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2. 17. 02:03
- 19세기, 독일 배경입니다.
- 슈바르츠발트 근처의 한 마을, 박물학자 찰스와 사냥꾼 에릭입니다.
- 둘의 능력이나 느낌은 원작과 비교가 안될 정도로 약화되어 있습니다.
- 달리고 또 달리는 중입니다.
- 달리고 또 달리는 중입니다.
클라우스의 방문 후, 둘은 거취를 옮길까 진지하게 고려했지만 결국 이 겨울에는 어렵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떠나지 말라'는 클라우스 슈미트의 경고도 문제였다. 그의 경계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짓은 하지 않는게 좋지 않겠는가.
하여 한동안 둘은 이제껏 하던 일들을 계속하는데 전념했다. 에릭은 추적과 사격은 물론이고 덫 놓는 법, 자취를 숨기는 법, 야영하는 법 등, 에릭은 자신이 전해줄 수 있는 모든 생존 지식을 찰스에게 가르쳐 주려고 노력했다. 그러한 열정적인 가르침 덕에 찰스의 사냥 실력은 꽤 나아졌고, 이제는 수사슴이나 여우, 심지어 늑대 등 꽤 잡기 어려운 동물들까지 잡아내는 지경에 이르렀다.
허나 이렇듯 착실하게 늘어가는 찰스의 사냥 실력과 달리, 에릭의 '힘'쪽에는 별 진전이 없었다. '클라우스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가능하다.'는 찰스의 말에 대해 에릭은 회의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이야기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그런 식으로 다룰 수 있는 힘은 아닌 것 같아."
"모르잖아. 혹시라도 노력해 본다면."
"찰스, 이걸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 막고 싶었던 적은 있었지만..."
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릭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그렇게 변신하는 스스로를 저주한 적은 있어도 인정하거나, 나아가 그 변신을 보름 외의 다른 기간에도 할 수 있기를 꿈꿔본 적조차 없었을 것이다. 찰스 또한, 이런 상황만 아니라면 굳이 에릭에게 그러한 일을 하도록 종용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슈미트의 위협이 그들 앞에 자리하고 있었고, 그러니 이젠 모든 것이 바뀌어야만 했다.
"에릭, 분명 할 수 있을 거야."
에릭은 불안한 눈으로 찰스를 바라보았다. 잠시 무언가를 설명하려다 포기하는 그의 마음 속에는 짙은 의혹과 희미한 희망, 그리고 무엇보다도 압도적인 두려움이 뒤섞여 있었다. 말하지 못했지만 그가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찰스는 알 수 있었다.
'과연 그래도 괜찮을까? 그런 내 앞에서 네가 안전할까?'
찰스는 에릭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찰스?" 의문을 담고 이름을 부른 에릭이었지만 곧 찰스의 키스를 받아주며 잠시 그 붉은 입술에 취했다. 입술을 뗀 찰스는 할 수 있는 한 가장 진지한 얼굴로 에릭에게 말했다.
"난 단 한 번도 늑대인 네 옆에서 두려웠던 적 없어."
"찰스..."
"노력해 보자. 에릭, 괜찮다면 내가 네 안에 들어가 볼게."
에릭의 시선이 흔들렸다. 이 쪽을 향해 전해져오는 걱정에 미소지으며 찰스는 말을 계속했다.
"단순히 그 힘 때문만은 아니야. 오히려 내 힘 때문이기도 해. 내가 무엇을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자네 마음에 들어가 무엇을 볼 수 있는지 알고 싶어서 그래."
잠시 망설이던 에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한 마디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위험할 것 같으면 얼른 빠져 나가."
"물론.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날 리 없어."
조금 못마땅한 듯 미간을 찌푸린 에릭의 표정에, 도저히 웃음을 터트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에릭에게 한 이야기는 농담이 아니라 말 그대로 진심이었다. 이제껏 다른 이의 경계심 없는 마음이나 선명한 감정 등을 읽어 오긴 했지만, 그 날처럼 누군가의 마음 속에 아예 '들어가' 본 것은 찰스로서도 단 한 번도 도달한 적 없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찰스는 에릭의 마음 속에 펼쳐져 있던 그 광활한 공간을 잊을 수 없었고, 또한 찰스 자신의 힘이 지금보다도 더 확장될 수 있다는 놀라운 가능성에 전율했다.
그래서 에릭의 허락 하에, 찰스는 하루에 일정 시간 반드시 에릭의 마음 속에 '들어갔다.' 처음 에릭의 마음 속에 들어갈 때 이미 겪었지만 다른 사람의 정신 세계에 스스로를 던지는 것은 의외로 위험한 일이었다. 그러나 에릭은 그를 사랑했고, 그래서 에릭의 마음은 찰스의 존재를 느끼는 즉시 거의 모든 방어와 거부를 포기하고 순순히 찰스를 받아들여 주었다. 그것은 사실 아주 특별하고 행복한 경험이기도 했다.
다른 이들의 마음에도 이렇게 쉽게 들어갈 수 있는 것일까? 아마도 힘들 것이다. 맨 처음, 자신의 의사를 거부하던 에릭의 마음은 강렬한 폭풍 그 자체였음을 찰스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제는 좀 나을지도 모르지만, 에릭의 오두막에서 지내는 동안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기회는 사실상 없었고, 숲의 동물들의 마음에는 들어가는 것이 아예 불가능하다는 사실만 알 수 있었다.
어쨌건 그래서 찰스는 에릭의 마음 속을 지속적으로 들여다보았고, 그 안에서 늘 '열쇠'를 찾아다녔다. 에릭의 마음 속의 수 없이 많은 공간 어딘가에 그가 입었던 깊은 상처를 치유할 열쇠가 숨어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늑대인간'인 스스로를 저주하고 경원하는 에릭이 쇼우에게 맞설 수 있을 만큼 강해지려면, 그 마음 안 어딘가 있을 그 금단의 문을 열어야만 할 것이었다.
그렇게 에릭의 마음 속을 오가면서, 찰스는 그간 에릭이 겪었던 수없이 많은 고뇌와 고통을 보았고, 또한 겪었다. 그것은 일생 동안 스스로를 괴물로 여기며 살아온 한 남자의 삶이었고, 그 앞에서 찰스는 결국 이미 답했다고 생각하던 그 질문과 다시 맞닥뜨리게 되었다.
- 그의 '힘'을 키우는 것이 과연 올바른 일일까.
에릭 렌셔는 '늑대 인간'인 그 자신을 명백히 혐오하고 있었다. 에릭에게 있어 그것은 클라우스 슈미트가 그에게 건 저주에 불과했고, 어머니를 앗아가고 인생 전부를 망쳐 놓은 끔찍한 사고일 뿐이었다. 그 부정적인 분노와 격분을 느낄 때마나, 찰스는 에릭이 스스로를 증오하고 저주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에는 깊은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에릭을 신뢰한다 해도 결국 '인간'인 찰스 자비에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간혹 어슴푸레한 의혹이 떠오르곤 했다.
- 그가 클라우스처럼 되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을까.
예컨대 클라우스 슈미트는 분명 '괴물'이다. 그는 자비심 없이 인간을 죽이고 아무렇지도 않게 에릭의 어머니를 해치고 에릭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려 했다. 하지만 그가 과연 처음부터 그런 존재였을까. 어쩌면 그도 한때는 에릭처럼 자신의 힘을 두려워 하는 평범한 인간이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처음에는 부정하기 쉬웠으나, 에릭의 어두운 과거를 알게 될수록 그 생각은 끈질기게 찰스의 마음 속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찰스 자비에는 보았던 그 어린 소년을 떠올렸다. 아무도 없는 황야에 홀로 서서 그를 밀어내기 위해 애쓰던 그 아이, 어린 에릭을.
하여 한동안 둘은 이제껏 하던 일들을 계속하는데 전념했다. 에릭은 추적과 사격은 물론이고 덫 놓는 법, 자취를 숨기는 법, 야영하는 법 등, 에릭은 자신이 전해줄 수 있는 모든 생존 지식을 찰스에게 가르쳐 주려고 노력했다. 그러한 열정적인 가르침 덕에 찰스의 사냥 실력은 꽤 나아졌고, 이제는 수사슴이나 여우, 심지어 늑대 등 꽤 잡기 어려운 동물들까지 잡아내는 지경에 이르렀다.
허나 이렇듯 착실하게 늘어가는 찰스의 사냥 실력과 달리, 에릭의 '힘'쪽에는 별 진전이 없었다. '클라우스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가능하다.'는 찰스의 말에 대해 에릭은 회의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이야기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그런 식으로 다룰 수 있는 힘은 아닌 것 같아."
"모르잖아. 혹시라도 노력해 본다면."
"찰스, 이걸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 막고 싶었던 적은 있었지만..."
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릭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그렇게 변신하는 스스로를 저주한 적은 있어도 인정하거나, 나아가 그 변신을 보름 외의 다른 기간에도 할 수 있기를 꿈꿔본 적조차 없었을 것이다. 찰스 또한, 이런 상황만 아니라면 굳이 에릭에게 그러한 일을 하도록 종용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슈미트의 위협이 그들 앞에 자리하고 있었고, 그러니 이젠 모든 것이 바뀌어야만 했다.
"에릭, 분명 할 수 있을 거야."
에릭은 불안한 눈으로 찰스를 바라보았다. 잠시 무언가를 설명하려다 포기하는 그의 마음 속에는 짙은 의혹과 희미한 희망, 그리고 무엇보다도 압도적인 두려움이 뒤섞여 있었다. 말하지 못했지만 그가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찰스는 알 수 있었다.
'과연 그래도 괜찮을까? 그런 내 앞에서 네가 안전할까?'
찰스는 에릭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찰스?" 의문을 담고 이름을 부른 에릭이었지만 곧 찰스의 키스를 받아주며 잠시 그 붉은 입술에 취했다. 입술을 뗀 찰스는 할 수 있는 한 가장 진지한 얼굴로 에릭에게 말했다.
"난 단 한 번도 늑대인 네 옆에서 두려웠던 적 없어."
"찰스..."
"노력해 보자. 에릭, 괜찮다면 내가 네 안에 들어가 볼게."
에릭의 시선이 흔들렸다. 이 쪽을 향해 전해져오는 걱정에 미소지으며 찰스는 말을 계속했다.
"단순히 그 힘 때문만은 아니야. 오히려 내 힘 때문이기도 해. 내가 무엇을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자네 마음에 들어가 무엇을 볼 수 있는지 알고 싶어서 그래."
잠시 망설이던 에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한 마디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위험할 것 같으면 얼른 빠져 나가."
"물론.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날 리 없어."
조금 못마땅한 듯 미간을 찌푸린 에릭의 표정에, 도저히 웃음을 터트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에릭에게 한 이야기는 농담이 아니라 말 그대로 진심이었다. 이제껏 다른 이의 경계심 없는 마음이나 선명한 감정 등을 읽어 오긴 했지만, 그 날처럼 누군가의 마음 속에 아예 '들어가' 본 것은 찰스로서도 단 한 번도 도달한 적 없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찰스는 에릭의 마음 속에 펼쳐져 있던 그 광활한 공간을 잊을 수 없었고, 또한 찰스 자신의 힘이 지금보다도 더 확장될 수 있다는 놀라운 가능성에 전율했다.
그래서 에릭의 허락 하에, 찰스는 하루에 일정 시간 반드시 에릭의 마음 속에 '들어갔다.' 처음 에릭의 마음 속에 들어갈 때 이미 겪었지만 다른 사람의 정신 세계에 스스로를 던지는 것은 의외로 위험한 일이었다. 그러나 에릭은 그를 사랑했고, 그래서 에릭의 마음은 찰스의 존재를 느끼는 즉시 거의 모든 방어와 거부를 포기하고 순순히 찰스를 받아들여 주었다. 그것은 사실 아주 특별하고 행복한 경험이기도 했다.
다른 이들의 마음에도 이렇게 쉽게 들어갈 수 있는 것일까? 아마도 힘들 것이다. 맨 처음, 자신의 의사를 거부하던 에릭의 마음은 강렬한 폭풍 그 자체였음을 찰스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제는 좀 나을지도 모르지만, 에릭의 오두막에서 지내는 동안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기회는 사실상 없었고, 숲의 동물들의 마음에는 들어가는 것이 아예 불가능하다는 사실만 알 수 있었다.
어쨌건 그래서 찰스는 에릭의 마음 속을 지속적으로 들여다보았고, 그 안에서 늘 '열쇠'를 찾아다녔다. 에릭의 마음 속의 수 없이 많은 공간 어딘가에 그가 입었던 깊은 상처를 치유할 열쇠가 숨어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늑대인간'인 스스로를 저주하고 경원하는 에릭이 쇼우에게 맞설 수 있을 만큼 강해지려면, 그 마음 안 어딘가 있을 그 금단의 문을 열어야만 할 것이었다.
그렇게 에릭의 마음 속을 오가면서, 찰스는 그간 에릭이 겪었던 수없이 많은 고뇌와 고통을 보았고, 또한 겪었다. 그것은 일생 동안 스스로를 괴물로 여기며 살아온 한 남자의 삶이었고, 그 앞에서 찰스는 결국 이미 답했다고 생각하던 그 질문과 다시 맞닥뜨리게 되었다.
- 그의 '힘'을 키우는 것이 과연 올바른 일일까.
에릭 렌셔는 '늑대 인간'인 그 자신을 명백히 혐오하고 있었다. 에릭에게 있어 그것은 클라우스 슈미트가 그에게 건 저주에 불과했고, 어머니를 앗아가고 인생 전부를 망쳐 놓은 끔찍한 사고일 뿐이었다. 그 부정적인 분노와 격분을 느낄 때마나, 찰스는 에릭이 스스로를 증오하고 저주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에는 깊은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에릭을 신뢰한다 해도 결국 '인간'인 찰스 자비에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간혹 어슴푸레한 의혹이 떠오르곤 했다.
- 그가 클라우스처럼 되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을까.
예컨대 클라우스 슈미트는 분명 '괴물'이다. 그는 자비심 없이 인간을 죽이고 아무렇지도 않게 에릭의 어머니를 해치고 에릭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려 했다. 하지만 그가 과연 처음부터 그런 존재였을까. 어쩌면 그도 한때는 에릭처럼 자신의 힘을 두려워 하는 평범한 인간이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처음에는 부정하기 쉬웠으나, 에릭의 어두운 과거를 알게 될수록 그 생각은 끈질기게 찰스의 마음 속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찰스 자비에는 보았던 그 어린 소년을 떠올렸다. 아무도 없는 황야에 홀로 서서 그를 밀어내기 위해 애쓰던 그 아이, 어린 에릭을.
- 에릭은 그렇게 되지 않을 거야.
그럴 때면 이러한 말을 스스로에게 아무 거리낌 없이 들려줄 수 있었다. 게다가 그는 이미 늑대인 에릭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 거대한 회색 늑대는 언제나 기꺼이 몸을 던져 그의 목숨을 구해 주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좀더 가벼워져, 찰스는 에릭의 마음 속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갈 힘을 얻곤 했다. 믿자. 문 너머에 있는 것은 광폭한 괴물이 아니라 바로 그 늑대이리라. 사려깊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앞길을 인도하고 뒤를 지켜주던 또다른 에릭 렌셔. 새로운 문을 만나고 그 곳의 입구를 열어 보아야 할 때마다, 찰스는 언제나 그 늑대의 따스함을 떠올리며 용기를 얻었다.
"내 마음 속엔 뭐가 있지?"
"여러가지."
"내가 겪었던 일들?"
"그리고 자네의 생각들이 담겨 있어. 에릭 렌셔의 마음 속은 아주 넓거든."
"...끔찍하지는 않고?"
그래서 어느날 모닥불가의 그에게, 찰스는 아무 거리낌 없이 답해줄 수 있었다.
"전혀. 그 곳에는 행복한 기억들이 많이 들어 있더군."
에릭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찰스를 쳐다보았고, 찰스는 빙그레 미소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 곳에는 반짝이는 시냇물과 봄의 들꽃이 있어."
"믿기 어렵군."
"노란 데이지와 물 오른 전나무들이 풍겨내는 독특한 향기를 맡을 수 있지. 가끔은 비가 오고, 그러면 흰 옷을 걸친 검은 머리 여인이 꽃다발을 만들며 노래를 해."
"......"
에릭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찰스를 바라보았다. 이 장면이 그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찰스는 알았다. 오래되어 거의 퇴색된 기억이었지만 그 향기만은 무섭도록 강렬하게 그의 마음 속에 각인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티티새 소리를 흉내내며 어린 에릭을 끌어안고 빙글빙글 돌지. 그러다 넘어졌지만 아무렇지도 않았어. 왜냐면-"
에릭이 눈을 감았다. 그 눈꺼풀 뒤에 아로새겨져 있던 옛 기억을 찰스의 맑은 목소리가 매끄럽게 읊는다.
"고사리풀이 하도 두텁게 깔려 있어서 둘다 푹신한 풀 위에 그냥 주저앉고 말았거든."
"...그리고 그 흰 치마에 풀 물이 드는 바람에 어머니는 꽤 애를 먹었고."
남자의 목소리가 떨려 왔다. 찰스는 손을 올려 그의 어깨를 감싸안았고, 에릭은 눈을 깜박여 눈물을 털어내며 말을 계속했다.
"너무 오랫동안...잊고 있었는데."
찰스는 에릭의 등을 쓸어주었다. 잊어왔던 기억들에 휩쓸린 에릭의 마음은 지금 이 순간 찰스가 보아왔던 중 가장 행복에 가까운 형태로 부드러워져 있었다. 따뜻함이 그의 안에서부터 흘러나와 찰스의 마음까지 덥혀 주었다. 그런 에릭의 눈을 들여다 보며, 찰스는 한 마디 한 마디 영혼에 새기듯 찬찬히 말했다.
"네 마음 속에는 계속 들어 있었어."
어느새 키스가 시작되었고, 찰스는 에릭의 입술을 음미하며 다시 한 번 확신을 가졌다.
- 에릭은 괴물이 아니야. 그리고 앞으로도 절대 괴물이 되지 않을 거야.
그 날로부터 며칠 뒤, 마침내 찰스는 에릭의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문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그것은 거친 발톱 자국이 가득한 피로 물든 철문이었다. 어두운 곳에 존재하는 그 문에는 두터운 쇠사슬이 감겨 있었고, 안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무섭도록 검은 어둠 뿐이었다. 찰스는 그 문을 바라보며 고요히 - 정신적으로 - 깊이 숨을 들이킨 다음 천천히 내쉬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저 안에 있는 것을 직면할 준비가 되었는가?'
솔직히 말한다면 무서웠다. 하지만 에릭을 생각하면 멈출 수 없었다. 두터운 사슬을 손에 쥐자 얼어붙을 것 같은 냉기가 느껴졌다. 결코 끊어질 것 같지 않은 둔탁한 고리는, 그러나 찰스의 힘과 만나 서서히 부스러지기 시작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영원히 후회할 일 따위 하지 말고 에릭의 마음 밖으로 사라져.' 마음 속에서 마지막 유혹의 속삭임이 들려왔지만 찰스는 그것을 무시했다. '에릭은 괴물이 아니야. 그리고 절대 괴물이 되지도 않을 거야.' 그의 입술을 기억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을 기억해 냈다. 사슬이 끊어진 문에 손을 대자,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내며 경첩이 움직였다. 살아 꿈틀 대는 것 같은 어둠이 그 입을 벌린다. 찰스 자비에는 망설임 없이 발을 내딛었다.
문 안의 시간은 밤이었다. 등불같이 휘황한 별이 타오르는 찬란한 밤이 살아 꿈틀대는 어둠 속에 펼쳐져 있었다. 모든 것이 생생한 그 세계에서 흰 눈에 덮인 땅만이 깊이 잠들어 있을 뿐이었다. 찰스는 조심스레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시각, 이 광경 모두 경험이 있었다.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바로 그가 꿈에서 보았던 늑대의 세상이었다. 아주 작은 빛줄기마저도 칼같이 잡아내는 늑대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세상. 거대한 태양같은 보름달이 뜬 하늘과 영원히 얼어붙은 눈 덮인 땅.
- 영원히.
찰스는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 전율했다. 단 한 그루의 나무도 보이지 않는 흰 설원, 이 곳은 그와 에릭이 있던 검은 숲이 아니다. 새로운 땅, 나무도 풀도 없는 미지의 땅이었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당연히도 인기척은 없었고, 이 곳이 어디인지 정확히 알 수 있는 어떠한 표시도 없었다. 그저 한 가지 확신만이 이상할 정도로 강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 이 곳은 영원히 얼어붙은 땅이다. 지금은 어디에도 없는 곳이다.
찰스는 발걸음을 옮기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혹시라도 에릭, 혹은 '늑대'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을까 하여 주위를 살폈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아까 문 앞에서 느꼈던 확신이 점차 의혹으로 변해 갔다. 혹시 엉뚱한 문을 찾아낸 것은 아닐까? 그저 '괴물'에 대한 일그러진 기억이 들어 있는 또 한 군데 영역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심을, 찰스는 고개를 저어 단번에 떨어냈다. 그렇지 않다. 아까의 문에서 느껴졌던 소름끼치는 감각을 무시할 수는 없다. 분명 에릭의 '늑대'는 이 곳 어디엔가 있으리라.
계속 걷는 동안 찰스의 입에서 입김이 나오기 시작했다. 에릭의 마음 속에 찰스의 의식이 들어온 것 뿐인데 거의 물리적으로까지 느껴지는 추위에 찰스는 내심 놀랐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걸까? 생각하는 순간, 검은 그림자가 몰려나왔다.
"...!"
고개를 든 순간 마주친 것은 붉은 불꽃같은 눈이었다. 온 하늘을 가릴 정도로 거대한 야수가 그를 노려보고 있었고, 거대한 앞발이 영원히 얼어붙은 흰 눈 위에 지워지지 않을 자국을 아로새겼다. 적의와는 전혀 다른 감정이 물리적인 힘을 갖고 돌풍처럼 몰아친다. 이제까지 에릭의 마음 속에서 보거나 겪어왔던 감정의 폭풍들과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잠깐, 잠깐! 에릭, 내 말을 들어!"
- 물러가라.
찰스는 말을 멈추고 눈을 크게 떴다. 이 곳의 거대한 야수, 그가 본 늑대는 에릭이 아니었다. 야수가 몸을 돌려 찰스에게서 멀어진다. 육중한 발소리가 사라져 가는데도 돌풍은 더욱 거칠게 몰아닥쳤고, 결국 찰스의 몸이 어딘가로 날려가기 시작했다.
- 너는 '우리'가 아니다.
- 이 곳에 있어선 안된다.
- 돌아가라.
흙바닥이라면 손톱을 박고서라도 매달렸겠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이를 악문 찰스 앞에서 야수의 그림자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고, 찰스는 결국 비명을 지르며 날려가 문 밖으로 '추방'되었다. 눈을 번쩍 뜨자 그곳은 현실이었고, 그의 앞에 앉아 있던 에릭이 걱정스러워 하는 얼굴로 찰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찰스는 잠시 혼란에 빠져 있다 간신히 정신을 추스렸다. 지금 그가 보고 겪었던 것을 정리하는 동안 에릭은 찰스에게 시원한 물 한 컵을 가져다 주었고, 그것을 단숨에 들이킨 찰스는 숨을 간신히 가라앉히며 이마의 땀을 닦았다.
"찰스?"
"...찾았어, 에릭."
찰스를 바라보던 남자의 얼굴이 경직되었다.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찰스는 에릭의 손을 잡고 그가 보았던 것에 대해 모두 말해 주었다. 그리고는, 놀란 얼굴로 이 쪽을 바라보는 에릭에게 이야기했다.
"난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어."
"어째서? 혹시 그 안에 괴물이..."
"아니야, 그런 게 아냐 에릭."
찰스의 양 손이 에릭의 뺨을 감싸쥐었다. 짙은 푸른 눈동자가 청회색 눈동자에 시선을 맞춰 왔고, 할 수 있는 한 다정한, 하지만 아무리 봐도 경직된 미소를 떠올린 찰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문 안에는 네가 들어가야 해. 너 외에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어."
에릭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런 그의 손을 굳게 잡으며 찰스는 거의 속삭이듯 나직하게 말했다.
"'그들'이 널 기다리고 있어."
"놈들이..."
"에릭, 그들을 믿어 줘."
"찰스, 그건 괴물이야. 내 안의 괴물이라고!"
"슈미트와는 달랐어. 에릭! 그들은 날 추방했지만 해치려고는 하지 않았어."
"...알겠어."
잠시 고민하던 그가 고개를 끄덕였을 때, 찰스는 간신히 안도감을 느끼며 미소지을 수 있었다.
"이 일에 대해서는 내일 얘기하자. 마을에 다녀온 뒤 생각해 보자고."
에릭은 영 불안한 기색이었지만 말없이 고개를 다시 끄덕였고, 찰스는 그대로 그 곁에 누워 에릭의 체온에 감싸여 깊이 잠들었다. 꿈에서 그는 다시 한번 그 설원을 본 듯한 기분이 들었고, 희미하게 울리는 늑대의 울음 소리를 들은 듯도 싶었다. 하지만 둘 모두 희미한 그림자로만 감돌았을 뿐이었다.
이윽고 아침 햇살에 반쯤 깰 듯한 기분으로 옆자리를 더듬었을 때, 마을에 가는 날이면 늘 그렇듯 에릭이 일찍부터 떠나 버렸다는 것을 깨달은 찰스는 다시 베개를 끌어안으며 눈을 감았다. 에릭은 없었지만 이부자리에는 그의 체취가 가득 했고, 이렇듯 별다른 훈련이 없는 김에 좀더 행복한 수면을 즐기며 늘어져 있고 싶었던 것이다.
눈을 감고 있어도 실내의 바람은 느껴진다. 문이 열렸고, 바깥의 싸늘한 공기가 찰스의 얼굴에까지 흘러 닿아왔다. 들어서는 인기척에 괜스레 장난기가 든 찰스는 계속 잠든 척 하기 위해 짐짓 눈을 감고 누운 자세를 고쳤다. 그리고 에릭이 눈치챘나 살펴보기 위해 몰래 정신을 집중한 순간,
"행복한 늦잠이군, 자비에 박사."
찰스는 눈을 떴다. 정신의 손길이 상대의 생각에 닿은 순간 깨달은 사실에 온 몸에 오한이 들었다. 눈앞에 서서 이 쪽을 내려다 보고 있는 남자의 얼굴에는 친절한 미소가 가득 떠올라 있지만, 여전히 그 눈에는 단 한 점의 미소조차 담겨 있지 않았다.
"클라우스 슈미트..."
"옷 챙겨 입을 시간은 주겠소. 어서 준비하시오."
"어째서... 어째서 여기 온 겁니까?"
남자가 예의바르게 웃었다.
"여기 온 이유는 나중에 가르쳐 줄 테니 어서 옷을 입고 나오시오. 물론 옷을 입지 않고 있어도 나는 별 상관 없소만."
"거절할 수 있나요?"
"맘대로."
하지만 그 순간 클라우스의 생각은 전혀 다른 얘기를 하고 있었다. 지금 죽여버리고 에릭에게 '교훈'을 주는 게 나을지, 아니면 굳이 데려가서 그의 '계획'을 진행하는게 나을지 고민하는 마음의 소리를 들은 찰스는 고분고분 일어나 옷을 걸쳐입기 시작했다.
"똑똑하군."
클라우스는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찰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인간 치고는 아주 똑똑해. 그럼 갑시다. 마차를 대기시켜 두었으니."
"...에릭은요?"
"그 아이는 곧 내게 올 거요."
보란 듯이, 클라우스는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실내에 떨구었다. 그러고 난 뒤 마치 귀부인을 에스코트 하기라도 하듯 찰스를 향해 손을 내밀었고, 찰스는 굳은 얼굴로 그 손을 무시한 채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절 죽일 겁니까?"
"글쎄? 모르겠소."
남자는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
"그 아이 하기 나름에 달려 있소이다. 그래, 어쩌면..."
이어 클라우스 슈미트의 마음 속에 기대감이 일렁이는 것을, 찰스는 경악 속에 감지해냈다.
"당신도 '내 무리'에 들어오게 될 지도 모르지."
그는 진심이었다.
- 계속
달리고 또 달립니다. 다음화에 끝나겠네요. 혹은 에필로그가 분리되던가요...
곧 예약 페이지 개설하겠습니다...
'연구 결과 -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단편] 검은 숲 속에서 번외편 (2) | 2012.02.20 |
---|---|
[중편] 검은 숲 속에서 - 7 (5) | 2012.02.18 |
[메모] X saga (2) (107) | 2012.02.15 |
[중편] 검은 숲 속에서 - 5 (4) | 2012.02.13 |
[중편] 검은 숲 속에서 - 4 (2) | 2012.02.12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