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릭찰스 분위기만... 수위 전혀 없음.
* 화이트폰님이 쓰실 글에 연관된 글입니다.
* 자자 저만 쓰면 안되죠 다들 빨리 쓰삼!
'내 어린 에릭'
눈을 떴을 때 시야에 들어온 것은 다마스크 벽지에 감싸인 천장이었다. 한번, 그리고 두번. 눈을 깜박이고 나서야 지금 본 것이 꿈이었음을, 방금 들렸던 목소리 또한 환청임을 깨닫는다. 클라우스 슈미트, 세바스찬 쇼우는 죽었다. 1개월 전 바로 그의 손에 의해. 각성과 함께 쇼우의 죽음을 깨닫는 것은 나쁘지 않았다. 복수가 실행되었음을, 하여 완료되었음을 깨닫는 것은 그럭저럭 괜찮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의 '유산'을 추적하는 요즈음 그를 꿈에서 보는 것은 좀 다른 문제다.
- 내 어린 에릭.
고통과 분노, 우리는 정말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될 거다. 이미 죽어버린 남자는 이마의 구멍에서 피를 흘리며 그의 어깨를 붙들었다. 그 머리를 통과했던 핏빛 동전을 고스란히 손에 쥐고, 친밀한 몸짓으로 에릭의 어깨를 두드리고 격려하듯 가볍게 잡아 흔든다. 그리고 그렇게 슈미트 박사에게 붙들린 어린 에릭의 눈앞에는 세 구의 시체가 쓰러져 있었다. 이제는 기억에도 희미한 잿빛 군복을 걸친 남자가 둘, 그리고 그 사이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것은...
"찰스..."
찰스 프란시스 자비에. 새삼 입밖에 내어 불러본 이름은 그저 공허한 울림에 불과할 뿐이었다. 시트를 그러쥐며 몸을 일으킨 에릭은 새벽 공기로 인해 차갑게 식어버린 손으로 미간을 잠시 눌렀다.
- 어째서?
왜 찰스인가. 그에게서 등을 돌린 친구가 새삼 이렇게 꿈에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쇼우가 등장하는 꿈 자체는 결코 낯설지 않았다. 저 마이애미 바다에서 찰스를 처음 만난 이후로도 에릭은 쇼우의 꿈을 꾸곤 했다. 괴로웠던 과거, 고문, 다시 그에게 붙들리거나, 죽였건만 다시 살아나는 꿈을. 하지만 그 꿈 속에 찰스가 등장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는 에릭의 인생에 있어 처음으로 만난 자신의 이해자이자 친구였고 목숨도 맡길 수 있는 동료였지만, 엄연히 에릭의 "과거"와는 분리되어 있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 무엇 때문에?
에릭은 침대에서 내려서서 욕실을 향해 걸어갔다. 바닥에 깔린 깊고 부드러운 카펫의 질감은 꿈에서 본 그 방을 떠올리게 했다. 힘없이 쓰러진 창백한 남자가 바로 거기 있을 것만 같다. 흩어진 갈색 머리카락, 늘어진 손, 능력을 발휘할 때의 습관 그대로 관자놀이에 갖다 댔다가 쓰러져 버린 듯 했다. 짙은 푸른색 눈동자는 눈꺼풀 안에 갇혀 보이지 않고, 그 위로는 검은 점처럼 단호하게 들이박힌 총알 구멍에서 한 줄기 피가-
- 맙소사.
번개같은 깨달음이, 얼음 송곳같이 차갑고 무자비한 자각이 가슴에 꽂혔다. 이마의 총상, 이마, 그 곳이 아니었다. 그 날 쇼우는 아무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고 차가운 총알은 끝까지 기적을 기도하며 아들을 지켜보던 어머니의 심장에 정확히 들이박혔다. 그녀는 어떤 고통의 흔적도 공포의 흔적도 없이 눈을 감은채 가슴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꿈 속에 등장하는 찰스는, 그런 놀라운 능력을 지녓음에도 꼼짝하지 못하고 마치 꼭 지금의 에릭처럼 헬멧을 쓰고 있는 쇼우의 총에 맞은 찰스는,
- 나인가? 내가?
동전을 통과시킨 곳, 굳게 눈감은 쇼우의 이마에 자리잡았던 바로 그 상처가 있던 곳, 그 곳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에릭은 욕실에 걸려 있는 거울을 차분히 바라보았다. 차가운 은색 거울 틀 안에 갇혀 있는 남자는 강경하지만 불안에 찬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욕실 창으로 흘러 들어온 햇볕을 받은 청회색 눈동자는 마치 깨질 것처럼 위태로와 보였다.
- 말도 안 되는 소리.
에릭은 이를 악물었다. 이런 쓰레기 같은 꿈 때문에 흔들릴 수는 없다. 그는 더 이상 복수만을 위해 모든 것을 걸고 달리던 에릭 렌셔가 아니었다. 그는 매그니토였고, 미래를 위해 돌연변이들을 보호하고 이끌어갈 자였다. 이제 와서 과거의 일을 돌아보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설령 그 환상 속에 그가 가장 아쉬워하고 가끔은 그리워하기까지 하는 이가 들어있다 해도, 이런 사소한 무의식이 그의 발목을 붙들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찬물을 얼굴에 끼얹었다. 꿈 따위에 얽매이기에는 해야 할 일이, 생각해야 할 것이 너무나 많았다. 엠마의 도움으로 손에 넣은 클라우스 슈미트 - 세바스찬 쇼우의 은닉 재산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다행히 전범재판을 피해, 혹은 적절히 증거와 증인까지도 파기하고 숨어버린 나치 잔당들은 결코 적지 않았고, 에릭은 그들을 찾아다니며 대부분은 그들의 목숨과 함께 '후원'을 받아내고 있었다. 어느샌가 '나치 사냥꾼'에 대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고, 하여 그들은 다시 지하로 지하로 자취없이 숨어들기 위해 노력했다. 오늘도 그들 중 하나를 찾아가 '후원'을 받을 것이다.
세수를 하던 에릭은 고개를 돌려 수건을 집어들었다. 거울 속의 남자는 다시 차갑고 단단한 무기질의 눈빛으로 돌아가 있다. 거기 만족하며, 에릭은 이제부터 할 일에 대해 집중하기 시작했다. 수건을 내려놓을 때 단 한번 '옛 친구'의 말이 생생히 떠올랐지만, 에릭 렌셔, 아니 매그니토는 그 옛 파편을 무시하고 등을 돌려 그의 세계로 돌아갔다. 거울에 반사되어 부서진 햇빛처럼, 그 말은 그의 뇌리에 아무 의미없는 반향을 남겼을 뿐이었다.
- 잘 듣게 친구, 쇼우를 죽인다고 해서 평화를 얻을 수는 없어.
그 말은 사실이었다. 허나, 단 한 번도 그런 평화를 원했던 적은 없었다.
-끝
원래는 화이트폰 님과 릴레이를 하려 했습니다만, 화이트폰님께 귀속된 글의 서두쯤 되는 부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