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은 참으로 불행한 남자였습니다. 섹스 중독이라는 건 - 어느 평론가가 이미 말했듯 - 이 영화에서는 단순한 희화나 야한 얘깃거리가 아니라 철저한 저주이자 족쇄입니다.
'수치'라는 영화 제목처럼, 주인공은 누구에게도 떳떳이 말하기 어려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섹스에 중독되어 있는 이상, 그에게 섹스란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듯 애정의 확인도, 욕망의 방출도, 어떤 정점이나 의식도 아니고 그저 '반드시 하지 않으면 괴로운 것' 입니다. (섹스중독은 단순한 섹스선호와는 전혀 다른 중독증입니다.)
'여동생'이라는 존재는 그런 그에게 실로 천형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왜냐면, 중독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 마치 마약 중독자가 환상이나 안식을원해서가 아니라 오직 금단증상의 끔찍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썩어가는 팔에 주사기를 꽂고야 말듯 -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하는 그 섹스의 대상이 될 수 없는데 '육체적으로 성교 대상일 수 있는' 존재니까요.
굶주림으로 치환해 보면 그 '관계'의 고통은 더 명확해집니다.
여기 굶주린 사람이 있어요. 지독스러운 위염에 걸려 있어서 너무나 고통스럽지만 그래도 굶주림 때문에 어떻게든 먹을 것을 먹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언제나 손을 뻗어서 먹고 싶은 거을 낚아채 먹어왔어요. 헌데, 사실 그가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곳에 먹음직한 빵이 하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빵을 먹으면 가족이 죽는다고 생각해 보세요. 당신은 가족을 죽인 죄책감에 시달릴 테고, 온 세상이 당신을 경멸하고 비난하겠죠.
극중 씨씨와 브랜든의 관계는 제게 딱 이렇게 다가왔습니다. 브랜든에게 있어 씨씨는 알콜중독자 앞에서 빤히 돌아다니는 술병입니다. 게다가 그녀는 나름 매력적이고, 기분이 좋으면 브랜든에게 과격하게 육체적인 방식으로 친밀감을 표현합니다. 얇은 티셔츠 하나만 걸친채 그를 껴안고,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샤워실에 오빠가 들어와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죠.
하지만 브랜든은 그녀에게 성적인 의미로는 손가락 한 까딱해선 안되는 처지죠. 그저 '섹스중독자'라는 것도 물론 '수치'스러운 일이지만 '여동생'을 그 미친 삶에 성적인 의미로 끌어들인다는 건, 고작해야 대낮에 호텔 전망창에 기대어 섹스를 하거나, 돈으로 산 여자 둘과 한꺼번에 그룹섹스를 하거나, 여자와 안된 날에는 남자와 성행위를 하는, 그런 것들과는 비교도 안되게 '수치스러운' 일이니까요. 조금이라도 혈육의 정이 있다면, 아니, 혈육의 정이 없더라도 해서는 안되는 일이고, 그래서 브랜든은 씨씨가 그의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극도로 강한 스트레스 상태에 놓이게 되죠.
여자를 더럽게도 못 꼬시는 - 그래서 그가 헌팅 실패한 여자들이 오히려 브랜든에게 접근해 올 정도인 - 직장 상사가 여동생과 키스와 애무를 나누는 동안, 브랜든은 앞좌석에서 언짢은 표정을 짓고 앉아만 있을 뿐입니다. 어딜봐도 자기만 못한 그 못난이 수컷이 여동생과 키스를 나누고 애무하고 자는 동안, 브랜든은, 가장 섹스를 '필요'로 하는 브랜든은 그 신음소리를 들으며 괴로워하고 또 괴로워 하다 야밤에 거리를 조깅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녀를 자신의 황폐하고 지옥 같은 섹스 라이프에 끌어들이는 순간, 그의 삶은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수치스러운 것이 될 테니까요. 그가 자신의 섹스라이프와는 구분해서 유지해오던 모든 생활이 경계없이 무너질 테니까 말입니다. 바로 그래서, 그는 회사 화장실에서는 자위를 하지만, 직장 동료를 자신의 성적 환상 - 전망창에서의 섹스 - 에 직접 끌어들이진 못합니다. 그에게 섹스란 곧 '수치'고, 거기 자심의 '수치스럽지 않은 모습'을 아는 사람들을 끌어들일 순 없는 거죠.
그래요. 브랜든은 섹스 중독자고, 그래서 일반적인 사람들보다 훨씬 다양한 방식의, 그래서 보통 사람 보기에는 '문란한' 방식의 섹스를 하고 또 하지만, 행위 내내 그는 기뻐하거나 성취감을 느끼질 못합니다. 마음 한 구석에 '정상적'이고 '문제없는' 삶에 대한 나름의 기준과 감각이 있기에 그 모든 행위중의 그는 늘 고통스럽고 힘겨워 보입니다. 아까 말했듯, 자기 인생이 이 때문에 파멸하리라는 걸 알면서도 썪어가는 팔에 주사를 놓는 중독자처럼요.
인간이 스스로가 벌거벗었다는 것을 - 그리고 그것이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바로 그들이 '선악과'를 먹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최초의 '죄'를 저질러 '타락'하는 순간 그들은 그때까지의 자신들이 무구한 존재였고, 이제 죄를 접하였기에 그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 여오하에 걸맞는 방식으로 이야기하면 이렇게 됩니다. '수치스러운 짓'을 저지르기 전까지 그들은 '수치'를 몰랐습니다. 그리고 브랜든은, 하나 하나 '선'을 넘어가면서 '수치'에 대단히 깊이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수치심의 늪에 빠진 거죠.
그러므로 그는 어찌 보면 그에게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존재들 - 공적인 삶으로는 같은 직장의 동료, 그리고 사적인 삶으로는 여동생 씨씨에 대해, 그들을 나름 아끼면서도 결코 손은 대지 못하는 상황에 놓이고 말아버린 것입니다.
씨씨의 말대로, '우리는 나쁜 사람들이 아닙니다.' 브랜든의 경우에도 그는 나쁜 사람은 아니예요. 그저 '잘못된 장소에 놓인'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생활에서 - 꼭 섹스가 아니더라도 - 작고 큰 온갖 수치스러운 일을 저지르는 우리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여러가지 꿈, 환상, 두려움, 공포를 갖고 있고, 그것들을 실행하거나 겪게 될 때 반사적으로 주위를 돌아봅니다. 우리 자신의 영혼과 마음 속에 내재시키고 있는 법전을 펴지요. 윤리, 도덕, 규범, 규율, 때로는 법 - 우리가 어떤 기준을 갖고 있건, 정도는 다를 뿐 '수치'가 우리와 함께 합니다.
'헝거'에서 극단의 육체적 굶주림과 목숨을 건 갈망을 교차시킨 감독은, '섹스중독'을 소재삼아 인간의 욕망과 수치심에 시선을 갖다댑니다.
모든 수치심의 가장 큰 근원 중 하나인 여동생의 전화를 무시하고 정신없이 - 사실상 도피하기 위해 - 섹스에 스스로를 매몰시켰던 브랜든은 그 까닭에 여동생을 거의 잃을 뻔 합니다. 그리고 그 여동생의 손목에는 이미 수없이 많은 시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는 자국들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제 그는 다시 한번 지하철에서, 그와 늘 시선이 마주치던 그 금발 여인을 마주합ㅂ니다. 왼손 네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낀 려린을, 처음과 달리 그는 좀더 굳은 표정으로 바라봅니다.
그는 과연 또 '선'을 넘고 '수치'의 영역에 들어갈까요? 감독은 그 모든 것을 극히 모호하게 처리해 버립니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참으로 현실적인 비유입니다. 아담과 이브 이래 인간은 '수치'를 알게 되었고, 그 모든 '수치'들은 매일 매일 불시에 우리에게 찾아오며, 우리는 그 때마다 실로 다양한 방식 - 수락과 거부를 포함한 모든 방식 - 으로 우리의 수치심을 실감하니까요.
차분하고, 생각을 하게 만들어 주는 좋은 영화였습니다. 배우들은 단역 한 명 한명까지 모두 연기가 훌륭했고, 대본은 단순하지만 분명했고, 카메라의 시선이 참으로 인상적이었습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시선'을 참으로 잘 잡아내는 카메라 워크가 좋았습니다.
이 영화가 성기 노출 등을 이유로 개봉되지 않는다면 전 그것이 '수치스러운' 일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진실로 달을 못 보고 손가락만 보는 것일테니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