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울시장 당선 기념 배포본이었습니다.
2. 정치에 대한 패러디가 약간 들어가 있지만 그게 핵심은 아닙니다. 중요한건 에릭과 찰스죠!
3. 동화 라푼젤 패러디입니다.
탑이 있고 마녀가 살고 있었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마법사가 살고 있었답니다. 슈미트인지 쇼우인지 할로우맨인지 케빈 베이컨인지, 전해지는 이름만 수십가지인 무서운 남자였습니다. 그렇게 이름이 여러가지인 이유는 아주 오래 오래 살아서라고 하더군요. 아무튼 이 마법사는 나름 부업으로 유기농 상추를 재배하고 있었습니다. "무엇을 낳을까요 두근두근 돌연변이 상추"라는 기괴한 이름의 상추는 유전자 변형 채소인 주제에 엄청난 고가였기 때문에 정상적이라면 절대 팔리지 않았겠지만, '절대 그럴 분이 아니신' 국왕 전하가 강바닥을 다 들어엎는 바람에 채소밭이 씨가 마르다시피 한 요즘에는 날개돋친 듯 팔리고 있었습니다.
상추 및 각종 야채 품귀 현상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는 상황에서, 특히 괴로워하던 한 아주머니가 있었습니다. 아주머니가 그토록 괴로워한 이유는 사실 여러가지였어요. 그 분이 원래는 채식주의자였다는 점, 하지만 어째서인가 단백질을 달라고 무척 보채는 뱃속의 아기 때문에 유제품과 달걀 정도는 어떻게든 먹고 있었지만, 아무튼 채소가 너무나도 먹고 싶었다는 점, 마지막으로 그럼에도 가끔은 미치도록 채소가 먹고 싶었다는 점을 들 수 있겠습니다. 어쨌건 아주머니는 매일 매일 마법사의 상추밭을 바라보며 말라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아주머니를 보다 못한 남편이 결국 상추를 서리하러 가게 된 거야 우리 모두가 짐작할 수 있는 일이지요. 물론 즉각, 시뻘건 피부를 가진 악마같은 남자에게 붙들려 곧장 마법사 앞으로 끌려가게 되었구요.
"내 상추를 훔치려 하다니 유감이군." 이라고 웃으며 말한 마법사는 즉각 부부에게 상추 훔치는 것을 "재고려" 해 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거절 못할 거래를 걸었지요.
마법사는 말했습니다. 자기는 일-생동안 너무나 착해서 손해만 보고 산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정-말 성격이 좋은 나니까, 나님이니까 아주머니를 두꺼비로 만들거나 아저씨를 통돼지로 만들어 구워 먹어 버리거나 하지 않는 거라고요. 그리고, 새파랗게 질린 부부에게 선언했습니다. 두 부부가 정답게 한 쌍의 소가 되어 다정하게 함께 쟁기를 끌며 송아지 낳고 일가족이 행복하게 살겠는지, 아니면 이번에 낳는 아기를 자신에게 넘겨주고 편안하게 살겠는지 선택을 하라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슬쩍 귀띔하길, 요즘 밭 가는 하인들이 야들야들한 송아지 고기가 먹고 싶어 죽을 지경이라고 했습니다.
부부는 필사적으로 자비를 간청했지만 마법사는 절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아기를 넘겨주겠다고 약속하면 일평생 무한 상추 이용권을 주겠다고 했을 뿐이죠. 그리고는 당장이라도 두 부부를 소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듯 지팡이를 움찔거리는 모습에, 결국 부부는 아기를 넘겨주겠다고 약속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분이 좋아진 마법사는 부부가 아기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것까지는 허락해 주었답니다.
"미쳤어요? 육아가 얼마나 귀찮은 일인데 그래요?" 라는 이웃 마녀 엠마의 말에 마법사 쇼우 씨는 웃으며 답했습니다. "아기 때무터 내 취향으로 키워서 성년때 따먹기 위해서 뭔 고생을 못 하겠어?" 그리고 '뭐 이런 변태새끼가 다 있나' 라는 눈으로 쳐다보는 엠마에게 이런 말도 했죠. "어차피 네가 많이 도와 줄 거잖아. 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녀니까 말야." 제길, 엠마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말했습니다. "순면 기저귀 빨래는 니가 하세요." 어차피 안 하겠지만 말이죠.
그로부처 이십여년 후.
명랑한 말발굽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말 잔등에 올라앉은 청년은 꽤나 즐거운 듯 콧노래를 불러제끼고 있었습니다. 부드러운 망토를 두른 여행복 차림에 칼 한 자루만 허리에 차고, 멋진 가죽 부츠에 은 박차를 단 푸른 눈동자의 청년은 그야말로 즐거워 견딜 수 없다는 듯 연신 노래를 흥얼거리며 길을 재촉합니다.
"분명 '계시'에 적혀 있었단 말야. 내 나이 20세가 되는 해, 세상에서 가장 부자인 마법사의 영지에서 내 인연을 만나게 될 거라고."
그런 흐리멍텅한 계시 하나 믿고 여기까지 온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무려 지난달 따로 점쳐본 점괘는 '연인'이었고, 드디어 솔로 생활 청산인가 하고 기뻐서 돌아오는 청년에게 길거리의 돗자리 사주 할아버지가 외쳤던 것입니다.
"자네, 동쪽에서 허리 가는 미인을 만날 팔자야! 죽이게 섹시한데다 무려 처녀일 거라고!"
어쨰 계시보다 더 흐리멍덩한 것 같습니다만, 아무튼 청년은 '이쯤 되면 운명!' 이라고 외치며 애마 미스틱의 등에 올라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었습니다.
내 님은 이제나 나올까 저제나 나올까. 두근두근하며 길을 가던 청년은, 그러나 이 글에 등장한지 한 페이지도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산등성이 지는 해를 바라보며 인정해야만 했습니다.
"하하하, 이거 꼼짝없이 길을 잃었는걸, 하하하하, 미안해 미스틱."
붉은 갈기의 준마가 한심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아니 좀더 정직하게 말하자면 매우 주인을 업신여기는 눈빛으로 노려보았습니다만, 긍정 파워로 가득한 우리의 청년은 개의치 않고 즐겁게 얘기합니다.
"숲에서의 야영이라니 완전 즐겁잖아! 부드러운 밤바람, 타오르는 모닥불, 나 심심하지 말라고 시시때때로 와 주는 유쾌한 불곰과 늑대!"
미스틱의 눈빛이 더 차가워집니다만, 청년은 그런 것 따위 알아채지 못한 채 야영 준비를 했습니다. 아니,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청년은 어둑해지던 숲의 한쪽 구석이 뭔지 알 수 없는 불빛 때문에 훤히 빛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고, 곧장 호기심을 느끼고 말았습니다.
"미스틱, 저 불빛 보이지? 가 보자! 어쩌면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르고, 잘만 하면 심심하지 않게 이야기나 하면서 즐거운 밤을 보낼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미스틱은 매우 회의적인 눈빛이었지만, 어쨌건 이 쓸쓸한 숲에서 음침하게 혼자 잠드는 것보다는 누군가 더 있는 것이 좋다는 데에는 동의하고 있었으므로 묵묵히 주인을 따라 걸음을 옮겼습니다.
잠시 후.
"오오! 저것 좀 봐!"
청년은 눈이 둥그래져서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았습니다. 대체적으로 시니컬한 성격을 지닌 미스틱도 이번만은 놀라서 둥그런 눈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덤불 속에 몸을 숨긴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만큼 인상적이었던 것입니다.
"라푼첼, 라푼첼, 날 올려주렴!"
이 공터 가장자리에 도착한 순간 이미 초로의 마법사는 높디 높은 탑 앞에 서서 그렇게 외치고 있었습니다. '이봐요, 라푼첼이 대체 무슨 뜻인가요?' 라고 물어볼 틈도 없이 그렇게 외치더니, 곧장 공중으로 두둥 떠올라 버린 것입니다. 와아아아아아우, 이건 정말 스펙터클한 일 아닙니까? 청년은 말 그대로 눈이 동그래져서 그 광경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약 10분쯤 후 마법사가 - 아마도 로브에 망토에 지팡이를 들었으니 마법사 맞을 겁니다 - 다시 두둥실 내려오는 걸 보고서야 뒤로 주저앉아 버렸던 것입니다.
"와우 미스틱, 방금 봤어?" 라고 외치면서요. 미스틱은 뒤를 뒤로 눕히고 히힝거렸습니다. 다른 이유에서가 아닙니다. 그간 이 주인과 함께 해 오면서 쌓아온 직감이 외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인간, 절대 똑같이 해 볼 거라고! 저 위에 뭐가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면서 말입니다!!!
"나도 날아올라가 보고 싶어!"
아오, 그럴 줄 알았어! 저 인간 그럴 줄 알았다고! 미스틱은 힘껏 불만을 표시하며 푸릉거렸지만 청년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서둘러 탑 앞으로 다가갑니다. 아참, 아까 설명이 늦은 것 같은데, 사실 숲에서 희미하게 비치고 있던 건 바로 이 탑에서 흘러나온 조명이었습니다. 어떤 입구도 계단도 없이 높이 올라가 있기만 한 기묘한 하얀 탑이었지요.
어쨌건 미스틱이 어떤 불만을 표했건 간에, 청년은 아까 마법사가 서 있던 자리에 섰습니다. 그리고 외쳤죠.
"라푼첼, 라푼첼, 날 올려주렴!"
허허허허, 이 인간이 왜 이래. 설마 한 번 일어났다고 다시 똑같은 일이 일어나겠어? 미스틱은 머리좋은 명마답게 시니컬하게 비웃었지만, 다음 순간 일어난 일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뒷걸음질 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바로 청년이 둥 하고 떠오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미스틱은 그제서야 달려들었지만 이미 한 발 늦었습니다. 둥둥 떠오른 청년은 그대로 탑 위로 올라가 버렸거든요. 미스틱은 공연히 발을 구르며 성질냈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도리없이 청년이 무사히 내려오기를 빌며 기다릴 수밖에 없이 된 것이지요.
청년의 가슴은 터질듯 두근거렸습니다. 저 탑 위에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 알 수 없는 힘에 들려 올라가면서도 청년의 마음 속에는 두려움보다도 호기심이 가득했습니다. 금은보화가 쌓여 있을까요? '라푼젤'이라는 건 대체 무엇일까요? 혹시 계시에 나와 있던 절세미녀의 이름이 바로 라푼첼인 것일까요? 아니면 어떤 마법의 보물인 걸까요? 마침내 창문 안으로 들어가 나무 마룻바닥에 발을 디딘 순간, 청년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탄성을 내질렀습니다. "세상에나!" 눈앞의 광경은 그만큼이나 놀라웠답니다.
금은보화는 없었습니다. 기이한 마법 장치 같은 것도 없었습니다. 호두나무로 만들어진 매끄러운 마룻바닥 위에는 꽤 고급스런 카펫이 깔려 있었고, 그 위엔 푹신푹신해 보이는 커다란 침대와 그에 대비되든 너무나 소박해 보이는 테이블과 의자 두 개가 있었습니다. 청년을 놀라게 한 것은 그러나, 전반적으로 어딘가 언밸런스해 보이는 - 대체 핑크/자주색 비단이불에 감싸인 호화로운 마호가니 침대와 참나무로 된 투박한 테이블과 의자라니 이게 뭡니까. - 실내도, 그리고 그 언밸런스의 정점을 달리는, 온 방을 둘러싸고도 부족해 천장까지 닿을 만큼 높은 서가들도, 그리고 거기 빽빽하게 꽂혀 있는 무시무시한 양의 책들도 아니었습니다. 청년의 새파란 눈동자는 그 방 한가운데 서서 이 쪽을 바라보는 또다른 남자에게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어쩐지 쇼우놈 치고는 질량감이 다르다고 생각했지. 넌 뭐냐?"
일단은 청년인 듯 했지만 기묘하게 노안인지라 도무지 나이를 제대로 가늠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쨌건 잘 짜인 얼굴은 꽤 핸섬했고, 저 말만 내뱉고 꾹 다문 입과 날카로운 눈매는 어딘가 고양이과의 대형 야수나 맹금류를 연상테 했습니다. 단정하게 정리된 머리는 반듯한 이마를 잘 보여주고 있었고, 그 밑에서 빛나고 있는 청회색 눈동자, 견고하고 우아한 목선, 섬세한 어깨, 어째서인가 상반신이 누드인 까닭에 제대로 감상할 수 있던 잘 짜인 흉근과 단단해 보이는 복근,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잘록한 허리'를 본 순간 청년의 눈동자에는 불꽃이 튀었습니다.
즉각 부드러운 망토를 세련된 몸짓으로 한쪽으로 치우고 품위있는 자세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청년은 맑은 목소리에 자신이 담을 수 있는 가장 깊은 성의를 담아 말했습니다.
"이름 모를 미인이여, 이 몸은 찰스 프란시스 자비에라 합니다."
"......뭐?"
남자의 응대에 담긴 것은 황당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지만 청년, 아니 찰스는 굴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상냥한 미소를 띠고 사파이어빛 꿀처럼 달콤하고도 영롱한 시선을 던지며 정말 놀랍도록 청명하고 고운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세상의 어느 레이디라 해도 거절할 수 없을 듯한 정중하고도 열렬한 구애였지요.
"나 찰스 프란시스 자비에는 그대, 백색 탑의 미인에게 청합니다. 부디 그 귀한 이름을 가르쳐 주시지 않겠습니까?"
"이봐, 일단 내 이름은 에릭이긴 한데..."
"오, 에릭." 찰스가 풍부한 감정을 담아 그 이름을 말하는 순간, 미인, 그러니까 에릭은 그간 쇼우밖에 불러주는 사람이 없던 무미건조한 자신의 이름이 황금으로 만들어진 보석 명판에 아로새겨지기라도 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한다면 그래서 그 뒤 찰스가 줄줄 늘어놓는 말들을 전혀 막지 못했습니다.
"에릭, 내 가인佳人의 이름은 그 자태처럼 강인하고도 섬세하군요. 난 바로 그대를 만나기 위해, 그리고 그 고아한 이름을 듣기 위해 일곱 개의 산과 두 개의 바다를 넘어왔다오. 그대는 바로 내게 주어진 계시 속의 사람입니다. 별이 정하고 신이 내려주신 축복이지요."
"......뭐?!"
"그대를 보는 순간 깨달았습니다. 당신의 아름다운 눈동자, 우아한 몸가짐, 그 모든 것이 바로 나를 위해 준비된 이라는 걸요."
"저기 잠깐, 지금 뭔가 오해가..."
청년이 무릎을 펴며 몸을 일으킵니다. 눈앞에 선 귀공자가 보기만큼 만만한 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슬슬 경계하기 시작한 에릭에게, 찰스는 더더욱 달디단 목소리로 얘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니오, 에릭. 그대를 보는 순간 알 수 있었어요. 당신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너..."
"찰스입니다. 찰스 프란시스 자비에."
"너말야.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난 여기서 절대 나갈 수 없어."
"그럴 리가 있나요. 당신은 여기서 나갈 수 있어요."
에릭이 눈살을 찌푸립니다. 순간 뭔가 울컥한 듯 이를 악물고 잠시 침묵하던 그는, 고개를 돌리고 한껏 감정을 억제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습니다.
"안돼, 넌 여기 뭐가 걸려있는 지 몰라."
갑자기 침묵이 흘렀습니다. 아무 반응이 없는 것에 의아함을 느낀 에릭이 시선을 돌리자 여진히 달콤하고 상냥하지만 어딘가 머리속을 깊이 들여다 보는 듯한 푸른 눈동자가 눈에 들어옵니다.
"이봐?"
"부모님이군요. 그대를 이 곳에 묶어두기 위해 마법사가 협박을 하고 있고요."
"...!"
"방금 전에도 그는 당신에게 찾아와서 빨리 합방 날짜를 잡자고 고집을 부렸고, 당신은 그러느니 죽겠다고 뻗댔네요. 그 마법사가 당신을 억지로 건드리지 않은 이유는 저도 잘 모르겠지만, 괴이한 인물인 것만은 틀림없군요."
경악한 에릭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찰스는 말을 이었습니다.
"아무 걱정하지 말아요. 당신 부모님은 구출될 겁니다. 제가 꼭 그렇게 되도록 할 거예요."
"너...너 대체 어떻게."
"자세한 건 나중에 말해줄게요. 이 곳에서 나갈 수 있도록 해 줄 테니 아무 걱정 하지 말아요 내 사랑. 이 곳은... 이 곳은 품위가 좀 부족해요. 당신은 웨스트 체스터의 훌륭한 안주인이 될 겁니다."
에릭이 눈을 크게 떴습니다. 그간 쇼우의 '보살핌'을 받으며 그저 이 탑 안에서 사는 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삶이라고만 생각해 왔습니다. 이 왕국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숲이 마법사 쇼우의 영지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랬기에 이 탑까지 찾아온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지요. 이 곳에 와서 탑을 본 이가 혹시 있었다 해도 '마법사의 탑은 건드리는게 아냐' 라고 생각하며 모두 도망가 버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마법처럼 찰스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쪽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해준 것이지요. '넌 여기서 나갈 수 있어. 나와 함께 나가자.' 라고요.
다만...
"안주인?" 에릭이 미간을 찌푸렸습니다만, 찰스는 별일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습니다. "자자, 사소한 건 넘어가지요. 아무튼 날 믿고 기다려 봐요. 장인 장모님을 무사히 확보하면 다시 돌아와서 여기 그대에게 얘기해 줄게요."
과연 이게 사소한 것인가, 정말로 무시해도 되는 것인가에 대해 심각한 불안감과 의혹이 느껴졌습니다만, 어쨌건 에릭은 이 기이한 청년의 말을 믿어보기로 했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에릭은 곧장 입을 열었죠.
"그래서, 내가 지불할 대가는 뭐지?"
순간 찰스가 눈을 깜박였습니다. "예?"
"대가 말야. 부모님을 구해준다고 했고 내가 여기서 나가게 해 준다며. 그에 대해 네가 내게 원하는 게 있을 텐데."
어리둥절해 하던 청년의 푸르른 눈동자에 더없이 따뜻한 눈빛이 차 올랐습니다.
"내가 바라는 건 한 가지 뿐이에요."
"한 가지?"
청년이 다가왔습니다. 에릭의 어깨를 붙들고, 그 손을 잡아 손등에 보드라운 입술을 꾹 누릅니다. 그리고 놀란 눈으로 찰스를 바라보는 에릭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다정하게, 따뜻하게, 에릭이 일생 제대로 느껴보지 못했던 모든 대가 없는 상냥함을 담아.
"행복해져야죠. 내 사랑하는 이가 행복하지 못하다는 건 제게 지옥같은 일이 될 테니까요."
"그러니까, '안주인'이 되라 이건가?"
"그러면야 좋지만 꼭 그럴 필요도 없어요. 행복하면 돼요."
멍한 얼굴이 된 에릭에게 윙크를 남기고, 찰스는 닫혀있는 들창 앞으로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들창을 활짝 열고 아래를 내려다 본 다음 에릭을 돌아보았습니다.
"어...근데 에릭, 저 좀 내려주지 않겠어요? 어...어라, 에릭?!"
에릭의 푸른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습니다. 우리 에릭은 정말 속눈썹이 길구나, 이쁘기도 하지, 하고 찰스가 생각하는 순간 그 눈물이 뺨으로 흘러내립니다. 그 상태로 에릭이 천천히 손을 내밀자 찰스의 몸이 두둥실 떠올랐습니다. 사랑한다고 외치고 싶었지만 혹시라도 에릭이 집중력을 잃으면 큰일납니다. 입을 꾹 다물고 내려가는 찰스의 앞에서 에릭은 처음으로 환히 웃었습니다. 그리고 찰스는 생각했지요. 아, 내 사랑은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상어구나.
찰스가 떠난 후, 에릭은 방을 돌아보았습니다. 일생동안 이 곳에서 지내왔지요. 어린 시절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쇼우 아빠랑 결혼할 거야" 같은, 지금 생각하면 어린 자신의 입을 꿰매버리고 싶은 발언도 유감없이 하기도 했습니다. 그야 어린 에릭에게 있어 쇼우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가져다 주는 하느님 비슷한 것이었으니 말이죠.
하지만 언젠가부터 '뭔가 이건 아니다' 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린 에릭이 음식 투정을 하면 요리사가 울며불며 어디론가 끌려갔고, 새 옷이 튿어지기라도 하면 하녀가 영영 사라졌지요. 그래도 혹시 모릅니다. 만일 에릭이 정말로 '아무것도' 몰랐다면 그냥 그게 당연한 건 줄 알고 살았을 겁니다.
하지만 에릭은 알게 되고 말았습니다. '나의 에릭에게 꼭 필요한 교양을 갖추기 위해' 쇼우가 고용했던 가정교사로부터 그 깨달음이 시작되었지요. 그 가정교사는 곧 불온 딱지를 달고 나라 밖으로 추방되어 버렸습니다만, 그 때부터 지식욕에 눈뜬 에릭은 세상의 모습에 대해 알고 싶어진 나머지 엄청난 양의 책들을 사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에릭이 무슨 돈이 있었냐고요? 당연히 쇼우가 허락해 준 거죠. 그는 에릭이 제출한 도서 리스트를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고는 아자젤과 립타이드에게 던져주기만 했답니다. 그리고 그 뒤로도 에릭은 아자젤과 립타이드가 가져오는 "이달의 신간 리스트" 에서 또 많은 양의 책을 사들였고요.
그 결과, 너무나 당연하게도 에릭은 자유를 갈망하게 되었습니다. 쇼우가 사실은 강바닥을 뒤엎은 국왕 폐하를 뒤에서 조종한 인물이라는 건 원래 쇼우의 자랑질 덕에 알고 있었습니다만, 그게 진정으로 어떤 의미인지는 책을 읽고 나서야 생각해 보게 되었지요. 그간 '쇼우 아버지'의 위업이자 선행으로 생각하고 있던 것이 대체 무엇인지, 주위의 사람들이 하나 둘씩 사라지는 것이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확실히 알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깨달은 것은, '난 널 정말로 아낀단다.' 라고 아무리 감언이설을 늘어놓는다 해도 쇼우는 절대 에릭에게 자유를 줄 생각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탈출했고, 다시 잡혀 들어갔고, 탑의 고용인은 다시 바뀌었습니다. 그러기를 수차례, 결국 쇼우는 마지막 카드를 꺼내들었고, '진짜 부모님의 안전' 앞에서 에릭은 끝내 무릎을 꿇고야 말았습니다. 대신 자신의 존재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다치는 것이 너무나도 지긋지긋했던 에릭은, 탈출을 시도하지 않는 대가로 이 탑에 더이상 어떤 고용인도 들이지 말아달라고 간청했고, 그래서 이렇게 혼자 있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성년이 된지 이미 몇년 지났지요. 쇼우의 구애는 갈수록 집요해지고 있었습니다. 에릭도 언젠가는 그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었고요. 단지, 마법사 쇼우는 에릭이 언젠가 스스로의 의지로 무릎을 꿇을 날을 고대하고 있는 것이었고, 에릭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쇼우가 진심으로 에릭을 억누른다면 절대 당해낼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지요. "강제는 너무 쉬워서 재미 없거든." 그 때 명민한 에릭은 깨달았습니다. 그간의 교육, 교묘한 억압, 심지어 이렇게 쇼우를 향해 타오르는 반감마저도 "취향의 미인이 제 발로 무릎꿇고 항복한다"는 쇼우의 로망에 따른 교묘한 육성 결과라는 걸 말입니다. 이가 갈렸지만, 그 덕에 어떻게든 거절은 할 수 있었으니 다행일 뿐이었지요.
물론 시시각각 위험이 조여들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무려 키스까지 당해버리는 바람에 이제 끝인가 생각하던 참이었는데, 전혀 생각도 못한 일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 찰스 프란시스 자비에
안주인이니 뭐니 괴상한 소리를 하긴 했습니다만, 아무튼 부모님을 구하고 자길 탈출시켜 주겠다니, 이 또한 쇼우의 계략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엄청난 얘기였지요. 하지만 대체 여기서 어떻게 더 최악이 되겠어요? 에릭은 이를 꽉 물고 침대 베개 쪽을 바라보았습니다. 더이상 쇼우를 막을 수 없다면 어떻게든 피를 보기 위해 단도를 숨겨두었거든요. 그게 그의 피가 되건, 에릭의 피가 되건 말입니다.
다음날.
에릭은 이를 악물었습니다. 원래 오늘은 쇼우가 오지 않는 날이었거든요. 그러니 찰스가 온다 해도 쇼우와 마주칠 위험은 없고, 찰스가 와서 무사히 준비가 끝났다고 하면 밖으로 달아나면 그만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뭔가 초조해 보이는데, 괜찮은 건가?"
이 빌어먹을 놈이 여길 왜 왔담. 에릭은 티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속으로만 이를 갈았습니다. 에릭이 그러거나 말거나 상냥한 미소를 띤 쇼우는 짐짓 다정하게 말을 늘어놓을 뿐이었습니다. 그것도 되도록 에릭에게 바짝 붙으려고 노력하며 말입니다.
"내가 오늘따라 네가 너무 보고 싶지 않겠니. 그래서 이렇게 달려왔다만."
책상 위에는 쇼우가 선물이라며 사 온 장정본이 다섯 권이나 놓여 있었습니다만, '대운하 사업의 밝은 미래'라던가, '공영사업과 함께 하는 건축 토목 경제학'이라던가, '진정한 복지 - 부자 감세가 길이다' 같은, 대체 어느 정신나간 놈이 썼는지 알고 싶지도 않은 책을 뿐이었습니다. 차가운 눈으로 그 책들을 일별하던 에릭은 어떻게든 이 녀석을 빨리 보내버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는 최대한 정중하게 대답했습니다.
"책 잘 받았습니다. 이제 가 주시죠."
"허허- 에릭, 너 정말 변했구나. 옛날에는 정말 귀여웠는데. '쇼우 아버지랑 결혼할 거여요!' 라고 귀엽게 외쳐주지 않았더냐."
굳이 상기하기싫은 먼 과거를 꺼내드는 모습에 에릭의 이마에 힘줄이 불끈 솟았습니다만, 쇼우는 절대 개의치 않고 에릭의 바로 앞으로 바짝 다가와 상냥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눈이 전혀 웃고 있질 않는 걸요.
"에릭, 넌 아직도 헛된 꿈에 젖어 있구나. 난 네가 네 처지를 제대로 이해하고 미래를 위해 옳은 선택을 하길 바라는 것 뿐이란다. 내가 널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는 네가 제일 잘 알지 않니?"
에릭은 몸을 긴장시켰습니다. 쇼우의 손이 바로 에릭의 어깨를 짚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마치 키스할 듯 입술을 바짝 가져다 댄 쇼우가, 에릭의 귀에 조용히 속삭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바깥 사내가 가져온 헛꿈이 그렇게나 달콤하더냐?"
에릭은 화들짝 놀라 쇼우를 바라보았습니다. 뭔가 이야기를 해야겠는데, 입이 떨어지질 않았습니다. 어깨를 붙든 쇼우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쇼우 쪽이 동작이 더 빨랐고, 육체적인 힘은 약해 마땅할 마법사 주제에 도무지 당할 수 없는 힘으로 에릭을 밀어붙여 침대에 쓰러트린 쇼우는 그 목덜미에 살짝 입술을 내린 다음 혐오감으로 부르르 몸을 떠는 에릭에게 말했습니다.
"날 이 정도로 밀어붙이다니 정말 대단하구나. 역시 내 손으로 키워낸 내 취향의 아이야."
"내 몸에서 손 떼!"
결국 견디지 못하고 이를 악문 채 말하고 말았습니다만, 쇼우는 절대 손을 떼지 않았습니다. 그러기는 커녕, 오히려 에릭의 몸을 더 억누르며 찬찬히 말했습니다.
"오늘 그 녀석이 오기로 했지?"
에릭의 몸이 얼음처럼 굳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에릭을 바라보며 상냥하게 웃는 쇼우의 머리 뒤 창에서, 맑은 목소리가 들린 것은 그 직후의 일입니다.
"라푼첼, 라푼첼, 날 올려주렴!"
오 맙소사, 찰스입니다. 에릭의 얼굴에서 썰물처럼 핏기가 빠져나갔고, 쇼우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습니다.
"자 에릭, 선택하거라. 저 청년을 무시하고 지금 날 받아들인다면 저 청년과 네 부모를 다 무사히 보내 주마."
"네놈..."
"난 언제나 네게 선택의 기회를 줘 왔지 않니. 안 그래?"
이가 바득 갈렸지만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건 에릭도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래도 이런 식으로 항복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베개 밑에 숨겨둔 단도에 생각이 미치고, 그것이라도 활용해 어떻게든 이 위기를 모면하고 찰스에게 위험을 알려볼까 생각한 찰라, 마치 에릭의 생각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빙글 웃으며 쇼우가 말했습니다.
"에릭, 말해두겠지만 바깥에는 아자젤과 립타이드가 숨어 있단다."
"...!"
"그리고 그 친구들에게는 내 작은 발명품을 들려 줬지. 그 친구들에게는 이 방의 상황이 들리고 있단다."
"뭐!"
경악한 에릭 앞에서 쇼우가 웃어 보입니다. 이 악마 같으니.
"저들의 우리의 혼인 증인이 되는 셈이지. 저 순진한 바보가 어리숙한 농부 부부 둘을 데리고 방심하고 있는 동안, 우리는 만반의 준비를 해 뒀다 이 얘기다. 내가 모를 것 같았니? 널 키워낸 내가?"
에릭은 눈을 감았습니다. 그 감은 눈 위에 쇼우의 입술이 내려앉습니다. 미소를 만면에 담은 쇼우가 저항을 멈춘 에릭의 입에 입맞춤하고, 마침내 다리를 벌리려는 순간,
"야. 거기 너 비켜."
곧이어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고, 에릭은 뜬 직후 지금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아 멍하니 눈앞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자, 누구라도 이 상황은 이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일단, 온 몸이 푸른색 비늘로 덮여 있는 "굉장한" 여자가 쇼우를 두들겨패고 있었습니다. 그게 얼마나 격렬한 기세였냐면, 일단 이단옆차기를 날린 다음 주문 외울 틈도 주지 않고 원투 스트레이트 후 어퍼컷으로 옥수수를 털고, 당황한 쇼우를 그 뒤로는... 아아, 차마 묘사할 수가 없습니다. 짧게 얘기하자면, 마치 지독한 시어머니에게 제삿상에 올릴 북어 보푸라기를 앞으로 3분 안에 만들라는 말도 안되는 지시를 받은 며느리마냥 맹렬한 기세로 (이건 시어머니다 이건 시어머니다 이건 시어머니다) 후들겨패는 그 여자 앞에서 쇼우는 이 나라 가장 위대한 마법사에서 털 뽑인 닭같은 몰골로 뒤바뀌어 가고 있었습니다.
아니 대체 이 여자는 누구일까요? '아이구, 아이구구 나죽네'를 외치는 쇼우 앞에서 퍽 퍽 소리가 온 천하에 울리도록 두들겨 패 피떡을 만든 여자는 그제서야 뒤를 돌아보며 외쳤습니다.
"오빠, 이제 됐지?"
"응, 와 정말 언제 봐도 굉장하구나 미스틱은! 역시 난투기 최강, 블루 드래곤이야!"
"시끄러, 남의 눈에 띄면 안된다고 평소에는 말 노릇이나 시키는 주제에!!!"
아 그랬군요, 그랬던 것이었군요. 그러니까, 이 여자는 찰스의 여동생인 것이고, 그러니까 블루...블루 드래곤이고? 그래서 아마도 날아올라 와서? 이렇게 후드려 팬 것이겠군요. 하지만 그렇다면 립타이드와 아자젤은요?! 경악한 채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바라보는 에릭을 뭔가 심사하는 듯한 눈으로 위 아래 죽죽 훑어본 푸른 비늘의 여자는 흥 하고 고개를 돌리며 말했습니다.
"헐, 그 할아범 정말 맞는 말을 했네? 미인이잖아?"
"그렇지! 그래서 내 사랑을 위해 나는 말이지..."
"시끄러, 찰스 프란시스 자비에. 드래곤 로드 주제에 인간들의 너저분한 계시나 믿고 쏘다니고 말이지이."
그제서야 제정신이 든 에릭은 시선을 돌렸습니다. 아 맙소사, 거기 창 밖에 찰스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찰스이리라 짐작되는 것"이 있었습니다. 한없이 푸른 눈과 맑은 목소리는 찰스의 것이었습니다만,
"내 소개가 늦어서 미안해요, 하얀 탑의 그대. 하지만 그 때 눈앞에서 변하면 당신이 너무 놀랄 것 같아서."
창 바로 밖에 보이는 것은 거대한 크리스탈 드래곤의 머리와 눈이었습니다. 온 몸이 너무 거대한 까닭에 머리만 주욱 빼서 창 안에 들이밀고 있습니다. 수정처럼 반짝이는 비늘 사이의 온화한 푸른 눈이 실내를 둘러보았고, 피떡이 된 쇼우를 흘끗 바라본 뒤 다시 에릭을 향합니다.
"어때요, 이런 나도 괜찮나요?"
괜찮고 말고 할게 뭐 있겠어요.
1. 전설의 드래곤 로드가
2. 부모님을 한큐에 구하고
3. 쇼우를 피떡으로 만든 뒤
4. 프로포즈를 하고 있는데 말이죠.
에릭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어요. 탑 안 방은 이제껏 그런 적이 없으리만큼 환했는데, 그건 창을 통해 들어온 바깥의 눈부신 햇살을 크리스탈 드래곤의 아름다운 비늘이 반사하고 있기 때문이었지요. 그 빛에 감싸여, 에릭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어요. 눈에서는 어느새 눈물이 흘러나왔습니다만, 어쩌겠어요. 이럴때 안 울 수는 없잖아요? 몸을 일으켜 드래곤 앞으로 다가갔지요. 그리고 그 반짝이는 비늘에 입맞춤을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탑 안의 방을 불러본 후 찰스에게 찬찬히 얘기했어요.
"날 정말로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싶은 거지?"
"물론이죠!"
"그렇다면 일단 함께 얘기를 하자. 너와 나는 정말 할 일이 많거든."
머나먼 훗날, 사람들은 눈부시게 빛나는 드래곤 로드와 쇠를 자유 자재로 다루었던 위대한 군주의 전설을 이야기했습니다. 옛날, 아주 먼 옛날, 강바닥이 뒤집히고 산천이 망가지던 혼돈과 불황의 나날 속에 갑작스레 나타나 사악한 마법사를 물리치고 나라를 도탄에서 구한 인자한 드래곤과 결단력 넘치는 마법 군주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 둘은 나라를 구하고 잠시 안정시킨 후 새로운 왕을 세우고 아주 머나먼 나라로 날아가 버렸다고 합니다. 드래곤들만이 사는 나라, 혹은 모든 것이 영원히 사는 나라로 말입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 중, 이 위대한 전설이 바로 싱그러운 상추 한 다발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는 것을 제대로 알고 있는 이는 없습니다.
그건 오로지, 영생을 누리는 드래곤들만이 아는 비밀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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