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릭찰스에릭, 쇼우에릭 베이스에 쇼우찰스까지 나올 듯합니다. 아 막장이다.
* 19세기 배경의 패러렐입니다.
"저 여자, 분장이 너무 우스워."
붉은 빌로드로 둘러싸인 특석에 앉아서 하는 말 치고는, 런던 최고의 가수들에게 매우 미안해지는 얘기다. 하지만 잠시 무대 위에서 비올레따를 열연하던 후덕한 몸매의 여배우를 응시한 찰스는 간신히 웃음을 참으며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찰스?"
"미안, 네 말이 맞아 레이븐. 아마 그녀도 그렇게 생각할 걸. 근데 말이야..."
"응?"
"불쌍하니까 좀 반응해 줘, 건너편에서 널 뚫어지게 바라보는 사람이 있으니."
확실히, 붉은 빌로드로 둘러싸이다시피 한 오페라 하우스 특석에서 물색 드레스를 입은 아름다운 금발의 아가씨란 눈에 확 띄는 존재다. 건너편 특석을 잠시 바라보던 레이븐은 상대를 향해 살짝 웃어준 다음 '잘 했어?' 라고 물어보는 듯한 시선을 찰스에게 던졌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찰스는 다시 베르디의 선율에 빠져들기 위해 노력했다. '과연 진정한 사랑이 내게 불행이 될까, 불안한 내 영혼아 난 어쩌면 좋을까...'
"어때, 이 정도면 이제 와인도..."
"안돼."
물론 레이븐이 가만두지 않았지만. 비올레따가 알프레도의 구애에 대해 고민을 하거나 말거나, 이 열정적이고 맹랑한 소녀는 결코 원하는 것을 포기하려 들지 않는다. 단칼에 음주를 거부당한 레이븐은 아니나다를까 갈색 눈동자에 불을 켜고 찰스를 추궁했다.
"왜 그래, 찰스. 날 사교계의 레이디로 만들어 준다면서?"
"그거라면 걱정 마. 이미 만들고 있잖아.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 네가 내 사촌인 줄 알아."
"그럼 사교계에 들어온 건데 왜 와인은 안 되는 거야?"
찰스는 무대 위에서 우아한 몸짓과 노래로 이제껏 몰랐던 순수한 사랑의 기쁨에 대한 두려움을 연기하는 비올레따에게 마음 속으로만 사과하며 옆자리의 소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2년."
"오, 찰스-"
"18세 되는 생일날 최고의 부르고뉴 와인을 선물해 줄게. 그때까지만 참아주면 안될까?"
어쩔 수 없다는 듯 뾰로통한 얼굴이 되는 레이븐에게 찰스는 다정한 위로의 미소를 건넸다. 그의 가문, 르네상스 이전 시대부터 영국으로 건너와 자리잡은 자비에 가는 갓 열 여섯이 된 아가씨가 런던 사교계에 진출하기 위해 필요한 재력과 훌륭한 평판과 깊은 인맥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찰스 또한 이튼 칼리지에서 옥스퍼드 뉴 칼리지로 지금 막 성공적인 안착을 한 상태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고작 열여섯에 불과한 아가씨에게 사석에서 와인을 마시도록 쉽게 허락할 수는 없다. 특히,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더더욱.
"하지만-"
"미안해, 하지만 바첼러가 데뷔탄트에게 대뜸 와인을 마시게 하다니, 무리야 레이븐."
"알겠어."
말은 그렇게 했어도 레이븐의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하다.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바람에, 굳이 그 마음을 읽으려고 시도할 필요조차 없다. 뾰로통해진 얼굴을 바라보며 찰스는 속으로만 웃음을 참았다. 날이면 날마다 변덕이 죽 끓듯 하고 이것저것 관심사가 자주 바뀌면서도, 가끔 한 가지에 집착하면 못말리게 관심을 보이며 계속 그것 주위를 맴도는 그녀는 귀엽지만 꼭 그만큼 위험한 고양이 같았다.
고요히 흐르던 아리아의 분위기가 바뀌어 마침내 명랑한 반주가 흘러나오고, 아름다운 비올레따는 얼굴을 빛내며 노래했다. '난 항상 자유롭게, 기쁨을 쫓아 날아다니고 싶어!' 레이븐에게는 좀 실례되는 말이겠지만, 적어도 이 점에서 무대 위의 비올레따와 레이븐은 꼭 자매처럼 닮아 보인다고 생각하며 찰스는 레이븐의 기분을 풀어주기로 결심하고 입을 열었다.
"약속해. 네가 18세가 되는 날 아예 파리로 가서-"
"파리? 정말?"
찰스는 상냥하게 웃었다. 역시 통했다.
"그래, 파리에 가서 최고의 부르고뉴 와인을 따자."
"부띠끄에 데려가 줄 거야?"
"물론이지, 사랑스러운 여동생을 위해 그 정도를 못해줄까?"
순식간에 파리를 상상하고는 행복에 빠진 소녀의 얼굴이 밝게 빛났다. 좋아, 이제 그녀는 당분간 와인을 달라고 조르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은 파리로 갈지 니스로 갈지 아직 완전히 결정한 상태는 아닌었지만, 그녀의 반응을 보니 이 김에 파리로 결정해도 나쁘지는 않을 듯 싶어 찰스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레이븐이라면 바다보다는 도시를 더 사랑할 거야.
"흠, 찰스, 저 남자는 누구야?"
고급 레이스 장갑에 감싸인 손으로 직접 가리키려다, 찰스의 시선에 부채를 들어 얌전히 눈을 내리깔고는 부채 끝으로 살짝 방향을 가리킨다.
"어느 남자?"
"저기, 무대 옆에 남자가 하나 서 있어. 배우는 아닌 것 같은데?"
레이븐의 말대로였다. 아마 정면에 앉은 관객들 눈에는 거의 보이지 않겠지만, 벽 옆에 빗겨붙은 특석에서는 분명히 보였다. 분장도 없고, 옷을 보아도 배우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보다는 오히려 무대 장치 등을 손보는 잡역부인 듯 싶었다.
"글쎄, 무대 장치에 이상이라도 있는 걸까?"
대충 넘어가려고 했지만 매사에 호기심 많은 레이븐이 이런 일을 놓칠 리 없다. 금새 오페라 글라스를 들어 자세히 살펴보던 그녀는 금새 탄성을 질렀다.
"세상에! 저 남자 지금 품에서 뭔가 꺼내 들었어. 칼이야!"
찰스는 허리를 바로 세우며 특석 테라스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그대로 손을 들어 관자놀이에 얹고 정신을 집중한다. 레이븐이 가리킨 남자에게 의식을 집중한 순간 그가 느끼고 있는 것이 찌르는 듯한 살의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누구를 향한 것인지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남자는 관객석 쪽을 바라보면서 들고 있는 무언가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레이븐의 말대로라면 분명 칼일 것이다.
"찰스!"
"잠시만, 이 사람 누군가를 죽일 생각이야. 막아야겠어!"
레이븐이 비명을 지르려다 참으며 장갑 낀 양손으로 입을 막았다. 찰스는 과연 저 거리까지 자신의 '힘'이 가 닿을까 의심스러웠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남자를 향해 의식으로 외쳤다.
- 그만둬!
천천히 손을 올리던 남자가 동작을 멈췄다. 먼 거리라 표정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급작스럽게 움직임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는 것을 보니 놀란 기색이 뚜렷했다. 얼른 오페라글래스를 든 레이븐이 남자가 어떻게 하고 있는지 찰스에게 말해주었다.
"표정 보니 엄청나게 놀란 것 같아. 하지만 칼은 계속 들고 있어."
- 당장 그만둬.
찰스는 다시 한번 강력한 명령을 내렸다. 이런다고 상대가 살인을 포기해 줄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머리 속에서 누군가 말을 해 온다는 것은 일반적인 인간이라면 경천동지할 일일 것이다. 분명 그런 듯, 그는 들고 있던 것을 다시 품 속에 넣었지만 그 자리에서 물러나지는 않고 있었다. 찰스는 잠시 망설이다가, 약간 허풍을 치기로 결심했다.
- 여기서 돌아가지 않으면 아주 아픈 꼴을 당하게 될 거야.
옆에서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지만 주의를 돌릴 수가 없었다. 남자를 노려보고 있는데, 옆자리에서 레이븐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찰스...조심해, 저 남자 날 보고 있었어!"
그와 함께 잠시 희미해 졌던 상대의 살의가 더 치열해졌다. 남자의 감정과 의지는 너무 강렬해서, 찰스는 이제 그 남자가 레이븐 옆자리의 자신을 발견했다는 것, 그래서 찰스 쪽을 노려보며 살의를 불태우고 있다는 것까지 깨달을 수 있었다. 무대에서는 비올레따의 화려한 아리아가 거의 끝을 맺어가고 있었고, 사랑을 갈구하는 청년의 먼 목소리에도 흔들리지 않고 현세의 쾌락을 추구하겠다는 그녀의 선언이 절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지금은 날 보고 있어, 레이븐."
"어떻게 하지? 사람들을 부를까?"
찰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레이븐 이 거리까지는 어떻게 할 수가 없을 거야."
드디어 비올레따가 노래를 마쳤고, 사람들은 일어서며 박수 갈채를 날리기 시작했다.
"찰스!"
무언가가 무서운 속도로 날아왔다. 찰스보다 훨씬 반사신경이 뛰어난 레이븐이 찰스를 밀치지 않았다면 그는 죽었을 것이다. 돌아보니, 붉은 빌로드로 감싸인 로얄석의 벽에 단도가 박혀 있었다.
레이븐이 비명을 질렀고, 박수 갈채를 날리던 극장의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로열석 쪽을 바라보았다. 바닥에 쓰러졌던 찰스는 간신히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돌려 무대 쪽을 바라보았지만, 아까까지만 해도 남자가 서 있던 그 자리는 텅 비어 있을 뿐이었다. 흔들리는 커튼만이 방금 전까지 누군가 거기 서 있었고 지금 막 자리를 떴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난, 난 괜찮아 레이븐."
아직도 떨리고 있는 소녀의 어깨를 감싸안은 찰스는 공연이 끝났음을 깨달았다. 갈채를 보내려던 사람들은 난데없는 비명소리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고, 로얄 석 바깥쪽에 있던 하녀와 급사가 들어와 벽에 박힌 단도를 보고는 기겁을 했다. 단단한 목대로 마감된 벽에 푹 박혀들어간 단도를 바라보며 찰스는 등 뒤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깨달았다.
어떻게 그 먼 거리에서 이렇게 칼을 던질 수 있단 말인가?
오페라 극장의 소동은 재빨리 사람들 사이로 퍼져나갔다. 로열 오페라 하우스라는 사건 장소부터가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할 만 한 데다 비명을 지른 것이 아름다운 금발의 소녀라는 점, 그리고 아마도 매우 흉악할 것으로 짐작되는 악당이 던진 단도가 인간이 던진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힘으로 인해 벽 한가운데 푹 박혀 있었다는 것은 실로 호사가들의 구미를 돋우기 적당한 화젯거리였던 것이다. 게다가 그 목표는 누군가, 메이페어 가에 대저택을 소유하고 있는 자비에 가의 상속자다. 입에서 입으로 소문이 퍼지면서, 사람들은 당연히 오랜 원한, 혹은 재산을 노린 청부살인으로 생각하고 호기심 어린 시선을 찰스와 레이븐에게 던졌다.
"이것 봐, 찰스. 초대장이 평소에 비해 세 배는 되는 것 같아."
"온 런던이 우릴 기다리는 건 확실하군."
그 결과가 이것이다. 레이븐이 집사에게서 받아온 바구니 안에는 초대장이 수북히 쌓여 있었고, 고급지로 된 봉투 안에는 각종 야유회, 바자회, 티 파티, 산책, 뱃놀이, 사냥, 여행, 클럽 모임, 조찬, 만찬, 파티, 크로켓, 체스, 어쨌건 영국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모임의 초대장이 들어 있었다. 하나같이 우아한 필치에 격식있는 어조로 정중한 요청을 하고 있었지만, 그 상냥한 쪽지들이 담고 있는 핵심 내용은 모두 똑같은 것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와서 들려주세요. 듣고 싶어요.'
"맙소사, 이 모임에 다 참가하려면 몸이 다섯개라도 안되겠다."
달콤한 분홍색 마분지로 된 초대장을 들여다보던 레이븐이 지친 듯 고개를 저었고, 찰스는 그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대부분은 그저 우리 얘기를 듣고 싶은 것 뿐이니 잘 골라보면 하나만 가도 한 다섯개 모임은 취소시킬 수 있을걸."
"그래서, 이런데 갈 거야?"
레이븐의 질문에 찰스는 고개를 저으며 유쾌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럴 리가! 차라리 이 초대장을 보낸 사람들을 강의실에 몰아넣고 내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한 시간 동안 강의를 하고 말지."
그러는 와중에도 빈틈없이 초대장을 체크하고 답장을 보내야 하는 것들은 펜으로 표시를 남기고 옆에 밀어놓는다. 사소한 클럽 모임이나 야유회 등에는 굳지 답장을 보내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자비에 가와 친분이 있는 사람들의 초대장에는 직접 답장을 하지 않으면 실례가 되니까, 이렇게 표시를 해 둔 다음 나중에 찬찬히 답장을 쓸 생각인 것이다. 붉은 비단 쿠션을 댄 의자에 기대앉아 찰스가 하는 양을 유심히 보고 있던 레이븐이 문득 생각났는지 말을 걸어온다.
"하지만 괜히 안 가면 싫어하지 않아?"
"사실은 그렇지, 그래서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레이븐의 얼굴이 호기심에 가득 찬다.
"우리 가문 평판의 안녕을 위해, 넌 잠시 앓아누워 줘야겠어."
그리고 일그러진다. 찰스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힘, 마음을 읽는 능력 덕에 고개를 들지 않아도 지금 레이븐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정도는 알 수 있다.극장에서 본 남자처럼 강력한 의지를 지니지 않는 한 대체 무엇을 생각하는지 구체적으로는 알기 어려웠지만, 이렇게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사람의 감정 정도는 아주 쉽게 읽을 수 있었다.
"왜 꼭 그래야 하는데?"
"그야 네가 충격으로 쓰러져 앓고 있다는 정도가 아니면 이 많은 초대를 다 거절하는 것도 어려우니까 말야."
"흥, 그리고 오빠는 날 돌보느라 정신이 없고 말이지?"
"정확히 맞췄어. 혹시 너 요즘 내 능력을 배우기라도 한 거니?"
레이븐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왜 그래야 하는지 필요성은 이해했지만 그래도 하기 싫다는 표정이다. 아마도 레이븐은 할 수만 있다면 계속 그 표정을 짓고 불평을 늘어놓았을 것이다. 쓴웃음을 짓던 찰스의 얼굴이 묘하게 잠잠해지고, 진지해진 시선이 레이븐의 어깨 너머를 응시하지 않았다면
"...찰스?"
"내가 틀린 게 아니라면..."
"무슨 소리야?"
찰스가 일어서서 레이븐 뒤쪽, 창가를 향해 다가간다.
"이거 말야."
창가에 놓인 작은 탁자, 부드럽게 윤낸 호두나무 목재 위, 흰 꽃병 아래 무언가가 놓여 있다. 집어서 들어올리고, 그제서야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본 레이븐이 깜짝 놀라 갈색눈을 크게 뜨는 동안 찰스는 겉봉에 적힌 단아한 글씨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다. 그것은 봉투였다. 흰 마닐라지에 아무 문장 없는 밀랍 봉인이 붙어 있고, 적혀 있는 거라고는 단 두 마디 뿐이다.
'헬파이어 클럽.'
지옥불 클럽이라니, 18세기에나 통용될 법한 우스꽝스러운 이름이다. 얼굴을 가면으로 가린 귀족들이 자기들이 고안해 낸 유치한 의식 따위를 벌이기 위해 지어냈을 법한 이름.
"이 봉투, 아까는 분명히"
레이븐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분명 이 테이블 위는 비어 있었다. 잠시 왠지모를 위화감에 조심스레 주위를 둘러보던 찰스는, 그 위화감이 풍경 때문이 아니라 냄새 때문에 든 것임을 깨닫고 미간을 모았다. 냄새, 그렇다. 아주 미미한 냄새가 나고 있었다. 뭔가 탄 듯한 냄새, 혹은 유황 냄새.
'어울리는군.'
잠시 망설이다 봉투를 뜯었다. 안에 든 것은 흰 마닐라지로 된 수수한 초대장이다. 조금 실망하며 접혀 있는 종이를 펴서 들여다본 찰스는 가볍게 휘파람을 불어 놀라움을 표시했다.
"뭐야? 누군데 그래?"
"이건 의외네."
레이븐이 호기심에 눈을 반짝거리며 다가온다. "뭐야, 여왕폐하라도 되는 거야?" 다가온 소녀는 얌전히 올라앉은 글자들을 소리내어 읽기 시작했다.
"귀하와 자리를 함께 하고 싶습니다. 그 곳에서 이번에 겪으신 일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리고 당신의 힘에 대해서도. 중요한 일이오니 되도록 혼자 와 주십시오."
날짜와 장소가 써 있는 부분즈음에 남성적인 필치로 초대장을 보내온 이의 이름이 올라가 있다. 꼭 레이븐의 말에 마침표라도 찍듯, 찰스는 천천히 그 이름을 음미하듯 읽었다.
"세바스챤 쇼우."
"세바스찬 쇼우?"
똑같은 이름을 레이븐이 저런 어조로 입에 담는 이유는, 초대장을 보내왔다는 자가 현재 사교계에 대 화제가 되어 있는 정체 불명의 거부이기 때문일 것이다. 세바스찬 쇼우, 남아프리카에서 막대한 돈을 벌었다고도 하고 동남아에서 벌었다고도 했다. 어쨌건 확실한 건, 그가 누구인지 정확히 뭘 하던 사람인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 그리고 지금 부유층이 가득한 이 곳 메이페어 가에서도 중심이랄 수 있는 그로스브너 광장 근처에 호화로운 저택을 구입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그 막대한 수입원이 무엇인지 아직까지도 불분명하다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의 모임에 가끔 참석은 해도 공개된 파티를 여는 일은 없던 그가 굳이 찰스를 지목하여 불렀다는 것 뿐이다. 한동안 초대장을 바라보던 레이븐이 눈을 가늘게 뜨고 의혹에 찬 표정으로 찰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는 사이였어?"
"네가 더 잘 알잖아. 그럴 리가?
"그런데 이게 왜 왔지?"
찰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도 지금 초대장을 들여다보고 있는 명민한 소녀만큼이나 당혹에 빠져 있었다. 의외의 대상에게서 상상상하지못했던 방식으로 초대장이 날아온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지금 그를 감싸고 도는 불안한 마음은 그보다는, 초대장 안에 적힌 글의 내용 때문이었다.
'당신의 힘에 대해서도.'
찰스는 생각에 잠겨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레이븐에게 짧고도 간단히 말했다.
"가 봐야겠어."
레이븐이 고개를 끄덕이고, 곧 가볍게 달려나갔다. 찰스의 얼굴만 보고도 그가 뭘 원하는지 알아챈 것이다. 묵묵히 초대장을 내려다보던 찰스는 가볍게 고개를 젓고 서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어쩌면 쇼우가 지정한 시간이 되기 전에 그 '지옥불 클럽'이라는 것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 조금이라도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
-계속
그로스브너 광장의 포석 위에 사두마차의 발굽 소리가 울리는 일은 매우 흔했다. 그러나 누군가 그 문에 새겨진 자비에 가의 문장을 본다면, 충격으로 쓰러진 사촌 여동생을 간호하느라 두문불출하고 있는 자비에 가의 젊은 후계자가 사실은 외출을 즐겼다고, 그것도 장안의 화제인 쇼우 박사의 저택을 찾았다고 소문이 날 테고 이 또한 사교계의 화제가 될 것이었다. 그래서 현명하게도 찰스는 가문의 문장 따위 새겨져 있지 않은 작은 마차를 골랐다. '혼자 오라'는 말을 지켜, 마차를 모는 젊은 마부 외의 사람들은 전혀 대동하지 않은 채였다.
세바스찬 쇼우가 사교계의 화제가 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저택이었는데, 사실 꽤 넓은 정원을 가진 두 채의 저택을 한꺼번에 사들여 하나로 합쳐버린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 시세보다 높은 값을 부른 것은 물론이다. 하여, 저택 입구에 들어선 다음에도 한동안 마차는 속력을 거의 줄이지 않고 달렸고, 찰스는 마차가 꽤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음에도 거의 흔들림 없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속으로만 감탄했다. 단순히 잘 정리한 흙길이 아니다. 이 긴 정원의 마차 길을 전부 포장해 버리다니, 그는 아마도 쓸데없이 사치스러운 성격이거나 완벽주의자일 것이다.
'아마도 둘 다겠지.'
마차의 속력이 잦아들었다.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하니 정시 1분 전이다. 마차가 멈추자마자 입구에서 대기하던 하인이 달려와 잽싸게 문을 연다. 발판을 딛고 내려와 주위를 둘러보니 어스름이 내려앉는 시간인데도 저택의 모든 방에는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다. 먼 데 어딘가에서 음악 소리가 들려왔고, 몇몇 창문에는 사람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혼자' 오라고 했으면서 이런 공개된 행사에 부르다니.' 언뜻 그리 생각하는데, 눈앞에 의외의 사람이 나타나 주의가 흩어지고 말았다.
"저 쪽 모임은 오늘의 약속과는 상관 없는 쪽이랍니다."
여성스럽고 우아한, 하지만 일말의 친밀감이나 다정함 따위 없는 건조한 말투였다. 건조하되 열 때문에 말랐다기보다 오히려 얼어붙어 있다는 것이 어울리는 목소리다. 공손이 손을 내민 하인에게 모자와 단장을 맡긴 찰스는 그 목소리의 주인임에 틀림없는 여성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보통은 립타이드가 나오지만, 이번 손님은 아주 특별하다고 하시더군요."
어깨를 드러낸 흰 드레스가 너무나 잘 어울리는, 놀랍도록 아름다운 여인이 차갑다시피한 푸른 눈으로 이 쪽을 응시하며 말하고 있다. 길고 가느다란 목에도, 우아한 귀에도, 눈부신 금발에도 지금 그녀와 너무나 잘 어울리는 눈부신 다이아몬드가 얼음 조각처럼 빛을 뿌리며 얹혀 있었다. 인사할 타이밍조차 주지 않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엠마 프로스트입니다. 따라오시죠,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어딜 보아도 하녀나 하우스와이프가 할 법한 옷차림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마치 자신이 이 집의 일부인 듯 자연스럽게 하인들 앞에서 여주인처럼 행세하고 움직였다. 그렇다면 그녀는 아마 쇼우의 정부 노릇을 하는 고급 창부거나 애인, 혹은 부인일 것이다. 어쨌건 사교계에서 본 적 없는 여성이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정 말한다면 비서에 가장 가깝죠. 어떻게 생각하시건 상관 없지만요."
찰스는 묘한 느낌을 받고 앞서가는 여성의 흰 등을 응시했다. 어째서인가 그녀가 그의 마음을, 더 정확히는 '생각'을 알아채고 그에 반응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페르시아산 카펫, 대체 어떤 나라에서 제작했는지 모르겠지만 명백히 이국저인 상아와 흑단으로 된 조각품들, 인도차이나의 요란한 불상과 호화로운 탱화들, 벽에 아무렇지도 않게 붙어 있는 고가의 그림들 - 몰취미의 경계선에서 간신히 한 발 안쪽으로 들어온 호화로운 쇼우의 수집품들 사이에서 흰 드레스에 감싸인 여인은 또 하나의 장식품, 혹은 조각품처럼 보였다. 허나 지금까지 그녀가 한 말들로 미루어 볼 때 이 여인은 쇼우에게 있어 단순한 정부나 비서 정도가 아닐 것이었다. 찰스는 조용히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엠마의 생각을 읽어보려 한 순간,
"그만두세요."
미미하게나마 '조소'가 담긴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당신...?"
"여깁니다."
흰 레이스 장갑에 감싸인 손을 들어 가볍게 노크하고, 엠마는 무표정한 얼굴로 문 손잡이를 돌려 마호가니 문을 열고 찰스 쪽을 돌아보았다. 언뜻 보면 아무것도 떠올라 있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그 푸른 눈에는 명백한 비웃음이 담겨 있다.
"들어가시지요."
찰스는 초대장에 적혀 있던 말을 떠올리고 속으로만 작게 혀를 찼다.
'당신의 힘에 대해서도.'
아마도 세바스찬 쇼우는 어떠한 루트를 통해 찰스의 '힘'에 대해 알게 되었던 것 같았다. 그리고 눈앞의 이 여인을 보건대, 아마도 그 일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바로 곁에 찰스와 비슷한 사람을 두고 있기 때문이었겠지. 세상에서 하나뿐일 줄 알았던 자신과 같은 사람을 만난 것인데도, 단순히 반가워하기엔 주변 상황이 너무나 복잡했다. 허나 그 상황은, 운이 좋다면 이 문 안쪽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남자가 풀어줄 것이다. 잠시 마음의 준비를 한 찰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문 안으로 들어섰다.
남자는 벽난로 가에 서 있었다.
'이건 의외로군.'
찰스의 소감은 남자 뿐 아니라 방 전체에 대한 것이었다. 찰스를 보자마자 매우 기분이 좋다는 듯 만면에 환한 미소를 띠고 다가와 친밀한 몸짓으로 포옹하는 남자도 남자였지만, 이제껏 보았던 호화로운 실내와는 대조적으로 자주빛 카펫과 신화 속 풍경이 묘사된 그림 한두점 외에는 별반 장식이 없는 방 내부도 내부였다. 벽난로 앞에 놓인 안락의자와 빌로드 카우치는 물론 최고급품이었지만, 지금까지 쇼우의 저택 내부에 놓여 있던 사치스러운 가구들에 비하면 엄격해 보일 정도로 소박한 디자인을 하고 있었다.
여자는 '응접실'이라고 말했지만, 고급 탁자 위의 위스키와 크리스털 잔 세트를 제외하면 이 방 안에 딱히 '손님'과 연관된 것은 없어 보인다. 오히려 방 한쪽 구석에 놓인 - 아마도 카우치와 세트인 듯한 - 침대를 발견한 찰스는 의아함으로 미간을 좁혔다. 어딜 보아도 이 곳은 응접실이라기보다는 밀회를 위해 만들어진 밀실에 가까워 보였다.
"이런 곳에서 맞는 것을 용서해 주었으면 좋겠소." 그는 듣기 좋은 소탈한 목소리를 지녔지만, 미묘한 외국 액센트가 섞인 어조에는 다분히 권위적인 울림이 섞여 있었다. "사실 정식 응접실은 다른 곳에 있지만, 클럽 일반 회원들의 모임이 있는 날이라 어쩔 수 없이 이 곳에 자리를 마련하게 되었소."
역시 생각대로다. 남자의 포옹에서 풀려난 찰스는 사내의 지나치게 친밀한 태도에 의아함을 느끼며 인사를 건넸다.
"처음 뵙겠습니다. 찰스 프란시스 자비에입니다."
"쇼우, 세바스찬 쇼우요. 생명의 은인을 직접 보게 되어 기쁘군."
찰스는 눈을 크게 뜨고 쇼우를 바라보았다. '생명의 은인'? 경악한 찰스의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쇼우는 환히 웃으며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물론 이런 얘기가 너무나 갑작스럽고 당황스러울 거요. 하지만 내 얘기를 듣는다면 뭐든지 다 이해하게 될 거요."
한번 운을 띄워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싶었다.
"제 '힘'에 대한 얘기도 말입니까."
"그렇소."
의외의 화제를 꺼내 이 남자를 놀라게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역시 환히 웃으며 태연자약하게 고개를 끄덕인 남자는 유리장 쪽으로 다가가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고 안에서 잔과 병을 하나씩 꺼낸다. '들겠소?' 라고 묻는 듯한 시선을 받은 찰스는 가볍게 고개를 저어 거부의 뜻을 나타냈다. 잔에 브랜디를 한 잔 따른 쇼우는 진한 액체를 한 모금 넘기고 가볍게 이맛살을 찌푸렸다 펴며 말을 시작했다.
"내가 지금부터 하는 말에 거짓은 없을 거요. 원한다면 얼마든지 내 뜻을 읽어도 상관없소."
찰스는 한쪽 눈썹을 끌어올렸다. 어떻게 그가 찰스의 '힘'에 대해 이 정도까지 정확히 알고 있을까? 역시 아까의 추측대로 그녀가, 엠마 프로스트가 찰스를 찾아냈던 걸까? 물론 눈앞의 이 남자를 조금씩은 읽어볼 생각이긴 했지만, 찰스가 얼떨떨한 기분이 된 것은 그보다는 누군가 자신의 능력을 알고 이렇듯 아무렇지도 않게 거론하는 사태 자체가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글쎄요, 눈앞에서 말하는 사람들을 읽는 무례는 왠만해서는 저지르지 않습니다."
사실이긴 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변명같은 말이라고 생각하며, 찰스는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쇼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밀어 찰스에게 의자를 권했다. 그리고 그 자신 또한 안락의자에 앉으며 찰스 쪽을 바라보고 이야기했다.
"좋소. 남용은 좋지 않긴 하지, 하지만 내가 먼저 제안했다는 것은 반드시 기억해 주기 바라겠소. 나는 거짓말을 할 생각이 없고, 생명의 은인인 당신에게 내가 아는 바를 다 이야기할 것이오."
"아는 바라면..."
"물론 단도를 던진 자에 대한 얘기지."
찰스는 쇼우를 바라보았다. 40대로 보이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최고급 재킷을 차려 입은 몸에는 군살이 없고, 이 정도로 호화로운 집에 살면서도 눈이 전혀 풀려 있지 않다. 약간 말라 보이는 얼굴은 느긋하게 미소짓고 있음에도 어딘가 불안해 보였는데, 그것은 다분히 그가 지닌 지나치개 냉철한 푸른빛 눈 때문이리라. 아니, 그보다는 얇게 다물린 입 때문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 찰스의 관심사는 그것이 아니었다. 그를 긴장시킨 것은 쇼우의 외모가 아니라 그 입에서 방금 흘러나온 말이었다.
"그 남자를 알고 있습니까?"
"물론이오. 나는 그를 아주 잘 알고 있소."
찰스가 뭔가 더 물어보려고 입을 열었을 때, 쇼우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손을 올려 찰스의 뺨에 손을 댔다. 그 순간 찰스는 아주 기묘한 느낌을 받았는데, 남자는 친밀함을 나타내듯 뺨을 가볍게 만지고 손을 내린 것이 고작이었지만 그 손 안에는 분명 무언가가 숨어있는 것 같았다. 의지나 의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눈앞에 있는 것은 분명 나이든 남자에 불과했지만 방금 찰스의 얼굴에 닿았던 것은 그보다 훨씬 거대하고 강력한 무언가였다. 찰스가 입을 다물자, 쇼우는 바로 그것이 목적이었따는 듯 기쁜 표정으로 웃으며 그에게 다시 말을 건넸다.
"일단 내 얘기를 해 드리겠소. 다 듣고 나면 얼마든지 질문을 듣도록 하지."
"그러죠."
찰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천히 정신의 손길을 뻗칠 준비를 했다. 하지만 그 첫 시도는 무참히 실패하고 말았는데, 그것은 쇼우가 말한 것이 워낙 뜻밖이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이름은 에릭 렌셔, 독일인이오. 나를 죽이려 하고 있소."
찰스의 새파란 눈동자가 놀라움으로 벌어지는 것을, 남자는 다분히 성취감 어린 미소로 바라보았다.
"이름을 알고 계십니까?"
"그렇소. 당신보다 한... 다섯 살 더 먹었을 거요."
"그렇다면 어서 경찰에"
"소용 없소. 영국 경찰 따위가 그를 잡을 수는 없지. 무엇보다도..."
이 말을 할 때의 그는 거의 다정해 보였다.
"나는 그를 사랑하고 있다오. 에릭은 내 아들이나 다름없거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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