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치계로 진출한 찰스, 이상은 다르지만 그를 잠시 돕고 떠나려다 인생 틀어잡힌 에릭입니다.
- 찰스는 뮤턴트를 지지하는 정책을 펴고 있지만 자신이 돌연변이인 건 숨기고 있어요 :D
- 연작입니다. 이번 글에는 화이트폰님의 리퀘가 들어갔습니다.
"아름다워."
그것은 매우 흔치 않은 일이었다.
"뭐가?"
"자네 눈이."
사무실을 향해 천천히 이동하던 휠체어가 순간 멈췄다. 찰스는 웃으며 지금 이 순간 에릭의 얼굴을 꼭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돌아보려 했는데, 머리를 돌려볼 것도 없이 눈앞에 그 눈동자가 나타났다. 청회색 눈동자는 그러나 놀랍도록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꾹 다문 입에 약간 찌푸리기까지 한 미간을 보니 화가 났나 싶기까지 했다. 그런 얼굴을 하고서, 에릭 렌셔는 찰스 프란시스 자비에에게 아주 냉정한 어조로 물었다.
"무슨 소리야, 그거."
"자네 눈동자는 정말 미치도록 아름다워. 내가 말 안했던가?"
햇볕에 따라 푸르게도 보였다 회색으로도 보였다 하는 눈동자가 찰스의 진의라도 탐색하려는 듯 빤히 이 쪽을 바라본다. 그 시선을 부드럽게 받아내며, 찰스는 다시 나지막하게 말했다. 달콤하게, 더없이 상냥하게.
"세상에는 수많은 푸른 눈이 있지만 자네같은 눈은 흔치 않아."
하지만 듣는 사람의 얼굴은 그 말에 담긴 진의 따위 상관없다는 듯 냉랭하기만 하다.
"찰스, 갑자기 왜 이러는지 모르겠는데,"
"그냥 그걸 알려주고 싶었어. 자네는 정말 아름다워."
에릭의 얼굴이 냉랭을 넘어 차갑게 얼어붙었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굳었다. 하지만 찰스는 그런 에릭의 기분을 풀어주려 하기는 커녕 오히려 빙글빙글 웃으며 말을 잇고 있었다. 지금 에릭이 왜 이리 표정이 싸늘해졌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이 보면 에릭이 찰스의 말에 화를 내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의 감정을 손에 쥘 수 있을 듯 감지할 수 있는 찰스의 답은 달랐다.
"갑자기 왜 이래. 내가 혹시 뭐 잘못한 거라도 있어?"
"아냐 친구 전혀 그런 건 없어. 그냥 말해주고 싶었을 뿐이야."
저 차갑게 굳은 얼굴은 너무 갑작스러운 말에 당황한 속내를 숨기기 위한 에릭의 필사적인 가면이다.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이 냉정하게만 보이는 남자가 약간이라도 그 냉랭함을 무너뜨리는 광경을 볼 수 있겠지만, 적어도 남들 보는 눈이 있는 여기선 그러면 안된다는 것쯤 찰스도 잘 알고 있었다.
"일단 가자고."
에릭이 일어섰다. 다시 휠체어 뒤로 돌아가 천천히 민다. 찰스는 대화를 계속 잇기엔 시간이 없다는 사실이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가 의원으로서 바쁜 나날을 보낼수록 단 둘이 이야기할 시간은 줄어든다. 암살 시도 이후 찰스의 의정활동은 이전보다 더 주목받게 되었고, 그는 점차 뮤턴트 인권 운동의 상징이 되어가고 있었다. 뮤턴트를 위해 일하는 것은 원래 원하던 바였지만 상징이 되어 떠받들리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아이콘이란 원래 동유럽의 성화를 의미하는 거라고. 난 예수도 성모 마리아도 아닌데.' 찰스가 불만을 담아 투덜거리고 있노라면 에릭은 어깨를 으쓱이며 받아치곤 했다. '어쩔 수 없잖아. 아마 그리라면 그릴걸?' '에릭!' '어차피 뮤턴트 분리주의자들은 이미 자네의 사진과 인형을 불태우고 있어. 인간들은-' '에릭, 스스로가 인간이 아닌 것처럼 말하지 마.' 에릭은 뭔가 더 말하고 싶어하는 듯 했지만 찰스의 얼굴을 보더니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에릭."
"왜."
"자네 말야..."
"또 이상한 소리 하면 저 분수에 휠체어 던져 버린다."
"그럼 얘기하면 안되겠는걸"
사실 요즘 에릭의 신경은 제법 예민해져 있었다. 지속적으로 찰스에게 날아드는 분리주의자들의 협박은 요즘 점점 더 심해져, 몇몇 메시지들은 명백히 위험한 의도를 내포하고 있었다. 찰스를 배신자, 괴물들의 보호자, 우두머리로 지칭하는 그런 편지나 쪽지들은 경고나 욕설을 넘어서서 노골적인 협박을 하고 있었다. 찰스는 이전의 총격 사건을 직접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메시지들을 대부분 무시해 버렸지만, 에릭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그 편지들의 발신처를 추적하고 주위를 살폈다. 지금 찰스의 옆에는 에릭 한 명만이 있지만, 이 평화로워 보이는 의회 앞뜰에도 사실 몇명인가의 경호원이 조심스레 찰스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얘기해 봐."
"응?"
"안 던질 테니 얘기해 보라고."
찰스는 피식 웃었다.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어."
"......"
"에릭?"
"미안해 할 거 하나도 없어."
아아, 그래. 늘 그렇게 말하지 내 친구. 하지만 난 늘 자네에게 미안해. 나만의 여정이었어야 할 일에 자네를 끌어들인 게 잘못은 아니었을까 하고. 하지만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정색을 하며 스스로 원한 길이었노라 말하는 자네가, 고맙고도 무섭다는 걸 자네는 알까.
"자네도 마찬가지야."
"무슨 소리야?"
"내게 미안해 할 필요 없어."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이름을 부르기 위해 숨을 들이킨 순간, 에릭이 허리춤에서 무전기를 꺼냈다.
"건너편, 전방 덤불에 뭔가 반짝였다. 알아봐."
그렇게 말하면서 몇 걸음 앞으로 나선다. 아마도 그 반짝인 것과 찰스 사이를 몸으로 가로막으려는 것이다. 찰스는 반사적으로 머리에 손을 올렸다. 가벼운 두통이라도 느끼는 듯 했지만 실상은 에릭이 주목하는 덤불 속에 누가 있는지, 어쩐 일인지 알아보려는 그 나름의 방식이었다. 에릭의 짐작대로 그 곳에는 사람이 있었다. 그 인간의 의사를 읽기 위해 마음 속으로 파고들어간 순간, 총성이 울렸다.
"에릭!"
살의를 느끼자마자 저격범의 의식을 끊어버렸지만 아슬아슬한 차이로 한발 늦었다. 새파랗게 질린 찰스 앞에서 에릭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에릭, 괜찮아? 에릭!"
비명을 지르며 몸을 숙이고 도망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무릎을 꿇은 채 비틀거리던 에릭이 한 손을 아래로 내렸다가 다시 올린다. 찰스의 눈에는 뒷모습만 보이는 까닭에 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갑작스레 힘껏 몸을 일으킨 에릭이 돌아서서야 몸 상태를 볼 수 있었다.
"맙소사, 에릭!"
다가온다. 한 발로 뛰다시피 해서 다가온 에릭의 허벅지에는 엄청난 상처가 나 있다. 일반적인 총상과 다르다. 울컥 피가 솟아나오는 것 보고서야 찰스는 하얗게 질려 손을 내밀었다. 어서, 어서 지혈하지 않으면 저 출혈량으로는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한발 다가온 에릭은 그대로 무너져 찰스의 온 몸을 끌어안았다. 남자가 힘겹게 숨을 내쉰다. 단 한 순간 모든 것이 악몽으로 변해버렸는데, 에릭이 그의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막을 수가...찰스, 막을 수가 없어."
"무슨 소리야, 에릭!"
"이 총알, 막을 수가..."
중얼거리던 에릭이 양 팔로 간신히 의자를 짚고 몸을 떼는 순간,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다시 한번 총성이 울린 것이다. 찰스의 눈앞에서 에릭의 어깨가 붉게 물들었다. 남자의 어깨에 박힌 총알은 몸 안에서 파열되며 큰 상처를 남겼고, 뜨거운 피가 찰스의 얼굴과 몸에 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자를 붙들고 있던 에릭의 팔은 움직이지 않는다. 한쪽 팔은 불가항력으로 인해 아래로 늘어졌지만, 다른 팔은 힘껏 버티고 서서 이름 모를 저격자들의 시야에서 찰스를 가리고 있다.
팔을 뻗었다. 눈을 크게 뜬 채 피투성이가 된 에릭의 몸을 끌어안은 찰스는 그대로 의식을 확장했다. 순간 모든 것이 멎었다.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던 사람들도, 달려가던 사람들도, 손가락으로 에릭 쪽을 가리키며 어딘가 외치던 사람들도, 사방에서 이 쪽을 노리던 저격자들과 총성을 향해 달려가던 경호원들까지도 모두 멈춰섰다. 마치 영화 속의 정지된 장면같은 광경이었지만, 모든것이 멈춰 있는 화면과는 달리 다른 모든 것들은 움직이고 있었다. 분수에서 흩날리는 물방울, 사람들의 머리칼을 스치는 바람, 그리고 찰스의 옷에까지 뜨겁게 번져가는 에릭의 피.
"찰스..."
에릭의 속삭임 한 마디에 모든 것이 바뀌었다. 서 있던 사람들 모두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죽은 것은 아니었지만 모두 한꺼번에 의식을 잃은 것은 틀림없었다. 도저히 선별할 수가 없었다. 누가 도망치는 사람인지, 누가 저격자인지, 앞으로 누가 더 총을 쏠 것인지 알 수가 없어서 모두 기절시킨 것이다. 그 비현실적인 침묵 속에서 에릭이 속삭이는 소리만이 찰스의 귀에 멍멍하게 들려 왔다.
"다행...이야..."
"에릭?"
"이번에는..."
"말 하지 마. 소리내서 말하지 않아도 돼!"
생각을 읽는다. 에릭의 머리 속에 떠오르는 말은 단 하나. '이번에는 지켜냈어.' 라는 의사가 전해져 와, 찰스는 아무 말도 못하고 이를 악물었다. 아냐, 그래선 안돼 에릭. 나 때문에 자네가 다쳐선 안돼. 날 지키는 것보다 자네의 목숨이 몇 배로 중요해. 적어도 내게는 그래.
"에릭, 조금만 더 버텨. 곧 구급차가 올 거야!"
찰스가 손쓸 수 있었던 거리 밖에까지 도망친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이 신고를 했는지 경찰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함께 구급차가 다가왔다. 에릭은 뭔가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그 말은 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했고, 숙련된 구급요원들의 손에 들것에 옮겨진 남자는 그대로 흰 차 안에 실려들어가 사라졌다.
"의원님, 괜찮으십니까? 다친 데 없으세요?"
다급한 질문에 찰스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피가..."라고 말하는 구급요원에게 한 손을 들어보이며 답한다.
"전 괜찮습니다. 다친 데 없어요."
"하지만 의원님."
"아까 그 사람을 살려주세요. 저 대신 총에 맞았습니다."
'대신'이라는 말을 할 때 그제서야 눈에 왈칵 눈물이 고였다. 사방에 사람들이 쓰러져 있기 때문인지, 구급요원은 거기까지만 듣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났다. 찰스는 양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선택을 후회한 적은 없다. 그 선택 때문에 불특정 다수의 악의에 목숨을 내맡기고 살아야 한다는 것도 온전히 납득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그 선택을 내린 자신이, 그리고 그 선택 탓에 움직이지 못하게 된 두 다리가 저주스러웠다.
그 선택 때문에 그가 총에 맞았다. 그리고 망가진 다리로는 지금 그와 함께 있을 수조차 없다. 사경을 헤매고 있을 텐데 손조차 붙들어 줄 수 없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 하나.
- 정치계로 진출한 찰스, 이상은 다르지만 그를 잠시 돕고 떠나려다 인생 틀어잡힌 에릭입니다.
- 찰스는 뮤턴트를 지지하는 정책을 펴고 있지만 자신이 돌연변이인 건 숨기고 있어요 :D
- 연작입니다. 이번 글은 화이트폰 님의 리퀘스트 요소를 넣기 위해 준비했습니다.
"찰스, 왜 그러나?"
"죄송합니다. 등이 쑤셔서 그래요, 로버트. 가끔 이러더군요."
2차대전 참전용사였던 하원의원은 그 심정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도 독일놈들이 박아둔 총알 자리가 가끔 욱신거리지. 빌어먹을, 절대 잊게 내버려 두질 않는다니까." 찰스는 웃으며 그에 동의했고, 두 의원은 서로의 정책에 지지를 보내기로 약속한 다음 자리를 파했다. 사무실에서 나오자 문 바로 옆에 붙어 있던 에릭이 자연스럽게 다가와 휠체어 손잡이를 잡는다. 모인 미간에 꾹 다물린 입술, 그의 마음을 읽을 필요조차 없어 보였다.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었어?"
"아니."
거짓말, 그렇게 판단했지만 그의 마음 안에 들어가지는 않았다. 만일 찰스가 꼭 알아야 할 일이라면 에릭이 먼저 입을 열어 알려줄 것이다.
"그냥 자네가 여기 있는 게 싫어."
바로 이렇게. 찰스는 실소를 터트리고 싶은 것을 참으며 그저 조용히 미소지었다. 에릭은 처음부터 정치계 진출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그는 미국인이 아니었고, 그에게 있어 정치란 기만, 술책, 그리고 그의 인생을 정신적으로 눌러죽인 '학살'과 깊이 연관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는 오래 전 인간 때문에 깊이 다친 짐승처럼 사람을 믿지 않았고, 특히 그 사람이 '다수' 일 때에는 더더욱 믿지 않았다. '당선될 때까지만.' 곁에 있어 달라는 부탁에 그의 대답은 이렇게나 짧았다. 당선된 뒤로도 그는 삼 개월을 더 기다려 주었고, 그동안 내내 찰스를 설득하기 위해 애썼다. '넌 의미없는 놀음을 하는 중이야. 저들이 그런 문제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히틀러도 처음에는 비웃음을 샀어. 어떻게 됐는지 봐.' 에릭에게 모든 정부는 똑같았고, 격론이 오가는 미국의 하원과 우뢰와 같은 박수를 보내는 나치스의 의회가 아무 차이가 없었다.
아마 지금의 에릭이 들으면 화낼 것이다. 총격 사건이 일어났을 때 찰스는 그가 가 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실 에릭은 그러한 암살 시도에 대해 몇번이나 경고했었다. 일종의 공포증 발현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무시해 버린 것은 바로 찰스 자신이었다. '이 곳은 전장이 아니야.' '충분히 전장이야. 넌 저들에게 선전포고를 했어.' '에릭, 제발! 내게 다가오는 사람들을 오스왈드 보듯 할 필요는 없잖아.' 그는 항복하듯 양손을 들었지만 그것은 오히려 불만의 표시라는 걸 찰스는 잘 알고 있었다. '원하는 대로, 의원님. 하지만 내가 늘 지켜줄 수만은 없잖아.' '오, 에릭-' '난 곧 떠날 거야. 내가 없으면 어쩌려고 그래. 그래 가지고 '살아 있는' 자네 기사를 언제까지 읽을 수 있겠어?' 그 고집스러운 얼굴에 찰스는 약간은 도전적으로 내뱉었다. '그만 좀 해. 기분은 이해하지만 여긴 미국이야.' 하지만 그를 공격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고집스레 이 쪽을 바라보는 청회색 눈동자의 주인에게 확신시키고 싶었을 뿐이다. '이 곳은 미국이야. 나치스 독일이 아니라고. 이 곳은 자유와 민주주의의 땅이야.' '그리고 대통령을 암살하고 말이지.' '에릭!' 고집스러운 얼굴로 이 쪽을 바라보던 그가 찰스의 얼굴을 양 손으로 붙들었다. '난 네게 늘 감사하고 있어.' '...에릭?' '넌 증오심밖에 모르던 날 구해줬어. 그리고 날 더 강하게 만들어 줬고.' '잠깐, 이건' 키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네가 죽는 게 싫어. 그러면 난 인간을 영원히 증오하게 될 거야.' 끌어안았던 기억이 난다. 그렇다. 사실 그것이 두려웠다. 자신의 곁에서 떠난 그가 인간을 증오하며 다시 그의 인생을 지배하던 그 증오 속으로 들어가 버릴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눈을 떴을 때 눈물이 났다. 깊은 마취에서 깨면서 지나치게 피를 잃었던 까닭에 너무 추워서 온 몸이 덜덜 떨리고 배에서는 끔찍한 통증이 엄습해 왔지만 그 때문에 운 것이 아니었다. 손이, 오직 손만이 따뜻했다. 침대 옆에 앉아 그가 깨어나기만 기다리다 잠들어 버린 에릭의 머리가 그 손 곁에 있었다. 천천히 손을 움직여 그의 머리를 가볍게 만져 보았을 때, 찰스는 세상이 부풀어올라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옆쪽으로 눈물이 흘러 떨어지자 시야가 간신히 맑아졌다.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쓰다듬고 또 쓰다듬는데도 에릭은 눈을 뜨지 못했다. "찰스!" 먼저 비명을 지른 것은 병실 안으로 들어오던 레이븐이었다.
비명소리가 울리고서야 에릭은 깨어서 찰스를 바라보았다. 허나 눈을 마주친 것은 단 한 순간, 곧바로 내리뜬 시선을 한 에릭은 머리를 쓰다듬던 찰스의 손을 잡아올리더니 아주 조용히 손바닥에 입을 맞추었다. 그 뒤로 며칠간 찰스는 그를 보지 못했고 - 애당초 가족밖에 면회할 수 없다는 것을 레이븐이 우겨서 들어올 수 있었다고 했다 - 그래서 그는 에릭의 입술이 닿았던 그 손을 내려다보며 에릭을 생각하곤 했다.
"난 자네가 떠난다고 해도 이젠 못 막겠어."
며칠 뒤, 간신히 그렇게 입을 열었을 때 에릭은 한동안 찰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내가 떠날 거라고 생각해?"
"자네 말대로 되었잖아. 바보라고 욕해도 좋아."
이미 선고는 내려졌다. 다시는 두 발로 땅을 딛을 수 없을 것이라는 얘기를 듣고도 찰스는 크게 동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에릭의 날카로운 눈까지 속이지는 못했다. 잠시 아래쪽을 헤매던 시선, 미소를 띠려다 애매하게 실패한 입가, 짧게 숨을 내쉬고 깊이 숨을 들이쉬는 모습까지 본 그는 충실한 경호원답게 그 자리에서는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게 바로 몇분 전 일이다. 찰스는 어떻게든 웃으려 애쓰며 다시 말했다. 가볍게, 아무렇지도 않게.
"그는, 날 쏜 사람은 뮤턴트들에게 딸을 잃었어."
"찰스."
암살범과 눈이 마주친 순간, 무방비한 찰스의 뇌 안으로 남자의 기억이 흘러들어왔다. 일부러 읽은 것은 아니다. 찰스를 바라보는 순간 그 중년 남자는 입을 꾹 다문 채 마음 속으로 외치고 있었다. '놈들과 한패다' '살인자' '괴물' 찰스와 같은 파란 눈을 가진 소녀가 그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다. 공포에 질린 채 절규하며.
"범인들은 잡히지 않았고, 그가 본 건... 그가 본 건 비명을 지르며 납치당하는 딸아이의 얼굴이었어. 그게 마지막이었던 거야."
"찰스!"
에릭이 찰스의 어깨를 꽉 붙들었다. 그만 말하라는 뜻이라는 걸 알면서도 말을 멈출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 말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레이븐에게도, 행크나 알렉스에게도 말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절규하는 소녀의 영상을 보며 아버지는 되뇌이고 있었다. '괴물' '살인자' 그는 찰스가 뮤턴트라는 걸 몰랐지만, 그가 뮤턴트 등록 법안을 반대한다는 것만으로도 그를 죽이고 싶어할 만큼 뮤턴트를 증오하고 있었다. 왜냐면,
"왜냐면...왜냐면," 호흡을 가다듬지 않고는 그 다음 말을 하기가 너무나 어려웠다. "왜냐면 딸의 머리는 끝내 발견되지 않았으니까."
어깨를 붙든 에릭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그 손에 얼굴을 기대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찰스는 말했다. 마음은 당장 입닥치고 그에게 기대라고 외치고 있었지만 도저히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에릭, 난... 나란 인간은 최저야."
"개소리."
그 아버지의 마음을 들여다 본 순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올라오는 총구를 보면서도 그를 멈추지 못했다. 순간 반강제로 들이밀어진 증오와 혐오와 살의는 그 정도로 강렬했고, 밀어닥치는 슬픔과 지옥같은 고통은 심장을 찌르고 들어왔다. 그럼에도 총에 맞는 순간 그의 머리 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내가 죽어서 그 법안이 부결된다면 그걸로 됐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에릭."
"찰스!"
"자네가 내 뒤를 이어주면 된다고...그걸로 족하다고."
"그런 소리 하지 마."
"죽도록 무서웠지만 그건 총 때문도 아니고 죽을까봐서도 아니었어. 알아?"
"......"
찰스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바로 앞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청회색 눈을 향해, 그가 자신을 증오하거나 경원하게 된다 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혹시라도 살아서 눈을 떴을 때 자네가 없을까봐, 인간을 증오하기로 결정하고 내 곁을 떠났을까봐 그게 두려웠어. 난 그런 인간이야."
언젠가 날려보낼 수밖에 없는 독수리를 붙들어 두고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이 말을 하는 것으로 다시 한번 족쇄를 채우게 된다는 것도 모르지 않았다. 가라고 말하면서 이리 토로하는 것은 정말 최저의 행동이다.
"에릭, 떠나는 게 나을지도 몰라. 자네와 난 달라. 어쩌면 내 꿈이 잘못된 걸지도 몰라. 그렇다면 누군가는 다른 길을 준비해야 해."
"자네의 꿈은 잘못돼 있어."
칼로 에는 듯한 통증이 가슴에 느껴진다. 하지만 잘 알고 있다. 이게 에릭이다. 가장 아픈 순간에도 절대 고개를 돌리지 않고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걸어오는 이다.
"그 멍청한 망상을 그만두지 않는 한 반드시 누군가는 자네를 죽이려고 할 거야."
"그렇겠지."
"그러니까 헛소리는 그만해. 난 여기 있을 거야."
놀라서 바라보았다. 차가운 파란 눈이, 날카롭게 뻗은 눈썹이, 반듯하게 내려온 콧날이, 그 밑에 굳게 다문 입이 그의 결심을 말해주고 있다.
"에릭..."
"다시는 그런 놈들이 널 해치지 못하게 할 거야. 찰스, 넌 순진하고 오만한 바보고 그 꿈은 말도 안되지만 나와는 상관 없는 얘기야. 그러니 떠나라는 헛소리는 받아들일 수 없어."
"에릭, 넌 분명히,"
에릭이 침대 위에 놓인 찰스의 다리에 손을 얹었다. 분명 눈으로는 그의 손이 얹힌 것이 보이는데 방치된 다리에는 아무 감각도 없다. 천천히 다리를 만지던 에릭이 강경하게 말했다.
"꿈도 꾸지 마. 이런 몸을 하고서 나더러 가라고?"
"에릭, 이건 네 책임이 아냐. 그리고 네가 걱정할 일도"
"앞으로는 내가 책임질 일이야."
어깨 위에 다시 손이 얹혔다. 이번에는 입술이 다가온다. 날카롭고 격렬한 키스에 찰스는 할 말을 잃고 에릭의 팔을 붙들며 매달렸다. 입술을 뗀 순간 에릭이 속삭였다.
"..."
찰스는 눈에 눈물이 핑 고이는 것을 알아채고는 눈을 감아 버렸다. 그의 나직한 속삭임에 기껏 이악물고 말했던 결심이 산산이 부서져 나간다. 날 떠나, 에릭. 난 분명 자네를 상처입히게 될 거야. 나를 지켜내건 그러지 못하건 간에 자네는 상처를 입겠지. 깃털은 꺾이고 날개는 부러질지도 몰라. 다시는 날 수 없을지도 몰라. 내게 갇히지 말고 날아가. 이 우리에서 벗어나 버려. 지금이 기회야. 지금 간다면 돌아보지 않을 수 있어. 자네도, 나도.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에릭이 뒤에서 말을 걸어왔다. 찰스는 잠시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과거의 상념에서 벗어나 옆을 돌아보았다. 여전히 보이는 것은 휠체어를 미는 손 뿐이다. 남자인데도 길고 보기 좋게 모양이 잡힌 우아한 손.
"아 그냥 좀."
사람들이 많다. 이런 곳에서 함부로 잡을 수는 없었지만, 지금 이 순간 찰스는 에릭의 손을 잡고 싶었다. 강한 손, 그를 건사하고 돌봐주는 손, 그를 사랑해 주는 손, 그를 지지해 주고 받쳐주는 손, 남들에게는 차가울지 몰라도 자신에게는 더없이 따뜻한 손을.
"빨리 은퇴하라고."
"힘들 걸. 아직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나 아니면 안된다고 믿는 건 노인들이나 하는 짓이야."
"난 갓난아이 때 이미 흰 머리를 달고 태어났거든."
"어울리네."
햇살이 따스했다. 찰스는 가볍게 웃으며 속으로만 조용히 기원했다. 다른 것은 바라지 않습니다. 이기적이라는 것도 잘 압니다. 하지만 제발, 그만은 저보다 더 오래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 AU입니다. 에릭찰스에릭, 쇼우는 없고, 에릭을 찰스가 주웠다는 설정만 유지됩니다.
- 정치계로 진출한 찰스, 이상은 다르지만 그를 잠시 돕고 떠나려다 인생 틀어잡힌 에릭입니다.
- 찰스는 뮤턴트를 지지하는 정책을 펴고 있지만 자신이 돌연변이인 건 숨기고 있어요 :D
- 연작입니다. 이번 글은 스칼렛 위치님의 리퀘스트 요소가 들어가 있습니다.
"등록법을 반대하신다는 겁니까?"
"저는 우리 국민들이 어떤 이유로건 '구별' 되길 바라지 않습니다. 그것이 피부색이건 성별이건 돌연변이 여부건 간에 그들은 모두 성실하게 하루를 살아가는 국민입니다."
"그렇습니다만 자비에 의원님, 범죄를 저지르는 뮤턴트들에 대해 따로 대책이 없다는 지적이 있는데요."
"뮤턴트만 범죄를 저지르는 게 아닙니다. 범죄에 대한 방지책은 우리 모두가 고민해야 할 문제죠. '함께' 말입니다."
'함께' 라는 말에 방점이 찍혀 있다는 것을 누구나 느낄 수 있었다. 계속되는 의정활동으로 약간 창백해진 얼굴을 꿋꿋이 들고 답하던 찰스 자비에는 이제 질문은 끝이라는 뜻으로 손을 들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럼에도 쏟아지는 기자들의 질문과 다가오는 마이크를 밀어내며 경호원의 도움을 받아 어떻게든 앞으로 다가가려던 움직임은 풍채 좋은 한 남성에 의해 막혔다.
"의원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질문은 끝났는데요."
짧게 답하며 고개를 든 자비에 의원의 시선이 그 남자의 것과 얽혔다. 묵묵히 자비에를 내려다 보던 남자의 입매가 꾹 눌렸고, 그를 바라보던 의원은 서서히 경악에 찬 얼굴이 되어 입을 벌렸다. 의원이 손을 들어 남자의 어깨를 붙든다. 심상치 않은 기색에 의원 주변의 기자들을 막던 경호원이 고개를 돌려 남자 쪽으로 손을 뻗는다. 남자가 손을 올렸고, 총을 발견한 누군가가 비명을 지르려 했다. 시간은 끔찍하게 느리게 흘렀고, 의원이 잠깐 숨을 들이키고 뭔가를 말하려는 순간 총성이 울렸다.
에릭은 눈을 떴다. 방금 울렸던 총성이 아직도 낯익은 방 천장에 울리는 것 같아 두 손을 들어올려 눈을 가리고 잠깐 세게 비볐다. 꿈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인식하고 긴 한숨과 함께 몸을 일으킨다. 눈을 감으면 다시 한번 선명하게 그 때의 모습이 눈에 그려졌다. 몸에 한 발, 그리고 가슴에 제대로 한 발 더 쏘기 위해 남자는 손을 들었다. 에릭은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고 총은 폭발했다. 사람들의 비명소리와 함께 그는 쓰러졌지만, 에릭의 눈에 들어온 것은 단 한 사람, 배를 피로 적시며 쓰러지는 찰스 프란시스 자비에 뿐이었다.
총알을 뽑아낼까 했지만 오히려 더 위험하다는 생각에 참았다. 안아들자, 아직 의식이 있는지 시선을 에릭의 얼굴로 돌린 찰스가 팔을 에릭의 목에 감으려 했다. 하지만 그 팔은 피에 젖은 채 힘없이 늘어졌고, 푸른 눈이 눈꺼풀 안으로 말려들어가며 천천히 눈을 감는 것을 본 에릭은 다급히 그의 이름을 외쳤다. '정신 차려! 의식을 잃어선 안돼!' 누군가 구급차를 외쳤지만 그보다 한발 먼저 에릭은 의원용 리무진에 올라탔다. 쓸데없이 넓은 좌석이 지금만은 더없이 고마웠다.
수행원 한 명이 건넨 구급상자에서 압박붕대를 꺼냈다. 차마 둘러감지는 못하고 환부에 대고 꾹 눌렀다. 거의 의식을 잃은 것 같던 찰스가 짧게 비명을 질렀고, 에릭은 그가 고통스러워 한다는 사실보다 그에게 의식이 있음을 감사했다. "빨리 병원으로! 어서!" 기사는 이미 최대속도를 밟고 있었지만 에릭은 으르렁대며 소리쳤다. 머리를 감싸안자 꾹 닫혀 있던 눈꺼풀이 바르르 떨리더니 고통스럽게 열린다. "에릭..." "아무 말 하지 마." 짧게 말을 잘라버린 에릭은 무서운 표정으로 앞을 노려보며 이를 악물었다. 실책이다. 돌이킬 수 없는 실책이다. 그를 지키지 못했다. "에릭." 그가 다시 한번 말했다. 시선을 내리자 식은땀이 가득한 얼굴이 그를 기묘할 정도로 평온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고통의 그림자가 깊이 새겨져 있으면서도 잔잔한 호수 같은 눈에 에릭은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을 맛보아야만 했다. 안돼. 내 눈앞에서 떠날 꿈도 꾸지 마. 마치 지금이라도 곧 미련 없이 떠나버릴 것 같은 표정으로 바라보지 말란 말이야.
"얘기하고 싶었던 게 있었어."
"닥치고 병원에 가서 수술할 생각이나 해."
"내 친구."
다정하게 부른 그 단어에는 심지어 웃음기마저 들어가 있었다. 에릭은 눈가에 뭔가 고이는 것을 발견하고 두어번 눈을 깜박였다. 찰스의 얼굴에 그게 떨어지고 나서야 그는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손을 들어 눈가를 누르자 손에 묻은 피 냄새가 확 끼쳐 왔다. 피, 찰스의 피.
"난 자네가... 내 뜻을 이어줬으면 좋겠어."
"개소리 하지 마."
"레이븐을...레이븐을 도와줘."
에릭은 욕설을 내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다시 눈물이 흘러 떨어진다. 하필이면 찰스의 눈가에 떨어진 그 눈물은 이미 젖어있는 눈에 흘러들어가 다시 얼굴 옆으로 떨어졌다. 병원 앞에 차가 도착했고, 이미 연락을 받은 것인지 응급실 직원과 의사들이 달려나와 찰스를 침상 위에 누이고 다급히 달려들어갔다. 배에 얹혀 있던 압박붕대가 떨어져 피에 젖은채 바닥에 뒹굴었고, 에릭은 따라 들어가는 것조차 잊고 차 뒤에 앉아서 울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무릎 위에 얹혀 있던 남자의 체온이 서서히 사라져갔고, 어쩌면 그것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시 한번 눈물이 흘렀다.
이를 악물고 버텨 보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서야 차에서 내릴 수 있었다. 또다시 지키지 못했고, 또다시 눈 앞에서 가장 소중한 이가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꼴을 보아야만 했다. 아주 오래 전 간신히 흉터만 남았던 상흔 위에 생생한 상처가 덧붙어, 에릭은 이를 꽉 악물고 한 걸음 한 걸음 병원 쪽으로 다가가며 다짐했다. 만일 찰스가 목숨을 잃는다면 인간들은 지옥을 보게 될 것이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를 앗아가 버린 데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만일 그가 살아남는다면?
마음속에 던져진 질문에 에릭은 희망의 불꽃을 품었다. 살아남는다면, 혹시라도 그가 에릭 자신을 둘러싼 저주를 걷어치우고 살아남는다면. 손을 내려다보았다. 붉은 피에 젖은 손은 평소 그가 상상하던 그대로였다. 이제껏 살아오면서 그 손은 쓰레기들의 피에 늘 젖어 왔다. 하지만 지금 이 손에 말라붙은 것은 바로 찰스의 피였다. 이 피에 맹세코, 반드시.
그것이 벌써 2년 전. 눈을 떠서 바라본 손에는 아무것도 묻어 있지 않다. 에릭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주먹을 쥐고 다시 손을 폈다. 고개를 돌려 시계를 보고, 새벽 6시임을 깨닫고 아직 울리지 않은 알람을 끄며 일어선다. 평소보다 조금 이른 기상이었지만 준비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다. 샤워와 세수와 면도를 마치고 옷을 걸치고 방 밖으로 나간다. 그의 침실에 당도하여, 가볍게 노크하고 인기척을 기다린다. 잠시동안의 침묵에 쓰게 미소짓고는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가 그를 깨운다.
"찰스, 일어나."
어이없게도 어린애처럼 베개를 끌어안은 채 잠든 남자의 어깨를 잡고 흔들자, 아직 잠에서 덜 깬 푸른 눈동자가 살며시 드러났다가 다시 사라진다. 갈색 머리를 쓰다듬자 기분 좋은 고양이처럼 나지막하게 신음을 내뱉더니 눈을 감은 채 잠에 취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온다.
"어제 보고서 다 읽느라 두시까지 못 잤어."
"안됐군. 그래도 지금은 일어나야 해."
"알아...아는데...잠깐만..."
목소리가 다시 잦아든다. 깊이 숨을 내쉬는 꼴을 보니 다시 잠에 빠졌다. 에릭은 천천히 손을 내려 부드럽고 따뜻한 볼의 감촉을 느끼며 잠시 자비심 있게 기다려 주었다. 그리고 속으로 스물까지 센 뒤, 이번에는 이마를 쓸며 다시 말했다.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되는 거 알잖아. 비서들을 기다리게 할 셈이야?"
"...에릭."
"음?"
"자넨 악마야."
"칭찬 고마워."
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지만 이번에는 분명 의식이 깨어 있다. 천천히 눈을 뜬 찰스는 양 손을 짚으며 상반신을 일으키고는 언제나 그렇듯 에릭을 향해 손을 뻗었다. 겨드랑이 사이로 팔을 넣고 총격사건 이후 영영 움직일 수 없는 무릎 밑으로 손을 넣어 가볍게 들어올려 욕실 쪽으로 걸어간다.
"예전에도 얘기했지만 이 정도는 혼자 할 수 있어."
"알고 있어. 그럼 제 시간 맞게 일찍 일어나던가."
찰스는 포기한 듯 피식 웃었다. 그는 아마 모를 것이다. 그의 능력을 생각한다면 알 지도 모르지만 어쨌건 모를 것이다. 그가 살아 있는 한 순간 한 순간이 에릭에게 어떤 의미인지, 더이상 움직이지 못하는 다리를 바라보며 다시금 그 맹세를 되새기는 심정이 어떤 것인지도.
"그럼 잘 부탁해."
에릭은 찰스의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댔다 떼었다. 개조된 욕실의 받침대에 찰스를 내려놓고 몸을 돌리려는데, 찰스의 팔이 그의 목에 다시 한번 감겨온다. 어떤 의미인지 알아챈 에릭은 순순히 그가 원하는 대로 키스를 받아주었다. 혀가 섞이고, 키스를 마친 찰스가 잠시 에릭의 목에 기대어 눈을 감는다. 나지막한 속삭임을 들으며, 에릭은 다시 한번 그에게 키스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늘 미안해."
"헛소리."
스스로에게 맹세했다. 찰스의 이상에 동조하지 못하던 자신 따위 버리겠다고. 그가 살 수만 있다면,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그의 소원대로 결코 떠나는 일 없이 그와 함께 하겠노라고. 그의 연인, 동료, 반려, 혹은 그 무엇도 못 되더라도 반드시 그의 곁에 붙어서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꼭 지켜내고야 말겠다고. 이번 한 번만, 단 한 번만 운명이 자신을 향해 호의를 베풀어 준다면 그 한 번의 호의로 영혼을 팔겠노라고. 그리고 그 맹세의 대가가 바로 이렇게 눈 앞에서 숨쉬고 있다. 그의 다리는 죽었지만, 어쨌건 그는 살아있지 않은가.
샤워하기 위한 준비를 마친 다음 욕실 밖으로 나갔다. 가정부가 준비한 아침을 들여오고 저택의 각 전화기를 체크한다. 간밤에 아무 일 없었는지 얘기를 듣고 추가로 살펴야 할 보안 사항이 있으면 그걸 검토한다. 비서와 이야기하여 하루의 일정을 숙지하고 위험 지역은 없을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논한다. 이제는 익숙한 일과가 되어 버린 일이다. 그를 위해서라면, 그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자비에 가의 젊은 마부는 별로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약간 부아가 난 듯한 얼굴로 검은 빵을 우물거리고 있었는데, 사실 그건 예의바른 태도가 아니었다. 어느 저택이건 식사 시간 즈음 해서 방문하는 손님의 고용인에게는 차와 빵, 혹은 간략한 식사 정도는 대접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고, 그 기준으로 미루어 볼 때 티타임을 넘어 명백히 저녁 시간대에 방문한 이 마부에게 빵과 간단한 요리, 그리고 차가 나온 것은 나쁘지 않은 일이었건만, 게다가 세바스찬 쇼우의 저택에서 제공한 저녁이 꽤 괜찮은 것임에도 그의 표정은 영 풀릴 줄을 몰랐던 것이다.
고용인들이 부엌에 테이블을 내주겠다고 했는데도 마치 말이 없어질까 걱정이라도 되는 듯 냄새나는 마구간 한 구석에서 혈통 좋은 말들을 노려보며 빵을 씹어삼키는 그의 입에서는 가끔 중얼거림이 새어나왔는데, '찰스...' '가만 두나 봐라' '검은 빵이라니!' 등의 의미모를 말이 튀어나왔다. 그 목소리는 그 나이대의 젊은 남자 치고도 너무 가늘고 높아서, 모르는 사람이 보면 남장한 여자인가 하고 생각할 정도였다.
어쨌건 그렇듯 검은 빵에 투덜대는 것과는 영 딴판인 태도로 스튜 그릇 바닥까지 빵으로 싹싹 닦아먹은 청년은, 마지막 빵 조각을 입에 밀어넣고 우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난 듯 안 난듯 영 애매하게 붙은 콧수염에 붙은 빵 부스러기와 스튜 국물을 냅킨으로 닦고, 하녀가 가져다 준 쟁반에 다 쓴 냅킨을 쓱 얹어놓고 주위를 둘러본다. 마구간에는 말들 뿐이고, 이 저택의 마부와 하녀들은 모두 식사를 하고 있거나 저택에서 벌어지는 연회의 시중을 드느라 정신없을 것이다. 아까 찰스가 들어갈 때 보니 집사는 따로 없거나 적어도 자리를 비운 것으로 보였고, 아마도 비서나 하우스와이프인 듯한 흰 옷의 여자 - 그 여자를 생각하는 순간 마부의 이마가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 는 찰스와 함께 저택 안으로 들어간 듯 보였다.
"즉, 돌아다녀도 된다는 거지."
가볍게 중얼거린 청년은 주위를 흘끗 둘러보고는 씩 웃었다. 좋아, 자유다.
그 순간 청년의 얼굴이 '바뀌었다.' 목울대가 내려앉았다 다시 올라오고, 어딜 봐도 평범하고 약간 신경질적인 느낌이었던 남자의 얼굴 근육이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움직이지 않을 방식으로 움직인다. 광대뼈가 내려가고 볼 살이 오르고, 좁고 높던 비량이 작달막하게 바뀌었다. 뾰족했던 턱 라인과 푹 꺼졌던 눈두덩도 아까와는 다르다. 입고 있는 옷은 분명 마부의 옷이었는데, 서 있는 것은 전혀 다른 얼굴을 한 청년이었다. 그는 품에서 남자가 지니는 물건 치고는 너무 작은데다, 예쁘게 에나멜 세공까지 되어 있는 거울을 꺼내 얼굴을 들여다보고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부의 외투를 벗는다. 바지는 당연히 검은색 정장이었지만 외투 안에서 드러난 조끼와 셔츠는 대단한 고급품이었다. 이 정도면 하인을 마주친다 해도 길을 잃고 헤매는 연회장 손님 쯤으로 위장할 수 있을 것이다. 원래는 연회가 있을 것을 예측하지 못한 터라 찰스로 가장하고 돌아다닐 예정이었지만, 오히려 소란한 연회가 있다니 잘 되었다.
마부는 - 아니, 찰스의 '사촌여동생' 레이븐 양은 속으로만 쾌재를 부르며 마구간 밖으로 나섰다. 온 몸의 근육을 남들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움직여 외모를 바꿀 수 있는 이 '능력'은, 어렸을 때엔 그저 못생긴 외모에 딸린 저주일 뿐이었지만 이제는 달랐다. 찰스를 만나 유복한 삶을 살게 되고, 이 '능력'의 가능성을 깨달은 찰스의 제안에 의해 저주가 아닌 '선물'이라는 생각으로 훈련을 지속하고, 그리고 흥미진진한 사건들의 세계로 빠져들면서 이 '능력'은 수도 없이 도움이 되어 주었다.
하지만 그래도, 아까의 시시한 검은 빵에 대한 대가는 반드시 받을 것이다. 프랑스 파티셰가 조리한 최고의 디저트로 말이지. 사정없이 미안해하다가 결국은 그 보상을 약속할 찰스의 얼굴을 떠올리며, 레이븐은 쾌재를 불렀다. 뭐, 원래 찰스의 계획은 이 곳 고용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며 이 저택에 대해 캐 보라는 것이었지만 그것뿐이라면 재미없다. 무엇보다도 대강 하녀들 표정만 봐도 견적이 나오는 문제인데, 이 곳 하녀나 하인들을 구슬러 저택 주인의 사정을 알아내는 건 절대 녹록치 않은 일일 것이다. 칙칙한 아줌마 아저씨들을 상대로 뭘 얻어내느니 차라리 직접 가서 뒤지고 말지.
그렇게, 레이븐은 저택 안으로 조심스레 들어갔다. 굳이 정문으로 갈 필요도 없었다. 고용인들이 사용하는 뒷문은 어디에나 널려 있었고, '아래층'의 하인들은 '위층'의 높으신 분들이 가끔 길을 잃어 자신들의 구역으로 들어온다 해도 그저 당황하면서 보내줄테니 말이지.
수수한 문을 살짝 열고 들어가, 조심스레 기척을 확인해 가며 발걸음을 옮겼다. 건너편에 기척이 없는 이상 발걸음 소리는 내지 않을 생각이었다. 물론 기척이 있다면 오히려 당당히 발소리를 내며 돌아다녀야겠지만, 쇼우 저택의 복도 카펫은 의외로 두꺼워서 발소리나 제대로 나겠나 싶었다. 하인들의 공간을 지나고 나니 아마도 1층 거실인 듯한 공간이 펼쳐진다. 역시 연회 때문인지 복도를 돌아다니는 하인은 없었고, 레이븐은 잽싸게 손님인 척 당당한 태도로 몸가짐을 바꾸고 계단을 올라갔다.
보통 사교계 누군가의 활동에 대해 알고 싶다면 뒤져봐야 할 곳은 두 곳이다. 하나는 편지함, 다른 하나는 서재. 편지함이 있는 문가는 문지기나 하인들이 있을 가능성이 높고, 거기서 무언가를 뒤적거리는 모습을 보여봤자 좋을 일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목표 지점은 간단하다. 각종 서류와 초대장과 편지가 모여있는 곳, 즉 서재로 숨어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계단 위로 올라간 레이븐은 비어 있는 복도를 보고 미소를 떠올렸다. 대부분의 하인들은 접객중이거나 식사중일 거라는 짐작이 맞았다. 조심스레 살펴본 2층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마호가니로 된 두터운 문들만 방문객을 맞이하며 점잖게 서 있었고, 그녀가 할 일이라고는 거기서 서재에 해당할 법한 문을 골라 안을 탐색해 보는 것 뿐이었다.
서재는 보통 가장 큰 방이다. 양쪽 복도의 문 간격을 볼 때 가장 가능성이 높은 곳은 바로 복도 끝 문. 레이븐은 그 곳을 향해 다가가 조심스레 열쇠구멍으로 안을 탐색하며 혹시나 인기척이 나나 싶어 다시 한번 뒤를 살피고 손잡이를 잡았다. 누군가 열쇠로 잠그고 나갔는지 두터운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조끼 밑, 바지춤에서 작은 쇠꼬챙이를 두개 꺼냈다. 한 개는 쑥 밀어넣고 다른 한 개로 조심스레 잠금장치를 탐색한다. 마침내 찰칵, 소리와 함께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고, 상아로 세공된 문 손잡이를 잡은 그녀는 최대한 조용히 그것을 잡아당기고 흐르는 듯한 유연한 태도로 문 안으로 잽싸게 들어갔다.
완벽한 침입이었다. 런던 시내의 어떤 노련한 도둑이라 해도 그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단순히 이 곳에 들어왔다는 것만으로 기뻐할 만큼 하수가 아니었다. 잽싸게 돌아서서 다시 한번 아까의 도구로 조심스레 문을 잠그고 나서야,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놓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나지막히 읊조리며 돌아섰다. "좋아, 미스터 쇼우, 당신의 비밀은 뭐죠?" 청년으로 보이는 외모 치고는 너무 가느다란 목소리가 서재에 울렸고, 방금 너무 크게 중얼거렸다고 생각한 레이븐은 쿡쿡거리며 빙글 돌아서서 날 듯한 걸음으로 책상을 향해 다가갔다.
세바스찬 쇼우는 정리 정돈을 매우 좋아하는 성격으로 보였다. 문과 마찬가지로 마호가니로 된 넓은 책상 위에는 상아로 된 두꺼운 문진 아래 곱게 정돈된 고급지가 놓여 있었고, 그 바로 위쪽에는 수정으로 된 잉크병과 은장식이 달린 상아 펜이 흰색의 옥이나 대리석 쯤으로 보이는 전용 받침대에 고정되어 있었다. 평소 보석을 너무 좋아한다고 나무라던 찰스라면 야단스럽다고 눈을 찌푸릴만한 화려한 소품들이었지만 반짝이는 것을 몹시 사랑하는 레이븐으로서는 꼭 만져보고 싶을 만큼 매력적인 물건들이기도 했다. 물론 지문을 남길 바보는 아니지만.
책상 위에는 그렇게 서류 및 편지 작성을 위한 간단한 도구와 아마도 쇼우가 읽을 법한 두터운 외국어 책 두어권밖에 없었고, 흥미로운 서류가 들어있을 법 한 서랍은 당연히도 잠겨 있었다. 잠시 실망감에 어깨를 늘어뜨린 레이븐은 서랍의 잠금 장치를 살펴 본 다음, 다시 한번 쇠꼬챙이를 꺼내 작업에 들어갔다. 아니, 들어가려 했다.
"?!"
레이븐은 경악했다. 그녀가 손을 대기도 전에 철컥 소리와 함께 잠금장치가 해제되었을 뿐 아니라, 깜짝 놀라 손을 떼자마자 서랍이 스르륵 열리기까지 했던 것이다. 비명을 지르려다 간신히 참았는데, 이번에는 목 뒤쪽으로 뭔가 선뜩한 감각이 느껴진다. 날카롭고 차가운 감각이.
"소리 지르지 마. 컨트롤이 흐트러지면 네가 죽을 수도 있으니까."
자기도 모르게 양손으로 입을 막았다. 안 그러면 정말 비명을 질러 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방금 어깨 너머에서 들려온 남자의 목소리는 나지막했지만 정말 숨막히게 차가워서, 듣는 것만으로도 목 뒤의 뾰족한 것이 박혀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무서웠다.
"손 들어."
한 손에 장치를 든 채 였지만 레이븐은 순순히 양 손을 들었다. 외모는 완벽한 남자처럼 보였지만 힘은 어쩔 수 없다. 이렇게 불리한 상황에서 섣불리 반항해 봤자 아무 의미 없을 것은 뻔했다. 대체 누굴까? 일단 쇼우는 아닐 것이다. 그는 지금 이 집 어딘가에서 찰스를 만나고 있을 테니까. 이 집 하인도 아니다. 하인이라면 사람 부르는 줄을 당기거나 큰 소리로 사람들을 부를 테니까. 문을 여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으니 밖에서 들어온 사람도 아니고, 아마도 안에 계속 있던 자일 텐데 처음부터 지금까지 아무런 기척도 없이 조용히 기다리다 다가온 거라면 분명 레이븐만큼이나, 아니면 그 이상으로 기척을 죽이는데 익숙한 녀석이라는 얘기가 된다.
"너...너 뭐야?"
자기도 모르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 남자 치고는 묘하게 높은 목소리였지만 상대는 전혀 개의치 않는 것으로 보였다. "질문을 하는 건 네가 아냐. 나지." 역시 뒤에서는 기척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럴 수는 없다. 지금 레이븐의 목에 와 닿은 것이 정말 존재하는 칼날이라면 저 남자는 적어도 레이븐 바로 뒤에 서 있어야 한다. 자기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려는데 다시 한번 차가운 날붙이가 목 뒤에 꾹 눌렸다. 상처를 줄 정도의 움직임은 아니었지만 돌아보려던 고개를 얼어붙게 만드는 데에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난 이 방 어디서건 네 목을 날려버릴 수 있어. 내 말 이해했나?"
이해는 개뿔이! 당장에라도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레이븐은 피가 싸늘하게 식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음에도 간신히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그 와중에도 남자는 멀리서 이 쪽을 향해 얘기하고 있었다. 동료라도 있는 것일까? 어떻게 저렇게 먼 거리에 서서 바로 자신의 목 뒤에 칼날을 댈 수 있단 말인가?
"귀가 먼 건 아닐텐데. 시체로 발견되고 싶지 않다면 그대로 천천히 뒤돌아서도록. 아주 천천히."
거의 냉혹하게까지 들리는 목소리에는 어디의 것인지 모를 외국 액센트가 섞여 있다. 레이븐은 일단 남자의 말대로 최대한 진정하려 애쓰며 느리게 몸을 움직여 돌아섰다. 놈의 일행이 몇 명일지 몰라도, 어떻게든 이 위기를 무사히 모면해 볼 방법을 생각해 내야만 한다. 그리고 돌아선 순간 그녀는 가볍게 숨을 삼켰다.
"말해 봐. 넌 여기 뭘 찾으러 온 거지?"
레이븐은 그대로 입을 벌렸다가 아무 말도 못한 채 다시 꾹 다물었다. 등줄기에 새삼 소름이 돋는다. 그 자, 바로 로열 오페라 극장에서 찰스를 향해 칼을 던진 그 남자가 얼음장같이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오, 찰스!'
이번만큼은 그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이 후회되었다. 그렇게 마음 속으로 찰스를 애타게 부르던 레이븐의 얼굴이 새삼 파랗게 질렸다. 날카로운 칼날 때문도 아니었고, 무서운 기색으로 이 쪽을 노려보는 남자 때문도 아니었다. 정확히 말한다면, 레이븐의 목에 바짝 붙은 나이프가 남자의 손에 들려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마치 악령이라도 붙은 것처럼, 혹은 나이프 자체가 살아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 예리한 쇠붙이는 날을 번득이며 레이븐의 목 바로 밑에 둥둥 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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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치뜰때 참 왜 이리 이쁘지 말입니다. 쇼우가 에릭 볼때마다 입 찢어지는 이유 알 법하지 말입니다.
이안 경은 왜 이리 귀여우시대요.
미국에 살았었다면서 나 미국액센트 있나요? 하고 물어보는, 저 앙큼한 독일계 아이리쉬 영국인 같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