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간 놀던 거 아니고 바쁜 회사일 짬짜미 이거 소설화 하고 있었습니다.
- 2월 25일 행사에 나올 글이라 정말 시간이 없네요.
- 열심히 달리겠습니다-
1.
찰스는 한숨을 푹 쉬었다. 오 맙소사 -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되어 버린 걸까. 레이븐의 말이 옳았다. 바로 2개월 전, 따뜻한 장작이 타오르는 실내에서 사랑스런 누이는 전혀 사랑스럽지 않은 표정으로 외쳤더랬다. '독일이라니, 미쳤어?' 네 살이나 어린 주제에 언제나 누나라도 되듯 따지고 드는 금발의 누이 앞에서 찰스는 그저 눈알만 굴렸다.
'오, 레이븐 - 그렇게 걱정할 것 없어. 슈바르츠발트 한 가운데 있는 아주 작은 마을일 뿐이야. 거기서 요양을-'
'사랑하는 오라버니이? 그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 같은데 말이야?'
그날 저녁 도착한 새 비단 드레스 자락을 꼭 틀어쥔 레이븐은 새파란 최고급 비단에 주름이 지거나 말거나 아랑곳하지 않고 찰스를 몰아붙였다.
'바로 6개월 전에 나한테 그 말 하지 않았어? 트랜실바니아의 서늘한 공기로 피서를 떠난다고 했지?'
'오, 레이븐 난 정말 그럴 작정이었어.'
'물론 그럴 작정이었겠지, 다정한 오라버니! 하지만 실제 어땠어? 괴상한 마을에 가서 들쑤시고 다니는 바람에 쫓겨났다면서?'
'아니, 그래도 그 마을 사람들이 믿던 흡혈귀가 사실 전설이 와전된 거라는 건 밝혀-'
'그 전에는!'
이번에야말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멕시코였잖아. 아후...아휘...뭐라고 했지?'
'......아후이조틀.'
'거기서 그걸 찾겠다고 하다 황열병에 걸려 죽을 뻔 했던 걸로는 부족해?'
아무 답도 할 수 없었던 것은, 이 발랄하고 때로는 대책없을 정도로 저돌적이지만 동시에 말도 못하게 찰스를 걱정하는 누이의 눈매에 어느새 눈물이 맺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빠 제발, 의학 박사까지는 아주 좋았어. 아니, 귀족이 왜 그런 걸 배워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야, 어쨌건 좋았다고.'
'......'
'그리고 박물학 쪽으로 방향을 돌린 것에 대해서도 난 불만 없어. 오빠가 모으는 신기한 물건들 나도 좋아하잖아.'
'그렇지.'
레이스 장갑에 감싸인 레이븐의 손이 가슴에 매달린 터키옥 펜던트를 꼭 쥐었다. 전설속의 괴물 아후이조틀을 찾아갔던 멕시코에서 샀던 선물이었다. 황열병에 걸려 헛것을 보면서도 끝내 손에서 놓지 않았던 목걸이를, 누이는 건강이나 챙길 것이지 미련스레 이런걸 가져왔냐고 타박하면서도 기쁘게 받아 주었었다. 찰스는 미안함에 견디지 못하고 눈을 내리깔았다.
'하지만 이번엔 독일이잖아, 게다가 도착하면 겨울이야! 거기서 대체 뭘 찾으러 가는 건데? 언제까지 전설 속의 괴물들만 찾으러 다닐 거야?'
'......'
'웨스트체스터에는 주인이 필요해.'
하지만 찰스는 또한 알고 있었다. 늘 이렇게 말하는 레이븐이었지만,
'...그러니까 이번엔 좀 맘 잡고 조심해서 갔다 와. 응?'
'미안해, 레이븐.'
언제나 끝에는 늘 찰스에게 한 수 물러주었다는 것을.
눈물 젖은 눈으로 찰스를 바라보던 레이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정말이지, 대체 누가 누구의 후견인인지 모르겠다니까.' 그리고 그런 레이븐에게 찰스는 약속을 하나 해 주었다.
'이번에 다녀오면 얌전히 영국에 붙어 있을게.'
'......정말?'
'적어도 네가 행크와 결혼식을 올릴 때까지는.'
'찰스!'
새빨개진 얼굴의 여동생에게 찰스는 웃으며 다시 한번 말해 주었다. 그녀가 몰래 마음에 둔 청년과의 결혼을 허락해 주겠다고, 그리고 기꺼이 그 결혼식에 참석하겠노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것도, 이 위기에서 헤쳐나간 다음의 일이다.
"제길!"
찰스는 있는 힘을 다해 눈길을 뛰어가며 욕설을 내뱉었다. 숨이 턱까지 차 있었지만 절대 발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벌써 해가 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 곳, 독일 검은 숲의 겨울 해는 상상을 초월하게 빨리 가라앉았고, 그에 비해 찰스의 발걸음은 지독스러운 흰 눈에 묶여 느리기 짝이 없었다. 가야 한다, 한시라도 빨리 마을로 돌아가야 한다. 지금은 음력 13일, 마을 사람들이 말하는 '괴물'이 나타나는 보름이 되기까지는 겨우 이틀만 남아 있었다.
슈바르츠발트의 작은 마을 나이슬라흐, 고작해야 삼사십여 호의 가옥이 마을 창고가 있는 작은 광장을 중심으로 옹기종기 모여선 곳이다. 몇개인가의 가게가 있긴 하지만 거기 없는 물건을 사려면 몇시간이고 숲길을 걸어 읍내까지 가야만 할 정도로 한갓진 마을로, 옥스포드를 졸업한 영국인 학자가 와 있을 만한 곳은 아니었다. 그놈의 '괴물 전설'만 아니라면.
'정말입니다.'
독일인들답게 실로 무뚝뚝한 첫인상을 지녔던 마을 사람들은 그러나, 한달간의 여관비를 선불로 지불하고 눌러앉아 싹싹하게 말을 붙여가며 끈질기게 질문을 던져오는 찰스에게 의외로 자세한 설명을 들려 주었다. 이 애교많은 이방인의 붙임성 때문인지 그가 내민 돈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건 '괴물'에 대한 질문을 듣는 족족 성호를 그으며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조심하세요 영국인 양반, 보름 밤이 되면 절대로 돌아다니면 안돼요. 그 날은 외양간 문도 모두 꼭 닫아놓는답니다.'
'괴물'은 보름달이 뜨는 14일부터 16일 사이에 마을을 돌아다닌다고 했다. 그 동안, 아니 사실상 그 앞뒤로 일주일 동안 모든 주민들은 해가 떨어지면 곧장 외양간 문을 걸고 창고를 잠그고 누구도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로.
'많은 사고가 있었어요. 그 때만은 조심하십시오.'
주어지는 말은 모두 경고의 말들 뿐이었음에도, 마을 사람들의 진지한 태도를 접할 때마다 오히려 찰스의 의욕은 불타올랐다. 이번에야말로 진짜이리라는 기대감이 끓어올랐던 것이다. 근거 없는 짐작이 아니다. 마음속으로부터 깊이, 사실은 바로 그의 두뇌를 통해서 마을 사람들이 '직접 겪은 진실'을 얘기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그의 능력이 지금 그에게 생생히 속삭여 주고 있었다. 이 마을에서만은 진실을 접하고 있다고.
물론 모든 것을 읽어내지는 못한다. 사람들이 깊이 숨기려 하는 것, 혹은 잘못 알고 있는 것까지 다 간파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눈앞의 사람들이 그저 전설을 이용해 몇푼 돈을 울궈내려는 작자들인지 아닌지 정도는 구분할 수 있었고, 그것만 해도 큰 도움이 되어 주었다. 트란실바니아의 흡혈귀는 역사적 사실이 와전된 것이었고, 멕시코의 아후이조틀은 허구의 존재였다. 그러나 이 곳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아주 생생한 공포가 살아 꿈틀거리고 있었다. 직접 본 이는 아직 만나보지 못했지만, 분명 이 곳에서라면 '답'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을 갖게 된 것만 해도 찰스로서는 대단히 큰 수확이었다.
찰스는 어른들 뿐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적극적으로 이것저것 묻고 다녔다. 머나먼 외국에서 온 손님에게 강한 호기심을 느낀 아이들은 처음 잠깐만 경계심을 보여주었을 뿐, 곧 찰스가 보여주는 이국의 물건들에 매료되어 아주 훌륭한 정보원이 되어 주었다. '한스가 이상한 그림자를 봤대요!' '구드룬네 거위를 괴물이 잡아먹었대요!' 아직까지 그 단편적인 정보들에서 딱히 훌륭한 답이 나온 적은 없지만, 그래도 앞으로의 일은 알 수 없는 것이지 않은가.
하지만 오늘만은 그 아이들의 말을 단순히 믿어버린 자신이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숲 속의 샘에서 거대한 그림자를 보았다는 얘기를 듣고는 당장 달려나갔건만, 별반 소득도 없이 너무 늦어버린 것이다. 어느새 해는 지고 있고, 지금은 붉은 노을도 거의 사라져 지평선에 금빛 끄트머리만 남아 있는 상태다. 이마 마을 사람들은 - 아마도 어제 바로 그랬듯 - 문은 물론 덧창문마저 모두 걸어 잠그고 공포에 떨고 있을 것이다. 최악의 경우에는 이 추운 겨울밤을 밖에서 보내게 되는 수가 있다. 괴물도 괴물이지만 사실 찰스에게 당장 다가온 가장 큰 위협은 그것이었다. 눈 덮인 겨울의 슈바르츠발트에서 혼자 밤을 보낸다는 건 말 그대로 자살행위이므로.
"제발, 제발 좀!"
드디어 마을 문 안으로 들어선 찰스는 완전히 어두워진 하늘을 원망스레 바라보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옷을 두텁게 갖춰 입었음에도 뼛속까지 파고 들어오는 끔찍한 추위에 몸이 덜덜 떨려 왔고, 한 발짝 옮길 때마다 지친 몸은 비명을 질러댔다. 턱까지 숨이 차오른 상태에서 더 속도를 내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간신히 마을 광장에 도달한 찰스는 절망적인 시선을 던지며 여관 문에 달려가 힘껏 노커를 두드렸다. 문은 잠겼고 덧창문도 단단히 닫혀 있다. 안에 불은 켜져 있었지만, 아무도 찰스에게 답하지 않았다.
"이봐요! 여기 사람이 있어요!"
외치며 노커를 두드렸지만 여전히 답은 없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한숨을 내쉰 찰스는 고개를 돌려 광장 가의 집들을 바라보았다. 마찬가지다. 단단히 빗장을 걸고, 자물쇠를 안에서 걸고, 덧창문을 닫고, 아무도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들여보내 달라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소리쳐 봤지만 마찬가지로 아무도 답해오지 않는다. 새삼 덜덜 떨려오는 몸을 양팔로 끌어안으며 찰스는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숲 속의 자그만 마을, 한적하고 평화로운 곳이라고만 생각했던 곳이 이렇게 쓸쓸하고 무서워 보인 적은 없다. 이름 그대로 검은 숲에 둘러싸인 건물들의 검은 그림자 사이에 이상하리만치 밝은 달빛만 떨어진다. 달빛, 아마도 괴물이 지금 자신을 본다면 이 밝은 달빛 덕에 아주 쉽게 찾아내고 잡아먹으리라. 공포보다는 추위 때문에 덜덜 떨며 다른 건물 쪽으로 다가가 보려던 찰스는 누군가 그의 어깨를 친 순간 그만 짧은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으악!!"
돌아본 곳에 선 큰 그림자를 보았을 때 공포는 순간 경악이 되었지만 그 그림자가 랜턴을 든 남자라는 것을 알아본 뒤부터는 급속도로 가라앉았다. 그렇다, 남자였다. 괴물이 아니라 그저 인간 남자 하나. 차가운 표정으로 찰스를 내려다보는 남자는 꽤 따뜻해 보이는 털가죽 망토를 걸친 등에 뭔가 묵직한 자루와 막대 같은 것을 지고는 랜턴을 들고 서 있었다.
"저기...저......"
잠시 도움을 청하려던 찰스는 곧 이 사람이 영어를 알아듣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생각하고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독일어를 할 수는 있었지만 듣기에 비해 말하기는 그다지 능숙하다고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깊이 당황한 상태라 문장이 잘 떠올라 줄지 의문이었다. 제발 이 사람이 자기 발음을 잘 알아들어 주길 바라면서, 찰스는 필사적으로 대화를 시도했다.
[그...도와주세요. 전 여기 사람이 아닙니다. 이 마을에 왔는데, 문이 닫혔고, 너무 늦어서...]
그러면서 최대한 지금 자신의 상황을 설명했다. 배도 고프고, 목도 마르고, 무엇보다도 춥다고. 하지만 남자는 그런 찰스를 차가운 시선으로 빤히 바라보기만 할 뿐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불안해진 찰스가 잠깐 남자의 생각을 훑어보려 했지만, 이 쪽을 향한 별다른 적의가 없다는 것, 약간은 찰스를 한심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 외에는 잘 알 수가 없었다.
[제 말 아시겠어요? 도와주세요.]
슬슬 반응없는 남자에게 부아가 났지만, 그래도 찰스는 열과 성을 다해 도움을 요청했다. 이미 밤이고, 마을 사람들은 이제 절대 찰스를 안으로 들여보내 주지 않을 것이다. 이 남자는 그간 마을에서는 본 적 없는 사람이었지만 아무튼 이렇게 날이 어두워도 멀쩡히 돌아다니는 걸 보면 바로 이 근처에 집이 있는 사람인 것만은 틀림없을 것 아닌가. 그는 찰스의 마지막 희망이었고, 찰스는 그 사실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었다. 간절히 손을 내미는 순간 남자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아마 그는 상대가 정신병자나 백치가 아닌가 의심하면서도 어떻게든 다시 한 번 매달렸을 것이다.
"정말 못봐 주겠군. 멍청한 짓 그만하고, 여관은 내일 아침까지는 안 열 테니 우리 집에서 묵고 가던가 하시오."
이 곳 사람 특유의 강한 억양이 섞여 있었지만 분명히 매우 유창한 영어였다. 생각지도 못한 모국어에 놀란 찰스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쳐다보자, 남자는 그런 찰스를 잠시 응시하다 곧 몸을 휙 돌려 어딘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자, 잠깐! 당신, 영어 해요? 영어 할 줄 알아요?"
남자가 멈춰선다. 하지만 돌아보지는 않았고, 냉정한 목소리가 밤 공기를 뚫고 찰스의 귀에 울려 왔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닐 텐데. 따라오시오. 싫으면 그냥 여기서 밤 새던가."
남자는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찰스는 허겁지겁 그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거 살았군요."
"......"
"성함이 어찌 되시나요? 전 찰스 자비에라고 합니다. 여기 온지는 열흘 쯤 되는데 처음 뵙는 분이군요. 괜찮으시다면-"
"에릭."
남자는 그 한 마디만 뱉고는 그 뒤부터 찰스가 뭘 묻건 무슨 이야기를 하건 모두 무시했다. 분명 말도 못하게 무례한 짓이었지만 그럼에도 어쨌건 도움의 손길인지라, 찰스는 속으로만 투덜거리며 어떻게든 남자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한참을 걷다 보니 오히려 숲에 더 가까워졌다. 불안해진 찰스는 남자의 생각을 조심스레 살펴보았고, 그가 집으로 가고 있는 것이 맞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다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어쨌건 살았다. 이 자가 무슨 속셈으로 찰스를 도와주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이 추운 밤을 눈밭에서 얼어죽을까봐 덜덜 떨며 지새지 않게 된 것만 해도 다행이 아닌가.
2.
'에릭' 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한 남자의 집은 숲 안에 틀어박히듯 자리잡고 있었다. 나무 벽에 너와로 지붕을 한 집은 겉으로 보기엔 허름한 오두막처럼 보였지만, 막상 꽤 두터운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의외로 견고하게 잘 지어둔 집이었다. 이 마을 사람들이 늘 그렇듯 덧창 안쪽에는 견고한 걸쇠들이 달려 있으며, 벽의 통나무들은 바람 샐 틈 없도록 단단히 못질되어 있다. 마을에는 잠시 마실 나왔던 것인지 벽난로에는 이미 모닥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고 거기서 훈훈한 열기가 훅 끼쳐 왔지만, 영국과는 달리 지독하게 춥고 습한 독일 겨울 공기의 냉기는 쉽게 몸에서 가시질 않았다.
덜덜 떨며 벽난로 가로 달려가 손을 비비며 몸을 녹이던 찰스의 시선이 바닥에 가 닿았다. 부유한 집이라면 카펫을, 가난한 집이라면 짚이라도 깔아둘 그 공간을 대신하고 있는 것은 무려 털가죽이다. 짙은 회색과 여러 다른 색이 섞여 있는 긴 털을 바라보던 찰스는 그것이 늑대의 모피라는 것을 깨닫고 그 크기에 경악했다. 몇해 전 세상을 떠난 찰스의 양부가 이런 크기의 늑대를 잡았다면 틀림없이 박제로 만들어 전시라도 했을 것이다. 헌데 그뿐이 아니었다. 늑대 모피의 존재를 깨닫고 둘러본 실내에는 온통 이런 저런 동물들의 모피가 걸려 있다. 족제비, 담비, 늑대, 여우... 자루를 내려놓는 에릭 쪽을 보던 찰스는, 그가 들고 있던 막대 같은 것이 사실은 소총이었다는 걸 깨닫고는 자기도 모르게 독일어로 질문했다.
[사냥꾼인가요?]
질문을 하고서야 상대가 영어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내고는 입술을 깨물었지만, 남자는 아무 대답 없이 걸머지고 있던 총을 구석에 걸어놓을 뿐이었다. 아마 그 총을 고정해 놓기 위해 만들어진 듯한 나무 대에는 지금 에릭이 들고 있던 것 말고도 두세 자루의 총이 더 있었다. 모두 오래된 것이었지만 그래도 손질이 잘 되어 있어서 둔탁한 금속에 모닥불빛이 반사되어 희미한 빛을 발한다. 이어 외투를 벗어 옆에 걸어놓더니 한쪽 구석에서 작은 솥을 들고 다른 쪽으로 가 무언가를 그 안에 던져넣는다. 그리고 그 솥을 그대로 가져와 불이 타오르는 벽난로에 걸고는, 벽난로 곁에 굴러다니는 장작 한 덩이를 집어넣어 불을 돋운다.
"저기, 이봐요."
여전히 무시한 채 구석으로 가는 그를, 찰스는 이제 확실히 부아가 난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이 추운 겨울 밤에 따뜻한 실내로 들여보내 준 것은 정말 눈물겹게 고마운 일이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 무시하는 건 좀 너무하지 않은가. 그래도 다시 한번 붙임성있게 말을 걸어볼까 하는데, 다시 구석으로 걸어갔던 에릭이 들고 온 것을 찰스 앞에 불쑥 내민다.
"저..."
호밀빵이다. 이 곳 사람들이 주식으로 먹는 검고 거친 호밀빵을 찰스에게 한 덩이 내민 에릭은, 작은 종지를 벽난로 앞에 놓았다. 분명 저 쪽에 식탁이 있긴 했지만 거기보다는 여기 벽난로 앞이 훨씬 따뜻하다. 아직도 외투를 입은 채 주저앉은 찰스는 솥에서 끓기 시작하는 것이 아마도 스튜쯤 되리라 짐작했고, 곧이어 벽난로 앞의 작은 종지 안에 담긴 것이 빵에 발라먹을 수 있는 치즈라는 것을 알게 되자 기분이 좀더 나아졌다.
지쳐 있던 뱃속에 빵이 들어가자 기운이 좀 돌았다. 솥에서 끓는 소리와 냄새가 나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이 거친 식사에 대한 기대감마저 생겨났다. 묵묵히 빵을 씹던 에릭이 몸을 일으키더니 어디선가 나무 그릇 두 개를 들고 온다. 적당히 스튜를 나눠담은 그는 그릇 하나를 찰스에게 내밀었고, 이제 둘은 그 스튜 국물에 호밀빵을 찍어가며 묵묵히 빵과 치즈와 스튜를 먹기 시작했다. 양이나 소는 아니고 생전 처음 먹어보는 고기였지만, 따뜻하고 진한 스튜 국물은 시장이 반찬인 탓인지 무척 맛있었다. 마지막 국물을 빵으로 깨끗히 발라내 삼키고 나서야, 찰스는 식사를 하는 내내 이 식사를 대접해 준 장본인과 말을 한 마디도 나누지 못했다는 걸 깨닫고 당황했다.
"저... 정말 맛있는 스튜군요."
"사슴고기."
"...예?"
남자는 아무 답도 하지 않고 아직 덜 먹은 빵을 삼켰다. 지금의 말이 바로 자신이 먹은 고기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이라는 걸 깨달은 찰스가 뭔가 말하려는 순간, 그가 또 말을 꺼냈다.
"사흘 전에 잡았지. 수가 줄어들고 있지만 아직은 잡을 만 하거든."
아무래도 사냥꾼이 맞는 것 같다. 그렇다면 그의 오두막이 이렇게 마을에서 떨어진 데 있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사냥꾼, 숯장이, 그런 직업을 가진 자들은 늘 마을에서 떨어져 이렇게 마을 사람이 아닌 것처럼 살아가게 되어 있으니 말이다. 동물을 잡아와 가죽을 벗기고 고기를 해체하고 무두질을 하며 살고 있다면, 마을의 금기에서 어느정도 벗어나 있는 존재나 마찬가지니 이렇게 찰스를 재워주는 것도 이해가 갔다. 그리고 동시에, 이 사람의 태도도 납득이 갔다. 그는 아마도 찰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일 것이다. 마을 사람이라면 신기한 이방인인 찰스에 대해 모두들 알고 있었지만, 그는 아마도 마을에 가끔 들르는 것이 전부일 테니, 게다가 붙임성도 없는 성격일 듯 하니 더더욱 모를 수밖에.
"그나저나 당신, 영국인이 여기서 뭐 하는 거요?"
느껴지는 것은 그저 호기심 뿐이었다. 역시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찰스는 금새 붙임성있는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호의어린 미소와 다정한 말로 스스로를 소개하는 것은 늘 그가 즐겨하는 일이었고, 무엇보다도 독일에 와서 처음으로 영어로 이리 긴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이었기에 더 신이 났다. 박물학자인 자신을 소개하고, 지금까지 해 온 일을 얘기했다. 사람들의 신앙과 공포 속에 존재하는 기이한 생물이나 괴물들에 대한 조사가 절대 쓸모없는 일이 아니라는 주장, 보통 사람들은 그런 게 있을 리 없다고 비웃지만, 분명 그러한 경외심의 원인이 되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에 그러한 전설이 생기게 된 것이라는 그의 생각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래서 이 지역의 '괴물'에 대해 조사하러 왔다는 것을 말하는 순간,
"...에릭?"
남자의 얼굴이 변모했다. 그저 이야기를 듣고 있던 무표정한 얼굴에 더없이 뚜렷하게 적의와 반감이 솟아올랐다. 다급히 살펴본 그의 생각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저 희한한 사람을 만났다는 정도로만 생각하던 그가, 이제는 무서울 정도로 두터운 장벽을 치기 시작한다. 이 쪽을 응시하던 푸른 눈은 이제 얼음장처럼 차갑게 변했고, 그 순간 아주 강렬한 생각이 찰스의 손에 잡힐듯 생생하게 떠올랐다. 아니, "뚫고 올라왔다"는게 맞는 표현일 것이다. 그 생각은 너무 생생하고 강렬해서, 찰스는 눈앞의 남자가 불러낸 과거의 광경을 그의 시각에서 고스란히 들여다 볼 수 있었다.
'괴물!' '너 때문이야!' 죽음, 비웃는 사람들, 구경거리, 그리고 아주 잠깐이지만 한 여자가 거의 눈에 '보였다'. 검은 머리에 낡고 두터운 옷을 걸친 중년 부인이 목이 거의 잘린 채 쓰러져 있다. 흔들리는 시야는 일반적인 어른보다 훨씬 낮아서, 아마도 아이의 것인 듯 하다. 아이가 아래를 내려다보았고, 피에 흠뻑 젖어 있는 작은 손이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 외쳤다. '괴물이다!' '저주받았어!' 누군지 모를 여자가 비명을 지르고, 고함소리가 어둠을 꽉 채웠다. 흠칫 놀라는 순간 그 기이한 광경은 사라졌고 스튜 냄새와 모피가 가득한 작은 오두막이 다시 눈에 들어왔지만, 찰스는 방금 보였던 그 압도적인 광경을 지우기 어려워 눈을 깜박거렸다.
"에릭?"
이 쪽을 노려보던 남자는 잠시 입을 일그러뜨리더니 싸늘한 어조로 내뱉듯 말했다.
"결국 네 놈도 구경꾼이군."
당황스러운 말이었다. '구경꾼'이라는 그 말에 담긴 경멸과 적대감에 더욱 당황한 찰스는 어떻게든 에릭의 감정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해 보았지만, 이미 반감의 장벽을 친 남자에게는 소용 없었다.
"예? 아닙니다, 저는 아까 얘기한 것처럼..."
"그래, 당신도 그런 놈이겠지. 도시에서 곱게 살다가, 그게 뭔지도 모르고 다가왔다가 깨닫는 순간 꽁지 빠지게 도망치는 녀석들."
"잠깐만요, 지금 저에 대해서 오해가"
"됐소."
좀더 강경하게 밀어붙여서라도 오해를 풀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정신적인 충격이 꽤 컸다. 아직도 방금 본 참상이 눈앞에 생생했던 것이다. 눈, 피, 피냄새, 함성, 찰스의 기억은 아니다. 방금의 그 광경을 생각해 낸 것은 바로 눈앞의 이 남자다. '괴물'의 피해자! 방금의 이야기는 아마도 '괴물'에 대해 호기심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얘기이리라. 그렇다, 마치 찰스와 같은 방문자들.
"저기..."
조금 정신을 차리고 다시 말을 붙여보려 했지만 에릭은 일어서서 어딘가로 걸어가 버렸다. 돌아보는데, 바닥에 깔려 있는 늑대 가죽보다 훨씬 커다란 모피를 들고 온다. 역시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이제 그 마음에는 한치를 들여다 볼 수 없을 만큼 두터운 장벽이 쳐져 있었다. 아마도 곰가죽 정도 되어 보이는 두텁고 무거운 모피를 찰스 앞에 내려놓은 남자는 서느러니 식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걸 덮고 자면 될 거요. 내일 아침에 곧장 나가시오. 인사는 필요 없소."
"제 말을 좀 들어주시면 안될까요?"
휙 돌아서서 가 버리는 그림자의 주인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인다. 찰스는 이를 꾹 악물고 잠깐 어떻게든 대들어 볼까 생각했지만, 저 정도로 마음에 두터운 장벽을 친 상대라면 무엇을 말해도 소용없다는 생각이 들어, 깊은 한숨을 내쉬며 그만둬 버렸다. 일단 모피를 덮자 온기가 천천히 냉기에 지친 몸을 휘감아 왔지만 의외로 정신만은 맑아서, 찰스는 그 뒤로도 한참을 뒤척여야 했다.
눈을 떴을 때 집안은 어두웠고, 어디에도 인기척이 없었다. 안쪽 덧창을 열어보고서야 해가 떴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벗어뒀던 겉옷을 입고 황급히 문 앞쪽으로 나가본 찰스는 이 사냥꾼의 오두막에 자기 혼자 뿐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상당히 당황했다. 당장 나가라고 한 주제에 에릭은 찰스만 남겨두고 이 집에서 나가 버린 것이다. 사냥을 나간 것일까? 아니면 어제처럼 마을에 뭔가 볼 일이 있었던 것일까? 찰스는 십중팔구 전자일 것이리라 짐작했다. 어젯밤의에릭은 한시라도 빨리 찰스를 내쫓고 싶은 눈치였고, 고로 만일 마을에 갈 예정이었다면 지체없이 찰스를 깨웠을 것이다.
어쩄건 예상하지 못한 사태 때문에 찰스는 고민에 빠져야만 했다. 그냥 이 집을 비워놓고 나가 버릴 수도 있겠지만, 잠그지도 못하고 휭하니 나가버려야 한다는 것은 도시인인 찰스로서는 대단히 마음에 걸리는 일이었다. 런던이라면, 그리고 독일이라 해도, 도시에서 이런 식으로 집 문을 잠그지 않는 건 좀도둑을 초대한다는 의미나 다를 바 없다. 물론 이 곳은 사람이 빼곡이 들어찬 도시가 아니라 마을이 아니면 하루종일 사람이라고는 도통 찾아보기 어려운 숲 속이었지만, 그래도 '일말의 가능성'이라는 것을 쉽게 무시할 수는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고민하던 찰스는 결정을 내렸다. 슬슬 배가 고파오지만 어제 먹다 남긴 호밀빵도 있고, 솥에는 스튜도 좀 남아 있었다. 장작을 어디서 가져오는지도 눈여겨 봐 두었으니 적어도 배는 곯지 않을 수 있다. 지금은 하필 보름 전날, 고로 괴물이 나타나기 바로 전날이지만 괴물의 진짜 피해자를 발견한 이상 오히려 여기 있는 게 더 나을수도 있다. 에릭이 돌아와서 아직도 남아 있는 찰스를 보고 어떻게 반응할지는 미지수이지만.
이불 대용인 모피를 두르고 앉아서, 찰스는 어제 보았던 그 놀라운 기억들을 되새겨 나갔다. 에릭의 마음 속에 담겨 던 그 무시무시한 영상들은 절대 꿈이나 환상 같은 것이 아니었다. 망상도, 헛것도 아니었다. 아마도 지금보다 매우 어렸던 에릭의 눈 앞에서 그 여자는 분명히 죽은 것이다. 함성과 사람들의 시선으로 유추해 볼 때, 아마도 마을 사람들은 그 일로 에릭을 꺼리고 피했던 것 같다. 재앙의 피해자가 오히려 불길한 존재 취급 당하는 일은 미신을 믿는 시골 사람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마녀, 그들은 언제나 '마녀'나 '악마의 하수인'을 찾아내 그들이 느끼는 불길함과 두려움을 거기 전가시키곤 했으니까. 아마도 소년은 그 뒤로 호기심어린 시선의 대상이 되었을 테고, 와서 물어보고는 두려움, 혐오감, 경멸감, 혹은 조롱을 내보이며 사라지는 자들이 부지기수였을 것도 쉽사리 짐작할 수 있다. 아마도 '구경꾼'이라는 말은 거기서 튀어나온 것이리라.
하지만 '구경꾼'이라니? 찰스는 갑작스레 부아가 치밀어 올라 입술을 물었다. 그런 무례한 소리가 어디 있는가 말이다. 자신은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 더군다나 에릭을 두고 재앙이라고 비난한 적도 없고 적어도 찰스 생각에는, 무례할 정도로 과거의 일을 캐어 물은 것도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한다면 물어볼 기회조차 없었던 것이지만. 그럼에도 함부로 구경꾼 운운하며 사람을 무시하다니, 기분 나쁘지 않을 수가 없는 일 아닌가. 대체 무슨 일을 겪었기에 저렇게 처음 보는 사람에게까지 배타적으로 구는 것일까?
오두막 안을 초조하게 서성거리던 찰스는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굳게 결심했다. 일단 에릭이 돌아올 때 까지는 여기 있다가, 그가 돌아오면 마을로 가서 최대한 에릭이라는 이 사냥꾼에 대해 알아볼 것이다. 옛날의 사건에 대해서도 최대한 알아보고, 그것이 정말로 '괴물'과 연관이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도 조사하리라. 대관절 그것이 무엇이기에 그렇게 에릭을 고통스럽게 만든 것인지, 사람을 이토록 배척하게 만든 것인지 반드시 알아내고야 말 것이다. 어느새 괴물보다도 에릭의 고통에 더 생각의 초점이 맞춰져 있었지만 그 사실은 깨닫지 못한 채, 찰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드디어 자신이 할 행동이 결정난 것에 대해 기뻐하고 있었다.
검은 숲의 겨울 해는 짧다. 하지만 갓 아침이 되어 깨어난 사람이 읽을 것도 즐길 것도 없는 빈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일은 거의 고역에 가까웠다. 정오가 넘어갈 때쯤 찰스는 장작에 불을 붙여 작은 그릇에 담겨 있던 스튜를 데웠고, 남아 있던 굳은 빵을 스튜와 함께 우물거리며 싹 먹어치웠다. 그럭저럭 배를 채우고 나니 다시 지루함이 몰려와, 결국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는 조심스레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탐사'를 시작한 것이다.
오두막이라고는 해도 한 사람이 살기엔 명백히 넓은 집이다. 게다가 계단 쪽으로 가서 올려다 보니 이층이 있는 듯 해서, 찰스는 작게 휘파람을 불고는 천천히 계단을 딛고 올라갔다. 첫 단을 디뎠을 때 울린 삐걱이는 소리에 언뜻 발을 멈췄지만, 다행히도 목재는 전혀 썩어 있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 난간을 잡고 계속 올라가 드디어 이층에 도착했지만, 곧 찰스는 실망감에 어깨를 늘어뜨려야 했다. 놀랍도록 먼지가 앉은 놋쇠 손잡이를 단 문들은 전부 단단히 잠겨 있었던 것이다. 그 뿐이 아니었다. 내려가기 위해 뒤를 돌아본 순간 찰스는 몹시 당황하고야 말았으니, 십년은 쌓인 듯한 두터운 먼지 사이에 그의 발자국이 또렷하게 찍혀 있었던 것이다. 에릭이 이 곳에 잘 올라오지 않는 것 같긴 해도, 어쩌다라가도 이 장면을 본다면 누가 여기 올라왔는지 모를 수가 없게 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어제 그가 보였던 싸늘한 눈빛과 차가운 태도가 이걸 보면 얼마나 심해질 지 생각해 본 찰스는 더욱 난감한 심정이 되어 눈을 감았다.
"이런 맙소사..."
위기는 거의 언제나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가져온다. 다행히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눈을 번쩍 뜬 찰스는 곧장 아래층으로 달려내려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마도 이층 침실 내에 있을 침대 대신 쓰이고 있는 듯한 짚자리, 간단한 세간들, 그리고 부엌이라 짐작되는 곳 한쪽 구석에 그가 찾던 그것이 있었다. 들통은 이 집에 있는 다른 물건들처럼 꽤 낡았지만 깔끔했고, 긴 막대에 달린 솔 또한 바로 그 옆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던 것이다. 아까보다 좀더 의기양양한 표정이 된 찰스는 코트까지 완전히 걸친 다음 문 밖으로 나가 눈덩어리를 떼어 들고 나온 들통에 담았다. 들통이 가득 차게 눈을 담아서는 따뜻한 실내로 가져와 불가에 둔다. 난로에 새 장작을 던지고 불을 들쑤셔 잘 옮겨붙게 해 놓자 더 강한 열기가 실내에 퍼졌고, 곧 들통은 눈 녹은 물로 가득 차게 되었다. 그리고 찰스는 그 들통과 솔을 들고 바로 이층으로 올라가 긴 솔을 들통에 담근 후 바닥을 닦기 시작했다.
그렇다. 좀 우스꽝스러워도 이름을 붙이자면 '대청소 작전' 쯤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어제의 식사와 잠자리에 대한 보답이라고 불러도 될 것이고, 그가 왜 낮 내내 이 곳에 남아 있는가에 대한 대답도 되어줄 것이다. 게다가 아까의 발자국도 완벽하게 지워 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더욱 운이 좋다면, 이 봉사의 결과 에릭이 보였던 적개심이 좀 누그러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남자 혼자 사는 살림이 그렇듯 (이에 대해 레이븐은 예전부터 찰스에게 심각한 잔소리를 해대곤 했었다.) 에릭의 집 바닥은 꽤 지저분한 편에 속했고 덕분에 생각보다는 힘들었지만, 어쨌건 작업에 착수한지 두어시간 만에 찰스는 목적한 바를 대강은 이룰 수 있었다. 적어도 에릭의 집 바닥은 이제 아주 깨끗하게 소제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 노력은 헛되지 않아, 그 와중에 찰스는 몇가지 심상찮은 것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일단 그는 에릭의 마음 속에 떠올랐던 그 여성을 발견했다. 그녀가 담긴 작은 초상화는 구석의 작은 테이블 위에 얹혀 있었다. 정확히는 바닥을 바라보도록 뒤집혀 있었는데, 들어올리는 순간 바닥에 깨끗하게 빈 자국이 날 정도인 것으로 보아 아주 오랫동안 손을 대지 않은 모양이었다. 초상화 뿐이 아니었다. 조그마한 원탁은 에릭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여성적인 물건으로 가득했지만, 전부 지독하게 두터운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던 것이다. 초상화 속의 여성은 어제 에릭의 기억을 통해 본 여인보다는 훨씬 젊었지만, 찰스는 그 콧대와 눈썹을 알아볼 수 있었다. 여인이 걸친 하얀 머릿수건과 갈색 드레스는 수수했지만 깔끔했고, 지금까지 그가 봐 온 나이슬라흐 사람들의 옷차림을 생각해 볼 때 나름 가장 깔끔한 나들이 옷을 차려 입은 듯 했다. 이런 시골 마을의 아가씨가 조그마한 크기라 해도 정식 초상화를 주문할 만한 일이라면, 아마도 결혼식 정도일 것이다. 아마도 부부가 한 쌍으로 맞추어, 한 쪽은 남자가 가지고 있거나 했을 것이다. 어째서인가 남편의 것은 없었지만 말이다.
그 외에도 묘한 것들을 두어가지 발견할 수 있었다. 하나는 작은 은반지였다. 반지는 마루와 마루 틈바구니에 빠져 있었고, 찰스는 그걸 빼내 보려다 아주 작은 나무 조각이 손가락에 박히는 부상을 입어야 했다. 얼른 가시를 뽑아내고 손가락을 입에 넣어 깨끗이 했지만 꽤 아팠다. 아픔을 참고 들여다 본 반지는 꽤 작고 가늘어서 아마도 여성용인 것 같았다. 세월이 흐르며 지나치게 녹이 슬어 완전히 회색이 되어 버린 반지의 안쪽에는 아마 글자가 새겨져 있었던 것 같았지만, 녹에 흐려진 글자 중에서 알아볼 수 있을 만한 것은 성에 해당하는 부분에 새겨져 있는 '렌셔' 뿐이었다.
다른 하나는 좀더 기묘한 것이었다. 에릭이 침대로 사용하고 있는 듯한 짚자리 바로 옆의 테이블에 5마르크 짜리 은화가 하나 놓여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은화 그 자체로는 별로 특이할 것은 없었으나, 이런 시골에 흔한 돈이 아니라는 점이 신기했다. 무엇보다도 이 정도의 은화라면 보통 사람들은 금고에 넣어두거나 적어도 이렇게 남들 눈에 쉽게 뜨일 곳에 둘 것 같지 않다는 점이 기묘했던 것이다. 은화 주위에는 다른 동전들도 전혀 없었다. 오로지 이 은화 한 닢만이 테이블 위에서 반짝거리고 있었다. 거의 틀림없이, 어떤 사연이 있는 물건이리라.
잘 닦은 것처럼, 혹은 끊임없이 만지작거리기라도 했던 것처럼 반짝이는 은화를 들여다 보다 어쩐지 불안한 기분이 된 찰스는 테이블 위에 은화를 두고 몸을 일으켰다. 어쨌건 청소는 다 끝났고, 이제 들통과 솔을 놓아두고 뻐근한 으깨를 주무르며 느긋하게 에릭을 기다리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돌아선 순간 깜짝 놀란 찰스는 거의 소리 지를 뻔 했다. 어떤 인기척도 없었건만 문가에 에릭이 서 있었던 것이다. 어두운 청회색 눈동자가 이 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엄밀히 말해 찰스가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전혀 없었다. 분명 깨끗이 청소를 했을 뿐이고 은화는 잠깐 들여다 봤을 뿐 곱게 내려놓고 돌아선 뒤인데도, 굉장히 큰 잘못이라도 한 듯한 기분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찰스는 스스로에게 반복적으로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음'을 주지시키고 나서야 간신히 에릭을 향해 입을 뗄 수 있었다.
"저..."
"왜 안 나갔지."
얼음처럼 차갑게 잘라 끊는 말에, 찰스는 잠시 답을 못 하고 주저했다. 평소 화술이 부족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이 쪽을 노려보는 에릭의 눈앞에서는 단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문득 바로 앞에 놓여 있는 들통의 존재를 깨달았고, 구정물이 가득 담긴 들통과 솔을 치워야 한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물을 버리기 위해 들고 나가는데, 아마도 그제서야 찰스가 뭘 하고 있었는지 깨달은 듯한 에릭이 들통을 빼앗아 든다.
"저,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꺼져."
부당한 대접이다. 원래의 찰스라면 이럴 때 절대 가만 있을 리 없다. 하지만 지금만은 그럴 수가 없었다. 에릭의 온 몸에서 피어오르고 있는 강렬한 울분 때문이었다. 감지하는 것만으로도 이 쪽까지 먹먹해 질 것 같은 강렬한 분노와 울분이 그의 온 몸에서 끓어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찰스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차라리 그랬다면 무언가 말을 해 볼 여지가 있었으리라. 에릭의 감정은 그보다 더 먼 과거의 일, 아마도 에릭이 알고 있을 뭔가를 향한 것이었다. 어째서 그가 그러한 반응을 보이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찰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외투를 두르고 가지고 왔던 것들을 챙기고는 문 밖으로 나섰다.
3.
숲길을 걷는 내내 울적한 마음이 가시질 않았다. 지난 밤부터 지금까지, 알게 된 것도 있었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수수께끼가 생겨난 때문이다. 게다가 그것이, 한 남자에게 저리도 강렬한 울분을 - 아마도 그 원인이 되었을 상처를 불러왔을 어떤 사건과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하니 발걸음은 더욱 무거워졌다. 과연 그 일에 대해 알아낼 수 있을까? 그 일에 대해 알려줄 마을 사람이 있을까?
마침내 마을 울타리가 보이고, 어제 문을 열어주지 않던 야속한 여관 정문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는 걸려있지 않은 문을 열고 들어가자 훈기와 함께 요리 냄새가 훅 끼쳐 온다. 뭐라고 말하기도 전, 카운터 뒤에 서 있던 여관 주인이 눈을 휘둥그렇게 뛰고 이 쪽으로 달려왔다.
[오, 선생님! 살아계셔서 다행입니다!]
그답잖게 기뻐서 뛸듯 반가워하는 속내에는 아마도 죄책감이 약간이나마 자리하고 있으리라. 이렇게 반가워 할 거였으면 문 두드릴 때 좀 열어주었으면 좋지 않았겠는가 하는 생각이 안 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건 슬쩍 감지해 본 여관 주인의 마음은 정말 기쁨과 반가움, 안도감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래서 찰스는 한 쪽 눈썹을 슬쩍 치켜올렸을 뿐 별말 없이 뜨거운 커피 한 잔을 주문했다.
여관방의 따스한 난로가에 앉아 입이 델 정도로 뜨거운 커피를 마시다 보니 어느새 바깥의 냉기가 스르르 풀려 나간다. 무슨 일인가 해서 쳐다보는 손님들에게 어제 실종됐던 손님이 무사히 돌아왔노라고 떠벌이는 여관 주인을 한참동안 쳐다보던 찰스의 뇌리에, 어쩌면 이 사람이라면 에릭에 대해 알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저, 에릭이라는 사람을 아시나요?]
[에릭? 양치기 에릭요?]
[오, 아뇨. 사냥꾼 에릭이요.]
순간 여관 주인의 얼굴이 멈칫하니 굳었다. 그 의외의 반응에 어리둥절해 하는 찰스 앞에서, 약간 마뜩찮은 얼굴이 된 여관 주인이 내키지 않는 다는 듯 물어 온다.
[그 놈을 보셨나요?]
그건 마치 꺼려지는 자들, 마을에서 추방당한 자들을 두고 얘기하는 것 같은 그런 말투였다. 마치 찰스에게 아주 재수없는 일이 생겼다는 듯, 액땜이라도 해야겠다는 듯한 표정과 감정이었던 것이다. 찰스는 문득 어제 에릭의 기억에서 읽어낸 군중 중에 이 사람도 있었을지가 궁금해졌다. 그를 둘러싸고 저주받았다고 외치던 사람들 말이다.
[그 녀석에 대해서는 많은 말을 하고 싶지 않아요.]
여관 주인은 고개를 절레 절레 저으며 말했다. 그러나 찰스는 물러설 마음이 없었다. 이런 폐쇄적인 좁은 시골 마을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 돌아다니는 모든 소문을 알 수밖에 없는 사람이 바로 여관 주인이다. 또한 외지인들을 자주 만나기에 손님들의 환심을 늘 사야 하는 입장에서 믿음직한 정보처가 되어 주는 이들이 바로 이러한 여관 주인임을 그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마음에 품고 있던 불편함을 애써 뿌리치며, 찰스는 자신이 만들 수 있는 제일 붙임성 있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좋아요, 제가 와인 한 잔 사죠. 얘기 좀 해 주시겠어요?]
[이런, 손님. 낮부터 술이라니요...그건 좀]
[제일 좋은 것으로 부탁해요.]
어차피 이런 시골에 찰스의 주머니를 거덜낼 법한 대단한 와인은 없으리라고 자신할 수 있었지만, 여관 주인으로서는 제법 남겨먹기 좋은 기회이니 분명 넘어오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손님, 낮술은 기독교도로서 좀]
[배도 고프군요. 좋은 햄이나 돼지갈비 있나요?]
주인의 얼굴이 갑자기 확 밝아졌다.
[마침 상등품 갈비가 있습죠.]
찰스는 속으로 지갑 두께를 잠시 생각해 보았지만, 지금까지 잘 아껴 썼으미 이 정도 돈을 좀 쓴다고 해서 큰 이상이 생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에릭의 사연에 대해 알 수 있다면 별로 큰 돈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관 주인은 신이 나서 주방으로 달려갔고, 곧 찰스의 기준에서도 나쁘지 않은 와인과 먹음직스러운 갈비 요리가 등장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여관 주인의 얘기가 시작되었다.
사실 여관 주인은 매우 길고 또 장황한 여러 이야기들을 늘어 놓았지만, 마음 속으로 요약해 보니 약간 싱거울 정도로 간단한 내용이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원래 이 마을에 괴물의 전설이 있던 것은 사실이라 했다. 여관주인이 어린아이였을 당시 마을의 제일 나이든 노파마저도 '소녀 시절'의 전설을 기억하고 있다고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15년 전 까지만 해도 마을 사람들은, 전설은 어디까지나 '전설'인 것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은 검은 숲에 창궐하는 늑대 떼 때문에 그런 전설이 생겼다고 믿었고, 그래서 그저 전통에 따르는 마음으로 서로 순번을 돌아가며 살찐 염소나 양을 골라 겨울 보름 밤 마을 어귀에 묶어두곤 했다. 말하자면 괴물에 대한 '제물'이었다. 그러한 '제물'들은 꼬박 꼬박 사라졌지만, 사람들은 늑대 떼들이 물어간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15년 전 모든 것이 바뀌었다. 금기를 어긴 여인이 괴물에게 희생당한 것이다. 여관 주인은 이 말을 하며 다분히 공포 어린 기색으로 침을 삼키고 성호를 그었으며, 찰스는 드디어 에릭에 연관된 얘기가 나오리라는 것을 깨닫고 이야기에 좀더 집중했다. 희생당한 여인은 지주집 하녀였다. 홀로 아들을 키우던 과부로, 얌전한 행실로 마을에서 별 문제 없이 살아가던 이였다. 그러던 그녀가 그 차가운 밤에 왜 거기 있었는지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대기를 찢었고, 처음 듣는 소리에 놀라 뛰쳐나온 사람들은 갈기 갈기 찢긴 여자의 시체와 - 이 점은 아무래도 시골 사람들 특유의 과장 같았다. 적어도 찰스가 직접 보았던 그 광경을 생각하면 말이다 - 그 옆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울부짖는 아이를 보게 되었다. 그것은 금기였다. 제물이 바쳐지는 날에는 그 누구도 밖에 나가선 안 되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훌쩍거리는 아들의 입에서 많은 말을 들어내진 못했다. 아이는 반쯤 넋이 나간 채 '괴물은 사람이었다'는 말만 반복했다고 했다. 바로 여기서 여관 주인은 말을 멈추었다. 그 기묘한 표정에서 심상찮은 기색을 읽은 찰스가 얼른 그 마음을 읽어 보려 했지만, 이미 여관 주인의 마음은 온전히 닫혀 있었다. 스스로의 기억에 자물쇠를 걸어 버린 것이다. 아마도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 잊고 싶었던 일들이라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이리라. 찰스는 아쉬움에 조용히 이를 물었지만, 여관 주인은 그런 것 따위 알아채지 못한 채 그대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마을 사람들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괴물의 정체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금기가 깨졌다는 사실이 더욱 중요했다. 바로 다음달, 마을 사람들이 묶어둔 제물은 거부당했다. 대신 '사람'이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겨울 내내, 보름 전후로 바깥에 얼씬거리던 사람들은 모두 남김없이 죽었다. 3년쯤 지나고서야 더이상 마을에 피비린내가 나지 않았는데, 그것은 사람들이 '절대로' 바깥에 나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서, 그간 마을에서 그 전설을 그저 '전설'로만 생각하던 사람들은 그 생각을 바꾸었거나, 혹은 괴물에게 죽임당했던 것이었다.
죽은 여인의 아들은 사실상 추방당했다. 관대하기로 소문난 이 곳 지주가 돌봐주겠다고 나섰지만 어째서인가 소년은도망쳐 버렸고, 마을 사람들은 곧 그 일을 잊었다. 적어도 10년 후, 낡은 군복을 걸치고 총을 든 험한 인상의 청년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행색을 보면 군대에 있었다는 것은 알 수 있었지만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돌아온 에릭은 마을 사람들의 차가운 눈길 따위에는 신경끄지 않고 그간 비어 있던 집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숲의 동물들을 사냥하며 '알아서' 지내기 시작했다. 사냥꾼으로서 에릭은 의외로 솜씨가 좋았고, 처음엔 영 마뜩치 않아 하던 마을 사람들도 어떻게든 그럭저럭 이 불청객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래봐야 물건을 사고 팔아주는 정도가 고작이었지만.
여관주인은 고개를 저으며 얘기를 끝냈다. 아니, 그러기 전에 한 마디를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대체 그 녀석이 무슨 생각으로 손님을 도왔는지는 모르겠지만,별로 질이 좋은 녀석은 아니니 조십하십쇼."
찰스는 고개를 대강 주억거리며 감사의 말을 전했다. 하지만 너무나 당연히도 그럴 생각 따위는 없었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오히려 그의 뇌리에 떠올랐던 것은, 에릭이 얼마나 분하고 억울했을까 하는 생각 뿐이었다. 어젯밤 그의 반응, 그 차가운 대응과 격렬한 울분이 이해가 갔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가 어째서 이 마을에 돌아왔을까? 능히 혼자서 제 한몸 건사할 수 있을 법한 그가? 식사를 마치고 깊이 생각에 잠겨 있던 찰스는 잠시 밖을 쳐다보았다. 해가 저물려면 아직 한참 남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 곧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몸을 지킬 권총과 나이프 한 개, 돈과 몇가지 간단한 도구들, 그렇게 준비하고 작은 배낭에 옮겨담은 후 길을 나서며, 여관 주인에게는 앞으로 한 이삼일 자리를 비울 거라고 말했다. 문을 나서며, 그는 호주머니 속에 손을 넣었다. 작은 은반지, 에릭의 방에 떨어져 있던 그것이 손에 단단히 잡혔다. 은화는 돌려놓았지만 이것만은 미처 전해주지 못한 채였고, 덕분에 에릭을 또 찾아갈 이유가, 정확히는 핑계가 완벽하게 성립되었다.
숲길을 걸어가며 그는 결심을 굳혔다. 어떻게든 에릭과 대화를 해야 한다. '괴물'과 직접 대면하고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고 싶지 않았을 이 마을에 굳이 돌아온 자.
4.
"계십니까?"
에릭의 오두막은 비어 있었지만 찰스는 그 곳을 떠나지 않고 서서 기다렸다. 늦어도 날이 저물면 아마 틀림없이 집 주인이 나타나리라 믿으며. 그리고 그의 짐작대로 에릭은 거의 저녁때가 되어서야 집에 돌아왔다. 어깨에 뭔가 끈을 걸머지고 있었는데, 끌려오는 것의 정체를 확인한 찰스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슴, 그것도 다 자란 붉은 사슴이었다. 아무리 두텁게 눈이 깔려 있다고 해도 남자 셋이 달려들어서 겨우 옮길 법한 것을 에릭은 혼자서 능숙하게 끌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멋진 사냥감이군요."
인사치레를 하는 동안, 에릭의 시선은 찰스에게 고정되어 떠날 줄을 몰랐다. 여전히 차가운 청회색 눈동자 안에는 어이없어하는 감정과 함께 짜증, 그리고 약간의 분노가 섞여 있었지만 찰스는 태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마쳤다. 충분히 예상 내의 반응이었으므로.
에릭은 그런 찰스를 완전히 무시하고 사슴을 오두막 옆의 작은 창고처럼 보이는 건물로 끌고 갔다. 창고 문을 열자 안에서 피냄새가 끼쳐 왔고, 건물 안에 매달린, 가죽이 벗겨진 사냥감들이 눈에 들어왔다. 에릭이 창고 대들보에 갈고리 달린 밧줄을 걸고 사슴을 달아올리는 동안 찰스는 고개를 돌려 그가 왔던 길 쪽을 바라보았다. 길게 남아 있는 핏자국이 묘한 느낌을 주었다.
"여긴 왜 왔지?"
돌아보니 에릭이 서 있었다. 창고 문이 닫힌 걸 보면 사슴을 달아매는 작업은 다 끝난 듯 싶었다.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남자에게, 찰스는 할 수 있는 한 상냥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드디어 말을 걸어주는군요! 기쁩니다." 그리고 그 말을 듣고 일그러지는 에릭의 얼굴은 아랑곳하지 않고 재빨리 그 뒤에 말을 더 이었다. "사실은 돌려드릴 게 있어서 왔습니다. 그 김에 얘기도 나눌까 하고요."
에릭은 한동안 그런 찰스를 빤히 노려보고 서 있었다. 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찰스는 아마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지독한 반감, 거의 혐오감에 가까운 감정이었지만 그래도 살의까지는 느껴지지 않았기에 그 자리에 여유를 갖고 버티고 서 있을 수 있었다. 그는 그 시선을 온 몸으로 받아내며 끼고 있던 장갑을 뺀 다음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어 거기 잘 간직해 두었던 은반지를 꺼냈다. 그 반지가 겨울 공기 속에 나타난 순간, 창고에서 문까지는 꽤 되는 거리였는데도 에릭의 표정이 대번에 변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날 청소하다가 이걸 주웠어요. 마룻바닥 사이에 끼어 있었죠. 시커멓길래 잘 닦아 왔습니다."
사실 그대로였다. 나오기 전 꽤 공들여서 닦았지만 긴 세월의 때를 다 닦아내는 것은 무리였던 것이다. 아직도 군데군데 검은 얼룩이 가시지 않은 낡은 반지를 바라보던 에릭은 갑자기 찰스 쪽으로 다가오며 짧게 말했다.
"내놔."
찰스는 남자의 손이 자신의 손에 닿기 직전 주먹을 꽉 쥐었다.
"제가 그랬죠? 얘기도 좀 나눌 겸 왔다고요."
에릭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이번에야말로, 지금껏 찰스가 느꼈던 그 어느 감정보다도 살의에 가까운 것이 에릭의 온 몸에서 타올랐다. 찰스는 그런 그를 달래듯 한 손을 내밀며 차분하게 진정시키듯 말했다.
"절 당신이 이제껏 보아 왔던 '구경꾼'들과 같다고는 생각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어요."
"무슨 헛소리야."
찰스는 주먹쥔 손을 남자 쪽으로 천천히 내밀며 말했다.
"믿어줬으면 좋겠는데, 전 살짝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요."
남자는 어이없다는 듯 찰스를 바라봤지만, 익히 예상한 반응이었으므로 찰스는 아무 동요 없이 말을 계속했다.
"집안 대대로 간혹 그런 사람이 나타났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말인데, 전 마을 사람들이 당신에게 씌운 말도 안 되는 누명에 동참할 생각이 없습니다."
에릭이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찰스 쪽을 바라보았다. 찰스는 총력을 다해 에릭의 마음을 읽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고, 그가 찰스의 말에 대해 미심쩍어 하면서도 아주 약간, 약간이나마 '이 자의 말을 들어볼까'라고 갈등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아주 약간 입가를 끌어올렸다. 그리고 손가락을 천천히 펴며 말했다.
"이것, 어머니의 반지죠?" 순간적으로 느껴진 에릭의 경악이 생생해, 그는 그것을 어루만지듯 부드럽게 얘기했다. 반지에 대한 그의 생각을 읽어내는 것은 지금 이 순간 아주 쉬운 일이었다. 자신의 이야기에 완전히 빠져든 남자의 정신은 활짝 열린 책과 다를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 당신은 그걸 소중해 보관해 두고 있었지만 어느날 없어졌어요. 마룻바닥 사이에 끼어 있었지만 사실 찾아볼 생각도 못 했죠."
"그만."
"왜냐면 당신은 그 반지가 사라진 걸..."
"그만해!"
"어머니가 당신을 떠났다는 뜻으로 받아들였어요. 맞죠?"
소리지르던 에릭은 경악한 눈으로 찰스를 응시했고, 그는 이제 완전히 드러난 작은 은빛 반지를 에릭 앞에 내밀며 말을 맺었다.
"가져가요. 어머니는 당신을 떠났던 적이 없어요."
에릭이 멍하니 반지를 바라본 시간은 짧았지만, 그동안 그의 마음에는 비할 데 없이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여전히 그의 마음 많은 곳은 안개가 낀 듯 희미했고 그것은 이 남자가 찰스에게 감추고 싶은 것이 많다는 뜻이었지만, 적어도 이제껏 강렬하게 몰아치던 찰스를 향한 증오심과 혐오감은 실로 눈녹듯이 사라져 가고 있었다. 잠시 반지를 들여다 보던 남자는 손을 들어서 반지를 집어들고 천천히 살펴 보았다. 반지를 잡는 순간 어째서인가 짧은 고통의 표정이 스치고 지나갔지만, 살펴보는 눈은 진지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표정은 점차 풀려갔다. 곧이어 조금 망설이는 표정이 되었던 에릭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기꾼은 아닌 것 같군. 들어와."
찰스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남자의 뒤를 따라 집 안에 들어갔다. 이제서야 '괴물'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이 피어올랐다.
문 안으로 들어서자 익숙한 훈기가 몰려왔다. 벽난로 가에 자리를 잡고 앉은 찰스는 집안에 둔 들통의 물로 몸과 얼굴에 묻은 피를 적당히 씻어낸 에릭이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난롯가로 다가오는 광경을 침착하게 지켜보았다. 전에는 경황이 없어 제대로 보질 못했던 에릭의 얼굴은 의외로 단정해서,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수염과 흩어진 머리만 정돈한다면 꽤 괜찮은 신사처럼 보일 듯 싶었다. 물론, 신사처럼 차려입는다는 것도 전제조건에 넣어야겠지만.
"그래서, 뭘 듣고 싶은 건지 말해봐."
찰스는 잠시 입술을 핥았다. 긴장할 때면 튀어나오는 버릇이었다.
"괴물에 대해 얘기해 주십시오."
"왜?"
"알고 싶으니까요."
"알게 되면 어떻게 할 건지 말해 봐."
찰스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얘기했다.
"전 초자연적인 괴물 자체는 믿지 않습니다."
남자가 코웃음을 쳤지만, 그는 신경쓰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하지만 이 곳에서 어쩌면 처음으로 그런 것을 접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네요. 게다가 사람이 죽었고 말이죠."
"그 '괴물'이 뭔지는 알고 말하나?"
"물론 모릅니다. 알게 되면, 그래요. 어쩌면 당신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르죠."
"도움을 준다. 네가?"
남자의 말에는 비웃음이 가득 담겨 있었지만 찰스는 오히려 지금이 기회임을 깨달았다. 이 배타적인 태도, 자신에 대한 불신을 이제부터 차근 차근 물리쳐야만 했다.
"이 곳에 돌아온 이유는 아마도 복수가 아닌가요?"
에릭은 숨을 멈췄다. 청회색 눈이 단번에 상대를 노려보았지만, 찰스는 절대 지지않고 그 시선을 되돌려주며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을 주어 말을 이어 갔다.
"한몸 건사하는데 아무 문제 없는 당신이 절대 오고 싶지 않았을 이 마을에 돌아올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 뿐이더군요."
"너..."
"괴물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당신을 돕고 싶어요."
처음 이 마을에 오게 된 이유라면 분명 탐구심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찰스는 폭력과는 분명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다. 하지만 그것은 이 마을에 와서 에릭을 만나기 전의 일이었다. '괴물'이 있었고, 한 여인이 죽었고, 그녀의 아들은 복수를 위해 돌아왔는데 마을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만 할 뿐 아무도 나서지 않는다. 그렇다면 결국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차라리 에릭에게 와서 이야기를 듣고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편이 나을 듯 싶었다.
찰스는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듯 이 쪽을 바라보는 에릭에게 다시 한번 명확하게 말해주었다.
"돕고 싶습니다."
에릭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지만, 곧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나마 찰스의 말 때문인지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누그러진 태도였지만 그래도 그것은 분명 거부의 몸짓이었다.
"당신은 도울 수 없을 거요."
"이봐요."
"도울 수 없어. 그건 사람이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절망감이 깊이 배인 목소리로 말한 에릭은 잠시 고개를 떨구고 있다가 찰스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내가 겪은 일에 대해서는 얘기해 주지. 이 이야기를 다 듣거든 곧 마을을 떠나시오."
찰스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찰스는 이 이야기를 다 듣는다 해도 결코 떠나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조심스레 에릭의 마음에 정신을 집중하고 지금 귀로 들려오는 이야기와 함께 그 마음에 보여주는 것들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에릭이 열 다섯 살 되던 해의 일이라고 했다. 그 해 겨울은 유독 눈이 많이 왔고 늑대 또한 창궐했다. 에릭은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고, 모자뿐인 둘의 생활은 결코 윤택하지 않았지만 어머니가 지주 댁 하녀였던 덕에 그럭저럭 먹고 살 수는 있었다. 어머니는 에릭 또한 지주 댁 일꾼으로 들어가길 바라고 있었고, 아마도 그 겨울의 일만 없었다면 가능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운명의 날, 에릭은 그만 늦고 말았다. 물론 그도 마을의 전설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되도록 일찍 오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주의 개인적인 심부름을 하느라 늦어져 버렸던 것이다. 지주가 갑자기 에릭을 부른 것에 대해 어머니는 의아해 했지만, 앞으로 일꾼으로 발탁되려면 좋은 인상을 주어야 했고 어쩄건 그 부름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간단한 몇 가지 일을 끝냈을 뿐인데도 해는 금방 져 버렸고, 어둑해져 가는 길에 나선 어린 에릭은 어떻게든 '괴물'의 눈에 띄지 않기만을 빌며 열심히 집을 향해 발을 옮기고 있었다.
어두운 밤, 드디어 구석진 골목 앞에 닿아 안도의 한숨을 쉬며 그 앞으로 들어가려던 순간, 무언가가 나타났다. 어린 에릭의 눈에 거의 거인처럼 보였던 '무언가'가. 에릭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 찰스는 에릭의 뇌리에 떠오른 영상을 보고는 그만 숨을 삼켰다. 그것은 에릭의 말처럼 실로 압도적이고 무시무시한 그림자였던 것이다.
지상 어디에도 저런 생물은 없을 것이다. 온 몸은 거의 푸르스름하다 싶은 흰 털로 뒤덮였고, 일그러진 얼굴은 거의 확실하게 늑대의 형상을 취하고 있었다. 그 얼굴에 자리잡은 눈은 칠흑같은 밤의 어둠에도 지지 않고 녹색으로 빛났다.
어린 에릭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주저앉았고, 괴물은 하얗게 얼어붙어 있는 소년에게 다가와 천천히 음미라도 하듯 코를 들이대고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괴물이 천천히 가지런한 이빨을 드러내고, 드디어 경악과 경직에서 풀려난 소년이 간신히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 순간, 불타는 듯한 통증이 에릭의 어깨를 덮쳤다. 에릭의 의식은 급히 희미해졌지만, 그 와중에도 여자의 비명 소리만은 똑똑히 들려왔다. '에릭!' 바로 어머니였다.
거기서 에릭의 회상은 끝났고, 그는 혼란스러워하는 듯한 얼굴로 천천히 말을 늘어놓았다.
"괴물에 대해 많은 것을 기억하지는 못해. 놈이...어머니를 죽였다는 것만은 잘 알고 있지. 하지만 내가 알 수 없었던 건..."
그는 다시 한번 혼란스러운 표정이 되었다가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찰스는 그의 생각을 더 자세히 읽어보려 했지만 아지랑이처럼 희미한 안개만 일렁일 뿐이었다. 무언가를 깊이 감추고 있는 것이다.
"그랬군요."
찰스는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그 뒤는 이미 잘 알고 있다. 에릭의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마을 사람들은 에릭을 둘러싸고 저주하며 차가운 눈길로 마을에서 추방해 버렸던 것이다. 그가 입으로 말하는 것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그는 찰스가 마을에서 들어 알고 있던 사실 한 가지는 말하지 않았다. 에릭이 마을에서 떠난 뒤 군대에 들어갔지만 결국 옛 악몽에 질려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는 동안, 찰스는 잠시 망설이다 결국 그의 말을 끊고야 말았다.
"잠시만요." 말없이 이 쪽을 쳐다보는 남자에게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지주님이 당신을 돌봐주겠다고 했다는 얘기를 들었었는데요."
다음 순간 에릭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지금 찰스의 뇌리에 느껴진 감정들과 똑같은 것이었다. 증오, 격노, 그리고 살기. 그 모든 감정은 찰스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에릭은 이를 악물었고, 무언가 꾹 참아 왔던 것을 토해내듯 그에게 말을 내뱉었다.
"아직도 모르겠나? 그 놈이 바로 괴물이야. 클라우스 슈미트, 그 저주받을 지주놈이 바로 괴물이었다고!"
찰스는 순간 멍한 얼굴로 에릭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고개를 숙였다 다시 한번 에릭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의 마음은 분노와 증오로 가득 차 있었고, 거기 찰스가 절대 이 일을 믿어주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과 의혹 또한 단단히 자리잡고 있었다.
믿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었다. 이 곳 마을 사람들은 그들의 지주를 존경했고, 좋은 분이라고 칭송해 마지 않았던 것이다. 실제 이 마을도 구석진 곳에 있긴 했지만 찢어지게 가난하지는 않았다. 에릭이 본 '괴물'은 분명 진실이지만, 그 괴물이 정말로 이 마을의 지주인지는 전혀 다른 문제 아닌가. 하지만 지금 찰스의 눈 앞에서 이 이야기를 털어놓은 에릭의 얼굴엔 빠른 속도로 회의가 번지고 있었고, 그 얼굴을 본 찰스는 지금 자신이 해야 할 말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믿기는 어렵군요...하지만," 에릭의 눈이 찰스의 눈을 마주보았고, 찰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이 불안해 하는 남자에게 믿음을 주기 위해 노력하며 말을 이었다. "전 당신의 말이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에릭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찰스는 거기서 말을 끝낼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그렇다면 당신은 한 가지를 잘못 생각했네요."
"무슨 얘기지?"
찰스는 이 집에 들어온 뒤 처음으로 유쾌한 기분이 되었다. 에릭이 어리둥절해 하는 표정을 지었던 것이다.
"전 당신이 본 '괴물'에 대해서 알고 있어요."
"...뭐?"
"당신, 사냥꾼이라면 총 정도는 잘 다룰 자신이 있겠죠?"
에릭은 지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냐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찰스는 그에 덧붙여 가볍고 명쾌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좋아요. 은탄환을 만들어야겠네요."
설 목표치까지 완료.
최대한 빠른 속도로 소설화 진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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