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3일 23시 까지
요런 표지의 예약 특전을 드립니다. 약 20p내외의 <어나더 엔딩북> 되겠습니다. 네, 엑스사가는 엔딩이 둘 입니다^^!
이걸로 갈까 저걸로 갈까하다가 에라이 둘 다 가보자!....로 결론 내렸습니다. 자갈사이즈 돌까지는 던지셔도 되는데 도끼는 좀 참아주세요. 저 마감 쩜.ㅠㅠ
선입금 예약은 여기 게시판에서 해당 공지와 카테고리 선택하시고 신청하시면 됩니다, 꾸벅.
그리고 수정첨삭을 살짝 거친 도입부 겸 샘플 글은 아래 접어둡니다.
※ 영화 엑스맨 퍼스트클래스 AU 여성향 에릭X찰스 팬픽입니다.
※ AD11세기 영국-스칸디나비아-프랑스 등지를 배경으로 한 순구라개뻥쌩사기 스또오리입니다. 고증과 개연성을 포기하고 보시면 정신 건강에 매우 유익합니다.
※ 물론 역사상 실존 인물&지명&사건도 간간이 등장합니다만 좀 더 그럴싸한 개뻥을 위한 병풍일 뿐이오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01
베네딕트 회칙을 따르는 수도원들이 늘 그렇듯, 찰스가 철이 든 후 십여 년을 살아온 이 수도원의 종과終課 역시 해지기 전에 마무리 된다. 서녘 하늘에 희미한 실금만 남긴 저녁 어스름에 잠시 시선을 주었던 청년 수도사는 경사진 길을 급히 오르느라 약간 밭아진 호흡을 가라앉히며 제법 규모가 있는 수도원 내측의 객사에 발을 디뎠다. 장서관의 고문서 수장고에서 두문불출하던 그를 여기까지 호출한 인물과 사정은 그리 궁금치 않다. 국왕이 머문 런던 지척이란 수도원 입지상 연줄 닿는 귀족 명사들이 제법 드나들지만 하필 찰스 프랜시스 자비에를 지목해 외부인 접촉을 대개 통제하는 수도원 내칙마저 거두게 만들 이는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럴 수 있는 이도, 그럴 이유가 있는 이도.
끝이 뾰족한 로마네스크 아치가 겹겹이 세워진 회랑 끝의 응접실 문앞에서 찰스는 짧게 숨을 들이키고 문을 열었다. 수도원장이 난처하고 불편하며 다소 겸연쩍은 기색을 숨기지도 않고 ‘찰스 형제와의 면담을 간곡히 부탁’ 했노라던 –꽤나 거액의 기부금을 겸사로 챙긴 게 분명했다- 귀한 손님이 수도원 측에서 내놓은 조금 늦은 저녁 식사를 들다가 문소리에 고개 들어 찰스를 보았다.
“오랜만이군.”
“주님의 가호로 다시 뵙는 군요, 웨스트체스터의 헨리 경. 그간 별고 없으셨습니까.”
“별고 없어 보이나?”
“적어도 외양은 무탈해 보이십니다.”
찰스보다 예닐곱 살은 많아 보이고 햇빛에 그을어 단단한 얼굴을 한 젊은 남자 –웨스트체스터의 헨리- 가 피식 웃고는 술잔이 찰랑이도록 술을 부어 입가로 가져갔다. 수도원에서 성찬용으로 쓰기 위해 으레 준비하기 마련인 와인이 아니라 독한 내가 확 풍기는 켄트의 사과주였다.
“두 주 전에 노르망디를 떠나 영지로 돌아왔다. 아버지, 아니 웨스트체스터 경께선 올 여름을 넘기기 힘들어 보이더군.”
“전갈 받았습니다. 그분을 위해 기도하고 있지요.”
“내가 웨스트체스터 백작위를 정식으로 계승하면 너를 수도사제로 인정해줄 것을 켄터베리 주교께 청하겠다. 옥스퍼드의 찰스 자비에는 벌써부터 학식으로 이름이 나있으니 주교께서도 쉽게 허락하실거다.”
“헨리 경, 저는 일생 수도하며 신께 봉사하기로 서원한 몸입니다. 또한 일개 학승일 뿐 세속의 제후들과도 의무와 복종의 연을 다져야 하는 사제는 저의 길이 아닙니다.”
“웃기는군. 그렇다면 진작에 은수사(隱修士)라도 되어 산골에 처박힐 일이었다. 아니면 재작년 볼로냐 유학 중에 로마에 주저앉거나. 귀족의 아들로 태어난 자가 어디를 간들 주군에 대한 의무에서 자유로울 수 있나? 사제가 되어 내 영지로 돌아와 백작령에 봉사해라. 그게 네 의무다.”
“..............”
헨리는 찰스의 대꾸도 듣지 않고 술을 다시 따랐다. 자신의 술잔 뿐 아니라 곁에 준비된 다른 술잔에도 그득하게 따르더니 대뜸 찰스에게 내민다.
“헨리 경, 저는 술을 마실 수 없습니다.”
“수염도 안 난 애송이 시절부터 맹랑한 애주가였던 네가 할 말은 아니군.”
“철모르던 옛 시절은 지나갔고, 저는 지금 수도사니까요.”
“왜, 술을 마시면 곤란한 일이라도 있나?”
“일단은 저도 계율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게 아니겠지. 취하면 넌 네가 숨기는 너의...........”
“헨리 경...!”
윽박 질렸을 때조차 차분하던 찰스가 이 방에 들어와 처음으로 흔들린 기색으로 헨리의 말문을 막았다.
“여전하구나, 너는.”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 우린 여전히 저주받을 놈들이군 그래.”
“...............”
헨리가 술잔을 내밀며 재촉했다. 무겁고 고집 센 목소리는 권고가 아니라 선고였다.
“권하는 게 아니다. 요구하는 거지.”
둘의 시선이 술잔 너머에서 부딪혔고, 찰스가 먼저 눈길을 거두며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음을 새삼 깨달은 하얀 손가락이 내밀어진 술잔을 받았고, 그날 저녁의 마지막 어스름은 찰랑이는 독주 아래 삼켜졌다.
살아온 무수한 날들과 별 다르지 않은 이른 햇살을 등진 채로, 에릭은 마악 물굽이를 지나 시야에 들어온 수도원을 노려보았다.
“여기까지 왔구먼.”
곁의 늙은 전사가 다잡은 한 마디는 지금 에릭과 에릭이 탄 배 위의 모든 바이킹들의 감상과도 같았다. 한때는 그들이 무소불위의 검이요 명령이며 천벌이자 재앙이었던 시대가 있었다. 용머리를 조각한 롱쉽(longship) –남쪽의 굼뜬 백성들은 에릭들이 지금 탄 날렵한 스카이드(skeid)나 좀 더 거대한 드라카르(drekar)들을 구분 않고 그리 불렀다- 이 기적 같은 스피드로 강을 거슬러 올라가 모든 것을 정복하고, 약탈하고, 승리했던 시절 말이다. 바이킹은 공포의 지칭에 다름 아니었고 브리튼의 일곱 왕국은 차례로 굴복하여 수백 년을 두려움에 떨었었다. 적어도 크누트 대왕의 마지막 정복까지는.
“여기가 바로 대왕의 못난 자식들과 함께 바이킹의 영광도 끝났다고 주절거리는 놈들이 제 똥무더기 위에서 뭉기적대는 땅이지.”
노전사의 한 마디에 클클대는 웃음들이 맞장구를 쳤고 에릭은 다음의 수순을 잘 알고 있었다.
“두 번 다시 개소리를 하지 못하게 해주자...... 모두 일어섯!!”
새벽의 그림자를 뚫고 바이킹의 배들이 강변에 늘어섰고, 전사들은 전투도끼를 든다. 거친 싸움꾼들 사이에서 몇몇 궁수가 나란히 자리를 잡았다. 이들은 오직 에릭을 따라 여기까지 온 자들이었다. 바이킹 에릭 에이릭손, 최근 데인의 가장 유력한 수장들 중 하나인 본홀름의 젊은 전사를 말이다.
진한 금발을 목덜미까지 늘어뜨린 푸른 눈의 사내가 유유히 뱃전에 서서 팔을 쳐들자 궁수들이 특별히 만든 강철 화살을 시위에 메기고 목표를 향했다. 어른 남자의 손가락 둘을 합친 것과 비슷한 굵기의 화살은 화살이라기보다 거의 쇠봉에 가까웠고 실제 용도도 그에 가까울 것이다. 에릭은 이물에 매두었던 신호용 까마귀 들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을 확인한 후 심호흡과 함께 쳐들었던 팔을 내렸고, 궁수들은 일제히 당긴 시위를 놓았다.
수도원의 성무일과는 새벽과 아침 중 새벽에 더 기운 하늘 아래 시작된다. 효과曉課도 지나 조과朝課가 가까워 아침 소세를 끝낸 수사들이 하나 둘 회당을 향할 때 햇빛과 다른 섬뜻한 빛줄기 하나가 수도원의 종탑을 스쳤다. 거칠게 다듬어진 데인인의 화살이.
서기 1065년 초여름, 강을 끼고 두둑한 둔덕 위에 자리한 옥스퍼드 수도원이, 바로 그 강을 타고 올라온 전사들의 발아래 짓밟히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약탈과 습격에 이골이 난 북구의 전사들은 그들의 롱쉽이 채 정박하기도 전에 세차게 강물을 차내며 수도원 옹벽에 매달렸다. 서둘러 봉쇄한 문과 이런 습격에 대비해 올려둔 외벽은 그러나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데인 인들이 쏴 갈긴 거대한 화살들이 마치 사다리인양 차례로 옹벽에 박혔고, 만족들은 괴성을 올리며 벽을 타넘었다. 둔한 강철 살촉이 이해할 수 없는 힘으로 벽을 꿰뚫었고, 수사들은 마침내 아침을 부수며 강림한 공포와 혼란을 마주하게 된다.
젊은 에릭, 강철의 주인 에릭. 광포한 에이릭 올라프손의 아들, 비천한 어미로 인해 버림 받았으나 기어이 아비의 모든 것을 물려받은 자.
데인인들의 가장 강력한 수장이 그가 왜 새로운 공포인지를 몸소 보여주기 시작한 것이다.
이즈음의 수도원들은 더이상 속수무책 약탈당하는 대상이 아니었다. 하느님께서 도우사, 앨프레드 왕의 군대가 데인 인들에게 승리한 것이 어언 지난 세기의 일이며, 크누트의 정복조차 이제 기억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왕들의 군대는 강력해졌고 하나하나가 버서커인 양 날뛰던 북방의 만족도 기세가 누그러든지 오래, 이런 약탈의 시도는 오히려 드물었고 성공은 더더욱이나 그렇다. 만약 이 수도원을 습격한 자가 저 불가사의한, 강철의 주인이라고까지 일컬어지는 젊은 에릭이 아니었다면 수도원의 견고한 옹벽은 지척에 주둔한 왕의 병사들 혹은 귀족들이 이끄는 민병대가 달려올 때까지 모두를 충분히 지켰으리라.
젊은 에릭, 거친 북해를 건너온 사내의 날랜 발걸음이 바짝 질린 비명들과 어수선한 소음을 곧장 질러서 수도원의 가장 안쪽, 두 개의 안뜰 중 좀 더 특별한 신분을 가진 의탁자 들을 위해 지어진 분관을 향했다. 그는 자신이 굳이 이 수도원을 택한 목적과 수도원 어디에서 무엇을 해야 할 지 잘 알고 있는 듯 했다. 그의 용무에 비하면 그의 전사들이 본당의 곳곳에서 갈취 중인 찬란한 성물이며 재물들도 별 것 아닌 양 안중에 없어보였다. 데인의 수장은 자신의 이 습격이 실은 위험천만한 모험이며 그만큼 냉정하게 계산된 무력도발임도 알고 있다. 도하에서 제압, 가장 가까운 초소의 병단이 쇄도할 때까지의 시간, 그리고 그 안에 처리해야 할, 은밀한 의뢰.
저도 모르게 일그러지는 미간과 새나온 냉소를 굳이 가리지 않은 채, 전사는 수도자의 처소치고는 지나치게 번듯한 방문을 차부수고 들어갔다.
코를 알싸하게 찌르는 약채의 향기와, 곯은 술냄새가 습격자의 긴장한 전신을 반긴다. 크리스천의 수도원과 일말의 인연도 없는 몸이지만, 소위 신께 바친 정숙과 헌신의 공간에 이 난잡한 공기란 가당치도 않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승냥이 같은 왕들이 섬뜩한 야만의 투쟁을 거듭하는 저 북국의 땅이나 여기 기름진 녹색 대지의 수도원이나, 탐욕의 추접함은 비슷비슷한 냄새를 풍기는 모양이다.
에릭은 막 옆방들과 낭하를 울리기 시작한 비명들을 일체 무시하고 우스꽝스러울만큼 커다란 침대로 성큼성큼 다가가 벌거벗은 큼직한 몸뚱이를 있는 대로 뻗고 늘어진 금발의 사내를 잡아챘다. 잘해봐야 3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거구의 사내는, 얼마나 고주망태가 되도록 퍼마셨던지 에릭의 우악스런 손길에도 잠에 취한 채 입술을 씰룩댈 뿐이다. 다크블론드의 거한, 왼족 어깨의 화살촉 흉터, 오른쪽 광대뼈 바로 아래의 홍반. 힐끗 본 침대 아래에 엉망으로 굴러다니는 진홍의 망토에서 웨식스(wessex)의 와이번 문장을 확인한 데인의 젊은 수장이 입술 끝을 슬쩍 올렸다. 이래서야 요란하게 연출한 침입의 수고에 비해 지나치게 쉬운 목표 아닌가. 전사다운 결투의 미학 따위에는 일말의 관심도 없는 그의 검이 가차 없이 금발 사내의 목을 날렸고, 그것으로 볼일은 끝났다 생각한 찰나였다.
지나치게 커다란 침대의, 지나치게 봉긋한 이불 무더기가 꿈틀대더니, 느리고 어수룩한 움직임으로 둘둘 말린 덩어리 틈새로 하얀 다리가 불쑥 비어져 나왔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새하얀 다리였다. 가늘지도 그렇다고 둔중하지도 않은 선은 그저 쭉 뻗어 발끝에서 마무리 되었을 뿐 어떤 단련의 흔적도 없다. 그리고 굳은 살 하나 없이 은은한 연분홍색 뒤꿈치가 그 주인의 ‘노동하지 않아도 되는’ 신분을 은연중에 암시하였고, 바로 그 점이 에릭으로 하여금 하마터면 반사적으로 휘두를 뻔한 검을 거두게 했다. 방금 자신이 죽인 거한이 침대에 끌어들인 것이 흔한 시골 촌부나 창부가 아닌, 제법 신분이 있는 계집이라면 나름 몸값을 뜯어낼 인질의 가치가 있을 터였다. 예를 들어 혹시나 대동하고 온 처라든가......?
금녀구역을 명시하는 수도원 회칙을 아예 깔아뭉갠 에릭의 추측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즉시 박살나버렸다.
역시나 술냄새와 잠에 취한 하얀 얼굴이 이불 아래서 천천히 드러나 에릭을 똑바로 향했고, 그는 발가벗은 청년의 목울대에 선명한 치흔을, 그 의미를 바로 알아보았으니까.
상황 자체에 당황하지는 않았다. 북국이나 이곳이나 힘 가졌다는 자들이 침대에서 탐하는 육신이 젊은 여자에 국한하지 않는다는 걸 넌더리나도록 잘 아는 에릭이다. 또한 남색에 대해 반사적으로 관습적 혹은 생리적 혐오부터 불러 일으킬만큼 번듯하게 살아오지도 못했다. 거의 모든 종류의 육욕에 대해 공평하게 무감각한 기준을 가지게 된 사내가 이 노골적인 상황을 앞에 두고 판단의 저울에 올린 건 하나 뿐이다. 지금 그가 자기 자신을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하게 사로잡은 스스로의 빌어먹을 충동에게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의 길이.
“......헨리...?”
약간 쉬어있는 목소리가 침대 끄트머리에 널부러진 시체를 불렀고, 비몽사몽의 혼돈을 잠시 헤매던 푸른 눈이 마침내 에릭을 명징하게 담는 순간 둘은 각각의 판단을 끝내고 각자 손을 뻗었다. 에릭의 손아귀가 청년의 목덜미를 채었을 때, 청년은 손가락을 제 관자놀이에 대고 눌렀다.
“!!!”
몸 전체가 마비되는 듯한, 초유의 두통이 에릭의 머릿속을 뒤흔들었고 젊은 바이킹은 살벌한 욕설을 내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청년의 목줄기를 제압한 손아귀의 긴장만은 놓치지 않았다. 일견 나약해뵈는 상대라 해도 결코 방심하지 않는 것이 에릭의 뼛속 깊이 배인 습성이었고 덕분에 아직 살아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날 아침의 경우도 그랬다.
목이 졸린 청년의 입에서 쥐어짠 신음이 새어나왔고, 치명적인 두통은 닥칠 때와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것이 이해도 짐작도 못할 무형의 '공격'임을 직감적으로 알아챘으나, 에릭은 답지 않게 의문을 뒤로 하고 몸을 숙였다. 마술? 주술? 어쨌든 이게 무엇인지는 반드시 추궁하리라 생각하면서도, 젊은 사내는 이불을 젖히고 다리가 드러났을 때부터 자신을 지독스레 사로잡은 갈증에 먼저 매달렸다.
쇠뇌를 하나하나 다스려 옹벽 깊이 박아 넣은 '능력'의 사용이 부른 허기일지도 몰랐다. 자신의 특별한 '힘'을 사용하고 나면 으레 닥쳐오는 진한 고양감과, 약간의 식욕처럼 말이다. 그것이 오늘처럼 거의 맹목적인 색정으로 나타난 적이 있었던가? 소년 시절부터의 기억을 대강 들추었으나 여전히 애매하다. 배가 주리면 채우고 몸이 요구하면 가능한 들어주며, 오로지 하나의 길만을 달려온 수십 년이다. 북해는 거칠고 그의 영지는 척박했으며, 일궈온 삶 또한 그와 흡사했다. 내일을 보장할 수 없는 삶에서, 욕구와 갈증은 그때그때 채워줘야 하는 법이다. 그럴 수 있는 자가 더 오래 살아남는다.
완전히 제압한 몸을 내리누르고, 빌어먹을 흰 다리를 붙잡아 벌린 에릭은 급히 풀어낸 제 성기를 그대로 찔러 넣었다. 다른 것은 전혀 필요치 않았다. 당혹감과 고통을 담고 벌어진 푸른 동공도, 새빨간 입술 새로 투둑 터져 나온 비명도.
침입은 수월하지 않았으나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마치 이 수도원에 들이닥친 에릭들의 공세처럼 말이다. 수시간전 이미 열렸었던 비부는 몇 번의 성마른 채근에 필사적으로 적응하려 들었고, 숨을 몰아쉬며 최대한 몸에서 힘을 빼려는 그 주인의 의사에도 고분고분 따르려 한다. 피할 수 없는 행위라면 적어도 심하게 다치지는 말아야겠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아래 깔린 남자의 빠르고도 뻔한 판단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몸짓은 제법 인상적이었고, 이렇게 생생하게 지금 이 행위를 새기고 있는 에릭 자신이 또한 의외였다. 에릭은 정사의 기억을 세세히 남겨두는 취미도 상대의 반응을 따지듯 짚어보는 취미도 없다. 그에게 육체적 욕망과 충동, 그리고 의무감은 언제나 거의 같은 비율의 동의어 였으니까.
정사는 거칠고 짧았다.
느닷없는 충동을 곧이곧대로 풀어낸 바이킹은, 이완되기 시작한 육체와 달리 개운할 리 없는 정신적 뒷끝에 메마른 욕설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의 몸 아래 깔려 되는대로 흔들리는 동안 얼추 상황을 파악한 청년의 입에선 허탈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바지춤을 훔치며 손아귀에 든 두 손목을 풀어주자, 어느샌가 패닉을 털어내고 잠잠해진 푸른 눈이 에릭을 쫓았다.
“이름은?”
“.....찰스, 찰스 자비에.”
색슨 말로 툭 내뱉은 바이킹의 발음에서 강한 북구 악센트를 알아들은 찰스가 즉시 대답했다. 이젠 아예 쉬어터진 목청이라 꽤나 괴로웠지만 이 황당한 데인인한테 단칼에 절단 나는 것보다야 나았다. 반사적으로 그를 향해 사용하려다 어이없도록 간단히 제압당한 찰스 자신의 ‘은밀한 능력’으로 말할 것 같으면, 당분간 있으나마나한 잔재주일 것이다. 그래, 적어도 머리를 들쑤시는 이 지독한 숙취가 가실 때까지는 말이다. 엊저녁 헨리가 찰스에게 술을 강요한 목적이 바로 저 숙취였던 만큼, 쉽게 어찌할 수도 없을 것이다.
브리튼의 수도원이나 덴마크의 본거지에서나 볼 것 없이 배척받을 행위를 충동적으로 저질러버리고 돌처럼 굳은 얼굴을 한 남자를 올려다본 찰스는, 어쩐지 눈치만으로도 충분히 현재 그의 속사정을 알 것 같았다. 그가 자신의 경추 전체를 제압하고, 자신이 관자놀이를 누르며 그의 정신을 향해 무형의 창을 날린 순간 여느 사람들과 전혀 다른 울렁임을 느꼈었다. 숱한 사람들과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사고의 체계, 본인이 알거나 말거나 그것이 어떤 것이든 그의 '뇌' 속에 심어져있는, 특별한 힘을 컨트롤하기 위한 부분의 존재가 찰스의 감각을 제대로 뒤흔들어 놓았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 이 낯선 만족 남자의 고단한 삶이 찰스의 머릿속에 폭포수처럼 쏟아진 것이다. 이어서 반사된 양 번져오기 시작한 두통, 거기에 촉발된 듯 날뛰기 시작한 숙취. 도저히 능력을 계속 사용할 수가 없었다. 에릭이 자신의 목뼈를 아예 부숴버릴 기세로 조르지 않았더라도 말이다.
“몸값을 치를 수 있나?”
“아마도.”
주어가 생략된 질문의 의미를 잘 아는 찰스였고, 목숨이 경각에 달린 이 판국에 흘러나온 찰스의 그다지 확실치 않은 대답이 오히려 그의 확고한 배경을 암시한다는 것을 알아들은 에릭이었다. 흥정이 가능한 상황이라면 더는 두려울 것이 없다는 반응. 푸른 눈의 청년은 그가 당한 일에도 불구하고 이제 전혀 에릭을 두려워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몇 달이나 몇 년 전의 일도 아닌, 바로 직전의 일임에도.
수도원 한가운데 귀족들을 위한 객방에서, 아무렇지 않게 남자와 뒹굴고, 이튿날 아침 목이 달아난 그 남자의 시신을 발치에 놓은 채, 난입한 데인인 약탈자에게 다짜고짜 범해지고도 이내 침착할 수 있는 청년. 그리고, 어쩌면 기묘한 주술의 재주를 부릴 수 있는 수도사. 몇 푼의 금화를 취해보겠다고 이 자를 데려가는 게 과연 득일까?
에릭의 이성이 간단히 부정적 답을 제시하는 동안, 그의 팔은 전혀 다른 행동을 취하고 있었다. 바닥에 제멋대로 떨어진 린넨 셔츠와 튜닉, 그리고 질 좋은 모직으로 지어진 예의 진홍색 웨식스 망토를 집어들어 청년에게 던진 것이다.
“넌 지금부터 내 인질이다. 따라 나와.”
“.....몸값을 치를 말미가..... 어떻게 되오?”
“주제 넘는군. 네 몸값을 흥정할지 무시하고 노예로 부릴지는 오딘 신만이 아실 일.”
바이킹의 으름장이 호락하게 들리지 않았다. 어쨌거나 찰스의 공격을 물리치고 아침 댓바람부터 쓰라린 맛을 육신에 새겨준 자는 이 자, ‘본홀름의 에릭’ 이 유일했으니 말이다. 살아오며, 적어도 자신이 다룰 수 있는 힘을 자각한 이래로는 누군가에게 위협을 느껴본 적 없던 찰스가 이 생경한 아침을 안겨다 준 장본인을 다시 한 번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찰스 자비에를 제압하고 수치스럽게 정복한 자, 거친 야만족의 냉정한 수장, 그리고 비할 데 없이 위험한 어떤 힘의 주인.
그런데 자신은 이 자를 두려워하거나, 심지어 혐오하거나 증오할 수가 없었다. 신기하리만치 어떤 거부감도 일지 않는다.
다만 그것은-
아까부터 울렁거리던 속과 관자놀이 핏대가 발딱발딱 뇌를 향해 들이박듯 맥동치는 통증 사이사이로 희미하게 번뜩이는 에릭의 과거, 그의 감정, 그의 의지가 아직 찰스의 두뇌를 강고하게 사로잡은 탓이 클 것이다. 맙소사, 심지어 지금 찰스는 에릭이 조금 전 찰스 자신의 벗은 다리를 본 순간 일으킨 충동마저 자기의 감정인 양 읽어낼 수 있었다.
통증에 후들거리는 손으로 튜닉을 뒤적이는 동안, 찰스는 자신이 범해진 충격보다 이 정신적 타격에 더 강한 영향을 받고 있음을 인정해야했다. 뭐, 애시당초 육체적 정절과 그리 친숙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너도 수도사였나?”
침대 곁의 협탁에서 장미목 로자리오부터 챙겨들자 무뚝뚝한 질책이 떨어진다. 잘못 듣지 않았다. 어이없다는 투의 한 마디에는 분명 질책에 가까운 뉘앙스가 담겨있었고 찰스는 자신의 정결치 못한 행실에 대한 명백한 비난을 느꼈다. 그 수도사를 다짜고짜 덮친 건 누구냐고 되묻지 않은 건, 어디까지나 마침 그때 경추부터 등줄기를 따라 허벅지까지를 날카롭게 쑤신 통증 탓이다.
에릭은 눈앞에서 잔 경련을 일으키며 몸을 가누지 못하는 수도사를 내려다보며 혀를 찼다. 딱 보이는 그대로 부유한 남방의 방탕하고 난잡한 귀족 아니랄까봐 그만한 일에 휘청거리는 꼴이 아주 배알 꼴렸기 때문이다. 자신의 손바닥에, 손가락 사이사이에 저 희고 부드러운 감촉이 아직 남아있어서 더욱 그랬다.
“날 새겠군.”
금방이라도 침대에 고꾸라질 것 같은 몸에 손을 대자, 반사적으로 흠칫 굳는 꼴은 우습지도 않다. 물색 모르는 처녀도 아닌 주제에 새삼스럽긴. 겨우 린넨 셔츠 위에 튜닉을 반쯤 걸친 청년을 붉은 망토와 하얀 이불로 둘둘 말아 그대로 어깨에 걸머지자 뭐라뭐라 항의를 하는 것도 같았는데 에릭은 완전히 무시하고 꽝꽝 언 청어마냥 경직한 엉덩이나 손바닥으로 한 번 철썩 때려주었다.
“힘 빼. 귀찮게 굴면 바다에 처넣어 버리겠어.”
수도원 마당으로 나서자, 노략질에 이골이 난 자들답게 실어 나를 보화와 상등급 노예로 팔릴만한 포로들만 깔끔히 추리고 분류해 배에 싣는 중이었다. 수도원 측이나 에릭의 수하들이나 사망자는 거의 없다. 그만큼 빠르고 치밀하게 제압한 승리였다. 이것이 모종의 특별한 습격이 아니었다면 좀 더 시간을 두고 철저히 약탈했을 것이나, 에릭은 물러설 때를 정확히 아는 수장이기도 했다. 누구 좋으라고 여기 더 뭉기적거리다 군대의 칼맛을 보겠는가 말이다. 덴마크 궁정의 은밀한 인맥을 동원해 웨스트체스터의 헨리를 죽여달라 요구한 자들은 헨리를 죽인 해적들 또한 남김없이 토벌되어 영영 입을 다물게 되기를 은근히 바랄 터인데.
부관 격인 외눈박이 스벤이 다가와 하나 밖에 남지 않은 눈으로 눈짓을 보냈고, 에릭은 무뚝뚝한 '끝냈다' 한 마디로 나이든 전사의 소리 없는 질문에 답했다. 아버지뻘 나이의 스벤은 살아온 나날만큼의 경계심과 의심을 적절하게 사용할 줄 아는 자였고, 그러므로 당연히 에릭이 져날라온 이불더미에 대해서도 특유의 집요한 눈길을 보내며 관심을 표해왔다. 몇 가지 정황만으로 충분히 많을 걸 눈치 챈 그가 갈가마귀처럼 그렁거리는 목소리로 에릭의 의중을 떠보기 시작한 것이다.
“이번에는 인질을 잡지 않기로 했잖은가, 젊은 에릭.”
“....................”
“아니면 노예로 부릴 셈인가? 놀랄 일이군.”
가노를 들이지 않는 에릭의 습성은 제법 유명했고 그만큼 고만고만한 위치의 씨족들 사이에서 종종 빈축을 사곤 한다. 스벤은 의혹을 숨기지 않은 채 얌전히 에릭 어깨 위에서 숨을 죽인 이불덩어리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흐음, 저놈이 끼고 온 여자던가? 제법 반반했나 보군.”
“아냐. 단지 알아볼 것이 있다.”
이불 째 갑판위에 찰스를 내려놓은 에릭이 뒤돌아 우렁차게 외쳤다.
“퇴각!! 지금부터 귀환한다!!!! 형제들!! 집으로 돌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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