렸다.
잠시 곰곰히 생각하던 그는 이번에는 허리를 숙이고, 발을 들려고 애쓰는 대신 손을 뻗어 발 주위의 눈을 치우기 시작했다. 어쩐 일인지 발이 완전히 고정되어 버린 상태에서 거의 무릎까지 덮인 눈을 파헤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어쨌건 찰스는 이를 악물고 계속 눈을 치워 나갔다. 곧 손가락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아파 왔지만 결코멈추지 않았다.
눈이 점차 파여 나가면서, 찰스의 발 주변에서 무언가가 슬그머니 윤곽을 비치기 시작했다. 발목쯤까지 치워내자 그 형태는 좀더 명확해졌는데, 그것을 본 그는 잠시 입술을 물고 고민하다 방법이 없다는 생각을 하고는 더욱 더 깊이 파헤쳐 나갔다. 검은 색의 무언가가, 바위같이 단단한 뭔가가 마치 족쇄와 같은 모양을 하고 찰스의 발목 주위에 둘러감겨 있었다. 파헤치고 또 파헤치다 지친 찰스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들었고, 멀리서 빛나던 작은 불빛이 지금이라도 꺼질 듯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이를 악물고, 그는 다시 발목의 검은 족쇄를 완전히 드러내기 위해 노력했다. 계속 눈을 파낸 손가락은 이제 거의 아무 감각을 느끼지 못했고, 손가락이 붙어 있는 손 부분이 떨어져 나갈 듯 아파왔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불빛, 거기 무엇이 있을지는 전혀 알 수 없었지만, 어떻게든 저 불빛 쪽으로 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직감이 들었던 것이다. 다급히 눈을 치우던 찰스는 드디어 자신의 발목을 그토록 강하게 휘어감고 놓아주지 않던 것이 무엇인지 볼 수 있었고, 사정만 허락했다면 즉시 뒤로 펄쩍 뛰어오를 만큼 크게 놀랐다.
손.
손이라고 불러야 할까. 그럴 수 있다면, 찰스의 발목을 붙들고 있는 것은 커다란 두 손이었다. 한 개의 엄지 가락과 칼날같은 네 개의 손가락, 그 표면은 피부라기보다는 껍질이라 불러야 적합할 정도로 단단히 굳어 있었고, 각 손가락 끝에는 뾰족한 발톱이 나 있었다. 강철 죔쇠처럼 발목을 틀어쥔 손은 족쇄라 느껴질 정도로 차갑고 딱딱했으며, 아무리 힘을 가해도 도무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숨을 헐떡이며 어떻게든 공포에 질리지 않기 위해, 침착하기 위해 노력하던 찰스의 귀에 뭔가 불길한 소리가 들려 왔다. 어느새 눈은 그쳐 있었고, 드러난 환한 달빛 밑으로 거대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명백히 공포에 질린 찰스의 눈앞에서 그 그림자는 더욱 거대하게만 변해갔고, 아주 먼데에서도 알아볼 수 있는 가지런한 이빨과 충혈된 두 눈이 찰스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다가왔다. 더이상 견딜 수 없었고, 찰스는 비명을 질렀다. 길고 긴 비명 끝에 괴물의 이빨이 찰스를 덮쳤고, 그 순간 그는 잠에서 깨어났다.
"찰스?"
눈앞에 검은 그림자가 있었다. 찰스는 순간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으나, 곧 그림자의 주인이 밖에서 막 돌아온 에릭임을 알아보고 이불 속에 기어들어가 몸을 웅크렸다. 대체 무슨 일인지 묻는 에릭의 손길이 식은땀에 젖은 찰스의 머리와 등을 다정하게 쓸어 내렸으나, 찰스는 한참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불길한 예감에 몸을 떨었다. 아직도 꿈에서 본 괴물이 눈에 선했다. 가지런한 이빨, 충혈된 두 눈, 잿빛 모피.
'그것'은 분명 에릭이었다.
찰스는 이를 악물고, 에릭을 힘껏 끌어안은 뒤 숨을 골랐다. 등을 문질러 주는 에릭의 손길은 실로 다정했지만, 진정되어 가는 찰스의 머리에는 다른 것이 느껴졌다. "...에릭?" 이름을 부르며 시선을 돌려 에릭과 눈을 맞췄다. 이 쪽을 내려다 보는 청회색 눈동자에서 방금 느낀 것과 같은 감정들이 느껴진다. 불안과 두려움.
"무슨 일 있었어?"
질문을 들은 에릭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그렇게 굳은 얼굴을 하고 한동안 찰스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와락 끌어안고 깊이 숨을 들이쉰 후 한숨짓는다.
"에릭?"
한숨을 내쉬고도 한참동안 아무 말이 없다. 조심스레 그의 마음을 훑어가자 답이 떠올랐다. 거의 직접 말하기라도 하듯 분명히 느껴지는 그것에 찰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가 왔구나."
에릭의 입술이 찰스의 이마에 머물렀다. 그리고는 "대체 그가 무슨 말을 했어?" 라고 묻는 붉은 입술을 막듯 키스한다. 한참 후, 간신히 말할 결심을 한 듯 숨을 들이켰다.
"찰스, 내 말 잘 들어. 네 안전을 보장해 주겠대."
"뭐?"
"여길 떠난다면 무사히 갈 수 있도록 해 주겠다고 했어."
찰스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곧 의혹에 젖어 가늘어졌고, 에릭의 마음 속에서 곧장 답을 읽어낸 것인지 곧 다시 벌어졌다. 이제 거기 가득한 것은 바로 분노였다.
"에릭, 자네는 어쩌고?"
"찰스."
"말해줘, 그가 뭐라고 했어?"
"...난 여기 남아야 해."
찰스는 눈을 감았다. 엄습하려는 절망감을 누르는 동안 새로운 분노가 끓어올라왔다. 늙고 교활한 괴물 같으니! 클라우스 슈미트는 에릭의 약점을 너무나 잘 알았고, 그것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까지 완벽하게 숙지하고 있었다. 소중한 이를 다시는 잃고 싶지 않다는 그 바램을 이용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 에릭은 크게 흔들리고 있다. 어떻게든 그 동요를 막아야 한다. 차분하게 마음을 가다듬은 그는 에릭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최대한 침착하게 질문했다.
"그 말을 믿어?"
"찰스."
"클라우스 슈미트의 약속을 믿느냐고 묻고 있는 거야."
에릭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주름이 깊이 패인 미간과 꾹 다문 입이 그가 느끼고 있는 괴로움을 웅변하고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절대 물러날 생각이 없는 찰스는 이를 악물고 말을 이었다.
"그는 널 원해, 에릭."
"알고 있어."
"그리고 날 증오해."
"......"
"에릭 렌셔, 잘 들어. 놈은 반드시 날 죽이고 말 거야."
"찰스!"
견디지 못한 에릭이 언성을 높였지만 찰스는 결코 지지 않고 오히려 더 언성을 높였다. 에릭의 괴로움이 너무나 생생히 느껴졌지만 여기서만은 물러설 수가 없었다. 설령 그가 더 고통스러워 하더라도 이 잘못된 상황을 되돌려 놓아야만 한다.
"난 놈의 마음을 봤어. 에릭, 그는 날 죽이고 싶어해. 날 믿어. 그건 진심이었어."
"찰스..."
에릭의 시선이 흔들렸다. 여전히 그의 마음 가득 들어찬 두려움을 느낀 찰스는 놀란 눈으로 에릭을 응시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어째서 그가 이렇게까지 클라우스를 두려워 하는 것인가. 그 이유는 깊은 안개 속에 숨어 있었고, 찰스는 이제껏 늘 보아 왔던 그 안개가 이제는 지긋지긋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에릭, 대체"
"찰스, 넌 놈을 몰라."
"잊었는지도 모르겠는데, 에릭, 난 이미 그 괴물을 봤어. 에릭 자네가 보았던 바로 그 괴물을."
에릭이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눈을 감았다.
"그 얘기가 아냐!"
"그럼 얘기해 줘, 대체 뭐가 문제인데?"
이를 악물고 묻는 찰스의 어깨를 잡고, 에릭은 한 글자 한 글자를 찰스의 마음에 새겨 넣을 듯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놈은 나보다 강해."
"그래, 정면에서 맞붙으면 불리할 지도 몰라, 하지만"
"그 얘기가 아니야, 나는 클라우스를 절대 이길 수 없어. 널 지킬 수 없어, 찰스!"
"에릭 제발, 그러니까 함께 떠나자고 했잖아."
"놈이 그걸 눈치챘어."
"하지만-"
"지금 널 보내지 않으면 널 죽일 거야."
"에릭!"
"놈에겐 그럴 힘이 있고, 내겐 널 지킬 힘이 없어."
"대체 왜 그렇게 확신하지?"
"내 눈앞에서 변신했어. 바로 조금 전에!"
순간 에릭이 한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아, 찰스는 멍하니 에릭을 바라보았다. 그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은 아주 간단히 알 수 있었지만 예상 외의 말에 그렇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보름도 아니며 밤도 아니다. 어떻게 클라우스 슈미트가 괴물로 변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게 지금 무슨..."
"내 마음을 읽어, 찰스. 내가 본 것을 다시 봐."
잠시 에릭의 눈을 바라보던 찰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할 수 있는 한 정신을 집중하기 위해 노력했다. 클라우스 슈미트, 그리고 끔찍한 괴물. 그 순간 에릭이 느꼈던 순수한 절망과 공포. 망연자실한 시선 앞에서 에릭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두려움, 찰스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지킬 수 없다는 무력감, 그리고 끔찍스러운 자기 혐오가 뒤죽 박죽으로 섞여 뺨 위로 흘러내렸다. 에릭이 힘겹게 입을 열어 간신히 말했다.
"제발, 떠나 줘."
"에릭."
"제발."
절망. 그것은 순수한 절망의 눈물이었고, 찰스는 그가 에릭에게 희망을 줄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랜 침묵 후, 그는 눈앞의 남자보다는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 선언하듯 말했다.
"알겠어."
"......"
"그 말대로 할게."
에릭이 찰스를 끌어안았다. 셔츠의 어깨 부분이 젖어 왔지만, 찰스는 차마 그 남자의 등조차 쓸어줄 수 없었다.
가져온 것이 많지 않아 가져갈 것도 별로 없었다.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샌 두 사람은 핏발 선 눈을 한 채 오두막 입구에 서 있었다. 에릭은 숲에서 벗어날 때까지 함께 가겠다고 약속했던 터였다. 여장은 다 꾸렸지만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아 머뭇거리던 찰스는 에릭을 향해 실낱같은 희망을 담고 말을 건넸다.
"정말로 이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해?"
"찰스."
짙은 푸른색 눈에는 기대와 체념이 뒤섞여 있다.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들어줄 수 없는 에릭은 그 시선을 마주하는 것조차 견디기 어려워 차마 눈을 맞추지도 못했다.
"분명히 후회할 거야."
"...알아."
"그런데 왜?"
에릭의 눈이 떨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찰스는 말을 이어갔다. 그나마 지금이 에릭의 생각을 돌이킬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이라는 직감에 따른 것이었다.
"그건..."
"그래, 클라우스 슈미트, 그게 우리 문제지. 하지만 생각해 봐, 에릭."
"찰스."
"모든 것이 다 달라질 수 있어. 우리가 함께 노력하면-"
에릭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눈가는 붉어졌고, 청회색 눈동자는 더없이 불행해 보였다.
"젠장, 찰스! 그만해."
그만하라고 외치고 있었지만 그의 마음이 외치는 소리가 선명히 들려 왔다. '나도 함께 가고 싶어. 함께 있고 싶다고.' 찰스는 그 마음에 답을 보냈다.
"그럴 수 있어, 에릭."
에릭의 양 손이 찰스의 얼굴을 감쌌다. 말릴 틈도 없이 떨리는 입술이 찰스의 입술을 막아 왔고, 물러서려는 얼굴을 붙든 채 에릭은 더없이 격렬하게 키스해 왔다. 찰스는 손을 들어 에릭의 팔을 밀어내려 했고, 에릭은 더 강인하게 그를 끌어안고 밀어붙이며 키스를 계속했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 흐른 뒤, 간신히 서로 떨어진 두 사람은 키스를 나눈 연인이라기보다는 갓 싸움을 끝내고 난 적들처럼 서로를 노려보았다.
"찰스, 잘 알잖아."
"아니까 이러는 거야."
"널 잃고 싶지 않아!"
"지금 내가 떠나면 잃게 돼."
"제기랄!" 에릭이 이를 악문다. 분노한 남자를 바라보며 찰스는 마찬가지로 이를 악물고 내뱉듯 말했다.
"이게 자네가 원하는 삶이야? 스스로를 괴물로 여기고 끔찍한 곳에 자신을 가두고-"
"그만해!"
"슈미트와 함께 여기서 썩어 문드러지는 게? 그의 '무리'가 되고 싶어?"
에릭의 얼굴이 돌처럼 굳었다. 그가 입은 상처는 매우 깊은 것이었고 거의 물리적이기까지 한 그 아픔에 찰스의 가슴까지 미어질 것만 같았지만, 그가 스스로를 지옥에 몰아넣는 것을 그대로 두고 볼 수는 없었다.
"대답해 봐, 에릭 렌셔! 클라우스 슈미트의 무리가 될 셈이야?"
에릭은 찰스에게서 돌아섰다. 그 어깨가 크게 오르내리는 것을 발견한 찰스는 마지막 줄을 붙드는 심정으로 그 등에 말을 던졌다.
"에릭, 이러지 마."
"...난 괴물이야."
"에릭!"
"네 말이 맞아. 슈미트는 괴물이고, 나도 마찬가지야."
찰스의 눈이 커졌다. 다시 이 쪽을 향해 돌아선 그의 눈에는 정말 야수의 그것과 같은 순수한 분노와 흉폭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것이 향하는 대상이 찰스가 아니었음에도 두려움이 느껴질 만큼 격렬한 감정이 남자의 온 몸에서 넘쳐 흐른다.
"괴물은 괴물끼리 살 수밖에 없어. 떠나, 찰스."
마치 위협하는 늑대처럼 남자가 으르렁거렸다. 결코 물러날 생각이 없이 양 발을 단단히 딛고 서 있는 찰스의 어깨를 잡더니 그대로 오두막 밖으로 밀어낸다.
"에릭!"
"난 괴물이야.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아."
한 마디를 말할 때마다 에릭의 눈에서 불꽃이 흐르는 것 같았다. 찰스가 아니라 에릭 자신에 대한 저주와 격노와 혐오가 그의 온 몸에서 끓어오르고 있었다.
"네가 어떤 눈으로 날 봐도, 내게 어떤 감정을 갖고 있대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아."
"안돼..."
"가. 돌아가, 찰스. 너와 어울리는 곳으로 가. 여긴 네가 있을 곳이 아니야."
밀려났다. 문이 닫혔다. 찰스는 힘껏 소리지르며 문을 두드렸지만 문 잠기는 소리를 끝으로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손이 아프도록 문을 두들기던 찰스는 거의 절규에 가깝게 울부짖으며 문을 내리치고 이마를 기댔다.
이럴 수는 없다. 어떻게 해도 이렇게 끝낼 수는 없다. 돌아서서 문에 등을 기대로 숨을 몰아쉬던 찰스는 고통스런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하며 어떻게든 생각을 해 보기 위해 노력했다.
에릭은 저 안에 틀어박혀 버렸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마음의 문을 닫고 들어가 버린 것이다. 찰스는 눈을 감고 신음하다 몸을 일으키고 다시 문을 향해 몸을 돌렸다.
"안돼 에릭! 제발..."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찰스는 정신을 집중했다. 두터운 나무 문에 이마를 대고 새삼 눈을 꾹 감는다. 이 오두막의 벽 너머 어딘가에 있을 에릭에게 어떻게든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찰스 자신의 안타까움, 슬픔, 분노, 그리고 그에 대한 사랑. 또한 이해시켜야만 했다. 어째서 이렇게 순응해서는 안되는지, 왜 클라우스의 말을 따라서는 안되는지, 무엇보다도 그들이 왜 이렇게 헤어져서는 안되는지.
이 굳게 잠긴 집 안 어딘가 있을 에릭을 찾고 또 찾으며 그는 계속 말을 걸었다. 제발, 에릭. 제발! 희미하게 그의 존재감이 느껴진 순간, 찰스는 그 '존재'에게 있는 힘을 다 해 스스로의 의식을 쏘아 보냈다. 내 말을 들어 줘, 이해해야만 해. 이해해야만 했다. 에릭이 그를, 그가 에릭을. 그렇다. 그의 두려움과 공포마저도 이해해야만 지금의 잘못된 결정을 돌려놓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온 마음을 던진 순간 멀리 있던 에릭의 마음이 놀랍도록 구체적으로 닿아 와, 찰스는 놀라움에 숨을 들이키면서도 좀더 집중하기 위해 노력했다. 단단히 닫힌 마음을 감싸 안고, 다른 이의 무의식에서도 흔히 보아왔던 그 두려움의 안개를 뚫기 위해 최선을 다 했다.
'난 그를 잃게 될 거야.'
'이렇게 보내는 게 그나마 나아.'
'다시 잃을 수는 없어.'
'괴물'에 대한 원초적이고 압도적인 공포, '자신'에 대한 극단적인 혐오와 불신, '잃는 것'에 대한 비이성적인 공포, 그 모든 것을 감지한 찰스는 잠시 숨을 돌린 뒤 이제껏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일을 시도했다. 절박한 마음으로 정신의 손을 뻗으며, 자신의 온 마음과 의지를 모아 그 짙은 안개 속으로 뛰어든 것이다. 돌아올 수 없는 곳에 몸을 던지는 순교자와도 같이.
분노의 함성이 찰스의 온 의식에 몰아쳤다. 그것은 공황에 빠진 폭도들 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비슷한 끔찍한 감각을 찰스에게 선사했다. 온 몸이, 아니 온 의식이 가루가 되어 흩날려 버릴 듯 고통스러웠지만 찰스는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더 깊은 곳을 향해 의식을 쏘아보냈다. 오직 에릭의 이름을 부르며, 분노와 공포와 혐오와 저주를 흘려보내며 오로지 그 안의 에릭을 찾아서.
더러운 탁류처럼 폭풍같은 감정들이 그의 손발을 휘감아 묶었다. 사지를 갈가리 찢어버릴 듯한 고통 속에서도 그는 에릭을 향한 마음을 놓지 않았다. 찾아야 한다, 그를 찾아야 한다.
'에릭!'
절규했다. 그를 찾아 손을 뻗었다. 혼란 속 어딘가 존재할 그를 찾아서.
'에릭, 에릭!'
재차 그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의 감정이 아니라 그를, 오직 그를. 온 영혼을 모아 다시 한번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
어느새 폭풍이 사라졌다. 너른 황야가 나타났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돋지 않은 그 광막한 땅에 서 있는 것은 어린 소년이었다. 다갈색 머리카락에 너무나 익숙한 푸른 잿빛 눈을 가진, 두려움에 찬 소년.
'에릭.'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러한 경험은 처음이었다. 회색 하늘 밑의 메마른 잿빛 땅 위에 선 소년이 그를 바라본다. 찰스는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양 팔을 벌리고, 도망치려는 아이를 품 안에 꼭 붙들어 끌어안아 주었다.
'안돼, 넌 죽을 거야!'
아이가 비명을 질렀다.
'난 널 잃게 될 거야, 엄마처럼! 넌 죽을 거야. 괴물에게!'
황야에 거센 두려움이 다시 한번 폭풍처럼 몰아쳤다.
'오지 마, 돌아가! 제발 돌아가!'
그 두려움이 찰스의 의식에 다시 한번 칼날처럼 몰아쳤다. 그러나 에릭을 붙든 찰스는 이제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이야기 해 줄 수 있었다.
'에릭, 그게 그 괴물이 원하는 거야.'
'넌 죽을 거야.'
'괴물은 네가 그렇게 믿길 바라고 있어.'
'하지만 엄마는 죽었어.'
'난 아니야.'
아이가 저항을 멈췄다. 찰스는 아이의 작은 귀에 대고 속삭였다. 자신의 진심이 통하길 바라며.
'에릭, 난 살아 있어.'
'너도 사라질 거야. 없어질 거야.'
'난 널 떠나지 않아.'
'아냐 난, 난 저주받았어.'
'그게 바로 그가 네게 심어둔 저주야.'
아이의 눈이 커졌다. 가느다란 양 손목을 붙들고 아이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찰스는 아주 느리게, 똑똑히 말해주었다.
'난 절대 널 버리지 않아. 널 떠나지 않아.'
'......'
'네가 날 버리지 않는 한 떠나지 않아.'
'하지만 놈이...'
'에릭, 네가 그랬지. 너도 그와 같은 늑대인간이라고.'
아이의 몸이 경직했다. 다시 찬 바람이 불어온다. 위험 신호였지만, 찰스는 그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으리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에릭, 그가 할 수 있는 건 너도 할 수 있어.'
'내가 괴물...'
'아니야. 에릭, 넌 괴물이 아니야. 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야.'
'......'
'하지만 슈미트가 할 수 있는 건 너도 할 수 있어.'
바람이 울림이 되었다. 대지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찰스는 에릭을, 어린 에릭을 있는 힘을 다 해 끌어안았다. 무너지기 시작한 세상 속에서 아이에게 한 마디라도 더 하기 위해 노력하며, 그는 품 안의 온기를 놓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 했다.
'에릭, 사랑하고 있어.'
'......'
'날 믿어 줘. 내 소원을 들어 줘.'
'......찰스.'
'난 죽더라도 당신과 함께 있고 싶어. 그러니까...'
세상은 무서운 속도로 무너졌다. 무너진 황야 밖으로 튕겨나갔지만 이제 폭풍은 없다. 고요한 의식 속에서 그가 알고 있는 에릭이 그를 바라본다. 남자가 손을 뻗는 순간 찰스의 의식에 한계가 왔다. 더이상 집중할 수가 없었고, 곧 차가운 바람이 피부에 느껴졌다. 눈을 뜨자 온 몸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고, 그저 앉아 있었을 뿐임에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어려울 정도의 피로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찰스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랐다. 기대앉은 문 뒤로 발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
"진심이야, 에릭."
문이 열렸다. 중심을 잃고 무너지던 몸이 에릭의 다리에 기대어 균형을 찾았다. 기다란 손이 내려와 찰스의 얼굴을 어루만졌고, 찰스는 고개를 들어 이 쪽을 향해 숙인 에릭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에릭의 눈동자에는 눈물이 가득 괴어 있었다. 문득 찰스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이 남자, 생각보다 자주 우는 사람이었구나.' 그리고 아까 그의 의식 속에서 못다한 말을 맺었다.
"그러니까 날 지켜줘."
에릭이 무릎을 꿇었다. 강인한 팔이 찰스의 몸을 감쌌다. 그가 조용히 말했다.
"사랑해."
찰스는 미소지었다. 내일 당장 슈미트가 그를 죽이러 온다 해도, 지금만큼은 그게 상관 없을 정도로 기뻤다.
- 계속
"제발."
절망. 그것은 순수한 절망의 눈물이었고, 찰스는 그가 에릭에게 희망을 줄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랜 침묵 후, 그는 눈앞의 남자보다는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 선언하듯 말했다.
"알겠어."
"......"
"그 말대로 할게."
에릭이 찰스를 끌어안았다. 셔츠의 어깨 부분이 젖어 왔지만, 찰스는 차마 그 남자의 등조차 쓸어줄 수 없었다.
가져온 것이 많지 않아 가져갈 것도 별로 없었다.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샌 두 사람은 핏발 선 눈을 한 채 오두막 입구에 서 있었다. 에릭은 숲에서 벗어날 때까지 함께 가겠다고 약속했던 터였다. 여장은 다 꾸렸지만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아 머뭇거리던 찰스는 에릭을 향해 실낱같은 희망을 담고 말을 건넸다.
"정말로 이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해?"
"찰스."
짙은 푸른색 눈에는 기대와 체념이 뒤섞여 있다.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들어줄 수 없는 에릭은 그 시선을 마주하는 것조차 견디기 어려워 차마 눈을 맞추지도 못했다.
"분명히 후회할 거야."
"...알아."
"그런데 왜?"
에릭의 눈이 떨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찰스는 말을 이어갔다. 그나마 지금이 에릭의 생각을 돌이킬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이라는 직감에 따른 것이었다.
"그건..."
"그래, 클라우스 슈미트, 그게 우리 문제지. 하지만 생각해 봐, 에릭."
"찰스."
"모든 것이 다 달라질 수 있어. 우리가 함께 노력하면-"
에릭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눈가는 붉어졌고, 청회색 눈동자는 더없이 불행해 보였다.
"젠장, 찰스! 그만해."
그만하라고 외치고 있었지만 그의 마음이 외치는 소리가 선명히 들려 왔다. '나도 함께 가고 싶어. 함께 있고 싶다고.' 찰스는 그 마음에 답을 보냈다.
"그럴 수 있어, 에릭."
에릭의 양 손이 찰스의 얼굴을 감쌌다. 말릴 틈도 없이 떨리는 입술이 찰스의 입술을 막아 왔고, 물러서려는 얼굴을 붙든 채 에릭은 더없이 격렬하게 키스해 왔다. 찰스는 손을 들어 에릭의 팔을 밀어내려 했고, 에릭은 더 강인하게 그를 끌어안고 밀어붙이며 키스를 계속했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 흐른 뒤, 간신히 서로 떨어진 두 사람은 키스를 나눈 연인이라기보다는 갓 싸움을 끝내고 난 적들처럼 서로를 노려보았다.
"찰스, 잘 알잖아."
"아니까 이러는 거야."
"널 잃고 싶지 않아!"
"지금 내가 떠나면 잃게 돼."
"제기랄!" 에릭이 이를 악문다. 분노한 남자를 바라보며 찰스는 마찬가지로 이를 악물고 내뱉듯 말했다.
"이게 자네가 원하는 삶이야? 스스로를 괴물로 여기고 끔찍한 곳에 자신을 가두고-"
"그만해!"
"슈미트와 함께 여기서 썩어 문드러지는 게? 그의 '무리'가 되고 싶어?"
에릭의 얼굴이 돌처럼 굳었다. 그가 입은 상처는 매우 깊은 것이었고 거의 물리적이기까지 한 그 아픔에 찰스의 가슴까지 미어질 것만 같았지만, 그가 스스로를 지옥에 몰아넣는 것을 그대로 두고 볼 수는 없었다.
"대답해 봐, 에릭 렌셔! 클라우스 슈미트의 무리가 될 셈이야?"
에릭은 찰스에게서 돌아섰다. 그 어깨가 크게 오르내리는 것을 발견한 찰스는 마지막 줄을 붙드는 심정으로 그 등에 말을 던졌다.
"에릭, 이러지 마."
"...난 괴물이야."
"에릭!"
"네 말이 맞아. 슈미트는 괴물이고, 나도 마찬가지야."
찰스의 눈이 커졌다. 다시 이 쪽을 향해 돌아선 그의 눈에는 정말 야수의 그것과 같은 순수한 분노와 흉폭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것이 향하는 대상이 찰스가 아니었음에도 두려움이 느껴질 만큼 격렬한 감정이 남자의 온 몸에서 넘쳐 흐른다.
"괴물은 괴물끼리 살 수밖에 없어. 떠나, 찰스."
마치 위협하는 늑대처럼 남자가 으르렁거렸다. 결코 물러날 생각이 없이 양 발을 단단히 딛고 서 있는 찰스의 어깨를 잡더니 그대로 오두막 밖으로 밀어낸다.
"에릭!"
"난 괴물이야.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아."
한 마디를 말할 때마다 에릭의 눈에서 불꽃이 흐르는 것 같았다. 찰스가 아니라 에릭 자신에 대한 저주와 격노와 혐오가 그의 온 몸에서 끓어오르고 있었다.
"네가 어떤 눈으로 날 봐도, 내게 어떤 감정을 갖고 있대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아."
"안돼..."
"가. 돌아가, 찰스. 너와 어울리는 곳으로 가. 여긴 네가 있을 곳이 아니야."
밀려났다. 문이 닫혔다. 찰스는 힘껏 소리지르며 문을 두드렸지만 문 잠기는 소리를 끝으로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손이 아프도록 문을 두들기던 찰스는 거의 절규에 가깝게 울부짖으며 문을 내리치고 이마를 기댔다.
이럴 수는 없다. 어떻게 해도 이렇게 끝낼 수는 없다. 돌아서서 문에 등을 기대로 숨을 몰아쉬던 찰스는 고통스런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하며 어떻게든 생각을 해 보기 위해 노력했다.
에릭은 저 안에 틀어박혀 버렸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마음의 문을 닫고 들어가 버린 것이다. 찰스는 눈을 감고 신음하다 몸을 일으키고 다시 문을 향해 몸을 돌렸다.
"안돼 에릭! 제발..."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찰스는 정신을 집중했다. 두터운 나무 문에 이마를 대고 새삼 눈을 꾹 감는다. 이 오두막의 벽 너머 어딘가에 있을 에릭에게 어떻게든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찰스 자신의 안타까움, 슬픔, 분노, 그리고 그에 대한 사랑. 또한 이해시켜야만 했다. 어째서 이렇게 순응해서는 안되는지, 왜 클라우스의 말을 따라서는 안되는지, 무엇보다도 그들이 왜 이렇게 헤어져서는 안되는지.
이 굳게 잠긴 집 안 어딘가 있을 에릭을 찾고 또 찾으며 그는 계속 말을 걸었다. 제발, 에릭. 제발! 희미하게 그의 존재감이 느껴진 순간, 찰스는 그 '존재'에게 있는 힘을 다 해 스스로의 의식을 쏘아 보냈다. 내 말을 들어 줘, 이해해야만 해. 이해해야만 했다. 에릭이 그를, 그가 에릭을. 그렇다. 그의 두려움과 공포마저도 이해해야만 지금의 잘못된 결정을 돌려놓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온 마음을 던진 순간 멀리 있던 에릭의 마음이 놀랍도록 구체적으로 닿아 와, 찰스는 놀라움에 숨을 들이키면서도 좀더 집중하기 위해 노력했다. 단단히 닫힌 마음을 감싸 안고, 다른 이의 무의식에서도 흔히 보아왔던 그 두려움의 안개를 뚫기 위해 최선을 다 했다.
'난 그를 잃게 될 거야.'
'이렇게 보내는 게 그나마 나아.'
'다시 잃을 수는 없어.'
'괴물'에 대한 원초적이고 압도적인 공포, '자신'에 대한 극단적인 혐오와 불신, '잃는 것'에 대한 비이성적인 공포, 그 모든 것을 감지한 찰스는 잠시 숨을 돌린 뒤 이제껏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일을 시도했다. 절박한 마음으로 정신의 손을 뻗으며, 자신의 온 마음과 의지를 모아 그 짙은 안개 속으로 뛰어든 것이다. 돌아올 수 없는 곳에 몸을 던지는 순교자와도 같이.
분노의 함성이 찰스의 온 의식에 몰아쳤다. 그것은 공황에 빠진 폭도들 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비슷한 끔찍한 감각을 찰스에게 선사했다. 온 몸이, 아니 온 의식이 가루가 되어 흩날려 버릴 듯 고통스러웠지만 찰스는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더 깊은 곳을 향해 의식을 쏘아보냈다. 오직 에릭의 이름을 부르며, 분노와 공포와 혐오와 저주를 흘려보내며 오로지 그 안의 에릭을 찾아서.
더러운 탁류처럼 폭풍같은 감정들이 그의 손발을 휘감아 묶었다. 사지를 갈가리 찢어버릴 듯한 고통 속에서도 그는 에릭을 향한 마음을 놓지 않았다. 찾아야 한다, 그를 찾아야 한다.
'에릭!'
절규했다. 그를 찾아 손을 뻗었다. 혼란 속 어딘가 존재할 그를 찾아서.
'에릭, 에릭!'
재차 그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의 감정이 아니라 그를, 오직 그를. 온 영혼을 모아 다시 한번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
어느새 폭풍이 사라졌다. 너른 황야가 나타났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돋지 않은 그 광막한 땅에 서 있는 것은 어린 소년이었다. 다갈색 머리카락에 너무나 익숙한 푸른 잿빛 눈을 가진, 두려움에 찬 소년.
'에릭.'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러한 경험은 처음이었다. 회색 하늘 밑의 메마른 잿빛 땅 위에 선 소년이 그를 바라본다. 찰스는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양 팔을 벌리고, 도망치려는 아이를 품 안에 꼭 붙들어 끌어안아 주었다.
'안돼, 넌 죽을 거야!'
아이가 비명을 질렀다.
'난 널 잃게 될 거야, 엄마처럼! 넌 죽을 거야. 괴물에게!'
황야에 거센 두려움이 다시 한번 폭풍처럼 몰아쳤다.
'오지 마, 돌아가! 제발 돌아가!'
그 두려움이 찰스의 의식에 다시 한번 칼날처럼 몰아쳤다. 그러나 에릭을 붙든 찰스는 이제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이야기 해 줄 수 있었다.
'에릭, 그게 그 괴물이 원하는 거야.'
'넌 죽을 거야.'
'괴물은 네가 그렇게 믿길 바라고 있어.'
'하지만 엄마는 죽었어.'
'난 아니야.'
아이가 저항을 멈췄다. 찰스는 아이의 작은 귀에 대고 속삭였다. 자신의 진심이 통하길 바라며.
'에릭, 난 살아 있어.'
'너도 사라질 거야. 없어질 거야.'
'난 널 떠나지 않아.'
'아냐 난, 난 저주받았어.'
'그게 바로 그가 네게 심어둔 저주야.'
아이의 눈이 커졌다. 가느다란 양 손목을 붙들고 아이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찰스는 아주 느리게, 똑똑히 말해주었다.
'난 절대 널 버리지 않아. 널 떠나지 않아.'
'......'
'네가 날 버리지 않는 한 떠나지 않아.'
'하지만 놈이...'
'에릭, 네가 그랬지. 너도 그와 같은 늑대인간이라고.'
아이의 몸이 경직했다. 다시 찬 바람이 불어온다. 위험 신호였지만, 찰스는 그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으리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에릭, 그가 할 수 있는 건 너도 할 수 있어.'
'내가 괴물...'
'아니야. 에릭, 넌 괴물이 아니야. 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야.'
'......'
'하지만 슈미트가 할 수 있는 건 너도 할 수 있어.'
바람이 울림이 되었다. 대지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찰스는 에릭을, 어린 에릭을 있는 힘을 다 해 끌어안았다. 무너지기 시작한 세상 속에서 아이에게 한 마디라도 더 하기 위해 노력하며, 그는 품 안의 온기를 놓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 했다.
'에릭, 사랑하고 있어.'
'......'
'날 믿어 줘. 내 소원을 들어 줘.'
'......찰스.'
'난 죽더라도 당신과 함께 있고 싶어. 그러니까...'
세상은 무서운 속도로 무너졌다. 무너진 황야 밖으로 튕겨나갔지만 이제 폭풍은 없다. 고요한 의식 속에서 그가 알고 있는 에릭이 그를 바라본다. 남자가 손을 뻗는 순간 찰스의 의식에 한계가 왔다. 더이상 집중할 수가 없었고, 곧 차가운 바람이 피부에 느껴졌다. 눈을 뜨자 온 몸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고, 그저 앉아 있었을 뿐임에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어려울 정도의 피로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찰스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랐다. 기대앉은 문 뒤로 발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
"진심이야, 에릭."
문이 열렸다. 중심을 잃고 무너지던 몸이 에릭의 다리에 기대어 균형을 찾았다. 기다란 손이 내려와 찰스의 얼굴을 어루만졌고, 찰스는 고개를 들어 이 쪽을 향해 숙인 에릭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에릭의 눈동자에는 눈물이 가득 괴어 있었다. 문득 찰스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이 남자, 생각보다 자주 우는 사람이었구나.' 그리고 아까 그의 의식 속에서 못다한 말을 맺었다.
"그러니까 날 지켜줘."
에릭이 무릎을 꿇었다. 강인한 팔이 찰스의 몸을 감쌌다. 그가 조용히 말했다.
"사랑해."
찰스는 미소지었다. 내일 당장 슈미트가 그를 죽이러 온다 해도, 지금만큼은 그게 상관 없을 정도로 기뻤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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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이렇게 진행되어도 되는 건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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